객관적인 사실만을 기록하는 역사가들은 때로는 그 일이 손쉬울 때가 있다. 일례로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지속된 한반도 내의 전쟁으로서 전사 175,801명, 부상 554,202명, 피란민 2,611,328명이 발생한 민족의 비극이었다’로 요약하면 된다. 그 안에 피란민들이 치렀던 고난의 행군 기록은 들어갈 자리도 없거니와, 낱개로 살펴보는 일은 군더더기가 된다. 주관이 배제되어야 하므로.
마치 아픈 자식을 둔 부모가 자식의 입장에서 일기를 써나갈 때 그 아픔의 심도와 진폭 앞에서 마냥 하늘을 바라보던 일 따위가 잊히게 되는 것과도 흡사하다. 그렇게 해서 개별적인 슬픔과 고통은 그냥 묻힌다. 하지만 묻힌다 해서 실물 자체가, 진실의 현물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객관성을 유지해야 하는 르포 기사 앞에서 기자들이 망연해하거나 무력해지는 건 그런 때다. 파주의 오랜 응어리이면서도 요즘의 파주 사람들까지도 그 실물을 외면해 오는 사이에 그 진실이 잊히고 있는 용주골 사연 또한 그런 예다.
용주골은 6.25가 남긴 부끄러운 상흔 중의 하나다. 유엔군의 일원으로 미군이 대거 참여하게 되고 종전 후에도 미군 기지가 유지되면서 생겨난 이른바 ‘기지촌’이다. 수많은 미군이 찾았고, 어떤 미군 부대장은 이곳을 찾기 위해 헬기까지 타고 왔다가 그 사실이 알려져 좌천/강등됐던 비화도 있다. 서울의 집창촌 단속의 풍선 효과로 인해 수도권 최대 규모의 집창촌이라는 불명예를 기록하던 시절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