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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역사 2cm] '3·1운동 격발' 독립선언문, 이완용 별장서 낭독됐다

송고시간2017-02-27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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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황대일 기자 =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정각 서울 종로구 인사동 태화관.

근대식 식당 건물에서 갑자기 '대한 독립만세' 함성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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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국권 침탈을 거부하는 한반도의 몸부림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만세삼창에 앞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됐다.

독립기념관에 전시된 민족대표 독립선언도.

독립기념관에 전시된 민족대표 독립선언도.

선언서는 손병희, 한용운 등 민족대표 33명이 독립 의지와 당위성을 만방에 알리려고 만들었다.

태화관에서 독립을 선언한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특급 매국노 이완용이 별장으로 쓰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태화관은 24대 왕인 헌종의 후궁 사당으로 쓰이다 이완용에게 넘어갔다.

1907년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에 분노한 군중의 방화로 집을 잃은 이완용에게 일제가 선물한 것이다.

이완용은 사당을 개조해 별장으로 꾸몄다. 을사오적을 비롯한 친일파가 주로 이용했다.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도 자주 드나들며 나라를 빼앗을 궁리를 했다.

1939년 신축한 태화관 당시 전경(독립기념관 제공)

1939년 신축한 태화관 당시 전경(독립기념관 제공)

태화관이 매국 근거지로 불린 이유다.

1910년 강제합병을 전후해 태화관에는 변고가 잇따랐다.

맑은 대낮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심지어 벼락까지 떨어져 아름드리 정원 고목이 부러졌다.

집안 항아리 6개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깨졌다.

이런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자 매국노에게 천벌이 내려졌다는 소문이 장안에 파다했다.

이완용조차 불길한 조짐을 느끼던 상황에서 별장은 1918년 음식점으로 탈바꿈한다.

우리나라 최초 근대 요릿집인 명월관 분원이 됐다.

광화문 사거리에 있던 명월관이 소실되자 태화관을 영업장소로 활용한 것이다.

명월관은 대한제국 황실 주방장 출신의 안순환이 1903년 세웠다.

회색빛 2층 양옥에 들어선 궁중요리 전문점이었다.

명월관 덕분에 일반인도 궁궐 음식을 맛볼 수 있게 됐다.

노래와 춤으로 흥을 돋우는 궁궐 기생과 나인이 나중에 합류하면서 요정으로 운영됐다.

친일파들은 나라를 팔아먹은 돈으로 여기서 방탕하게 놀았다. 이완용, 송병준, 이지용 등 핵심 친일파가 단골이었다.

손병희 천도교 교주도 가끔 이용했다.

독립선언서 낭독 장소가 된 것은 이런 인연 때문이었다.

민족대표들은 탑골공원에서 독립을 선언할 계획이었으나 하루 전날 장소를 바꿨다. 비폭력 원칙을 훼손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경술국치 이후 감시가 엄격해진 일제의 눈을 피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경찰은 3명 이상만 모이면 단속했으나 식당에는 비교적 관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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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관은 3월 1일 다른 손님은 일절 받지 않은 채 33인분 음식만 준비했다.

손 교주가 주도하는 종교계 지도자 모임으로 생각해 특별히 배려했기 때문이다.

거사일에는 태화관에 29명만 모였다. 기독교계 대표 4명은 불참했다.

민족대표들은 만세삼창 후 곧바로 경찰에 자수했다. 평화투쟁의 일환이었다.

항일운동 방식이 온건했는데도 대가는 혹독했다.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김병조와 무죄판결을 받은 길선주, 구금 중 숨진 양한묵을 제외한 26명은 감옥에서 온갖 고초를 겪었다. 이들은 1년 6개월~3년간 투옥됐고, 손병희 선생은 옥사했다.

만세삼창 이후 태화관 영업은 한동안 중단됐다. 일제가 독립선언서 낭독을 문제 삼았기 때문이다.

태화관은 1921년 미국 선교사들에게 팔려 감리교 포교 공간으로 활용됐다.

매각 당시 태화관에서 진풍경이 벌어졌다.

명월관 기생들이 노래를 부르며 퇴거를 거부했고, 감리교인들은 찬송가로 맞대응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찬반 세력이 주말마다 서울 도심에서 맞서는 광경과 비슷했다.

우여곡절 끝에 태화관은 감리교 여성 복지기관으로 변했다. 1940년에는 일제가 외국인 선교사를 추방하고 건물을 몰수해 종로경찰서 청사로 사용했다.

1979년에는 도심재개발로 철거되고 태화빌딩이 들어섰다.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주인공은 학생 대표 정재용(1886~1976)이었다.

민족대표들이 경찰에 연행된 탓에 약속 시각 이후에도 나타나지 않자 정재용은 팔각정 단상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를 신호탄 삼아 학생과 민중 시위는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항일시위는 한 달가량 이어졌다. 독립 열기가 단기간에 확산한 데는 고종 황제가 독살됐다는 소문도 한몫했다.

3·1 운동을 계기로 일제의 통치방식은 바뀌었다. 무단통치만으로 한계가 있다고 보고 기만적 문화통치를 도입한 것이다.

had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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