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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욱과 임수정이 싱글로 살아가는 법

2023.11.28

by 류가영

    이동욱과 임수정이 싱글로 살아가는 법

    이동욱과 임수정, 이어서 부르면 낯선 세계의 사랑이 이 세계로 찾아와 입술을 건드리는 듯하다. 어쩌면 꿈같이, 영화 <싱글 인 서울>에 나란히 등장하는 그 이름.

    어디선가 본 듯 익숙한 만남. 닮은 듯 다른 이동욱과 임수정이 같은 곳을 바라본다. 장난스럽지만 편안하게. 이동욱이 입은 체크 재킷과 팬츠는 에곤랩(Egonlab at 10 Corso Como), 니트 톱과 터틀넥 톱은 지방시(Givenchy). 임수정이 입은 체크 니트 카디건과 슬립 드레스는 랄프 로렌(Ralph Lauren), 이어링은 불가리(Bulgari).
    이동욱이 입은 시스루 카디건과 이너 톱은 미우미우(Miu Miu), 화이트 터틀넥 톱은 아미(AMI), 데님 팬츠는 발렌티노(Valentino). 임수정이 입은 메탈릭 드레스는 프라다(Prada), 이어링은 콜로프(Korloff).
    N서울타워 오브제를 손에 쥔 이동욱이 “이거 누구 아이디어예요?” 하며 웃는다. 그런 이동욱에 대해 임수정이 다음과 같은 단서를 건넸다. “동욱 씨는 말은 싫다고 하면서 결국 다 해줘요. 그냥 하는 것도 아니고, 잘해줘요.” 브이넥 스웨터와 터틀넥 톱은 제냐(Zegna).

    음표들의 산책, 이동욱

    “등받이 있는 의자에 앉으세요.” 이동욱이 말했다. 스튜디오 창문으로 들어온 오후 2시 햇살이 스프링클러에서 쏟아지는 물처럼 시원했다. 이동욱을 보고 이동욱을 예찬하지 않는 것은 어렵다. 외모든 성품이든. 그는 칭찬을 웃어넘기는 편이다. “낯간지럽죠.”

    촬영 스튜디오의 스태프가 등받이가 커다란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미리 주신 질문지를 읽고, ‘이게 무슨 말이지?’ 생각하다가 손발이 오그라들었어요.” 이동욱이 양손을 들어 손가락 끝을 모았다. 이동욱은 그가 바라보는 사람을 특별하게 만드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이 그에게서 로맨틱한 무드를 읽는다. 그것이 잘 조직된 연기에 의한 것일까? 그와 눈을 마주 보고 있으면 이동욱의 재능은 저 눈이구나, 라고 국어책의 선명한 글을 읽듯 이해하게 된다. 눈의 서사는 시간의 축적인데, 그는 어떤 감정으로 삶을 채워왔을까? 하지만 그가 너무 겸연쩍어하니 낯간지러운 수사는 여기에서 멈추겠다.

    이동욱은 연말에 찾아온 영화 <싱글 인 서울>에서 싱글을 고집하는 파워 인플루언서 영호 역을 맡았다. 그는 싱글 라이프에 대한 책을 쓰라는 제의를 받는다. “영호는 벽을 쌓고 관계를 끊는 인물이에요. 공감은 되지만, 저랑은 다르죠. 저는 누군가 다가오면 지켜보는 편이에요. 혼자 지내는 시간이 좋지만, 사람들이랑 같이 있는 게 훨씬 즐거워요.” 그가 마른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리며 화제를 바꿨다. “MBTI를 저는 안 믿거든요. 인간의 심연은 우주 같은데 알파벳 몇 개로 판단하는 게 좀.” 하지만 MBTI는 인간의 심연이 우주 같아서 생긴 것이다. 인간을 이해하는 쉬운 기준이 필요해서. 물론 이동욱에겐 알파벳 네 개가 결코 ‘이해’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생각하는 찰나, 그의 로맨틱한 무드가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인간을 너무 쉽게 이해하면 안될 것 같아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영호가 책을 쓰다가 내레이션으로 본인이 쓴 글을 읽는 장면이 있어요. 싱글 예찬을 아주 비장하게 하는데, 이렇게 말하면 좀 그럴 수도 있는데, 개똥 같은 논리거든요. 지금 혼자 살지 않는 자 모두 유죄! 이래요.” 뭐, 유죄씩이나? 웃음이 나왔다. 이런 부풀려진 언어들이 <싱글 인 서울>이 관객에게 웃음을 주는 지점일 것이다. 그런데 이동욱은 과장을 싫어하지 않나? “맞아요! 감독님이 시나리오에 왜 그 부분을 쓰셨는지 모르겠는데 영호가 힙합 스타일 옷을 입고 커다란 주얼리를 주렁주렁 걸치고…” <쇼미더머니> 래퍼처럼요? 말을 끊고 묻자, 더 빠른 속도로 그가 곧바로 뒤를 잇는다. “네! 스냅백을 쓰고, 거울을 보며 되게 만족해하는 장면이 있어요. 잠깐 나오는 신인데요, 저는 살면서 단 한 번도 그렇게 입어본 적 없거든요.” 우스꽝스러웠을 것 같다. 하지만 속으로만 생각하고, 와, 멋있었을 것 같은데요, 라고 말했다. “아, 네, 현장에 계신 분들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까 그런가, 여기긴 했는데,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그러니까 영호 말고, 이동욱의 모습이 너무 부끄러운 거예요.” 이동욱이 심박수 높아진 러너처럼 호흡을 내쉬었다. 그에겐 민망한 장면이겠지만 관객은 즐거워할 것이다. 이동욱의 그런 모습은 보지 못했을 테니까. 그가 허탈하게 웃으며, 아냐, 그건 아니었어, 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옆에 앉아 있던 영화 홍보 관계자가 담요처럼 온화한 어투로 말했다. “편집됐어요.” 이동욱이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편집됐어요? 아, 그래. 잘됐다. 잘됐어. 그렇다니까, 안 어울린다니까.” 영화에 안 어울린다는 건지, 본인에게 안 어울린다는 건지 묻지 않았다. “다른 부분은 굉장히 현실적이에요.” 인터뷰 마치고 임수정 배우에게 들은 얘기는 이렇다. “동욱 씨는 말은 싫다고 하면서 결국 다 해줘요. 그냥 하는 것도 아니고, 잘해줘요.”

    이동욱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면 ‘신조어를 잘 모르는 편’이라고 나온다. <싱글 인 서울>보도 자료에는 이동욱을 ‘설렘을 부르는 플러팅 장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가 ‘플러팅’이라는 단어를 알까? “안 지 얼마 안 됐어요. 우리 어릴 때는 작업 건다, 이런 표현 썼잖아요. 꼬신다? 맞아, 이런 단어 썼죠. 그런데 제작 보고회에서 저한테 플러팅 기술이 뭐냐? 물어보시는 거예요. 없죠. 없어요.” 그날 현장에서 임수정은 “이동욱 자체가 플러팅”이라고 말했다. 일리 있다.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에선 살인마 역할을 맡았는데도 피해자 임시완과 브로맨스 느낌이 날 정도였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재미가 없어져요. 개그나 리액션은 타이밍이잖아요. 그 타이밍을 제가 놓쳐요.” 내가 말했다. 이동욱도 사람이네요. 그가 따라 발음했다. “사람입니다.”

    특별한 장면이 있다. 이동욱과 임수정은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에서 잠깐 마주쳤다. 이동욱은 임수정의 과거 연인으로 한 신 등장한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이동욱이 빛과 함께 나왔다. 앞에 임수정이 서 있다. “조명 덕분이죠. 제가 봐도 눈부시긴 했어요. 저는 카메오고, 딱 그 장면만 나오니까 전략적으로 그렇게 해주신 게 아닌가 싶어요.” 하지만 빛과 빛 사이, 상대 배우와 이동욱 사이, 그것이 감정의 영역이든, 서사든, 이동욱은 그 ‘심연’을 메우는 배우다. 그의 우아함은 공간을 차분히 가라앉힌다는 것이고, 그것은 연기 외의 이동욱을 구성하는 성질, 한 인간을 사랑하게 하는 ‘플러팅’이다.

    “이번 작품을 하면서 임수정이 왜 좋은 배우인지 알게 됐어요. 저는 급한 편이거든요. 그러니까, 그거는 그거잖아, 라고 공식처럼, 확정적으로 표현할 때가 많은 거죠. 임수정 배우는 한 번 멈춰요. 더 생각하면서 덜어낼 것과 담을 것을 정해요. 덕분에 저도 제가 표현하는 감정을 돌아볼 수 있었어요. 그게 굉장히 큰 도움이 됐어요.”

    그가 발음하는 단어들이 한 글자 한 글자 동그랗고 부드럽게 들렸다. 그의 언어는 누군가에게 존중을 표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고, 나는 그 마음이 진심 같았다. 하지만 한 인간의 성정을 판단하는 것이 이 글의 논점은 아니다.

    헤링본 재킷은 위니 뉴욕(Winnie New York at Mue), 데님 팬츠는 리던(Re/Done at Beaker), 앵클 부츠는 돌체앤가바나(Dolce&Gabbana).

    집에서 쉬는 날 이동욱의 루틴은 운동하고 TV 보기. 여러 인터뷰에서 얘기했다. “맞아요, 그게 다예요.” 그가 최근 본 영화 제목이 떠오르지 않아서 스마트폰을 꺼내는 사이, 내가 만화 <H2>를 열 번 넘게 보았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H2>를 그린 만화가 아다치 미츠루의 작품을 좋아한다. “히로의 엄마가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그다음 컷에서는 하루카 엄마의 영정 사진이 나오잖아요.” 나는 그 장면이 기억나지 않았다. 내 기억과 다른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그에겐 내용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그러니까 포인트는 이거예요. 만화의 전개 방식이 콘티와 비슷해요. 컷 배치! 그 장면은 정말 훌륭한 콘티고, 훌륭한 컷 배치예요. 어릴 때는 죽음 자체가 충격이었고, 커서 다시 보았을 때는 이런 배치 때문에 이 작가를 좋아했나 봐요.” 그가 몇 장면을 더 말했다. 열 번 넘게 본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세세한 것들을. 다른 만화가의 작품과 한국의 유명 만화가에 대해서도. 그는 어른이 되고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된 후엔 어릴 때 좋아하던 만화책을 전부 샀고 그중 어떤 것들은 박스도 뜯지 않은 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좋아하는 것의 이유를 발견하고, 그 이유를 다시 좋아하는 사람. 그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라고 적고 싶은데, 역시 낯 뜨겁다고 할 것 같아서 지웠다가, 다시 적었다.

    아이패드에 띄워놓은 질문지가 거의 아래까지 내려갔다. 이동욱은 웃는 얼굴로 다음 질문을 기다렸다. 부담도 없고, 경계도 없는 표정. 그래서 다소 조심스럽게 느껴지는 것을 물었다. 배우로서의 미래를 생각하며 행보를 정하는지, 아니면 시간이 갈수록 홀가분해지는지. 그가 햇살을 눈덩이처럼 모아서 내 얼굴에 던졌다. 거짓말이다.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다. 하지만 느낄 순 있다. 그는 그런 느낌으로 말했다. “저는 후자예요. 데뷔한 지 대략 25년 된 것 같은데 이제 와서 뭘. 하고 싶은 거 하고 찾아줄 때 하고 싶어요. 작품이 여러 개 들어온다면 제일 마음에 드는 걸 골라서 하고 싶고요. 너무 신중하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아요.”

    유재석이 진행하는 유튜브 ‘핑계고’에 나와 이동욱은 스스로를 “안녕하세요, 유튜버 겸 배우 이동욱입니다”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 “맞아요. 배우가 뒤로 갔죠. 그런데 그 말을 다른 사람이 저에게 할 때는 부담스럽더라고요. 네, 뭐, 유튜버 활동을 통해” 이동욱이 말을 못 잇고 웃었다. “제가 제 입으로 유튜버 활동이라고 하는 게 재밌어가지고요. 유튜브 활동을 통해 저를 모르던 어린 팬들도 생기고 외연 확장에 확실히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가 다시 좋은 점을 찾았다. 좋은 점이 없어도 좋을 텐데.

    인터뷰 초반에 이동욱이 손발이 오그라든다고 했던 질문은 “이동욱이 누군가를 바라보는 연기를 할 때 눈에서 음표들이 돌아다니는 것 같아요. 어떤 배경음악이 흘러나오면 좋을까요?”였다. 그는 며칠 전 백예린의 ‘산책’을 들었는데, 질문을 읽고 그 노래를 떠올렸다고 한다. 언젠가 그 노래와 함께 이동욱의 음표들이 쏟아지는 장면을 보게 될 것 같다.

    이동욱이 입은 재킷과 새틴 블라우스는 아크네 스튜디오(Acne Studios), 팬츠는 지방시(Givenchy). 임수정이 입은 레더 블루종과 시폰 블라우스, 핀스트라이프 스커트, 벨트는 생 로랑 바이 안토니 바카렐로(Saint Laurent by Anthony Vaccarello), 이어링은 그라프(Graff).
    깃털 장식 니트 톱과 라인스톤 미니스커트는 발렌티노(Valentino), 스트랩 힐은 지안비토 로시(Gianvito Rossi), 이어링과 링은 그라프(Graff).

    혼자 읽는 시그널, 임수정

    어깨에 숄처럼 패브릭을 두른 임수정이 테이블에 앉았다. 여려서 사라질 것 같은 그녀가 한 단어 한 단어 정확하게 발음하며 인사할 땐 눈앞의 아스라함 대신 선명한 탑 하나가 놓여 있는 것 같았다. 한편 여배우의 외모에 대해 적는 것은 결례지만, 임수정 앞에서 그런 칭찬을 건네지 않는 것은 역시 매우 어렵고, 더 어려운 일이다.

    “한 번쯤은 인생 연기라고 할 만한 걸 하고 싶어요.” 임수정이 인터뷰 중에 말했을 때 내 머릿속엔 <장화, 홍련>과 <김종욱 찾기>와 <내 아내의 모든 것> 그리고 최근 개봉한, 비록 관객의 충분한 지지를 받진 못했지만 <거미집>이 떠올랐다. 올해 개봉 20주년을 맞은 <장화, 홍련>은 그중 압권이고, 한국 영화사에서도 존재감이 뚜렷하다. “맞아요. 언젠가 저에게 회고전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영화를 가장 앞에 둘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그 사이 많이 성장했어요.”

    인터뷰는 스튜디오 한쪽의 메이크업 룸에서 했다. 바깥에선 이동욱 배우가 화보를 찍었다. 여배우를 둘러싸는 성벽 같은 사람들이 사라지고 그녀와 나, 영화 홍보 담당자만 남았다. 처음에 그녀는 약간 당황하는 것 같았다. 모두가 사라진 풍경을 보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그러나 이내 평정심을 찾고 눈을 맞췄다. 그녀는 <싱글 인 서울>을 홍보하기 위해 최근 유재석과 조세호가 진행하는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했다. 예고편을 보고 추측할 수 있는 건, 현재 소속사가 없고 완전히 혼자 다닌다는 것. 섭외 전화도 직접 주고받는다. “거의 2년째예요. 지금은 혼자 가방 하나 들고 비행기 티켓 끊고 세계 어디든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전엔 그렇게 못했어요. 20대 초반부터 배우를 했고, 늘…” 단어와 단어 사이의 비브라토가 여러 풍경을 연상시켰다.

    “여기도 제가 혼자 운전해서 왔어요. 그런데 주차를 제대로 못해서 차를 이리 돌렸다 저리 돌렸다, 어떡하지 하는 사이, (이)동욱 씨 매니저가 보이길래, 도와주세요, 라고 말했어요.” 어떤 삶은 도움을 요청할 일조차 없을 것이다. 그녀는, 기어코 살았어야 하는 삶을 이제라도 사는 것 같다. “현진은 사랑에 감이 떨어지는 캐릭터예요. ‘썸’의 시그널을 잘못 이해한다고 할까요? 그래서 자꾸 엉뚱한 데로 직진해요. 저는 그렇게 직진하는 편은 아니에요. 누가 다가와도 의심을 많이 하고, 그 시그널을 제가 못 알아채서 지나쳐버린 적도 있어요.”

    그녀가 <싱글 인 서울>에서 자신이 연기한 현진에 대해 이야기하며 스스로를 대비시켰다. “반면 비슷한 건, 일에 프로페셔널하다는 거예요. 그리고 허당인 것도.” 예고편에 공개된 현진의 모습과 임수정의 얼굴이 나란히 겹쳤다가 사라졌다. 내가 아이패드 화면의 질문을 손가락으로 올렸다 내렸다 하는 와중에 그녀가 발음하는 ‘프’가 유독 선명하게 들렸다. 높이 솟아오른 파도가 수면으로 직 하강하는 느낌.

    “특히 종이책에 대한 열정!” 그녀가 출판사 편집장처럼 말했다. 현진처럼. “저도 종이책이 좋거든요. 책을 한번 내보고 싶어요. 저를 돌아보는. 취향이나 아니면 연기 얘기. 또 제가 채식 생활을 8년 정도 했기 때문에 그 얘기를 써봐도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편집장 역할이 저에게는 운명처럼 느껴졌어요.” 마침 그녀의 주된 촬영지는 파주 출판 단지였다. 그녀는 출판사 직원처럼 매일 출퇴근했다. “그래서 굉장히 자연스럽게 그 직업의 정서를 느낄 수 있어요.” 예고편에서, 굵게 펌하고 묶은 머리는 너무 부스스해서 오히려 전형적으로 보였다. 깃이 큰 흰 셔츠, 그 위에 겹쳐 입은 살구색 카디건. 그녀가 점심때 한 손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파주 출판 단지를 걸어 다녔다면, 아무도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채지 못해서 그냥 그대로 평화로웠을 것이다. “의상 팀에서 끝끝내 동그란 안경을 씌워주시더라고요.”

    메이크업 룸 바깥은 소란함으로 가득했다. 임수정이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들어 여닫이문의 작은 유리로 투명한 감정을 보냈다. 화보 촬영을 마친 이동욱 배우가 임수정을 보며 먼저 손 하트를 만들어 보인 것 같았다. “동욱 씨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줘요. 그런데 방금, 순간 저승사자 같았어요.” 다행히 드라마 <도깨비>의 저승사자가 <싱글 인 서울>에선 다른 사람의 삶에 전혀 관심이 없다. 그게 이 영화의 흥미로운 지점이다.

    여름과 재즈 음악을 좋아하는 임수정은 손때 묻은 것들이 좋다. “책을 한번 내보고 싶어요. 취향이나 연기 얘기 혹은 채식 생활을 8년 정도 했기 때문에 그 얘기를 써봐도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편집장 역할이 저에게는 운명처럼 느껴졌어요.” 오버사이즈 롱 코트와 옐로 레더 글러브는 더 로우(The Row), 스틸레토 힐은 크리스찬 루부탱(Christian Louboutin), 이어링은 그라프(Graff).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서 사랑할 수 있을까요? 물론 완전하게 같은 사람은 없겠지만. 내가 물었다. “연애는 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길게 만나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결국 부딪칠 거예요. 좋아하는 것들의 취향. 음악, 영화, 음식 이런 거 있잖아요. 하다못해 계절 취향도 중요하잖아요. 저는 여름이 너무 좋아요. 음악은 두루 듣는 편인데 기본적으로 제일 편안하게 느끼는 건 재즈예요.” 직진하지 않는다는 말이 이해되었다. 시그널을 놓쳤다는 말도. 그녀에겐 느낌이나 순간보다 확실한 의지가 중요하다. 비단 사랑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싱글 인 서울> 보도 자료에는 임수정에 대해 ‘믿고 보는 로맨스 장인’이라고 적혀 있다. 그녀는 머쓱한 미소를 지었지만 이내 이렇게 말했다. “저는 그 수식어를 받아들일 의향이 있어요. 큰 칭찬이라고 보거든요. 로맨스 장르에서 저 배우가 나오면 괜찮다, 좋다, 재밌다, 이렇게 인정해주는 거니까.” 그녀는 정말 ‘훌륭한’ 배우가 되고 싶어 한다. 단단하고 높은 의지. 그녀가 현진의 프로페셔널한 직업의식에 끌린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제 상대 배우가 최근엔 장기용이었고, 거슬러 올라가면 동욱 씨, 공유, 현빈, 와, 이렇게 대단한 사람들이었고, 우성 오빠도 있었고, 결은 약간 다르지만 류승룡 오빠 그리고 황정민, 강동원, 소지섭…” 그녀는 기억을 더듬으며 놀라워했다. “이 배우들 덕분에, 그냥 그들이 존재 자체가 로맨스 장인이어서 제가 그런 수식어를 받게 된 거 아닐까요?” 설득력이… 없는 말은 아니지만, 한편 저 잘난 이름들 속에서 임수정이라는 글자가 볼드체처럼 굵게 보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저들 모두를 상대한 배우니까. 그리고 그녀는 늘 그만큼의 인정을 받아왔다. “네, 지금까진 좋은 평가를 받아온 것 같아요. 대중의 평이나 평론가의 평 모두요. 그런데 아직도 욕심이 나요.”

    어깨에 걸친 패브릭을 펼치고 일어나면 그녀는 바로 카메라 앞에 서서 어떤 역할이든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장화, 홍련>을 찍은 20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그녀가 읽어낸 감정의 결은 그녀의 배후에 온전히 쌓여 있다. “올해 <장화, 홍련> 20주년 기념으로 영화도 다시 찾아보고 GV 행사에도 참석했어요. 신기하게도 그때의 감정이 솟아나더라고요. 나는 다 잊었다고 생각했고, 그 후로 많은 캐릭터를 만났는데.” 그녀의 말을 끊고 내가 말했다. 이미 인생 연기를 했어요. 그녀가 주저함 없이 대답했다. “그건 그때에 맞는 인생 연기였어요. 지금은 더 성숙해졌고 경험도 달라졌어요.” 순간, 나는 그녀에게 몰입했다. 존중의 감정이었다. 곧바로 그녀는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해 언어를 배운 것처럼 확고하게 말했다. “이 캐릭터를 연기하기 위해 지금까지 배우로 살아온 것이 아닐까,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그녀의 용감한 언어. 거기엔 바라볼 수밖에 없는 순수함, 성장이 자신의 건실한 의무라고 믿는 직업인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요즘 저는 매일이 도전이에요.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나간 것도. 정말 벌벌 떨었어요. 제가 현진에 대해 설명하는데 엉뚱하게 남자 배우인 영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예요. 현진을 영호로요.” 왜 허당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예능 프로그램은 속도가 너무 빨라요. 하지만 나중엔 따라갈 만했어요. 안타깝게도 그때 끝이 났어요.” 그러나 그녀의 현실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그것을 단념하지 않는 한. “혼자니까 해야 할 게 많아요. 하지만 잘하고 있어요. 예전엔 제가 이렇게 못할 줄 알았어요.” 총소리를 기다리는 수영 선수처럼 그녀는 곧 저 깊은 곳으로 들어갈 것이다. (VK)

    포토그래퍼
    김영준
    컨트리뷰팅 패션 에디터
    고동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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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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