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서울 | 조은별 기자] “‘연인’에서 미워해서 미안했는데 ‘고려거란전쟁’을 본 뒤 사랑한다는 댓글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배우 지승현은 지난해 누구보다 바쁜 한 해를 보냈다. 이미 촬영을 마친 SBS ‘7인의 탈출’이 하반기 편성된데 이어 MBC ‘연인’의 구원무 역에 캐스팅돼 촬영이 한창이었다. 비슷한 시기 KBS2 ‘고려거란전쟁’도 촬영에 들어갔다.

아내인 길채(안은진 분)를 사랑했지만 아내를 버릴 수 밖에 없던 구원무와 고려의 용맹한 장수 양규는 인물과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다. 두 작품 모두 사극이지만 시대와 캐릭터가 다른 만큼 도전할 수 있겠다 여겼다.

지승현은 “‘연인’이 로맨스물이고 가상의 인물을 연기했다면 ‘고려거란전쟁’은 전쟁물이고 실존인물을 연기한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분명하다고 여겼다. 결과적으로 양사의 대상 배출작에 참여하게 돼 영광이다”고 말했다.

‘고려거란전쟁’이 방송되기 전까지 지승현 자신도 양규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지승현은 “처음 캐스팅 제안을 받은 뒤 대본을 받았을 때만 해도 실존했던 고려의 장수정도로 여겼다”며 “사료를 찾아보고 김한솔PD와 대화를 나누면서 단 3000명의 군사로 1주일동안 40만 거란 대군을 막아낸 장수였다는 걸 알게 됐다. 전쟁학자들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더라”라며 혀를 내둘렀다.

대본과 사료를 통해 양규의 활약상을 접한 지승현은 제작진에게 “드라마를 마칠 때쯤 전 국민이 양규를 알 수 있도록 널리 알리겠다”며 ‘양규 홍보대사’를 자처했다.

그의 호기로운 선언은 사실이 됐다. 지승현의 활약에 힘입어 ‘고려거란전쟁’은 시청률 10%(닐슨코리아 전국 기준, 이하 동일)까지 치솟았다. 각종 SNS에는 “강감찬(최수종 분)을 보러 왔는데 양규를 재발견했다”라는 글이 이어졌다.

지난 7일 16회 방송에서 양규가 거란군이 쏜 화살에 맞아 사망한 장면은 방송 최고 순간 시청률인 11.0%까지 치솟았고 이날 지승현의 이름은 구글 트렌드 검색어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제가 잘했다기보다 양규의 희생과 애민정신, 그리고 이를 섬섬옥수로 표현한 제작진의 역할이 컸다고 봐요. 양규는 권력을 탐하지 않고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던 분이죠. 사후 현종이 직접 글을 써 하사할 정도로 업적을 기렸고 부인과 아들에게는 사망할 때까지 해마다 100섬의 쌀을 하사했대요. 또 조선 세조 때까지 양규를 위한 무제를 올릴 정도로 국민적 추앙을 받았어요.”

데뷔 이후 줄곧 군인과 형사 등을 연기했던 지승현이지만 양규 연기를 위해 국궁과 승마 연습에 매진했다. 실제 제작한 국궁을 연습하며 국궁사법으로 활을 쏴 피범벅이 된 지승현의 손가락이 클로즈업되자 국궁 동호회 회원들이 “이건 ‘찐’(진짜)이다”라며 화답했다.

김한솔PD는 디테일한 연출로 지승현이 양규를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특히 칼날에 양규의 갑옷이 조금씩 뜯겨나가는 모습은 ‘고려거란전쟁’의 백미로 꼽힌다. 실제 영하 10도의 혹한 속에서 무려 사흘에 걸쳐 촬영한 장면이었다. 양규의 전사 장면을 찍은 날은 때마침 지승현의 생일이었다.

“양규가 눈을 맞으며 숨지는 설정이었는데 때마침 눈이 내렸어요. 화살이 꽂혀 사망한 뒤 ‘컷’소리가 들리자마자 스태프들이 다같이 생일을 축하해줬죠. 김한솔PD님은 ‘양규장군님이 돌아가셨지만 지승현은 다시 태어난 날’이라고 말씀하셨어요. 뜻깊은 죽음의 날이었죠.(웃음)”

경북 안동 출신인 지승현은 학창시절부터 TV ‘주말의 명화’를 즐겨보며 배우의 꿈을 키웠다. 고교 시절 학교를 자퇴하고 서울에 가 배우가 되겠다고 부모를 졸랐다 체육교사였던 부친에게 뒤돌려 차기로 맞기도 했다.

경희대학교 영문과를 지망한 것도 먼 훗날 할리우드 진출을 염두에 둔 진학이었다. 대학 입학 뒤 전공 공부보다 연기학원과 아나운서학원을 다니며 배우를 준비했다. 학군단으로 군복무를 한 것도 연예계 인맥을 마련하기 위한 준비의 일환이었다.

2009년 개봉한 영화 ‘바람’에 캐스팅됐지만 영화 흥행의 실패로 단역을 전전했다. 그의 이름 석자를 알린 건 2016년 KBS2 드라마 ‘태양의 후예’다. 학군단 복무 경험이 밑받침이 됐다. 고교 시절 아들을 호되게 혼냈던 안동의 부친은 이제 아들의 열성팬이 됐다. 지승현은 “예전에는 연기활동을 별로 아는 척 안하셨는데 이제 고향에 내려가면 아버지가 ‘장군 고생했어’라고 말씀하신다”며 웃었다.

“만약 ‘바람’이 처음부터 잘됐다면 어린 시절 허파에 바람이 들었을 텐데(웃음). 18년이란 시간동안 배우 지승현이 성장해 양규란 역할을 만날 수 있게 됐네요. 이제는 저도 현대물에서 로맨스 연기도 하고 싶어요. 기회가 된다면 할리우드에도 진출하고 싶습니다.” mulgae@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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