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 위 나무들이 연둣빛 신록으로 말을 걸어왔다

장태동의 한양도성 순성 ④ 낙산 구간

등록 : 2020-04-30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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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 광희문 낯선 느낌 자아냈지만

성곽 따라 오르자 600년 흔적 오롯이

도성 안팎에 자리잡은 돌산·장수마을

물오른 나무, 화사한 꽃길과 어우러져

한양도성 성곽 위로 자란 나무의 신록이 푸른 성벽 같다.

한양도성 순성 낙산 구간은 흥인지문에서 낙산 정상(낙산공원)과 장수마을을 지나 혜화문까지 이어지는 2.1㎞ 길인데, 한양도성 동남문인 광희문에서 흥인지문(동대문)까지 약 1㎞ 구간을 붙여 걸었다. 광희문과 흥인지문 사이에 있었던 한양도성 성곽과 부대시설, 그 주변 마을에서 출토된 유물을 보기 위해서였다. 낙산공원을 찾은 사람들은 미세먼지 없는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을 보며 옛날에 보았던 가을 하늘을 이야기했다. 성곽 위로 자란 나무들은 연둣빛 신록으로 봄을 완성하고 있었다. 그 길을 걷는 아줌마 몇몇이 나누는 말을 들었다. “오늘은 정말 완벽한 날이야.”

광희문과 이간수문


중구 광희동2가 차들이 질주하는 도로 옆 낯선 건축물 하나, 조선시대 한양도성 동남쪽 문인 광희문이다. 문 옆 한양도성 성곽 아래 작은 공원 햇살 고이는 의자에 앉은 할아버지의 시간은 600년 넘게 흐르고 있는 성곽의 시간보다 여리다. 오전 10시 햇살이 막 퍼지기 시작할 때 광희문에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으로 출발했다.

광희문.

1396년 완공된 광희문은 처음부터 수구문(水口門)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말 그대로 물이 지나는 길이다. 광희문과 흥인지문 사이에는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이 있었다. 한양도성 성곽의 축을 이루는 백악산(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이곳을 거쳐 도성 밖으로 흘러나갔다. 이곳은 한양에서 지대가 가장 낮은 곳이었다.

이간수문.

2008년 9월 옛 동대문운동장 터에서 땅속에 묻혔던 이간수문의 홍예 부분이 드러났다. 지표 3.7m 아래에 있던 것이었다. 발굴은 계속됐고 홍예 내부에서 길이 4m 넘는 목재가 발견됐다. 수문을 통해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한 시설이었다. 복원된 이간수문을 보고 놀랐던 건 수문의 크기 때문이다.

이간수문 부근에는 조선시대 건물터와 집수시설, 배수시설, 철을 생산했던 유적, 기와보도, 우물 등 동대문운동장 터에서 발견된 유적을 볼 수 있는 야외전시장이 있다. 복원한 집수시설은 작은 연못이다. 여름이면 연꽃도 핀다.

이런 것들이 모여 있는 곳이 옛 동대문운동장 터에 생긴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다. 생뚱맞게 남아 있는, 옛 동대문운동장을 비췄던 조명시설의 배웅을 받으며 흥인지문으로 향한다.

보물1호 흥인지문은 1398년 지어졌다. 지금의 문은 1869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흥인지문은 한양도성의 문 가운데 유일하게 옹성(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지키기 위해 성문 밖에 쌓은 작은 성)이 있는 문이다.

성 밖 채석장 마을과 성안 마을 텃밭

흥인지문에서 찻길을 건너 흥인지문공원 앞에 섰다. 한양도성 성곽이 낙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그 초입 성곽에 글자가 새겨진 돌이 여러 개 박혀 있다. 한양도성 축성 뒤 숙종 때 보수공사를 하면서 새긴 글자다. 1706년(숙종 32년)에 훈련도감 관리인 한필영이 공사를 총괄하고 1구간은 성세각, 2구간은 전수선, 3구간은 유제한이 공사를 이끌었으며, 석수의 우두머리는 오유선이었다는 등의 내용이다.

옛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돌을 뒤로하고 성곽 안쪽으로 올라가다 돌아본 풍경에 동대문디자인플라자와 흥인지문이 보인다. 그 풍경을 보고 성곽을 따라 걷는다. 옛 성곽과 지금의 마을 사이에 난 길은 시간 사이에 난 오솔길 같다. 그 길에 연둣빛 물오른 나무들이 비현실적이다.

성곽 마을 구멍가게 앞 텃밭에 상추가 자란다. 아직은 작은 상추들이 꽃 같다. 더 크면 따 먹는단다. 텃밭에서 갓 딴 상추 맛은 시장이나 대형마트에서 파는 것과 맛과 향이 다르다. 집 뒤꼍 텃밭의 옛 추억을 떠올리며 텃밭 한쪽 나무 그늘에 앉아 잠시 쉰다.

일제강점기에 채석장이었던 곳. 절벽 위에 집들이 들어섰다. 절벽 아래에도 마을이 있다. 흥인지문에서 한양도성 성곽을 따라 낙산공원으로 올라가는 길, 성곽 밖에 있다.

어느새 낙산 정상(낙산공원)으로 향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잠시 성 밖 마을을 구경하기로 하고 텃밭 옆 암문으로 나갔다. 빌라들이 들어선 산비탈 마을 골목길을 물어 물어 덕산파출소를 찾아갔다. 파출소 옆에 창신2동경로당 간판이 붙어 있다. 그 건물을 바라보았을 때 오른쪽에 좁은 골목이 있다. 그 골목으로 들어가서 오르막길을 올라가다보면 ‘소통공작소’ ‘돌산마을 조망점’ 등을 안내하는 작은 이정표가 보인다. 이정표를 따라 도착한 곳은 ‘돌산마을 조망점’이었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도 집이고 절벽 아래도 집이 빼곡하다. 사람들은 그곳을 돌산마을이라 부른다. 일제강점기에 채석장이었던 곳이다. 이곳에서 채취한 화강암으로 옛 서울역, 조선총독부 건물 등을 지었다고 한다. 1960년대에 채석장이 있던 곳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기 시작해서 지금의 모습이 됐다.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는 골목길에 된장찌개 향기가 퍼진다. 어느 집 점심 밥상에 된장찌개가 오를 모양이다.

홍덕이밭과 장수마을을 지나 혜화문

성을 나갔던 암문으로 다시 들어가 낙산공원 쪽으로 올라가다보면 왼쪽에 정자가 있다. 정자 앞에 서면 옛 한양도성의 사대문 안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곳에서 보이는 남산이 누에 같다. 남산 서쪽에 ‘잠두봉 포토 아일랜드’가 있다. ‘잠두’란 누에의 머리를 말한다. 백악산(북악산) 줄기에서 이어지는 도심의 푸른 숲은 창경궁과 창덕궁의 궁궐 숲이다.

낙산 정상 못미처에 홍덕이밭으로 가는 길이 있다. 조선시대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봉림대군(효종)을 모시던 나인 홍덕이가 볼모지에서 봉림대군에게 김치를 해주었다고 한다. 훗날 왕이 된 봉림대군이 홍덕이에게 낙산 중턱에 밭을 주어 농사짓게 하고 김치를 담그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홍덕이밭을 상징하는 작은 밭이 낙산 중턱에 있다.

홍덕이밭이 있는 길이 낙산공원의 여느 길보다 고즈넉하다. 그 길을 따라 걸어서 낙산 정상에 도착했다. 너른 마당을 지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사방으로 트인 전망에 시원한 바람이 좋다. 미세먼지 없는 하늘은 파랬고 하얀 구름은 선명했다. 마음도 씻기는 것 같다.

몸을 움직여 바라본 다른 쪽 풍경에는 조금 전 정자 앞에서 보았던 남산 쪽 풍경이 보인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성곽이 도심으로 들어가 꼬리를 감춘다. 성곽 옆 물오른 수양버들이 바람에 낭창거린다.

낙산공원 한양도성 성곽과 장수마을.

성 밖 장수마을로 향한다. 장수마을은 성벽 바로 아랫마을이다. 가파른 산비탈 좁은 골목이 미로 같다. 바위 위에도 집을 짓고 담장을 세웠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다시 나와 걸었다. 산비탈 동네가 다 그렇듯, 길 아래가 다른 집 지붕이고 옥상이다. 옥상 빨랫줄에 널린 빨래가 바람에 나부낀다. 슬레이트 지붕 한쪽 햇볕 좋은 곳에 고양이가 웅크리고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히 걷는다. 마을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성곽으로 드나드는 마을 골목 어귀는 여러 곳이다. 그중 한 곳으로 나가 성곽을 따라 혜화문으로 향했다. 성벽 위로 자란 나무들이 연둣빛으로 물들었다. 신록이 쌓은 성벽 같다. 그런 성벽 앞에 펼쳐지는 하늘이 끝까지 파랗다. 성곽길은 꽃길이다. 그 길을 걸어오는 아줌마들이 활짝 웃는 얼굴로 이야기를 나눈다. “오늘은 정말 완벽한 하루야.” <끝>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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