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시로 여는 수요일]나비를 읽는 법


-박지웅

나비는 꽃이 쓴 글씨

꽃이 꽃에게 보내는 쪽지

나풀나풀 떨어지는 듯 떠오르는

아슬한 탈선의 필적

저 활자는 단 한 줄인데

나는 번번이 놓쳐버려

처음부터 읽고 다시 읽고

나비를 정독하다, 문득

문법 밖에서 율동하는 필체

나비는 아름다운 비문임을 깨닫는다

울퉁불퉁하게 때로는 결 없이

다듬다가 공중에서 지워지는 글씨

나비를 천천히 펴서 읽고 접을 때

수줍게 돋는 푸른 동사들

나비는 꽃이 읽는 글씨

육필의 경치를 기웃거릴 때

바람이 훔쳐가는 글씨





나비는 우편배달부다. 이 꽃이 쓴 엽서를 싣고 저 꽃에게로 간다. 새는 산의 허리를 끊으며 직선으로 날지만, 나비는 언제나 삐뚤빼뚤 난다. 꽃이 주는 배달비가 언제나 꿀술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꽃이 쓴 엽서가 아니라 나비를 읽으려 애쓰지만 나비의 문장은 금세 수풀 속으로 사라진다. 꽃은 나비의 날개에 쓰인 꽃가루 글자를 꼼꼼히 읽는다. 점자를 읽듯 끈끈한 암술머리로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읽는다. 꽃가루 속 오랜 DNA 문장을 해독한 꽃송이마다 열매가 부푼다. 백악기 이래 시작된 나비와 꽃의 공진화가 지구 밥상을 차린다. 우리는 그 과육을 맛보며 뒤늦게 말한다. ‘참 달콤한 문장이었어!’

- 시인 반칠환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울경제 1q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