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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사해(縱橫四海)] 와룡강

∑ 제 1 장 기녀(妓女)의 아들

-금릉(金陵)!

달리 응천부(應天府), 또는 남경(南京)이라고도 불리는 금릉은 위진남북조


(魏晋南北朝)시대 이래 열국(列國)의 도읍이었던 강남(江南)의 고도(古都)
다.
주원장은 하늘의 뜻에 부응(副應)하여 명(明) 제국을 창업하였다. 그리고
이곳 금릉을 도읍으로 삼았었다. 응천부(應天府)라는 이름은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다.
예로부터 강남은 물산이 풍부한 곳이고 그 풍부한 물산이 모두 모여드는 곳
이 바로 이곳 금릉이다.
비록 삼세황제 영락제(永樂帝)에 의해 제국의 수도가 연경(燕京)으로 옮겨
지긴 했지만 금릉의 번영과 영화는 조금도 쇠락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
다.

때는 만추(晩秋),
휘___ 이잉!
옷깃을 파고드는 차가운 삭풍이 고도 금릉을 휩쓸고 있었다. 가을도 깊어가
어느덧 잔혹한 겨울의 여신이 그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금릉의 북방에 위치한 종산(鐘山)을 넘어 불어오는 바람은 벌써 서슬퍼런
칼날같이 매서웠다.
만추의 금릉 일대에는 매서운 삭풍과 함께 흉흉한 살기(殺氣)가 감돌고 있
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무림인들이 꾸역꾸역 금릉 일대로 모여들고 있
었기 때문이다.
몰려든 무림인들의 눈은 하나같이 탐욕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과연 무엇
이 무림인들을 이토록 미치게 만드는 것일까?
그것은 한 가지 소문 때문이었다.

-지옥혈겸(地獄血鎌)이 금릉에 나타났다!

소문은 바로 그것이었다.
지옥혈겸(地獄血鎌)-!
그것이 대체 무엇인가? 무엇이기에 도검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무림인들
을 미치게 만드는 것인가?
이름 그대로 지옥혈겸은 한 자루의 낫(鎌)이다.
마치 피칠을 한 듯 시뻘건 색의 날을 지닌 이 한 자루의 낫은 지금으로부터
오백 년 전에 전무림을 혈풍의 겁난 속으로 몰아 넣었던 한 명 전율스러운
대마황(大魔皇)이 사용하던 병기였다.

-아수마황(阿修魔皇)!

고금제일마(古今第一魔)로도 불리는 이 전대미문의 거마(巨魔)는 오백 년


전, 단신으로 북육성(北六省) 남칠성(南七省)을 피로 물들여 전 강호를 공
포에 떨게 했던 인물이다.
그 아수마황이 무림을 피로 씻을 때 사용했던 병기가 바로 지옥혈겸이다.
이 지옥혈겸은 고금을 통틀어 가장 무서운 위력을 지닌 것으로 알려진 마물
(魔物)이었다.
만년한철(萬年寒鐵)도 두부 자르듯 잘라 버리고 어떤 호신강기도 종이처럼
베어 버린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며 이 지옥혈겸에는 아수마황이 남긴 가
공할 초마공의 비결이 감추어져 있다고 한다.

-지옥혈겸을 얻으면 천하무적이 될 수 있다!

그런 밑도 끝도 없는 소문이 오백 년 내내 인구에 회자될 정도였다. 하지만


이 지옥혈겸은 이미 오백 년 전에 이 세상에서 사라졌었다.
아수마황의 무자비한 횡행을 보다 못해 오패왕(五覇王)이라 불리는 세외의
다섯 기인들이 강호로 나와 그를 협공했고, 그 다섯 기인의 연수합격에는
고금무적을 자랑하던 아수마황도 견디지 못하고 패사(敗死)했었다.
그리고 자신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아수마황은 애병인 지
옥혈겸을 안고 바닥이 없는 무저갱(無底坑)에 몸을 던져 버렸었다.
그렇게 지옥혈겸은 이 세상에서 사라졌었다.
헌데 주인인 아수마황과 함께 수천 장 지하 깊은 곳에 묻혔다고 알려진 그
지옥혈겸이 다시 세상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소문인가?
당연히 무림은 흥분과 기대로 들끓기 시작했으며, 검을 든 자와 주먹을 쥔
인간들은 하나같이 탐욕에 눈이 멀어 날뛰고 있었다.
확인되지도 않은 소문에 미친 무림인들이 꾸역꾸역 금릉 일대로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무림인들은 재물에는 초연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신병이기나 무공비급 등에는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
하물며 고금제일마의 유물인 지옥혈겸의 유혹은 너무도 강렬한 것이다. 얻
기만 하면 독보강호할 수 있다는 이 천고마병을 어떤 무림인인들 모른 척할
수 있겠는가?
지옥혈겸을 노리고 금릉에 몰려든 무리들 중에는 심지어 오백 년 전 아수마
황을 협살했던 오패왕(五覇王)의 후예들인 오대무벌(五大武閥)의 인물들까
지 눈에 뛸 정도였다.
바야흐로 금릉은 무림의 거의 모든 기인명숙들이 운집한 태풍의 중심지가
되어 버렸다.
도처에서 사소한 충돌이 끊이지 않았고, 매일 아침 금릉부(金陵府)의 관리
들은 싸우다 죽어넘어진 무림인들의 시신을 거두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일반 양민들과는 관계없는, 무림(武林)이라는 세상 밖
의 세상의 일이었다. 강호(江湖)라고도 불려지는 무림세계는 일반 양민들에
게는 그저 공상 속의 별세계라고 할 수 있었다.
풍운이 일든 겁풍의 조짐이 싹트든, 세상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그 가운데 수많은 인간들은 하루하루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었다.
울고 웃고 노하고 기뻐하며…

-진회하(秦淮河)!

이곳은 중원의 풍류한량들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환락가


(歡樂街)다.
본래 진회하라는 것은 금릉의 북서방을 끼고 돌아 장강으로 흘러드는 아름
다운 강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진회하의 아름다운 강변 주위로 기루와 창굴이 뒤섞인
홍등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작금에 이르러서는 진회하 일대가 천하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화
려한 홍등가가 된 상태였다.
휘황하고 현란한 붉은 등이 꺼질 날이 없고 밤의 꽃들의 요염하고 질탕한
웃음이 끊일 날 없는 환락의 불야성(不夜城)! 그곳이 바로 진회하(秦淮河)
인 것이다.

저녁 무렵,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도 않았건만 진회하 일대는 벌써 유혹적


인 붉은 등의 불빛으로 현란하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호호호…!"
"까르르…"
홍등의 원색적인 불빛 속으로 요염한 기녀들의 웃음소리가 자극적으로 배어
흘렀다. 밤이 되자 진회하는 바야흐로 생기를 띄며 살아나고 있는 것이었
다.
그 진회하의 번화한 길목에 유달리 눈에 띄는 하나의 기루가 자리하고 있었
다.

<낙월정(落月亭).>

그것이 그 기루의 이름이었다. 별로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평범한 기루인


이 낙월정은, 그러나 진회하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기루였다.
그것은 낙월정에 한 명의 유명한 기녀(妓女)가 있기 때문이었다.

-낙월부인(落月婦人) 수운월(水雲月)!

기녀의 이름은 그러했다.


그녀는 묘하게도 부인(婦人)이라 불리는 기녀였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
문이었다.
하나는 그녀가 마흔이 다 된 중년여인이라는 점이었다. 나이가 중년일 뿐
아니라 아들까지도 한 명 있는 몸이니 부인이라 불려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녀가 부인이라 불리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녀가 유명한 기녀이면서 동시
에 이곳 낙월정의 주인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사실 서른이란 나이는 기녀들에게 환갑 이상의 나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낙월부인은 서른이 아니라 마흔이 다되어가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불구하고 금릉의 뭇 한량들로부터 절대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가무음곡(歌舞音曲) 실력이 가히 발군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낙월부인이 마흔이 다된 나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젊음과 미모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젊은 기녀들도 비교되지 못하는 그녀의 빼어난 미모는 뭇 사내들의 혼
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기이하게도 그녀는 십 몇 년 전 진회하에 처음 나타났을 때의 젊음과 미모
를 아직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잔인한 세월조차도 유독 그녀에게만은 해
꼬지를 못하는 듯 보이는 것이다.
낙월부인을 처음 보는 사람은 누구나 그녀가 아직 이십대인 줄 알 정도였
다.
절색의 미모, 그에 더한 빼어난 가무음곡의 실력으로 낙월부인 수운월은 십
몇 년 간 진회하 제일의 야화(夜花)로 군림해 오고 있었다. 그 어떤 기녀보
다 화려하고 고고한 모습으로…

일경(一更:오후 일곱시) 직전____


막 홍등(紅燈)이 내걸린 낙월정으로부터 한 명의 인물이 걸어나왔다.
그가 낙월정에서 모습을 나타내는 순간 길을 지나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 인물에게 쏠렸다.
그것은 그 인물이 낙월정 같은 환락굴(歡樂窟)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
문이다.
먼저 그 인물은 나이가 어렸다.
이제 겨우 십 오륙 세 정도나 되었을까? 그는 아직 젖비린내가 다 가시지도
않은 어린 소년이었다. 도저히 기루에 출입을 할 나이로는 보이지 않는 어
린 나이인 것이다.
둘째, 그 소년은 화려한 주위 모습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림을 하고 있었
다.
몸에는 다 헤지고 빛이 바랜 폐포(弊袍)를 걸치고 있으며 머리에는 이빨이
숭숭 빠진 낡은 죽립(竹笠)을 쓰고 있는 것이다.
내다 버려도 아무도 주워가지 않을 그 낡은 죽립 때문에 소년의 용모는 제
대로 볼 수가 없었다. 다만 오똑한 콧날과 주사같이 붉은 입술만이 죽립 밑
으로 드러나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허름한 옷 밖으로 드러난 소년의 피부는 너무 희어 창백하게까지 보
였다.
그 새하얀 피부에 타는 듯 붉은 입술은 극히 대조적인 느낌을 풍겼는데 그
의 입술가로는 음울하고 퇴폐적인 조소가 흐르고 있었다.
낚시질을 가는 것일까? 소녀의 왼쪽 어깨에는 한 자루의 긴 낚싯대가 짊어
져 있었다.
폐포소년은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 없이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 낙월정을 나
섰다.
"쯧쯧! 금릉일관옥(金陵一冠玉)이 점점 더 타락해 가는군!"
낙월정 주변에서 보고 있던 몇몇 사람들이 폐포소년의 뒷모습에 대고 혀를
찼다.
"하늘도 얄궂단 말이야. 십전잠룡(十全潛龍)이라고도 불리던 신주(神州) 제
일의 기재가 어째서 천한 기녀의 몸에서 났단 말인가?"
중인들은 안타까운 듯 혀를 차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금릉일관옥(金陵一冠玉)-!
폐포소년은 그렇게 불린다.
아니 몇 년 전까지는 그렇게 불렸었다.

-십전잠룡(十全潛龍) 철운비(鐵雲飛)!

십전(十全)의 잠룡(潛龍)!
그같은 찬사로 불리었던 이 소년의 이름은 철운비(鐵雲飛)였다.
그는 범인의 천 배를 능가하는 지혜를 지녔다고 한다. 한 번 본 것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머리 속에 새길 수 있는 재능을 지닌 천고의 기재(奇才)인
그가 하지 못하는 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 없다고 했다.
적어도 세인들은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사실이었다.
철운비는 이미 오 세 때부터 금릉 교외에 자리한 귀곡서원(鬼谷書院)을 드
나들었다.
귀곡서원은 춘추전국시대의 대학자인 귀곡자(鬼谷子)가 세웠다는 서원의 이
름을 그대로 딴 학당(學堂)이다. 그만큼 귀곡서원은 최고의 기재들만이 입
교할 수 있는 곳이다.
몇 백 년 동안 귀곡서원이 세상에 뿌려 놓은 인맥(人脈)은 깊고도 넓다. 그
런 이유로 귀곡서원의 원생으로 선출되었다는 자체만으로도 출세가 보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철운비는 그 귀곳서원에 불과 오 세의 어린 나이로 입교했던 것이다. 이는
전무후무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십 세가 되는 해부터는 더 이상 귀곡서원에
다니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천하를 통틀어 다섯 번째 안에 들
정도로 크다는 귀곡서원이건만 더 이상 철운비가 볼 책이 없기 때문이었다.
금릉 전체에서 가장 지혜로운 어린 천재 철운비!
그는 만인에게 있어 경이의 대상이었고 가희 인중의 용(人中之龍)같은 존재
였다.
그러나,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의 그는 탁월한 어린 부랑아일 뿐이
었다.
물론 그가 이렇게 타락하게 된 데에는 동기가 있었다.
이 년 전 어느날, 항상 철운비에게 뒤지기만 하던 어느 어린 수재(秀才)가
열등감에 못 이겨 내뱉은 한 마디 말이 십전잠룡(十全潛龍)을 십결잠룡(十
缺潛龍)으로 만들어 버렸다.

-네 어미는 천한 창녀(娼女)다. 네 어미는 밤마다 다른 사내를 침실로 불러


들여 몸을 팔았고… 너는 그 중에서 어쩌다 태어난 개잡종이다!

철없는 악동(惡童)의 그 한 마디 말이 비수같이 철운비의 어린 가슴을 난자


질해 버린 것이었다.
철운비의 어머니는 바로 진회하의 꽃이라 불리는 낙월부인 수운월, 그녀였
던 것이다.

"…!"
눈(眼), 진물이 흐르는 한 쌍의 눈이 언제부터인가 낙월정을 나서는 철운비
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 눈의 주인은 바쁘게 진회하의 거리를 오가는 인파 속에 섞여 있었다.
그는 한 명의 노인(老人)이었다.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인상
인 이 노인은 너무도 평범하여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 오히려 이상
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문득 노인은 음울한 음성으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저 아이가 금릉일관옥(金陵一冠玉)이라 불리던 아인가?"
그의 눈은 철운비의 모습을 집요하게 쫓고 있었다.
헌데 자세히 보면 그의 눈가에 검은 그늘이 서려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심각한 내상을 입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기이하구나. 천한 기녀의 자식인데… 하늘과 땅 사이에 가장 막강
했던 한 명의 패왕(覇王)을 닮았다니…"
노인은 나직하게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짙은 의혹과 불신이 깃든 음성이었
다.
그런 노인의 눈가에는 짙은 회한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고독패왕(孤獨覇王)! 저주스러울 정도로 막강했던 고루마맥(固陋魔脈)의
후예! 이상하게도 저 어린 놈은 그 자, 고독패왕을 닮았다."
빠직!
돌연 진물 흐르는 노인의 눈에 강렬한 불꽃이 튀었다. 그것은 그가 한 가지
치욕스러웠던 기억을 되살린 때문이었다.
고독패왕(孤獨覇王)!
그가 어떤 인물이기에 금릉일관옥이라고도 불리는 철운비와 닮았다는 것일
까?
"어쨌든… 지금에 와서 무림의 파멸을 막을 자는 고독패왕이란 저주스러운
놈 외에는 없다. 그래서 이것을 그에게 전해야만 하는데… 종적을 찾을 수
가 없으니 문제다!"
노인은 알 수 없는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조심스럽게 가슴섶을 만졌다.
그의 가슴섶에는 무엇인가 들어 있는 듯 제법 불룩해 보였다.
노인은 음울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도망다니는 것도 지쳤다. 거기다 지옥천존(地獄天尊)이란 놈은 워낙
집요해서 열흘이 가기 전에 노부 무영종(無影宗)을 찾아낼 것이다."
무영종(無影宗)이란 이름을 지닌 노인의 늙은 눈이 암울한 절망으로 물들었
다.
그 사이 철운비의 모습은 어느덧 인파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헌데,
파츳…!
철운비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노인 무영종의 눈에 돌연 한 가닥 기광이
번뜩였다.
"그래… 그렇게 하면 된다!"
그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히죽 웃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
다.
"어찌되었든 이것을 다시 지옥천존이란 놈에게 돌려 줄 수는 없다! 그것은
… 밤의 제왕(帝王)인 나 무영종의 자존심이 용납지 않는다."
이어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철운비가 사라진 곳으로 걷기 시작했다.
"저 어린 놈을 이용하면… 지옥혈겸(地獄血鎌)을 지옥천존의 손에서 빼돌릴
수도 있다."
그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암울한 절망의 그늘이 깔려 있던 무영종의
주름 가득한 얼굴은 이 순간 기이한 생기를 띠었으며 기괴한 웃음까지 떠돌
았다.
"크녠! 지옥천존(地獄天尊)! 결국 네놈은 지옥혈겸을 얻지는 못하게 될 것
이다!"
그는 괴이한 웃음을 흘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어 그의 모습은 삽시에 인
파 속으로 사라져 갔다.
헌데 지옥혈겸이라니…!
무영종이라 자칭한 이 괴노인(怪老人)이 설마 저 고금제일마라는 아수마황
(阿修魔皇)의 천고마병 지옥혈겸(地獄血鎌)을 갖고 있단 말인가?
금릉 일대를 광란의 혈풍으로 몰아 넣고 있는…?
정녕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점점 잦아지는 가운데 어둠이 짙어가고 있었다.


밤(夜), 진회하에 밤이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환락과 열기로 후끈하게 달아오르는 밤, 진회하 일대에 무수히 걸린 흥등
(紅燈)이 점점 유혹의 빛을 강렬하게 뿌려내고 있었다.

소년 철운비(鐵雲飛)는 낚시대를 둘러멘 채 휘적휘적 인파 속을 걷고 있었


다.
"후훗! 난지(蘭芝), 저 계집은 허리쓰는 솜씨가 대단했지?"
그는 걸음을 옮기며 죽립 속에서 히죽 웃었다.
지금 그는 진회하 북쪽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그 일대에는 보다 하급의 홍
등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동전 한 닢이면 여자를 살 수 있는 홍루들이 길
좌우로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것이다.
다닥다닥 어깨를 붙이고 늘어선 값싼 홍루들에서는 다투어 기녀들이 쏟아져
나와 지분냄새를 풍기며 손님들을 끌고 있었다.
철운비의 눈은 그 중 한 명의 어린 창녀를 보고 있었다. 십 오륙 세 정도
되었을까? 희고 동그란 얼굴에 백치같은 표정을 지닌 미소녀였다.
그녀의 이름은 난지(蘭芝), 철운비는 이 소녀 창기 난지를 알고 있었다. 아
니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녀와 하룻밤 같이 자기까지 했다.
철운비가 이미 여자를 경험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천한 창녀라고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은 후 철운비는 철저
하게 타락해 버렸다. 어린 나이에 그는 술에 빠져 살았으며 진회하 일대의
야화(夜花)들과 동침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귀엽고 준비한 용모 때문에 그는 어떤 기녀에게서나 대환영을 받았다.
낙월부인(落月婦人) 수운월(水雲月)은 철운비의 그런 행동 때문에 근심으로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그 역시 진회하 일대에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러나 철운비는 주위의 시선이나 염려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머
니 수운월의 근심조차도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개의치 못했다.
한데 그나마 다행이랄까? 여자들과 어울리는 것마저 곧 시들해졌는지 철운
비는 낚시질에 빠져 버렸다. 매일 저녁 그는 낚시를 강물에 드리운 채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낙월부인 수운월은 그나마 철운비가 다른 기녀들을 건드리지 않는 것을 위
안으로 삼고 있었다. 물론 언제 또다시 그의 행동이 변할 것인지는 예측할
수 없었지만…
문득,
"어이쿠…"
철운비의 앞 쪽에서 노인의 다급한 비명소리가 돌려왔다. 그와 함께 철운비
역시 육중한 충격으로 낚시대를 떨어뜨리며 신형을 휘청했다.
그가 막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바로 세우는 순간,
"아이구, 이놈아! 젊은 놈이 눈깔을 어디다 박고 다니는 것이냐?"
노인의 고래고래 악을 쓰는 음성이 철운비의 귓전을 때렸다. 그의 앞에는
한 명의 노인이 털썩 주저앉은 채 철운비를 노려보고 있었다.
철운비는 한눈을 팔고 걷다가 마주 오던 그 노인과 충돌한 것이었다.
노인은 일시에 낡은 마의(麻衣)를 걸쳤으며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극히
평범한 용모였다. 그 역시 낚시질을 가던 길이었는지 바닥에는 또 하나의
낚시대가 떨어져 있었다.
"미안해요! 하지만 노인장도 앞을 보고 다니셔야지…!"
철운비는 입술을 씰룩이며 마지못해 그 마의노인을 부축해 일으켰다.
(피… 냄새가…!)
헌데 마의노인을 부축해 일으키던 그는 검미를 살풋 찌푸렸다. 마의노인의
몸에서도 한 가닥 비릿한 피냄새를 감지한 것이었다.
"쯧쯧! 요즘 젊은 것들은 도대체가 노인을 공경할 줄 모른단 말이야!"
마의노인이 끌끌 혀를 차며 철운비를 째려보았다.
"카악! 놈! 냉큼… 꺼져라!"
이어 그는 눈을 부릅뜨며 쉰 음성으로 가래침을 탁 뱉았다. 그리고는 바닥
에 떨어진 두 개의 낚시대 중 하나늘 집어들더니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철운비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의노인의 모습은 이내 붐비는 인파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내 코가 잘못된 것일까? 분명 피비린내가 느껴졌는데…!)
철운비는 마의노인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바닥에 떨어진 낚시대를 집으려 허리를 숙였다.
헌데 그 직후,
(이것은 내 낚싯대가 아니다!)
철운비는 흠칫하며 낚싯대를 주시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낚싯대는 언뜻 보면 철운비의 대나무 낚싯대와 비슷했
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것은 분명 달랐다. 푸르스름한 벽광(碧光)이 서려 있
는 그 낚싯대는 일견하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철운비는 검은 눈썹을 찌푸렸다.
(이건 그 재수없는 늙은이의 것이다. 빌어먹을 늙은이가 낚싯대를 잘못 바
꿔갔구나!)
그는 급히 벽색을 띤 낚싯대를 집어들었다.
"엇!"
그러나 그 낚싯대를 집어들던 철운비는 한 소리 당혹성과 함께 허리를 휘청
했다. 놀랍게도 그 벽색의 죽간(竹竿)은 흡사 쇠로 만들어진 듯 무거운 것
이 아닌가?
(보통 낚싯대가 아니다!)
철운비는 내심 나직한 신음을 발했다. 이어 그는 억지로 벽색죽간을 집어들
어 그것을 살펴보았다.
낚싯대의 길이는 일 장 정도, 일견하여 대나무로 만들어진 듯 보였으나 자
세히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낚싯대는 옥(玉)같기도 하고 쇠(鐵)같기도 한
특이한 재질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낚싯대의 끝에는 천잠사(天蠶絲)를 꼬아 만든 낚싯줄과 검푸른 빛의 예리한
낚시바늘이 달려 있었다.
또한 낚싯대의 손잡이에는 이상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얼핏 보아
올챙이를 그려 놓은 듯한 무늬로 보였다. 보통사람이 그것을 보면 그저 의
미없는 단순한 무늬로 볼 것이다.
그러나 철운비의 눈에는 결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절전된 고문(古文)인 과두문이다!)
그는 눈을 번뜩이며 내심 중얼거렸다. 올챙이같이 생겼다고 해서 과두(?)라
고 이름붙여진 이 글자는 갑골문자만큼이나 오래된 고어(古語)다.
철운비는 이제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올챙이 문양의 과두문을 해독해 보
았다.

<벽옥… 마간(碧玉魔竿)>

그 글의 뜻은 그러했다.
철운비는 십 세 이전에 이미 만권서(萬卷書)를 읽었다. 그래서 그 과두문의
해독이 가능했던 것이다.
벽옥마간(碧玉魔竿)이라 이름붙여진 낚싯대는 얼핏 보면 대나무같아 보였
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것은 대나무가 아니었다.
(벽옥마간이라! 그 늙은이가 이상한 물건을 남기고 갔군!)
철운비는 벽옥마간을 만지작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예의 마의노
인은 이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철운비는 고개를 갸웃하며 검미를 모았다.
"그러고 보니 그 늙은이와 부딪힌 것부터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 그 늙은이
가 내게 일부러 부딪혀 온 것 같단 말이야!"
그러나 이내 그는 고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어쨌든 이 벽옥마간이란 놈은 마음에 들었다. 그 늙은이를 다시 만나도 별
로 돌려 줄 마음이 없는 걸…!"
그는 히죽 웃으며 죽립을 다시 고쳐 썼다.
이어 그는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 천천히 진회하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조룡탄(釣龍灘)-!
이곳은 진회하 북서쪽에 위치한 험준한 협곡이다.
콰르릉… 쿠르르릉!
종산(鍾山)의 산록을 휘돌아 흐르는 물줄기는 장강과 합류하기 직전 흡사
용(龍)이 꿈틀거리는 것같이 거세고 힘찬 흐름을 보이고 있었다.
폭포같이 굽이치는 물줄기, 뽀얗게 일어나는 무수한 포말은 실로 일대장관
이었다.
그 옛날 한 명의 상고기인이 그곳에서 천년수룡(千年水龍)을 낚았다는 전설
이 있는 협곡이다. 그래서 그곳은 조룡탄(釣龍灘)이라 불려졌다.
"…!"
조룡탄 옆의 한 바위 위에는 폐포를 걸친 한 명의 죽립소년이 물가에 낚싯
대를 드리우고 앉아 있었다.
금릉일관옥(金陵一冠玉) 철운비, 바로 그였다.
이곳 조룡탄은 바로 철운비의 낚싯터였다. 언제부터인가 철운비는 남몰래
고독을 즐기게 되었다. 그러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 이곳 조룡탄이었다. 조
룡탄 일대의 지형은 극히 험해 인적이 얼씬도 하지 않는 탓이었다.
콰르르…!
조룡탄은 뽀얀 포말을 일으키며 기세 좋게 철운비의 앞으로 흘러가고 있었
다. 뿌연 물안개가 철운비의 온몸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그러나 철운비는 미동도 없이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물 속에 드리운 벽옥마간(碧玉魔竿)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조룡탄 건너편을 향하고 있었다. 그곳은 종산(鍾山)의 산록이
었다.
울창한 숲이 우거진 종산의 산록을 휘감고 한 채의 성채 같은 대장원이 우
뚝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철부(鐵府).>

울울창창한 원시림으로 뒤덮인 웅장한 대장원의 이름은 그러했다.


아니 그 장원의 이름을 정식으로 부르자면 흑룡왕부(黑龍王府)라 해야 한
다.
흑룡왕부의 주인은 흑룡왕(黑龍王) 철무정(鐵無情)이라는 인물로써 당금 황
제인 영락제의 조카뻘 되는 인척이었다. 영락제(永樂帝)의 막내누이가 바로
흑룡왕 철무정의 어머니인 것이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흑룡왕 철무정은 어렸을 때부터 대단한 신임을 받고 있
다고 한다.
그는 대명황실 사상 최고의 기재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가 무공을 연마했는지 어떤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무공을 제외하면 그 어떤 방면에도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의 그런 뛰어난 자질 때문에 영락제는 철무정을 친자식같이 총애해 왔다.
한데 지금으로부터 이십여 년 전, 한 가지 일로 인해 철무정은 영락제와 충
돌하여 그 관계가 소원해지고 말았다.
영락제는 철무정을 북원(北元)의 달단족(達丹族)의 왕녀(王女)와 정략결혼
시키려 했다.
한데 철무정이 이에 반발했다고 한다.
결국 그 일로 인해 흑룡왕부의 철씨일족은 권력에서 멀어진 것이었다.
권력에서 멀어졌든 어쨌든 흑룡왕부에는 가장 고귀한 명 황실의 일족들이
살고 있었다.
(…!)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철운비는 오래도록 흑룡왕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히죽 고
소를 지으며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후훗! 운명은 참으로 불공평하다. 같은 철(鐵)씨이건만…누구는 고귀한 황
족의 핏 줄을 타고나고 누구는 천한 기녀(妓女)의 음탕한 피를 타고나다니
…!"
그것은 다분히 자조적인 음성이었다.
흑룡왕부의 주인도 철씨(鐵氏), 철운비 자신도 철씨(鐵氏), 분명 같은 철씨
성을 타고 났으나 흑룡왕부의 일족과 철운비 자신의 신세는 하늘과 땅만큼
이나 달랐다.
흑룡왕부의 사람들은 황실의 일족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언젠가는 북경의 중
앙정계로 복귀하여 천하를 경영할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다.
반면 천하디천한 창기의 아들인 그 자신은 제아무리 영리해봤자 시골 촌구
석 향리의 말단 한직이 고작이다.
신분의 벽은 너무도 높고 완고하다. 철운비가 천하의 망나니가 된 것은 그
를 시기한 악동의 독설(毒舌) 때문이라기 보다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자기
신분의 한계를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스으… 스으…!
어둠의 장막은 갈수록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그 속에 흑룡왕부는 거대한
짐승같이 웅크리고 있었다.
조룡탄가에 앉은 철운비의 시선은 오래도록 그 흑룡왕부의 거대한 그림자를
쫓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철운비는 외로울 때면 흑룡왕부를 보게 되었다.
실상 그가 조룡탄을 찾아오는 것은 낚시질이 목적이 아니라 흑룡왕부를 보
기 위해서였다.
흑룡왕부!
그곳은 철운비를 끌어당기는 묘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철운비는 자신이 왜 흑룡왕부의 추위를 서성이는지 알지 못했다. 그것이 거
의 본능적인 귀소본능(歸巢本能)임을 그는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저곳에 한 번 들어가 보아야 하리라! 내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이
흑룡왕부 안에 있음이 분명한데…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철운비는 내심 염두를 굴리며 두 눈에 이채를 빛냈다. 그의 숨결은 자신도
모르게 다소 거칠어져 있었다.
흑룡(黑龍)의 왕부(王府)!
그곳에 자신의 운명이 연결되어 있음을 본능적으로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애송이 놈! 그 벽옥마간을 어디서 구했느냐?"
돌연 철운비의 등 뒤에서 얼음장같이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
철운비는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나타났을까?
화라락…!
철운비의 삼 장 뒤에는 한 명의 인물이 밤바람에 장포자락을 펄럭이며 유령
같이 서 있었다. 그 자는 흡사 어둠 속에서 홀연히 솟아난 듯이 그곳에 서
있었다.
나이는 삼십대 중반 정도, 일신에는 칙칙한 회색 장포를 걸쳤으며 허리춤에
는 폭이 좁고 길이가 각기 다른 두 자루의 칼을 꽂고 있었다.
철운비는 한눈에 그 자가 찬 칼이 왜국(倭國)의 인자(忍者)들이 사용한다는
인자쌍도(忍者雙刀)임을 알아보았다.
칼뿐만이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자의 틀어올린 상투까지도 왜국인의 그
것이었다.
회포인의 얼굴은 가늘고 강퍅한 인상을 물씬 풍겼다. 또한 뜬 듯 만 듯 가
늘게 찢어진 두 눈에서는 독사의 그것같이 섬뜩한 한광이 줄기줄기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
철운비는 자신이 마치 한 마리의 독사 앞에 노출된 듯한 오싹함을 느끼며
부지불식간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는 무섭도록 침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당신은 누구요?"
그는 짧은 동요를 가라앉히며 짜증이 서린 음성으로 회포인에게 물었다.
"당신?"
순간 회포인은 독사같이 가는 눈으로 철운비의 아래 위를 빠르게 훑어보았
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자신의 면전에서 이토록 건방진 어조로 뇌까린 자
는 없었다. 그를 부하로 부리고 있는 한 명 무서운 마인(魔人)조차도…!
(이놈 봐라!)
내심 놀라움과 흥미를 느끼며 회포인은 축축하게 젖어드는 듯한 음산한 음
성으로 입을 열었다.
"지옥천존(地獄天尊)의 세 그림자인 지옥삼패(地獄三覇)의 수좌 회의사신
(灰衣死神) 잔독(殘毒)이 본인이다!"
말을 하는 그의 눈가로 언뜻 한 줄기 회한의 빛이 스쳤다. 그는 자신이 남
의 수하로 있다는 사실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듯했다.
철운비의 날카로운 눈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읽어냈다.
(회의사신 잔독?)
그는 회포인의 이름을 입 안으로 되뇌었다.
그러나 지옥천존이니 지옥삼패니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철운비로서
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묻겠다. 너는 무영종(無影宗)이란 늙은 도적의 벽옥마간(碧玉魔竿)
을 어디서 얻었느냐?"
츠____ 으!
회포인, 즉 회의사신 잔독이 독사같이 차갑게 눈을 번뜩이며 재차 물었다.
철운비는 가볍게 눈썹을 모았다.
(무영종? 아까 길거리에서 부딪힌 그 재수없는 늙은이의 이름이 무영종이었
는가?)
그는 힐끗 벽옥마간을 바라보며 예의 괴노인을 떠올렸다.
이어 그는 벽옥마간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퉁명스런 음성으로 말했다.
"난 무영종이 누군지도 모르오. 이 낚싯대는 웬 미친 늙은이가 내 낚싯대와
바꿔간 것뿐이오!"
"…!"
회의사신 잔독은 음울한 시선으로 말없이 철운비를 주시했다. 그런 그의 가
는 눈꼬리가 문득 가늘게 떨렸다.
(대단한 자질을 지닌 놈이다. 살려둔다면 후일 나 잔독의 야심에 큰 화근이
될 수도 있는 놈이다!)
그의 숨결이 다소 거칠어졌다.
회의사신은 남의 수하로 만족할 위인이 아니었다. 지금은 다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지옥천존(地獄天尊)이란 무서운 마인의 수족 노릇을 하고 있
을 뿐이었다.
천하를 도모해 보고자 하는 웅대한 포부를 지닌 만큼 그의 시선은 남달리
날카로왔고, 그래서 지금 눈앞의 폐포소년이 대단한 자질을 지닌 기재임은
한눈에 알아본 것이었다.
그의 마음은 기재를 아끼는 마음과 추악한 질투심으로 어지러운 상태였다.
그 갈등은 비록 짧았으나 그의 심중을 혼란케 만들었다.
(적수는 적을수록 좋다. 우리 동영(東瀛) 은밀종(隱密宗)의 부활을 위해서
는 이 어린 잠룡을 죽여야만 한다. 하지만… 정말 아까운 놈이다!)
회의사신의 손이 생전 처음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스윽…
그의 왼손이 천천히 자신의 사신쌍인(死神雙刃)의 손잡이로 옮겨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철운비는 긴장감으로 입 안이 바짝 타는 느낌이었다.
(이 자… 나를 해치려 한다!)
그는 회의사신 잔독이 자신에게 살심을 품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
로서는 회의사신의 살수를 피할 방법이 없었다.
회의사신 잔독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가장 빠른 쾌도술(快刀術)을 지닌 자
였다. 그는 좌수도법(左手刀法)으로 가히 천하무적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자신의 실력의 오 푼 이상을 내보인 적이 없었다. 세인들
이 아는 것은 그의 진정한 실력의 반도 되지 못했다.
그런 그가 남의 밑에 있는 것은 한 가지 목적 때문이었다. 그 한 가지 목적
때문에 그는 스스로를 숨기고 있는 것이었다.

∑ 제 2 장 낙월부인(落月婦人)의 비밀(秘密)

스읏!
회의사신(灰衣死神) 잔독의 좌수가 거의 칼의 손잡이에 이르렀다.
"…"
(…!)
철운비와 회의사신의 시선이 한 순간 허공에서 불꽃을 튀기며 뒤엉켰다.
철운비는 잘 알고 있었다. 회의사신의 손이 칼에 닿는 순간 자신이 몸뚱이
가 여지없이 두 동강날 것임을…!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죽립 아래의 그의 눈빛은 추호도 흔들림임을 보이
지 않았다. 그는 그저 남의 일인 듯 무덤덤한 표정으로 회의사신을 바라보
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어쩌면 그는 회의사신이 자신을 고통없이 죽여주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달리 조숙한 탓에 자신이 어머니와 그녀를 돈으로 산 어느 남정네 사이의
욕정의 산물임을 잘 아는 철운비다.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를 한스럽게 생각하는 그이기에 눈앞에 보
이는 죽음조차도 전혀 두렵지 않은 것이다.
두려움은 미련에서 나온다. 그럴진대 이 세상에 한 점 미련도 없는 철운비
에게 무슨 두려움이 있겠는가?
팟!
드디어 회의사신의 좌수가 사신쌍인(死神雙刃)의 손잡이에 닿았다. 절대절
명의 위기였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웬… 놈이냐?"
갑자기 회의사신은 어둠 속을 향해 대갈일성을 터뜨렸다.
번____쩍!
동시에 그의 허리춤에서 무서운 도광(刀光)이 폭출하며 벼락같이 허공을 그
어갔다. 그의 발도(拔刀)는 얼마나 빨랐는지 그저 한 줄기 빛이 번뜩이는
것만 볼 수 있었을 뿐이다.
따당…! 피유유우…웅!
직후 요란한 금속성과 함께 비단폭 찢어지는 듯한 소성이 적막한 밤하늘을
뒤흔들었다.
파____앗!
그와 함께 무엇인가가 회의사신의 칼에 부딪혀 한쪽 옆의 바위에 깊숙이 박
혔다.
그것은 한 장의 종잇장같이 얇은 쇳조각이었다. 크기는 손바닥만한 정도인
데 전체적으로 회색빛이 도는 반투명한 물체였다.
그 쇳조각을 본 순간,
"번뇌… 철편(煩惱鐵片)?"
부르르…!
회의사신의 전신에 격렬한 떨림이 일었다.
"번뇌… 살황(煩惱煞皇)! 그 자가… 나타나다니…!"
그는 마치 실성한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의 가늘게 찢어진 독사의 눈
에는 은은한 공포의 빛마저 서려 있었다.
철운비는 그런 그의 모습에 내심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번뇌살황(煩惱煞皇)? 그가 어떤 인물인데 저 아수라같은 자를 공포에 떨게
만든단 말인가?)
바로 그 때였다.
"흐흐! 잔독! 정말 오랜만이구나. 용기가 있다면… 봉황대(鳳凰臺)로 오너
라…!"
어둠 속에서 한 줄기 음울한 웃음소리가 일더니 점점 멀어져 갔다. 그것은
흡사 십팔층 지옥에서 울려나오는 듯 음산하고 공허한 웃음이었다.
회의사신 잔독의 전신이 일순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다.
"육합번뇌후(六合燔惱吼)! 정… 정말… 그 늙은이로군!"
그는 공포의 음성으로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히고 있었다.
문득 그는 철운비를 흘깃 돌아보았다. 그의 가늘고 매서운 눈은 더 이상 살
기를 띠고 있지 않았다.
(고독패왕(孤獨覇王)에게 죽은 줄 알았던 번뇌살황이 살아 있다니… 어쩌면
오늘 밤이 나의 마지막 밤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그의 눈길이 어두워졌다.
회의사신 잔독이 무서워하는 자는 하늘과 땅 사이에 단 일 인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인물은 십여 년 전 고독패왕(孤獨覇王)이라는 한 명의 무서운 승
부사와 싸워 패해 죽었다고 알려졌다.

-번뇌살황(煩惱煞皇)!

그가 바로 번뇌살황이었다.
더 이상 무서울 수 없다는 암살(暗殺)의 제왕! 중원의 모든 자객들이 신적
인 존재로 우러러보는 우상이 바로 그였다.
역시 자객도의 인물인 회의사신 잔독이 두려워하는 단 한 명의 인물이 바로
그 번뇌살황이었다.
"원한다면… 가 주마, 번뇌살황!"
철운비를 일별하던 회의사신은 음울하게 중얼거리며 허공으로 신형을 떠올
렸다.
스읏!
단지 그의 어깨가 한 번 흔들했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는 어둠 저편을 날아
가고 있었다.
"…!"
철운비는 회의사신의 절정경공에 너무도 놀라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한동안 회의사신이 사라진 곳을 망연히 주시
하고 있었다.
헌데 다시 고개를 돌리던 철운비는 흠칫했다. 그의 눈에 한 권의 낡은 책자
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회의사신이 서 있던 곳에 떨어져 있었다.
철운비는 의아함을 느끼며 그 책자를 집어들었다. 그것은 무엇인가 극히 부
드러운 가죽으로 만든 한 권의 비급이었다.

<좌수살법(左手殺法).>

비급의 표지에는 그와 같은 글이 쓰여져 있었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비급을 살펴보던 철운비는 순간 아연실색하고 말았
다.
(이것은 사람의 가죽이다!)
놀랍게도 그 비급은 인피(人皮), 그것도 여인(女人)의 부드러운 인피를 벗
겨 만든 것이 아닌가?
철운비는 그것을 깨닫고 숨이 멎을 듯 놀랐다. 허나 이내 그는 침착을 되찾
으며 비급을 들쳐보았다.
좌수살법(左手殺法)이란 비급 안에는 사식(四式)의 도법(刀法)과 함께 동영
(東瀛) 막부(莫府)의 인자(忍者)들이 사용하는 인자술(忍者術)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름하여 살풍인법(殺風忍法)이라 불리는 것이 그것이었다.
잠입(潛入), 정탐(偵探), 이간(離間), 살인(殺人), 함정구축 등등 사법(邪
法)이라고 천대받는 가장 잔혹하고 신랄한 수법이 그 비급의 거의 전부를
채우고 있었다.
철운비는 침음하며 눈썹을 모았다.
(회의사신 잔독은 일부러 이것을 떨어뜨리고 갔다. 왜 그랬을까?)
그는 비급을 덮고 바위에 박힌 예의 철편을 주시했다.
(모든 것은 이것 때문이다! 회의사신은 번뇌살황(煩惱煞皇)이라는 이 쇳조
각의 주인에게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비급을 남기고 간 것이
다!)
그의 추측은 예리하고도 정확했다.
회의사신은 번뇌살황과의 승부에서 살아남는다는 확신이 없었고, 자신이 죽
을 경우 좌수도법이 절전될 것을 우려하여 그 비급을 남겨두고 간 것이다.
철운비의 신분이 무엇이든간에 자신에게로 이어져온 한가닥의 사문 절기를
실전시킬 수는 없는 일이기에…!
팟!
철운비는 회색빛이 도는 쇳조각, 즉 번뇌철편을 바위에서 뽑아냈다.
그것은 종이같이 얇고 반투명했으며 일견하여 아주 약해 보였다. 허나 놀랍
게도 그것은 마치 두부에 박히듯 바위를 뚫고 들어간 것이 아닌가?
"어쨌든 이 쇳조각이 내 목숨을 구했군!"
철운비도 번뇌철편을 만지작거리며 고소를 지었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크녠! 그렇다! 네 녀석은 노부에게 생명의 빚을 진 것이다!"
돌연 어둠 속에서 괴악한 노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철운비는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음성이 바로 저녁 무렵 자신과 부
딪혔던 마의노인의 그것인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번뇌살황이 아니라 늙은이였소? 이 번뇌철편을 던진 그 장본인이…?"
그는 놀란 음성으로 어둠 속에 대고 물었다.
그러자 어둠 속 어딘가에서 재차 마의노인의 노갈이 터져나왔다.
"고얀 놈! 생명의 은인보고 늙은이라니? 정말 예의가 없는 놈이로군!"
철운비는 쓸쓸한 고소를 지었다.
(당했군! 무영종(無影宗)이란 저 늙은이는 일부러 내게 자신의 신물을 주어
회의사신 잔독의 표적이 되게 만들었다. 그리고 회의사신이 나를 해치려는
순간 번뇌철편을 날려 그자를 쫓아보낸 것이다!)
그의 영민한 두뇌는 이내 전후 사정을 파악해냈다.

-무영종(無影宗)!

그는 한 가지 물건 때문에 전 무림인들의 표적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추적자는 지옥천존(地獄天尊)이란 자가 보낸 살수
회의사신(灰衣死神) 잔독이었다.
이에 무영종은 철운비에게 자신의 신물인 벽옥마간(碧玉魔竿)을 주어 회의
사신 잔독의 추적을 따돌린 것이었다.
그리고 회의마신이 철운비를 해치려는 순간 회의사신이 가장 무서워하는 번
뇌살황이란 인물의 신표(信標)를 던져 회의사신을 쫓아보낸 것이었다.
그 신표가 바로 번뇌철편(煩惱鐵片)이었다.

"크녠! 어쨌든 네놈은 노부 무영종(無影宗)에게 생명을 빚졌다. 게다가 덤


으로 회의사신(灰衣死神)의 무적도법까지 얻었으니… 그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다시 어둠 속에서 괴악한 무영종의 음성이 이어졌다.
"…!"
철운비는 온 청력을 기울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허나 그는 무영종이 어디에 은신해 있는지 알아낼 수 없었다.
무영종의 경공과 은신술은 천하제일이었다. 그가 몸을 숨기려 마음만 먹으
면 아무도 그를 찾아내지 못한다.
철운비는 이내 그것을 깨닫고 무영종의 종적을 찾는 것을 포기했다.
이어 그는 한숨을 내쉬며 퉁명스런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요구가 무어요? 재수없는 늙은이…!"
"킬킬… 역시 네놈은 머리가 좋다. 노부는 네놈에게 한 가지 시킬 일이 있
다."
어둠 속에서 무영종의 득의에 찬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무엇이오?"
"여기서는 말할 수 없다! 내일 한 곳으로 나를 만나러 와라. 그때 네놈의
목숨을 구해준 대가를 치루게 해 주겠다."
무영종의 뒷말이 그에게 미련을 던져주었다.
"어디 가면 늙은이를 만날 수 있소?"
철운비는 급히 외쳐 물었다.
"금릉부중(金陵府中)의 감옥(監獄)으로 와라! 그곳에 오면 노부를 볼 수 있
다. 어떻게 들어든 그거야 네 재주에 달린 문제지만…!"
무영종의 괴악한 목소리는 점차 멀어졌다.
"감옥으로… 오라고?"
그의 망연한 음성은 재차 이어졌다.
"명심해라. 금릉부중(金陵府中)의 뇌옥이다. 그리고 그 벽옥마간(碧玉魔竿)
의 손잡이를 오른쪽으로 돌려보아라. 좋은 일이 생길 테니…!"
그 말을 끝으로 무영종의 음성은 여운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휘이잉!
장내에는 다시 밤바람 소리만 적막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
철운비는 한동안 어둠 속에 멍청히 서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쓸쓸하게 고
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나 철운비보다 더한 괴짜가 있을 줄 몰랐군!"
이어 그는 조룡탄에 드리운 벽옥마간을 거둬들였다.
"손잡이를 돌려보라고 했겠다."
끼릭…!
그는 벽옥마간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힘껏 오른쪽으로 돌렸다.
파___ 팟!
순간 갑자기 벽옥마간 전체가 손잡이 속으로 말려들어가 버렸다.
"엇! 이것 봐라!"
철운비는 경이의 표정으로 나직한 탄성을 발했다. 일 장 길이의 벽옥마간이
순식간에 단번에 두 자 정도의 길이로 축소된 것이 아닌가?
실로 믿어지지 않는 놀라운 일이었다.
철운비는 두 눈에 이채를 발하며 중얼거렸다.
"벽옥마간! 볼수록 범상치 않은 물건이다. 아마 이것도 원래는 무영종이란
그 늙은이의 것이 아니라 어디선가 훔친 물건인 듯하구나!"
그는 고소를 지었다.
"어쨌든 이놈은 점점 내 마음에 든다!"
그는 만족스러운 듯 축소된 벽옥마간을 쓰다듬었다.
이어 그는 흘깃 금릉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감옥으로 만나러 오라고 했겠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죽립 아래의 그의 두 눈이 스산하게 번뜩였다.
"후훗! 좋아. 원한다면 만나러 가 주지! 재수없는 늙은이!"
철운비는 히죽 웃으며 다시 죽립을 깊숙이 눌러썼다.
이어 그는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 어둠이 완연한 조룡탄에서 멀어져 갔다.
"한 번 금릉부중(金陵府中)의 뇌옥을 구경해 보는 것도 괜찮겠지?"
그의 음성은 어둠 속에 묻혀 점점 희미해졌다.
콰르르르릉!
조룡탄의 물줄기만이 여전히 뽀얀 포말을 일으키며 어둠 속에 요동치고 있
었다.
그러나 철운비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조룡탄에서 겪은 이 일련의 사건이
그의 인생 전체를 뒤바뀌어 버릴 줄은…!

진회하(秦淮河)-!
시간은 이미 사경(四更)이 지나 새벽이 다가오건만 여전히 진회하의 거리는
흥청대고 있었다.
눈을 어지럽히는 현란한 홍등의 불빛들, 기녀들의 뇌쇄적인 웃음소리와 취
객들이 질탕한 음성 속에 밤은 깊을 대로 깊어만 갔다.

<낙월정(落月亭).>

그곳 역시 화려한 홍등이 밝혀져 대낮같이 환했다.


매일밤과 마찬가지로 이 밤도 금릉제일미인 낙월부인(落月婦人) 수운월(水
雲月)의 미태를 보러 몰려온 유객들로 낙월정은 정신없이 북적거리고 있었
다.
헌데 그 낙월정의 후원에는 외부의 분위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채의
전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요란하고 화려한 낙월정 안에 그런 곳이 있을까 싶을 만큼 조용하고 아늑한
별원(別院), 그곳은 바로 철운비와 수운월 두 모자가 기거하는 곳이었다.

<잠룡헌(潛龍軒).>

전각은 그렇게 이름 불리워졌다.


전각의 주위는 조용했다. 깊을 대로 깊은 어둠만이 소리없이 전각의 뜰 앞
에 내려 쌓일 뿐이었다.
"운비는 또 조룡탄에서 밤을 지새우는 모양이구나!"
문득 주위의 적요를 깨며 한 줄기 우울한 탄식이 들렸다.
사르르…!
이어 한 명의 여인이 잠룡헌의 침실로 사뿐히 들어섰다.
경국지색(傾國之色)!
그 표현이 너무도 적절하게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나이는 이십 전후 정도 되었을까? 은은한 우수와 기품을 지닌 아찔할 정도
로 아름다운 소부였다.
너무나 아름답고 화사하여 사악하게까지 느껴지는 이 미녀는 일신에 하늘색
금장을 걸치고 있었다. 그 하늘색 궁장 안에 감싸인 그녀의 몸매는 아주 풍
만하고 뇌살적이었다.
그것은 미소부가 용모와는 달리 상당히 나이가 들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
다.
하늘색 궁장의 그림 같은 미소부, 대체 그녀는 누군가?

-낙월부인(落月婦人) 수운월(水雲月)!

그렇다!
그녀가 바로 낙월부인 수운월이었다.
진회하 제일의 야화(夜花)!
그녀를 한 번 안아보지 못해 상사병이 걸린 고관대작들이 부지기수라는 것
은 잘 알려진 얘기였다.
그 소문이 결코 부끄럽지 않을 만큼 수운월은 빼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었
다.
수운월이 진회하게 처음 나타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십사 년 전이었다.
그때 수운월은 핏덩이인 철운비를 데리고 나타났다.
한데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그녀의 용모는 십사 년 전인 그 때나 지금이나
전혀 변함이 없는 것이 아닌가? 변한 것이 있다면 보기 좋게 살이오른 몸매
뿐이었다. 지금의 그녀는 예전에 비해 한층 완숙하고 풍만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혹자는 그녀가 무림의 전설로 내려오는 주안술(朱顔術)을 연마한 것이라고
도 했다.
그러나 정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온통 신비로운 비밀에 싸인 금릉제일염! 그녀가 바로 낙월정의 주인이기도
한 낙월부인 수운월이었다.

수운월은 텅 빈 침실을 돌아보며 상념 어린 우울한 눈빛을 지었다.


그녀가 들어선 곳은 바로 철운비의 침실이었다. 수운월은 덩그라니 비어 있
는 철운비의 침상을 내려다보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촉촉한 두
눈에 갈등과 회한의 빛이 엉켜 들었다.
"수운월아 수운월아! 너는 원래 운비를 망가뜨려 그 야속한 사람에게 복수
하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아이가 방황하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다니…!"
그녀는 우울하게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한데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철운비를 타락시켜 복수한다니…? 수운월은
대체 누구에게 복수를 한다는 말인가? 친 모자지간이라고 알려진 철운비와
수운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이 있는 것일까?
수운월의 고운 옥용에 갈등 어린 우수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아이는 커갈수록 그 사람을 닮아 간다. 나 사황녀(邪皇女) 수운월의 방
심을 무참히 짓밟는 그 무정한 사람을… 그래서 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탄식했다.
빠직!
중얼거리는 그녀의 봉목에 새파란 광망이 흘렀다. 그 눈빛에는 끔찍한 사기
(邪氣)가 실려 있었다. 어지간한 사람이 그 눈빛을 접했다면 그대로 심장이
파멸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만큼 그녀의 눈빛에는 무서운 마력(魔力)이 실
려 있는 것이다.
일개 평범한 기녀로 알려진 수운월이 그런 무서운 눈빛을 지녔다는 것은 아
주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사황녀(邪皇女)!

그것이 수운월의 본래 신분일까?


사실 그녀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사라락…!
수운월은 흐르듯 교구를 움직여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열린 창문 밖으로 진회하의 물안개가 뿌옇게 피어 오르는 것이 보였다.
수운월은 어두운 봉목으로 북쪽을 주시했다. 그곳은 종산(鐘山)이 있는 쪽
이었다.
"철… 무정(鐵無情)! 그 사람 이름이 묘하게도 종산 흑룡왕부(黑龍王府)의
흑룡왕야(黑龍王爺)의 이름과 똑같다. 이것이 과연 우연일까?"
그녀는 우울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종산 쪽을 바라보았다.

-철무정(鐵無情)!

그것은 수운월이 죽어도 잊지 못할 이름이었다.


십수 년 전, 수운월은 한 명의 젊고 고독한 승부사를 짝사랑했다. 그 젊은
패웅의 이름이 바로 철무정이었다.
어느날 철무정은 수운월의 사부를 찾아와 도전했었으며 그녀가 천하최강이
라 믿고 존경하던 그녀의 사부를 일검(一劍)에 무참히 패배시켰다.
사부의 패배! 그것은 수운월에게 있어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보다 당혹하게 만든 것은 자신이 한눈에 그 젊은 패웅을 사
랑하게 된 사실이었다.
-고독패왕(孤獨覇王) 철무정(鐵無情)!

그것이 수운월이 사랑한 고독한 승부사의 이름이었다.


수운월은 창 밖에 시선을 던진 채 깊은 생각에 빠져든 듯했다.
(곧… 소수마공(素手魔功)이 절정에 이른다. 그렇게 되면 내가 직접 흑룡왕
부에 잠입하여 흑룡왕야와 그이가 동일인인지 아닌지 확인해 볼 수 있다!)
츠____ 읏!
그녀의 봉목이 새파랗게 광망을 쏟아냈다. 그와 함께 그녀의 숨결이 다소
거칠어졌다.
그녀는 복수일념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다고 할 수 있었다.
지금 그녀는 한 가지 무서운 사공(邪功)을 연마중이었고 그것은 거의 완생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그렇게 되면 그 옛날 고독패왕에게 복수를 할 가능
성이 생기는 것이었다.
복수를 생각하자 수운월은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그녀
는 외인이 잠룡헌에 접근함을 미처 감지하지 못했다.
그때,
"흐흐… 여기로 도망쳐 와 있었군!"
문득 수운월의 등 뒤에서 술취한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
그제서야 수운월은 흠칫 생각에서 깨어나며 뒤를 돌아보았다.
침실의 입구에는 한 명의 화복(華服)청년이 문가에 기대서 있는 것이 보였
다. 제법 반듯하고 영준한 용모를 지닌 자였다.
그러나 지금 그의 두 눈은 취기과 욕정으로 붉게 달아올라 거슴츠레하게 흐
려져 있었다.
화복청년을 본 수운월은 아미를 살풋 찌푸리며 나직한 교갈을 터뜨렸다.
"주상공! 이게 무슨 짓이에요?"

-주천화(朱天華)!

이것이 화복청년의 이름이었다. 황실의 먼 종친 중 한 사람으로 당금 금릉


왕부(金陵王府) 금릉왕(金陵王) 주태사(朱太師)의 외아들이었다.
그는 대단한 호색가였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어떤 방법으로든 욕심
을 채우고 만다.
그는 오래 전부터 수운월에게 음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수운
월은 교묘한 수법으로 그를 피해 왔다.
오늘도 주천화는 초저녁부터 낙월정에 나타나 수운월에게 추근거렸다. 이에
견디다 못한 수운월은 이곳 잠룡헌으로 피해 버린 것이었다.
"흐흐! 고고하신 낙월부인마님! 지금까지는 잘도 본공자를 피해 왔지만 오
늘은… 안 돼!"
주천화는 히죽 웃으며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것을 본 수운월의 옥용이 살짝 변했다. 아무래도 주천화를 피하는 것이
쉽지 않겠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흐흐! 순순히… 본공자에게 안기는 것이 좋을 게야!"
주천화는 욕정에 충혈된 눈으로 침까지 흘리며 수운월에게로 다가섰다.
"…!"
수운월은 역겨운 술냄새에 옥용을 찌푸리며 비칠 구석으로 밀려났다.
(바득! 더러운 사내놈, 명을… 재촉하는구나!)
그녀의 눈꼬리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여차하면 그녀는 무공을 쓸 작정
으로 소매 속의 섬섬옥수에 공력을 모았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주… 천화!"
돌연 문 쪽에서 얼음장같이 싸늘한 호통이 터졌다.
"웬 놈이냐?"
"…!"
주천화와 수운월은 깜짝 놀라며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 두 사람의 눈에 한 명의 폐포소년이 문가에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
다.
허름한 폐포에 머리에는 낡은 죽립을 눌러쓴 소년이었는데 죽립 아래로 한
쌍의 봉목이 새파란 살기를 번뜩이고 있었다.
철운비!
폐포소년은 바로 조룡탄을 떠나온 철운비였다.
한데 철운비의 왼손에는 한 자루 새파랗게 날선 비수(匕首)가 움켜쥐어져
있었다.
그 비수를 보는 순간 수운월은 철운비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닫고 안색이
홱 변했다.
(칼을…! 설마 저 아이는…!)
그녀는 어떻게든 철운비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어… 랏! 쓰레기!"
번쩍!
하지만 그때 철운비가 사나운 일갈을 터뜨리며 그대로 주천화에게 돌진해
왔다.
다음 순간,
"아… 안 돼! 케___ 에엑!"
두 손을 허위적대던 주천화의 입에서 돼지 멱따는 듯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철운비의 작은 몸이 옆구리로 파고드는 순간 격렬한 통증이 그곳에 느껴진
것이었다.
"너… 너… 잡종… 이…!"
주천화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철운비를 내려다 보았다.
철운비는 그런 주천화를 노려보며 싸늘하게 웃었다.
"네놈이 어머니 주위에서 추근대는 꼴이 늘 보기 싫었다!"
팍!
말과 함께 그는 주천화의 옆구리에서 비수를 뽑아냈다.
퍼___ 억! 쿠웅!
그러자 시뻘건 피가 확 번져오르며 주천화는 뒤로 벌렁 넘어졌다. 삽시에
침실은 흥건한 피로 물들었으며 역겨운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이 모두가 실
로 그것은 찰나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까아악!"
"살… 살인이다!"
직후 철운비의 등 뒤에서 여인들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분분히 터져나왔
다.
잠룡헌의 변고를 어느새 알아차리고 급급히 달려온 기녀들이 방 안에 피투
성이로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고 비명을 내지른 것이었다.
삽시에 낙월정은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
"…!"
그 속에 철운비와 수운월 두 모자는 말없이 우뚝 선 채 서로를 주시하고 있
었다.
철운비의 눈빛은 아무런 표정없이 무심해 보였다.
그러나 수운월의 봉목에는 격렬한 파문이 일고 있었다.
따당…!
문득 철운비는 쥐고 있던 비수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수운월을 향해
히죽 웃어 보였다.
"어쨌든 저는. 당신의 아들입니다. 당신을 지켜드리는 일은…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어머니!"
이어 그는 홱 몸을 돌려 잠룡헌 밖으로 걸어나갔다.
"흐윽…!"
수운월의 입에서 오열에 가까운 낮은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성큼성큼 시야에서 멀어지는 철운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수운월의 두 눈에
격렬한 떨림이 일었다.
이 순간 그녀의 눈에는 자그만 철운비의 등이 마치 산악같이 거대해 보였
다. 이미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아들 철운비는 너무 커버린 것이었
다.
수운월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나쁜 자식! 말투까지 제 아버지를 닮아가다니…!)
주르르…!
마침내 그녀의 두 볼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를 눈물 흘리게
하는 것은 철운비가 그녀의 방심을 찢어 놓은 누군가와 너무도 흡사하게 닮
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철운비는 잠룡헌 밖으로 나서며 히죽 웃었다.


(후훗! 이것이 일석이조(一石二鳥)라는 것인가?)
그의 전면으로 신고를 받은 몇 명의 관병(官兵)이 바쁘게 달려오는 것이 보
였다.
기이한 여운을 내포한 철운비의 웃음, 그것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철운비
자신밖에는 없을 것이다.
어느덧 동녘이 훤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금릉부증(金陵府中)의 뇌옥(牢獄)-!
음습하고 침침한 지하에 암울하게 뻗어 있는 통로 양편으로 수십 개의 뇌옥
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린애 팔뚝만한 철창이 쳐진 뇌옥 안은 수많은 죄수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음습한 지하뇌옥에 아침이나 밤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었다.
새벽 무렵, 싸늘한 한기 속에 뇌옥 안의 죄수들은 대부분 잠들어 있었다.
철컹…!
문득 뇌옥 입구의 육중한 철문이 쇳소리를 내며 열려졌다.
이어 크고 작은 두 개의 인영이 뇌옥 안으로 들어섰다. 음산한 인상에 관복
을 걸친 장한과 창백한 안색의 폐포소년이었다.
폐포소년은 물론 바로 철운비였다.
죽립을 벗어 버린 그의 모습은 수려하고 영준한 용모였다. 지나치리만치 희
고 깨끗한 피부, 선이 분명하고 단아한 오관, 약간 그늘진 눈매와 여인의
그것처럼 붉디붉은 입술의 조화가 마력적인 아름다움마저 풍긴다.
철운비를 대동한 관복의 장한는 금릉부중의 간수였다.
철운비는 어두운 통로를 따라 걸으며 무심한 시선으로 뇌옥 안을 둘러보았
다.
(이 안 어딘가에 그 늙은이가 있겠군!)
그때 그의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의 간수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말
했다.
"철운비! 네가 한 짓을 탓할 생각은 없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어. 천하의
금릉왕야(金陵王爺)의 외아들을 찌르다니… 쯧쯧!"
그는 안됐다는 듯 혀를 차며 철원비를 통로 맨 끝의 뇌옥 앞으로 데리고 갔
다.
뇌옥 안에 몇 명의 죄수들이 초라하게 쪼그린 채 잠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간수는 힐끗 철운비의 옆모습을 일별하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천화가 죽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만일 죽기라도 한다면 너는 참
수형이야!"
철컹!
그는 혀를 차며 철창문을 열었다.
철운비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이었다.
"그는 죽지 않소!"
그는 철창 안을 들여다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그 말에 간수는 의아한 눈으로 철운비를 내려다보았다.
"죽지 않는다고?"
철운비는 힐끗 간수를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죽지 않도록 찔렀으니까 죽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오?"
이어 그는 의아한 교정의 간수를 뒤로하고 성큼 철장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철운비는 의학에도 이미 정통해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인체의 어디를 찔
러야 죽지 않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실을 어찌 일개 간수가 알 수
있으랴?
철운비는 히죽 웃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그 색골 황족나부랑이 때문에 참수당한다면 정말 억울한 일이지.)
이어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뇌옥 안을 둘러보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간수는 알 수 없다는 듯 곤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철창문을 다시 열쇠로 잠궜다.
"어쨌든… 각오는 하고 있어라. 금릉왕야가 이 일을 그냥 넘기지만은 않을
테니까… 쯧쯧!"
이어 그는 혀를 차며 몸을 돌려 뇌옥에서 멀어져 갔다.
"…!"
하지만 철운비는 간수 쪽은 아예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는 간수가 사라지고 나자 눈을 빛내며 주위의 죄수들을 눈여겨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죄수들은 대부분 쪼그린 채 잠들어 있어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었
다.
(여기까지 오기는 왔는데 그 늙은이를 어떻게 찾아내지?)
철운비는 난감한 듯 검미를 모았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크녠! 왔구나 애송이!"
문득 한 쪽에서 괴악한 노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
철운비는 흠칫하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가 갇힌 뇌옥의 안쪽에서 한 명의 마의노인이 잠든 죄수들 틈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인상의 보잘 것없는 노인이었다. 허름한 마의에 구부정
한 허리, 그러나 기이하게도 그의 얼굴 전체에는 검푸른 기운이 서려 있었
다.
"역시… 늙은이었군!"
철운비는 입술을 실룩이며 마의노인 앞으로 다가갔다. 마의노인이 바로 저
녁 무렵 길거리에서 자신과 충돌하여 낚싯대를 바꿔치기한 장본인임을 알아
본 것이었다.
마의노인은 힘겹게 벽에 기대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바로 노부다. 네… 놈은 노부의 예상보다 빠르게 나타났다!"
그는 철운비를 바라보며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
철운비는 침중한 안색으로 마의노인의 앞에 앉았다. 그의 검미가 미미하게
찌푸러졌다.
(안 좋은데… 이 늙은이는 무엇인가 지독스러운 경력에 내부가 온통 으스러
졌다. 하루가… 가기 전에 죽는다!)
그는 내심 염두를 굴리며 소리없는 신음을 발했다. 그는 의술에 정통해 있
었다. 때문에 첫눈에 마의노인이 오래 살지 못할 것임을 간파한 것이었다.
문득 마의노인은 철운비의 침중한 눈빛을 느꼈는지 입술을 실룩이며 입을
열었다.
"빌어…먹을!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애송이! 천하의 무영종(無影宗)이 너
같은 어린 놈의 동정을 받을만큼 불쌍해지지는 않았다!"
그 말에 철운비는 고소를 지었다.
"어련하시겠소? 한데 무엇 때문에 나 철운비를 이곳까지 부른 것이오?"
마의노인, 무영종은 지체치 않고 대답했다.
"한 가지 물건을 노부 대신 다른 사람에게 전해 달라고 네놈을 불렀다."
말을 하며 그는 허리춤에서 하나의 물건을 뽑아들었다. 그것은 무명천으로
둘둘 만 물건으로 언뜻 보아 낫(鎌)같이 보였다.
"이것을… 고독… 패왕(孤獨覇王)이란 사람에게 전해 주면 된다. 그러면 우
리 사이에는 줄 것도 받을 것도 없게 되는 것이다!"
무영종은 숨을 헐떡이며 예의 낫같은 물건을 철운비에게 내밀었다.
"고독… 패왕?"
철운비는 물건을 받아들며 고개를 갸웃하며 되뇌었다. 무림의 일을 알지 못
하는 그로서는 당연히 고독패왕이란 이름을 알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강호의 물을 조금이라도 먹은 사람이라면 고독패왕이란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고 말 것이다.
십칠 년 전!
강호무림은 갑자기 세상에 나타난 한 명의 무서운 승부사(勝負士)가 일으킨
돌풍으로 풍비박산이 났었다.

-고독패왕(孤獨覇王)!
한 자루 철검(鐵劍)을 둘러메고 무림에 발을 들여 놓은 이 인물의 출신내력
에 대해서는 누구도 아는 바가 없었다.
알려진 것이라고는 그가 늘 혈혈단신이라는 점과 그의 애병(愛兵)인 녹슨
철검의 이름이 마종지검(魔宗之劍)이라 불린다는 사실뿐이었다.
고독패왕이란 이름도 그가 단 한 명의 방수도 없이 강호를 독행(獨行)한 데
서 연유한 이름일 뿐이었다.
그의 마종지검은 짧은 시간동안 실로 무수한 무림인들을 쓰러뜨렸다.
기라성 같던 뭇 무림명숙들이 그의 일초반식도 받지 못하고 거꾸러졌다.
가장 먼저 고독패왕의 손아래 패한 인물은 재림사황(再臨邪皇) 나극이란 인
물이었다.

-재림사황(再臨邪皇) 나극(羅極)!

그가 누군가? 오패왕의 후예들인 오대무벌보다도 오히려 더 무섭다는 배교


(拜敎)의 교주가 아니던가?
그는 환술(幻術)과 요악한 사법(邪法)으로 천하무적이라 알려진 지 오래였
다.
한데 믿을 수 없게도 그 전설적 사파의 제왕인 재림사황 나극이 고독제왕의
손아래 패한 것이었다.
나극은 재수없게도 고독패왕의 대파천행(大破天行)의 첫 제물이 되고 만 것
이다.
고독패왕이 나극을 쓰러뜨렸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무림인들은 그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독패왕이 두 번째 표적을 쓰러뜨렸을 때 무림인들은 더 이상 의심
할 수가 없었다.

-번뇌살황(煩惱煞皇)!

하늘이라도 죽일 수 있다는 전율의 대살수(大煞手)!


번뇌살막(煩惱煞幕)이라는 가장 무서운 청부살인 집단의 총수가 바로 이 인
물이다. 마음만 먹으면 십팔층 지옥의 아수라라도 죽일 수 있다고 알려진
밤의 제왕이 번뇌살황인 것이다.
한데, 그 번뇌살황이 오히려 어둠 속에서 고독패왕의 습격을 받고 치욕의
패배를 맛보아야만 했다.
그 사실은 무림인들을 아연케 하기에 충분했다. 하나 그것은 겨우 신황의
시작에 불과할 뿐이었다.
고독패왕은 흑도쌍황(黑道雙皇)이라 불리던 재림사황 나극과 번뇌살황을 쓰
러뜨린 후 흡사 폭풍같이 무림을 휩쓸었다.

-소림(少林)의 활불 천뢰법존(天雷法尊)!
-녹림(綠林)의 제왕 녹림무영종(綠林無影宗)!
-마도연맹(魔道聯盟)의 총수 벽월천마존(碧月天魔尊)!
-황실제일인(皇室第一人) 나한천작(羅漢天爵)!

…!
인간으로서는 더 이상 강해질 수 없다고 믿던 숱한 일대종사들의 찬란한 영
명은 하루 아침에 허무하게 스러지고 말았다.
그 장본인은 고독패왕! 바로 그였다.
그는 승부에 미친 광인이라고 알려졌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다만 한 판의 승
부라고 했다. 그는 백 일 간 중원을 횡당했으며 일천 번 싸워 이기는 신화
를 이룩했다.
그의 최종적인 표적이 지난 오백 년 간 무림을 장악해 온 오패천(五覇天),
즉 오대무벌(五大武閥)임은 불문가지의 사실이었다.
하나 오패천을 쓰러뜨리는 것이 고독패왕의 최후 목표라고 믿는 사람은 그
리 많지 않았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과연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독패왕은 늦봄에 무림에 나타났으며 백 일이 지난 늦여름에 돌연 실종되
었다.
그는 오패천 중 사자철림(獅子鐵林)을 치기 위해 장강(長江)을 건넌 직후
실종되었다고 한다.
단 백 일(百日), 하나 그가 백 일 동안 일으킨 돌풍은 가히 충격적인 것이
었다. 혹자는 그가 오백 년 전 무림을 피로 씻었던 아수마황보다 오히려 강
할 것이라고 했다.
한데… 그런 고독패왕이 장강을 건너 직후 세인들의 이목에서 사라진 것이
었다.
숱한 추측이 난무했으나 아무도 시원하게 그 답을 말하지는 못했다.
광풍(狂風)처럼 전 대륙을 휩쓸고 사라진 고독한 패왕(覇王)!
그는 의혹의 신비한 장막 속으로 사라진 후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십칠 년 전의 일이었다.

"어엇!"
따당…!
무명천에 싸인 물건을 받아 들던 철운비는 신음과 함께 그것을 바닥에 떨어
뜨리고 말았다. 그 물건이 보기와는 달리 대단히 무거웠던 것이다. 놀랍게
도 그것은 수십 관의 무게로 느껴질 정도였다.
화라락…
철운비가 물건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낫을 싸고 있던 무명 천이 저절로 풀어
져 버렸다.
츠___ 읏!
순간 뇌옥 안은 삽시에 섬칫한 검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
철운비는 숨을 죽이고 눈앞에 드러난 그 물건을 들여다보았다.
역시 그것은 일종의 낫(鎌)이었다.
손잡이의 길이는 두 자, 그리고 날이 한 자 정도, 또한 손잡이의 끝에는 극
히 가느다란 쇠사슬이 한 타래 매달려 있었다.
낫은 전체적으로 칙칙한 핏빛을 띠고 있었으며 손잡이에는 기이한 문양(文
樣)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끔찍하게도 아수라(阿修羅)와 악귀(惡
鬼)들이 마구 날뛰는 형상의 문양이었다.
그 문양들 가운데 언뜻 갑골문자의 글이 드러나 보였다.

<지옥… 혈겸(地獄血鎌).>

갑골문자의 내용은 그러했다.


∑ 제 3 장 천년마병(千年魔兵) 지옥혈겸(地獄血鎌)을 얻다

"지옥… 혈겸!"
철운비는 피를 머금은 듯한 날을 지닌 낫(鎌)에 새겨진 이름을 나직이 뇌까
리며 신음성을 발했다.
무영종은 그런 그를 형형한 시선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역시 명불허전이군! 갑골문을 한눈에 해독하다니… 어쩌면 이놈은 지옥혈
겸에 감추어져 있다는 아수마맥(阿修魔脈)의 최후마공까지도 알아낼지 모르
겠다!)
그는 내심 혀를 내두르며 소리없는 신음성을 발했다.
이윽고 그는 철운비를 직시하며 괴악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장 무섭다는 여덟 자루의 병기, 환우팔천병(
宇八天兵) 중 서열 제삼위(第三位)의 마병이다."
"환우팔천병?"
철운비는 검미를 모으며 나직이 되뇌었다.
이어 그는 지옥혈겸의 손잡이에 새겨져 있는 아수라의 문양을 자세히 들여
다보았다.
(이 문양들 중에는 두 가지 구결(口訣)이 감추어져 있다. 일종의 내공심법
(內功心法)과 이 낫을 쓰는 초식인데… 잘 이해가 안 된다.)
그는 내심 염두를 굴리며 중얼거렸다.
그렇다. 철운비가 보고 있는 수라문양에는 하늘과 땅 사이에 가장 패도적인
두 가지의 무공구결이 감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천 년 간 그것을 알아낸 자는 전무했다. 그것은 지극히 난해하고 교
묘하여 누구도 발견할 수 없는 신비 속에 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철운비는 믿어지지 않게도 한눈에 그 존재를
어렴풋이 깨달은 것이 아닌가?
무영종이 그 사실을 알았으면 아미 기절초풍했으리라.
그러나 그것을 알 리 없는 무영종은 다시 입을 열어 설명했다.
"그것은… 오백 년 동안 무저갱(無底坑)이란 곳에 묻혀 있다가 최근 발굴된
것이다. 그것을 발굴한 자는… 지옥천존(地獄天尊)이란 자인데… 클클… 그
놈은 그것을 손에 넣은 직후 노부에게 빼앗겼다!"
그는 득의의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은 이미 짙은 죽음의 그늘이 가득 덮여 있었다.
그는 자신이 곧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철운비 역시 그것을 알아보았
다.

-무영종(無影宗)!

그를 모르는 사람은 강호에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반면 그의 진정한 모습을 본 자 또한 하늘 아래 존재치 않았다.
그것은 무영종이 두 가지 방면에서 천하제일이었기 때문이다. 경공술과 역
용술이 바로 그것이었다.
뿐이랴? 그의 신투(神偸) 절기는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백 년 간 밤의 제왕으로 군림해 왔다. 그가 노린 것 치고 그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뛰어난 재주를 지닌 무영종도 단 한 번 무참하게 패배를 당한
적이 있었다.
십칠 년 전, 그는 한 젊은 패웅의 병기를 훔치려다 하마터면 세상을 하직할
뻔했다.
고독패왕(孤獨覇王)-!
무영종은 바로 그 고독패왕의 병기인 마종지검(魔宗之劍)을 훔치려 했고,
예외없이 성공했다.
하나 그 직후 고독패왕이 쳐낸 일권에 무영종은 하마터면 전신이 으스러질
뻔했다.
그것이 무영종의 유일한 실패였다.
고독패왕에게 패한 후 무영종은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것은 패배를
모르고 살아온 그의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남겼다.
그래서 그는 결심했다. 천하를 떠돌며 고독패왕을 골탕먹일 수 있을 만한
절기를 찾기로!
그리고 그것은 곧 실행에 옮겨졌다.
무영종은 그 날로부터 천하를 주유하며 고독패왕에게 복수할 수 있는 초절
기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히 그는 하나의 무서운 암중세력(暗中勢力)이 무림을 장악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암중세력은 놀랍게도 지난 오백 년 간 무림을 사실상 지배해 온 오대무
벌(五大武閥), 즉 오패천(五覇天) 중 몇을 합친 것만큼 거대했다.
저 고금제일마 아수마황(阿羅魔皇)을 척살한 다섯기인, 오패왕(五覇王)의
후손들인 오패천은 지난 오백 년 간 구대문파를 대신하여 중원무림을 관장
해 왔었다.
헌데 그들 오패천을 몇 배 능가하는 거대한 암중세력이 태동하고 있는 것을
무영종은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 사실에 경악한 무영종은 즉시 그 암중세력에 잠입하여 동정을 살펴보았
다.
그 결과 그는 그 암중세력의 지존이 지옥천존(地獄天尊)이란 인물인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 자는 단지 지옥천존이라 알려졌을 뿐 모든 것이 비밀에 싸인 인물이었
다.
무영종이 지옥천존의 존재를 알아냈을 무렵, 지옥천존은 그 옛날 아수마황
이 오패왕에 패해 죽음에 이르게 되자 스스로 몸을 던진 무저갱(無底坑)의
발굴에 막 성공한 상태였다.
그는 무저갱 안에서 한 부의 마경(魔經)과 한 자루의 병기를 얻었다.
그 병기가 바로 지옥혈겸(地獄血鎌)이었다.
지옥천존은 과거 아수마황보다 오히려 무서운 자였다.
그러나 그런 그도 무영종의 절묘한 신투술에는 당하지 못하고 어이없이 지
옥혈겸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 직후 대노한 지옥천존은 무영종을 향해 무섭게 일장을 후려쳤다.
지옥참(地獄斬)-!
그 일격은 놀랍게도 이미 백 장 밖을 벗어난 무영종의 등판을 으스러뜨려
버렸다.
무영종은 그로 인해 단 번에 내장을 상하는 치명적인 중상을 입고 말았다.
하나 그는 사력을 다해 겨우 지옥천존에게서 달아날 수 있었다.
무영종의 두 눈에 은은한 공포의 빛이 어렸다.
"지옥천존! 그 놈은… 이미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무서운 놈이다. 그 놈과
맞설 자는 하늘과 땅 사이… 단 한 명뿐이다!"
그는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철운비는 문득 침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고독… 패왕이란 분이 그 분입니까?"
무영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렇다. 고독패왕 철무정! 오직 그만이… 지옥천존을 막을 수 있다!"
"…!"
그 말에 철운비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고독패왕이란 인물의 이름도 철무정이란 말인가? 흑룡왕야(黑龍王爺)와 똑
같은 이름이라니… 이것은 우연일까?)
그의 내부에는 의혹이 구름같이 피어났다.
희대의 승부사 고독패왕과 철부의 주인인 흑룡왕야의 이름이 같은 것이다.
이것이 단지 우연일까?
그러나 무영종은 그런 철운비의 내심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것은 무영종
이 지옥천존의 지옥참에 당한 상세가 급격히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껏 지옥혈겸을 지옥천존에게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일념만으로 버
텨왔다.
그러다 긴장이 풀리자 그의 생기는 급격히 소멸하고 있는 것이었다.
무영종 역시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한 가닥의 남은 의지로 철운비를 마주보았다. 그리고는 거친 숨결을
억지로 가누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지옥혈겸에는… 마도무림의 근원이라할 수 있는 사대마맥(四大魔脈)의…
최후최강의 마공, 지옥명부마강(地獄冥府魔강)이 감추어져 있다고 한다. 만
일 지옥천존이 그것마저 얻으면… 놈은 불사지체(不死之體)가 되어… 아무
도 놈을 막지 못한다!"
무영종의 음성은 급격히 약해지며 잦아들었다.
"…!"
철운비는 온 정신을 기울여 그의 말을 들어야만 했다.
끊어질 듯 미약한 무영종의 음성은 그러나 필사적인 의지를 담고 다시 이어
져 나왔다.
"그래서… 지옥혈겸을 반드시 고독패왕에게 전해야만… 무림의 운명… 바로
… 네 손에… 달려… 있다."
무림의 안위를 염려하는 그의 마음은 생명의 한계마저 초월하고 있었다.
천운비는 그런 무영종의 모습에서 한 가닥 뜨거운 감동을 느꼈다.
무림에 관해서는 문외한인 그였지만 무영종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만은 절로
침중해지는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차갑게 식어 있는 무영종의 손을 꼭 쥐어 주었다.
"되었습니다. 잘 알았으니 그만 말씀하시고 몸을 돌보십…!"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영종은 두 눈을 부릅뜨며 호통을 내
질렀다.
"괘… 씸한 놈! 네놈의 똑똑한 골통 정도면… 노부가 얼마 못 산다는 것을
못 알아볼 리 없는데… 그따위… 소리를… 쿨룩… 쿨룩!"
노갈을 내지르던 그는 숨넘어갈 듯 심한 기침을 해댔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 시커먼 핏덩이가 토해져 철운비의 앞섶을 온통 검붉게
물들였다. 그 핏속에서는 몇 조각의 끊긴 내장조각까지 섞여 있었다.
허나 몇 모금의 기혈을 토한 뒤 갑자기 무영종의 죽어가던 두 눈에 휘황한
생기가 감돌았다.
그것을 본 철운비는 내심 침중한 신음을 발했다.
(회광… 반조(廻光返照)!)
그는 한눈에 그것이 죽기 직전 나머지 생기를 한꺼번에 폭출하는 회광반조
현상임을 알아보았다.
그때 무영종이 힘겹게 바로 앉으며 말을 이었다.
"지옥천존은… 아수라같이 강하다. 하지만 더욱 무서운 것은… 그놈의 수하
에 규모 미상의 거대한 세력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
그 말에 철운비는 문득 자신이 조룡탄(釣龍灘)에서 만났던 회의사신(灰衣死
神)이란 무서운 도수를 떠올렸다.
무영종은 다소 생기를 찾은 음성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노부는 지옥혈겸을 탈취한 직후 쉬지 않고 이곳 금릉으로 달려왔다. 고독
패왕이 이곳 금릉 주위에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
만 그의 은신처가 어딘지 찾을 겨를이 없었다. 그만큼 지옥천존과 그 수하
들의 추적은 무섭고 집요했다… 네가 조룡탄에서 만난 회의사신(灰衣死神)
만 해도… 무림을 통틀어 열손가락 안에 드는 무서운 놈이다! 클룩…!"
그의 눈빛은 극히 침중했다.
그는 고독패왕만이 지옥천존을 막을 수 있다고 철운비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그의 바램일 뿐이었다.
일대 일의 승부라면 아마 고독패왕이 지옥천존을 이길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고독패왕은 단신이었다.
그에 반해 지옥천존의 수하에는 종잡아 수십만의 고수들이 운집해 있었다.
거기에다, 회의사신(灰衣死神) 잔독같은 고수들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할 수
도 없는 일이었다.
무영종이 알기로 회의사신 같은 자는 둘만 모여도 능히 고독패왕이나 지옥
천존을 상대하기에 가능한 인물이었다. 그만큼 지옥천존의 암중세력은 무섭
고 거대한 것이었다.
무영종의 눈빛이 더할 수 없이 침중한 이유는 실상 무림에 지옥천존과 그의
세력을 막을 만한 조직이 있을지에 대한 의문 때문이었다.
만일 그 옛날 아수마황을 쓰러뜨렸던 오패왕(五覇王)의 후손들이 연합을 한
다면 또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들 오대무벌 사이에는 상호견제의 묘한 알력이 존재하여 연합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무영종이 절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무영종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철운비는 고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 뇌옥으로 숨어드신 이유는… 지옥천존의 추적을 잠시라도 따돌리려고
그러신 것이구료."
그렇다! 지옥천존, 그가 아무리 무서워도 설마 천하의 무영종이 좀도둑으로
위장하여 관부의 뇌옥에 은신한 것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무영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하게 웃었다.
"천하 도둑들의 총수인 노부 무영종이 제발로 관부에 숨어들 줄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소매춤을 뒤져 하나의 묵직한 피낭을 꺼내들었다.
"네게 큰 짐을 지워 미안하다. 그 대가로… 이것을 주마!"
툭!
그는 피낭을 철운비의 앞에 던져 주었다.
"무엇이오?"
철운비는 의아한 눈으로 무영종을 바라보았다.
무영종은 푸르스름한 얼굴에 괴악한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흐흣… 펴보아라. 그 안에는 무림인들이 꿈에라도 얻기 원하는 두 가지의
물건이 들어 있다!"
"…!"
철운비는 말없이 피낭을 펴보았다.
피낭 안에는 두 권의 비급과 여러가지 잡동사니들이 들어 있었다.
잡동사니들은 몇 장의 인피면구와 역용도구들이었다. 그리고, 갖가지 도둑
질에 쓰이는 소도구를 또한 그 속에 섞여 있었다.
철운비는 다른 것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두 권의 낡은 비급을 꺼내들었다.
그것은 두 권 모두 다 낡아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고경(古經)들이었다.
"…!"
철운비는 두 눈에 이채를 반짝이며 두 권의 고경을 살펴보았다. 그가 책이
라면 사족을 못 쓴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천잔수종경(天殘水宗經).>
<천면무영경(千面無影經).>

두 권의 고경에는 그와 같은 제목이 적혀 있었다.


철운비는 먼저 천잔수종경을 펼쳐들었다.
표지를 넘기자 다음과 같은 글이 눈에 들어왔다.

<천잔조수(天殘釣修) 어잠해(漁潛海)가 수종일맥(水宗一脈)의 영광을 위해


천잔수종경(天殘水宗經)을 남긴다.>
-천잔조수(天殘釣修)!

그는 팔백 년 전의 인물이었다.
마도무림(魔道武林)에 사대마맥(四大魔脈)이 있다면 정도(正道)에는 대정팔
강(大正八强)이 있었다.
정파무림 사상 최강의 팔인(八人)!
그들이 바로 대정팔강이며 천잔조수는 그 대정팔강 중의 한 명이었다.
천잔조수의 특기는 두 가지로, 수공(水功)과 낚싯대 사용법이 그것이었다.
천잔조수의 수중공부(水中功夫)가 고금최강인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또한 그의 낚싯대를 이용한 초식은 그 괴이신랄한 변화론 단연 천년최강이
었다.
천잔조수의 독문병기는 바로 무영종이 철운비에게 미리 준 벽옥마간(碧玉魔
竿)이었다.
천잔조수가 남긴 천잔수종경에는 천잔조수의 수중무공과 사식(四式)의 조법
(釣法)등이 수록되어 있었다.

-천잔사식(天殘四式), 그렇게 이름붙여진 사식(四式)의 조법(釣法)은 능히


사대마맥의 절기와 승부를 가를 수 있을 정도였다.

<천면무영경(千面無影經).>

그것은 천면마황이란 자가 남긴 것이었다.


천면마황(千面魔皇)-!
그는 사대마맥만은 못하나 그들을 제외하면 가장 강한 열 명의 마왕 고금십
마(古今十魔)의 서열 제 일 위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그의 특기는 역용술(易容術)과 경공이었다. 천 개의 얼굴과 번개보다 빠른
경공, 그 두 가지 절기로 천면마황은 천하를 종횡으로 누볐다.
그는 자신의 절기로 온통 악행을 일삼으며 돌아다녔다.
도둑질, 강간, 방황…
천하의 모든 사람이 그를 증오하며 욕했다. 허나 아무도 천면마황을 잡지
못했다. 그것은 그가 천 개의 얼굴과 벼락보다 빠른 경공을 지닌 탓이었다.
그러나 그런 천면마황이건만 그는 실로 어이없는 최후를 맞고 말았다.
어느날 그는 동정호변에서 외팔이에 애꾸인 한 명의 늙은이와 충돌하게 되
었다.
그가 다름아닌 천잔조수였다.
천면마황은 자칫 방심하다 천잔조수의 낚시바늘에 찔려 동정호로 끌려 들어
갔다.
땅 위에서야 아무리 날고 기는 천면마황이라도 물 속에서는 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천잔조수의 손에 격살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천잔조수 또한 그때 입은 내상이 도져 외로운 죽음을 맞게 되었다.
무영종(無影宗)은 우연히 천잔조수가 죽은 작은 동굴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천잔조수와 천면마황의 절기를 얻었다.
천면무영경은 바로 천면마황의 절기를 기록한 비급이었다.
또 이 천면무영경의 뒷면에는 한 장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 지도는 천
면마황이 평생 도둑질로 모은 재보를 감춘 장보도였다.
무영종은 본래 평범한 일개 좀도둑이었다.
허나 육십 년 전, 그는 우연히 팔백 년 전의 두 기인의 절기를 얻어 일약
무림십강(武林十强)에 끼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재질은 극히 미천하여 두 권의 비급의 정수를 얻지 못했다.
천잔조수의 무공은 장애자의 몸에 맞게 만든 것이라 지극히 독선적이고 편
협했다.
무영종은 그 중 수중무공만 조금 연마할 수 있을 뿐이었다.
천잔수종경의 진수인 천잔사식(天殘四式)과 용황삼결(龍皇三訣)은 아예 익
힐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천잔수종경에 비해 천면무영경의 절기는 그나마 다소 쉬운 편이었다.
그 때문에 무영종은 천면무영경의 연마에 보다 주력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중 육할을 연마할 수 없었다. 허나 그 정도 만으로도 무
영종은 백 년 내 무적이었다.
십칠 년 전 고독패왕에게 패하기 전까지만 해도…
무영종은 두 권의 비급을 살펴보고 있는 철운비를 바라보며 거칠게 숨을 헐
떡이며 말했다.
"그… 두 권의 비급만 완전히 연마하면… 너는 능히 사대마맥의 후예와 싸
울 수 있다!"
"…!"
"하지만… 싸울 수 있을 뿐, 그놈들을 이기지는 못한다. 마도무림의 신화인
사대마맥(四大魔脈)의 마공은… 그만큼 무섭다!"
그의 말에 철운비는 씁쓸하게 고소를 지었다. 이어 그는 천잔수종경과 천면
무영경을 다시 피낭 안에 집어 넣었다.
"노인장의 성의는 고마우나 나는 무림과는 인연이 없는 놈이오!"철운비의
그 말에 무영종은 사색 완연한 얼굴에 묘한 미소를 띄었다.
"운명… 이란 알 수 없는… 법이다. 크녠… 그리고 노부보고 네놈의 운명에
도박을 걸라면… 나는 네놈이 무림인이 되는 쪽에… 돈을 걸겠다!"
"…!"
철운비는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묘한 웃음을 보이던 무영종은 이내 정색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노부가… 살아 있을 시간은 별로 많지 않다. 그 사이… 노부가 지옥천존에
대해 알고 있는 이야기와 무림에 대해 이야기해 주겠다."
"…!"
철운비는 그를 저지하려다가 나직한 한숨과 함께 그만 두기로 했다.
(그게… 이 늙은이가 원하는대로 두자. 그것이 내가 이 노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도움인 것 같으니…!)
그는 내심 탄식하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늘 냉소가 서려 있던 그의 눈가로 문득 뜨거운 습기가 서렸다. 그는 어느덧
죽음을 앞둔 눈앞의 늙은 도둑에게 호감을 갖게 된 것이었다.
무영종은 세상사람들로부터 양상군자(梁上君子)라고 손가락질 받던 늙은 도
둑이었다. 허나 그의 가슴 깊은 곳에는 누구 못지 않은 뜨거운 정의감이 충
만해 있었다.
그리고 철운비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을 느꼈기에 그의 가슴 또한 뜨
겁게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음습한 금릉부중의 지하뇌옥 안은 무서우리만큼 적막했다.
아무도 깨어 있지 않은 새벽, 그 적막한 감옥 속에서 무영종의 끊어질 듯
미약하고 나직한 음성이 위태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조금씩 생명을 갉아먹는 미약한 음성이…

아침(朝),
"철운비! 석방이다, 나와라!"
철컹!
뇌옥을 흔드는 한 소리 외침과 함께 쇠창살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
철운비는 예상했었다는 듯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예의 간수가 열린 창살의 문 밖에 서 있었다. 그의 음침한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는 철운비가 주천화를 찌른 것을 내심 고소해 하
고 있는 것이었다.
철운비의 예상대로 주천화는 죽지 않았다.
주천화의 아버지인 금릉왕야(金陵王爺) 주태사는 아들이 기녀(妓女)를 강제
로 능욕하려다가 기녀 아들의 칼에 찔린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가급적 그 사건을 덮어두려고 했다.
물론 그 모든 것은 철운비의 안배 속에 든 일이었다.
"…!"
철운비는 힐끗 뇌옥의 구석을 돌아보며 일어섰다. 그의 두 볼에는 흐릿한
눈물자국이 나 있었다.
뇌옥의 구석에는 무영종이 잠든 듯 돌아누워 있었다. 그는 자는 듯 보였으
나 실상 방금 전 숨이 끊어졌다.

-부탁… 한다 무림을!

그 말을 끝으로 무영종은 철운비의 손을 꼭 쥔 채 눈을 감았었다.


철운비의 가슴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편히… 잠드시오 노인장!)
그는 무영종의 명복을 빌며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리면서 그는 옷깃 속에 지
옥혈겸(地獄血鎌)을 빠르게 감추었다.
그때,
"밖에… 너를 마중나온 사람들이 있다!"
철컹!
간수가 철운비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미소지었다.
"고맙습니다!"
철운비는 간수를 향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어 그는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 뇌옥 밖으로 사라져 갔다.

스으… 스으…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짙은 안개가 금릉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해는 어느덧 한 뼘 이상 떠올라 아침을 재촉하고 있었다. 허나 온통 시야를
가리고 있는 짙은 안개 때문에 아직도 여명 무렵과 다를 바가 없었다.
"…!"
휘적휘적 뇌옥을 나서던 철운비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뇌옥 밖, 스으… 스으…
짙은 안개 속에 삼인(三人)이 그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이남일녀(二男一女).
검박한 옷차림의 백의미소부와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꾸부정한 노문사(老
文士), 그리고, 그 륜차(輪車) 뒤에 서 있는 훤칠한 키의 미장부가 그들이
었다.
백의미소부는 물론 철운비의 어머니인 낙월부인(落月婦人) 수운월이었다.
그리고 그녀와 함게 있는 노문사와 미장부 역시 철운비가 아주 잘 아는 인
물들이었다.

-귀곡선생(鬼谷先生).
-옥기린(玉麒麟) 단목린(丹木鱗).

귀곡선생은 바로 천하제일서원인 귀곡서원의 원주(院主)였다.


옥기린 단목린-!
미녀가 무색할 정도로 뽀얀 피부와 서글서글한 용모를 지닌 이 미청년은 철
운비와 함께 귀곡쌍영(鬼谷雙英)이라 불리는 기재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용모만으로 따진다면 철운비도 옥기린에게는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철운비보다는 삼 세 연상인 옥기린은 그 빼어난 용모와 지혜의 소유자로써
금릉의 뭇 소녀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었다.

"운비(雲飛)야!"
수원월은 촉촉히 젖은 시선으로 철운비의 앞으로 달려왔다. 그녀는 글썽글
썽하게 눈물이 고인 눈으로 철운비를 바라보며 그의 두 손을 꼭 움켜쥐었
다.
"에미… 때문에… 네가 욕을 보았구나!"
그녀는 못내 가슴이 아픈 듯 철운비의 머리를 한 손으로 쓰다듬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런 그녀의 손은 기이할 정도로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츠읏!
"…!"
"…!"
그런 수운월의 손을 바라보며 두 쌍의 눈이 야릇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바
로 귀곡선생과 옥기린 단목린의 눈빛이었다.
(소수(素手)…다! 가장 파괴력이 강한 사문(邪門)의 저주마공! 역시… 저
여아는 재림배교(再臨拜敎)의 후예인가?)
귀곡선생의 진물 흐르는 노안이 음유하게 번뜩였다.
(소수마공(素手魔功)은 오성(五成)까지는 괜찮으나 그 이상 성취가 진전되
면 심성이 극악하게 변한다. 보아하니 저 아이의 수준은 이미 오성(五成)의
화후에 이른 듯한데… 그대로 두면 무서운 대마녀(大魔女)가 탄생하겠군!)
그는 내심 앓는 듯한 신음을 발하며 중얼거렸다. 그의 노안은 낙월부인 수
운월의 소수(素手)를 보고 한 가지 무서운 전설을 떠올린 것이었다.

-소수여황(素手女皇)!

그녀는 만사(萬邪)의 하늘인 배교(拜敎)의 전설적 여사황(女邪皇)이었다.


천 년 전, 그녀는 소수인(素手印) 공력이라는 무서운 마공으로 천지(天地)
를 휩쓸었다.
그녀의 눈부시도록 새하얀 손(素手)이 춤을 추면 부서지지 않는 것이 없었
다.
아무도 그녀를 막지 못했다.
소수여황은 매일 천 명을 죽였고 하룻밤에 열 명의 미소년을 능욕하여 그들
의 정기를 빨아먹었다. 그녀는 백 일 간 천 명의 미소년의 양기를 갈취하여
천년내공을 쌓아 불사지체에 이르렀다.
아니, 그녀가 막 불사지체(不死之體)가 되기 직전이었다. 돌연 한 명의 무
서운 마황(魔皇)이 나타나 소수여황을 제거했다.

-고루대제(固陋大帝) 능잠(陵潛)!

가장 무서운 마도의 전설 사대마맥(四大魔脈)! 그 중 하나인 고루마맥(固陋


魔脈)의 당시 전인이 바로 그였다.
소수여황이 아무리 강해도 사대마맥의 초마공에는 견디지 못했다. 결국 소
수여황은 고루대제의 발아래 쓰러졌고 만사(萬邪)의 하늘 배교는 무참하게
괴멸되고 말았다.
그것이 천 년(千年) 전의 일이었다.
고루마맥의 무서운 전설은 그때 비로소 확인되었다.
소수마공(素手魔功)은 바로 소수여황(素手女皇)이 남긴 초극사공(超極邪功)
이었다.
한데, 천 년 전 소수여황이 죽으며 실종되었다던 그 소수인(素手印)의 공력
이 낙월부인 수원월에게서 재현된 것이었다.
귀곡선생이 신음과 함께 침중함을 금치 못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수운월은 한참만에야 철운비의 손을 놓으며 비로소 생각난 듯 말했다.


"어서 노선생께 인사 드려야지. 네가 바로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은 선생께서
직접 금릉왕야를 찾아가 탄원해 주신 덕분이란다."
그녀는 손으로 눈가를 닦으며 앞을 비켜 주었다.
귀곡선생은 곧 금릉왕야의 글선생이기도 했다.
귀곡선생은 낙월정에서의 불상사를 듣고 새벽같이 금릉왕(金陵王) 주태사를
찾아갔고 그 직후 철운비의 석방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철운비는 고소를 지으며 귀곡선생의 앞으로 다가가 포권했다.
"폐를 끼쳤습니다. 노야(老爺)!
귀곡선생은 진물 흐르는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마음에 둘 것 없다. 노부가 한 일은 별로 없으니까!"
이어 그는 인자한 시선으로 철운비와 수운월 모자를 돌아보았다.
"우선은 영친을 집으로 모시고 가서 위로해 드려라. 쯧쯧… 하나뿐인 아들
인 네 녀석이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 얼마나 충격을 받으셨겠느냐?"
그는 딱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네게 긴히 할 말도 있고 하니 오후에 서원에 한 번 오거라!"
말을 마치자마자 옥기린 단목린이 귀곡선생의 바퀴 의자를 뒤에서 밀었다.
드르르!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양인의 모습은 점차 안개 속으로 멀어져갔다.
"꼭… 오시게나 운비(雲飛)!"
멀어지는 단목린이 철운비를 돌아보며 서글서글한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 모습은 사내가 보아도 반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철운비는 멀어져가는 귀곡선생과 단목린의 뒷모습을 말없이 주시하고 있었
다.
문득 그는 단목린의 뒷모습을 쫓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봐도 단목형은 계집같단 말이야!)
그의 시선은 갸름한 단목린의 어깨선과 한 줌밖에 안 되는 잘룩한 허리, 그
리고 그 아래의 풍성하고 모양 좋은 둔부를 더듬고 있었다. 그것은 균형있
는 여인의 몸매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때 문득, 철운비의 어깨에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자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 다른 아이들도 너를 걱정하고 있단다."
낙월부인 수운월이었다.
"알겠습니다 어머니!"
철운비는 수운월을 올려다보며 미소지었다. 아직은 수운월 쪽이 반 뼘 정도
큰 키였다.
그녀는 그윽한 눈빛으로 아들을 내려다보며 따뜻하게 미소지었다. 이어 그
녀는 철운비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사뿐 걸음을 옮겼다.
두 모자의 그림자는 이내 자욱한 아침 안개 속으로 멀어져갔다.

한데 그들이 사라지고 난 직후,


"흐음! 전설상의 소수(素手) 같았는데… 잘못 보았을까?"
문득 한 줄기 음울한 음성이 안개 속에서 흘러나왔다.
뚜벅…!
이어 한 명의 인물이 안개를 휘감은 채 어두운 그늘에서 걸어나왔다.
흑(黑)!
그의 전신은 온통 흑(黑) 일색이었다. 일신에 걸친 의복은 물론 그 분위기
까지…
그는 전신에 칠흑같이 어두운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팔 척의 훤칠한 키에
당당한 체격, 얼굴 역시 검은빛 면사를 쓰고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칙칙하고도 음습했다. 그가 나타나자 주위
는 질식할 것 같은 마기(魔氣)로 가득 뒤덮였다.
그가 쓰고 있는 검은빛 면사 위,

<존(尊).>

생생한 아수라의 문양과 함께 그와 같은 글이 핏빛으로 쓰여져 있었다.


온통 흑(黑) 일색으로 전신을 가리고 있는 이 인물의 몸에서 보이는 것이라
고는 면사 사이로 번뜩이는 한 쌍의 눈빛 뿐이었다.
섬뜩하게도 그 자의 눈빛은 은은한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스으… 스으…
"…!"
"…!"
흑포인의 위로 세 명의 인물이 유령같이 뒤따르고 있었다.
이남일녀인 그들 삼 인은 하나같이 칙칙한 죽음의 그늘을 지닌 자들이었다.
그들의 맨 좌측에는 회색장포를 걸친 한 명의 도수(刀手)가 시립해 있었다.
지극히 허무하고 퇴폐적인 분위기, 독사같이 차갑고 섬뜩한 눈빛의 회의도
수, 그는 바로 회의사신(灰衣死神) 잔독(殘毒)이 아닌가?천하최강의 좌수도
법(左手刀法)의 명인인 그가 흑포몽면인의 뒤에 시립해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회의사신을 거느리고 나타난 이 흑포몽면인은 누군가?

-지옥천존(地獄天尊)!

오오! 설마 바로 그란 말인가? 회의사신을 수하에 둔 암중세력이 절대자!


저 아수마황보다 더 무섭다는 그란 말인가?
지옥천존(地獄天尊)은 철운비와 수운월 모자가 사라진 쪽을 주시하며 침음
성을 발했다.
(범상치 않은 모자다. 특히 그 어린 소년에게는… 나의 심령(心靈)을 위협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의 숨결이 몽면 속에서 다소 거칠어졌다. 철운비에게서 어떤 강렬한 협위
가 느껴진 때문이었다.
그 때였다.
"틀림없소. 무영종(無影宗), 그 늙은 도둑의 종적이 이곳으로 이어졌습니
다. 천존(天尊)!"
시립해 있던 회의사신이 지옥천존의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듯 음울한 음성으
로 입을 열었다.
"…!"
그 말에 지옥천존을 흘깃 금릉부중의 뇌옥을 주시했다.
그가 뇌옥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문득 회의사신의 가는 눈꼬리에 야릇한 미
소가 떠올랐다.
(후훗! 철운비라는 아이에게 이 무서운 자가 신경을 쓰면 곤란하지. 자의든
타의든… 그 아이는 우리 은밀종(隱密宗) 단천류(斷天流)의 전인이 된 상태
니까!)
그때,
"따르… 라!"
스윽!
지옥천존은 음울한 어조로 한 마디를 내던진 후 성큼성큼 뇌옥을 향해 걸음
을 옮겼다.
"…!"
"…!"
스으!
그러자 회의사신을 비롯한 삼 인(三人), 지옥삼패(地獄三覇)는 소리없이 신
형을 움직였다. 마치 지옥천존의 그림자(影) 같이…

∑ 제 4 장 소수마공(素手魔功)의 저주(咀呪)

오후가 되자 자욱한 안개도 흔적없이 스러졌다. 그러나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퍼부을 듯 잔뜩 찌푸려 있었다.
휘____ 이잉!
간간이 부는 바람에는 칼날같은 한기마저 섞여 있었다.
겨울은 그리 멀지 않은 것이다.

금릉성의 동문(東門)___
철운비는 휘적휘적 동문을 나서고 있었다.
여전히 허름한 폐포에 죽립을 눌러쓴 모습인 그는 지금 귀곡서원(鬼谷書院)
으로 가는 길이었다.
귀곡서원은 금릉성의 동쪽에 있는 울창한 원시림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철운비가 귀곡서원으로 가는 것은 근 일 년 수 개월 만이었다.
천울림(天鬱林)이라 불리는 원시림 속에 자리한 귀곡서원은 강남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서원이었다. 그것은 귀곡서원에 일대석학 귀곡선생이 있기 때
문이었다.
귀곡선생의 지혜와 식견은 당대제일이라 알려졌다.
그러나 일 년 그 이전만 해도 귀곡서원에는 귀곡선생을 능가하는 초기재가
있었다.
그가 바로 철운비, 금릉일관옥(金陵一冠玉)이었다.

"…!"
성문을 나서던 철운비는 멈칫하며 걸음을 멈춰섰다.
성문 밖에 한 명의 거지노인이 잔뜩 몸을 쭈그린 채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너덜너덜하게 찢긴 허름한 마의(麻衣)를 걸친 거지노인은 추위 탓인지 머리
를 푹 숙이고 있어 얼굴은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다만 빛바란 회색머리와 주름이 가득한 목덜미로 미루어 그가 꽤 나이든 노
인임을 알 수 있었다.
철운비는 그 거지노인의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춰섰다.
(춥겠군!)
그는 연민의 시선으로 거지노인을 내려다 보았다.
거지노인의 주위로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노인을 거들떠 보는 사람은 없었다. 날씨가 춥고 음습한 탓
인지 사람들은 그저 걸음을 총총히 하며 바쁘게 오갈 뿐이었다.
철운비는 주위를 돌아보다가 문득 씁쓸한 고소를 지었다.
(별 수 없군. 내 옷이라도 벗어 줄 수밖에…!)
그는 망설임없이 자신의 낡은 폐포를 벗어 들었다. 거지노인이 추위에 떨고
있는 것을 보고 차마 그냥 지날 수 없었던 것이다.
"노인장, 이거라도 더 걸치쇼!"
철운비는 자신의 폐포를 거지노인의 어깨에 덮어 주었다.
한데 그가 막 폐포를 노인의 어깨에 덮어 주는 순간,
번___ 쩍!
돌연 숙여졌던 노인의 머리가 펴들리며 한 쌍의 시뻘건 불덩어리가 철운비
의 눈동자에 폭사되어 들어왔다.
눈(眼)-!
그 한 쌍의 시뻘건 불덩어리는 바로 거지노인의 눈이었다.
(윽!)
순간 철운비는 눈동자가 볼에 달군 쇠꼬챙이에 지져지는 듯한 아찔한 충격
에 신형을 휘청했다. 그만큼 거지노인이 눈빛은 강렬하고도 무서운 것이었
다.
"크크녠! 네놈이 일천구백구십구 명만에 처음이었다. 감히 노부… 재림사황
(再臨邪皇)에게 연면의 정을 보여준 놈은…!"
철운비에 뇌리로 마치 우뢰성 같은 음상이 들려왔다. 그것은 무서운 신념
(邪念)이 정제된 음성이었다. 범인이라면 그 한 마디의 사황파멸후(邪皇破
滅吼)에 심령이 바스러지고 말았으리라.
그러나 철운비는 그 정도 충격까지는 받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의지력이
범인에 비할 수 없을 만큼 강인했기 때문이었다.
(재… 림사황이라고?)
그는 두 눈을 부릅뜨며 거지노인을 주시했다.
그러나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한 쌍의 사악하고 시뻘건 눈뿐이었다. 그 외
의 아무것도 그의 시야 속에 잡히지 않았다.
철운비는 그 한 쌍의 눈을 노려보며 아득하게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 한 쌍의 눈은 마력적인 힘으로 철운비의 마지막 정신력마저 빼앗아 버린
것이었다.
직후,
"흐핫핫! 좋다 좋아! 이제는 고독패왕에게 흔쾌히 도전할 수 있다. 우리 재
림배교의 운명을 맡길 사종사황(邪宗邪皇)의 재목을 구했으니…!"
파____ 앗!
재림사황(再臨邪皇)이라 자칭한 거지노인은 사악한 광소를 터뜨리며 거칠게
철운비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실로 가공할 일이었다. 그의 일갈에 사방 십 리가 삽시에 지진을 만난 듯
들썩거리는 것이 아닌가?
"우웩!"
"케엑!"
그와 함께 그 주위를 지나던 행인들이 일시간에 모두 혼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십 리 내에 있는 관병들 또한 일제히 실신하여 쓰러졌다. 그만큼 재
림사황의 한 소리 장소에 실린 공력은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후핫핫! 철무정(鐵無情) 이놈! 조금만 더 기다려라. 조금만 더!"
피___이잉!
그때 재림사황은 앙천광소와 함께 철운비의 손목을 움켜쥐고 훌훌 날아올랐
다.
피이잉! 고오오!
삽시에 그의 모습은 철운비와 함께 까마득히 암천으로 사라져 버렸다. 마치
한 줄기 벼락이 지나는 것처럼…

-천울림(天鬱林)!

금릉성 동쪽에 위치한 울창한 원시림이다. 천울림은 그 안에 귀곡서원(鬼谷


書院)이 있어 더욱 유명한 곳이다.
그 천울림의 외곽에는 한 채의 허물어진 폐사(廢寺)가 자리하고 있었다.
낡고 퇴락하여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물씬 풍기는 폐사, 허나 대웅전은 반쯤
허물어진 채 그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대웅전 안,
"…!"
"…!"
이인(二人)이 마주앉아 있었다. 그들은 한 명의 폐포소년과 낡은 마의차림
의 노인이었다.
꾀죄죄하고 볼품없는 옷차림의 일노일소(一老一少), 허나 그들의 눈빛만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일노일소는 바로 철운비와 재림사황(再臨邪皇)이라 자칭한 신비의 거지노인
이었다.
"…"
철운비는 무심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눈앞의 마의노인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아혈(啞穴)이 제압된 상태였다.
재림사황의 인상은 한 마디로 지극히 음산했다. 시체를 방불케 하는 푸르뎅
뎅한 피부, 그와 대조적으로 타는 듯 이글거리는 핏빛 눈동자, 그것은 섬뜩
하고 전율적인 느낌을 물씬 풍겼다.
헌데 보라!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지금 재림사황의 눈과 눈 사이에는 또 하나의 붉은 눈(赤眼)이 떠올라 있지
않은가?
제 삼의 눈!
허나 그것은 진짜 눈이 아니라 단지 눈(眼)을 닮은 하나의 붉은빛 점에 불
과했다.
그 혈점(血點)은 영락없이 눈의 형태를 하고 있어 언뜻 보면 재림사황이 세
개의 눈을 가진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철운비는 짧은 순간의 혼란과 경악을 수습하고 지금은 그저 재림사황의 말
을 무심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크크크! 노부는 재림배교(再臨拜敎)의 당대교주인 재림사황(再臨邪皇) 나
극이란 분으로 달리 삼목사황(三目邪皇)이라 불리기도 한다."
재림사황은 핏빛 눈동자를 형형하게 빛내며 그렇게 입을 열었다.

-재림사황(再臨邪皇) 나극(羅極)!

아아! 그것은 실로 놀라운 이름이 아닌가?


만사(萬邪)의 하늘 배교(拜敎)의 당대지존! 저 오대무벌(五大武閥)의 벌주
(閥主)들조차 상대하기를 꺼린다는 전설적인 일대사황 재림사황(再臨邪皇)!
그 엄청난 이름을 다시 듣게 되다니…
십칠 년 전, 재림사황은 한 명의 무서운 패왕(覇王)과의 싸움에서 패해 죽
었다고 알려졌지 않은가?
헌데, 그가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다니… 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재림사황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던 인물은 바로 고독패왕이었다.
십칠 년 전, 고독패왕은 한 자루 철검(鐵劍)을 둘러메고 배교(拜敎)로 쳐들
어 왔었다.
실로 무모한 도전으로 보였으나 결과는 전혀 예기치 못한 것으로 판가름났
다.
놀랍게도 고독패왕은 그 녹슨 철검을 단 한 차례 휘두르는 것으로 재림사황
을 쓰러뜨려 버린 것이 아닌가?
고독패왕의 마종지검(魔宗之劍)은 순간적으로 재림사황의 사황마벽(邪皇魔
壁)의 호신강기를 박살내 버린 것이었다.
재림사황은 상대가 애송이라고 방심하다가 실로 어이없이 쓰러진 것이다.
그 일전으로 천 년 만에 부활했던 재림배교는 일패도지(一敗塗地)하여 지상
에서 소멸되고 말았다.
헌데 그때 고독패왕에게 죽었다고 알려진 재림사황이 지금 철운비의 앞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재림사황은 형형한 눈빛으로 철운비를 직시했다.


"무림에서는 우리 재림배교가 고독패왕에게 일패도지하여 와해되었다고 믿
고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빠직!
그의 두 눈에서는 무서운 사광(邪光)이 폭출했다. 그의 눈빛이 처절하도록
강해진 것은 그가 십칠 년 전 자신을 패배시켰던 고독패왕을 회상했기 때문
이었다.
"…!"
철운비는 재림사황의 전율적인 눈빛에 심혼이 압도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재림사황은 다시 말을 이었다.
"본… 재림배교는 고독패왕에 당한 치욕을 갚기 위해 지하에서 십칠 년 간
절치부심해 왔다."
"…!"
"사실… 본교에는 사종삼보(邪宗三寶)가 있어서 삼 년 내로 고독패왕에 대
한 복수가 가능했었다. 헌데… 노부의 못난 여제자가 그 중 하나를 훔쳐 달
아나는 바람에 그기간이 십칠 년으로 늘어난 것이다!"
그는 회한의 표정으로 으르렁대듯 말했다.

<사종삼보(邪宗三寶)!>

그것은 배교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종삼보를 남긴 인물은 배


교의 두 창시자인 사황쌍려(邪皇雙呂)였다.

-적목천존(赤目天尊).
-소수여황(素手女皇).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부부였다. 그 중 소수여황이 전무림을 파괴시키려다 고루대제(固陋
大帝) 능잠(陵潛)에게 잡혀 죽은 일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적목천존과 소수여황 부부는 세 가지 물건을 남겼었다.
-사황철경(邪皇鐵經).
-소수마경(素手魔經).
-적목사령정(赤目邪靈精).

바로 그것이었다.
사황철경(邪皇鐵經)과 소수마경(素手魔經)은 사황쌍려 양인의 일신절기를
담은 비급이었다.
그 중의 사문절기(邪門絶技)들은 저 사대마맥의 초마공에 못지 않을 정도로
막강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었다.
그에 비해 적목사령정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것은 바로 적
목천존이 죽으며 남긴 일종의 원정내단이었다.
무려 천년수위에 육박하는 적목천존의 내공정수가 고스란히 담긴 내단이 바
로 적목사령정인 것이다.
천 년 전, 적목천존은 소수마공(素手魔功) 때문에 마성(魔性)에 빠진 아내
소수여황에게 암살되었다.
허나 죽기 직전 그는 자신의 필생내공을 하나의 내단으로 남겼다.
재림사황은 천 년 만에 적목천존의 시신에서 적목사령정을 얻어 재림배교를
연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그 적목사령정을 완전히 용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고독패왕의 도
전을 받아 패퇴하고 말았다.
당시 재림사황은 겨우 적목사령정의 일 할 정도를 용해했을 뿐이었다.
허나 그것만으로도 능히 그는 백 년 내 무적(無敵)을 구가했었다.
고독패왕에게 패한 후 재림사황은 본격적으로 적목사령정을 용해하려 했다.
그 용해방법은 바로 소수마경(素手魔經)에 수록되어 있었다.
헌데 그 직후 재림사황은 소수마경을 도난당하고 말았다.

-사황녀(邪皇女) 수운월(水雲月)!

재림사황의 여제자인 그녀가 소수마경을 훔쳐 재림배교에서 도망친 것이었


다. 재림사황은 사황녀가 왜 소수마경을 훔쳐 재림배교를 떠났는지 아직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어쨌든 소수마경의 분실은 재림사황에게 있어 실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밖
에 없었다.
별 수 없이 재림사황은 본신의 내공만으로 적목사령정을 용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십칠 년이 지났다. 재림사황은 그 동안 적목사령정의 삼할을 융해할
수 있었다.
현재 그는 옛날보다 두 배 강해진 상태였다.
그러자 재림사황은 복수를 위해 고독패왕의 행적을 추종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 최근 금릉 모처에서 상상도 못한 신분으로 은거하고 있
음을 알고 복수를 위해 금릉에 온 것이었다.

"노부는 당년에 비해 두 배 강해졌으나… 그 놈 고독패왕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은 없다! 그 동안 그 놈 역시 놀고 있지만은 않았을 테니까!"
재림사황은 회한의 눈을 번뜩이며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허나 철운비의 귀에는 그의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내심 크게 격동되
는 마음을 금치 못했다.
(수운월! 아아! 설마 어머님이 이 노인을 배신했다는 여제자 사황녀(邪皇
女) 수운월과 동일인이란 말인가?)
그는 너무도 놀라운 사실에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재림사황는 지금 머리 속이 온통 고독패왕의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철운비의 격동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문득 그는 가라앉은 침중한 어조로 다시 말을 꺼냈다.
"어쩌면… 이번 설욕전에서 노부는 그 놈에게 패해 죽을지도 모른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적목일맥(赤目一脈)이 단절되는 것은 근심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폐사 밖의 음울한 하늘을 응시하며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노부의 적목사령정(赤目邪靈精)을 전해 줄 전인(傳人)이 필요했다. 하지만
두 번 다시 배신당하는 일을 겪고 싶지는 않았다."
빠직!
재림사황은 타는 듯 시뻘건 눈을 다시 철운비에게로 돌렸다.
"그래서 거지행세를 하여 마음이 충후한 놈을 구했는데… 운수 나쁘게 네놈
이 걸려든 것이다."
"…!"
철운비는 아혈이 찍혀 말을 못하는 상태였다. 그는 그저 묵묵히 재림사황의
말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문득 재림사황은 철운비를 노려보며 히죽 웃었다.
"킬킬! 이미 네놈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네놈은 노부대신 적목일맥(赤
目一脈)을 이어야만 한다."
말과 함께 그는 천천히 오른손을 쳐들었다.
치치치!
그의 오른손 식지는 어느새 불에 달군 듯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재림사황은 시뻘건 식지를 철운비의 앞에 세우며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십중팔구 노부는 고독패왕에게 죽는다. 복수는… 네가 해야만 한다! 소수
마경(素手魔經)을 찾아 적목사령정(赤目邪靈精)을 용해하여 천녀내공을 얻
으면 그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어 그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식지를 철운비의 미간에 갖다댔다.
치지직…!
(크으윽…!)
순간 살이 타는 듯한 끔찍한 소성과 함께 철운비는 마치 이마가 뚫어지는
듯한 격렬한 통증을 느꼈다. 그의 전신은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뒤틀렸다.
그 가운데는 서서히 정신을 잃어갔다.
"크녠… 명심해라! 너는 노부 재림사황의 분신이며… 영원한 사중제왕(邪中
帝王)이다. 고독패왕을… 쓰러뜨리는 것이 네 의무다."
아득하게 정신을 잃어가는 철운비의 귓전으로 재림사황의 음산한 음성이 파
고들었다.
빠지직!
그와 함께 뼈가 부서지는 듯한 끔찍한 소성이 귓전에 부딪쳐 왔다.
아… 보라! 시뻘겋게 달아오른 재림사황의 식지는 완전히 철운비의 이마 속
으로 파고든 것이 아닌가?
그 순간, 철운비는 완전히 의식을 잃고 말았다.

-적목사령정(赤目邪靈精)!

그것은 재림사황의 몸에서 철운비의 몸 속으로 옮겨졌다. 철운비는 실로 영


뚱하게도 사중제왕(邪中帝王)의 기연을 만난 것이었다.

<낙월정(落月亭).>

한낮의 낙월정은 한산한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아직 해가 지고 홍등을 밝


히려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기녀들은 대부분 잠을 청하거나 몸단장을 하며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헌데 난데없이 웬 소동이란 말인가?
"까아악___!"
"왜… 왜 이래요?"
기녀들의 비단폭 찢는 듯한 날카로운 비명이 낙월정의 정적을 깨뜨렸다.
콰… 쾅! 우두둑!
그와 함께 폭음이 일며 낙월정 전면의 전각이 삽시에 박살났다.
뚜벅…!
이어 무너지는 전각을 꿰뚫고 한 명의 거한이 성큼 낙월정 안으로 들어섰
다. 일 장에 가까운 이 거인은 전신에 검붉은 털이 숭숭하게 돋은 괴인이었
다.
그 자의 두 눈은 굶주린 야수같이 시뻘겋게 번들거리고 있었으며 날카롭게
돋은 송곳니가 오싹한 전율을 끼쳤다. 한 마리 야수를 보듯 흉측한 인상을
주는 거한이었다.
"크녠… 여기에 철운비(鐵雲飛)라는 애송이가 있으렷다?"
혈모괴인(血毛怪人)은 흉흉한 일갈을 내지르며 성큼 낙월정 안으로 들어왔
다.
그가 나타나는 순간 기녀들은 그의 흉측한 모습에 사색이 되어 일제히 내원
쪽으로 달아났다.
그 때였다.
"어디서 오신 고인이신데 어린 아이들을 놀라게 하시나요?"
문득 한 줄기 듣기좋은 옥음이 들려왔다.
사르르…
낙월부인 수운월이 그림 같은 자태로 전각의 앞에 나타났다.
"정… 정주님!"
순간 기녀들은 겁에 질려 외치며 황망히 수운월의 뒤로 달려가 숨었다.
수운월은 침착한 태도로 기녀들을 달랜 후 혈모괴인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
렸다.
혈모괴인의 흉측한 모습은 여인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허나 수운월은 달랐다. 그녀의 옥용에는 일점의 동요조차 보이지 않았다.
동요는커녕 그녀는 살풋 미소까지 띄우며 혈모괴인의 앞으로 흐르듯 다가섰
다.
"제가 수모라는 계집이온데… 대협께서는 어느 방면의 고인이시지요?"
수운월은 생긋 웃으며 혈모괴인에게 물었다.
그 모습에 혈모괴인은 일순 찔끔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이내 그는 흉흉하게 핏빛 눈을 번들거리며 입을 열었다.
"본좌는… 지옥천존(地獄天尊) 막하 지옥삼패(地獄三覇)의 둘째 거령수황
(巨靈獸皇)이다. 철… 운비라는 애송이를 찾으러 왔다."
순간,
(거령수황(巨靈獸皇)!)
수운월은 내심 움찔하며 나직이 부르짖었다.

-거령수황(巨靈獸皇)!

그는 십여 년 전 묘강과 남황(南荒) 일대를 온통 공포로 떨게 만들었던 거


마(巨魔)였다.
그는 본래 인간의 여자와 성성이 사이에서 태어난 반인반수(半人半獸)였다.
그 때문인지 그는 대단한 신력(神力)과 포악한 흉성을 지녔다.
우연히 거령패왕경(巨靈覇皇經)의 절기까지 얻어 그의 몸은 금강불괴지신이
되었다. 무공까지 연마하게 되자 거령수황은 천남일대에서 온갖 만행을 자
행하고 다녔다.
살인(殺人), 강간, 방화…
그 자의 만행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에 보다 못한 오패천(五覇天) 중 남황(南荒) 벽력부(霹靂府)의 고인들이
나서게 되었다. 그들은 거령수황을 어느 절곡으로 몰아 넣고 만 근 화약으
로 폭사시켰다고 한다.
한데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십 년 전에 이미 죽었다고 알려진 거령수황이
지금 수운월의 앞에 나타난 것이 아닌가?
수운월이 내심 놀람을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수운월은 놀라운 기색을 조금도 내색지 않고 살풋 미소지으며 물었
다.
"철운비라면 천녀의 아들인데 그 아이가 귀하께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나
요?"
빠직…!
순간 거령수황은 흉흉한 핏빛 눈이 전율적인 혈광(血光)을 토했다.
"크녠! 그 애송이가… 감히 무영종(無影宗)이란 늙은 도둑에게 지옥혈겸(地
獄血鎌)을 가져갔다. 그것을… 돌려 받으러 왔다!"
"지옥혈겸!"
이번 만큼은 수운월의 옥용이 일변했다.
지옥혈겸!
그 이름은 그만큼 대단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수운월은 철운비가
금릉부 중의 뇌옥을 나올 때 이상한 낫같은 것을 갖고 나온 것을 알고 있었
다.
(그것이… 지옥혈겸…!)
그녀의 내부에는 일순간 격렬한 동요가 일었다. 동시에 그녀는 자신이 지금
취할 행동이 어떤 것인지 알아차렸다.
"헛… 소리를 하는구나! 그 대가로 죽어 주어야겠다!"
스팟!
싸늘한 한 소리 교갈과 함께 수운월은 벼락같이 거령수황의 앞으로 날아들
었다.
"카___앗! 감히… 네년이…!"
꽈___ 릉!
갑자기 수운월이 달려들자 거령수황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마주 일권을 내
쳤다.
거령신권(巨靈神拳)-!
거령수황의 일권은 하늘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가를 듯한 가공할 위력으로
수운월을 휩쓸어왔다. 그 엄청난 기세에 수운월의 교구는 무참하게 휩쓸려
박살날 듯했다.
하나 그 순간,
빠직!
돌연 수운월의 소맷자락에서 눈부시도록 하얀 소수(素手)가 벼락치듯 뻗어
나왔다.
직후 실로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크아악…!"
거령수황의 입에서 처참한 비명이 터지며 그의 거구가 가랑잎같이 낙월정
밖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피를 뿌리며 날아가는 거령수황의 가슴에 새하얀 장인(掌印)이 찍혀 있는
것이 언뜻 보였다.
이 돌연한 사태에 주위의 기녀들은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
"정… 주님이 무공을…!"
그녀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제각기 탄성을 발했다.
한데 그 때였다.
"역시… 너는 소수마공(素手魔功)의 전인(傳人)이었군!"
콰드득!
움울한 일갈과 함께 돌연 허공에서 한 명의 흑의인이 폭풍같이 날아내렸다.
칠흑같이 어두운 흑포에 같은 색의 몽면을 쓴 그 인물이 나타나자 삽시에
장내는 숨막히는 위압감으로 뒤덮였다.
순간,
"지… 옥천존(地獄天尊)?"
장내로 날아내리는 흑포인을 보며 수운월은 신음하듯 나직이 부르짖었다.
그녀의 옥용에는 일순 격렬한 경련이 일었다.
지옥천존(地獄天尊)-!
그렇다. 흑포몽면인은 바로 금릉부의 뇌옥에 나타났던 신비인 지옥천존이었
다.
고수자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수운월은 한 눈에 자신의 앞에 나타난 인물
이 어쩌면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가장 무서운 인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는 무거운 절망감으로 가슴이 내려앉는 것
을 느꼈다.
(어쩌면 나는 철무정(鐵無情) 그 사람에 대한 복수를 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수운월은 내심 그렇게 중얼거리며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이어 그녀는 소매 속의 섬섬옥수에 소수마공(素手魔功)을 극한까지 끌어모
았다.
낙월정(落月亭)!
이곳은 낙월정이었다.
장차 천하(天下)를 휩쓸 대폭풍의 발원지인…

∑ 제 5 장 귀곡서원(鬼谷書院)

그것은 천울림의 울창한 수림 가운데 한적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날씨는 여전히 잔뜩 찌푸려 있었다. 음울하고 무거운 구름이 귀곡서원 전체
를 찍어누르듯 뒤덮고 있었다.
문득 귀곡서원 안으로 한 명의 폐포소년이 들어섰다. 희고 창백한 안색에
연지를 바른 듯 붉은 입술을 지닌 미소년(美少年)의 준미하고 단아한 용모
와 옷차림은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철운비, 폐포소년은 바로 철운비였다.
그의 뇌리 속은 다소 혼란한 상태였다.
그가 고통에 못이겨 혼절하여 다시 깨어났을 때 재림사황(再臨邪皇)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일견하기에 그의 몸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였다. 분명 이마를
불로 지지는 듯한 극심한 고통을 느꼈건만 철운비의 이마에는 아무런 상처
도 없었다.
(훗훗… 모든 게 한바탕의 꿈이었을까?)
철운비는 걸음을 옮기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나 분명 꿈은 아니었다.

-네 몸에는 적목사령정(赤目邪靈精)의 천년내공(千年內功)이 잠들어 있다.


너는 그것으로 노부의 복수를 해주어야만 한다!
재림사황의 괴악한 음성이 아직도 철운비의 뇌리를 울리고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재림사황은 한 가지 물건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것은 핏빛의 작은 방울이었다. 전체적으로 핏빛을 띤 그 방울은 표면에
복잡한 문양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파천마령(破天魔鈴).>

그 문양 위에는 그와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문양들은 한 가지 사악한 구결을 나타내고 있었다.

-파천심황결(破天心荒訣)!

목소리만으로 인간의 심령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사악한 마법(魔法)인


그것은 배교에서 가장 무서운 사법(邪法)으로 꼽히는 것이었다.
그 옛날 적목천존(赤目天尊)이 아내 소수여황(素手女皇)에게 암격당해 죽어
가며 파천마령에 새긴 구결이 바로 그것이었다.
만일 누군가 파천심황결을 연마하여 파천마령(破天魔鈴)을 울리면 삼라만상
을 그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나 천 년 내 그 누구도 파천마령을 울리지 못했다. 그 이유는 파천심황
결로 파천마령(破天魔鈴)을 울리려면 천년내공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철운비는 모르고 있었으나 파천마령은 지옥혈겸과 함께 환우팔천병( 宇八天
兵)에 드는 마병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배교지존(拜敎至尊)을 나타내는 신물이기도 했다. 재림사황
은 폐사를 떠나면서 그 파천마령을 남기고 간 것이었다.

(후훗! 무영종(無影宗)과 마찬가지로… 재림사황이라는 그 노인도 헛수고만


한 것이다. 나란 놈은 무림과 인연이 없는 놈이니…!)
철운비는 고소를 지으며 귀곡서원 안으로 들어섰다. 눈에 익은 건물들이 그
의 시야 속으로 들어왔다.
그때,
"아니… 이게 누구인가?"
"하하! 십결(十缺)이 아닌가?"
귀곡서원을 오가던 유생들이 환하게 웃으며 철운비를 맞았다. 그들은 모두
낯익고 정다운 모습이었다.
"안녕들 하셨소, 책벌레 양반들!"
철운비는 모처럼 환하게 마주 웃으며 옛동료들의 손을 잡았다.
"노사(老師)께서 천추각(千秋閣)에서 기다리시네! 어서 가보시게!"
"하하! 노사만 만나뵙고 곱게 돌아갈 생각은 아예 말게나. 오랫 동안 격조
한 죄로 우형들과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셔야 하네!"
서생들은 철운비를 둘러싸고 떠들썩하게 웃어제꼈다. 그들은 철운비에게 있
어 허물없은 지기들이었다.
(역시… 친구란 좋다!)
철운비는 옆동료들에 둘러싸여 오랜만에 흔쾌하게 웃었다.

<천추각(千秋閣).>

귀곡선생(鬼谷先生)의 서재인 그곳은 서재라기보다는 서고(書庫)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상당히 넓은 전각 전체가 온통 수만 권의 고서들로 가득차 있
었기 때문이다. 주위를 진동하는 책냄새와 함께 고아한 분위기가 물신 풍기
는 곳이었다.
드륵…!
철운비는 성큼 천추각의 거실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기분 좋은 종이 냄새가 물씬 철운비의 코를 쩔렀다.
거실의 사면은 온통 고서(古書)로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의 서탁과 네 개의 포단이 놓여 있었다.
서탁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한 잔의 용정차(龍精茶)가 놓여 있
었다.
그러나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철운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깐 자리를 비우신 모양이군!)
그는 서탁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노사(老師)께서 왜 나를 보자고 하셨을까?)
그는 귀속선생이 자신을 부른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러다 무심결에 그의 시선이 서탁 위로 옮겨졌다. 서탁 위에는 철운비가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한 권의 고경(古經)이 놓여 있었다.
사슴 가죽을 엮어 만든 고색 창연한 그 고경은 별로 두껍지 않았다.
아주 오래된 듯 표지가 검게 퇴색한 책이었는데 그 표지 위에는 막 문드러
지기 직전의 고문자가 쓰여 있는 것이 철운비의 눈에 들어왔다.
"…!"
본래 고문(古文)과 고본(古本)을 좋아하는 철운비였다. 그는 눈을 반짝이며
고경의 표지에 적힌 글을 읽어 보았다.

<적붕진결(赤鵬眞訣).>

그 고문(古文)의 내용은 그러했다.


(적붕… 진결(赤鵬眞訣)?)
철운비는 고개를 갸웃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어 그는 적붕진결(赤鵬眞訣)의 표지를 열어 보았다. 표지 안쪽에는 다음
과 같은 아주 강한 필체의 서명이 적혀 있었다.

-적붕무가(赤鵬武家)는 결코 사대마맥(四大魔脈)의 아래가 아니다.


본가가 불사마맥(不死魔脈)에 패한 것은 시운(時運)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
릇 적붕(赤鵬)의 후예된 자는 적붕일맥(赤鵬一脈)이 사대마맥 따위의 방문
좌도(方門左道)의 아래가 아님을 천하에 보여야만 한다.
-적붕황(赤鵬皇) 절필(絶筆).

그 글이 쓰여진 것은 천년(千年) 이전이며 기록자는 병화무림사상 최강자라


고 불리는 인물이었다.

-적붕황(赤鵬皇) 단목천뢰(丹木天雷)!

그 이름은 변황일대에서는 아직도 무신(武神)으로 떠받들고 있었다. 그의


후예가 세운 문파가 바로 저 변황무림의 명가중의 명가인 막북(漠北) 적붕
호황천(赤鵬護皇天)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적붕황(赤鵬皇)은 적붕삼보(赤鵬三寶)라는 세 가지 물건을 남겼다고 전한
다.

-적붕진결(赤鵬眞訣),
-적붕건(赤鵬巾),
-적붕수호천병(赤鵬守護天兵),

그 세 가지가 바로 적붕삼보(赤鵬三寶)였다.
허나 그 중 전해지는 것은 적붕진결뿐이었다. 막북(漠北) 적붕호황천(赤鵬
護皇天)은 바로 그 적붕진결(赤鵬眞訣)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그들이 적붕황(赤鵬皇)의 직전 중 겨우 삼할만을 이었음을 의미한
다.
그러나 적붕호황천은 그 삼 할의 절기로도 천 년 간 변황최강(邊荒最强)으
로 군림해 왔다.
영원한 변황최강자 적붕황(赤鵬皇)의 천년비급!
그 적붕진결(赤鵬眞訣)이 놀랍게도 귀곡서원의 서탁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
는 것이었다.

"…!"
철운비는 호기심이 등해 적붕진결의 다음 장을 넘겼다. 그곳에는 한 가지
패도극강한 무공구결이 적혀 있었다.

-적붕쇄강조(赤鵬碎鋼爪) 구결진해(口訣眞解)!

철운비는 형형하게 눈을 빛내며 그 구결을 읽어나갔다. 그의 영민한 두뇌는


어렵지 않게 그것이 철벽이라도 종잇장같이 꿰뚫어 버리는 무서운 파괴력을
지닌 진결임을 알아보았다.
적붕쇄강조란 이 무공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가장 강맹한 파천기공의 하나
였다. 호신기공 파해전문의 무공인 그것은 어떤 호신강벽이라도 종이짝 찢
어내듯 할 수 있었다.
무림인이라면 꿈에라도 얻고 싶어하는 초절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철운비는 그런 것 따위는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그는 그것이 무공구결임을 알자 검미를 모으며 책자를 덮어 버렸다.
"무엇인가 했더니… 나와는 인연없는 무공구결이었군!"
그는 고소를 지으며 적붕진결을 한쪽으로 밀어 놓았다.
"나는… 무림(武林)이라는 세계와는 인연이 없는 놈이다. 후훗! 무림인들에
게 이것이 어떤 가치를 지녔는지는 모르나… 내게는 한낱 휴지조각만 못하
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허허! 적붕진결(赤鵬眞訣)이 휴지조각만도 못하다고? 적붕황 조사께서 아
시면 지하에서 통곡하시겠군!"
문득 한 소리 창노한 웃음이 철운비의 귓전을 울렸다.
"…!"
철운비는 흠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나타났을까? 서재의 입구에는 이인(二人)이 우뚝 서 있었다.
바퀴의자에 앉은 노문사와 임풍옥수같이 영주무비한 미청년, 바로 귀곡선생
과 옥기린 단목린이었다.
철운비는 그들을 보자 고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노사께서… 무림과 관계 있으신 분인 줄은 몰랐습니다!"
그는 귀곡선샌이 일부러 자신이 보도록 적붕진결을 서탁 위에 놓은 것을 알
아차렸다.
드르르…!
귀곡선생은 바퀴의자를 굴려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이어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를 속인 것은 결코 본의가 아니었다. 하나의 무서운 비밀세력이 노부를
사십 년 동안이나 추종해 오고 있지. 노부가 한낱 늙은 서생으로 신분을 속
여 온 것은 바로 그 때문이네!"
"…!"
귀곡선생은 나직이 탄식하며 철운비와 마주 앉았다. 그런 그의 진무른 노안
으로 우울한 상념이 가득 흐르고 있었다.
철운비는 뜻밖이라는듯 의아하여 물었다.
"노사(老師)를 해치려는 자들이 있단 말씀이신가요?"
귀속선생은 침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놈들의 이름은 지옥마교(地獄魔敎)라고 하네. 그들은 사십 년 전 노부
를 제거하려다 실패한 후 지금까지 추격의 손길을 늦추지 않고 있지!"
그 말에 철운비는 은연중 놀람을 금치 못했다.
(지옥마교! 무영종을 추적했던 지옥천존(地獄天尊)과 관계있는 조직일까?)
그는 내심 의혹을 느끼며 염두를 굴렸다.
그때 귀곡선생이 찬찬이 철운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사십 년 간… 노부는 이곳에 은신한 채 본문에서 잃어 버린 두 가지 물건
의 종적을 찾아왔네. 그것들은 하나의 수건(巾)과 병기인데… 그것들만 손
에 넣으면 지옥마교(地獄魔敎) 따위를 두려워 피해 다니지 않아도 된다네.
한데…!"
말을 하는 그의 노안이 더할 수 없이 침중해졌다.
"적붕이보(赤鵬二寶)의 행방을 알지도 못했는데…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게 되었네!"
"지옥마교 측에서 노사의 종적을 발견한 모양이군요!"
철운비는 음울한 그림자가 깔린 귀곡선생의 노안을 마주보며 말했다.
귀속선생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맞아. 지옥마교에 지옥천존이라는 무서운 젊은 마웅(魔雄)이 나타났는데…
그 놈이 노부와 린아에게 아주 가깝게 육박해 오고 있네!"
그는 말을 하며 자신의 뒤에 우뚝 서 있는 옥기린 단목린의 섬섬옥수를 다
독였다.
철운비는 힐끗 단목린을 바라보았다.
이어 그는 침중한 표정으로 귀곡선생에게 물었다.
"떠나… 실 생각입니까?"
귀곡선생은 우울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는… 막북으로 떠날 생각이네. 그래서 자네를 부른 걸세!"
"…!"
철운비는 귀곡선생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유현하게 눈을 번뜩였다.
그러나 그는 입을 열지 않고 묵묵히 귀곡선생의 말을 듣기만 했다.
츠으…
귀곡선생은 형형한 눈빛으로 철운비를 주시했다.
아!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이 순간 귀곡선생의 진무른 노안 깊은 곳에서는
태양이 이글대는 듯한 무서운 신광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빛은 더 이상 허약한 늙은 노사의 눈빛이 아니었다.
철운비는 태어난 이래 이처럼 강렬한 눈빛을 접한 기억이 없었다. 만사(萬
邪)의 제왕(帝王)이라는 재림사황의 눈빛조차 지금 귀곡선생의 눈빛만큼 강
하다고는 단언하지 못할 정도였다.
철운비는 귀곡선생의 무서운 신광을 정면으로 받으며 묵묵히 그의 말을 기
다리고 있었다.
문득 낮으나 웅후한 귀곡선생의 음성이 철운비의 귓전을 울렸다.
"우리와… 함께 막북(漠北)으로 가지 않겠는가? 대막… 십만 리와… 변황의
십만용사가 자네의 것이 될 수 있네!"
"…!"
"노부는… 자네를 십 년 내에 구주팔황의 제왕(帝王)으로 만들어 줄 수 있
다네. 만일 노부와 함께 막북…, 적붕의 땅으로 가기만 한다면…!"
츠으… 빠지직!
귀곡선생의 강렬한 눈빛이 휘황하게 철운비의 전신을 휘감았다.
철운비는 마치 자신의 앞에 하나의 거대한 산이 솟아 오른 듯한 위압감에
사로잡혔다.
허나 그의 우울한 신색에는 약간의 변화도 일지 않았다.
"저는… 중원을 떠날 수 없습니다, 노사(老師)!"
그는 한참만에야 음울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어찌되었든… 제가 살 곳은 중토(中土)입니다. 그리고 노사를 따를 수 없
는 보다 큰 이유는 그 분… 저의 어머님이 이곳 중원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
그는 자신의 의사를 명백하게 밝혔다.
이어 철운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분부를… 따르지 못함을 용서하시기를…!"
그는 귀곡선생에게 깊이 손을 모아 보였다.
"노사의 가르침은…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가능하면… 다시 뵐 수 있기를
빌겠지만… 역시 힘들겠지요?"
그는 우울한 눈빛으로 귀곡선생을 주시했다.
"…!"
"…!"
빠직!
순간 일노일소(一老一少)의 시선이 허공에서 서로 뒤엉켰다. 그들의 눈빛에
는 온갖 상념이 깃들어 있었다.
이윽고 먼저 철운비가 무거운 침묵을 깨며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오면… 막북까지의 여행이 모쪼록 평안하시기를…!"
그는 귀곡선생의 뒤에 그림자같이 서 있는 단목린에게도 일별을 던졌다.
이어 그는 몸을 돌려 성큼 서재를 나섰다. 그의 모습은 곧 천추각에서 멀어
져 갔다.
"…!"
"…!"
귀곡선생과 단목린은 형형한 시선으로 철운비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문득 단목린은 붉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회유하지 못한 이상 제거해야 하지 않나요? 저 아이는 본문의 적붕진결을
본 데다가… 특히 다른 문파의 손에 들어가면 장차 중원을 침공할 때 큰 장
애가 될 테니…"
그의 싸늘한 어조에 귀곡선생은 고소를 지으며 말을 막았다.
"허허! 단단히 삐졌구나. 혜린아!"
혜린이라니…! 설마 옥기린의 이름은 단목린(丹木鱗)이 아니고 단목혜린(丹
木]慧鱗)이란 말인가? 그것은 사내의 이름이라기보다는 계집의 이름인데…!
"헛허! 운비가 네게 관심을 안 두었다고 제거하자는 소리를 하다니… 역시
사내보다는 계집의 마음이 독하구나!"
귀곡선생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랬었는가? 단목혜린는 사내가 아니고 계집이었는가?
철운비의 시선을 과연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귀곡선생의 말에 단목혜린은 옥용을 빨갛게 물들였다.
"그… 그게 아니에요. 저는…!"
그녀는 황급히 말을 더듬으며 변명했다.
귀곡선생은 그런 그녀의 손을 다독이며 입을 열었다.
"운비는… 바람과 같은 아이다. 노부가 잡지 못한 이상… 다른 자들도 그
아이를 잡지는 못한다!"
"…!"
그는 노안을 유현하게 빛내며 창 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른 자들에 비해 노부쪽이 매우 유리한 편이지. 헛허… 노부에게
는 바람같은 용(龍)을 사로잡아 놓을 만한 대단히 아름다운 손녀가 있으니
까!"
"할아버니!"
단목혜린은 옥용을 새빨갛게 붉히며 귀곡선생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귀곡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자하게 미소지었다.
"일단은… 막북으로 돌아가자. 그리고 튼튼한 그물을 마련하여 다시 용(龍)
을 잡으러 오자!"
"…!"
두 사람은 창 밖의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스으… 스으!
어두운 구름은 한층 더 낮게 귀곡서원을 뒤덮고 있었다.

-낙월정(落月亭).

"…!"
철운비는 낙월정 앞에 석상같이 굳어져 있었다. 그의 두 눈은 온통 경악으
로 부릅떠져 있었다.
아… 보라! 폐허, 낙월정 전체가 참담한 폐허로 변한 채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 화려하던 낙월정의 전각들은 모두 폭풍을 만난 듯 허물어지고 무너져 있
었다.
폐허로 변한 낙월정의 주위에는 금릉부(金陵府)의 관병들이 배치되어 일반
인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또한 일부 관병들은 폐허 속에서 기녀들의 시신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흉수는 두 명이었네!"
"한 놈은 전신에 붉은 털이 덮인 인간같지도 않은 거인(巨人)이었고 다른
한 명은 흑포를 뒤집어 쓴 몽면인이었네!"
"그놈들은 갑자기 나타나 낙월정을 삽시에 폐허로 만들었다네."
"그들은 무슨 낫(鎌)인가 하는 것을 내 놓으라고 했다는데… 영랑의 시신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네!"
철운비를 둘러싼 중인들의 말이 봇물 터지듯 한꺼번에 그의 귓전을 울렸다.
그러나 철운비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어… 머니…!)
그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두 주먹을 으스러져라 불끈 움켜쥐었다. 지금
그의 뇌리에는 어머니 낙월부인(落月婦人)의 안위에는 아무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것은 너무도 절실한 감정이었다.
그제서야 철운비는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증오하던 낙월부인 수
운월, 그녀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던가를…
철운비의 가슴은 미칠 듯한 격정과 다급한 긴장감으로 들끓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 그래! 어머님의 침실 아래에 지하밀실이 하나 있었다.)
번쩍!
그의 두 눈에서 벼락치는 듯한 안광이 작렬했다.
다음 순간 철운비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낙월정의 폐허 안으로 돌진
해 들어갔다.
"어엇! 이봐! 조심하게. 아직 무너지지 않은 곳도 있어!"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폐허를 지키던 관병들이 손을 내저으며 황급히 외쳤
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철운비가 폐허 안으로 뛰어든 후였다.

잠룡헌(潛龍軒)의 지하에는 한 칸의 극히 은밀한 지하석실이 자리하고 있었


다. 그 지하석실은 세 겹의 철문(鐵門)으로 방호되어 있어 은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잠룡헌 아래에 그런 밀실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낙월정 내에서 아무도 없었
다.
철운비도 우연하게 그 지하밀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기관지학(機關之學)에도 남다른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그였기에
낙월부인 수운월의 침실 아래에 지극히 은밀하게 자리한 그 밀실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 번도 그곳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철… 컹!
철운비는 지하석실의 세 번째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짙은 피
비린내가 철운비의 코를 찔렀다.
철문의 안쪽에는 한 칸의 석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별로 넓지 않은 장방형의 석실인 그곳은 아무런 장식조차 없어 썰렁한 냉기
가 감돌았다. 한쪽에 놓인 한 좌의 돌침상과 자단목의 서가 하나가 전부였
다.
한데 석실 안을 들여다 보던 철운비의 두 눈이 격동으로 부릅떠졌다.
"어머니!"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참담한 외침을 발했다. 돌침상 위에 한 명의 혈인(血
人)이 단좌하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전신으로 꾸역꾸역 선혈을 흘러내고 있는 왜소한 체구의 여인, 아! 그녀는
바로 낙월부인(落月婦人) 수운월이었다.
"…!"
수운월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실로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의 의복은 갈가리 찢겨 풍만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풍염하고
탄력있는 유방, 잘룩하고 굴곡있는 허리, 그 아래의 은밀한 계곡과 미끈한
허벅지까지…
한데 보라! 끔찍하게도 그녀의 전신 피부는 거북등같이 쩍쩍 갈라져 있지
않은가? 무엇인가 강력한 역도가 순간적으로 그녀의 모든 호신지력을 박살
낸 듯했다.
그녀의 몸 부위 중 유일하게 무사한 곳은 두 팔뿐이었다. 희디흰 섬섬옥수
와 팔꿈치까지의 부위는 여전히 옥같이 매끈한 상태였다. 피 속에 떠올라
보이는 그녀의 두 손이 너무도 희어 섬뜩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운… 비(雲飛)! 그래… 네 쪽이 빨랐구나. 지옥… 천존(地獄天尊)보다…!"
단좌하고 있던 수운월이 힘겹게 눈을 뜨며 피에 젖은 눈으로 철운비를 바라
보았다.
"지… 지옥천존(地獄天尊)이었습니까? 어머님을 이렇게 만든 자가…!"
철운비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수운월의 앞으로 다가갔다.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수운월의 모습이 그의 가슴을 비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을 안겨 주
었다.
수운월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피에 젖은 눈으로 그윽이 바라보았다. 비통해
하는 아들의 모습은 수운월로 하여금 복잡한 감회에 엉켜들게 만들었다.
"그 자는 저것을 노리고… 습격해 왔지만 가져가지는 못했다."
그녀는 억지로 웃으며 석침의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예의 지옥혈겸(地
獄血鎌)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지옥천존(地獄天尊)-!
그는 금릉부 중의 뇌옥에서 무영종의 시신을 발견해 냈다. 그리고 무영종이
죽기 직전 철운비와 접촉한 사실을 간수의 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 직후 그는 수하의 지옥삼패와 함께 낙월정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철운비가 귀곡서원을 향해 출발한 후였다.
대신 지옥천존은 낙월부인 수운월을 포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운월의 무공도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소수마공(素手
魔功)은 이미 육성(六成)의 경지에 이른 상태였다. 그 정도만 해도 어떤 호
신기공이라도 박살낼 수 있었다.
금강불괴에 가까운 거령수황이 그녀의 일격에 쓰러진 것은 바로 그 때문이
었다.
그러나 지옥천존(地獄天尊)은 상상 이상의 강자였다.
지옥천존과 맞선 순간, 수운월은 미처 소수인(素手印)의 공력을 발출하지도
못하고 지옥천존의 지옥참(地獄斬)에 휘말리고 말았다.
마도의 전설인 사대마맥 중 지옥마맥(地獄魔脈)의 절기인 지옥참의 공력은
실로 가공할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그것은 수운월의 모든 호신지력을 바스러뜨리고 그녀의 내부를
상하게 만들었다.
치명적인 중상을 입은 수운월은 사력을 다해 잠룡헌(潛龍軒)으로 피신했다.
이어 그는 철운비의 침실에서 지옥혈겸을 찾아 이곳 밀실로 숨어든 것이었
다.
지옥천존은 곧 수운월을 추격했다. 하나 그는 일시간에 은밀하기 그지없는
이곳 지하밀실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관병과 사람들이 몰려들자 그
는 낙월정에서 사라진 것이었다.
물론 멀리 가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그는 어디선가 낙월정을 감시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철운비가 이곳에 들어온 것도 역시 그 자의 눈을 피하지는 못했으리
라.

수운월은 희게 탈색된 창백한 옥용으로 철운비를 바라보았다.


이어 그녀는 괴롭게 숨을 헐떡이며 입을 열었다.
"시간이… 많지 않다. 지옥천존(地獄天尊)도 곧 이곳을 발견할 것이다. 그
전에… 네게 꼭 해 주어야만 할 이야기가 있다!"
그녀는 외상뿐 아니라 내부 역시 심각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지옥천존의 지옥참(地獄斬)은 수운월의 심맥과 내장 마디마디를 끊어 놓았
다. 그녀는 지금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듣기… 만 해라. 이것은… 네 출생에 대한 이야기다."
"…!"
철운비는 힘겨운 표정으로 말을 꺼내는 수운월을 만류하려 했다.
그러나 수운월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녀의 피 젖은 듯
한 옥용은 아주 괴롭게 변하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나는… 네가 기녀의 자식이라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 하고 있음을 잘 안
다.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 없다. 왜냐하면… 나는 너를 낳아준 친 어
머니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은 칼로 자르듯 단호했다.
"예… 엣! 무… 무슨 말씀을…?"
순간 철운비는 경악으로 눈을 크게 띄며 수운월을 주시했다. 그는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일시지간 그는 수운월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수운월은 그런 철운비의 모습을 바라보며 갈등과 회한이 뒤엉킨 표정을 지
었다.
하나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네 아버니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가장 위대하신 분이다. 그의 이름은 바로
… 고독패왕(孤獨覇王)… 철무정(鐵無情)이다!"
"고독… 패왕(孤獨覇王)!"
철운비의 두 눈이 한껏 치떠졌다.
쿵!
엄청난 충격이 벼락같이 그의 뇌리를 뒤흔들었다.
고독패왕(孤獨覇王) 철무정(鐵無情)!
아아! 그 전설적인 이름의 고독한 승부사(勝負士)! 그가 바로 자신의 아버
지라니…! 철운비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십칠년(十七年) 전, 낙월부인 아니 사황녀(邪皇女) 수운월은 방년 십칠 세
의 꿈많은 소녀였었다.
그녀는 사중일염(邪中一艶)이라 불릴 정도로 대단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 때문에, 수운월은 자연히 콧대가 높을 대로 높아져 있었다. 그녀는 뭇
사내들을 발가락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았다.
한데 그런 오만한 그녀를 여지없이 뒤흔들어 놓은 한 명의 사내가 나타났
다.
고독패왕 철무정!
바로 그였다. 어이없게도 수운월은 자기의 사부인 재림사황(再臨邪皇)을 패
배시킨 원수 고독패왕을 사랑하게 된 것이었다.
일단 사랑에 빠진 수운월에게 고독패왕이 사문(師門)의 원수라는 것 따위는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집요하게 고독패왕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고
독패왕의 비밀스런 거처를 알아낼 수 있었다.
하나 그 순간 수운월은 참담한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고독패왕, 그녀가 짝사랑하는 정인에게는 이미 여인(女人)이 있었던 것이
다.
능희연(陵姬燕)!
그것이 여인의 이름이었다.
고독패왕과 능희연(陵姬燕)은 이미 부부관계를 맺은 상태였다. 더구나, 그
당시 능희연은 만삭의 몸이었다.
고독패왕에게 아내가 있다는 사실은 수운월에게 아득한 절망감을 안겨 주었
다. 그리고, 그 절망감은 이내 격렬한 질투로 변했다.
사랑을 얻기 위한 여심(女心)은 차라리 무모하도록 집요한 것이었다.
질투심에 불탄 수운월은 고독패왕에 대한 잔인한 보복을 계획했다. 그것은
바로 능희연이 낳을 고독패왕의 아이를 훔쳐내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그것을 행했다.
능희연이 낳은 아이는 사내아이였다. 수운월은 고독패왕이 잠깐 집을 비운
사이 그 사내아이를 훔쳐갔다. 막 몸을 푼 능희연에게는 수운월을 막을 힘
이 없었던 것이다.
처음 수운월은 그 어린아이를 이용하여 고독패왕을 괴롭히다가 죽여 버릴
작정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너무도 귀여운 사내아이의 모습에 자기
도 모르게 반해 버려 차마 독수(毒手)를 쓰지 못한 것이었다.
마침내 수운월은 그 아이를 자신이 기를 작정을 하게 되었다. 결국 그녀는
사부 재림사황에게서 소수마경(素手魔經)을 훔쳐 이곳 진희하로 잠입하게
된 것이었다.
그 때의 사내아이가 바로 철운비였다.

"…!"
철운비는 망연한 표정으로 말을 잊고 말았다.
수운월의 말은 전혀 상관없는 타인의 이야기같이 공허하게 철운비의 귓전을
울렸다.
"용서해 달란 말은… 하지 않겠다. 하지만… 이것만은 믿어다오. 나는… 너
를 친아들같이 사랑했다!"
수운월은 쥐어짜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고통과 회한이 뒤덮인 그녀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배어 흐르고 있었다.
철운비는 그 모습을 망연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압니다. 당신이…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하지만…!)
그는 지그시 입술을 악물었다. 그의 눈가에도 축축한 물기가 번져 흘렀다.
(용서하십시오. 저는… 당신이 나의 생모(生母)와 아버님께 끼쳐 드렸을 고
통과 슬픔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꽉 움켜쥔 그의 두 손이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다. 그의 입에서는 차마 용
서한다는 그 한 마디 말이 나오지 않았다.
"…!"
수운월은 마른침을 삼키며 안타까운 눈빛으로 철운비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그녀의 눈빛은 참담하게 변했다.
(그래… 쉽사리 용서하지 못하겠지! 내가 너와 네 부모에게 한 짓을…!)
그녀는 절망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그녀는 서가를 향해 손을 뻗어 한 권의 비단책자를 집어들었다.

<소수마경(素手魔經).>

비단책자는 바로 소수여황(素手女皇)이 남긴 소수마경이었다. 그 안에는 소


수인(素手印)의 공력뿐 아니라 절정의 미안공, 방중사법(房中邪法)등이 수
록되어 있었다.
수운월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잘라 말했다.
"이제… 떠나라! 지옥천존(地獄天尊)이란 자가 곧 이곳에 들이닥칠 것이다.
"
그녀는 소수마경과 지옥혈겸을 철운비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리고 손을 뻗
어 석침의 모서리를 눌렀다.
그긍!
순간 굉음과 함께 석침이 옆으로 이동했다. 그와 함께, 그곳으로 시커먼 비
밀통로가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쏴아아!
그 통로 아래쪽으로 요란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지하수로인 듯했다.
"이 아래의 동굴은 진회하와 연결되어 있다 가능한… 금릉에서 멀리 떠나
라!"
수운월은 만감이 교차하는 눈으로 철운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같이… 가시지 않겠습니까?"
철운비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수운월은 서글프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나는… 이미 심맥이 끊겨 얼마 살지 못한다. 함께 간다면… 네게 짐만 될
뿐이다."
그녀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콰___ 르릉___!
돌연 석실 밖에서 한 소리 둔중한 굉음이 터졌다.
그와 함께 석실 전체가 마구 뒤흔들리는 것이 아닌가? 누군가 외부에서 석
실의 철문을 부수려는 듯했다.
수운월과 철운비의 안색이 일변했다.
"어서… 가라! 더 지체한다면… 저승에 가서도 네녀석을 저주하겠다!"
수운월은 다급히 외치며 철운비를 노려보았다.
"…!"
철운비의 눈빛이 심하게 뒤흔들렸다. 그러다 그는 지그시 입술을 물며 수운
월의 앞에 큰절을 올렸다.
"육체… 보중하십시오, 어머님…!"
그는 비통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어 벌떡 몸을 일으킨 그는 그대로 밀로(密
路) 안으로 뛰어내렸다.
첨벙…!
그가 밀로 안으로 뛰어드는 순간 그 아래쪽에서 요란한 물소리가 들렸다.
수운월은 젖은 눈빛으로 밀로 안을 내려다 보았다.
"어… 머니라고…!"
주르르!
그녀의 두 볼 위로 뜨거운 격동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와 함께 피에 젖은
그녀의 옥용에 봄햇살같이 화사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철운비가 자
신을 용서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이제… 죽어도 좋다."
그긍!
수운월은 낮게 중얼거리며 석침을 원래의 위치대로 돌려 놓아 밀로를 봉쇄
했다.
쿵… 콰릉___!
그때 예의 굉음은 점점 더 커지며 사위를 뒤흔들었다.
수운월은 체념의 표정으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철… 무정(鐵無情)! 그 사람의 얼굴을 한 번 더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아
쉽지만… 이제는 되었다."
그녀는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바로 그 때였다.
콰드득___!
재차 굉음이 일며 세 번째 철문이 종잇장같이 찢겼다. 이어 그 사이로 한
명의 노인이 성큼 들어섰다.
한데, 아! 놀랍게도 그는 바로 재림사황(再臨邪皇)이 아닌가?
철운비에게 적목사령정(赤目邪靈精)을 심어준 거지노인인…!
"쯧쯧! 나는 그래도 네가 고독패왕의 계집 정도는 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겨우 이 모양이냐?"
재림사황은 수운월의 앞에 우뚝 선 채 괴악한 일갈을 터뜨렸다.
"사… 사부님?"
순간 눈을 감은 수운월의 전신에 격렬한 파문이 일었다. 비로소 그녀는 나
타난 인물이 지옥천존이 아니라 자신의 옛 사부인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그녀의 내부에는 격렬한 동요가 물결치듯 일어났다.
"용서… 하세요. 못난… 제자를…!"
쿠___ 웅!
그녀는 쥐어짜는 듯한 음성으로 외치다가 그대로 모로 쓰러졌다. 내상이 심
각한 데다가 격렬한 죄책감을 느껴 혼절하고 만 것이었다.
재림사황은 쓰러진 수운월의 참담한 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배교의… 후예는 누구에게도 져서는 안 된다. 패배는 고독패왕에게 당한
그 한 번으로 족하다!"
이어 그는 수운월의 앞으로 다가서며 그녀의 피에 젖은 가냘픈 몸을 안아들
었다.
"교(敎)로… 돌아가라! 너를 다시는 패하지 않은 초인(超人)으로 만들어 주
마!"
스윽!
그는 마치 안개가 스치듯 밀실을 날아 나갔다.
"고독… 패왕(孤獨覇王)! 너와의 승부는 뒤로 미루어야만 하리라! 후훗! 그
옛날의 사황쌍려(邪皇雙呂) 두 분 조사만큼이나 강한 배교의 후예들이 곧
너를 찾아가게 될 것이다."
재림사황의 음울한 음성이 텅 빈 석실을 공허하게 울렸다.
모두가 떠나고 비어 버린 낙월정의 지하밀실, 그것은 다시 겁운(劫雲)의 시
작을 예고하고 있었다.

∑ 제 6 장 고루마정(固陋魔井)의 비밀(秘密)

진회하(秦淮河) 남단___
스으… 스으…
무성한 갈대숲이 끝간 데 없이 일망무제(一望無際)로 펼쳐져 있었다.
석양빛이 낮게 드리운 음울한 가을저녁,
휘___ 이잉…!
스산한 저녁 바람이 갈대숲을 흔들고 지나갔다.
문득,
"그… 그 분이 나의 아버님이란 말이지? 가장 위대했다던 그 전설적 승부사
가…?"
철벅… 철벅!
주위를 울리는 물소리와 함께 만감이 서린 소년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어
한 명의 소년이 강물에서 걸어나와 천천히 갈대밭으로 올라섰다.
전신이 흠뻑 물에 젖은 소년, 철운비!
바로 그였다. 지금 그의 허리춤에서는 예의 지옥혈겸이 묶여 있었다.
철운비의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새파랗게 질려보였다. 초겨울이 가까운 날
씨에 장시간 물 속을 헤엄쳐 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철운비는 지금 웃고 있었다. 그의 가슴
은 벅찬 감동으로 파도치고 있었다.
"고독패왕(孤獨覇王)! 그 분이 나의 아버님이시다. 아아…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는 주체할 수 없는 격동과 희열에 휩싸였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는 하루아침에 일개 천한 기녀의 아들에서 무림의
전설적 패왕(覇王)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닌가? 지금껏 그를 괴롭히던 신분의
열등감이 한 순간에 안개같이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한데 그 때였다.
"네가… 수운월(水雲月)이란 천한 계집의 아들이냐?"
돌연 한 줄기 음산한 일갈이 철운비의 상념을 깨뜨렸다.
"…!"
철운비는 흠칫 정신을 차리며 전면을 주시했다.
언제 나타났을까?
스으… 스으…
한 명의 흑포몽면인이 갈대꽃을 밟고 표표히 서 있었다. 전신을 온통 칠흑
같이 검은 천으로 감싼 인물이었다.
한 덩이 암운(暗雲)처럼 허공에 둥실 떠 있는 그 자의 모습은 흡사 지옥에
서 뛰쳐나온 아수라(阿修羅)의 그것이었다. 그의 전신에서는 전율적인 마기
(魔氣)가 뭉글뭉글 피어오르고 있었다.
철운비는 흑포몽면인이 나타나는 순간 갑자기 주위가 질식할 듯 무서운 위
압감에 짓눌리는 것을 느꼈다.
부르르!
그것을 느끼자 그의 신형이 부지불식간에 경련을 일으켰다.
"지… 옥… 천존(地獄天尊)?"
문득 철운비는 낮게 쥐어짜듯 중얼거리며 흑포몽면인을 주시했다.
"바로… 그렇다!"
흑포몽면인, 지옥천존은 몽면 속에서 음울한 어조로 대꾸했다. 몽면 사이로
드러난 그의 눈가에 서린 핏빛 노을이 한층 짙어졌다.
(대단한… 근골이다. 무영종(無影宗)이 이 어린아이를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구나!)
지옥천존은 빠르게 철운비의 근골을 살피며 몽면 속의 숨결이 다소 빨라짐
을 느꼈다. 그 역시 한눈에 철운비의 근골이 천하제일임을 알아본 것이었
다.
그는 핏빛 눈동자를 전율스럽게 번뜩이며 내심 염두를 굴렸다.
(이놈은… 제거해야만 한다. 지옥혈겸(地獄血鎌) 때문이 아니더라도… 장차
나의 대업(大業)에 결정적인 방해가 될 놈이 분명하므로…!)
빠직!
그의 검은 장포 속으로 일순 새파란 벼락이 흘렀다. 그것은 그가 손 끝에
전 내공을 모았기 때문이었다.
스읏!
지옥천존의 손이 서서히 앞으로 쳐들려졌다. 그와 함께 장포자락이 바람도
없는데 세차게 펄럭였다.
철운비의 전신이 숨막히는 긴장감으로 굳어졌다.
(피할… 길이 없다!)
그는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무공이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그로서는 지
옥천존의 살수를 도저히 피할 수 없다는 것을 통감했기 때문이었다.
빠지직!
마침내 지옥천존의 손이 장포 밖으로 드러났다. 희고 깡마른 그의 우수(右
手) 주위로는 불꽃같은 강흔(剛痕)이 일어났다.
지옥참(地獄斬)!
그것이 바로 무영종과 수운월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지옥마맥(地獄魔脈)의
천년마공(千年魔功)- 지옥참(地獄斬)의 정수(精髓)였다.
"잘… 가라 애송이!"
츠읏!
마침내 지옥천존은 휘황한 핏빛 안광을 토해내며 서서히 우수(右手)를 밀어
냈다.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마음이 독하시군 천존(天尊)!"
돌연 측면에서 한 소리 굉렬한 사자후(獅子吼)가 터졌다.
번___ 쩍! 콰아아아작!
동시에 한 명의 인물이 한 자루 철검과 한 덩이가 되어 일천 장 밖에서 벼
락같이 날아들었다.
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자후가 터졌을 때 그 신비인은 분명 일천 장 밖에 있었다. 한데, 그 음성
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는 지옥천존의 측면으로 육박하고 있지 않은가?
고오오!
일순 화산이 폭발하는 듯 굉렬한 검기의 폭풍이 장권을 휩쓸었다.
"고독… 패왕(孤獨覇王)?"
그와 함께 가공할 검기의 폭풍 속에서 지옥천존의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콰르르릉… 쩌저적…!
그리고 하늘과 땅이 일시에 허물어지는 듯한 굉렬한 폭음이 사위를 뒤흔들
었다.
아아… 보라! 그 한 차례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가자 사방 일천 장 내의 갈
대밭이 순간적으로 재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뿐이랴? 가공하게도 지면까지 쩍쩍 갈라져 균열이 일어났다. 그것은 도저히
인간과 인간의 힘이 충돌한 결과라고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크… 윽! 과연 무섭구나, 마맥검강풍(魔宗劍剛風)!"
직후 혼란의 장내를 뚫고 한 줄기 고통스런 신음성이 들렸다.
폐허로 변한 갈대밭 중앙에는 한 명의 인물이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
러질 듯 휘청거리고 있었다.
지옥천존(地獄天尊)!
바로 그였다.
그의 흑포는 갈가리 찢겨져 있었다. 찢겨진 흑포 사이로 그의 전신이 거북
등같이 쩍쩍 갈라져 있는 것이 보였다.
지옥천존은 이미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身)이었다. 그런 그이건만 돌연
나타난 신비인이 검기(劍氣)에 휘말려 무참하게 난자당한 것이었다.
대체 신비인(神秘人)은 얼마나 무서운 인물이기에 지옥천존정도의 인물을
이토록 무참하게 만들어 놓은 것일까?
한데… 없었다. 장내에는 지옥천존 혼자만이 우뚝 서 있을 뿐 예의 신비인
도 철운비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놓치지… 않는다 고독패왕! 비록… 당신이라 해도…!"
지옥천존은 북쪽을 주시하며 입술을 잘근 물었다.
파앗!
다음 순간 그는 지면을 박차고 그대로 북쪽으로 몸을 날려 까마득히 그 자
리에서 사라져 갔다.
종산(鍾山)의 북방, 험준한 산봉에 둘러싸인 하나의 폐허가 자리하고 있었
다. 그것은 이미 천년(千年) 이전에 폐허가 된 듯 거의 형태조가 유지하지
못한 석전(石殿)의 폐허였다.
화라락!
문득 어두운 암천(暗天)에서 하나의 장대한 인영이 폐허로 중앙으로 훌훌
날아 내렸다.
일신에 자색장포를 걸친 중년인으로 네모 반듯하게 각진 얼굴에 긴 눈꼬리
의 봉목을 지닌 인물이었다.
나이는 사십대 중반 정도, 만수지왕(萬獸之王) 사자(獅子)를 연상케 하는
중후한 인상의 중년이었다. 가슴 아래까지 기른 운기도는 검은 수염은 자포
인의 기품과 위엄을 한층 더해 주었다.
자포인의 어깨너머에는 한 자루 녹슨 철검(鐵劍)이 걸려 있었다. 또한 그의
장포의 소맷자락에는 한 마리 흑룡(黑龍)이 살아 있는 듯 생생하게 수놓여
져 있었다.
지금 자포인의 옆구리에는 한 명의 소년이 안겨 있었다. 흠뻑 물에 젖은 낡
은 폐포를 걸친 소년은 바로 철운비였다.
철운비의 가슴은 온통 벅찬 격동으로 들끓고 있었다.
(아아… 바로 이 분이시다!)
그는 자포인의 무쇠같은 팔에 안긴 채 만감이 뒤엉킨 눈으로 자포인을 올려
다 보았다. 그의 두 눈이 격렬한 파문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이 제왕(帝王)의 풍도를 지닌 자포인이 누군지 알아차렸
다. 그것은 비록 자포인에게 저격당한 지옥천존의 경악성을 듣지 못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핏줄, 그렇다. 그것은 본능적인 피의 흐름에서 느낄 수 있는 절실한 육감이
었다.

-고독패왕(孤獨覇王) 철무정(鐵無情)!

이미 철운비의 가슴에 또 다른 운명의 화인을 찍은 인물, 바로 그였다.


철운비가 위기에 닥친 결정적인 순간 고독패왕이 나타나 지옥천존의 마수를
저지시킨 것이었다.
문득 고독패왕은 우울한 어조로 탄식했다.
"지옥… 혈겸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었들 때 반신반의했는데… 사실이었구
나!"
스윽!
그는 철운비를 안고 폐허의 중앙으로 들어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두 사람의 앞에 다 허물어진 하나의 성문(城門)이
나타났다.
반쯤 무너진 가운데 검푸른 이끼가 가득 뒤덮인 성문 위에는 흐릿하게 고루
(固陋)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고루의 문양 아래 천년(千年)의 풍상에 삭은 네 자의 대전체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고루… 성전(固陋聖殿).>
글의 내용은 그러했다.
고독패왕은 여전히 철운비를 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무영종(無影宗)이 금릉에 나타났을 때부터 모든 일이 본좌의 이목을 벗어
나지는 못했다. 어쨌든 지옥혈겸이 지옥일맥(地獄一脈)의 무리의 손에 넘어
가지 않아 다행이다."
뚜벅!
그는 진중한 음성으로 말하며 성문을 지나 폐허의 중앙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이끼에 덮인 하나의 석정(石井)이 자리하고 있었다. 여러 개의 돌
을 쌓아 만든 우물인 그것은 아주 오래된 듯 온통 검푸른 이끼로 뒤덮여 있
었다.
우물 옆에는 하나의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고루… 마정(固陋魔井).>

그것이 우물의 이름인 듯했다.


고독패왕은 고루마정(固陋魔井)의 앞에 이르러 철운비를 내려 놓았다.
"도…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철운비는 더듬거리며 고독패왕에게 포권했다.
그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만일 고독패왕과 시선이 마주치면 자신의
내부의 격동을 들킬 것 같아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하… 감사를 해야 할 쪽은 본좌 쪽이야. 지옥혈겸이 지옥천존의 손에 들
어갔다면… 모든 게 끝장났을 테니까!"
고독패왕은 온화하게 웃으며 철운비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순간 그의 두 눈에 언뜻 경탄의 빛이 스쳤다. 그 역시 철운비의 뛰어난 근
골을 알아본 것이었다.
문득 고독패왕은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래… 이 아이에게 도박을 걸어 봐야겠구나!)
츠읏!
그의 눈빛이 모종의 결심으로 아주 강해졌다.
"앉거라! 네게 해 줄 이야기가 있다."
그는 철운비에게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어 그 역시 고루마정 옆의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감사합니다!"
철운비는 공손히 대답하며 고독패왕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의 공손한 태도에 고독패왕은 은은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는 철운비를 바라보며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본좌는 두 가지 신분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황실의 종친인 흑룡왕(黑龍
王)이란 신분이고… 또 하나의 신분은 고독패왕(孤獨覇王)이라고 알려진 것
이 그것이지."
"…!"
철운비는 그 말에 흠칫했다.
(역시 이… 이 분이 흑룡왕(黑龍王)이시기도 했구나!)
그의 내심은 심한 격동으로 다시금 흔들렸다.
그제서야 그는 이해할 수 있었다. 종산(鍾傘) 흑룡왕부(黑龍王府)에서 그토
록 자신의 마음을 끌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흑룡왕부(黑龍王府)!
그곳에는 바로 자신을 낳아준 친부(親父)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또한 철
운비 자신이 고귀한 황실일족(皇室一族)임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때 격동을 금치 못하는 철운비의 귓전으로 다시 고독패왕의 담담한 음성
이 이어져 나왔다.
"어린 시절, 본좌는 늘 외로웠다. 그래서 종종 이 천 년 된 폐허에 혼자 놀
러오곤 했지."
"…!"
고독패왕은 감회 어린 시선으로 주위의 폐허를 돌아보았다.

<고루성전(固陋聖殿)!>

그것이 천년폐허의 이름이었다. 그곳은 무림사상 가장 강했던 한 명의 초인


(超人)이 살던 곳이었다.

-고루대제(固陋大帝) 능잠(陵潛)!

저 마도무림의 전설 사대마맥(四大魔脈)의 하나인 고루마맥(固陋魔宗)의 마


지막 전인!
고루대제는 배교의 사악한 여마 소수여황(素手女皇)을 제거한 뒤 이곳 종산
에 고루성정(固陋聖殿)을 쌓고 고독하게 살다가 죽어갔다.
그런 그가 이곳에 고루성전을 쌓은 것은 바로 이곳에 고루마맥(固陋魔宗)의
발원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고루마정(固陋魔井)!

바로 그것이었다. 이 고루마정에는 고루마맥(固陋魔宗)의 천년유학들이 감


추어져 있었다.
어린 시절의 고독패왕 철무정은 우연히 고루마정(固陋魔井)에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고루절학을 얻게 되었다.
발군의 자질을 지닌 그는 십 년 만에 고루일맥의 절학을 십성(十成) 완성했
다.
고루일맥(固陋一脈)의 절기는 사대마맥(四大魔脈)의 하나에 낄 정도로 초절
한 것이었다.
고루일맥이 유일하게 상좌를 양보하는 것은 사대마맥 중 최강이라는 천마맥
(天魔宗)의 절기뿐이었다.
본시 고독패왕은 황실비전의 절기를 연마한 몸이었다. 거기에 고루일맥의
절기까지 얻은 그는 거의 천하무적(天下無敵)의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극강해지기는 했으나 철무정은 무림사(武林事)에는 흥미가 없는 인
물이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실력을 전혀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한데 십팔년(十八年) 전, 철무정은 한 명의 여인을 만나면서 무림에 뛰어들
게 되었다.

-혈지(血芝) 능희연(陵姬燕).

그녀가 바로 그 장본인이었다.
어느 비오는 날 한 명의 미녀가 일단의 무리에 쫓겨 흑룡왕부(黑龍王府)로
뛰어들어 왔다.
혈지(血芝) 능희연, 후일 철운비를 낳게 되는 그녀였다.
능희연은 일단의 무서운 암중세력에게 쫓기고 있었다.
<지옥… 마교(地獄魔敎)>

그 비밀세력은 바로 지옥마교(地獄魔敎)였다.
지옥마교는 사대마맥(四大魔脈) 중 지옥마맥(地獄魔脈)의 후예였다.
그들의 마수(魔手)가 뻗히지 않은 곳은 천하에 없었다. 그대로 간다면 십
년 내 무림뿐 아니라 대명황실조차 지옥마교(地獄魔敎)에 장악당할 형편이
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철무정는 분연히 일어서서 지옥마교와 싸우게 되었다.
바로 고독패왕(孤獨覇王)이라는 위대한 이름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무림인들은 그저 그가 무공에 미친 승부사라고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몇몇
고인들을 빼고 고독패왕의 손에 패사한 자들은 모두 지옥마교(地獄魔敎)에
서 뿌려 놓은 간세들이었다.
단 일년(一年), 그 사이 놀랍게도 지옥마교의 거대한 조직은 고독패왕 일
인에 의해 뿌리째 뒤흔들리고 말았다.
이에 대노한 지옥마교의 교주는 자신이 직접 나서 고독패왕을 제거하기로
작정했다.

-지옥노조(地獄老祖) 능황(陵皇)!

그는 교주(敎主)인 자신이 직접 나서면 능히 철무정을 제거할 수 있으리라


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옥노조가 사대마맥 중 지옥마맥(地獄魔宗)의 후예라면 철무정은
고루마맥(固陋魔脈)의 후예였다.
양인은 이내 누구도 상대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두 사람은 예상대로 동패구상(同敗具傷)하고 말았다. 고독패왕 철무정
이 갑자기 실종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대결전의 결과 이인(二人)은 서로 심각한 내상을 입었다. 하지만 나이 이미
백 세에 가까운 지옥노조 능황 쪽의 상세가 보다 엄중했다.
우세를 점한 철무정조차도 그때 입은 내상을 회복하는 데 십 년이 소모되었
을 정도였다. 당연히 능황(陵皇)은 죽지 않았으면 폐인이 되었을 것이다.
철무정은 그렇게 믿고 지옥마교(地獄魔敎)가 지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했
다.
그래서 그는 흑룡왕부(黑龍王府)에 칩거한 것이었다.
한데 그로부터 십칠 년이 지난 지금, 그 옛날 지옥노조 능황만큼 강한, 아
니 어쩌면 그보다 더 강할지도 모를 무서운 마맥(魔宗)이 지옥마교에서 나
온 것이었다.
물론 그 자는 바로 지옥천존(地獄天尊)이었다.

말을 하는 철무정의 안색이 점차 창백하게 변해갔다. 실상 그는 방금 전 지


옥천존과 일초를 교환하면서 지옥천존에게 상처를 입혔으나 그 자신도 가볍
지 않은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철운비를 바라보며 다시 침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지옥마교는 십칠 년 전에 한 차례 좌절당했었다. 그런 그들이 다시 공공연
히 무림을 횡행하는 것은 그들이 지난 날에 비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음을
의미한다!"
"…!"
철운비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철무정의 말을 세이 경청하고 있었다.
문득 철무정의 안색이 어둡게 그늘졌다.
"어쩌면… 이제 본좌의 힘으로도 그들을 막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럴… 수가…!"
듣고 있던 철운비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고독패왕(孤獨覇王) 철무정!

더 이상 강할 수 없다는 전설적인 패왕(覇王)! 그의 입에서 비관의 말이 나


올 정도라면 이제 아무도 지옥마교(地獄魔敎)를 막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철운비는 절로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고독패왕 철무정은 문득 결연한 신색을 지으며 말했다.
"어쨌든… 본좌는 또다시 지옥마교와 싸울 작정이다. 하지만 이제 승운(乘
運)은… 그들 쪽에 있다. 그래서… 후사를 네게 부탁할 작정이다!"
츠읏!
그는 형형한 시선으로 철운비를 내려다 보았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철운비는 당혹감을 금치 못하며 고개를 들어 철무정을 마주보았다.
빠직…!
순간 이인(二人)의 시선이 허공에서 서로 마주쳤다.
그제서야 철운비의 모습을 제대로 본 철무정는 흠칫했다.
(이상도 하군! 이 아이는… 희연(姬燕), 그 사람과 아주 흡사하게 생겼다!)
그는 알 수 없는 의아로움을 느끼며 침음성을 발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내색지 않고 침중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고루… 마정(固陋魔井)을 네게 맡긴다. 그 중의 절기를 연마하여… 만일
본좌가 지옥마교에 패한다면… 네가 본좌 대신 지옥마교를 맡아야만 한다!"
그는 옆의 고루마정을 가리키며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철운비는 부친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명… 심하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그의 눈가에 문득 뜨거운 물기가 서렸다.
(이 분은… 당신의 죽음까지 예견하고 계시다!)
그는 부친의 비장한 결의를 깨닫고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적은… 그만큼 강하고 거대한 존재인 것이다.
문득 철무정은 침중한 기분을 떨쳐 버리려는 듯 껄걸 웃음을 터뜨렸다.
"하핫! 그래도 너는 노부보다 유리하다. 적이 너에 대해 아는 것보다 네가
적에 대해 아는 것이 더 많으니…!"
이어 그는 품 속에서 하나의 옥패를 꺼내들었다. 검은 묵옥(墨玉)으로 만들
어진 길쭉한 모양의 옥패인 그것의 표면에는 수많은 용(龍)들이 뒤엉킨 형
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묵룡보패(墨龍寶牌)>

이것이 그 옥패의 이름이었다. 그 중에는 황실 최강의 절기 두 가지가 감추


어져 있었다.
-용형제왕검결(龍形帝王劍訣)!
-묵룡벽정풍(墨龍霹霆風)!

한 가지의 초상승 검결(劍訣)과 초극경공술이 그것이었다.


"이것을… 갖고 가거라! 후일 도움이 될 것이다!"
철무정은 수중의 묵룡보패를 철운비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생명같이 소중히 여기겠습니다!"
철운비는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묵룡보패를 공손히 받아
들었다.
"자아… 이제 가라! 뒷일은 네게 맡긴다!"
철무정은 은은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오면…!"
철운비는 정중한 태도로 철무정에게 삼 배를 올렸다. 이어 그는 몸을 일으
켜 고루마정(固陋魔井)으로 다가갔다.
이윽고 고루마정의 옆에 이른 철운비는 뒤를 돌아보았다.
"…!"
그때 고독패왕 역시 형형한 시선으로 철운비를 주시하고 있었다.
(아… 버님!)
철운비는 소리없이 입 안으로 뇌까려 보았다.
다음 순간,
휘___ 익!
그는 망설임없이 몸을 날려 고루마정 안으로 뛰어들었다.
고독패왕은 곤혹한 눈빛으로 철운비가 뛰어든 고루마정을 주시했다.
(이상도 하구나. 저 녀석은 꼭 잃어버린 내 아들같으니…!)
피의 흐름을 속일 수 없는 것일까? 그것은 지극히 본능적인 느낌이었다.
이윽고 고독패왕은 흘깃 하늘을 올려다보며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친구…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미안해 하실 것 없소 패왕(覇王)! 이것이 각하에 대한 본좌의 최선의 경의
이니까!"
문득 어디선가 한 줄기 음울한 음성이 들려왔다.
스스스…
이어 고루성전의 정문으로 한 명의 인물이 유령같이 나타났다.
전신이 흠씬 피에 젖은 흑포인,
지옥천존(地獄天尊)-!
바로 그였다.
지금 그의 상의는 갈가리 찢겨져 있었다. 그러나 얼굴의 복면만은 여전히
쓰고 있는 모습이었다. 벌거벗은 그의 가슴에는 뇌전(雷電) 형상의 상처가
나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상처를 본 고독패왕의 눈에 언뜻 이채가 스쳤다.
"친구! 그대는… 본좌가 아는 사람인 것 같은데… 폭풍(暴風)…!"그가 거기
까지 말했을 때 지옥천존이 포권하며 고독패왕의 말문을 막았다.
"왕야(王爺)의 눈은 역시 무섭습니다그려! 하지만… 옛날의 단(丹)모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소이다!"
그는 침중한 어조로 잘라 말했다. 기이하게도 고독패왕과 지옥천존은 아는
사이인 듯했다.
고독패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때 지옥노조 능황을 구한 것이 자네였을 줄이야!"
스윽!
그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서서히 일어섰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그 자리
에 마치 하나의 산(山)이 솟아오른 듯했다. 그 엄청난 위압감과 기도는 천
하인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문득 고독패왕은 씁쓸한 고소를 지었다.
"변했군! 옛날의 자네라면… 결전장에 방수를 대동하지는 않았을 텐데…!"
스으…
그는 말과 함께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고루
성전의 주위에는 수많은 고수자들이 은신하고 있었다. 그 숫자는 무려 일천
을 헤아릴 정도였다.
지옥천존은 부인하지 않았다.
"용서하시기를… 아직은 제가 왕야에 못 미침을 아는 때문에 방수가 필요했
소이다!"
그는 고독패왕의 눈길에 부끄러운 빛을 띠며 말했다.
고독패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어쩌면… 이 고루일백(固陋一脈)의 성지에 뼈를 묻게 될지도 모르겠군!)
그는 내심 중얼거리며 씁쓸하게 고소를 지었다.
이어 그는 우수를 들어 고루마정(固陋魔井) 쪽으로 흔들었다.
꽈릉…!
그러자 한 소리 굉음과 함께 고루마정이 삽시에 함몰되어 버렸다. 그것은
지옥천존이 철운비를 추종한 것을 저어한 때문이었다.
고독패왕은 그제서야 지옥천존과 마주섰다.
"자! 이제… 시작해 보세! 후후! 지옥… 노조(地獄老祖) 능황이 자네를 얼
마나 잘 가르쳤는지 보세나!"
찌___ 저정!
그는 흔쾌히 웃으며 짊어지고 있던 철검(鐵劍)을 뽑아들었다. 그것은 고루
철검(固陋鐵劍)이라 불리는 고루일맥(固陋一脈)의 수호마병이었다. 달리 마
종지검(魔宗之劍)이라 알려진 환우팔천병(還宇八天兵) 중 서열 이 위의 마
검(魔劍)이 그것이었다.
"핫하… 그대에게는 일천(一千)의 방조자! 본좌에게는 고루철검(固陋鐵劍)!
훌륭한 승부가 되지 않겠나?"
고독패왕은 껄껄 대소를 터뜨리며 지옥천존을 바라보았다.
지옥천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왕야(王爺), 실례를…!"
스윽…
그는 지옥파멸마강(地獄破滅魔剛)을 일으키며 고독패왕의 앞으로 다가섰다.
다음 순간,
고오오 꽈르르릉___!
벼락치는 듯한 무서운 광풍이 주위를 뒤흔들며 양인 사이에서 일어났다.
고독패왕(孤獨覇王) 철무정(鐵無情)___!
지옥천존(地獄天尊)___!
더 이상 강할 수 없는 최강의 초인(超人)들…!
과연… 그들의 승부 결과는 어찌될 것인가?
∑ 제 7 장 익룡연(翼龍淵)의 기우(奇遇)

첨벙…!
끝이 없이 떨어지던 철운비의 몸이 돌연 수면과 충돌했다.
"크윽…!"
순간 철운비는 뼈를 에이는 듯한 지독한 한기에 신음성을 발하며 몸을 허위
적거렸다. 다행히 물은 별로 깊지 않았다.
위를 올려다 보니 손바닥만하게 하늘이 바라다 보였다. 그곳으로 빛이 들어
오고 있어 고루마정 안은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철운비는 시선을 모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쪽이군!)
문득 그는 눈을 빛내며 옆쪽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하나의 동굴이 흐릿
하게 드러나 보였다. 동굴은 아주 오래된 듯 온통 이끼로 가득 뒤덮여 있었
다.
한데 그것은 인공(人功)이 가해진 흔적이 나타나 보였다.
첨벙…!
철운비는 전신을 덜덜 떨며 그 동굴로 올라섰다.
동굴 속은 생각보다 건조했다. 그는 길게 뻗어 있는 동굴의 통로를 따라 걷
기 시작했다.
한데 그가 십여 장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을 때였다.
꽈르릉…!
돌연 둔중한 굉음과 함께 고루마정이 위로부터 붕괴되었다.
(아버님께서 지옥천존이 나를 추적하지 못하도록 퇴로를 끊어 놓으셨군!)
철운비는 부친 고독패왕을 생각하자 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부디 살아 계십시오! 소자가 단 한 번 만이라도 아버님이라 불러볼 수 있
도록…!"
그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중얼거렸다. 이어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겨 동굴 안
으로 걸어 들어갔다. 동굴 안에는 몇 개의 야명주가 박혀 흐릿한 빛을 뿌리
고 있었다.
"…!"
그 빛을 의지하여 철운비는 동굴의 양벽에 복잡한 문양(文樣)이 가득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일부가 이끼에 덮여 있었으나 대부분 이끼가 뜯겨져 있었다. 아마도
고독패왕이 그 문양을 읽기 위해 이끼를 뜯어낸 듯했다.
"…!"
철운비는 그 중 가장 가까운 문양 앞으로 다가갔다. 그 문양은 대전체의 글
로써 대충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고루절기(固陋絶技)는 천하최강(天下最强)이었다. 본 대제의 사부님이신


고루황(固陋皇)께서 불사마맥(不死魔脈)과의 싸움 이후 실종되시기 전까지
만 해도 그랬다.>

이 글을 쓴 것은 천 년(千年) 그 이전의 인물이었다.

고루대제(固陋大帝) 능잠(陵潛)-!
그는 고금최강자(古今最强者)로까지 거론되는 인물이었다. 그의 이름이 알
려진 것은 그가 전율스런 여사황(女邪皇) 소수여황(素手女皇)을 제거한 쾌
거 덕분이었다.
그의 고루절기(固陋絶技)는 천하최강이라 알려졌다. 그러나 실상 그의 고루
절기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천 년 그 이전, 고루대제의 사부 고루황(固陋皇)은 고루대제가 아직 젊었을
때 실종되고 말았다.
그 무렵 고루황은 남해(南海)에서 중원을 침습해 온 한 명의 무서운 마황
(魔皇)과 충돌했었다.
그리고, 그 후 또다시 사대마맥(四大魔脈) 중 불사마맥(不死魔脈)과 싸우러
가서 실종된 것이었다.
따라서 고루대제는 고루일맥의 완전한 절기를 얻지는 못했다. 고루대제가
얻은 것은 고루일맥 반부의 비급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반 쪽의 절기만으로도 그는 무적(無敵)이었다.

철운비는 벽면의 이끼를 뜯어내며 이어지는 고루대제의 글을 읽어 내려갔


다.

<사부 고루황께서는 불사마맥과 싸우러 가시기 전 이곳 고루마정(固陋魔井)


에 들르셨었다. 그 분은 최후절기를 이곳 어딘가에 남긴 듯한데 본 대제는
인영이 닿지 않아 그것을 찾아내지 못했다.>

고루대제의 서언은 거기서 끝나 있었다. 그 뒤로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구


결들이 벽면에 가득 적혀 있었다.

-고루철혈공(固陋鐵血功).
-철혈검결(鐵血劍訣).
-고루패왕참(固陋覇王斬).
-사멸마인(死滅魔刃).
-강시섭령술(彊屍攝靈術).
……

그와 같은 십종(十種)의 절기들!
이름하여 고루십종(固陋十宗)!
그것들은 모두 패도극강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 비례하여 그것들은 지극히 편협하고 잔독한 마공(魔功)의 냄새
를 물씬 풍겼다.
고루절기(固陋絶技)는 연마하는 사람의 성격을 편협하고 독선적으로 만드는
마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고독패왕 철무정이 고루절기를 연마하고도 마성에 빠지지 않은 이유는 그가
황실비전의 현문정종심결(玄門正宗心訣)을 연마했기 때문이었다.
철운비는 고루십종(固陋十宗)의 절기들을 훑어보았다. 무공에 관해서는 전
혀 문외한인 그가 쉽게 이해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문제점이 많았다. 그것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철운비는 우선 그것들을 훑어보는 것 만으로 그쳤다.
이어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겨 동굴의 끝으로 다가갔다.
동굴의 끝은 하나의 매끈한 석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한데 그곳에는 하나
의 가면이 걸려 있었다.
흉측한 고루(固陋) 형상의 가면은 고루황(固陋皇)이 남긴 두 가지 보물 중
하나였다.

-고루철검(固陋鐵劍).
-고루철면(固陋鐵面).

고루이보(固陋二寶)!
그 두 가지를 일컬어 그렇게 칭한다.
고루철면은 바로 고루일맥의 종사(宗師) 상징하는 것이었다.
고루대제 능잠은 그것을 사부 고루황에게서 직접 물려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고루철면(固陋鐵面)에 아예 손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고루철면의 아래에는 최근 새긴 듯한 두 가지의 구결이 금강지력(金剛之力)
으로 새겨져 있었다.

-단철패왕천강결(丹鐵覇王天剛訣)!
-패왕철수결(覇王鐵袖訣)!

그 두 가지 구결은 바로 고독패왕 철무정이 남긴 것이었다. 그는 황실비전


의 패왕천강(覇王天剛)과 고루절기를 합일시켜 그 두 가지 절기를 창안했
다.
단철패왕천강결(丹鐵覇王天강訣)과패왕철수결(覇王鐵袖訣),그것은 고루절기
이상으로 패도극강했다. 하나 그러면서도 광명정대함을 잃지 않은 초절기였
다.

(아버님은 역시 패왕(覇王)으로 부족함이 없는 분이시다!)


철운비는 부친 고독패왕이 남긴 구결을 보며 새삼 경외감을 금치 못했다.
그러다 문득 그는 눈을 번뜩이며 고독패왕의 금강지력을 주시했다. 그것은
매끈한 석벽에 한 자 깊이로 새겨져 있었다.
한데 그 글씨가 새겨진 면으로 하얀 횟가루 같은 것이 흘러나와 있지 않은
가?
"이것은 석벽이 아니다!"
철운비는 나직하게 신음하듯 부르짖었다.
이어 그는 눈을 번뜩이며 고루철면(固陋鐵面)을 벽에서 벗겨냈다. 그리고
힘껏 벽을 밀어보았다.
푸스스… 우르르…!
순간 놀랍게도 석벽 전체는 푸석푸석한 먼지를 일으키며 무너져 내리는 것
이 아닌가?
역시 그 벽은 돌로 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누군가 토벽을 쌓고 그 벽 위
에 횟가루를 발라 석벽으로 위장해 놓았을 뿐이었다.
아마도 고독패왕 역시 그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러나 그는 그 벽을 일부
러 허물어 보지는 않았다.
철운비는 기광을 빛내며 내심 염두를 굴렸다.
(아버님이 고루마정의 입구를 무너뜨리신 것도 내가 이 가짜 벽을 발견한
것을 계산하고 하신 것이었구나!)
그는 고독패왕의 치밀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어 그는 눈을 빛내며 무
너진 토벽의 안쪽을 주시했다.
그곳은 또 다른 동굴로 내부가 칠흑같이 어두웠다. 어둠 속으로 은은한 물
소리가 들릴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 동굴은 어디로 연결되는 것일까?)
철운비는 고개를 갸웃하며 동굴 안을 기웃거렸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번___ 쩍!
동굴의 깊은 곳에서 돌연 무엇인가 한 쌍의 시퍼런 광망(光芒)이 일어났다
가 사라졌다.
(무엇인가?)
철운비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는 성큼 동굴 안으로 걸어들어 갔다.
처음에는 칠흑같이 어두웠으나 점차 어둠에 익숙해지자 흐릿하게나마 주위
의 경물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동굴은 점점 넓어졌다.
그렇게 백여 장 정도 들어갔을까? 갑자기 동굴이 뚝 끊기며 하나의 넓은 연
못이 전면에 나타났다.
철운비는 그곳에서 잠시 멈춰섰다.
(이 주위에서 무엇인가 번뜩였는데…?)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연못의 주위를 돌아보았다.
문득 연못가에 반쯤 삭은 하나의 비석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비석 위
에는 대전체의 글이 다 문드러져 가는 형상으로 쓰여져 있었다.

<익룡연(翼龍淵).>

그와 같은 큼직한 글 아래로는 보다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연자(緣者)만이… 익룡(翼龍)을 얻으리라.


고루황(固陋皇) 절필(絶筆).>

아! 놀랍게도 그 글을 쓴 인물은 고루대제(固陋大帝)의 사부 고루황이었다.


철운비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인연있는 자가 익룡(翼龍)을 얻는다고?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는 연못 안을 들여다보며 고소를 지었다.
"설마 이 안에 용(龍)이라도 숨어 있단 말인가?"
그러다 문득 그는 이미 고루마정의 입구가 봉쇄된 것을 기억해 냈다.
"어쨋든 이 고루마정을 나갈 길이라고는 이 연못밖에 없으니… 한 번 들어
가 보자!"
그는 한 차례 길게 심호흡을 했다.
풍___ 덩!
이어 그는 망설임없이 연못 속으로 뛰어들었다.

익룡연(翼龍淵)은 그렇게 깊지는 않았다.


사오 장 정도 내려갔을까? 갑자기 연못이 옆으로 꺾어졌다. 그리고, 꺾여진
그곳에 하나의 수중 동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십 장이 넘는 넓이의 수중 동굴의 안쪽으로부터는 흐릿한 빛이 흘러들어 오
고 있었다. 아마 이 동굴은 외부로 연결되어 있는 듯했다.
빛을 본 철운비는 기뻐하며 즉시 그 쪽으로 헤엄쳐 갔다. 어릴 때부터 조룡
탄(釣龍灘)의 거친 험류를 타고 놀았던 그의 수영 솜씨는 가히 발군이었다.
촤아…!
철운비는 물살을 빠르게 헤치며 빛을 향해 다가갔다.
한데 그 수로(水路)의 중간부분에 무엇인가 시커먼 물체가 웅크리고 있는
것이 언뜻 눈에 보였다. 높이는 오, 륙 장 정도, 전체가 거무튀튀한 빛을
띠고 있는 물체였다.
철운비는 그 물체를 단순히 바윗덩이로만 생각했다. 한데 철운비가 그 바위
같은 물체의 오 장 앞으로 다가갔을 때였다.
번___ 쩍! 빠지직!
돌연 바위같은 물체의 중간에서 한 쌍의 시퍼런 광망이 폭사되었다. 그 빛
덩이는 바로 방금 전 철운비가 본 그 광망이었다.
그 때였다.
카___ 아악!
돌연 그 괴물체가 무서운 괴성을 토하며 벌떡 일어섰다.
오… 보라! 놀랍게도 그것은 한 마리 거대한 괴룡(怪龍)이 아닌가?
"익… 룡(翼龍)!"
쏴아…!
순간 철운비는 대경실색하며 황급히 뒤로 퉁겨졌다.

-익수룡(翼水龍)!

그렇다! 그 괴물체는 바로 상고시대에 살았던 익수룡(翼水龍)이었다. 일어


선 키가 무려 십여 장이나 되는 상고의 거대한 익룡(翼龍)인 것이다! 그것
은 전신이 검붉은 비늘로 뒤덮여 있었다. 무쇠 같은 부리는 일 장에 가까웠
으며 날개는 너무 커서 수중 동굴 속에서는 제대로 펴지도 못하고 있었다.
철운비는 돌연한 익수룡의 존재에 까무러칠 듯 놀랐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그 익수룡은 더 이상 철운비를 쫓아오지 않았다.
"…!"
철운비는 의아함을 느끼며 비로소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익수룡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내 그는 익수룡의 한쪽 발목이 굵은 쇠사슬에 묶여
벽에 박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흠! 묶여 있었군!"
철운비는 그제서야 안심하고 익수룡의 앞으로 내려섰다.
꾸___ 어억!
순간 익수룡은 철운비를 바라보며 입을 딱 벌리고 괴성을 내질렀다.
그것은 겉보기에는 매우 흉맹해 보였다. 그러나 그 눈빛은 무엇인가 간절한
갈구를 담고 있지 않은가?
철운비는 첫눈에 알아차렸다.
"이봐! 그 쇠사슬을 풀어달란 말이냐?"
철운비는 장난삼아 익수룡에게 말을 걸었다.
꾸억…!
그러자 놀랍게도 익수룡은 철운비의 말을 알아들은 듯 구슬프게 고개를 끄
덕이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에 철운비는 해연히 놀랐다.
(가만히 보니 꽤 불쌍해 보이는데…!)
그는 고소를 지으며 익수룡을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어디 보자! 내가 도와 줄 수 있는지…!"
그가 다가가자 익수룡은 옆으로 물러서 철운비가 쇠사슬을 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꾸욱…!
익수룡의 한쪽 발목을 묶고 있는 쇠사슬은 약 이 장 길이로 굵기는 손가락
정도였다.
한데 기이하게도 그것은 전혀 녹이 슬지 않은 모습이었다. 예리하리 만큼
새파란 빛이 번뜩거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쇠사슬의 자질이 범상치 않음
을 보여 주었다.
(이건 어찌해 볼 수가 없겠는데…!)
철운비는 쇠사슬을 살펴보니 난감한 듯 검미를 모았다.
그러다 문득 그는 자신에게 있는 지옥혈겸(地獄血鎌)을 떠올렸다.
(어쩌면 지옥혈겸이 이것을 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곧 허리에 묶어둔 지옥혈겸을 풀었다. 지옥혈겸의 날이 드러나자 수중
동굴 안은 시뻘건 혈광으로 물들었다.
꾸우우!
익수룡도 지옥혈겸에서 번지는 그 핏빛의 섬뜩한 예기에 접하자 두려운 듯
몸을 도사렸다.
철운비는 심호흡을 한 뒤 지옥혈겸을 움켜쥐고 익수룡의 발목을 묶고 있는
쇠사슬을 힘껏 내리쳤다.
쩌___ 엉!
귀청을 찢는 요란한 쇳소리가 주위를 진동했다. 그와 동시에, 놀랍게도 쇠
사슬이 반 정도 뭉턱 잘려진 것이 아닌가?
"된다!"
철운비는 눈을 크게 뜨며 희열의 외침을 발했다.
쨍…!
재차 지옥혈겸을 내려치자 철삭은 마침내 쇳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꾸… 어억!
쇠사슬이 끊어지자 익수룡은 기성을 내지르며 환했다.
"어이쿠…!"
촤아아!
그 바람에 철운비는 그만 물살에 휘말려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꾸억…!
그러자 익수룡은 미안한 듯 낮게 울며 철운비의 옷깃을 물어 그를 바로 세
워 주었다.
"조심해! 잘못하다가는 네녀석의 덩치에 깔려 죽겠다!"
철운비는 짐짓 눈을 부릅뜨며 익수룡의 머리통을 한 번 후려치는 시늉을 했
다.
그러다 문득 그는 쇠사슬이 박혀 있던 석벽에 몇 자의 글이 쓰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대라철삭(大羅鐵索)은… 지옥일맥(地獄一脈)의 수호마병 지옥혈겸(地獄血


鎌) 만으로 끊어진다. 그대가 지옥혈겸을 지녔다면 진정한 인연자(因緣者)
라 할 수 있다. 이놈의 이름은 수호익룡(守護翼龍)이라고 하는 잠마혈맥(潛
魔血脈)의 수호영물이다. 노부 고루황(固陋皇)은 남해 잠마혈맥을 패배시킨
후 그 전리품으로 이놈을 얻었다. 수호익룡을 얻는다면 그대는 노부 고루황
과 잠마일맥(潛魔一脈)의 진전을 이을 인연자라 할 수 있다.>

글의 내용은 대략 그러했다.
기록자는 바로 고루황(固陋皇)이었다.
수호익룡(守護翼龍)이라 일컬어지는 익수룡! 그것은 본래 남해 잠마혈맥의
수호영물이었다.
잠마혈맥은 저 사대마맥(四大魔脈) 중 가장 신비하다는 일족이었다.
천 년(千年) 그 이전, 당시 잠마일족(潛魔一族)의 종사는 야심을 품고 중원
에 들어왔었다.
그러나 그는 중원에 들어서자마자 한 명의 무서운 초인(超人)에 의해 가로
막히고 말았다. 그가 바로 고루황이었다.
고루황과 잠마(潛魔)의 후예는 무려 칠주칠야(七晝七夜)를 싸웠다. 그리고,
결국 반초 차이로 잠마(潛魔)의 후예가 고루황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잠마의 후예는 피눈물을 흘리며 다시 남해로 돌아갔다. 그때, 잠마의 후예
가 패배한 증거는 고루황에게 주고간 것이 바로 수호익룡(守護翼龍)이었다.
수호익룡을 받은 고루황은 그것을 어디에 쓸 것인가 고심했다. 그러다 결국
는 수호익룡을 대라철삭(大羅鐵索)으로 묶어 고루마정(固陋魔井)을 지키도
록 한 것이었다.
그것이 천 년 이전의 일이었다.
꾸워…!
문득 수호익룡이 석벽의 글을 읽고 있는 철운비의 등을 부리로 밀었다.
철운비는 몸을 돌리며 수호익룡의 부리를 다독여 주었다.
"좋아! 네 녀석과는 꽤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빙긋 미소지었다.
이어 그는 시선을 돌려 빛이 들어오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선… 이곳을 빠져나가고 보자!)
촤아!
생각을 마친 순간 그는 즉시 물살을 헤치며 앞으로 헤엄쳐 나갔다.
구우…!
그러자 수호익룡은 낮게 울부짖으며 철운비의 뒤를 뒤뚱뒤뚱 걸어 쫓아갔
다. 그 모습은 실로 우스꽝스러웠다.

여명(黎明), 뿌연 어둠이 주위를 뒤덮고 있었다. 아직 해가 뜨려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할 듯 주위는 깊은 적요 속에 잠겨 있었다.
스으… 스으!
음습한 새벽 안개가 진회하 일대를 뒤덮고 있었다.
그 뿌연 안개는 낙월정(落月亭)의 폐허에도 소리없이 흐르고 있었다.
무참하게 파괴된 낙월정의 폐허는 여명의 어둠 속에 황량하게 널려 있었다.
"…"
언제부터인가 황량한 낙월정의 폐허에 하나의 작은 인영이 석상같이 서 있
었다.
윤기 흐르는 장발에 낡은 폐포를 걸친 소년, 철운비___ 바로 그였다.
주위의 어둠 탓일까? 새하얀 그의 얼굴은 창백해 보인다. 지금 철운비는 음
울한 상념이 깃든 시선으로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잠룡헌(潛龍軒)이 있던 자리였다.
잠룡헌이 있던 지면은 무엇인가 강력한 역도에 의해 움푹 파여져 있었다.
그 구덩이 속, 찢어진 철문(鐵門)의 잔해가 뒹굴고 있었다.
철운비는 그 철문의 잔해를 바라보며 가슴이 무겁게 굳어졌다.
(아아… 결국 변을 당하신 것일까? 어디에도 계시지 않으니…!)
그의 눈이 고통으로 어지러졌다. 그가 괴로워하는 이유는 바로 낙월부인(落
月婦人) 수운월의 안위 때문이었다.
자신을 친부모로부터 떼어 놓은 저주스러운 여인… 그러나 수운월은 어쨌든
자신을 지금까지 길러준 어머니 같은 여인인 것이다.
철운비는 고루마정(固陋魔井)을 빠져나온 후 곧 고루성전(固陋聖殿)으로 가
보았다.
그러나 그가 본 것은 푹풍이 스치고 지나간 듯 황폐하게 변한 고루성전의
폐허뿐이었다.
고독패왕(孤獨覇王)과 지옥천존(地獄天尊)!
그 두 절대자(絶代者)의 승부에서 누가 이겼는지 철운비로서는 알 수 없었
다.
고루성전을 둘러본 철운비는 급히 낙월정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잠룡헌의
밀실은 이미 누군가에게 파괴된 후였고 수운월도 온데간데없이 실종되어 버
리고 없었다.
수운월의 실종은 철운비의 가슴에 칼을 대는 듯 예리한 고통을 안겨 주었
다. 그 고통 속에서 철운비는 비로소 수운월이 자신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
한 존재였는지 절감 할 수 있었다.
츠읏!
문득 어둠 속에서 철운비의 두 눈이 새파랗게 작렬했다.
"지옥… 천존(地獄天尊)이든 누구든… 결코 용서치 않겠다! 그 분을… 괴롭
힌 자는…!"
그는 다부진 결의가 깃든 음성으로 낮게 중얼거렸다.
한데 보라! 중얼거리는 철운비의 이마 위로 은은한 붉은 점이 떠올랐다.
사람 눈(目)의 형태를 한 붉은 점,
-적목하령정(赤目邪靈精)!

아!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에 떠오르자 철운비의 이마에는 흡사 또 하나의 눈이 생겨난 듯했다.
그것은 신비롭고도 사이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기이한 모습이었다.
"구주… 팔황(九州八荒)을 뒤져서라도 나의 그 분을 찾아내겠다. 그러기 위
해서는… 정말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철운비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중얼거렸다.
"기왕 무공일도(武功一道)에 든 이상…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가장 강한 무적
자(無敵者)가 되겠다. 후훗! 그래야 위대하신 나의 아버님의 명예에도 누를
끼치지 않게 될 테니…!"
그는 어두운 하늘을 보며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그런 그의 눈에 당당한 제
왕(帝王)의 위엄을 지닌 한 중년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독패왕(孤獨覇王) 철무정!

바로 그였다. 가장 위대한 전사(戰士)이자 최고의 승부사인 천하제일존(天


下第一尊)!
철운비는 그가 자신의 부친이라는 사실에 다시금 가슴이 벅차 오르는 것을
느꼈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호호! 대단히 광오하신 꼬마도련님이시로군! 감히 천하무적을 입에 올리다
니…!"
돌연 요악하고 음사한 여인의 음성이 철운비의 뒤에서 들려왔다.
그러나 철운비는 달리 놀라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돌연한 여인의 교소에
놀랄 만도 했으나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일 장 뒤,
화라락… 스으… 스으…!
언제 나타났을까?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안개 속에 한 명의 여인이 유령같이
서 있었다.
우물(尤物)!
그렇게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여인는 한 마디로 인간우물(人間尤物)이었다. 요악하면서도 처절하도록 아
름다운 옥용, 그것은 가슴 철렁하도록 충격적인 미(美)의 결정체였다.
비단 용모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매 또한 완벽에 가까웠다. 만지면 터
질 듯 풍성하고 농염한 몸매, 그 자극적인 굴곡의 흐름은 필설이 따르지 못
할 정도였다.
한데… 아! 실로 아찔했다.
여인은 그 농염한 몸매에 속이 훤히 비쳐 보이는 반투명한 나삼 하나만 걸
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차라리 걸치지 않은 것보다 더 자극적이었다.
사발을 엎어 놓은 듯 풍염한 젖무덤, 그 위에 떨어 맺힌 두 알의 자주빛 포
도송이까지 나삼 안으로 훤히 들여다 보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한 손에 들어올 듯 잘룩한 세류요, 움푹 들어간 귀여운 배꼽, 팽팽한 아랫
배, 그리고 탐스러운 허벅지 사이의 거뭇거뭇한 체모가 덮인 구릉까지 은은
하게 드러나 보였다.
또한 붉은 안개가 서린 방초숲 사이로 여인의 옹달샘까지 은근히 엿보며 보
는 이로 하여금 정신이 아찔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철석간담을 지닌 장부라 해도 눈앞의 나삼여인을 보는 순간 넋이 나
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철운비 그는 달랐다. 그는 냉철한 시선으로 나삼여인의 아래 위를
훑어보았다.
"당신은… 누구지?"
그는 극히 무심한 음성으로 물었다.
순간 철운비의 태도가 예상 밖인 듯 나삼여인의 두 눈에 언뜻 이채가 솟았
다.
(요… 자식 봐라? 천존(天尊) 각하까지도 바로 보기를 두려워 하는 내 모습
을 보고도 전혀 흔들리지 않다니…!)
그녀의 방심이 문득 야릇한 흥분으로 설레였다. 비록 어리긴 해도 자신의
몸매가 풍기는 무나운 유혹에 태연한 상대는 난생 처음 만났기 때문이었다.
나삼여인은 녹아난 듯 고혹적인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호호…! 이 누님이 누구냐고? 이 누나는 지옥천존(地獄天尊) 막하 삼패(三
覇)의 막내, 나찰관음(羅刹觀音) 환요(幻妖)라고 하지요!"
그녀의 목소리는 더할 수 없이 나긋하고 부드러웠다. 게다가 그녀의 아름다
운 옥용에는 봄햇살 같은 요악한 미소가 번져 눈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그 미소를 접한 철운비는 은은하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가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그것이 바로 나찰환희소(羅刹歡喜笑)라는 절
정사법임을, 그러나 놀랍게도 그 나찰환희소조차 철운비에게는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철운비의 내부에 만사(萬邪)의 정수인 적목사령정의 천년내공(千
年內功)이 잠재한 탓이었다.
그것을 알 리 없는 나삼여인, 나찰관음 환요는 철운비가 자신의 사술에 전
혀 반응을 보이지 않자 당혹함을 금치 못했다. 그녀로서는 이런 경우를 생
전 처음으로 겪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찰관음(羅刹觀音) 환요(幻妖)? 이름 한 번 괴상하군. 한데… 본인에게
무슨 용무가 있지?"
철운비가 우울한 눈빛으로 나찰관음을 바라보며 물었다.
나찰관음은 당혹함을 감추기 위해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꼬마도련임을 뵙고 싶어하는 분이 계세요. 본녀와 함께 가주어야겠어요!"
"지옥… 천존인가?"
철운비는 어른스레 뒷짐을 지며 태연하게 물었다.
나찰관음은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바로 그 분이 도련님을 뵙고 싶어 하세요!"
그러나 철운비는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유감이군! 본인도… 그를 한 번 만나보고 싶지만… 지금은 달리 갈 곳이
있어 안 되겠어!"
그 말에 나찰관음의 옥용이 싸늘하게 변했다.
"이미… 그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아직도 모르나요?"
그녀는 차갑게 말하며 사뿐 철운비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나 철운비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태연하게 나찰관음의 풍
만한 몸매를 바라보며 문득 히죽 웃었다.
"과연… 그럴까?"
"휘___ 익!"
이어 그는 입술을 모아 날카롭게 휘파람을 불었다.
구워어어억___!
그 순간 갑자기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 무서운 괴성이 허공에서 터져나왔다.
나찰관음은 대경하며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학! 저… 저것은…!"
그녀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보라!
우르르… 고오오…!
한 마리 거대한 익룡(翼龍)이 하늘을 온통 뒤덮으며 벼락같이 지면으로 내
리덮치고 있지 않은가?
양 날개를 활짝 편 길이가 무려 이십 장이나 되는 거대한 괴수! 그것은 바
로 철운비가 고루마정(固陋魔井)에서 데리고 나온 잠마혈맥(潛魔血宗)의 수
호익룡(守護翼龍)이었다.
그것이 나타나는 순간,
콰드득… 구워어억!
천지를 뒤흔드는 용음과 함께 사위는 삽시에 휘몰아치는 돌풍에 휘말렸다.
"흐… 윽!"
그 와중에서 나찰관음은 공포에 질린 신음을 토하며 뒤로 퉁겨져 나갔다.
"핫하…! 다시… 보자! 못생긴 계집!"
직후 가공할 돌풍 속에서 철운비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고오오…!
지면으로 내리덮쳤던 수호익룡은 다시 굉렬한 돌풍을 일으키며 허공으로 치
솟고 있었다.
그 수호익룡의 등 위에는 언제 올라탔는지 철운비가 당당한 자세로 앉아 있
었다.
"얼굴은… 못생겼으나 당신의 몸매는 제법 괜찮아! 핫하! 그러니 너무 비관
하지는 말라고…!"
우르르!
철운비는 망연한 표정으로 지면에 서서 자신을 올려다 보고 있는 나찰관음
을 향해 손을 모아 외쳤다.
"돌아가서 지옥천존에게 전해두는 게 좋아! 후훗! 몇 년 내로… 나 철운비
가 그에게 빚을 받으러 간다고! 낙월정을 부수고… 나의 소중한 어머님을
괴롭힌 빚을…"
구___ 워어억!
철운비의 낭랑한 음성이 여명의 진회하를 뒤흔드는 가운데 그를 태운 수호
익룡을 거센 광풍을 일으키며 까마득히 사라져 갔다.
"…!"
나찰관음 환요는 망연한 표정으로 시야에서 사라지는 수호익룡을 바라보았
다.
"수호익룡의 주인이었단 말인가? 그 어린아이가…!"
그녀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넋나간 듯 중얼거렸다. 그녀는 너무도 놀란
나머지 수호익룡의 날개 바람에 나삼의 일부가 찢겨 희멀건 허버지가 드러
나 보이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지금, 그녀의 뇌리를 온통 차지하고 있는 것은 창백하고 단아한 철운비의
얼굴뿐이었다.
그녀는 여인 특유의 육감으로 자신이 만난 그 소년이 장차 지옥천존뿐 아니
라 그녀 자신의 운명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칠 존재임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
철운비(鐵雲飛)!
이것이 그 소년의 이름이었다. 운명(運命)이 정한 미래의 제왕(帝王)…

-남해(南海).

대륙에서 아득하게 벗어난 망망한 대해역.


그러나 그곳에도 사람들은 살고 있다.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자연히 조직이 생기고 파벌이 생기기 마련이다. 따라
서, 그 어디에건 은원의 소용돌이는 끊일 날이 없다.
언제부터인가 남해(南海)에는 하나의 거대한 세력이 용트림하고 있었다.

<혈해군벌(血海軍閥)!>

그들을 일컬어 그렇게 불렀다.


중원무림과는 전혀 상관없는 독자적인 전통을 구축해 온 남해의 대패세(大
覇勢)… 혈해군벌(血海軍閥)은 바다(海)를 생활의 근거지로 하는 자들에 의
해 구성되었다.
어부, 상인, 해적, 심지어 동영의 왜구들까지 그 세력권 안에 포함되어 있
었다.
혈해군벌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혈해군
벌이 천 년 이전부터 남해를 지배해 왔다는 사실만 알려졌을 뿐이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남해(南海)를 진동하는 거센 소문의 소용돌이가 있었
다.

-혈해구룡(血海九龍)!

그 이름이 해역을 지나온 상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무림을 떠들썩하


게 만들고 있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
했다.
아홉 사람? 아홉 조직?
모를 일이었다. 다만 혈해구룡(血海九龍) 중 하나만 움직여도 대륙을 피에
잠기게 할 수 있다는 소문만 전해질 뿐이었다.

혈해군벌(血海軍閥)…!
혈해구룡(血海九龍)…!

모든 것은 그저 아득한 신비의 장막 속에 감춰져 있을 뿐이었다.


신비한 소문과 거대한 풍운(風雲)의 발상지, 그곳은 천년(千年)의 바다(
海), 바로 남해(南海)였다.

아득한 수평선…
사위 어디를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물, 푸른 바닷물 뿐이다.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 남해의 해경(海景)은 언제봐도 드넓고 시원하다.
황혼, 핏빛 일륜(日輪)이 서쪽 수평선으로 떨어지며 최후의 빛을 불사르고
있었다.
바다는 온통 붉은 핏빛이다. 마치 불을 질러 놓은 듯 물결은 걷한 불덩이에
휩싸여 있었다. 그것은 실로 일대장관이었다.
구___ 워어억!
문득 황혼에 잠긴 남해에 한 소리 창창한 괴성이 울려퍼졌다.
고오오!
그와 함께 북천(北天)으로부터 하나의 작은 점이 나타났다.
그 작은 점은 전광이 흐르는 듯한 속도로 바다 위를 가로질러 날아왔다.
아! 익수룡(翼水龍)!
그것은 전신이 온통 붉은 비늘로 뒤덮인 한 마리 상고 익룡이었다. 흡사 범
선의 돛같이 펄럭이는 익수룡의 거대한 무려 이십여 장이나 되어 보였다.

-수호익룡(守護翼龍)!

바로 잠마일맥(潛魔일맥)의 수호영물인 수호익룡이었다.


수호익룡의 목에는 대라철삭(大羅鐵索)이 고삐같이 매어져 있었다. 헌데,
그 대라철삭을 잡고 수호익룡의 등에 타고 있는 한 명의 소년이 있었다.
철운비, 바로 그였다.
화라락… 스으… 스으…!
거친 바다바람이 수호익룡의 등에 올라타고 있는 철운비의 장발과 폐포를
요란하게 펄럭이게 만들었다.
"이봐, 천왕(天王)! 도대체 나를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냐?"
문득 철운비는 이마에 손을 대고 사방을 살피며 수호익룡에게 크게 외쳤다.
그는 수호익룡에게 천왕(天王)이란 이름을 붙여 주었다. 천왕(天王)은 금릉
을 떠난 후 줄곧 남행(南行)하여 이곳 남해에 이른 것이었다.
구워어억___!
그때 수호익룡은 철운비의 말을 알아들은 듯 길게 울며 머리로 전면을 가리
켰다.
수호익룡이 가리키는 수평선 끝에 하나의 작은 점이 아득하게 바라다 보였
다.

∑ 제 8 장 잠마별부(潛魔別府)의 천고기연(千古奇緣)

철운비는 아득한 수평선 끝을 주시하며 눈을 크게 떴다.


"섬(島)?"
그는 앉은 자리에서 길게 허리를 세우며 바라다 보이는 작은 섬을 바라보았
다.
고오오!
수호익룡은 더욱 힘차게 날개짓하며 그 점을 향해 다가갔다. 마침내 아득하
게만 보이던 점은 급격히 커지며 철운비의 눈에 들어왔다.
점(點)은 역시 하나의 섬(島)이었다. 그 섬의 규모는 별로 크지 않았지만
섬 중앙이 흡사 날카로운 칼날같이 치솟은 기형(奇形)의 섬이었다.
쿠르르르!
섬 주위로는 하얀 포말이 마치 테두리같이 둘러쳐져 있었다. 그것은 섬 주
위에 수많은 수중암초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콰르르르… 처___ 얼썩!
섬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그 주위에 있는 파도소리는 우뢰성과도
같이 들렸다. 그것으로 보아 배로는 누구도 그 섬에 접근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유일한 방법이라면 수호익룡을 타고 들어가는 쪽일까?
우워___ 어억!
콰아아…!
그때 수호익룡은 고향에 돌아와 기쁘다는 듯 크게 울부짖으며 섬 중앙에 치
솟은 석봉(石峯)으로 날아갔다.
석봉(石峯)의 중턱에는 하나의 동굴이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수호익룡은
섬에 이르자 곧장 그 석동(石洞)으로 날아갔다.
콰드득… 우르르…!
이내 수호익룡은 선풍을 일으키며 동굴의 입구에 내려섰다. 철운비는 전면
의 동굴을 주시하며 호기심 어린 눈을 빛냈다.
"천왕(天王)! 여기가 옛날 네 집이었느냐?"
그는 수호익룡의 등 위에서 날렵하게 뛰어내렸다.
구우우… 쿠쿠!
철운비의 물음에 수호익룡은 낮게 웅얼거리며 뒤뚱뒤뚱 동굴 안으로 들어갔
다.
동굴 전면의 벽에는 해풍(海風)에 마모된 갑골문자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
다.

<잠마… 별부(潛魔別府).>

글은 그런 뜻을 담고 있었다.
철운비는 동굴벽을 주시하며 내심 염두를 굴렸다.
(잠마별부(潛魔別府)! 역시 이곳은 천 년 이전에 중원에 들어갔다가 고루황
에 패해 물러갔다는 잠마일맥(潛魔一脈)의 후예와 관계 있는 곳인가?)
구우우…!
그때 잠마별부(潛魔別府) 안에서 수호익룡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철운비는 흠칫 놀랐다.
"천왕(天王)! 무슨 일이냐?"
그는 급히 잠마별부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아…!"
철운비는 낮은 탄성을 발하며 눈을 크게 떴다.
잠마별부 안은 넓은 지하광장이었는데 그 광장의 끝에는 반쯤 열린 철문(鐵
門)이 보였다.
한데 철문 옆 하나의 거대한 괴수의 골격이 누워 있었다. 언뜻 보아 그 골
격은 수호익룡과 같은 익수룡(翼水龍)의 시체임을 알 수 있었다.
머리에서 꼬리까지의 길이가 십여 장, 가슴 부위 흉골의 높이만도 이 장에
가까운 거대한 골격이었다. 그 익룡의 골격 주위에는 손바닥 만한 운기 도
는 검붉은 비늘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한데 보라! 지금 수호익룡은 그 익룡의 시체 앞에 쭈그리고 앉아 눈물을 뚝
뚝 흘리고 있지 않은가?
그 모습에 철운비는 눈썹을 모았다.
(이것은 혹시 이 녀석 어미의 유해가 아닐까?)
그는 수호익룡과 예의 골격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천왕(天王)! 너무 슬퍼하지 마라!"
이어 그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수호익룡의 머리를 다독여 주었다.
그리고는 반쯤 열린 철문 사이로 다가가 반쪽을 들여다 보았다.
헌데,
(윽!)
철문 안을 들여다 보던 철운비는 질겁하고 말았다.
눈(眼)!
한 쌍의 새파란 눈이 철문 안쪽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눈빛은 흡사 예리하게 날선 두 자루의 칼날과도 같아 철운비를 대경실색케
했다.
철문 안은 한 칸의 석실이었다. 석실의 사면에는 수많은 고서(古書)들이 가
득 쌓여 있었는데 그것은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곰팡이 냄새를 풍기며 썩어
가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좌의 석대(石臺)가 놓여져 있었다. 예의 눈 주인은 바로 그
석대 위에 단좌하고 있었다.
나이는 삼십 전후 정도 되었을까? 극히 단아하고 영준한 용모의 문사(文士)
였다. 그는 너무 단정하고 영준하여 오히려 사악하게 느껴졌다.
그는 머리 위에 하나의 옥관(玉冠)을 쓰고 있었으며 일신에는 고통스러운
검붉은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그 검붉은 장포의 가슴에는 하나의 고루 형
상이 생생하게 수 놓여져 있었다.
석대 위의 적포문사를 자세히 살펴보던 철운비는 이내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시체(屍體)…!)
그렇다. 그 적포인은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시신이었다. 그가 살아 있는 듯
생생하게 보이는 것은 그 인물이 생전 화신지경의 내공을 연마했기 때문이
었다.
문득 철운비의 눈빛이 적포인의 가슴에 새겨진 고루형상의 무뇌에 머물렀
다.
(고루(固陋)! 혹시 이 분은 고루대제(固陋大帝)의 사부였던 고루황(固陋皇)
이 아닐까?)
그는 호기심으로 눈을 번뜩이며 성큼 석실 안으로 들어섰다.
적포인의 시신 앞에는 두 가지의 물건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한 권의 양피
비급과 붉은 빛이 도는 여인의 비녀였다.
옥비녀(玉簪)-!
그것에서는 맑은 핏빛이 우러나오고 있어 일견하기에도 예사 물건이 아님을
느끼게 했다. 비녀의 표면에는 수많은 용(龍)이 뒤엉킨 문양이 새겨져 있었
다.
"…!"
철운비는 한눈에 그 문양에 오묘한 현기가 서려 있음을 알아보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옥비녀를 집어든 후 그 아래의 비급을 살펴보았다.

<고루유전(固陋遺典).>

비급의 표지에는 그와 같은 제목이 적혀 있었다.


"역시… 이 분은 고루황이셨다!"
철운비는 태연히 놀란 표정으로 석대 위의 적포인을 바라보았다.

-고루황(固陋皇)!

그렇다! 그 인물은 바로 고루마맥 사상 최강의 고수자라는 고루황이었다.


고루황은 남해(南海)에서 온 잠마(潛魔)의 후예를 패배시킨 후 연이어 불사
마맥(不死魔脈)의 마인과 충돌하여 심각한 부상을 입고 실종되었다고 한다.
한데 그런 그가 놀랍게도 잠마(潛魔)의 영토인 이 남해의 절해고도에 고독
하게 죽어 있는 것이 아닌가?
문득 철운비는 놀라는 바람에 자칫 실수하여 고루황의 시신을 건드리고 말
았다.
푸스스!
순간 고루황의 시신과 의복이 삽시에 재가 되어 스러져 버렸다.
"어엇!"
철운비는 대경하여 주춤 물러섰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어 석대 위에는
한 무더기의 회색 잿더미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철운비는 당혹함을 금치 못했다.
"이… 이런…! 부주의하여 고인의 유해를 손상시키다니…!"
그는 안타까움으로 발을 굴렀다.
고루황은 바로 자신의 부친인 고독패왕에게는 사조뻘 되는 인물이었다. 그
런 고루황의 유해를 손상시킨 데 대해 철운비는 큰 죄책감을 느꼈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스으…!
고루황의 유해가 부서진 재속에서 문득 은은한 서기가 번져나오는 것이 아
닌가?
철운비는 의아함을 느끼며 눈썹을 모았다.
(무엇이지?)
그는 조심스럽게 고루황의 유해가 부서진 잿더미를 헤쳐 보았다.
그러자 그 속에서 한 알의 용안(龍眼)만한 구슬이 나왔다. 그것은 전체적으
로 유백색을 띠고 있었는데 표면으로 은은하고도 요악한 벽광(碧光)이 흐르
고 있었다.
(원정… 내단(元精內丹)이다!)
철운비는 흥분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유백색의 구슬을 집어들었다.
원정내단(元精內丹)!
그렇다. 유백색 구슬은 고루황이 죽으며 자신의 평생 내공을 내단으로 형성
해 놓은 원정내단이었다. 그것을 손에 쥐는 순간 흡사 살아 있는 물체같이
은은한 온기가 느껴졌다.
철운비는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타개하시면서 내단을 응결하여 놓으시다니… 이것은 무슨 뜻인가?)
그는 내심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막강한 내공을 지녔던 고수자라도
죽기 전 단기를 한 곳으로 응집하지 않으면 내단을 형성할 수 없다.
한데 고루황은 무슨 이유인지 자신의 평생 내공을 원정내단으로 남긴 것이
었다.
철운비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루유전(固陋遺典)을 집어 들었다. 이어 그는
석대 앞에 단정히 꿇어 앉아 그것을 떨쳐 보았다.

<절정마도(絶情魔島)에 들어오는 방법은 수호익룡의 인도를 받는 길 외에는


없다. 따라서 이 글을 보는 그대는 어쨌든 잠마일맥(潛魔一脈)이나 나 고루
황(固陋皇)과 인연이 있는 자일 것이다.>
글의 첫머리는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고루황은 천기를 읽어 천 년 그 이후 자신의 후예가 이곳 잠마별부에 이를
것을 예견했다. 그래서 자신의 내공을 원정내단으로 남긴 것이었다.
"…!"
철운비는 호기심 어린 눈을 빛내며 다음 글로 읽어 내려갔다. 고루황의 글
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본황은… 불사마맥(不死魔脈)의 후예인 태양천마(太陽天魔)와 충돌하여 전


신 심맥이 재로 타버린 상태다. 그러므로 그대는 본황의 유해를 손상시켰다
고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中略…
동진(東晋) 건태(建太) 오년(五年), 남해(南海)에서 잠마(潛魔)의 후예가
북상중이라는 말을 듣고 그를 요격하러 가게 되었다.
십만대산(十萬大山)에서… 그와 마주치는 순간 본황은 크게 놀랐다. 왜냐하
면 전설적 잠마(潛魔)의 후예가 놀랍게도 여인… 이었기 때문이다.>

고루황의 글은 실로 놀라운 비사(秘事)를 담고 있었다.


천 년 이전, 고루황은 잠마(潛魔)의 후예와 충돌하게 되었다. 한데 상대는
놀랍게도 여인… 그것도 굉장한 미인이었다.

-잠마여제(潛魔女帝) 궁비연(宮飛燕)!

그것이 잠마후예의 이름이었다.


그녀는 최강의 전사(戰士)이며 동시에 최고의 미녀(美女)였다.
고루황 역시 당시 천하제일준이라 할 만한 미남이었다.
본래 고루마맥(固陋魔宗)에 옥형미황공(玉形迷皇功)이라는 사공(邪功)이 있
었다. 그것은 일종의 미공(美功)으로 연마하면 어떤 냉심(冷心)의 미인이라
도 넋나가게 할 만한 준수한 용모를 지니게 된다.
고루황과 잠마여제, 그들은 서로 대면한 순간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러나… 어쩌랴? 그들은 한 하늘 아래 공존할 수 없는 사대마맥(四大魔脈)
의 후예들인 것을… 결국 양인은 서로의 애틋한 마음을 감춘 채 충돌하게
되었다.
결과는 일천 초 만에 잠마여제의 패배로 끝났다. 그녀는 섭혼(攝魂)의 마력
이 담긴 옥형미황공(玉形迷皇功)에 마음이 흔들려 자칫 허점을 보인 것이었
다.
그 일초의 패배는 잠마여제의 자존심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그녀는 여인
이기 이전에 당당한 사대마맥 중 하나의 종사인 것이다.

-복수… 하고 말겠어요 반드시…!

잠마여제는 옥루를 흘리며 두 가지 물건을 남긴 채 남해로 날아갔다. 수호


익룡과 자신의 머리에 꽂고 있던 옥비녀, 바로 그것이었다.

-혈마옥잠(血魔玉簪)!

그렇게 불리는 옥비녀는 잠마일맥(潛魔一脈)의 사대중보(四大重寶) 중의 하


나였다.
그것은 금강불괴라도 깨뜨리는 무서운 암기였다. 또한 그 중에는 한 가지
무서운 마공구결이 감추어져 있었다.
고루황과 잠마여제는 그렇게 헤어졌다. 그것이 두 남녀의 처음이자 마지막
해후였다.
그리고 고루황은 얼마 후 불사마맥의 후예인 태양천마(太陽天魔)와 충돌하
게 되었다. 그 싸움에서 그는 태양천마의 태양마강(太陽魔剛)에 심맥이 타
버리는 중상을 입었다.
중상을 입은 고루황은 즉시 남해로 날아갔다.
그는 잠마여제의 소원이 바로 불사마맥을 쓰러뜨리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불사마맥은 너무 강해 고루마맥이나 잠마혈맥 한쪽의 힘만으로는 이
길 수 없었다.
그래서 고루황은 자신의 절기를 잠마여제에게 주어 그녀가 자신을 대신하여
불사마맥을 쓰러뜨릴 수 있게 해주려 했다.
그러나 운명은 엇갈리고 말았다. 고루황은 이곳 절정마도(絶情魔島)까지 왔
으나 잠마여제를 만나지 못했다.
그때 잠마여제는 모처로 잠마혈맥이 잃어 버린 천년지보를 찾으러간 뒤였던
것이다.

고루황의 글은 이제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철운비는 글을 읽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완전히 그 천 년의 비사(秘事) 속
으로 빠져드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의 시선은 다시 고루유전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용형마도(龍形魔島)라는 곳으로 마황혈정(魔皇血鼎)을 찾으러간


후였다. 결국… 본황은 그녀를 만나보지도 못하고 죽게 되었다. 이에 노부
가 평생 연마한 고루옥형미황공(固陋玉形迷皇功)을 원정내단으로 만들어 놓
고 죽을 생각이다. 또한 고루유전에는 내가 그녀를 위해 기록한 네 가지 무
공이 있다.
그 중 세 가지는 본 고루마맥의 천년절기이고 나머지 하나는 남해로 오는
도중 혈마옥잠에서 찾아낸 잠마의 절기다. 그대가 누구든… 이 모두 그대의
것이다. 한 가지 부탁이 있다면 본황의 희망이 고루일맥과 잠마일맥이 서로
를 도우며 공존하기 바란다는 것이다.
고루황(固陋皇) 절필(絶筆).>

고루유전(固陋遺典)의 서문은 그렇게 끝나 있었다.


그 뒤로 네 가지 절정무공의 구결이 빽빽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고루황의
기록대로 전반부의 삼종(三種) 절기는 옥형미황공 등 고루마맥의 천년절기
였다.
그리고 마지막 무공은 고루황이 혈마옥잠에서 찾아낸 잠마일맥의 천년절기
였다.

-잠마폭풍참(潛魔暴風斬)!

이것이 그 절기의 이름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장법(掌法)으로 그 중에는 혈


마옥잠을 암기로 실어 날리는 암수가 들어 있었다.
적은 설사 잠마폭풍참의 파천지력을 막아내더라도 뒤미처 발출된 혈마옥잠
에 격중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철운비가 이제껏 본 어떤 절기보다 악독
하고 신랄한 것이었다.

(또 하나의 은원을 짊어지게 되었다. 나의 운명은 역시 무림을 벗어나지 못


하는 것일까?)
철운비는 우울한 눈빛으로 고루유전을 덮었다.
"어쨌든… 이곳은 무공연마에는 적합한 곳이다. 당분간 이곳에 머물러 힘을
기르자!"
그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석실 사면의 벽에는 수많은 고서들이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그것들은 대부
분 무공과 관계있는 비급들이었다.
잠마별부(潛魔別府), 이곳은 바로 잠마일맥 종사들의 연공장소였던 것이다.
"…!"
한차례 주위를 둘러본 철운비는 이윽고 몸을 일으켜 석실을 나섰다.

석실 밖, 수호익룡은 어디갔는지 보이지 않고 예의 익룡의 시체만 뒹굴고


있었다.
(아마도 잠마여제는 이놈을 타고 용형마도(龍形魔島)에 간 듯한데… 그녀는
돌아오지 않고 이놈만 돌아와 이곳에서 죽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
까?)
철운비는 익룡의 시체 앞에서 검미를 모으며 염두를 굴렸다.
바로 그 때였다.
구워어억…!
문득 철운비의 귓가에 어디선가 수호익룡의 긴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절정마도(絶情魔島)!

이곳은 잠마(潛魔)의 성역(聖域) 절정마도였다.


-운중산(雲中山)!

산서(山西) 북단에 위치한 험산(險山)이다. 사시사철 짙은 운무에 덮여 있


어 운중산(雲中山)이라 불린다.
그 운중산의 북단 산록에는 하나의 거대한 석성(石城)의 폐허가 자리하고
있었다.
수십 리에 걸쳐 벌려진 걷한 석성의 폐허는 비록 무너지고 퇴락했으나 한때
웅장하고 화려했던 위용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지금은 무성한 잡초로 뒤덮인 석성의 폐허…
스으… 스으…!
장성(長城)을 넘어 불어오는 싸늘한 늦가을의 삭풍이 을씨년스럽게 폐허를
스치고 지나간다. 벌써 누렇게 퇴색하여 말라붙은 잡초들, 겨울은 그리 멀
지 않은 것이다.

황혼(黃昏)이 지고 있었다. 황량한 폐허에 핏물처럼 내리는 황혼은 웬지 처


량하고 스산하다.
"…!"
화라락!
문득 저녁 바람에 옷깃을 펄럭이며 한 명의 인물이 석성의 폐허 앞에 나타
났다. 훤칠한 체격에 전신을 온통 검은 천으로 휘감은 인물의 얼굴 역시 검
은색 면사가 드리워져 있었다.
흑일색(黑一色)! 보이는 것은 온통 검은 빛 뿐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분위기는 음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츠으…!
눈(眼)! 면사 사이로 드러난 그의 두 눈은 섬뜩한 핏빛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은 흑일색인 그의 분위기와 전율적인 대조를 이루었다.
온통 음울하고 숨막히는 마기(魔氣)로 장내를 뒤덮는 인물는 누군가?
지옥… 천존(地獄天尊)!
그렇다! 바로 그였다. 지옥마교(地獄魔敎)의 가장 무서운 마황(魔皇) 지옥
천존! 그가 무슨 일로 이곳 운중산에 나타났단 말인가?
"십… 오 년 만인가?"
문득 지옥천존은 낫고 음울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무너진 석성의 정문을
올려다 보았다. 당당하고 웅장했던 성문(城門)은 그러나 지금은 허물어져
무성한 잡초로 덮여 있었다.
한데 그 잡초 속에는 하나의 편액(片額)이 뒹굴고 있었다. 길이 삼 장에 달
하는 무쇠를 주조한 그 편액은 벌겋게 녹이 슬어 있는데 그 위에는 웅후한
필체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폭풍… 무적(暴風無敵)!>

폭풍(暴風)!
아아! 그렇다면 이곳이 바로 오대무벌(五大武閥) 중 하나인 운중(雲中) 폭
풍성(暴風城)이란 말인가?

-운중(雲中) 폭풍성(暴風城),
-청해(靑海) 유리성궁(琉璃聖宮),
-남황(南荒) 벽력부(霹靂府),
-북산(北山) 사자철림(獅子鐵林),
-전능기환전(全能機幻殿),

이들이 달리 오패천(五覇天)이라고 불리며 지난 오백여 년 간 무림을 좌지


우지해 온 오대무벌들이다.
오대무벌이 저 전설적인 거마 아수마황을 죽음으로 몰아 넣은 오패왕(五覇
王)의 후손들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폭풍검후(暴風劍后),
-벽력천왕(霹靂天王),
-유리성모(琉璃聖母),
-사자천존(獅子天尊),
-전능기황(全能機皇),

삼남이녀의 초인(超人)들! 그들이 바로 오패왕이다.


운중 폭풍성은 그들 오패왕 중에서도 가장 강했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폭풍
검후의 후예들이었다.
헌데, 대륙을 떠받힌다는 다섯 기둥 오대무벌! 그 중에서도 단연 최강이라
던 폭풍성(暴風城)이 어찌 이렇게 폐허화되었단 말인가?
폭풍일족의 검호(劍豪)들은 모두 어디로 흩어지고 그들의 아성 폭풍성을 이
렇게 황폐하게 방치해 둔 것인가?
폭풍성(暴風城)-!
실상 그 이름은 이미 사십 년 전에 지상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사십 년 전, 변황(邊荒)의 두 개의 무서운 세력이 중원을 침공해 들어왔다.
폭풍성은 바로 그들과 맞서 싸우다 괴멸당한 것이었다.

<새황쌍천(塞荒雙天)>

변황무림의 최고 명문들인 변황사대군벌(邊荒四大軍閥) 중에서도 가장 강하


다는 두 패세가 그들이었다.

-막북(漠北) 적봉호황천(赤鵬護皇天),
-신강(新疆) 팔황마전(八荒魔殿),

새황쌍천은 천 년 간 중원제패의 야심을 키워왔다. 그들은 오대무벌보다 배


는 더 깊은 전통을 지녔다. 저 전설의 사대마맥(四大魔脈)에 못지않은 전통
과 저력을 지닌 것이 바로 새황쌍천이었다.
그들이 천 년 간 변황에서 힘을 길렀고 마침내 중원제패의 확신이 서자 연
맹을 맺고 노도같이 중원으로 밀고 내려온 것이었다. 그것이 사십 년 전의
일이었다.
서북(西北)의 뭇 문파들은 삽시에 새황쌍천의 진격에 초토화되고 말았다.
또 한 번의 크나큰 위기가 대륙에 닥친 것이다.
이에 오대무벌(五大武閥)은 긴급히 연합군을 결성하여 새황쌍천에 맞서기로
했다. 그리고 그 선봉을 맡은 것이 바로 폭풍성(暴風城)이었다.
폭풍성의 일만검호(一萬劍豪)는 한 자루 장검만 안은 채 감숙성에서 새황쌍
천을 맞아갔다. 그들 일만의 폭풍검사들은 강자(强者)가 아닌 자가 없었다.
그 옛날 아수마황(阿修魔皇)을 쓰러뜨린 결정적 역할을 한 것도 바로 폭풍
일맥의 폭풍검강(暴風劍剛)이었다.
그 푹풍검파의 후예인 폭풍검사들은 하늘과 땅 아래 가장 막강한 단일군단
이라 할 수 있었다. 비록 그들이 새황쌍천을 이기지는 못해도 며칠 동안 새
황쌍천의 진격을 막을 수는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다른 오대무벌의 연합군이 감숙성 사망평(死亡平)에 이르렀을 때,
그들이 본 것은 시체의 산(屍山)뿐이었다.
폭풍성의 일만검호들은 새황쌍천의 십수만 정병들과 뒤엉켜 모두 죽어 있었
던 것이다.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 무엇 때문에 푹풍성과 새황쌍천은 그토록 서둘러
무모하게 충돌했단 말인가?
숱한 의혹이 천하를 뒤덮은 채 폭풍성과 새황쌍천, 그들 가장 강한 삼파는
세상에서 사라졌다.
사십 년 전에…

지옥천존은 폭풍성의 폐허를 돌아보며 음울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아둔한 자들은 폭풍성이 새황쌍천과 동귀어진했다고 믿고 있다. 후훗… 하
지만 그것은 웃기는 소리다!"
지옥천존! 그는 대체 폭풍성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사대무벌(四大武閥)! 그 비열한 놈들은… 본성이 자신들보다 강했음에 늘
불만이었다. 그래서… 폭풍일족을 새황쌍천과 충돌시켜 지상에서 소멸시킨
것이다. 다른 자들은 모르나… 나 벽우뢰(霹雨雷)는 안다!"
뚜벅…
지옥천존은 음산하게 중얼거리며 폭풍성 안으로 들어섰다.
벽우뢰-!
그것이 지옥천존의 이름인가?
츠으…
문득 지옥천존의 핏빛 눈이 전율스러운 광망을 토했다.
"빚은… 받은대로 돌려 준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그것이 폭풍율법(暴
風律法)이 아닌가?"
그는 옷깃을 흩날리며 폭풍성 저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폭풍… 율법!
그것은 오백 년 간 사마(邪魔)의 무리를 공포에 떨게 한 폭퐁일족의 율법이
었다.
은혜에는 은혜로!
피에는… 피로!
그 철혈의 폭풍율법은 오백 년 전 처음 공포되었고 어떤 경우라도 어김없이
지켜졌다.
지옥천존 벽우뢰는 폭풍성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폭풍율법을 입에 올리는
것일까?
과연…

폭풍성의 북단___
콰르르르!
하나의 웅장한 폭포가 무수한 검이 빗발치듯 절벽을 내리 긋고 있었다.
흰 선을 그으며 맹렬한 기세로 삼십 장을 떨어져 내리는 폭포… 그 폭포 아
래에는 하나의 연못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
언제부터인가 한 명의 인물이 그 연못 속에 허리까지 잠긴 채 우뚝 서 있었
다.
콰르릉…!
폭포가 일으키는 사나운 파문에도 미동도 않고 수면에 떠 있는 인물은 여인
이었다.
나이는 이십 오륙 세 정도 되었을까? 그녀는 여인임에 분명했으나 그 복장
과 차림새는 사내의 그것이었다. 아무렇게나 질끈 묶은 치렁한 장발, 헐렁
한 장포, 물에 젖은 마의가 여인의 몸에 착 달라붙어 몸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 주고 있었다.
터질 듯 풍만하게 부푼 젖가슴, 잘룩한 허리, 미끈하고 팽팽한 하복부, 누
구라도 한 번 보면 뇌살당하기 충분할 만큼 풍만하고 탐스러운 몸매였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을 보면 이내 그런 음심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말 것이
다.
그것은 여인의 용모가 너무 추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아름답기 때문
이었다. 아니, 그녀는 아릅답다는 표현보다는 기품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조각같이 단아하고 반듯한 그녀의 옥용에는 여제왕의 위엄과 기품
이 실려 있었다.
한데,
"…!"
지금 그 기품있는 미인의 아미는 고뇌로 이지러져 있었다.
(아아…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여인임을 잊기로 작정하지 않았느냐?
벽황혜(霹皇慧)야!)
그녀의 붉은 입술 가로 단내가 가쁘게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고뇌에 싸여 있었다. 그것은 그녀 내부에서 솟아오르는 본능의 욕구
때문이었다. 한창 물이 오를 나이의 젊은 육체가 그녀를 괴롭히고 있는 것
이었다.
여인 벽황혜는 고개를 흔들며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폭풍초극검결(暴風超極劍訣)이… 극성에서 막힌 것은 아직도 본능의 욕망
을 제어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이 본능의 시련을 극복하지 못하면… 천년검
후(千年劍后)의 꿈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녀의 조각같은 옥용이 괴롭게 이지러졌다.

-천년검후(千年劍后)!

그것은 검도(劍道)의 전설적 존재였다.


한 자루 검(劍)으로 만류(萬流)를 제압할 수 있는 검의 여제왕(女帝王)! 그
것은 천 년에 아직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지고한 경지였다.
한데 벽황혜라는 이 여인은 누구이기에 감히 그 천년검후의 경지를 입에 올
리는 것일까?
"벽… 황혜야! 네 어깨에 폭풍성의 운명이 달렸음을 잊었느냐?"
문득 벽황혜는 절규하듯 외치며 물 속에 잠겼던 오른손을 맹렬하게 그어냈
다. 그녀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콰아… 작!
그러나 다음 순간 무형의 거대한 역도가 폭발하듯 일어나 삼십 장의 폭포수
를 둘로 쪼개냈다. 수십 만 근의 압력을 지닌 폭포 줄기가 순간적으로 두
조각 나는 것이 아닌가?
믿어지지 않는 놀라운 광경이었다.
"…!"
언제부터인가 여인 벽황혜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는 한 쌍의 눈이었다. 그
눈의 주인은 관목의 그늘 아래 은신하고 있었다.
지옥천존(地獄天尊) 벽우뢰, 바로 그였다.
벽황혜의 뒷모습을 주시하고 있는 지옥천존의 핏빛 눈에 만감이 서렸다.
(어느덧… 내게 육박해 오고 있구나 혜(慧)아야!)
그는 음울한 눈빛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네 방법이 옳다고 생각되면…그렇게 해라. 내 딸아. 하지만…!)
그는 소리없이 돌아섰다.
(애비는… 애비대로의 방법으로 복수하겠다! 우리 폭풍성을… 버린 모든 자
들에게…!)
스으…
지옥천존의 모습은 천천히 안개 속으로 멀어져 갔다. 돌아서 걷는 그의 눈
빛이 지극히 공허하게 변했다.
(다시는… 네 앞에 나서는 일이 없겠구나. 나는… 이미 아수라(阿修羅)의
길로 들어섰으므로…)
그는 우울하게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강해지거라… 그리고 행복해지거라. 딸아!)
스스… 스으!
이내 지옥천존의 모습은 음울한 한숨 속에 멀어져 갔다.
이곳은 운중(雲中)… 폭풍성(暴風城)!
천하를 겁풍(劫風)으로 몰아 넣은 진원지였다.

-절정마도(絶情魔島)!

콰르릉…! 쏴아아…!
우뢰같은 굉음과 함께 거친 파도가 절정마도 주위를 사시사철 휘감고 있었
다.
저녁 무렵, 해가 막 기울기 직전이었다.
절정마도의 동단에는 하나의 암초가 거친 파도의 횡포에 씻길 듯 떠 있었
다.
그 암초 위에 한 명의 소년이 우뚝 선 채 낚시를 드리우고 있었다.
나이는 십 칠팔 세 정도 되었을까? 그는 하의만 걸치고 상체는 벌거벗고 있
었다.
그렇게 우람한 체격은 아니었지만 소년의 상체는 적당한 균형을 이룬 데다
가 햇볕에 적당히 탄 구리빛으로 아주 보기가 좋았다.
그의 어깨와 등에는 윤기 도는 치렁한 장발이 드리워져 있었다.
저녁 햇살 아래 드러난 소년의 용모는 십전(十全)! 그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너무도 완벽한 균형이 오히려 요악해 보이기까지 하는 준미한
얼굴, 그것은 가히 마력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철운비(鐵雲飛)!
소년은 바로 철운비였다.
그가 이곳에 온 지도 이미 일 년 반 이상이 지났다. 지금 그에게서는 처음
수호익룡을 타고 절정마도에 왔을 때의 나약함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건강하고 보기 좋은 구리빛 체격은 믿음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바다를 주시하고 있는 철운비의 두 눈은 짙은 우수와 고독이 깃들어
더욱 음울해 보였다.
지금 그는 거친 파도 속에 벽옥마간(碧玉魔竿)을 드리우고 있었다. 길길이
날뛰는 거친 파고 속에서 대체 그는 무엇을 잡으려는 것일까?
콰아! 쏴… 아아!
거칠고 맹렬한 파도는 수만 근의 압력을 담은 채 수시로 철운비의 몸뚱이를
가격해 왔다. 그러나 철운비는 마치 암초와 하나가 된 듯 조금도 요동치 않
았다.

-패왕부동결(覇王不動訣)!

그것은 철운비가 부친 고독패왕이 준 묵룡보패(墨龍寶牌) 상의 묵룡진결(墨


龍眞訣)에서 얻은 부동지력(不動之力)을 완벽하게 연성했기 때문이었다. 이
제 그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은 하늘과 땅 사이에 거의 존재치 않았다.
(벌써… 백 일째다. 이제 그 영악한 놈이 슬슬 걸려들 때도 되었는데…!)
철운비는 파도를 노려보며 내심 염두를 굴렸다.
절정마도 주위의 파도는 거칠기 이를 데 없었다. 따라서, 그곳에서는 상어
나 고래 따위도 살지 않았다. 상어나 고래라 해도 절정마도 주위의 암초군
에 들어왔다가는 갈가리 찢기고 짓이겨져 죽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철운비도 몇 번인가 그 수중 암초군에 잘못 들어왔다가 죽은 고래의
시체를 발견했었다. 그만큼 절정마도를 감싸고 있는 수중 암초는 위험한 것
이었다.
한데 철운비는 그 수중 암초에서 도대체 무엇을 낚으려는 것일까?
문득 철운비는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며 고소를 지었다.
"나도 끈질기지만 그놈도 참 끈질기구나! 오늘도… 헛탕 같은데?"
그는 파도 속에 드리웠던 벽옥마간을 거두었다.
끼이이익!
벽옥마간의 끝에는 한 마리 거북이가 매달려 바둥대고 있었다. 길이가 한
자 정도 되는 바다거북이었다.
거북은 그래도 단단한 갑주로 방호되어 있어 수중 암초에서도 자생이 가능
했다.
"미안하지만… 네놈이 며칠 더 고생해야겠다. 만년혈만(萬年血鰻)을 낚으면
네놈도 놓아 줄 테니…"
철운비는 바둥거리는 거북의 다리를 손 끝으로 쥐며 중얼거렸다.

-만년혈만(萬年血鰻)!

철운비가 낚으려는 것이 바로 그것인가?


만년혈만은 일종의 바다뱀장어였다. 철운비는 그 만년혈만이 주위의 암초군
에 산다는 사실을 잠마혈부의 고서의 기록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것은 만 년 이상 산 영물(靈物)이었다. 만년혈만의 피를 한 방울만 마셔
도 금강불괴(金剛不壞)의 몸이 되며 활화산 같은 힘을 얻는다는 전설이 전
해 내려온다.
한데 그 만년혈만이 절정마도의 수중 암초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역대 잠마혈맥의 종사들은 만년혈만을 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었다. 그러
나 아무도 그 놈을 잡지 못했다.
그 사실을 안 철운비는 무공을 연마하는 가운데 틈틈히 만년혈만을 낚으려
시도해 왔다.
만년혈만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는 바다거북이었다. 그래서 철운비는 불쌍한
거북을 생포하여 미끼로 쓰고 있는 것이었다.

철운비는 두 눈에 기광을 빛내며 히죽 웃었다.


"후훗! 그놈은 며칠 전부터 이 미끼에 침을 흘리고 있다. 이제는 인내와의
싸움인데… 결국 이기는 것은 내 쪽이 될 것이다!"
이어 그는 벽옥마간을 줄여 옆구리에 찔렀다. 그는 만년혈만이 요사이 미끼
인 바다거북의 주위를 떠돌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 놈은 워낙 능구
렁이라 선뜻 미끼에 달려들지 않을 뿐이었다.
철운비는 파도 속을 노려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네놈의 피는 내가 빠른 시일내 강해지는데 꼭 필요하다. 반드시 잡고 만
다!)
한데 그 때였다.
막 고개를 들던 철운비의 눈에 언뜻 수중 암초군의 외곽에 무엇인가 떠오르
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 물체는 막 암초가 일으키는 거센 파도 속에 휘말려
들고 있었다.

∑ 제 9 장 천황철부(天皇鐵符)와 만년혈만(萬年血鰻)

(사람이다!)
철운비의 날카로운 눈은 순간적으로 파도 속에 휘말려드는 물체가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파앗!
그것을 알아본 순간 이미 철운비의 신형은 그 쪽으로 폭사되고 있었다.
피피핑!
그는 길길이 날뛰는 파도의 끝을 밟으며 질풍같이 날아나갔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누구도 그 거친 파도 위를 그렇게 날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철운비는 수공(水功)에 있어 고금최강인 천잔조수(天殘釣修)의 절기
를 연마한 뒤에 천면마황(天面魔皇)의 무영보법(無影步法)까지 익힌 상태
다. 그러하기에 남해에서도 가장 험악한 절정마도의 파도 위를 날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한 순간,
"차___ 앗!"
파___ 앗! 화르르…!
철운비는 단번에 백 장을 날아 막 파도에 휘말리려는 그 인물을 잡아챘다.
휘___ 익!
이어 그는 벼락같이 몸을 다시 뒤집어 십여 장 밖의 암초 위에 내려섰다.
그 일련의 동작은 그야말로 벼락치듯 이루어졌다.
철운비의 숨결은 약간 거칠어져 있었다.
(누군데 이 절정마도의 주위에서 조난당한 것일까?)
그는 의아함을 느끼며 암초 위에 그 인물을 바로 뉘였다.
그 인물은 이십대 후반의 장한이었다. 네모 반듯한 얼굴에 짙은 눈썹을 지
녀 대단히 강직한 성품의 인물임을 느끼게 했다.
장한은 건장한 몸에 검은 철릭을 걸치고 있었다. 그것은 고대전사들이 입었
던 것과 같은 철릭으로 소매 끝에는 천(天) 자가 새겨져 있었다.
장한의 몸에는 별다른 상처가 없었다. 다만 그의 미간 사이에 무엇인가 깨
문 듯한 검푸른 흔적이 짙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독(毒)… 이다!)
철운비는 그 검푸른 점을 보며 나직한 신음을 발했다.
장한은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그의 사인은 중독사였다. 무엇인가 지극
히 강렬한 극독이 장한의 전신혈맥을 응고시켜 버린 것이었다.
(내 눈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 상처는 남만 특산인 인면지수(人面蜘蛛)가
문 상처다. 남만에만 사는 인면지주가 어떻게 남해에 나타났단 말인가?)
철운비는 침음하며 검미를 모았다.

-인면지주(人面蜘蛛)!

천하사대독물(天下四大毒物)의 하나인 맹독의 독충이다. 그것은 일종의 거


미로써 얼굴생김이 사람과 같다하여 인면지주라 불린다.
인면지주의 독은 금강불괴라도 삽시에 녹여 버릴 정도로 극랄했다.
장한은 바로 그 인면지주의 독(毒)에 의해 중독사한 것이었다.
한데 그 인물의 시신은 녹지 않고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장한의 생시내공이 신(神)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뭐지?"
문득 철운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장한의 소매 사이로 삐죽하게 나와
있는 쇳조각을 발견하고 그것을 집어들었다.
그것은 한 자 길이의 철편(鐵片)이었다. 얇고 긴 형태의 철편이었는데 그
전면에는 비상하는 용(龍)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천황(天皇).>

그 용의 조각 위에는 그와 같은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또한 철편의 뒷면에는 깨알같은 고문(古文)이 가득 적혀 있었다. 철운비는
그것이 일종의 무공구결임을 알고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찌___ 익!
천운비의 허리에 끼어 있던 거북이 돌연 공포에 질린 기성을 발했다.
철운비는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콰아아…! 우르___ 르릉…!
돌연 철운비 옆의 수면이 쩍 갈라졌다. 그와 함께 갈라진 수면 안에서 한
마리 괴물이 벼락같이 떠올랐다.
온통 검붉은 비늘로 뒤덮여 번들거리는 몸뚱이, 불타는 듯 이글거리는 횃불
같은 두 눈, 그것은 한 마리의 거대한 바다뱀장어였다.
놀랍게도 그것은 대가리 부분만도 무려 일 장이나 되지 않은가? 뱀장어가
아니라 차라리 이무기라 해야 옳을 거대한 괴물이었다.
그것은 발견한 순간,
"만년… 혈만(萬年血鰻)!"
철운비는 아연하여 부르짖으며 벌떡 일어섰다.
카___아!
그때 거대한 바다뱀장어, 즉 만년혈만은 철운비를 향해 입을 딱 벌리며 벼
락같이 덮쳐왔다. 흡사 시커먼 동굴같은 만면혈만의 입 안 쪽으로 칼날같은
이빨만이 빽빽이 박혀 있는 것이 순간적으로 철운비의 눈에 들어왔다.
"이… 미물이…!"
콰___ 릉!
철운비는 창졸간에 대갈과 함께 일장을 후려치며 허공으로 튕겨올랐다. 그
의 일 장은 바위라도 부술 수 있는 파괴력을 지녔다.
콰릉…!
그의 일장은 정확히 만년혈만의 정수리를 후려쳤다.
터___ 어엉!
카아아…!
그러나 흡사 철벽을 두드린 듯한 굉음이 일며 만년혈만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대로 철운비를 덮쳐오는 것이 아닌가?
콰르르…!
수면을 박차고 떠오르는 만년혈만! 그놈의 몸뚱이가 무려 십 장 가까이나
되는 것이 언뜻 철운비의 눈에 들어왔다.
철운비는 낭패함을 금치 못했다.
(실… 수다! 놈이 주위에 있음을 알면서도 한눈을 팔다니…!)
그의 안면이 곤혹함으로 이지러졌다.
그 때였다.
콰르릉…!
만년혈만이 일으킨 거대한 물줄기가 벼락같이 철운비를 강타했다.
"크___윽!"
콰르릉… 카아아아!
순간 길길이 날뛰는 격랑 속에 철운비의 고통스런 신음이 잠깐 들렸다 파묻
혀 버렸다.
콰르르르…!
그와 함께 철운비의 몸은 삽시에 거친 파도 속으로 사라졌다. 과연 그는 어
찌된 것인가?

밤(夜), 은가루 같은 월광(月光)이 남해를 비추고 있었다.


쏴아아…!
월광이 쏟아지는 남해의 해면을 가르며 한 척의 배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
것은 두 개의 돛이 달린 거선(巨船)이었다.
거선의 돛대 끝에는 한 마리 청룡(靑龍)이 수놓인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거선의 선수,
"…!"
화라락…!
언제부터인가 한 명의 여인이 밤바람에 옷깃을 휘날리며 표표히 서 있었다.
나이 이십대 중반정도인 그 여인은 가냘픈 몸매에 수수한 백의를 걸치고 있
었다. 섬세하고 연약한 인상, 그러나 지극히 아름다운 옥용을 지닌 보기드
문 미인이었다. 그녀는 이미 혼인한 부인인 듯 검은 머리를 높게 틀어올리
고 있었다.
백의미부는 지금 무엇인가 걱정이 있는 듯 아미를 살짝 모은 채 밤바다를
주시하고 있었다.
"아아… 구룡대전(九龍大展)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는데… 천황(天皇)께서는
왜 아직도 오시지 않는 것일까?"
그녀는 우울하게 한숨을 내쉬며 밤바다 저편을 주시했다. 고개를 살짝 옆으
로 기울인 그녀의 모습은 고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데 구룡대전이라니…?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 때였다.
"부용아! 밤바람이 차다. 이제 그만 선실로 들어가자!"
문득 백의미부의 뒤에서 자애로운 노인의 음성이 들렸다.
"할아버지!"
부용이라 불린 미소부는 갸날프게 미소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뒤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한 명의 우람한 체구의 노인이 우뚝 서 있
었다. 건장한 구 척 장신에 벼락같이 강렬한 눈빛을 지닌 노인이었다.
노인은 기이하게도 그는 얼굴빛이 푸르스름했으며 탐스러운 흑염은 가슴까
지 기르고 있었다.
저 촉한(蜀漢)의 명장 관운장을 연상시키는 모습의 흑염노인는 일신에 푸른
곤룡포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것에는 살아 있는 듯 생생한 청룡(靑龍)의 형
상이 수놓여져 있었다.
청포노인은 자애롭게 미소지으며 부용부인의 앞으로 다가섰다.
"천황(天皇)은 혈해군벌(血海軍閥) 제일의 용사다. 좀 늦기는 했지만 별일
없을 것이다."
그는 부용부인의 어깨를 다독이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그런 그의 눈
가로 언뜻 한 줄기 어두운 그림자가 스쳤다.
(근래 동영마교(東瀛魔敎)의 왜구들로 보이는 무리가 곳곳에서 출몰하고 있
는데…천황이 늦는 것은 그 자들과 관계있는 것이 아닐까?)
한 가닥 불길한 상념이 그의 뇌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할아버지! 저게 무어죠?"
문득 부용부인의 음성이 청포노인의 상념을 깨뜨렸다.
부용부인은 봉목을 깜박이며 전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범선이 미끄러져 나가는 전면의 수면에 무엇인가 거대한 물체가 떠 있는 것
이 보였다. 그 물체는 온통 바다를 뒤덮고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은은한 붉
은 빛을 토하고 있었다.
그 물체를 본 순간,
(혹시… 저것은…!)
번___ 쩍!
청포노인은 두 눈에서 벼락치는 듯한 신광이 폭사되었다.
"여기서… 기다려라!"
파___ 앗!
이어 노인은 창노한 일갈과 함께 선수를 바차고 괴물체를 향해 날아갔다.
거선과 괴물체와의 거리는 백여 장이 넘었다. 허나 청포노인은 한 마리 천
룡(天龍)같이 밤하늘을 갈라 삽시에 괴물체에 이르렀다.
"만… 년혈만!"
괴물체의 위에 이른 청포노인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그의 두 눈은 온통 불신과 놀라움의 빛을 담은 채 부릅떠졌다. 주위의 바다
를 가득 메운 채 떠 있는 물체… 그것은 전신이 붉은 비늘로 뒤덮인 거대한
바다뱀장어였던 것이다.

-만년혈만(萬年血鰻)!

바로 그것이었다.
한데 절정마도에 나타났던 만년혈만이 어떻게 이곳에 나타난 것일까? 게다
가 만년혈만은 이미 오래 전에 죽은 것이 아닌가?
청포노인는 경악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누가… 이 괴물을 죽였지?)
화르르…!
그는 곧장 만년혈만의 시신 위로 내려섰다.
한데,
"사람…?"
만년혈만의 시체를 살피던 청포노인은 다시 한번 경악하고 말았다. 보라!
만년혈만의 목부분, 한 명의 소년이 만년혈만의 목을 끌어안은 채 기절해
있지 않은가?
상의를 발가벗은 장발소년, 그는 바로 철운비였다. 그는 만년혈만의 목 아
래 부드러운 부분을 입으로 물어뜯은 채 기절해 있었다.
그런 그의 피부는 기이하게도 마치 뱀껍질같이 한 겹의 허물이 벗겨져 있지
않은가?
청포노인은 한눈에 그것이 탈태환골(脫胎換骨)의 현상임을 알아보고 아연함
을 금치 못했다.
(이 어린아이가 만년혈만의 피를 빨아먹어 죽었구나!)
이어 그는 철운비의 옆으로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철운비는 위기의 순간 만년혈만의 목을 끌어안고 정신없이 그 놈의 목부분
급소를 물어뜯었다. 그 덕분에 그는 만년혈만의 보혈을 대량으로 마시에 되
었고 만년혈만은 그로인해 죽게 된 것이었다.
청포노인의 안색이 경악으로 거듭 변했다.
(이 어린아이… 장차 영원히 마르지 않는 초인적인 내공을 지니게 된다. 몇
년 내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이 탄생하겠는데…!)
그의 눈빛이 흥분으로 떨렸다.
(허허… 지난밤 꿈에 한 마리 흑룡(黑龍)이 노부 청룡제왕(靑龍帝王)의 품
으로 날아들었는데… 그게 이 녀석일까?)
그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이어 그는 급히 철운비를 만년혈만의
시신에서 떼어냈다.
한데,
"…!"
부르르…!
갑자기 청포노인의 전신에 격렬한 경련이 일었다. 물 속에 잠겨 있던 철운
비의 다른 한 손이 하나의 쇠조각을 굳게 움켜 쥐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
었다.
그것을 본 청포노인은 경악과 충격으로 한껏 눈을 부릅떴다.
(천왕… 철부(天皇鐵符)! 이… 이럴 수가… 노부의 손녀사위 철면천황(鐵面
天皇)의 신부가 어떻게 이 아이의 손에 있단 말인가?)
그의 노구가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다.
촤아…!
그때 예의 거대한 범선이 물살을 헤치며 만년혈만의 시신 앞에 이르렀다.
"할아버지! 그게 무어죠?"
선수에서 부용부인이 상체를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청포노인은 흠칫했다. 그는 급히 철운비의 손에서 천황철부(天皇鐵符)를 빼
내 소매 속에 넣고 철운비를 안아들었다. 그리고 부용부인은 돌아보며 애써
담담한 신색으로 말했다.
"만년혈만이다! 이 소년이 만년혈만을 죽였구나!"
"옛? 만… 년혈만이라고요?"
"만년혈만!"
순간 부용부인과 선원들의 입에서 일제히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청포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선원들에게 명령했다.
"만년혈만을… 배에 실어라!"
스___ 읏!
이어 그는 철운비를 안고 범선 위로 가볍게 날아올랐다.
스으… 스으…
월광(月光)은 여전히 은가루 같이 해면을 비추고 있었다.

꿈결인가?
"…!"
철운비는 비몽사몽간에 아주 따뜻하고 보드라운 손이 자신의 이마를 쓰다듬
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
그는 그 손길이 수운월의 그것이라 느끼고 미소지었다. 그가 아주 어렸을
때, 때때로 그렇게 부드러운 수운월의 손이 그의 얼굴을 쓰다듬는 것을 느
끼곤 했었다.
수운월은 잠든 철운비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곤 했었다.
그녀가 왜 그랬는지 그때 철운비는 알지 못했다.
그러다 지옥혈겸이 일으킨 풍파로 수운월과 아버지 고독패왕과의 사이를 알
게 되며 철운비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수운월은 잠든 어린 철운비의 모습에 무정한 여인의 얼굴을 떠올리곤 했었
던 것이다.
그럴 때면 철운비는 늘 잠든 척했었다. 웬지 그래야 될 것 같이 느꼈고 또
잠든 척하고 있으면 수운월이 좀 더 오래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기 때문이
다.
한데 지금 철운비는 그 옛날 자신을 쓰다듬어 주던 수운월의 보드라운 손길
을 느낀 것이었다.
그 때였다.
"정신이… 드셨나요?"
문득 한 줄기 낯선 여인의 음성이 철운비의 귓전을 울렸다.
"…!"
철운비는 그것이 수운월의 음성이 아님을 느끼고 흠칫하며 눈을 떴다.
눈을 뜬 철운비의 시야에 아름답고 가냘픈 미소부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는 지금 한 칸의 아담한 방의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미소부는
침상 옆에 앉아 조심스런 표정으로 철운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여자는… 누구지?)
철운비는 멍한 표정으로 미소부를 올려다 보았다.
문득 그는 자신이 누워 있는 방이 조금씩 흔들림을 느꼈다. 그것으로 그는
지금 어떤 배에 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때, 철운비를 내려다 보고 있던 미소부가 은은하게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
다.
"저는 천황군도(天皇群島)에서 온 곽부용(郭芙溶)이라고 해요. 벌(閥)내에
서는… 부용부인(芙溶婦人)이라고 불리지요."
그러나 철운비는 그녀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천황군도? 부용부인?)
그는 멍한 표정으로 내심 되뇌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부용부인 곽부용은 연민의 표정을 지었다.
"기억나지 않으세요? 도련님은 만년혈만을 죽였어요!"
그녀는 자연스럽게 철운비의 이마에 흩어져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며
말했다. 그녀의 손길은 동생을 대하듯 자연스러웠다.
철운비는 그것을 느끼고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래… 만년혈만! 그 놈이 덤벼들어 엉겁결에 목을 물어뜯었는데…)
그는 눈썹을 모으며 억지로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그때,
"부용아! 너는 잠깐 나가 있거라!"
문득 한 줄기 침중한 음성이 이 인의 귓전을 울렸다.
선실의 입구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거구의 청포노인이 우뚝 서 있었다.
스스로를 청룡제왕(靑龍帝王)이라 자칭한 바로 그 노인이었다.
"예…!"
곽부용은 청룡제왕이 나타나자 그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인 뒤 선실을 나갔
다.
"…!"
청룡제왕은 석실의 문을 등 뒤로 닫고 복잡한 눈으로 철운비를 주시했다.
이윽고,
"네… 이름은 무엇이냐?"
그는 태울 듯한 시선으로 철운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철운비(鐵雲飛)라고… 윽!"
철운비는 일어나 앉으려다 안색이 시뻘겋게 변하며 신음성을 발했다.
몸을 조금 움직이자 갑자기 내부에서 거대한 열기가 확 일어난 것이었다.
"움직이지 마라! 너의 내부에는 과다한 만년혈만의 보혈이 들어가 있어 좀
괴로울 것이다."
청룡제왕은 침중한 음성으로 말하며 철운비의 앞으로 다가서 한 손을 내밀
었다.
"이… 것을… 어디서 구했느냐?"
그의 손에는 예의 쇳조각 천황철부가 들려 있었다. 그는 천황철부를 내밀며
번개같은 눈빛으로 철운비를 주시했다. 거짓은 조금도 용납지 않겠다는 위
협이 그 눈빛 안에 깃들어 있었다.
하나 철운비는 태연히 그 눈빛을 받아냈다. 그리고 무심한 음성으로 잘라
대답했다.
"그것은… 한 장한의 시체에서 얻었소!"
"시… 체…!"
쿵쿵!
순간 청룡제왕은 안색이 백짓장같이 변하며 휘청 물러섰다. 그의 두 눈은
극도의 경악과 분노로 한껏 부릅떠졌다.
철운비는 격동하는 청룡제왕을 지켜보며 눈을 반짝 빛냈다.
(그 장한은 이 사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물이었겠군!)
이어 그는 냉정한 시선으로 청룡제왕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는… 절정마도 근역에서 중독사(中毒死) 한 채 표류하고 있었소. 그는
누구요?"
청룡제왕은 멍한 표정으로 철운비를 바라보았다.
문득 그의 노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이름은 철면천황(鐵面天皇) 초패강(楚覇强)! 혈해구룡(血海九龍) 중
천황군도의 제왕이며 혈해군벌(血海軍閥)의 제일용자(第一勇子)가 바로 그
다!"
청룡제왕은 처절한 음성으로 서서히 대답했다.
그러나 그런 그의 눈은 어느덧 평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것은 노인 청룡제
왕이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철운비는 청룡제왕의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혈해… 구룡! 그게 무어요?"
그는 냉철한 시선으로 청룡제왕을 주시하며 다시 물었다.
"남해에 살면서 혈해(血海)를 지배하는 구룡(九龍)을 모르느냐?"
청룡제왕은 검미를 모으며 철운비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내 철운비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음을 감지하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혈해구룡은 일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혈해군벌을 이루는 아
홉 개의 군도(群島)를 총칭하는 말이다!"
그의 설명은 대략 이러했다.

천 년 이전, 잠마여제(潛魔女帝) 궁비연에게는 아홉 명의 가신(家臣)이 있


었다.
잠마구종(潛魔九宗)___
바로 그들이었다.
비록 잠마여제나 사대마맥의 후예만은 못하나 각기 한 방면에서 천하최강인
구인(九人)의 가신들, 그들은 달리 쌍존(雙尊), 삼황(三皇), 사천신(四天
神)이라 불렀다.

-쌍존(雙尊)
열화존(熱火尊), 현음존(玄陰尊),
-삼황(三皇)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
-사천신(四天神)
청룡천신(靑龍天神), 백호천신(白虎天神), 주작천신(朱雀天神), 현무천신
(玄武天神),

그들이 바로 잠마구종(潛魔九宗)이었다.
그들은 또한 양의(兩意), 삼재(三才), 사상(四象)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잠마구종은 각기 한 가지씩의 초절기를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쌍존(雙尊) 중 열화존(熱火尊)은 극양기공에서 천하무적이었
다.
천 년 그 이전, 잠마혈맥 여종사 잠마여제(潛魔女帝) 궁비연은 고루황에 패
해 피눈물을 흘리며 남해로 귀환했다.
그 직후 그녀는 잠마혈정이란 잠마일맥의 천년지보를 찾으러 용형마도란 곳
으로 갔다가 실종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의 여제자와 잠마구종은 언젠가
그녀가 돌아올 것을 믿으며 남해 각지에 뿌리를 내리고 기다렸다.
잠마구종은 남해 아홉 곳의 군도(群島)에 들어가 각기 독자적인 세력을 구
축했다.
그렇게 천 년의 세월이 지나며 잠마구종의 후예들은 더 이상 거대해질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해졌다. 그 아홉 군도를 총칭하여 혈해구룡이라 한다.

-혈해군벌(血海軍閥)!

그것은 바로 잠마여제의 후예와 혈해구룡이 이룬 해상세력인 것이다.


혈해군벌의 상징적 벌주는 여전히 잠마여제의 후손이었다. 잠마여제의 후손
은 대대로 여인들이었다. 그녀들은 혈해성모(血海聖母)라 불리며 성모천도
(聖母天島)의 혈해성전(血海聖殿)에서 전남해를 지배해 왔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혈해성모는 점차 상징적 존재로 변해갔다. 대신 혈
해구룡의 지존들이 매 삼십 년마다 비무로 맹주를 선출했다. 그 비무대회를
구룡대전(九龍大展)이라 한다.
구룡대전의 승자는 삼십 년 간 전 남해의 패권을 장악하게 된다.

-구룡혈황(九龍血皇)!

구룡대전의 승자이며 남해의 제왕, 그를 일컬어 구룡혈황이라 한다.

"제 삼십오 차 구룡대전(九龍大展)이 이틀 후 성모천도(聖母天島)에서 개최


된다. 그런데 가장 유력한 구룡혈황의 후보자였던 철면천황(鐵面天皇) 초패
강이 그런… 변을 당하다니…!"
청룡제왕는 비통한 음성으로 말하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철운비의 지혜로운 두 눈을 스산하게 번뜩였다.
(흐음! 가장 유력한 후보가 모살되다니…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닌데…?)
그는 검미를 모으며 내심 염두를 굴렸다. 그는 잠마여제와도 한 가닥 인연
의 끈을 지닌 상태였다. 따라서 그녀의 후예들인 혈해군벌의 일은 결코 남
의 일 만이 아니었다.

-철면천황(鐵面天皇) 초패강(楚覇强)!

그는 잠마구종의 삼황(三皇) 중 천황(天皇)의 후예였다. 그의 패도신공은


혈해군벌 내에세 적수를 찾아볼 수 없었다.
초패강에게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다. 그녀가 바로 부용부인 곽부용이었
다.
그녀는 사상군도(四象群島) 중 청룡군도(靑龍群島)의 도주 청룡제왕의 손녀
였다.
청포노인 청룡제왕! 그는 바로 남해의 아홉 군도 중 하나의 지존인 것이다.
철운비는 문득 형형하게 눈을 빛내며 청룡제왕에게 물었다.
"이번 구룡대전에서 구룡혈황의 후보자는 누구누구입니까?"
그 물음에 비통함에 잠겨 있던 청룡제왕은 흠칫 정신을 차렸다.
(이… 어린 놈! 보통 명철한 놈이 아니다. 어쩌면 이놈 덕분에 초패강의 복
수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내심 철운비에 대한 알지 못할 신뢰가 싹트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신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관례상 장로격인 쌍존(雙尊)의 후예는 패권에 도전하지 못한다. 또한 사천
신(四天神)의 후예들은 쌍존이나 삼황의 후예에 비해 다소 처지는 무공을
지녔고…"
철운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받았다.
"결국 삼황(三皇)의 후예들이 각축을 벌인다는 얘기군요!"
"그렇다!"
청룡제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연을 덧붙였다.

-천황군도(天皇群島)
-철면천황(鐵面天皇) 초패강(楚覇强), 지황군도(地皇群島)
-쌍뇌모황(雙腦謀皇) 음세황(陰世皇), 인황군도(人皇群島)
-구지인마(九指人魔) 냉철성(冷鐵星),

그들이 바로 삼황(三皇)의 후예들이었다.


그들 중 누가 가장 강한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표면적으로 철면천황 초
패강이 돋보이나 삼자(三者)의 최강이라고는 속단할 수 없었다.

-쌍뇌모황 음세황!

그는 속이 아주 깊은 자로 단 한 번도 자신의 진실한 실력을 내보인 적이


없었다.

-구지인마 냉철성!

그는 가장 잔혹한 인물이었다. 별호의 끝에 마(魔)라는 글자가 붙을 정도로


그의 손속을 신랄하고 잔혹했다.
삼 인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그는 삼십 년 전 일차 구룡혈황에 도전했다. 실
패한 전력이 있었다. 그를 패퇴시킨 인물은 바로 천황군도 전대도주인 철모
(鐵母) 초철화(楚鐵花)였다.
철모 초철화는 혈해군벌 사상 최초의 여자 맹주였다. 그리고 초패강은 바로
그녀의 아들이었다.
철모 초철화는 구지인마의 한 손가락을 잘라 버리고 삼십사 차 구룡대전에
서 우승했었다. 자연히 구지인마는 철황일족에 대해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
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하고 단단히 설욕을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청룡제왕의 설명을 듣고난 철운비는 침음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럼… 철면천황 초패강의 암습자가 바로 구지인마란 말인가?)
그러나 이내 그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속단은 금물이다. 음모자는 의외의 인물일 수도 있다!)
그는 한동안 생각에 골몰했다.
"…!"
청룡제왕은 그런 철운비의 모습을 유현한 시선으로 주시했다.
(이놈은 몸 속에 가히 천하최강의 내공을 지녔다. 만일 이 아이가 초패강
대신 구룡대전에 참가해 준다면 가능성도 있는데…!)
그는 내심 염두를 굴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내 그는 씁쓸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혈해군벌의 일에 어찌 외인을 끌어들인단 말인가?)
그는 소리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선실을 나섰다.
철운비의 상념을 깨지 않으려는 배려에서였다.
한데,
"…!"
선실을 나서던 청룡제왕의 몸이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흐윽…!"
한 명의 여인이 선실 밖 하나의 기둥을 움켜쥔 채 사시나무 떨 듯 교구를
떨고 있었다.
백의미소부의 창백한 두 볼에는 끝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여린 어깨를 흔들며 격한 오열을 삼키고 있는 그 여인의 두 손은 나무 기둥
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부용부인 곽부용!
그녀는 바로 철면천황 초패강의 아내인 부용부인이었다.
그녀가 마침내 자신의 남편이 불귀의 객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만 것이
다.

새벽 무렵,
쓰으… 쓰으…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바다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콰아아… 촤___!
그 안개를 꿰뚫고 청룡제왕의 거선은 미끄러지듯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한데,
"…!"
"…!"
안개 속으로 수많은 그림자들이 거선의 주위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 자들은
모두 물 속에 있었다. 일신에 검은 가죽옷을 걸치고 역시 검은 몽면으로 얼
굴을 가린 자들,
스으… 스으…
그들은 물 속에서 흡사 유령같이 움직이며 거선으로 접근해 들었다. 절정의
수공을 익힌 자들인 듯 그들이 움직이는 데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팟… 팟!
이윽고 거선의 아래에 닿은 그들은 손에 단 날카로운 갈고리로 배의 표면을
찍으며 배 위로 기어 올라갔다.
꾸역꾸역 소리없이 배로 기어오르는 그들의 모습은 흡사 거머리와 같았다.
그 순간,
"불… 불이야!"
"저… 적(敵)이다. 케___ 에엑!"
화르륵___!
배의 한쪽에서 돌연 불길이 확 일며 날카로운 경호성과 비명이 밤하늘을 찔
렀다.
이 무슨 돌연한 사태인가?
삽시에 선상은 아수라장으로 화하고 말았다.
화다닥! 화르르르…!
"크___ 아악!"
"웬놈들이냐? 크___ 악!"
무섭게 치솟는 화염과 찢어질 듯한 비명, 급급한 호통성이 마구 뒤섞여 터
져올랐다.
새벽의 적막은 무참하게 깨지고 주위는 온통 아비규환의 수라장이 되고 말
았다.
스… 스슥…!
새벽의 습격자들은 수도 없이 바다에서 떠올라 속속 배 위로 날아올랐다.
돌연한 사태에 놀라 당황하며 선실을 뛰쳐나오던 청룡군도의 전사들은 습격
자들이 휘두른 기형장도에 무참하게 쓰러졌다.
츠___ 팟!
"크___ 윽!"
"아아악___!"
잇따른 비명과 비명, 그 속에 마침내 지옥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아수라의 생지옥이…!

선미(船尾)!
"크___ 윽!"
쿠웅___!
한 명의 청포노인이 피를 뿌리며 뒤로 비칠 밀려났다. 그는 끝내 버티지 못
하고 한쪽 무릎을 꿇으며 갑판에 무너졌다.
청룡제왕(靑龍帝王) 곽붕(郭鵬)!
바로 그였다.
헌데 끔찍했다. 그는 복부가 길게 찢겨져 꾸역꾸역 선혈을 쏟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전신에는 별모양의 암기들이 수십 개나 박혀 있
지 않은가?
문득 비웃음이 깃든 스산한 냉소가 청룡제왕의 귓전을 울렸다.
"흐응! 청룡군도의 제왕이라는 늙은이의 실력이 고작 이 정도라니… 실망인
데?"
청룡제왕의 일 장 앞에 한 명의 괴인이 우뚝 서 있었다.
날렵하고 늘신한 체구, 다른 습격자들과 마찬가지로 검은 피의를 머리에서
발 끝까지 두른 자였다.
그 자의 이마 위에는 섬뜩한 핏빛 나비의 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피의괴인은 허리춤에 길고 짧은 두 자루의 얄팍한 장도를 차고 있었
다.
그 칼은 중원의 것이 아닌 동영 왜구들의 칼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츠___ 읏!
냉오한 태도로 팔짱을 끼고 있는 피의괴인의 몽면 사이로 한 쌍의 가는 눈
이 독사같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때,
"크으… 비겁한 놈! 암기 따위로 암습하다니… 그러고도 무사라 할 수 있느
냐?"
청룡제왕이 입가로 피를 토하며 부릅뜬 눈으로 피의괴인을 노려보았다.
그는 돌연하게 쳐들어 온 피의괴인이 발출한 암기에 격중되어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한 것이었다.
"흥…! 이기기 위해서는 무슨 수라도 쓸 수 있다! 그것이 위대한 동영마교
의… 율법이다…!"
피의괴인은 냉소하며 잔혹한 음성으로 잘라 말했다.
순간 청룡제왕의 안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너는… 역시… 동영마교(東瀛魔敎)의 왜구였느냐?"
그러나 피의괴인은 청룡제왕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장도(長刀)에 왼손을
가져갔다.
그 자는 좌수도법(左手刀法)을 연마한 듯했다.

∑ 제 10 장 성모천도(星母天島)의 풍운(風雲)

피의괴인은 문득 냉오하고 잔혹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알고나 죽어라! 본좌는… 동영마교(東瀛魔敎)의 제일인자(第一忍者) 살인
혈접(殺人血蝶) 용천… 파(龍千波)다!"
살인혈접(殺人血蝶) 용천파(龍千波)!
그의 손이 거의 장도의 손잡이에 이르렀다.
"…"
그 모습을 청룡제왕은 절망의 표정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방금 전에도 그는
살인혈접의 장도가 칼집을 빠져나오는 것을 미처 보지도 못한 채 복부에 일
격을 당했었지 않은가?
하물며 저항능력을 상실한 지금 그 무서운 쾌도(快刀)를 막는다는 것은 불
가능한 일이었다.
(끝… 인가?)
청룡제왕은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의 노안은 무섭게 부릅떠진 채 살인혈접을 노려보고
있었다.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이었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콰… 쾅!
"우우웃!"
돌연 굉렬한 폭음과 함께 한 소리 무서운 장소가 후면의 선실 쪽에서 터져
나왔다. 그 장소성은 얼마나 컸는지 하늘과 바다가 뒤흔들렸다.
"크____ 아악!"
"케에____ 엑!"
퍼퍼퍽!
동시에 참담한 비명이 터지며 수십 명의 인자(忍者)들이 피떡이 되어 사방
으로 퉁겨져 나갔다.
실로 예기치 못한 갑작스런 사태였다.
(무엇이지?)
살인혈접은 흠칫하며 독사같이 날카로운 눈으로 홱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그는 보았다.
화라락! 고… 오오…!
박살난 선실 아래에서 하나의 인영이 폭풍같이 떠오르는 것을, 흡사 한 마
리의 용(龍)이 떠오르듯 날아오르는 인물는 상체를 발가벗은 한 명의 소년
이었다.
그의 얼굴은 장발에 가려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소년의 옆구리에는 한 명의 백의미녀가 축 늘어진 채 안겨 있었다.
물론 소년은 철운비였다.
한데 기이하게도 위로 떠오르는 철운비의 몸 주위로는 창창한 핏빛 노을이
꿈틀거리며 흐르고 있었다.
철운비의 등장에 잠시 흠칫하던 살인혈접의 입에서 재차 싸늘한 일갈이 터
져나왔다.
"죽…여랏!"
피이잉__! 스슷!
그자의 일갈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수십 명의 인자들이 메뚜기같이 떠올라
일제히 철운비를 배어갔다.
그 자들은 너무 빨라 그저 도광(刀光)이 번뜩 스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같은 쾌도(快刀)는 중원대륙을 통틀어도 구경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데 그 순간,
번____ 쩍!
철운비의 장발 속에서 한 쌍의 핏빛 광망이 벼락치듯 일어났다. 동시에 그
의 왼손이 언뜻 허공을 향해 흔들려졌다.
쩌러렁! 푸____ 하악!
그러자 돌연 그의 손 끝에서 시뻘건 붕조(鵬鳥)의 손톱같은 강기의 폭풍이
거세게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적… 붕쇄… 강조(赤鵬碎剛爪)?"
순간 지켜보던 청룡제왕의 두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살인혈접 역시 대경했다.
"위험… 하다! 물러나랏!"
팟!
그는 다급한 폭갈과 함께 벼락같이 신형을 떠올려 장내로 폭사되었다. 그러
나 그의 경호는 한 발 늦고 말았다.
빠지직! 콰____ 드득!
"케에엑____!"
"컥…!"
붕조의 손톱같은 붉은 광망이 장내를 스치는 순간 폐부를 찢는 처참한 비명
이 아침 하늘을 뒤흔들었다.
사람이고… 병기고 할 것도 없었다. 그 무서운 조강(爪剛)은 스치는 모든
것을 단번에 박살내 버렸다.
후드득…! 쿠쿠쿵!
수십 명의 인자들이 삽시에 피떡이 되어 갑판 위로 떨어져 내렸다. 아아!
그것은 실로 엄청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죽… 어랏!"
번____ 쩍!
살인혈접은 이미 유령같이 철운비의 앞에 이르렀으며 새파란 도광(刀光)이
철운비의 목으로 독사같이 뻗어갔다. 그의 일도는 너무도 빨라 철운비가 그
것을 느끼는 순간 이미 그의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싹뚝 잘려지고 있었다.
살인혈접 용천파의 도법(刀法)은 가히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가장 빠른 것이
었다.
퍼____ 억!
다음 순간 살인혈접의 장도는 여지없이 철운비의 목을 후려쳤다.
한데,
카____ 앙!
쇠와 쇠가 충돌하는 듯한 요란한 굉음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그와 함께 살
인혈접의 장도는 철운비의 목을 친 직후 강맹한 반탄력에 의해 퉁겨져 나갔
다.
놀랍게도 철운비의 목에는 한 줄기 혈선(血線)이 그어지긴 했지만 치명적인
상처는 없었다. 실로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 럴 수가…"
살인혈접은 이 어이없는 광경에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그 때였다.
번____ 쩍! 위____ 이잉!
철운비의 눈빛이 벼락같이 작렬하며 그의 왼손이 칼날같이 세워져 살인혈접
의 옆구리를 후려쳐 왔다.
그런 그의 일격은 방금 살인혈접이 펼친 쾌도에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빨
랐다.
꽈___ 릉!
다음 순간 양인 사이에 벼락 같은 폭음이 짓터져 올랐다.
"크____ 읏!"
"…!"
화라락!
스스스…
그와 함께 두 줄기 인영이 동시에 허공에서 퉁겨졌다.
철운비와 살인혈접, 그들은 십 장을 격하고 돛대 위에 내려섰다.
그것으로는 누가 이겼는지 금방 판단할 수가 없었다. 다만 살인혈접 쪽의
신형이 좀더 불안하게 흔들림을 보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신형이 흔들리는 것은 철운비에게 밀려서가 아니라 격렬한 놀
라움 때문이었다.
"네, 네가 어떻게 본 동영마교의 좌수도법을… 아느냐?"
그는 경악에 떨리는 음성으로 물으며 철운비를 노려보았다.
그의 놀라움은 실로 컸다. 철운비가 방금 빈 손으로 펼친 것이 바로 자신들
동영마교의 좌수도법(左手刀法)의 초식임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철운비는 살인혈접의 물음에 차갑게 냉소했다.
"내게… 물어 볼 필요없다! 지옥에 가면 염라대왕이 알려 줄 테니…!"
그는 백의미부, 즉 부용부인 곽부용을 옆구리에 낀 채 싸늘한 음성으로 대
꾸했다.
스으… 화락…!
문득 한 줄기 해풍(海風)이 불어와 살인혈접의 칼에 잘려진 철운비의 장발
을 흩날리게 만들었다.
그러자 조각으로 깎은 듯 반듯하고 섬연한 그의 옆얼굴이 드러났다. 그것은
충격적인 아름다움을 물씬 풍기는 모습이었다.
"…!"
살인혈접은 철운비의 그 아찔하도록 아름다운 용모에 다시 한번 부르르 몸
을 떨었다.
(저렇게… 아름다운 사내가 있다니…! 게다가 본교의 배신자 잔독의 좌수도
법까지 알고 있는 이 자는… 대체 누구지?)
그의 가는 눈꼬리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의혹과 불신, 충격적인 놀라
움이 뒤엉킨 눈빛이었다.
삐이익!
그러다 그는 갑자기 날카롭게 휘파람을 불었다.
스스스…! 풍____ 덩!
순간 갑판 위에서 난전을 벌이던 인자들이 일제히 바다로 뛰어 들었다. 그
모습은 일사불란하기 이를 데 없어 흡사 조수가 밀려가듯했다.
"후훗! 좋아 애송이, 네놈 같은 강골이 있다니 중원에 들어온 가치가 있었
다!"
살인혈접은 돛대 끝에 표표히 선 채 싸늘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은 마치 계
집의 그것같이 가늘게 들렸다.
"곧… 네놈은 나 살일혈접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화락!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는 그대로 몸을 날려 바다로 뛰어들었다.
"…!"
철운비는 그를 쫓을 생각도 하지 않고 스산한 눈길로 그 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다.
문득 그의 왼손이 무심결에 목을 쓰다듬었다. 그의 목에는 별로 깊지 않은
자상이 나 있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 상처마저도 급속히 아물고 있었다. 그것은 모두 만년
혈만의 보혈의 효능 때문이었다.
철운비의 피부는 이미 무쇠 이상으로 단단해진 상태였다. 이제 그의 몸에
상처를 낼 수 있는 것은 환우팔천병(還宇八天兵) 정도 외에는 없었다.
철운비는 선실에서 운공을 하여 만년혈만의 보혈을 내공화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동영마교 인자들의 내읍을 알고 뛰쳐나와 위기에 빠진 곽부용을 구
한 것이었다.
그는 아직도 안개가 자욱한 아침바다를 주시하며 내심 염두를 굴렸다.
(동영마교의 인자들이 이유없이 내습해 올 까닭이 없다. 누군가 암중에서
그 자들을 조종하고 있다. 그 자는… 과연 누굴까?)
문득 그의 뇌리 속으로 두 명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래… 그들 중 하나가 분명할 것이다!)
그는 음울한 눈빛으로 독백했다.
스으… 스으…
그때 동쪽 지평선으로부터 서서히 붉은 일광(日光)이 번져 오르기 시작했
다. 남해의 또 다른 아침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일륜의 광휘와 함께…

황혼 무렵, 철운비 일행을 태운 거선은 마침내 하나의 섬에 당도했다.


별(星) 모양의 섬, 그것이 바로 성모천도(聖母天島)였다.
남해를 지배하는 여신적 존재 혈해성모가 기거하는 상징적 성역(聖域)!
성모천도의 가운데에는 하나의 높은 산봉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리고 그
산봉 위에 한 채의 화려한 핏빛 석궁(石宮)이 자리하고 있었다.

-혈해성전(血海聖殿)!

그곳이 바로 혈해성전이었다.
혈해성전에는 혈해성모와 일단의 여인들이 기거한다.
혈해성전이 있는 산봉 아래에는 구궁(九宮)의 방위로 아홉 채의 성(城)이
바다를 면하고 둘러서 있었다. 그 성채를 혈해구룡군도(血海九龍群島)가 각
기 하나씩 차지하고 있었다.
이름하여 호화구룡성(護華九龍城)____!
혈해구룡군도의 지존들은 매년 일정 기간 그 성에 머물며 혈해성모의 신변
을 경호하고 있었다.

쏴아…!
청룡군도의 전신이 물살을 헤치며 성모천도(聖母天島)의 유일한 포구에 닿
았다.
이윽고 선교가 내려지고 먼저 삼인(三人)이 포구로 내려섰다.
청룡제왕 곽붕, 부용부인 곽부영, 그리고 철운비였다.
청룡제왕은 살인혈접에게 당한 부상 때문에 철운비에 의해 부축되어 내려섰
다.
"…!"
청룡제왕을 부축하며 막 지면으로 내려서던 철운비의 두 눈이 번뜩 빛났다.
선창 저쪽에 한 명의 인물이 우뚝 선 채 그들 일행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
이다.
나이는 오십 전후 정도, 깡마른 체격에 회색장포를 걸친 인물이었다. 은은
한 냉소를 짓고 있는 얄팍한 입술, 일견하여 그는 지극히 강팍하고 냉혹한
인상을 풍기는 인물이었다.
"조심해라! 저 자가 구지… 인마(九指人魔) 냉철성(冷鐵星)이다!"
문득 철운비의 귓가에 청룡제왕의 침중한 전음성이 들려왔다.
(구지… 인마 냉철성! 삼황 중 인황(人皇)의 후예…!)
철운비는 청룡제왕을 부축하여 구지인마 쪽으로 다가서며 입 안으로 나직이
되뇌었다.

-구지인마 냉철성!

인황군도(人皇群島)의 제왕(帝王)는 두 손을 소매 속에 찌르고 있었다. 그


가 손을 꺼내는 경우는 혈해성모를 배알할 때 뿐이었다.
그 이외의 장소에서 그의 손을 본 자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구지인마의 특기는 유명마조(幽冥魔爪)라는 조법(爪法)이었다.
유명마조(幽冥魔爪)의 조영(爪影)이 일면 만년한철의 벽이라도 종이 찢기듯
바스라진다고 한다. 그의 조법은 삼십 년 전 이미 적수가 없었다.
비록 그는 철모 초철화의 천강탄벽(天강彈壁)을 잘못 건드려서 손가락 하나
를 잃기는 했지만 누구도 구지마맥이 철모에게 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삼십 년 전 무적이었던 그의 조법이 지금음 얼마나 무서워졌는지 아무
도 알지 못했다.
지금 구지인마는 성모천도의 수호사자 역할을 수행하는 기간이었다. 그가
청룡제왕을 마중 나온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구지인마는 지극히 냉랭한 눈빛으로 다가서는 청룡제왕을 지켜보았다.


"동영마교의 무리들에게 욕을 보셨다고요, 노사?"
그는 청룡제왕에게 습하여 음침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 그의 눈가로 언뜻
조소의 빛이 흐르는 것을 철운비는 놓치지 않았다.
"허허! 목숨이 질겨서인지… 살인혈접은 노부의 목을 가져가지 못했소?"
청룡제왕은 고소를 지으며 마주 읍을 했다.
구지인마는 청룡제왕의 말을 흘려 들으며 음침한 시선을 철운비쪽으로 돌렸
다.
"이 애송이는… 본 적이 없는데…?"
그의 눈가로 의혹의 빛이 스쳤다.
그 모습에 청룡제왕은 얼른 철운비를 소개했다.
"이 아이는… 철모의 비밀제자요. 사형인 초패강을 대신하여 구룡대전에 참
가하러 왔소!"
"철모의 제자라고?"
번… 쩍!
구지인마는 두 눈에 무서운 광망을 토하며 낮게 으르렁거리듯 중얼거렸다.
철모(鐵母)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그의 눈빛은 아주 복잡하게 번뜩였다.
그것은 형용할 수 없는 원한과 애증이 교차하는 눈빛이었다.
철운비는 그 눈빛을 놓치지 않고 읽었다.
(흠… 이것 봐라! 이 마왕(魔王)과 천황군도의 여제왕 철모 사이에 원한 외
의 다른 감정까지 있었나?)
그는 일순 야릇하게 눈을 번뜩였다.
그러나 곧 그는 담담한 태도로 구지인마에게 포권했다.
"철… 운비(鐵雲飛)입니다! 도주의 지도… 바랍니다!"
구지인마는 음침한 눈으로 철운비를 노려보았다.
"흐흐… 좋아! 좋아! 철… 모가 너를 어떻게 가르쳤는지… 곧 알게 되겠지?
"
그의 얄팍한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칼날같이 스치며 지나갔다.
이윽고,
"내일… 구룡대전에서… 뵙기로 하지요, 노사!"
그는 음침한 음성으로 말하며 청룡제왕에게 포권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도 그의 독사 같은 눈은 예리하게 철운비를 주시하고 있
었다.
보통 사람이 그 눈빛을 접하면 오금이 저릴 것이다. 하지만 철운비는 달랐
다. 그의 눈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유현하게 번뜩거려 오히려 구지인마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가자, 철화(鐵花)야!"
슥!
구지인마는 옷깃을 펄럭이며 홱 돌아서 걸어갔다.
"…!"
그 때서야 한 명의 소녀가 구지인마의 뒤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소녀
는 지금껏 구지인마의 뒤에 서 있어 삼 인의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십 칠팔 세 정도 되었을까? 창백한 얼굴에 서릿발 같은 냉기가 서린 미소녀
였다. 얼음으로 만든 한 송이 꽃(氷花)이랄까?
투명하도록 흰 피부와 차디찬 눈빛이 충격적일 만큼 인상적이었다.
"…!"
소녀는 구지인마와 같이 두 손을 소매 속에 감춘 자세로 선 채 찌르는 듯한
시선으로 철운비를 주시하고 있었다.
슥!
그러다가 그녀는 이내 홱 몸을 돌려 멀어지는 구지인마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싸늘한 냉기만을 남긴 채…
청룡제왕 곽붕은 멀어지는 소녀의 뒷모습을 주시하며 문득 야릇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 아이가… 구지인마가 자랑하는 딸 빙서시(氷西施) 냉철화(冷鐵花)로군!
"
그 말에 철운비는 기이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빙… 서시 냉철화? 천황군도의 철모의 고명과 같군요!"
청룡제왕은 흘깃 철운비를 바라보며 고소를 지었다.
"행여나 눈독 들이지 마라! 저 아이의 뒤에는… 아버지보다도 더 무서운 인
물이 버티고 있다!"
"현음군도(玄陰群島)의… 현음모모(玄陰母母) 말입니까?"
철운비는 고소를 지으며 물었다.
청룡제왕은 그 말에 흠칫하는 기색을 지었다.
"빙서시가 현음일맥의 후예라는 얘기는 네게 해준 적이 없는 걸로 기억하는
데…!"
옆에 서 있던 곽부용 역시 놀라운 눈빛으로 철운비를 주시했다.

-빙서시(氷西施) 냉철화(冷鐵花)!

그녀는 구지인마뿐 아니라 쌍존 중 현음일맥의 직전까지 지닌 소녀인 것이


다.
철운비는 멀어지는 빙서시의 탱탱한 몸의 곡선을 훑어보며 문득 히죽 웃었
다.
"후훗! 저 계집이 익힌 현음강살(玄陰剛煞)은 아직 절정에 이르지 못헤 안
으로 갈무리되지 못한 상태더군요!"
"아…!"
청룡제왕과 곽부용은 새삼 놀라운 탄성을 발하며 철운비를 주시했다.
(이놈은… 볼수록 사람을 놀라게 한다. 초패강 대신 이놈을 구룡대전(九龍
大展)에 내세우려는 노부의 기도는… 성공할지도 모르겠군!)
청룡제왕의 노안이 유현한 빛으로 번뜩였다.
그리고 주의깊게 철운비를 주시하는 또 한 쌍의 눈이 있었으니…부용부인
곽부용, 바로 그녀의 눈빛이었다.

밤(夜), 깊은 밤이었다.
수호구룡성(守護九龍城)의 어느 밀실,
"아아… 흑…!"
숨넘어가는 여인의 신음이 뜨겁게 밤을 태우고 있었다.
하나의 넓은 상아침상 위에서 풍만한 여인의 동체가 뱀같이 꿈틀거리고 있
었다.
여인의 나이는 삼십대 중반 정도, 기품있고 완숙한 미모를 지닌 여인이었
다.
그녀의 도톰하고 육감적인 입술가에는 하나의 붉은 점이 돋아 있었다. 그것
은 여인의 매력을 한층 돋보이게 만들어 선정적인 아름다움마저 물씬 풍겼
다.
"아아흑… 싫어… 아아!"
여인은 희고 풍만한 몸을 뒤틀며 연신 달뜬 교성을 토해냈다.
그녀의 풍염하고 모양 좋은 유방이 하나의 손에 의해 제멋대로 이지러지고
있었다. 계집같이 희고 갸름한 그 손은 교묘한 움직임으로 여인의 유방을
주물러대고 있었다.
"하아… 음…!"
풍만한 젖무덤이 이지러지고 젖꼭지가 비틀릴 때마다 여인은 참을 수 없는
듯 숨넘어가는 교성을 발했다.
그러나 손의 주인은 말이 없다. 그는 달뜬 몸부림에 신음하는 여인의 모습
을 냉철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희고 갸름한 손, 그것같이 얼굴 역시 희고 단아한 중년의 사내였다. 그는
눈빛이 지극히 유현하여 심기가 깊어 보이는 인물이었다.
한데, 여인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인데 비해 사내는 회색장포에
옥관까지 머리에 쓴 단정한 차림이었다.
슥…
문득 사내의 한쪽 손이 여인의 유방을 떠나 아래로 이동했다.
눈같이 희고 깨끗한 피부, 적당히 살이 오른 허리, 팽팽한 하복부…, 사내
의 손길은 새털같이 부드럽게 여인의 나신을 쓸어 내려갔다.
"아… 흐윽…!"
사내의 손이 희멀건 허벅지 주위에 이르자 여인은 몸을 비틀며 숨을 헐떡였
다.
처음에는 수치심으로 꼭 붙어 있는 그녀의 탐스러운 하체는 사내의 손길에
따라 점점 벌어졌다. 윤기 도는 두 개의 옥주가 벌어짐에 따라 여인의 신비
지궁이 사내의 눈 아래 드러났다.
무성하고 까실까실한 체모가 덮인 둔덕, 그 둔덕 아래로 갑자기 절벽이 나
타났다. 그러나 그 절벽 아래는 무성한 방초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이때,
"제… 제발… 안으로…!"
사내의 손이 허벅지 바깥만 떠돌자 여인은 안타까운 듯 애원했다. 그 모습
에 사내의 입가에 비로소 득의의 미소가 번졌다.
"더… 벌려서… 세워라!"
그는 음침하게 명령했다.
"나… 나쁜 사람…!"
여인은 수치감으로 옥용이 새빨갛게 변하며 녠 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도 희멀건 허벅지를 한껏 벌려 세
웠다. 그 모습은 완전히 사내를 받아들이는 자세 그대로였다.
그녀는 안타깝게 사내를 갈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내의 눈은 여전히 무심
하고 냉정했다. 그는 한 줄기 조소마저 어린 냉랭한 눈빛으로 무방비 상태
로 개방된 여체의 비밀스러운 곳을 주시했다.
이윽고 그의 흰 손이 여인의 허벅지 안쪽으로 이동했다. 그곳의 방초 숲은
이미 따뜻한 온천수로 촉촉히 젖어 있었다.
사내의 손이 천천히 방초 사이를 헤쳤다.
"흐윽…!"
순간 여인은 사내의 손길을 느끼며 전율적인 신음을 발했다.
마침내 여인의 젖은 방초가 좌우로 갈라지며 신비롭고 은밀한 옹달샘이 드
러났다. 오묘한 꽃잎으로 둘러싸인 그곳에는 맑은 분홍빛 이슬이 배어 흐르
고 있었다.
한 순간,
"아악… 아흐윽…!"
여인의 입에서 갑자기 비명에 가까운 숨가쁜 신음이 터져나왔다. 그녀의 엉
덩이가 한껏 쳐들려지며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내는 여체의 보드라운 살점 속으로 손가락을 더욱 깊
이 진행시켰다.
"아아… 여… 여보…!"
그러자 여인은 거의 절규하듯 몸부림치며 숨가쁜 신음을 토해냈다.
사내의 교묘한 행위에 여체는 몇 번이고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거듭되는
격렬한 자극에 여인은 거의 반실신 상태가 되고 말았다.
"…!"
그제서야 사내는 손을 떼고 일어서 자신의 하의를 벗었다. 그러자, 비정상
적이라 할 만큼 흉측하고 웅대한 사내의 실체가 어둠 속에 드러났다.
사내는 활짝 개방된 여체 사이로 들어갔다. 이어 그는 두 손으로 여인의 허
벅지를 안고 여체의 깊은 곳에 자신의 일부를 접근시켰다. 더할 수 없이 보
드랍고 따뜻한 살점이 그의 예민한 일부에 닿았다.
"음…!"
사내 역시 약간 숨이 거칠어지며 낮은 신음을 발했다. 그는 흥분을 누르며
서서히 하체를 내리눌렀다.
"흐윽…!"
그러자 실신했던 여체가 재차 강렬한 충격으로 퍼덕이며 깨어났다.
사내는 그런 여체를 누르며 격렬한 긴축감을 즐겼다. 지그시 눈을 감은 그
의 입가에는 만족스런 미소가 어렸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
번쩍!
본능의 쾌락에 몰입해 가던 사내의 눈이 돌연 번쩍 떠지며 싸늘한 한망이
작렬했다.
"살인… 혈겁! 예의가… 없군!"
사내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음산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이어 그는 천천히
여인의 몸에서 자신의 일부를 이탈시켰다.
파앗!
그와 동시에 그는 빠르게 여인의 혼혈(昏穴)을 눌러 기절시켰다.
"후훗! 역시… 장래의 혈해제왕(血海帝王)답군 도주(島主)!"
문득 한 줄기 음울한 음성이 어둠 속을 울렸다.
스스스…
언제 나타났을까? 어두운 밀실의 천정에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 흑영은 마치 거미같이 천정에 달라붙어 있었다.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검은 피의를 걸친 몽면여인은 허리에 크고 작은 두
자루의 장도를 찌르고 있었다.
이 몽면여인은 누군가?

-살인혈접(殺人血蝶) 용천파!

청룡제왕을 습격했던 동영마교의 제일인자, 바로 그였다.


사내는 힐끗 천정에 매달려 있는 살인혈접을 응시했다.
"무슨… 용무인가?"
그는 살인혈접이 보고 있는 것에 개의치 않고 태연하게 하의를 걸치며 침상
의 모서리에 앉았다. 살인혈접은 그런 사내를 야릇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대단한 침착성에 깊이를 알 수 없는 무공… 정말 탐나는 사내다. 하지만…
심기가 너무 깊은 것이 흠이다.)
그는 내심 염두를 굴리며 음울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도주는 분명… 철면천황 초패강의 밀살(密殺)을 손수 책임지겠다고… 천존
(天尊)께 약속했을 텐데…!"
사내는 그 말에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리고 본좌는… 분명 초패강을 확실히 척살했다. 방법이 무엇이
었는지 밝힐 수는 없지만…!"
살인혈접이 음산한 음성으로 그 말을 받았다.
"하지만… 그대는 화근을 완전히 말살시키지는 못했다. 그대는 초패강이 지
녔던 천황철부까지 없앴어야 했어!"
사내의 눈이 기이한 빛으로 번뜩였다.
"오늘… 도착한 자칭 초패강의 사제 때문인가?"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그… 애송이는 그저 청룡제왕 곽늙은이가 내세운 꼭둑각시일 뿐이다! 내일
… 본좌가 혈해(血海)의 제왕(帝王)이 되는데 아무런 변수도 되지 못한다!"
"그… 럴까, 과연?"
살인혈접은 야릇하게 말꼬리를 늘였다. 이어 그는 가늘고 예리한 눈으로 사
내를 주시하며 음침하게 말했다.
"그 어린 놈은… 본인의 칼을 정면으로 맞고도 죽지 않았다! 이 점을 어떻
게 생각하는가?"
"…!"
부르르!
사내의 몸이 처음으로 경악의 반응을 나타냈다.
그 모습을 주시하며 살인혈접은 몽면 속에서 히죽 웃었다.
(역시… 너도 신(神)은 못 되는군, 모황(謨皇)!)
모황…?
그것이 사내의 이름인가?
사내, 즉 모황은 그러나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놈이… 그대만큼 강하단 얘기인가? 동영최강의 검사(劍士)인 그대만큼?"
그는 불신이 깃든 음성으로 확인하듯 물었다.
살인혈접은 그 말에 애매하게 대답했다.
"글쎄… 정식대결이 아니었으니까 무어라 말할 수 없지. 다만… 그 어린 아
이가 최소한 그대보다 아래는 아니라는 것은 얘기할 수 있지!"
그는 은근히 모황이 자신보다 못하다고 비꼬았다.
그러나 유현하고 깊은 모황의 눈에서는 아무런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그
는 조금의 동요도 없는 분명한 어조로 잘라 말했다.
"어쨌든… 내일 구룡대전의 승자는 본좌다. 지옥천존 각하께… 그렇게 전해
도 좋다, 살인혈접!"
아! 실로 놀라운 이름이 그의 말 속에 들어 있었다.

-지옥… 천존(地獄天尊)!

지옥마교(地獄魔敎)를 지배하고 있는 무서운 마종!


그의 그림자가 이 먼 이역 남해까지 드리워져 있단 말인가? 실로 놀라운 사
실이 아닐 수 없었다.
살인혈접은 음산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 모든 일은 그대가 초패강을 완벽하게 밀살시키지 못한데서 기인
한 일인…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럼…!)
스스스!
말을 마침과 함께 그의 신형은 거짓말같이 엷어지더니 이내 천정 속으로 사
라졌다.
"…!"
모황는 한동안 어둠 속에 미동도 않고 앉아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까? 그의 냉철한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츠읏!
그러다 문득 그의 두 눈이 어둠 속에서 새파랗게 번득였다.
"나… 의 길을 막는 자는 누구도 용서치 않는다! 비록 지옥천존이라 해도
…!"
그는 음산하게 중얼거리며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철… 운비라고 했으렷다? 네 신분이 무엇이라도… 내가 하려는 일을 막지
는 못한다! 나의 뒤에는… 아무도 모르는 강력한 후원자가 있으므로…!"
이어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밀실의 문을 향해 다가갔다.
문가에 이른 모황이란 사내는 문득 침상 위의 벌거벗은 여인을 힐끗 돌아보
았다.
"주작천후(朱雀天后)! 미안하지만 그대와 노는 것은 이것으로 끝이다!"
그는 음험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눈가로 언뜻 한가닥 아쉬운
빛이 스쳤다.
한데, 주작천후라 했던가?
아아! 침상 위의 여인이 바로 그녀란 말인가?

-주작천후(朱雀天后)!

사천신(四天神) 중 주작천신의 후예인 그녀는 또한 혈해구룡 중 주작군도


(朱雀群島)를 지배하는 여제왕이기도 했다.
그녀는 일찍이 망부(亡夫)하고 정결을 지켜오고 있다고 전한다. 헌데, 그런
주작군도의 여제(女帝)가 수호구룡성(守護九龍城)의 한 밀실에서 사내와 야
합을 벌이고 있다니… 그것은 아무도 생각지 못한 뜻밖의 사실이었다.

그긍…!
모황은 천천히 밀실의 석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밀실 밖에는 사 인(四人)의 거한들이 지키고 서 있다가 모황이 나타나자 즉
시 시립했다.
"사… 흉(四兇)! 저 계집을… 너희에게 맡긴다!"
모황은 사 인의 거인을 스쳐가며 무감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도주!"
"맡겨 주십시오!"
사 인의 거한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모황은 그들을 향해 무심히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곧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모황이 사라지고 나자 사 인의 거힌 사흉(四兇)은 고개를 들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런 그들의 눈은 한결같이 욕정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흐흣… 운이 좋은데? 그 고고한 주작군도의 암컷이 우리에게 내려지다니
…!"
"흐흐… 제일 먼저는 나다, 아우들!"
그들은 음탕한 웃음을 흘리며 꿀꺽 침을 삼켰다.
이어 그들은 흉흉하게 눈을 번들거리며 다투어 밀실 안으로 들어갔다.
철컹____!
소리를 내며 밀실의 문이 안으로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악! 너… 너희들이… 감히!"
"흐흐흐… 천후(天后)! 앙탈부릴 것 없다. 극락으로 보내 줄 테니…!"
"아아악!"
처절한 주작천후의 비명과 함께 사흉(四凶)의 음험한 웃음이 뒤섞여 밀실
밖으로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허나 그 소리는 밀실 밖 통로에서 밀폐된 채 외부에 조금도 새어나오지 않
았다.
깊은 밤, 밀실 안에서 어떤 짐승같은 만행이 벌어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
었다.
아무도…

∑ 제 11 장 지옥(地獄)의 밀실(密室)

유령인가?
스슥!
하나의 날렵한 인영이 소리없이 밤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이 주위 어디에… 음세황(淫世皇)의 처소가 있을 텐데…!)
인영은 빠르게 주위를 살피며 몸을 날렸다.

-지황부(地皇府).

이곳은 수호구룡성 중 지황군도(地皇群島)를 관장하는 성채였다.


지황부의 주위에는 수많은 고수들이 매복해 있었다.
그 지황부의 깊은 곳을 마치 제집같이 스쳐가는 인영는 머리 끝에서 발 끝
까지 온통 검은 천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철운비____!
인영은 바로 철운비였다.
그는 철면천황 초패강의 모살건에 관해 이인(二人)에게 혐의를 두고 있었
다.

-쌍뇌모황(雙腦謨皇) 음세황(淫世皇).
-구지인마(九指人魔) 냉철성(冷鐵星).

바로 그들 이인(二人)이었다.
구지인마는 철운비가 일 차 만나 본 바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 철운비는
쌍뇌모황 음세황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지황부(地皇府)에 잠입하려는 것이
었다.
스스스!
철운비는 이윽고 하나의 잘 가꾸어진 정원에 내려섰다.
한데, 그 때였다.
"후후훗! 대담한 놈이군! 감히 지황부를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다니…"
돌연 정원의 좌측에서 한 줄기 음산한 냉갈이 들려왔다.
"…!"
철운비는 일순 흠칫했다.
피____ 이잉!
그러나 그의 한 손이 벼락같이 좌측으로 그어졌다. 그의 소매 속에서 하나
의 검붉은 낫이 불쑥 튀어나와 빛살같이 허공을 갈랐다.
"엇!"
순간 어둠 속에서 나지막한 경탄성이 터졌다.
스… 슷!
이어 하나의 인영이 벼락같이 십 장 밖으로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흡사 한
마리 날렵한 암표범같이 물러서는 그 인물 역시 철운비와 같은 전신을 피의
로 휘감고 있었다.
짧고 긴 두 자루의 장도를 허리춤에 찌른 자객차림의 몽면인, 그를 본 순
간,
(살… 인혈접!)
철운비는 경악하며 발출했던 낫을 거두어 들였다. 그 낫은 끝부분에 극히
가는 쇠사슬이 연결되어 자유자재로 거두어 들일 수가 있었다.
그때,
"지옥… 혈겸인가?"
살인혈접은 몹시 놀란 듯 미미하게 몸을 경련하게 철운비를 주시했다.
"…!"
철운비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낫, 즉 지옥혈겸(地獄血鎌)을 소매 속에 넣으며 살인협접을 주시했다.
"후훗! 놀라운데? 동영 은밀종(隱密宗)의 제일상인(第一上忍)께서… 쌍뇌모
황의 신변을 지키다니…!"
그의 음성은 낮고 스산했다.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살인혈접의 두 눈에 놀라움의 빛이 스쳤다.
"너… 였군! 괴물 같은 애송이!"
그는 목소리만으로 상대가 철운비임을 알아보았다. 바로 지난 밤 자신의 칼
에 베이고도 죽지 않은 어린 괴물임을, 그것을 아는 순간 살인혈접의 눈에
서 전의가 사라졌다.
(불사지체뿐 아니라… 저 무서운 지옥혈겸을 지녔다니…! 정면으로 맞서서
는 손해만 볼 뿐이다!)
그는 내심 영악하게 염두를 굴렸다.
스슷!
다음 순간 그는 더 이상 지체지 않고 유령같이 뒷걸음질쳤다.
한데,
펄럭!
그가 움직이는 순간 그의 가슴 부위의 의복이 쩍 갈라지며 옆으로 벌어졌
다. 방금 전 살인협접은 단 한 발의 차이로 지옥협겸을 피했으나 그것의 무
서운 무형예기는 그의 옷깃을 잘라낸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 실로 뜻밖의 광경이 벌어졌다.
훌렁…!
벌어진 살인혈접의 피의 안 쪽에서 갑자기 한 쌍의 탐스러운 유방이 불쑥
튀어나온 것이 아닌가?
"어… 멋!"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낀 살인혈접은 아연하여 황망히 두 손으로 가슴을 가
렸다. 너무도 놀란 나머지 그녀는 부지불식간에 여인 본래의 날카로운 교성
을 토해냈다.
그 광경에 철운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계… 집이었나?)
그는 어이없음을 느끼며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그는 꿈에도 동영제일인자
가 계집임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놀라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잡아야… 한다! 그냥 보내면 시끄러워진다!)
스팟!
생각을 마치는 순간 철운비는 벼락같이 신형을 떠올려 살인혈접을 덮쳐갔
다.

-무영비폭(無影飛暴)!

천면무영경 상의 초절정의 경공이 펼쳐졌다.


바로 그 때였다.
"바… 바득! 나쁜 자식!"
스____ 팡!
한 줄기 분노의 교갈과 함께 살인혈접의 신형이 갑자기 철운비의 앞에서 꺼
지듯 사라졌다.
철운비는 순간 허공에서 신형을 휘청했다.
(아차… 은밀장안술(隱密藏眼術)이다!)
그는 낭패함을 금치 못했다.

-은밀장안술!

은미종(隱密宗)라 불리는 동영 인자들의 은신술이다. 살인혈접은 바로 그것


을 펼쳐 몸을 숨긴 것이었다.
은밀장안술을 펼친 이상 철운비라 해도 살인혈접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그때,
"바… 득! 이 원한은 꼭 갚는다. 그보다… 우선 쌍뇌모황의 침실 지하에 가
봐라! 한 명의 계집이 험한 일을 겪고 있을 것이다!"
어디선가 표독스런 살인혈접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
철운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스읏!
그러나 그는 무엇을 결심했는지 즉시 몸을 날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직후,
스스스!
문득 하나의 고목 밑둥이 들썩이더니 그 안에서 살인혈접이 빠져나왔다.
그녀는 두 손으로 젖무덤을 가린 채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바득… 두고 보자! 내 속살을 본 대가로 네 녀석이 본녀의 발을 핥도록 해
주겠다! 반드시…!"
그녀는 잔혹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스스스!
이어 그녀의 교구는 유령처럼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언뜻 그녀의 독사같은 두 눈에서 반짝 물기가 번지는 것이 보였다.

밀실____
"흐흐… 여… 역시 대단한데? 모황께서… 일 년 넘게 데리고 놀만하군!"
사내의 숨가쁜 헐떡임이 밀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침상 위,
"…!"
여인 주작천후가 발가벗은 채 축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엄청난 충격으로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천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풍만한 몸은 연신 강한 압박에 출렁대고 있었다.
그녀의 복부 위,
"헉… 헉…!"
한 명의 건장한 사내가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주작천후는 풍만한 왼쪽 허벅지가 사내의 팔에 안긴 자세로 능욕당하고 있
었다. 그 때문에는 내밀한 부위와 그곳으로 드나드는 사내의 흉측한 일부가
간간이 드러나 보였다.
"흐흐…!"
갑자기 사내의 행위가 급격히 빨라졌다. 아마도 절정이 가까워진 듯했다.
그때,
"흐흣! 적당히 해라, 막내! 이 노대(老大)에게 또 한 번 기회를 주어야 하
지 않겠느냐?"
지켜보던 다른 사내가 음험하게 웃으며 말했다.
침상 주위에는 세 명의 사내가 낄낄거리며 주작천후의 무참한 모습을 바라
보고 있었다. 그 자들은 이미 모두 한 차례씩 주작천후를 능욕한 듯했다.
그러나 아직도 욕정을 다 채우지 못한 듯 한결같이 두 눈이 벌겋게 충만된
모습이었다.
그때,
"으… 음…!"
사내의 행위가 거의 발작적으로 빨라졌다. 그 행위의 격렬함으로 온통 침상
이 무너질 듯 흔들렸다.
부르르!
순간 축 늘어져 있던 주자천후의 허벅지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와
함께 사내는 주작천후의 내부가 무서운 힘으로 자신을 조여댐을 느끼며 두
눈을 한껏 부릅떴다.
한데,
"헤헤… 이 계집, 대단한 색골… 허억!"
음흉하게 뇌까리던 사내의 입에서 돌연 숨넘어가는 비명이 터져나왔다.
퍼____ 억!
동시에 사내의 목이 갑자기 싹둑 잘려지며 침상 저편으로 날아갔다.
후두둑…!
잘려진 사내의 목에서 피분수가 확 일어나 침상 위에 늘어져 있는 주작천후
의 하얀 동체를 삽시에 검붉게 물들였다.
"웬… 놈이냐?"
"허____ 억! 조심해라!"
순간 나머지 세 사내의 입에서 경악과 비명이 뒤섞여 터져나왔다.
스슥! 찌____ 찌직!
한 자루 시뻘건 낫이 돌연 빛발같이 허공을 난무하는 것을 본 것이었다.
퍼퍼퍽____!
"케____ 에엑!"
"크악…!"
쿵… 쿵…!
선혈이 분수처럼 터지며 끊어진 팔다리가 난무했다. 삼 인의 사내 그들은
처음의 사내와 같이 일제히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직후,
"버러지… 만도 못한 놈들…!"
스으…
문득 밀실 안으로 한 명의 야행인이 날아 내렸다.
한 자루 검붉은 낫을 손에 든 소년, 바로 철운비였다. 그는 살인혈접의 말
을 듣고 죽시 이곳으로 왔으나 이미 늦은 상태였다.
(쯧! 이 여인은 누군데 이런 난행을 당한 것일까?)
철운비는 딱한 듯 혀를 차며 침상으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본 주작천후의 몸은 온통 네 사내에게 무참하게 난행당한 흔적으
로 만신창이었다. 젖가슴은 숱하게 주물리키어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고 구
타를 당한 듯 입과 코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민망하게 활짝 벌어진 흐드러진 허벅지 안쪽의 계곡은 사내들의 배
설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네 명의 사내가 토해낸 희끄므레한 체액이 역류하는 여체의 적나라한 부분
을 직시한 철운비는 절로 얼굴이 벌개졌다. 어린 나이지만 이미 숱한 여자
를 경험한 그였다. 그러나 차마 직시하기에 민망하고 무참한 모습인 것이
다.
철운비는 혀를 차며 주작천후의 연마혈(軟痲穴)을 풀어 주었다.
그러나 연마혈이 풀리긴 했으나 주작천후는 그것조차 못 느끼는 듯 한동안
멍한 눈으로 천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흐… 윽!"
퍼____ 억!
그러다가 돌연 그녀는 오열을 터뜨리며 맹렬하게 자신의 천개혈(天蓋穴)을
내리쳤다.
파____ 앗!
하지만 그보다 빨리 철운비의 손가락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이내 주작천후의
오른손이 축 늘어졌다. 철운비는 그녀가 자진할 것을 예상하고 기다렸다가
재빨리 저지한 것이었다.
그는 침중한 음성으로 주작천후에게 말했다.
"나는 이곳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소! 자진을 하든 말든… 그것은 부인의
자유요. 하지만…!"
그는 일부러 말을 끊으며 주작천후를 내려다 보았다.
"혈해군벌의 운명이 부인의 손에 달려 있을 수도 있으니… 알아서 하시오.
속편하게 자진하고 말 것인지… 알아서 그대를 이렇게 만든 자에게 복수할
것인지…!"
스윽!
말을 마침과 함께 철운비는 무심하게 몸을 돌려세웠다.
"기… 다려요!"
순간 주작천후는 찢어지는 듯한 음성으로 외치며 황급히 침상에서 내려섰
다.
"악!"
쿵…!
그러나 그녀는 뾰족한 비명을 토하며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너무 지
독한 난행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철운비는 급히 다가가 주작천후를 부축했다.
"같이… 가요! 그… 짐승 같은 놈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어요!"
주작천후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철운비에게 안겼다.
철운비는 그런 그녀를 냉철한 눈으로 내려다 보았다.
(후훗! 물론 죽으면… 안 되지! 너는 본좌의 가장 골칫거리를 하나 덜어 준
소중한 계집이니…!)
그는 내심 사이한 웃음을 흘리며 침상 옆에 놓인 주작천후의 의복을 집어들
었다.
태어날 때부터 가장 천한 기녀와 창녀들의 틈에서 자란 철운비였다. 따라서
여인에 대한 그의 선입견은 아주 퇴폐적인 것이었다. 그의 뇌리에서 여인들
의 순정이나 애정에 대한 환상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하지만 주작천후가 어찌 철운비의 그런 내심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자신에 대한 철운비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 알면 아마 그녀는 수치심에 못
이겨 그 자리에서 혀를 물고 자진하고 말았을 것이다.
(빠드득…! 음세황! 복수하고 말겠다! 나 주작천후를 버린 대가로…!)
츠읏!
어느덧 주작천후의 봉목이 새파란 독기(毒氣)로 번뜩이기 시작했다.

피이잉____!
철운비는 암천을 가르며 질풍같이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의 오른쪽 팔에는
주작천후가 끼어 있었다.
"서둘러야 해요! 그 자가… 성모께 어떤 짓을 할지 몰라요!"
주작천후는 초조한 표정으로 철운비를 재촉했다. 주작천후를 안은 철운비는
지금 성모천도의 중앙에 자리한 혈해성전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혈해성모(血海聖母)의 거처인 혈해성전의 주위는 혈해마녀라는 일천 명의
여전사들에 의해 사시사철 방호되고 있었다.
혈해마녀(血海魔女)-!
그녀들은 하나하나가 혈해구룡군도의 도주들만큼 초절정의 무공을 지닌 여
전사들이었다. 아마도 그녀들은 지상에 존재하는 가장 막강한 조직일 것이
다.
그 혈해마녀들에 의해 방호되는 혈해성전은 가히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이 혈새성전에 들어가면 한 가지 통행패를 지녀야 한다.

<성모령(聖母令)>

바로 그것이었다.
성모령은 모두 세 개였다.
그 중 하나는 역대 구룡혈황들이 소지하게 되어 있었다. 당대 소지자는 바
로 철모(鐵母) 초절화였다.
성모령 중 또 하나는 다음 대 혈해성모가 될 후계자가 지니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혈해성모의 가장 절친한 친구에게 주어진다.
주작천후-!
그녀는 바로 당대 혈해성모의 하나뿐인 고우(故友)였다. 그래서 혈해성모는
마지막 세 번째 성모령을 주작천후에게 내렸다. 따라서 혈해구룡의 지존 중
수시로 혈해성전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주작천후뿐이었다.
쌍뇌모황(雙腦謨皇)-!
그 자가 노린 것은 바로 주작천후의 성모령이었다.
주작천후는 십 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독수공방해 왔다. 한창 물이 오른 나
이의 독수공방은 정말 견디기 힘든 노릇이었다.
쌍뇌모황은 그것을 이용하여 교묘히 주작천후에게 접근했다.
결국, 주작천후는 쌍뇌모황이 펼친 흥분제에 중독된 상태에서 그에게 몸을
허락하고 말았다.
그것이 일 년 전의 일이었다.
한 번 쌍뇌모황에게 몸을 허락한 주작천후는 체념 상태에서 수시로 쌍뇌모
황의 욕정이 제물이 되어 왔다.
그러나 그녀는 꿈에도 알지 못했다. 쌍뇌모황이 노린 것이 바로 자신이 지
닌 성모령임을!
그녀는 쌍뇌모황이 자신에게 애정을 갖고 있지 않다 해도 최소한 그 자가
관심을 두는 것이 자신의 육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한 가닥 자존심마저도 방금 전 무참하게 짓밟히고 말았
다. 쌍뇌모황은 오로지 주작천후에게서 성모령을 뺏을 생각으로 접근한 것
뿐이었다.
그 사실은 네 흉한들에게 윤간당한 치욕 이상으로 주작천후의 방심에 크나
큰 상처를 주었다. 그것은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마지막 자존심이었던 것
이다.

(바득! 내게 상처 입힌 것을 곧 후회하게 해 주겠다. 음세황…!)


철운비의 팔에 안긴 채 어둠 속을 질주하는 주작철후는 원독으로 봉목을 새
파랗게 번뜩이며 이를 갈았다.
일부함원(一婦含怨) 오월비상(五月飛霜)이라 했던가?
독기 오른 주작천후의 모습은 그 무엇이라도 서슴지 않을 기세였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물러… 서랏!"
꽈____ 릉!
갑자기 철운비가 한 소리 호통을 내지르며 어둠 속에서 왼손을 후려쳤다.
꾸꿍!
순간 지축을 뒤흔드는 가공할 굉음이 밤의 적막을 흔들어 깨웠다.
(우웃!)
그와 함께 철운비는 신형을 휘청하며 크게 한 걸음 물러섰다. 만년혈망의
보혈을 복용하여 무적의 공력을 지닌 철운비건만 놀랍게도 누군가 그를 공
력으로 밀어낸 것이었다.
쿵쿵!
그때 어둠 속에서 하나의 날렵한 인영이 쓰러질 듯 휘청이며 삼 보 밀려나
는 것이 보였다. 그 인영은 고풍스런 고대(古代)의 전포(戰袍)를 걸친 한
명의 여전사였다.
나이는 이십 전후 정도, 하나 자세히 보면 그 이상 먹은 듯도 했다. 기이하
게도 전신 피부와 모발이 붉으레한 핏빛을 띤 여인었다.
또 그녀의 어깨 위를 고풍스런 고검(古劍)의 손잡이가 삐죽하게 드러나 보
였다.
어둠 속이었으나 그녀의 용모는 지극히 아름다워 어둠을 밝힐 정도였다.
하나 그녀의 아름다운 옥용에도 전혀 표정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기이한 느낌마저 풍겼다. 마치 한 덩이의 홍옥석을 조각해 놓은 듯한 착각
을 주는 미녀였다.
그녀가 바로 철운비를 상대한 장본인이었다.
(이럴… 수가!)
그때 철운비의 팔에 안겨 있던 주작천후는 전포여인을 바라보며 해연히 놀
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놀란 것은 그 전포여인 때문이 아니었다. 철운비가 단 일장에 그 신
비여전사를 물러서게 했다는 사실이 주작천후를 아연케 만드는 것이었다.

-혈해마녀(血海魔女)!

여전사로 바로 혈해성전을 수호나는 일천 명의 무서운 여고수 중 한 명이었


다.
그녀들은 겉보기에는 이십대 정도의 나이로 보였으나 실은 이미 백 세 이상
된 여인들이었다. 그것은 혈해마녀들이 일종의 사이(邪離)한 주안공(朱顔
功)을 연마하기 때문이었다.
일천 명의 혈해마녀들은 그 주안마공을 연마하여 영원히 늙지 않을 뿐 아니
라 인간같지도 않은 무서운 내공을 지니게 되었다.
하나 그 주안마공의 마기가 뇌리를 침습하여 그녀들은 인간의 감정을 완전
히 상실한 반인반시(半人半屍)가 된 상태였다.
인성을 상실한 만큼 혈해마녀들의 마공은 아주 무서웠다. 설사 혈해구룡의
도주들이라 해도 혈해마녀들과 일 대 일로 맞설 경우 이긴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한데 철운비가 놀랍게도 혈해마녀 중 한 명을 아주 간단히 밀어낸 것이 아
닌가?
주작천후는 눈 앞의 사실을 어찌 믿어야 좋을지 몰랐다.
(도대체… 이 애송이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녀는 새삼 해연히 놀란 시선으로 자신을 안고 있는 철운비를 올려다 보았
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흐흐… 간덩이가 부은 놈이로군! 감히 혈해의 성지에 난입하다니…!"
돌연 어둠 속에서 한 줄기 음습한 냉소가 울렸다. 이어 한 명의 인물이 유
령같이 어둠 속에서 걸어나왔다. 초로의 나이의 인물이었는데 지극히 강팍
한 인상에 두 손을 소매 속에 깊숙이 찌르고 있는 인물이었다.
(구지… 인마(九指人魔) 냉철성!)
그 자를 본 순간 철운비는 내심 신음을 발했다.
어둠 속에 나타난 인물은 바로 삼황 중 인황의 후예 구지인마(九指人魔) 냉
철성이었다.
구지인마의 뒤에는 몇 명의 혈해마녀들이 따르고 있었다. 철운비를 막아섰
던 혈해마녀도 구지인마가 나타나자 소리없이 그의 뒤에 시립했다.
구지인마는 구룡대전의 진행 기간 동안 혈해성전의 수호 임무를 맡고 있는
상태였다. 그가 혈해마녀들과 이곳에 나타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호오… 이게 누구요? 주작군도의 여재(女帝) 아니신가?"
구지인마는 철운비의 팔에 안긴 주작천후를 발견하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
다. 그런 그의 눈가로 은은한 조소의 빛이 떠올랐다.
주작천후는 그것을 느끼며 얼굴이 붉게 물든 채 급히 철운비의 팔을 빠져나
왔다.
이어 초조한 표정으로 구지인마에게 물었다.
"도주! 혹시 음세황이 이곳을 지나지 않았나요?"
구지인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 식경쯤 전 혈해성전으로 올라갔소. 어디서 구했는지 그가 성모령
을 제시하여 본좌는 그를 막을 수 없었소!"
그는 주작천후와 철운비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 철운비가 성큼 구지인마의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일각을 다투는 일이오! 음세황은 성모를 위해하려 저곳에 갔소. 우리를 통
과하게 해 주시오!"
구지인마는 흠칫하며 자세히 철운비를 주시했다. 순간 날카롭고 예리한 그
의 독사 같은 눈에 언뜻 이채가 스쳤다.
"오호라. 이제 보니 너 어린 놈은 낮게 청룡노사와 함께 온 철모의 비밀제
자로군!"
그는 비로소 철운비를 알아본 듯 기광을 번뜩였다.
철운비는 그 말에 몽면 속에서 슬쩍 얼굴을 붉혔다.
"내가 누군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소! 중요한 것은 음세황이 성모께 불충한
마음을 먹고 혈해성전으로 올라갔다는 사실이오!"
그는 침중한 음성으로 잘라 말했다.
주작천후는 얼른 그의 말을 거들고 나섰다.
"그래요! 어서 그를 잡아야만 해요! 저희를 통과케 해 주세요!"
하나 구지인마는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성모령이 없는 한 누구도 통과시킬 수 없소! 그것이 성전의 율법임을 모르
지 않을 텐데…!"
순간 듣고 있던 철운비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대갈을 터뜨렸다.
"지금 율법(律法) 따위를 따질 때가 아니오! 혈해군벌 전체의 운명이 걸린
문제란 말이오!"
"뭐야?"
빠직!
철운비의 폭갈에 구지인마의 독사눈이 싸늘한 한망을 폭사하며 무섭게 번뜩
였다.
"네… 녀석은 나 냉철성에게 호통을 친 최초의 놈이다!"
그의 음성이 한층 낮고 음울하게 변했다. 그것은 그가 극도로 노했음을 보
여 주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껏 그 누구도 감히 구지인마를 윽
박지를 인물은 없었다. 윽박지르기는커녕 혈해구룡군도의 뭇 도주들조차 그
와 바로보는 것마저 꺼릴 정도였다.
한데 지금 이 시커먼 천을 뒤집어 쓴 어린 망종이 하늘인지 땅인지도 모르
고 설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주작천후는 내심 가슴을 졸였다.
(이… 아이! 저 잔인한 자를 화나게 해서 어찌하려는 것일까?)
그녀는 걱정스런 시선으로 철운비를 주시했다.
"흐흐 좋아! 철모가 얼마나 네놈을 잘 가르쳤는지 미리 보도록 하지. 만일
…!"
빠지직!
구지인마는 말을 끊으며 가는 두 눈에 시퍼런 독망을 토해냈다.
"네… 놈이 노부에게 일초반식이라도 이긴다면 혈해성전에 올라가게 해 주
마! 그 뿐 아니라 본좌가 내일의 구룡대전에서도 네녀석을 적극 밀어 주고
… 내 딸아이도 네게 주겠다!"
그는 음울하고 냉랭한 음성으로 단언하듯 잘라 말했다.
그 말에 철운비는 내심 히죽 웃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구지인마를 격동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분명히 확인해 둘 필요가 있었다.
"남아일언(男兒一言)!"
철운비가 싸늘하게 외치자 구지인마는 즉시 대답했다.
"중천금(重千金)이다! 흐흣! 하지만… 조심해라! 본좌의 손을 본 자치고 살
아난 자는 없으니…!"
구지인마는 음침하게 철운비의 말을 받으며 서서히 두 손을 소매 속에서 빼
냈다.
마침내 양인은 팽팽한 긴장감 속에 마주섰다.
(아…!)
주작천후는 가슴을 졸이며 철운비와 구지인마가 대치한 모습을 주시했다.
그녀의 옥용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어느덧 그녀의 모든 관심은 이
정체 모를 신비소년의 안위로만 쏠리고 있었다.
그 사이 구지인마의 양 손이 거의 다 소매 바깥으로 드러났다.
"구유… 파천황(九幽破天荒)!"
쩌러렁!
순간 구지인마의 입에서 한 소리 사나운 호통이 터지며 검푸른 조강(爪剛)
이 수천, 수만 개의 창살같이 허공으로 폭사되었다.

-유명조강(幽冥爪剛)!

혈해군벌 내에서 이미 전설이 된 인황일맥(人皇一脈)의 천년마공이 펼쳐진


것이었다.
거의 같은 순간,
"패왕… 철수(覇王鐵手)!"
철운비의 입에서도 쩌렁한 한 소리 폭갈이 터져나왔다.
빠____ 라랑!
동시에 그의 야행복 자락이 돌연 철판같이 뻣뻣하게 변하며 마주 허공을 그
어갔다. 그것은 철운비의 아버지이고 환우최강의 승부사인 고독패왕 철무정
이 창안한 무적패공 패왕철수였다.
유명조강(幽冥爪剛)____!
패왕철수(覇王鐵袖)____!
과연 그 충돌 결과는 어찌될 것인가!

<혈해성전(血海聖殿).>

그것은 성모천도의 중앙에 높게 치솟은 석봉(石峯) 위에 우뚝 자리하고 있


었다. 전 남해를 지배하는 상징적 존재 혈해성모(血海聖母)가 기거하는 성
소가 바로 이곳 혈해성전이었다.
심야(深夜), 혈해성전은 음습한 어둠의 장막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혈해성전의 깊은 곳에는 하나의 대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방 십여 장
넓이에 달하는 대전이었다.
그 대전의 중앙에는 하나의 커다란 청동향로(靑銅香爐)가 놓여 있었다.
스으 스으!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는 그 향로는 높이 일 장 정도에 달하는 거
대한 것인데 아주 오래된 듯 검푸른 녹이 끼어 있었다.
또한 향로의 표면에는 수많은 용(龍)의 형상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일천
마리의 용(龍)! 그것은 오묘한 현기(玄機) 속에 서로 어우러져 있었다.
날고… 휘돌고 포효하는 군룡문(群龍紋),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것들은 금
방이라도 뛰쳐나올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그만큼 일천군룡문(一千群
龍紋)의 형상은 생생하고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
지금 한 명의 여인이 그 일천군룡문을 자세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나이는 십 칠팔 세 정도 되었을까? 아주 신비롭고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소
녀였다.
특히 은은한 붉은빛이 도는 그녀의 커다란 봉목은 실로 신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소녀는 고대 여신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용(龍)의 비늘을 엮어 만든 붉
은 빛이 도는 전포(戰袍)에 검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늘어뜨리
고 있었다.
그 폭포수 같은 머리카락은 그녀의 붉은 용린전포 위로 드리워진 채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물결치듯 일렁거렸다.
전포여인의 모습은 아주 성스럽고 신비로워 도무지 인간의 여인같아 보이지
를 않았다.
"용형혈정(龍形血鼎)! 이 중에는 잊혀진 성역 용형마도(龍形魔島)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전포여인은 낮게 중얼거리며 청동향로를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용형혈정(龍形血鼎), 그것이 청동향로의 이름이었다. 혈해군벌의 천년지보


인 이 용형혈정은 천여 년 전 잠마여제(潛魔女帝)가 용형마도로 잠마혈정을
찾으러 가며 남겼다는 전설이 있다.
그 표면에 새겨진 일천군룡문(一千群龍紋)에는 용형마도로 가는 열쇠가 숨
겨져 있다고 한다.
하지만 천 년 간 아무도 그 비밀을 풀지는 못했다.
전포의 여인은 신비로운 봉목을 빛내며 용형혈정의 일천군룡문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이 용(龍)의 형상들은 일종의 수(數)로 표시되고 있다. 그것을… 찾는데
무려 이십 년이 걸렸다!"
그녀의 숨결이 흥분으로 다소 거칠어졌다.
이십 년 동안 용형혈정의 비밀을 풀다니…! 그렇다면 그녀의 진짜 나이는
십 칠팔 세로 보이는 외양과는 아주 틀린단 말인가?
그렇다.

-혈해성모(血海聖母) 궁월영(宮月影)!

제 칠대 혈해성모가 바로 그녀의 진실한 신분이었다.


본래 혈해성모들은 처녀로 늙어죽는 전통이 있었다. 또한 그녀들은 고도의
주안술(朱顔術)을 연마하여 죽어서도 그 미모를 잃지 않는다.
보통 혈해성모는 이백 년을 주기로 바뀐다.
궁월영은 바로 잠마여제의 칠대손이었다. 그녀는 이십 년 전 혈해성모가 되
었으며 소녀같은 외양과는 달리 이미 삼십대 후반인 중년(中年)여인이었다.
역대 혈해성모 중 가장 지혜롭다고 알려진 재녀로써 그녀는 이십 년 간 용
형혈정의 문양들을 연구했고 마침내 천 년 간 아무도 찾아내지 못한 비밀을
밝혀낸 것이었다.
"바로… 이거다!"
문득 혈해성모 궁월영의 봉목이 아주 밝게 번뜩였다. 그녀는 지혜로운 눈을
빛내며 용혈혈정의 일천 번째 용(龍)을 들여다 보았다.
"역시… 생각대로 용형마도는 바로 그 섬이었다!"
궁월영의 옥용이 흥분으로 다소 상기되었다.
이윽고 그녀는 흐르듯 몸을 움직여 한쪽에 놓인 탁자 옆으로 다가갔다.
탁자 위에는 아직 미완성인 해도(海圖)가 한 장 놓여 있었다.
궁월영은 지필묵을 들어 해도의 중앙에 하나의 섬(島) 이름을 적어 넣었다.

-용형… 마도(龍形魔島)!

섬의 이름은 바로 그것이었다.
헌데 혈해성모 궁월영이 막 용형마도의 위치를 해도(海圖)에 그녀 놓는 순
간이었다.
스____ 윽!
돌연 한 줄기 극히 미세한 경풍이 뒤쪽에 일어나 궁월영의 배심으로 날아들
었다. 그 경풍을 극히 미세하여 잠마여제의 후예인 그녀조차 바로 지척에
이르러서야 감지할 수 있었다.
"…!"
궁월영은 일순 흠칫했다.
하나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녀는 이미 금강불괴의 몸으로 어떤
신병이기로도 그녀의 몸에 상처를 입히지 못한다. 게다가 그녀가 걸친 용린
전포(龍鱗戰袍)는 최고의 호신보갑이었다.
그것을 믿고 있는 궁월영은 경풍이 자신의 배심을 가격해도 별로 신경을 쓰
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 일은 왕왕 사람의 상상을 벗어날 때가 있는 법이다.
파____앗!
돌연 하나의 극히 미세한 침(針)이 궁월영의 용린전포를 꿰뚫고 들어와 그
대로 그녀의 등 뒤 명문혈(命門穴) 깊숙이 박혀 버리는 것이 아닌가?
"흑!"
쿠____ 웅!
순간 궁월영은 따끔한 통증과 함께 삽시에 전신의 모든 내공이 흩어짐을 느
꼈다.
명문혈은 인체의 삼백육십 개 대혈 중에서도 공력의 흐름을 통제하는 가장
중요한 요혈(要穴) 중 하나인 것이다.
"전능… 기환전(全能奇幻殿)의 전능용수침(全能龍鬚針)?"
그녀는 옥용이 하얗게 변하며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바로 그 직후,
"후훗! 그렇소! 바로 오대무벌(五大武閥)중 전능기환전의 보물인 전능용수
침이오! 그것 외에 성모의 잠마혈강(潛魔血剛)을 꿰뚫을 신병이기가 하늘
아래 달리 있겠소?"
한 줄기 음사한 음성이 궁월영의 귓전을 울렸다.
그와 함께 대전의 입구에 한 명의 회포문사가 유령같이 나타났다. 지극히
반듯하고 준미한 용모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유현한 눈빛을 지닌 인물이었
다.
"쌍뇌… 모황! 당… 신이… 감히…"
그 자를 본 순간 궁월영은 경악과 분노로 두 눈을 부릅떴다.
쌍뇌모황 음세황-!
그렇다! 회포문사는 바로 삼황(三皇) 중 지황(地皇)의 후예 쌍뇌모황(雙腦
謨皇)이었다.

∑ 제 12 장 용형혈정(龍形血鼎)의 비밀(秘密)

"흐흐흐! 나는 이 순간을 참으로 오랫동안 기다려왔소, 성모(聖母)!"


저벅!
쌍뇌모황은 음산하게 중얼거리며 성큼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사내로 태어나 계집의 치마폭에 싸여 전전긍긍하는 것이 실로 못볼 꼴이었
지. 그래서… 나는 철들면서부터 맹세했다오. 당신, 고결한 척하는 성모를
내 몸 아래에서 바둥거리게 만들겠다고…!"
그는 쓰러진 궁월영의 옆에 이르러 우뚝 멈춰섰다. 그는 용린전포에 싸인
궁월영의 풍만한 몸매를 천천히 쓸어보았다. 그런 그 자의 음침한 두 눈은
이미 사악한 욕정으로 붉어져 있었다.
자신의 육감적인 몸매를 쓸어보는 욕정에 찬 눈길을 느끼며 궁월영은 수치
와 분노로 아미를 파르르 떨었다.
"무… 엄하구나!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그녀는 다급한 호통을 내질렀다. 하나 그녀의 음성은 이미 위엄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전능기환전(全能奇幻殿)의 비보 전능용수침(全能龍鬚針)에 명문혈(命門穴)
이 금제된 탓에 지금 그녀는 손가락 하나 들 힘조차 없는 무기력한 아녀자
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쌍뇌모황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궁월영을 쓸어보며 음침하게 웃었다.
"후훗! 나를 걱정해 줄 필요는 없소 성모! 당신은 곧 본인을 한차례 즐겁게
해준 후 먼먼 중원의 매음굴(賣淫窟)로 팔려가 다시는 남해로 돌아오지 못
하게 될 테니까!"
"무… 무어라고?"
순간 궁월영의 옥용이 새파랗게 질렸다.
고귀한 혈해성모의 몸인 궁월영인지라 꿈에도 쌍뇌모황의 입에서 나온 것과
같은 모욕적인 말을 들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너무도 엄청난 충격과 분노에 거의 까무라칠 지경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쌍뇌모황은 그런 궁월영의 모습을 즐기는 듯 잔인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후훗! 오늘 밤이 가기 전 지옥마교(地獄魔敎)의 형제들이 너를 중원의 그
럴 듯한 창굴로 데려가 줄 것이다! 네가 실종된 남해는… 나 음세황이 구룡
혈황(九龍血皇)에 즉위하여 잘 다스려 줄 테니 걱정할 필요없다!"
"지… 지옥마교! 네놈이… 그들과 내통을…!"
궁월영은 너무도 큰 분노와 경악으로 인해 더 이상 말을 잇지도 못했다.
"흐흐 뭇 사내들의 노리개가 되기 전에 장래 남해제왕이 될 본인에게 안기
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라!"
쌍뇌모황은 득의의 표정으로 음험하게 웃으며 용린전포에 감쌓인 혈해성모
궁월영의 탄력있는 몸을 끌어안았다.
"놔…놔라! 네놈이 감히…!"
난생 처음 사내의 손길이 몸에 닿자 궁월영은 진저리를 치며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저항이었다.
쌍뇌모황은 도착적인 욕정으로 눈을 희번덕이며 힘없이 늘어진 궁월영의 교
구를 안아들더니 옆에 놓인 넓은 탁자 위에 눕혔다.
이어 그는 궁월영의 사지를 탁자의 네 모서리에 묶었다. 엄청난 충격으로
이미 혼미상태가 된 궁월영은 쌍뇌모황이 자신의 팔다리를 묶는 것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흐흐…!"
쌍뇌모황은 떨리는 손으로 궁월영이 걸친 용린전포의 저고리 옷고름을 풀었
다.
출렁…!
용린전포의 저고리 양 옆이 벌어지며 뽀얀 육봉이 출렁이며 나타났다. 얼굴
은 비록 주안술을 익혀 십 칠팔 세 소녀의 모습이었으나 그녀의 몸매만은
풍만하기 이를 데 없는 중년여인의 그것이었다.
백설이 내린 듯 하얀 피부, 사발을 엎어 놓은 듯 풍만한 유방, 그 위에는
탐스러운 한 쌍의 포도송이가 수줍게 떨고 있었다.
쌍뇌모황의 숨결이 점점 거철어졌다. 고결하고 성스러운 혈해의 성모! 그
고귀한 여왕의 속살이 지금 그의 눈앞에 노출된 것이었다.
쌍뇌모황은 성급하게 치밀어 오르는 흥분을 누르며 궁월영의 치마끈마저 풀
었다.
사라락…!
매끄러운 음향과 함께 전포의 치마자락이 좌우로 흘러내렸다. 그러자 여체
의 은밀한 신비가 눈부신 빛으로 일제히 깨어났다.
팽팽하고 기름진 복부, 쥐면 꺼질 듯 잘룩한 허리, 움푹 들어간 귀여운 배
꼽… 밑으로 내려갈수록 여체는 더욱 아찔한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갑자기 풍성하게 넓어진 골반 아래로 미끈한 하복부의 계곡이 나타났다. 그
계곡 아래로 언뜻 가뭇가뭇한 체모가 드러나 보여 쌍뇌모황의 숨을 멈추게
만들었다.
쌍뇌모황은 떨리는 손으로 치마를 완전히 벗겨 버렸다. 그러자 치마 속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궁월영의 하체가 드러났다.
은밀하고 도도록한 구릉에는 윤기 흐르는 갈색의 방초숲이 자리하고 있었
다.
궁월영의 방초는 그다지 무성하지 않았다. 그래서 둔덕 아래 절벽에 자리한
은밀한 옹달샘마저 거의 남김없이 그 형태가 드러나 보였다.
"흐흐흐…!"
쌍뇌모황은 침을 꿀꺽 삼키며 궁월영의 흐드러진 허벅지를 활짝 벌렸다. 중
년여인의 허연 허벅지가 완전히 개방되면서 그 가운데 숨어 있던 깊숙한 수
직의 균열도 함께 벌어지며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단 한 번도 타인의 눈에 드러난 적이 없는 전인미답의 균열! 하지만 그곳은
성숙한 나이답게 도독히 살이 올라 있고 또 한껏 무르익어 아름이 벌어져
있었다.
조물주가 그어 놓은 그 깊숙한 살 틈이 무르익다 못해 벌어져 원색의 오묘
한 속살을 드러낸 곳으로 쌍뇌모황은 얼굴을 가져갔다.
(이…이곳이 바로…!)
혈해성모의 여체의 그곳을 자세히 들여다 보며 쌍뇌모황은 전율햇다.
결코 넘볼 수 없었던 여신같은 존재 혈해성모! 지금 그 성스런 여인의 가장
음란한 부위가 그의 바로 눈앞에 무방비 상태로 있는 것이다.
대상이던 혈해성모의 비역이 지척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쌍뇌모황은 흥분
으로 몸을 떨었다.
혈해성모 궁월영의 두 다리는 활짝 벌려진 채 탁자의 모서리에 묶여 있었
다. 그 때문에 그곳 은밀한 부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보였다.
쌍뇌모황은 히죽 웃으며 궁월영의 방초숲에 뜨거운 숨결을 토했다. 그러자,
방초가 양 옆으로 갈라지며 궁월영의 부끄러운 꽃잎이 숨김없이 노출되었
다.
"으음…"
한 쌍의 분홍빛 꽃술이 촉촉히 젖은 채 떨고 있는 것을 본 쌍뇌모황은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도저히 못 견디겠다! 얼마나 안아보고 싶었던 계집이냐?)
그는 앓는 듯한 신음을 발하며 꿀꺽 침을 삼켰다. 이어 그는 평소 그답지
않게 조급하게 자신의 바지를 벗어내렸다.
그의 흉측한 일부는 극도의 흥분으로 팽창하여 은은한 통증이 느껴질 정도
였다.
"흐흐!"
쌍뇌모황은 침을 삼키며 탁자 위로 올라가 궁월영의 나체를 덮어눌렀다. 그
리고 활짝 개방된 궁월영의 비궁으로 자신의 무쇠같이 단단해진 일부를 가
져갔다.
"안… 돼! 제발…!"
순간 육중한 사내의 체중이 아랫배에 느껴지자 반 실신 상태의 궁월영이 한
가닥 이성을 회복하고 급히 저항했다. 하나 그 저항이라는 것은 너무도 미
약한 움직임이었을 뿐이다.
"흐흐… 이미 늦었소 성모."
쌍뇌모황은 히죽 웃으며 자신의 끊어질 듯 아프게 팽창한 일부를 궁월영의
내밀한 부위로 밀어넣어갔다. 순간 더할 수 없이 따스하고 보드라운 살점의
느낌이 전율적으로 와 닿았다.
"하악…!"
궁월영은 자신의 은밀한 곳으로 뻐근하게 밀려들어오는 뜨거운 이물질을 느
끼며 절망으로 눈을 하얗게 떴다. 남해의 여신의 육체가 무참히 더럽혀지려
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때였다.
"죽… 인다!"
돌연 한 소리 무서운 노갈이 대전을 뒤흔들었다.
꽈르릉-!
그와 함께 막 궁월영의 중심부로 자신의 욕망의 상징을 삽입하려던 쌍뇌모
황의 등 뒤로 무서운 경풍이 작렬했다.
"허엇!"
쌍뇌모황은 대경실색하며 신음을 발했다.
피잉! 스스슷…!
허나 그의 신형이 순간 믿어지지 않을 속도로 뒤집어지며 삼 장 옆으로 움
직였다. 그것은 민첩하고 기쾌하기 이를 데 없는 반응이었다.
"우웃! 적붕… 쇄강조(赤鵬碎剛爪)!"
그러나 노룡(怒龍)이 울부짖는 듯한 일갈과 함께 시뻘건 조영이 폭풍같이
쌍뇌모황의 뒤를 쫓았다.
그 순간 쌍뇌모황은 보았다. 한 명의 몽면소년이 흡사 아수리같이 자신을
덮쳐오는 것을!
흑의몽면소년은 누군가와 싸우다 다친 듯 가슴부위가 온통 피투성이었다.
하나 그 때문에 소년이 덮쳐드는 모습은 더욱 공포스럽게 보였다.
"천수… 참(千手斬)!"
꽈- 릉!
쌍뇌모황은 촉망 중에 사력을 다해 소년을 향해 마주 일장을 밀어냈다.
빠라랑…!
순간적으로 천 개의 수영(手影)이 일어나 삽시에 장권을 가득 뒤엎었다.
꽈르릉-!
직후 거대한 굉음이 터져 오르며 대전이 들썩 뒤흔들렸다.
"크읏!"
"우읏!"
그 가운데 두 마디의 신음이 일며 두 개의 그림자가 퉁겨지듯 훌쩍 물러섰
다.
쌍뇌모황은 옆구리를 움켜쥔 채 쓰러질 듯 신형을 비틀거렸다. 그런 그의
옆구리에는 붕조(鵬鳥)의 발톱이 긁은 듯한 다섯 줄기의 상처가 깊숙이 나
있었고 그곳으로부터 꾸역꾸역 선혈이 솟구치고 있었다.
"웩…!"
그때 흑의몽면소년, 즉 철운비는 한 사발의 피를 토해내며 신형을 휘청했
다.
그는 구지인마와 한 차례 싸워 적지 않은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거기에다
또다시 구지인마보다 오히려 강한 쌍뇌모황의 살인강기에 스쳐 내부가 뒤흔
들린 것이었다.
쌍뇌모황은 고통에 얼룩진 눈으로 철운비를 노려보았다.
"적… 붕쇄강조! 막북(漠北) 적붕호황천(赤鵬護皇天)의 후예냐?"
그는 창백한 안색으로 쥐어짜듯 중얼거렸다. 고통으로 새파랗게 변한 그의
안색 때문에 그의 얼굴은 더욱 음침해 보였다.
"빠드득! 내가 누군지 알 필요 없다! 네놈은 곧… 지옥은 구경하게 될 테니
…!"
슥…!
철운비는 몽면 속에서 두 눈을 새파랗게 번뜩이며 한 걸음 성큼 앞으로 내
디뎠다. 그런 그의 왼손에는 어느새 하나의 검붉은 낫이 들려 있었다.
"지…지옥혈겸!"
그 낫을 본 쌍뇌모황은 마치 사신(死神)을 본 듯 아연실색하며 부르짖었다.
피- 이잉!
이어 그는 더 이상 망설일 것도 없이 흡사 불맞은 여우같이 대전 밖으로 퉁
겨 달아났다.
그 와중에서도 그는 한 장의 도면(圖面)을 잡아채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도면은 물론 용형마도의 해도였다.
헌데,
"크으윽!"
쿠___ 웅!
쌍뇌모황이 사라지자마자 철운비는 둔중한 신음과 함께 털썩 무릎을 꿇었
다.
사실 연이어 두 명의 초고수와 충돌한지라 실상 그의 내부에는 한 올의 내
공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쌍뇌모황은 그것도 모르고 철운비의 허장성
세에 놀라 달아난 것이었다.
철운비로서는 실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위험했다! 그 교활한 놈이 조금만 대범했어도 큰일날 뻔했다!)
그는 고소를 지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어 그는 몽면을 벗으며 그것으로 입가의 선혈을 닦았다. 본래 단아한 그
의 얼굴은 내상 때문에 더욱 창백하게 변해 그 준미함이 오히려 돋보였다.
철운비는 그 자리에 선 채 몇 차례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혈맥의 곳곳에서
강맹한 장력이 일어나 삽시에 내상이 회복되었다. 그것은 만년혈만(萬年血
鰻)의 보혈의 영효 때문이었다.
철운비의 내공은 오히려 부상당하기 전보다 일층 진전되었다.
"흐윽…"
그때 문득 한 옆에서 쥐어짜는 듯 처절한 오열이 터졌다.
철운비는 흠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혈해성모 궁월영-!
옹열의 주인은 바로 그녀였다.
남해의 성녀! 혈해군벌 뭇 영웅들의 영원한 우상인 그녀가 상상도 못할 치
욕을 겪고 오열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철운비는 내심 혀를 찼다.
(쯧! 그나마 늦지 않아 다행이다!)
그는 고소를 지으며 궁월영에게로 다가섰다. 벌거벗겨진 채 가장 부끄러운
자세로 사지를 벌려 탁자에 묶인 궁월영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치욕을 못
견뎌 하염없이 눈물 흘리고 있었다.
성모의 눈물…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채 벌거벗은 몸으로 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철운비는 문득 야릇한 충동이 불끈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불현듯 그의 가슴을 사로잡아 그를 당혹케 만들었다.
하나 그는 곧 마음을 평정시켰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성모! 오늘…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아무것
도…!"
팟!
그는 침중한 음성으로 말하며 탁자에 묶인 궁월영의 팔다리를 풀어 주었다.
이어 그는 옆에 놓인 용린전포로 그녀의 몸을 가려 주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그는 대전을 나섰다.
(잠마여제의 후예를 지켜 주었으니… 이제 만족하시오, 고루황?)
철운비는 대전을 나서며 문득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어두운 밤하늘로 한
명의 준수한 문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루황(固陋皇)!

연인을 따라 남해까지 와서 죽은 천여 년 전의 일대마종! 바로 그의 모습이


었다.
"흑… 흐윽…!"
철운비가 나선 대전의 안 쪽에서 혈해성모 궁월영의 나직한 오열이 배어 흘
렀다.
철운비는 그 소리를 귓가로 흘리며 천천히 혈해성전의 아래로 걸어 내려갔
다.
"…!"
"…!"
그런 그를 어둠 속에서 몇 명의 인물이 말없이 맞았다. 바로 구지인마 냉철
성과 청룡제왕 곽붕, 그리고 주작천후 등 삼 인이었다.
구지인마는 복부를 붕대로 칭칭 감은 채 야릇한 시선으로 철운비를 주시하
고 있었다. 그는 철운비가 불시에 발출한 지옥혈겸에 당해 복부에 큰 상처
를 입은 것이었다.
"아우님!"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던 주작천후가 철운비의 무사한 모습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나비같이 날아왔다.
어느덧 동녘이 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제 삼십오차 구룡대전(九龍大展)은 치루어지지 못했다.


인황군도의 쌍뇌모황!
그가 혈해성모를 시해하고 용형마도의 해도를 훔쳐갔기 때문이었다.
그 소문은 소리없이 전 혈해군벌로 전해졌다. 그 즉시 전 남해에 쌍뇌모황
음세황에 대한 추살명령이 떨어졌다.
돌리는 말에 의하면 쌍뇌모황은 중원의 지옥마교와 내통하고 있었다고 한
다.
그 자의 목표는 구룡혈황의 맹좌 따위가 아니었다. 그가 꿈꾼 것은 혈해성
모를 제거하고 남해의 제왕(帝王)이 되는 것이었다.
하나 그 자는 혈해성모를 시해하기 직전 한 명의 젊은 용사에 의해 패퇴했
다고 한다.

-신비잠룡(神秘潛龍) 철운비(鐵雲飛)!

신비잠룡이라 불리는 십팔 세의 소년…!


그 이름은 삽시에 남해 일대에서 가장 영예스런 이름으로 부각되었다.
구룡혈황의 권좌를 노리던 또 한 명의 효웅 구지인마 냉철성은 흔쾌히 신비
잠룡을 구룡맹주로 추천했고 신비잠룡은 만장일치로 제 삼십오대 구룡혈황
(九龍血皇)이 되었다.
신비잠룡은 천황군도(天皇群島)의 여걸 철모(鐵母)의 제자로 알려졌다.
또한 구지인마 냉철성은 자기의 딸 빙서시(氷西施)를 신비잠룡의 첩으로 줄
작정이라고도 했다.
후일 남해제왕(南海帝王)이라 불릴 새로운 영웅(英雄), 신비잠룡! 그는 그
렇게 탄생했다.

<천황부(天皇府).>

혈해성전을 에워싼 아홉 개의 성채 중 천황군도 소속의 거성(巨城).


황혼, 타는 듯 붉은 저녁노을이 천황부 전역으로 번져 흐르고 있었다.
천황부의 대전에는 삼인(三人)이 서 있었다.
철운비와 청룡제왕 곽붕, 그리고 청룡제왕의 손녀이며 철면천황 초패강의
미망인인 부용부인(芙蓉婦人) 곽부용이었다.
지금 철운비는 다소 짜증스런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런 철운비에게
곽부용이 한 벌의 장포를 입혀 주고 있었다.
아홉 마리의 용(龍)이 수놓인 붉은 장포.

-구룡적황포(九龍赤皇袍)!
그 장포는 바로 혈해군벌의 맹주 구룡혈황(九龍血皇)을 상징하는 장포였다.
"갑갑하시더라도 잠시 참으셔야만 해요. 이것이 공자께서 삼십오대 구룡혈
황으로서 첫 번째로 성모님께 알현하는 것이니까요!"
곽부용은 손윗 누이같이 조용한 어조로 타이르며 철운비에게 구룡적황포를
입혀 주었다.
"…!"
철운비는 체념의 한숨을 내쉬며 고통스런 장포를 내려다 보았다.
문득 그는 부드럽고 온화한 표정의 곽부용을 바라보며 내심 고소를 지었다.
(이 여자는 꼭 친누님같다. 그러니 싫은 표정도 못 짓겠구나!)
조용하고 온화한 성품의 곽부용은 마치 손윗누님같아 철운비는 그녀를 함부
로 대할 수가 없었다.
청룡제왕은 한쪽에 앉아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 아이는 노부뿐 아니라 부용에게도 초패강의 대신이 되어줄 것 같아 다
행이다!)
그는 싱글벙글하며 굳이 자신의 내심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는 아름다운
손녀를 바라보며 내심 한 가지 일을 결심했다.
(부용은… 독수공방하기에는 너무 젊고 미인이 아닌가? 저 아이의 장래문제
도 철모와 깊이 한번 상의해 봐야겠다!)
그는 은은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그 때였다.
"냉… 철화(冷鐵花)입니다!"
한 줄기 찬바람 같은 차고 가는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스스슥…
이어 하나의 날렵한 인영이 삼인(三人)의 앞에 내려섰다.

-빙서시(氷西施) 냉철화(冷鐵花)!

바로 그녀였다. 구지인마 냉철성의 무남독녀인…!


"…!"
대전 앞에 내려서던 냉철화는 곽부용이 철운비에게 구룡적황포를 입혀 주는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눈매가 무서워졌다.
하나 이내 그녀는 그런 눈빛을 지워 버렸다. 그녀는 철운비와 청룡제왕을
향해 약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순찰령주 냉철화, 삼가 구룡혈황께 두 가지 보고를 드리러 왔습니다!"
"말하라!"
철운비는 곽부용에게 몸을 맡긴 채 오연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의 오만하고도 당당한 모습에 일순 냉철황의 차가운 눈빛이 은은한 파문
을 일으켰다. 하나 그녀는 그런 내심의 동요를 숨기려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먼저… 천황군도에서 철모(鐵母) 전(前) 맹주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철모께서?"
"…!"
순간 철운비를 비롯한 삼 인은 일제히 흠칫햇다.

-철모(鐵母) 초절화!
삼십사대 혈해군벌의 맹주였던 일세여장부!
그녀가 왔다는 말에 삼 인은 가슴이 철렁했다. 현재 철운비는 철모의 제자
로 위장한 상태였다.
하나 정작 철모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풍파의 불씨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청룡제왕은 냉철화를 바라보며 침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 분은 어디 계시느냐?"
냉철화는 고개를 저었다.
"알지 못합니다! 철모께서는 상륙하시자마자 누군가를 만나신다고 모처로
가셨습니다!"
그녀의 음성은 여전히 차갑고 분명했다.
그때 철운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두 번째 보고는 무엇이냐?"
"반도… 음세황(淫世皇)의 종적이 최종 확인되었습니다!"
냉철화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번- 쩍!
순간 철운비의 두 눈에 강렬한 신광이 뇌전같이 흘렀다.
"어디에… 있느냐 놈은?"
그는 흉흉하게 눈을 번뜩이며 다그쳐 물었다.
냉철화는 차가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벌(閥) 휘하의 순시선들이 정오 무렵 음세황이 한 척의 쾌속선을 타고 불
귀마해(不歸魔海)로 들어가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추적했으나… 그 자
는 아주 빠르게 불귀마해(不歸魔海)로 들어가 더 이상 추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불귀… 마해?"
철운비는 검미를 모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 듣고 있던 청룡제왕이 설명을 주었다.
"불귀마해란 이곳에서 북동쪽으로 오백여 리 떨어진 곳에 있는 죽음의 바다
를 일컫는 말이네!"
말을 하는 그의 안색이 극히 침중하게 변했다. 그 표정으로 미루어 철운비
는 불귀마해란 곳이 예사로운 곳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불귀마해(不歸魔海).

성모천도의 북방에 자리한 사방 백여 리의 해역으로, 그 주위에는 지금도


활동하는 해저화산(海底火山)들이 곳곳에 분포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불귀마해 주위는 사시사철 짙은 운무로 뒤덮여 있었으며 거센 폭
풍이 잘 날이 없었다. 따라서 한 번 그곳에 들어가면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
다. 그래서 불귀마해라 불리는 것이다.
불귀마해 주위의 해저화산들은 극히 불안정하여 수시로 지각변동을 일으키
는가 하면 극독을 함유한 유황연기를 토해내고 있었다. 화산이 요동칠 때마
다 엄청난 해일이 남해 일대를 뒤덮었다.
그 불귀마해 주위에는 아무것도 살지 못했다. 그래서 사망지해(死亡之海)라
고도 불리운다. 아무도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죽음의 귀역! 그곳이 바로 불귀마해인 것이다.

철운비는 청룡제왕의 설명을 들으며 의아한 듯 검미를 모았다.


(불귀마해가 그렇게 무서운 곳이라면 음세황이 무슨 목적으로 그곳에 들어
간 것일까?)
그가 잠시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문득 냉철화가 차가운 음성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당돌한 부탁이 있습니다 맹주!"
그 말에 철운비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대답했다.
"무엇이냐?"
냉철화는 문득 고개를 반짝 쳐들어 철운비를 주시했다. 그런 그녀의 두 눈
은 아주 싸늘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그녀는 차갑고 분명한 어조로 잘라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맹주에게 한 차례 도전할 기회를 달라는 것입니다!"
"…!"
"…!"
그녀의 당돌한 제의에 청룡제왕과 곽부용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나 철운비는 태연했다.
"이유를 들어볼까?"
냉철화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대답했다.
"나는 철이 들며 맹세했었어요. 나를 소유할 사람은 힘으로 나를 제압할 수
있는 자여야만 한다고요."
그 말에 철운비는 히죽 웃었다.
"오라! 그대는… 아버지 구지인마가 본인에게 패해 그대를 본인의 첩(妾)으
로 주겠다고 한 것에 불만이 있는 게로군."
냉철화의 서릿발 같은 옥용이 치욕으로 떨렸다.
"사… 실입니다! 아버님이 그렇게 결정하셨다 해도 맹주께서 나를 제압하지
못하면 이 계집을 첩으로 삼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녀는 잘근 입술을 깨물며 차가운 음성으로 못박았다.
"핫하! 좋아! 나도 강한 계집이 좋다! 네게 기회를 주겠다!"
철운비는 흔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우선 혈해성전에 고귀한 분을 뵈러 가는 것이 먼저
니까."
"감사합니다 어쨌든…"
냉철화는 고개를 숙이며 손을 모았다.
철운비는 이윽고 성큼 대전을 나섰다.
"고마워할 필요없다. 결국 그대가 내 잠자리를 지킬 계집이 된다는 데는 변
함이 없으니까."
그는 히죽 웃으며 냉철화의 옆을 걸어 지나갔다.
"…!"
그 말에 냉철화의 전신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로서는 참기 힘든
수치의 말이었다.
하나 철운비는 능청맞기 이를 데 없었다.
"하하! 가능하면… 도전은 뒤로 미루는 게 좋아! 그래야 좀더 오래 처녀를
지킬 수 있을 테니까!"
그는 조롱하듯 말하며 휘적휘적 대전을 걸어나갔다.
냉철화는 눈꼬리를 파르르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
(바… 바득! 오냐! 마음대로 좋아해라. 곧 눈에서 피눈물이 나게 해 줄 테
니까.)
그녀는 철운비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내심 이를 갈았다. 지금 그녀의 두 볼
은 빙서시란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발그레 상기되어 있었다.
한데,
"…!"
그런 냉철화와 철운비의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는 한 쌍의 슬
픔 어린 봉목이 있었다.
암사슴같이 슬프고 커다란 눈망울, 그것은 애틋한 안타까움으로 젖어 있었
다.
부용부인 곽부용, 바로 그녀의 눈이었다.

∑ 제 13 장 뜨거운 유혹(誘惑)

혈해성전의 북방에는 바다를 직면하고 있는 깎아지른 절벽이 하나 치솟아


있었다.
콰르르릉! 촤-아!
하얀 파도가 포말을 일으키며 단애 아랫부분을 핥고 있었다. 거세게 밀려왔
다가 일제히 흰 거품으로 부서지는 파도는 실로 절경이라 할 만한 것이었
다.
깎아지른 단애 위-
"…!"
"…!"
언제부터인가 두 명의 인물이 마주서 있었다. 그들은 구지인마 냉철성과 한
명의 여인이었다.
여인의 나이는 사십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풍만한 몸에는 사내같이 헐렁한
검은 장포를 걸쳤으며 이마에는 하얀 천을 질끈 묶고 있었다.
호쾌한 인상의 그 미부인(美婦人)은 옛날 대단한 미인이었던 듯 아직도 그
절륜한 미모가 그대로 남아 있는 모습이었다.
한 송이 원숙한 모란꽃이랄까? 그윽하고 풍성한 아름다움이 보는 이의 마음
까지 감싸안을 듯하다.
구지인마와 흑포미부인은 마주선 채 형용키 힘든 복잡한 시선으로 서로를
주시하고 있었다.
문득 구지인마가 음울한 음성으로 침묵을 깨뜨렸다.
"나를… 보자고 한 용건이 무엇이오 철모?"
철모라니…!
아! 그렇다면 중년미부는 바로 혈해군벌 사상 최초의 여맹주 철모 초철화
(楚鐵花)란 말인가?
중년미부 철모는 구지인마의 물음에 아주 어렵게 말을 꺼냈다.
"당신… 에게 한 가지 사실을 말해 주려고 불렀어요."
"…!"
구지인마는 묵묵히 철모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철모는 나직한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죽은… 패강(覇强)이란 아이는 제 친아들이 아니에요. 그 아이는 먼저 타
계한 저의 오라버니의 유복자예요."
"무… 어라고?"
순간 구지인마는 충격을 받은 듯 신형을 휘청했다. 그의 안색은 삽시에 여
러 차례 변화했다.
"그… 럼 당신은 결혼을…!"
그는 격동으로 더듬거리며 철모를 주시했다.
철모는 촉촉한 시선으로 마주 구지인마를 응시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하지 않았아요! 당신은 제 첫남자이자, 마지막 남자였어요."
"…!"
구지인마는 꿈꾸듯 멍한 표정으로 철모를 바라보았다.
철모는 그 시선을 느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제… 화려했던 우리들의 시대는 지났어요. 서로 더 이상 자존심을 내세
우는 일은… 그만두는 게 어때요?"
그녀는 한숨 섞인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의 모습은 다소곳하고 차분
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누가 남해최강의 여전사라 하겠는
가?
"…!"
철모를 바라보는 구지인마의 냉혹한 두 눈에 만감이 서렸다. 그것은 형용할
수 없는 벅찬 격동과 회한, 감격의 빛이 뒤얽힌 눈빛이었다.
구지인마와 철모, 그들 두 사람이 그 옛날 아주 다정한 연인 사이였음을 아
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고 육체를 나누어 쾌락의 열매도 함께 맛본 사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세기재들인 그들은 호승심과 자존심이 남달리 강하했고, 설령 사
랑하는 사람에게라도 지기 싫어하는 그 강한 성격들 탓에 결국 부부로 결합
하지는 못했다.
그후 철모는 결혼해서 초패강을 낳았다고 전하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초패강은 사실 철모의 조카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구지인마는 자신에게 처녀를 바쳤던 철모가 배신했다 여기고는 홧김
에 현음일족(玄陰一族)의 후예인 여인과 결혼하여 딸인 빙서시(氷西施) 냉
철화를 낳았다.
하지만 끝내 철모를 잊지 못한 구지인마는 당연히 부인을 진심으로 사랑해
주지 못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그의 부인은 상심하여 십 몇 년 전에 죽
고 말았다.
문득 구지인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허허롭게 고소를 지었다.
"그렇소. 허허! 우리들은 어느덧 늙은이가 되었구료. 이제 더 이상 무엇을
내세우겠소?"
그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내게로… 오겠소, 지금이라도?"
그 말에 철모는 살짝 옥용을 붉혔다.
"가가(哥哥)에게서 그… 말이 나오기를 저는 삼십 년이나 기다려 왔어요."
그녀의 음성은 수줍은 듯 낮게 떨려나왔다.
한데,
번- 쩍!
말을 하던 철모의 봉목이 돌연 무서운 신광을 토했다.
"어떤… 망나니냐?"
꽈르릉!
믿어지지 않는 무서운 일성교갈과 함께 그녀는 좌측을 향해 벼락같이 일장
을 후려쳤다.

-천강산수(天剛散手)!

남해최강의 파괴력을 지닌 철모의 일장이 좌측에 있는 하나의 바윗덩이를


후려쳐 갔다.
그 빠름과 강맹한 역도는 구지인마의 안색을 일변하게 할 정도로 무서웠다.
철모의 극히 예민한 청력은 바위 뒤에서 누군가 낮게 웃는 것을 감지했던
것이다. 구지인마는 듣지 못했으나 철모는 그것을 들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함인가? 철모가 구지인마보다 역시 한 단계 강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닌가?
"하하! 용서하시기를…엿들은 것은 본의가 아닙니다, 절대로…!"
그때 한 소리 흔쾌한 소년의 웃음소리가 바위 뒤에서 들렸다.
꽈르릉-!
동시에 한 줄기 붉은 인영이 바위 뒤에서 번뜩 치솟으며 철모의 천강산수를
맞받아쳤다.
"사위, 조심하게!"
순간 구지인마는 첫눈에 붉은 인영이 누군지 알아보고 다급히 외쳤다.
꽈르릉-!
직후 지축을 뒤흔드는 가공할 굉음이 짓터져 올랐다. 그와 함께 굉렬한 선
풍이 온통 장권을 뒤집어 엎을 듯 휩쓸었다.
그 선풍을 타고 한 명의 소년이 훌훌 날아올라 단번에 백 수십 장 저편으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철운비! 바로 그였다.
"핫하! 소문은 내지 않을 테니 안심하시기를…!"
스읏!
철운비는 짓궂게 웃으며 한 줄기 붉은 유성같이 혈해선전 쪽으로 날아 넘어
갔다.
"사… 사위라고요?"
그때 철모는 해연히 놀란 표정으로 구지인마를 주시했다. 그녀는 꿈에도 남
해에 자신의 일장을 그렇게 태연히 받아내는 자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
했기 때문이다.
구지인마는 놀라운 표정의 철모를 바라보며 은근하게 웃었다.
"허허! 왜 이러오? 화매의 제자가… 내 사위가 된 것을 모른단 말이오?"
(내… 제자라고?)
철모의 눈에 순간적으로 한 줄기 야릇한 광채가 스쳤다. 하나 그것은 너무
빨라 구지인마도 발견하지 못했다.

혈해성전의 깊은 곳에 자리한 한 칸의 밀실-

끼익…!
문득 문이 열리며 철운비가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한데 막 안으로 들어서던 그는 일순 흠칫했다. 그 밀실은 한눈에 여인의 규
방(閨房)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별로 요란하지 않으나 섬세하고 운치있게 단장한 규방이었다. 방의 한쪽에
는 작은 옥향로(玉香爐)가 하나 놓여져 있었고 그곳으로부터 분홍빛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옥향로 옆에는 하나의 커다란 상아(象牙)침상이 휘장에 드리운
채 놓여 있다.
"…!"
지금 침상 위에는 한 명의 궁중여인이 등을 돌린 채 앉아 있었다.
혈해성모 궁월영! 바로 그녀였다.
철운비는 순간적인 의혹에 사로잡혔다.
(이 계집은 왜 자기의 침실로 나를 부른 것일까?)
그는 잠시 멍청한 표정으로 문간에 서 있었다.
"들어왔으면… 문을… 닫아요!"
그때 침상 위에 궁월영이 돌아앉은 채 나직이 명령했다.
철운비는 그녀의 음성이 은은하게 떨리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
다.
철… 컹!
그는 문을 닫고 들어서며 손을 모았다.
"부르심을 받고… 오기는 했으나 장소가 마땅치 않…!"
말을 하던 철운비의 안색이 갑자기 홱 변했다.
사르르…!
돌연 궁월영이 섬섬옥수로 궁장 저고리의 고름을 풀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삽시에 저고리가 흘러내리며 궁월영의 뽀얀 속살이 드러났다. 놀랍게도 그
녀는 궁장 속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백설이 내린 듯 뽀얀 어깨의 피부, 살짝 드러나 보이는 풍만하고 모양 좋은
유방이 아찔하도록 유혹적이었다.
궁월영은 치마의 고름까지 거침없이 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철운비는 질겁하며 외쳤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성모? 혈해… 율법(血海律琺)을 깨실 작정입니
까?"
궁월영은 그 말에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대는… 본 성모의 순결을 지켜 주었어요. 그 보답으로 내 몸을 그대에게
… 줄 작정이에요!"
사르르…!
마침내 그녀의 치마가 완전히 흘러내렸다. 쥐면 꺼질 듯한 잘룩한 한 줌의
허리, 그 아래로 갑자기 넓어진 풍만한 둔부가 철운비의 눈에 확 쏘아져 들
어왔다.
(흑!)
동시에 철운비는 갑자기 아랫도리가 불끈 뜨거워짐을 느끼고 대경했다.
그제서야 그는 예의 옥향로에서 피어오르는 분홍빛 연기가 강렬한 최음향
(催淫香)이 섞여 있음을 깨달았다.
궁월영은 살며시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그대는… 내가 반도 음세황에 의해 가장 치욕스러운 모습이 될 것까지 보
았어요. 그 수치스러운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그대는 나를 가져야
해요!"
실상 그녀가 은혜를 갚기 위해 철운비에게 자기의 몸을 주겠다고 한 것은
그저 명분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그녀는 가장 부끄러운 모습을 철운비에게 보였다. 그것은 성모라 추앙받는
궁월영으로서는 죽어도 잊을 수 없는 치욕스런 기억이었다.
그 수치감을 보상받을 수 있는 길은 달리 없었다. 차라리 철운비에게 자기
의 몸을 주어 그 기억을 중화시켜 버리는 길 외에는…
그래서 궁월영은 철운비를 유혹했고 만일을 대비해서 최음향까지 피워 놓은
것이었다. 그녀는 최악의 경우 철운비가 욕정에 미쳐 자신을 범하기라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 일은 모두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었다.
철운비는 최음향 정도에 이성을 상실하기에는 너무 정신력이 강했다. 그것
은 다분히 만년혈만의 보혈과 적목사령정의 힘 때문이기도 했다.
츠읏!
문득 철운비의 눈빛이 아주 싸늘하게 변했다.
(성모라 불리는 고고한 계집도 역시 일개 음탕한 본성을 지닌 속물일 뿐이
란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들자 격렬한 분노가 그의 전신을 휩쌌다.
어린시절부터 기녀와 창녀들 틈에서 자란 탓에 여자의 본성에 대해 비뚤어
진 편견을 지니고 있는 그가 아닌가?
그가 알기로 여자라는 동물은 겉으로는 고고한 척하다가도 이익과 목적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음란해질 수 있는 천박한 암컷에 불과했다.
헌데 남해에 사는 모든 인간들로부터 성녀로 추앙받고 있는 혈해성모라는
이 여인조차도 지금 자신 앞에서 비천한 매음굴의 창기와 다름없는 짓을 하
고 있는 것이다. 그같은 사실이 주는 격렬한 분노는 최음향의 독성을 눌러
버렸다.
그는 차갑고 냉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는 여자를 좋아하오. 어느 정도냐 하면 열네 살 때부터 계집없이는 잠을
못 잘 정도로…!"
"…!"
부르르…
궁월영의 뒷모습이 어떤 불길한 예감으로 경직되었다.
철운비는 그런 그녀를 노려보며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계집을 좋아해도 내 스스로 맘에 드는 계집이 아니
면 안지 않소. 유감이지만… 성모를 안고 싶은 마음이 지금 내게는 없소.
용서… 하시기를!"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횡하니 돌아서 밀실을 나가 버렸다.
철컹…!
밀실의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흐윽…!"
순간 궁월영의 입에서 억눌렸던 오열이 기다렸다는 듯 터져나왔다.
그녀의 옥용은 최음향의 욕정과 철운비에게 당한 모멸감으로 무참하게 이지
러졌다.
"가… 감히 나 혈해성모를 거절하다니… 용서치 않겠다!"
그녀는 파르르 교구를 떨며 이를 갈았다. 그녀의 두 눈은 얼룩진 눈물과 독
기로 새파랗게 번뜩였다.
"나… 를… 죽기보다 더 치욕스럽게 만들다니… 바득! 그 대가를… 목숨으
로 치루게 되리라! 나쁜 자식!"
그녀는 전신을 바들바들 떨며 격하게 오열했다.
이어 그녀는 섬섬옥수로 자기의 유방을 움켜쥐었다. 최음향이 일으킨 격렬
한 욕화가 그녀의 전신을 엄습한 것이었다.
"흐윽! 죽… 인다! 반드시…!"
궁월영은 오열하며 옆으로 쓰러졌다. 쓰러지면서 그녀는 섬섬옥수로 미친
듯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모양좋은 유방이 그녀의 손길에 의해 제멋대로 이지러지고 하복부의 방초숲
은 금방 뜨거운 온천수로 촉촉히 젖어들었다.
궁월영은 피가 나도록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흐윽! 네놈은 철저하게 내게 이용된 후… 제거되리라! 나… 혈해의 성모를
모욕한 대가로…!"
그녀는 격하게 흐느끼며 떨리는 손을 하복부의 허벅지 사이로 가져갔다. 방
초숲이 그녀의 손 끝에 갈라지며 극히 보드랍고 따뜻한 살점이 만져졌다.
"아아… 흑!"
순간 궁월영은 흐느끼듯 교성을 토하며 몸을 활같이 휘었다. 벌려 세운 그
녀의 허벅지 사이로 명주고름 같은 섬섬옥수가 깊숙이 파고든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을 이미 뜨겁게 달아오른 꽃잎 속으로 밀어 넣으며 한
명의 사내에게 능욕당하는 착각 속에 빠졌다.
한 줄기 차가운 조소를 띄운 앳띤 미소년… 궁월영은 그 미소년이 자신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착각 속에 빠졌다.
미소년은 물론 철운비였다.
"흐윽… 나쁜… 놈! 더… 더 깊이… 아아흑… 아아…!"
궁월영의 격렬한 흐느낌은 끝이 없을 듯 뜨겁게 침실을 울렸다.
혈해성전!
이곳은 혈해의 성녀- 궁월영의 침전이었다.

(빌어먹을 계집… 하오문의 최음향까지 쓰다니!)


슥…
철운비는 빠르게 혈해성전 밖으로 나섰다. 어느덧 사위는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싸늘한 밤바람이 얼굴을 스쳐 끓어오르는 욕화를 다소 흐트렸다.
한데 그 때였다.
"벌써 성모님의 알현이 끝났느냐?"
돌연 전면에서 한 줄기 온화한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
철운비는 흠칫하며 전면을 주시했다.
어둠 속에 일남일녀(一男一女)가 유령같이 서 있었다.
철모와 구지인마! 바로 그들이 아닌가?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마주쥔 채 야릇한 시선으로 철운비를 바라보고 있었
다.
철운비는 당혹감을 느끼며 급히 포권했다.
"웬… 일이십니까 두 분?"
구지인마는 그의 말에 히죽 웃었다.
"크흣! 웬일이긴 웬일이냐? 네녀석이 감히 이 장인어른과 사부의 밀회를 훔
쳐본 죄를 벌하러 왔… 어이쿠!"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하던 그는 갑자기 비명을 내질렀다. 철모가 살짝 옥용
을 붉히며 구지인마의 옆구리를 꼬집은 것이었다.
이어 그녀는 형형한 시선으로 철운비를 주시하며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은… 이제 은퇴하기로 했다. 그래서 후사를 네게 부탁하기 위
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철운비가 자신의 제자로 위장한 것을 별로 책망치 않는 눈빛이었다.
책망은커녕 그녀의 눈에는 자애로움의 빛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
"천황군도와… 인황군도의 십만가솔의 운명을… 이제 네손에 맡길 작정이
다. 그 얘기를 해 주려고 기다렸다!"
철모의 말에 철운비의 안색이 일변했다.
"두 분께서는…!"
철모는 문득 따뜻한 눈으로 구지인마를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자애로움이
가득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 두 늙은이들은 이제 중원의 명산대천(名山大川)이나 유람하러 다닐
작정이다. 천황, 인황 양 군도와… 혈해군벌을 부탁한다!"
이어 그녀는 문득 두 권의 비급을 철운비에게 내밀었다.
철운비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못하고 다가가 공손히 두 권의 비급을 받아들
었다. 그는 이미 혈해군벌의 맹주가 된 상태인지라 비록 철모의 앞이라 해
도 무릎을 꿇을 수는 없었다.

<천강철경(天剛鐵經).>
<인황유명결(人皇幽冥訣).>

두 비급의 제목은 그러했다. 그것들은 혈해구룡의 삼황 중 천황과 인황 일


맥의 천 년 비급이었다.
철모는 자애로운 눈빛으로 철운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떠나기 전에 한 가지 더 부탁할 것이 있는데… 들어 주겠느냐?"
"하명… 하십시오!"
철운비는 공손히 머리를 숙이며 철모의 말을 기다렸다.
철모는 은은하게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부용이란 아이가… 사내아이를 하나 낳아 초씨(楚氏)를 잇도록 해다오! 그
게 이 사부의 마지막 부탁이다!"
순간 철운비의 안색이 벌겋게 변했다.
"어… 어찌 제가 형수님을…!"
그는 당혹함을 금치 못하며 말을 더듬었다.
하나 철모가 그의 말을 막았다.
"너는 이미 약속했다! 부용을… 네 아내로 맞아라! 이것은… 부탁이기 전에
전대 혈해군벌의 맹주로서의 명령이다!"
그녀는 단호한 음성으로 잘라 말했다.
이어 그녀는 철운비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옆의 구지인마를 이끌어 밤
하늘로 날아올랐다.
"끌끌! 잘해 보게나 사위!"
구지인마는 철모에게 끌려가며 의미있는 짓궂은 웃음을 흘렸다.
피잉!
다음 순간 양인은 삽시에 어둠 속을 날아 혈해성전의 아래로 사라져 버렸
다.
"명심해라! 부용을… 울린다면 내가 너를 용서치 않겠다!"
문득 멀리서 철모의 음성이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이… 런 어거지가…!"
철운비는 낭패한 표정으로 양인의 사라진 곳을 주시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던가? 철면천황의 미망인인 곽부용을 아내로 삼으라니
…! 철운비는 실로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그는 멍청한 표정으로 한동안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어느덧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천황부(天皇府).

밤은 깊어 천황부 전체는 짙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하나 단 한 곳, 어둠 속으로 여리게 불빛이 새어나오는 곳이 있었다. 그곳
은 한 칸의 규방이었다.
야심한 시각임에도 방 안에는 궁등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궁등 아래 한
명의 미소부가 다소곳이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부용부인 곽부용, 바로 그녀였다.
"…!"
지금 그녀는 온 정신을 모아 하나의 옷을 만들고 있었다. 붉은 빛이 도는
가죽의 장포, 그 가죽은 바로 만년혈만의 가죽이었다.
만년혈만의 가죽은 질기기 이를 데 없었다.
도검(刀劍)이 불침할 뿐 아니라 수화(水火)마저 불침하는 최고의 호신지보
(護身之寶)였다.
곽부용은 그 만년혈만의 가죽 중에서도 가장 질긴 부위로 한 벌의 장포를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한 올 한 올 정성스럽게 바늘을 움직이며 밤
이 깊은 줄도 모르고 있었다.
(운비(雲飛)… 그 어린 은인이 또다시 천황께서 당한 것과 같은 일을 당하
게 하지는… 않겠어!"
똑…!
문득 장포 위로 한 방울의 눈물이 굴러 떨어졌다. 곽부용은 바로 철운비를
위해 그 장포를 짓고 있는 것이었다.
그 때였다.
"그게… 내거요!"
문득 한 소리 음울한 음성이 곽부용의 귓전을 울렸다.
"…!"
곽부용은 흠칫하며 얼른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규방의 문간에 철운비가 비스듬히 기대선 채 뚫어지게 곽부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의 내부에는 지금 궁월영의 침
실에서 마신 최음향의 욕화가 무섭게 이글대고 있는 것이었다.
곽부용은 갑자기 나타난 철운비의 모습에 당황했으나 곧 수줍게 고개를 떨
구었다.
"그렇사옵니다. 이곳에 오는 선상에서부터 만들기 시작했는데… 아직 덜 끝
났어요!"
그녀는 미약한 음성으로 어렵게 대답했다.
그 연약한 모습에 철운비는 곽부용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싶은 충동이 불끈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꼭 최음향 탓만도 아니었다.
(천생… 여자로군! 아내로는 하늘 아래 가장 훌륭한 여자일 것이다!)
철운비는 내심 중얼거리며 성큼 곽부용을 향해 다가섰다.
"…!"
순간 곽부용은 어떤 불안한 예감에 바르르 몸을 떨었다.
하나 그녀는 달아나지 못했다.
문득 철운비는 곽부용의 앞에 이르러 갑자기 걸치고 있던 구룡적황포를 훌
렁 벗어 버렸다. 그러자 탄탄하게 균형 잡힌 그의 나신이 한꺼번에 드러났
다.
"아…!"
철운비의 나신을 본 곽부용은 나직한 규성을 토하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용… 서를…!"
철운비는 으르렁대듯 말하며 곽부용을 바닥에 쓰러뜨렸다.
"흐윽…!"
곽부용은 철운비의 건장한 몸이 자신을 찍어 누르자 소리를 죽이며 오열을
터뜨렸다. 하나 그녀는 미리 철모에게 언질을 받았는지 저항을 하지는 않았
다.
(철모! 당신의 요구대로… 해 드리리다! 후회하지 마시오!)
철운비는 자신의 몸 아래 깔린 곽부용을 내려다 보며 잔인하게 미소지었다.
이윽고 그는 거칠게 곽부용의 저고리를 벗기려 했다.
순간,
"안… 돼요! 그곳은…!"
돌연 곽부용은 격렬하게 저항하며 두 손을 가슴으로 가렸다.
철운비는 검미를 모았다.
(몸은 허락해도… 유방만은 안 된다는 말인가?)
그는 이해할 수 없는 곽부용의 태도에 고소를 지었다.
(그게 초패강에 대한 마지막 정절이라면… 그렇게 해 주지. 지금 내가 필요
한 것은 단지 그 빌어먹을… 최음향을 해독할 상대 뿐이니…!)
그는 손을 곽부용의 저고리에서 떼는 대신 그녀의 치마를 밑에서 걷어올렸
다. 그러자 환한 궁등의 불빛 아래 곽부용의 우유빛 허벅지가 나타났다.
그녀의 허벅지는 가냘픈 외양과는 달리 아주 풍만했다. 꼭 붙은 허벅지 사
이에 앙증맞도록 작은 고의가 도도룩한 둔덕 부분을 겨우 가리고 있었다.
"음…!"
곽부용의 뽀얀 속살을 본 철운비는 완전히 이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찌익-!
그의 손은 거칠게 곽부용의 고의를 찢어 버렸다.
"흐- 윽!"
순간 곽부용은 흐느낌과 같은 교성을 토하며 본능적으로 두 손을 내려 그곳
을 가렸다.
하나 철운비의 욕화에 타는 눈은 이미 곽부용의 은밀한 곳을 보고난 후였
다.
그녀의 봉긋한 둔덕은 기이하게도 거의 방초가 나 있지 않았다. 단지 짧은
잔디만이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마치 어린 소녀와도 같은 그녀의 기이한 부위의 유혹이 철운비를 거의 미치
게 만들었다.
"흐흣!"
철운비는 거칠게 곽부용의 무릎을 움켜쥐더니 좌우로 벌렸다.
곽부용은 거친 그의 손길에 처음에 격렬한 저항을 보였다.
하나 이내 그녀는 체념한 듯 두 다리에 힘을 뺐다. 그녀의 허벅지가 철운비
의 손길에 의해 양 옆으로 벌려 세워졌다.
"…!"
곽부용은 힘없이 그곳을 가렸던 손을 떼며 대신 얼굴을 가렸다.
철운비는 이글거리는 욕정의 눈으로 곽부용의 허벅지 사이를 노려보며 하의
를 벗었다. 그의 일부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거대하게 변해 한껏 곤두서 있
었다.
"음…!"
그는 치미는 욕화에 몸을 떨며 자신의 몸을 곽부용의 위로 겹쳤다. 놀랍도
록 풍요한 곽부용의 몸이 탄력있게 전신으로 느껴졌다.
한 순간,
"하아악…!"
자지러드는 듯한 곽부용의 신음이 규방을 뒤흔들었다.
"허억… 음…!"
그 뒤로 철운비의 거친 숨결이 잇달아 터져나왔다. 삽시에 뜨거운 열기가
후끈하게 규방을 메우기 시작했다.
철운비의 거칠고 뜨거운 숨결, 곽부용의 숨죽여 흐느끼는 웃음소리가 밤새
그칠 줄 모르고 이어져 나왔다.
천황부의 밤, 뜨겁고 광폭한 열풍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아침(朝),
구- 워어억!
돌연 한소리 창창한 용(龍)의 울음소리가 남해의 아침 바다를 뒤흔들었다.
고오오…!
이어 남쪽으로부터 한 마리 거대한 익룡(翼龍)이 벼락같이 날아왔다.
수레바퀴 같은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오는 익수룡(翼水龍), 바로 잠
마일맥의 수호영인 수호익룡이었다.
수호익룡은 아침 하늘을 가르며 쏜살같이 북쪽으로 날아갔다. 그 수호익룡
의 등 위에는 이인(二人)이 타고 있었다.
일신에 기이한 피의(皮衣)를 걸친 장발 소년과 고대전포를 걸치고 머리에
황금투구를 쓴 여전사(女戰士)였다.
그들은 철운비와 혈해성모(血海聖母) 궁월영, 바로 그들 두 사람이었다.
"…!"
궁월영은 철운비의 등 뒤에 단정히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
습은 더할 수 없이 고귀하고 성결해 보였다. 그녀의 모습 어디에도 간밤 욕
정에 몸부림치던 음탕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궁월영의 앞에는 철운비가 씁쓸한 표정으로 앉아 수호익룡의 목에 매인 대
라철릭을 움켜 쥐고 있었다.
(빌어먹을 계집! 뒤따라 올 수도 있는데 굳이 나와 함께 불귀마해(不歸魔
海)에 가겠다니 어제의 복수인가?)
그는 내심 투덜거리며 입술을 실룩거렸다.
그는 불귀마해로 달아난 쌍뇌모황(雙腦謨皇) 음세황을 추종하기 위해 수호
익룡을 불렀다.
한데, 궁월영이 막무가내로 함께 수로익룡을 타고 가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별 수 없이 그녀와 함꼐 수호익룡을 타게 된 것이었다.
철운비는 씁쓸한 표정으로 내심 중얼거렸다.
(부용부인에게는 안됐지만 불귀마해에서 음세황을 척살하는대로 나는 중원
으로 돌아간다!)
그는 문득 자신의 옷자락을 매만졌다. 그가 걸치고 있는 피의는 바로 만년
혈만의 가죽으로 만든 용린보갑(龍鱗寶甲)이었다.
곽부용을 떠올리자 철운비의 눈빛이 절로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곽부용은 밤새 철운비의 끝없는 요구에 시달려 몇 번이고 혼절했었다. 그녀
는 절정에 이를 때마다 죽은 남편의 이름을 불러 철운비를 당혹하게 만들었
다.
한데 철운비에게 밤새 그렇게 시달리고도 그녀는 새벽까지 바느질을 하여
용린보갑을 완성한 것이었다.
아침에 철운비가 눈을 떴을 때 곽부용은 용린보갑을 완성한 후 피로에 지쳐
그의 침상 옆에 쓰러져 잠들어 있었다.
그것을 본 철운비의 마음은 실로 복잡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의 갈등이 그의 내부를 어지럽혔다.
문득 철운비의 곽부용의 가냘픈 옥용을 눈 앞에서 지우며 씁쓸한 고소를 지
었다.
(부용부인에게는… 평생 갚지 못할 큰 빚을 졌다!)
"다… 왔어요! 불귀마해(不歸魔海)예요!"
문득 철운비의 뒤에서 궁월영의 무심한 음성이 들렸다.
그제서야 철운비는 흠칫 정신을 차리며 전면을 주시했다.
콰르르…! 쓰으… 쓰으…
수호익룡이 날아가는 전면에 뿌연 회색빛 운무가 장막같이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해저화산이 토해내는 유독한 유황독무(硫黃毒霧)였다.
또한 그것은 불귀마해가 시작된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스으… 스으…
음울한 회색의 유황독무는 마치 악령같이 바다를 뒤덮은 채 꿈틀거리고 있
었다. 그 가운데 흐릿한 섬들의 형상과 거친 파도가 철썩이는 것이 그림자
처럼 비쳐보였다.
아직 불귀마해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매케한 유황 냄새가 머리를 아
찔하게 만들었다.
철운비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지독한 곳인데… 음세황(淫世皇)은 왜 이런 곳으로 숨어 들었을까?"
그 말에 궁월영은 음울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저 안에는 하나의 섬이 있어요. 음세황은 그 섬으로 가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이에요."
철운비의 눈이 번득 빛났다.
"용… 형마도(龍形魔島)?"
궁월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나는 그곳의 위치를 용형혈정에서 천 년 만에 알아냈는데 그 직후
에 음세황의 암격을 받았어요!"
철운비는 말을 하는 궁월영의 숨결이 다소 거칠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마
궁월영은 음세황에게 당한 그 치욕스런 장면을 회상하는 듯했다.
구- 워어억!
콰아아…!
그때 수호익룡은 크게 경호성을 토하며 불귀마해의 권역으로 진입했다.
불귀(不歸)의 바다- 불귀마해(不歸魔海)!
잊혀진 천 년의 비지(秘地) 용형마도(龍形魔島)가 바로 그 중 어딘가에 있
는 것이었다.

∑ 제 14 장 신비(神秘)의 불귀마해(不歸魔海)

불귀마해의 중심부,
스으… 스으…
칙칙한 회색의 유황독무 가운데 하나의 섬이 떠 있었다. 또아리를 튼 용
(龍)의 형상을 한 그 섬은 전체가 검붉은 빛의 바위로 이루어져 음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또한 섬 주위로는 검붉은 바닷물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절독한 독무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콰르르… 콰… 아!
돌연 이 유황(硫黃)의 바다가 무엇 때문인지 격렬하게 출렁거렸다.
콰아아-!
이어 해수가 쩍 갈라지며 그 사이로 하나의 거대한 물체가 떠올랐다.
길이 십 수 장에 달하는 원통형의 거대한 물체인 그것은 전체가 검푸른 철
판으로 뒤덮여 있었다. 괴물체는 놀랍게도 그것은 일종의 배(船)였다.

-잠형용선(潛形龍船)!

그것이 배의 이름이었다. 이 배는 특수 설계되어 수면에 떠서도 물 속에 잠


겨서도 운항이 가능했다.
그 옛날 전능천존(全能天尊)이란 기인이 그것을 설계했었다는 전설이 천 년
간 인구에 회자되어 오고 있다. 하나 그것은 그저 전설일 뿐 잠형용선(潛形
龍船)은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
전능천존(全能天尊)-
그는 바로 후일 오대무벌(五大武閥) 중 전능기환전(全能機幻殿)의 시조가
된 전능기황(全能機皇)의 선조였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았
다.
한데 전능천존이 설계했었다는 신기이물(神器異物) 잠형용선(潛形龍船), 놀
랍게도 그것이 이 죽음의 바다 불귀마해에 나타난 것이었다.
철컹!
문득 요란한 금속성과 함께 잠형용선의 윗부분 입구가 둥글게 열렸다.
"여기가… 전설의 용형마도란 말이지?"
이어 한 줄기 여인의 음성이 잠형용선 안에서 들렸다. 그와 함께 한 명의
여인이 천천히 잠형용선의 감판 위로 올라섰다.
나이 이십 오륙 세 가량 되었을까?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일신에 칙칙
한 회색장포를 걸친 미인(美人)이었다. 길게 늘어뜨린 탐스러운 흑발도 두
건으로 질끈 묶어 넘겼다.
그녀는 파리하고 창백한 안색으로 일견하여 몹시 병약해 보였다.
하나 그와는 대조적으로 그녀의 크고 검은 눈만은 지혜와 총기로 별같이 반
짝이고 있었다.
"이곳 어디엔가 마종지보(魔宗之寶)인 마황혈정(魔皇血鼎)이 감추어져 있단
말이지?"
회포여인은 깊은 지혜가 담긴 시선으로 독무에 싸인 용형마도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파리한 옥용으로 문득 복잡한 상념의 그늘이 스쳤다.
(이십 년 전 실종되었던 세황(世皇) 오라버니가 혈해군벌에 잠입하여 용형
마도의 위치를 찾고 있었다니…!)
그녀의 표정이 아주 묘하게 변했다.
그녀의 손에는 최근 자신의 가문에 전해진 한 장의 서신이 들려 있었다. 그
것을 보낸 자는 한때 남해(南海) 제일기재라 알려졌던 자였다.
서신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소자(小子) 세황(世皇)이 삼가 아버님께 올립니다.
…中略…
혈해성모(血海聖母)는 최근 용형마도(龍形魔島)의 위치를 거의 알아낸 듯합
니다. 용형마도는 아마도 불귀마해(不歸魔海) 중에 있는 축융화염도(祝融火
焰島) 같은데 아직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혈해성모가 해도(海圖)를 완성한
순간 취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 서신을 쓴 자는 바로 지황군도의 도주인 쌍뇌모황(雙腦謨皇) 음세황이었


다.
그는 지옥마교(地獄魔敎)의 간세라고만 알려져 있었다. 하나 실상 그의 배
후에는 또 다른 세력이 있었던 것이다.
회포여인은 우울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오빠가 이미 마황혈정(魔皇血鼎)에 접근한 것은 아닐까?)
그녀의 지혜로운 눈빛이 엇갈린 상념으로 복잡해졌다.
(아아… 아버님 천수제왕(千手帝王)께서는 마황혈정의 천년마공(千年魔功)
으로 오패지존(五覇至尊)이 되시려는 야심을 갖고 계시다. 그것은 불의(不
義)인데… 자식된 도리로 막을 수가 없으니 안타깝구나…!)
그녀는 탄식하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회포여인은 결연한 표정으로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님의 불의한 야심을 막기 위해서라도… 마황혈정은 오라버니보다 나
음사향(淫麝香)이 먼저 얻어야만 한다!"
츠- 읏!
잔잔한 그녀의 봉목 깊을 곳으로 일순 새파란 안광이 배어 흘렀다.
"운중(雲中) 폭풍성(暴風城)의 마지막 전인인 검왕(劍王) 벽황(碧皇)이 한
걸음 먼저 용형마도에 상륙했으나… 마황혈정은 결국 나… 번뇌화(煩惱花)
음사향의 손에 들어오게 되리라!"
그녀는 낮고 우울한 음성으로 독백했다.
한데 그녀의 독백이 끝난 직후였다.
"후훗! 계집치고는 좀 광오한 데가 있는데…?"
돌연 한 소리 비웃음이 그녀의 뒤에서 들렸다.
"…!"
번뇌화 음사향이라 자칭한 회포여인은 일순 흠칫했다.
(어떤 자이기에… 전능일맥(全能一脈)의 제이(第二) 고수인 나의 이목을 속
이고 바로 뒤까지 접근했단 말인가?)
그녀는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나 그녀의 옥용에는 전혀 감정의 변
화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돌아섰다.
돌아서던 번뇌화 음사향은 다시 한번 놀라야만 했다.
스으… 스으!
짙은 독장이 피어오르는 해면 위에 일남일녀(一男一女)가 흡사 유령같이 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붉은 장포를 걸친 십 칠팔 세 가량의 소년과 일신에 고대 여신과 같
은 고풍스런 전포를 걸치고 머리에 황금 투구를 쓴 고고한 인상의 미소부였
다.
바로 철운비와 혈해성모 궁월영이었다.
화라락…!
지금 철운비는 윤기 흐르는 흑발을 태풍에 흩날리며 바다 위에 태연히 앉아
있었다. 그런 그의 뒤에는 궁월영이 고고한 표정으로 오연히 서 있었다.
음사향은 한눈에 혈해성모 궁월영을 알아보고 태연히 놀랐다.
(저 계집은 혹시 남해(南海)의 여제왕 혈해성모 궁월영…!)
하나 그녀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철운비였다. 그녀가 보기에 궁월영이
마치 철운비의 수하인 듯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음사향은 놀람은 금치 못하며 내심 중얼거렸다.
(내 눈이 틀리지 않는다면… 저 어린 소년은 혈해성모보다 오히려 몇 배 더
무서운 강적일 것이다!)
그녀는 은연중 가슴이 떨림을 느꼈다.
그때 철운비가 음사향의 몸매를 쓸어보며 히죽 웃었다.
"후훗! 제법 예쁘고 영리해 보이지만… 마황혈정이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
다니… 경망스럽군!"
그의 시선이 닿자 음사향은 흡사 자신이 발가벗기는 듯한 착각을 느끼며 옥
용이 새빨개졌다.
"무례하군요 어린 분이…!"
그녀는 서늘한 시선으로 철운비를 쏘아보며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끝내
동요의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철운비는 문득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 곧 그는 눈
썹을 찡긋하며 유쾌하게 웃었다.
"하하! 좋아! 당신과는 웬지 앞으로도 여러 번 만날 것 같군. 오늘은… 이
정도로 헤어져야겠어!"
철컹!
말을 마침과 함께 그는 쥐고 있던 대라철릭을 힘껏 잡아당겼다.
구- 워어억!
콰아아! 촤… 아…!
순간 굉렬한 용(龍)의 울음소리가 터지며 유황의 바다가 쩍 갈라졌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의 거대한 물체가 벼락같이 떠올랐다.
콰아아…! 우르르…
이어 그 거대한 물체는 잠형용선을 뒤엎어 버릴 듯 거창한 파도를 일으키며
까마득히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수… 호익룡(守護翼龍)?"
순간 음사향은 경악성을 발하며 급히 천 근 추의 공력으로 흔들리는 잠형용
선을 안정시켰다.
"핫하! 기억해 두는 게 좋아. 내 이름은 운비(雲飛)! 구룡혈황(九龍血皇)
철운비(鐵雲飛)라고 하지!"
고오오…!
순간 까마득히 치솟는 수호익룡의 등 뒤에서 철운비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구워어억…!
그와 함께 수호익룡은 철운비의 장소에 호응하는 듯 길게 용음을 토하며 독
무 속에 잠긴 용형마도 안으로 날아들었다.
"철… 운비! 구룡혈황 철운비…!"
번뇌화 음사향은 수호익룡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실성한 듯 중얼거렸다.
철운비! 그 이름만이 그녀의 뇌리를 가득 채워 버린 듯…!
스으… 스으…!
파도가 가라앉은 해면에는 짙은 유황독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용형마도의 지하에는 화산(火山)이 작용하여 생긴 아주 복잡한 용암동굴이


펼쳐져 있었다.
그 용암동굴의 깊은 곳,
"으음… 설마 이것이 천 년 이전에 실전된 열화대진(熱火大陣)의 진형(陣
形)이란 말인가?"
문득 피곤에 지치고 경악이 실린 한 소리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한 용암동굴의 끝,
"…!"
한 명의 문사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희고 창백한 신색의 중년문사,
쌍뇌모황 음세황-!
아! 그 자는 바로 성모천도에서 달아난 음세황이었다. 지금 음세황은 놀라
움이 가득한 시선으로 전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삼십 장 앞에는 하나의 철문(鐵門)이 우뚝 가로막혀 있었다. 높이 일
장의 그 철문 위에는 웅휘한 대전체로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었다.

<마황지문(魔皇之門).>

그것은 일견하여 천 년 이전에 쓰여진 글이었다. 또한 자세히 보면 그 글


아래로 한 폭의 아수라(阿修羅)의 문양과 작은 글들이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마황(魔皇)의 문(門)에 드는 자(者) 마황혈정(魔皇血鼎)을 얻을 것이고…


그는 곧 천년마제(千年魔帝)라 불리리라!

글의 내용은 그러했다.
그것은 일반인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글이었다.
하나 무림인에게는 달랐다. 그들에게는 실로 더할 수 없는 유혹을 지니고
있었다.

<마황혈정!>

그것을 얻으면 곧 고금무적이 된다는 소문은 이미 천 년 이전부터 전해 왔


었다.
혹자는 그것을 남해 잠마혈맥(潛魔血脈)의 천년지보(千年之寶)라고 했다.
또 혹자는 마황혈정이 사대마맥(四大魔脈) 중 가장 무서웠던 불사마맥(不死
魔脈)이 남긴 유물이라고도 했다.
두 가지 중 어느 쪽이 맞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나 마황혈정에 무서운 마
력(魔力)이 담겨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마황혈정이 마황지문(魔皇之門)이라는 철문 뒤에 있다는 것
이었다. 그 이상 가는 유혹이 달리 어디에 있겠는가?
음세황은 당장이라도 그 철문을 박살내고 안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하나 그는 지금 철문의 삼십 장을 격하고 단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하고 있
었다. 그 이유는 철문과 그 사이에 박혀 있는 일단의 쇠기둥 때문이었다.
보라! 굵기 한아름, 높이 일 장 정도의 무쇠 기둥들이 현묘한 진형으로 철
문 주위에 박혀 있지 않은가?
스으… 스으…
그 무쇠기둥들은 무엇 때문인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각 기둥 사
이에는 보이지 않으나 무서운 열화강풍(熱火강風)의 막(幕)이 끝없이 흐르
고 있었다.
음세황은 철문의 삼십 장 밖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채 고심에 잠겨 있었다,
팟!
문득 그는 하나의 돌조각을 들어 철주(鐵柱) 사이에 던져보았다.
푸스스!
순간 그 돌조각은 순간적으로 새카맣게 타며 재가 되어 허공으로 흩날렸다.
그것을 바라보는 음세황의 이마에 땀이 배어 흘렀다.
(으음… 하늘 아래 모든 기문지학(奇門之學)을 달통했다고 자신한 나도 모
르는 진형이 있다니…!)
얄팍한 그의 입술 끝이 낭패함으로 이지러졌다.
(정말 이것은 천 년 전 불사마맥(不死魔脈)의 마지막 후예 태양천마(太陽天
魔)와 함께 실전되었다는 열화대진(熱火大陣)일까?)
그는 미간을 잔뜩 모으며 침음성을 발했다.
그를 더욱 당혹하게 만드는 것은 태양천마라는 그 고대마종(古代魔宗)의 유
적이 어떻게 중원에서 수만 리 떨어진 이곳 남해고도에 있느냐 하느 것이었
다.
그것은 실로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음세황은 온 정신을 집중하여 염두를 굴렸다.
(이것이 열화대진이 맞는다면… 유일한 생문(生門)은 저곳… 이문(離門)이
다!)
그는 수십 개의 철주(鐵柱) 중 하나를 노려보았다.
그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다! 필경 혈해성모와 그 빌어먹을 애송이가 이
주위에 육박해 있을 것이다.)
그는 입술을 씰룩이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어 그는 소매 속에서 오른손을
쳐들었다.
쩌러렁!
그러자 괴이한 음향과 함께 그의 오른손이 먹물을 칠한 듯 검게 변했다.
(파옥묵강참(破玉默강斬)의 일격이라면 저 기둥을 깨뜨릴 수 있을 것이다!)
철주를 노려보는 음세황의 눈빛조차 검게 변했다.

-파옥묵강참(破玉默剛斬)!

그것은 저 오패천(五覇天) 중 전능기환전(全能奇幻殿) 사상 최강의 파천기


공(破天奇功)이었다. 그 위력은 실로 엄청나 스치기만 해도 옥(玉)을 두부
같이 으스러뜨릴 수 있을 정도였다.
음세황은 전내공을 우수(右手)에 모아 열화대전 중 이문(離門)의 철주를 겨
냥했다. 이어 그는 벼락같이 우수를 뻗어 이문의 철주를 향해 내치려 했다.
한데 그 때였다.
"그러면… 안 돼! 혈해군벌의 망나니…"
돌연 한 줄기 싸늘한 음성이 음세황의 귓전을 울렸다.
"웬놈이냐?"
순간 음세황은 대경하며 부르짖었다.
꽈- 릉!
동시에 그는 벼락같이 뒤쪽을 향해 파옥묵강참을 후려쳐 냈다.
빠지직…!
무쇠가 잘리는 소성과 함께 한 줄기 검은 빛이 벼락같이 음세황의 손 끝에
서 일며 허공을 그었다.
그 순간 음세황은 보았다. 한 명의 인물이 자신의 일 장 뒤에 유령같이 서
있는 것을!
그 인물은 표범같이 날렵한 몸매에 미청년이었다. 일신에 걸친 옷은 빛바랜
마의(麻衣), 삼단같은 머리 역시 빛바랜 영웅건으로 질끈 묶고 있었다.
마치 관옥으로 빚은 듯 영준하기 이를 데 없는 용모의 미청년, 그는 한 자
루 목검(木劍)을 내려뜨린 채 우뚝 서 있었다.
꽈르릉…!
다음 순간 파옥묵강참의 파천지력은 가차없이 마의청년의 몸에 작렬했다.
헌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스읏!
힘없이 내려뜨리고 있던 마의청년의 목검이 믿어지지 않을 속도로 위를 향
해 그어졌다. 그것은 눈부신 속도로 뻗어 파옥묵강참의 역도를 막아갔다.
음세황은 그 모습에 비릿한 조소를 베어물었다.
(미친 놈! 파천묵강참을 한낱 나무조각으로… 헉!"
비웃음을 흘리던 그의 안색이 홱 변한 것은 바로 직후였다.
쩌- 억!
놀랍게도 무엇이라도 으스러뜨린다는 파옥묵강참의 역도가 마의청년의 목검
끝에서 일어난 무형의 역도에 물살 갈라지듯 쩍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음세황은 두 눈을 무섭게 부릅떴다.
"무형…검강(無形劍剛)! 너는 소문의 검왕(劍王) 벽황(碧皇)…!"
하나 그의 입에서 터진 경악성은 채 을 맺지 못했다.
퍼- 억!
마의청년의 무령검강은 비단 파옥묵강참을 베었을 뿐 아니라 전광이 뻗치는
기세로 음세황의 정수리로 파고든 것이었다.
그것은 일견하여 극히 느릿해 보이는 일검(一劍)이었다. 하나 어떤 방법으
로도 그 일검(一劍)에서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퍼퍽!
"크- 아악!"
다음 순간 피보라가 확 퍼져오르며 처참한 비명이 동굴을 뒤흔들었다.
보라! 음세황, 그가 오른팔이 어깨에서부터 쌍둥 잘려 지면으로 나뒹군 것
이 아닌가? 남해무림의 삼대고수 중 한 명인 그가 어이없게도 단 일 초 만
에 한 팔을 잃어버린 것이다.
"크으… 전… 전설의 천년검왕(千年劍王)이로군!"
쿠쿵!
간발의 차이로 정수리가 빠개지는 대신 한 쪽 팔을 잃은 음세황은 고통스럽
게 안면을 일그러뜨리며 절망적인 신음을 발했다.
그는 신형을 비틀거리며 열화대전 쪽으로 밀려섰다.
치지직…!
그 바람에 그의 몸이 열화강풍의 막에 닿아 역겨운 살냄새와 함께 등이 타
들어 갔다. 하나 너무 놀란 나머지 음세황은 그것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했
다.
(어찌… 천년검왕이 계집 중에 나지 않고 사내 중에 났단 말인가?)
그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두 눈을 한껏 부릅뜬 채 자신의 앞에 표표히 서
있는 마의청년을 주시했다.

-검왕(劍王) 벽황(碧皇)!

이것이 음세황이 아는 그 미검수(美劍手)의 이름이었다. 그는 일 년 전부터


전 중원을 한 자루 목검(木劍)으로 휩쓸고 다니는 무서운 승부사였다.
아무도 검왕(劍王) 벽황(碧皇)의 일검을 받아내지 못했다. 흑자는 그가 이
미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알려진 운중(雲中) 폭풍성의 마지막 후예라고도 했
다.
그가 얼마나 강한지는 아무도 몰랐다. 심지어 그는 그 옛날의 고독패왕만큼
강하지 않겠냐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 정도였다.
한데 바로 그런 검왕 벽황이 지금 음세황의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검왕(劍王) 벽황의 체구는 별로 크지 않았다. 하나 음세황은 마치 자신의
앞에 하나의 산이 우뚝 솟아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만큼 검왕의 존재
는 거대해 보였다.
"네가… 죽어야 하는 이유는… 위대한 오패천의 후예이면서 지옥마교의 무
리와 내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슥!
검왕은 우울한 음성으로 말하며 재차 수중의 목검을 쳐들었다.
그런 그의 얼굴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너무도 아름다와 퇴폐적이고 요악해
보일 정도였다. 같은 사내라 해도 넋을 잃고 말 정도였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핫하… 나보다 한 걸음 먼저 음세황이란 쥐새끼를 잡은 친구가 계시는군!"
문득 한 소리 듣기 좋은 낭랑한 웃음소리가 이 인의 귓전을 울렸다. 그와
함께 하나의 훤칠한 인영이 유령같이 동굴의 입구에 나타났다.
윤기 흐르는 장발에 붉은 피의를 걸친 소년! 바로 철운비였다.
"네놈은… 철… 운비(鐵雲飛)!"
그가 나타난 순간 음세황의 두 눈이 공포와 절망으로 부릅떠졌다. 그는 흡
사 사신(死神)을 본 듯한 표정이었다.
(철… 운비?)
그때 검왕 벽황의 검미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태산이 무너진다 해도 끄덕하지 않을 성격의 그였다. 한데, 철운비라는 그
이름 하나가 그의 부동심(不動心)을 순간적으로 박살낸 것이 아닌가?
(설마 저 아이가 나의 어린 사제(師弟)란 말인가?)
그는 해연히 놀라 부지불식간에 홱 뒤를 돌아보았다.
그것이 실수였다.
"…!"
음세황의 간교한 눈이 순간적으로 벼락치듯 번쩍였다. 그를 꼼짝달싹 묶어
놓고 있던 검왕의 무령검망이 실날같은 빈틈을 드러낸 것이었다.
"카앗! 깨… 져랏!"
꽈릉-!
음세황은 그 실날같은 틈을 이용하여 발악하듯 외치며 파옥묵강참을 열화대
진 안 쪽으로 외쳤다.
"엇! 조심하시오!"
"…!"
휙!
동시에 철운비는 경악성을 발하며 벼락같이 날려 검왕에게로 날아들었다.
꽈… 꽝! 콰드득!
그 순간 굉렬한 폭음과 함께 이문(離門) 방 위의 철주가 박살났다.
쿠- 릉!
동시에 바닥이 쩍 갈라지면서 천정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바득! 다시… 보자! 애송이들…"
그 가운데 음세황은 이를 갈며 마황지문 쪽으로 몸을 날렸다.
콰콰쾅… 콰- 드득!
직후 가공할 굉음과 함께 기다렸다는 듯 동굴 전체가 함몰되어 내려앉았다.
"어엇!"
"우우…!"
철운비와 검왕의 다급한 경호성이 굉음 속에 터져나왔다.
하나 이내 그 소리는 굉음 속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다.
콰드득! 쿠쿠쿵!
천지멸렬의 굉음과 함께 동굴은 차례차례 허물어져 내렸다.
콰르르… 쿠쿠쿠…
그와 함께 갈라진 바닥으로부터 시뻘건 용암의 화염이 치솟아 올랐다.
대파멸(大破滅)!
순간적으로 용암동굴은 열화지옥으로 화했다. 그 광경은 실로 엄청났다.
돌연한 대붕괴에 휩쓸린 철운비와 검왕, 그들은 과연 어찌된 것인가?

캄캄한 어둠 속,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칠흑같은 어둠이 사위를 뒤덮


고 있었다.
문득 그 어둠 속에서 한 소리 괴로운 투덜거림이 흘러나왔다.
"크읏! 그 간교한 놈에게 기회를 주다니… 바보같은 작자!"
이곳은 지하의 또 다른 용암동굴이었다. 이 동굴은 방금 전 붕괴된 용암동
굴의 아래에 위치하고 있었다. 주위의 곳곳에는 함몰한 암석더미가 산재해
있었다.
콰드득!
문득 십만 근은 나감직한 하나의 바윗덩이가 모래같이 박살났다.
두두두!
이어 부서진 바윗덩이 뒤에서 한 명의 소년이 낭패한 신색으로 걸어나왔다.
철운비, 바로 그가 아닌가?
그의 팔에는 검왕(劍王) 벽황이 죽은 듯 축 늘어진 채 안겨 있었다. 지금
그들 두 사람은 모두 낭패한 신색이었다.
그나마 철운비는 만년혈만의 껍질로 지어진 보갑을 걸치고 있어 별 타격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검왕은 그렇지 못했다. 열화대진에서 일어난 열화강풍에 정면으로
휩쓸린 탓인지 그의 모발과 의복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철운비는 고소를 지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부용부인에게… 또 한 번 신세를 지고 말았다!"
이어 그는 검왕을 안은 채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암흑으로 뒤덮인 동
굴 속을 걸으며 문득 철운비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가볍지? 게다가 부용의 몸에서 나던 것 같은 기분
좋은 살냄새까지 나다니…!)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검왕을 내려다 보았다.
과연 기이했다. 철운비의 두 팔에 안긴 검왕의 몸은 아주 나긋하고 부드럽
지 않은가?
철운비는 검미를 모으며 고소를 지었다.
(어쨌든… 이런 연약한 몸에서 음세황 같은 초고수를 일격에 벤 무서운 힘
이 나오다니 놀랍다!)
그는 내심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한데 문득 그의 두 눈이 번쩍 빛났다.
(저것은… 무어지?)
그는 시력을 돋구어 전면을 주시했다.
전면으로 황급히 꺾어도는 용암동굴이 보였다. 한데 그 동굴의 벽 무엇인가
희고 붉은 빛을 토하는 하나의 물체가 기대어 있었다.
"시… 체 아닌가?"
그것을 자세히 본 순간 철운비는 아연하며 나직한 경악성을 발했다.
그렇다. 놀랍게도 그 물체는 바로 인간의 유골(遺骨)이었던 것이다.
철운비는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꿈에도 지하 수백 장의
이 용암동굴에서 인간의 시체를 발견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
이었다.
"…!"
그는 급히 시체가 기대앉아 있는 벽 쪽으로 다가갔다.
그 해골은 단정히 가부좌를 튼 자세로 벽이 기대앉아 있었다. 아마도 생시
거인(巨人)이었던 듯 앉아 있는 높이만도 여섯 자 가까이나 되었다.
시체는 붉은 고대적포를 걸치고 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듯 그것은 거의
다 살아 있었다.
한데 실로 기이했다. 해골은 정확히 반으로 나뉘어 각기 붉고 흰색으로 번
들거리고 있지 않은가?
해골의 주인은 아마도 무엇인가 극히 상반된 내공에 가격당해 죽은 듯했다.
"…!"
철운비는 시력을 집중하여 시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시체가 기대어 앉은
벽에는 금강지력으로 쓴 글이 가득 적혀 있었다.

<불사마맥(不死魔脈)의 못난 제자 태양천마(太陽天魔) 숙야염(宿夜炎)이 속


죄하여 이 글을 남긴다.>

동굴 벽의 글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 제 15 장 태양천마(太陽天魔)의 유물(遺物)

"태…태양천마(太陽天魔)!"
동굴 벽에 새겨진 글을 본 철운비는 아연실색하며 부르짖었다. 그는 얼마나
놀랐는지 하마터면 안고 있던 검왕을 떨어뜨릴 뻔했다.

-태양천마(太陽天魔)!

이 얼마나 놀라운 이름인가?


천 년 그 이전, 저 고루마맥(固陋魔脈)의 위대한 마황(魔皇) 고루황(固陋
皇)을 격패시켜 끝내 죽음에 이르게 한 전설적 패왕(覇王)!
태양천마가 저 사대마맥(四大魔脈) 중 최강이던 불사마맥(不死魔脈)의 전인
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한데 그 전설적 거마(巨魔)가 놀랍게도 이 남해 절해고도(絶海孤島)의 지하
에 화석이 되어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실로 놀랍고도 경이로운 사
실이 아닐 수 없었다.

철운비는 경이의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불사마맥의 마지막 전인을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다니…!"
이어 그는 안고 있던 검왕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
고는 눈을 빛내며 자세히 태양천마의 시신을 살펴보았다.
헌데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태양천마의 좌측 반신은 하얀 빛을 띠고 있었
는데 가까이서 보니 그 반신 골격은 모두 얼어붙어 있었다.
반면 그의 오른쪽 반신 골격은 달군 쇠같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지 않은가?
철운비는 그것을 바라보며 새삼 경악을 금치 못했다.
(태양천마가 고금최강의 열화마공(熱火魔功)을 연마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
실이다. 한데… 누군가 강력한 극음기공(極陰奇功)으로 태양천마를 암격하
여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그는 한눈에 태양천마가 어떤 강맹한 극음
기공에 격중되어 죽게 되었음을 알아보았다.
불사마맥(不死魔脈)의 후예… 태양천마!
과연 누가 있어 그를 얼어죽게 만들었단 말인가?
(이 글 중에 해답이 있겠지!)
철운비는 다시 벽면에 써 놓은 글로 시선을 옮기려 했다. 그러다 문득 그는
부주의하여 자칫 소매로 태양천마의 다 삭은 붉은 장포를 건드리고 말았다.
퍼- 석!
순간 그 붉은 장포는 삽시에 재로 변해 우수수 부서져 내렸다.
따… 땅!
헌데 그 직후 한 소리 맑은 금속성이 붉은 장포 속에서 일며 둥근 쇠고리
(鐵環)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전체가 검붉은 빛을 띤 그 쇠고리는 일견하여 직경 반 자 정도 되어 보였
다. 또한 그 표면에는 흐릿한 뇌정흔(雷霆痕)이 떠올라 있었다.
(무어지 이것은…?)
철운비는 고개를 갸웃하며 바닥의 쇠고리를 집어들었다. 그러자 손에 쥔 쇠
고리에서 은은한 열기가 느껴졌다. 쇠고리의 안쪽에는 몇 자의 글이 적혀
있었다.

<뇌정륜(雷霆輪).>

그것은 범어(梵語)였다.
철운비는 그 글을 보며 의아한 듯 검미를 모았다.
(뇌정륜? 환(環)이라 해야 옳은 물건인데 왜 륜(輪)이라 이름붙였지?)
그는 언뜻 뇌정륜의 표면에 새겨진 뇌정흔에 오묘한 현기가 담겨 있음을 느
낄 수 있었다. 하나 그것은 현묘하기 이를 데 없어 일시에 이해할 수 없었
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다시 살펴보자!)
철운비는 뇌정륜을 왼쪽 손목에 걸었다. 이어 그는 다시 벽면으로 다가가
태양천마의 글을 살펴보았다.
글은 다시 이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中略… 사조(師祖) 불사성황(不死聖皇)께서 남기신 마황혈정(魔皇血鼎)


의 종적을 찾아 헤매다 결국 이곳 용형마도에서 그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본좌는 뛸 듯이 기뻐했다. 헌데 바로 그 때와 거의 동시에 두 명의 무서운
계집이 들이닥쳤다. 그 계집들은 바로 빙모(氷母)와 잠후(潛后)의 후예들이
었다…!>

거기까지 읽고 난 철운비는 또 한 번 경악해 마지 않았다.


"마황혈정! 그것은 잠마혈맥의 것이 아니고 불사마맥의 제일인자 불사성황
(不死聖皇)이 남긴 것이란 말인가?"
그는 짐작지 못한 뜻밖의 사실에 경악의 신음을 발했다. 그는 이끌려들 듯
다시 벽면의 글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태양천마가 남긴 글은 무림인들이 전혀 모르는 아주 놀라운 비사(秘事)를
담고 있었다.

일천 수백 년 전, 사대마맥중 가장 신비하고 무서운 불사마맥에 한 명의 초


인(超人)이 났었다.

-불사성황(不死聖皇)!

바로 그였다.
불사성황은 가히 고금최강이라 할만큼 막강했던 인물이었다. 그의 지혜와
자질은 가히 영세무적(永世無敵)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대마맥 중 가장 강했던 불사마류(不死魔流)는 불사성황의
대(代)에 이르러 한 단계 더 강해졌다.
영세제일인(永世第一人)!
그렇게 불려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최강의 초인- 불사성황!
하나 하늘의 안배인가? 그는 죽음에 이를 때까지 자신의 절기를 전할 의발
전인을 얻지 못했다.
불사성황의 초마공은 너무나도 현오하여 어떤 기재도 불사성황의 절기의 단
오성(五成)도 연마하지 못했다.
불사성황은 백 년 간 환우를 주유하며 자신의 절기를 전할 기재를 찾아다녔
다. 하나 그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세상이 아무리 넓어도 고금제일이라
는 불사성황 만한 인재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는 그 과정에서 제법 뛰어난 한 쌍의 남녀기재를 얻게 되었다. 불
사성황은 자신의 절기를 둘로 나누어 그 두 남녀에게 전수했다.

-빙모(氷母).
-뇌왕(雷王).

두 남녀는 그렇게 불리웠다.


그들은 후일 부부가 되어 양극쌍려(兩極雙侶)라 불린 빙문(氷門)과 화문(火
門)의 종사들이었다.
빙모는 불사성황의 절기 중 극음의 절기를, 뇌왕은 반대로 극양절기를 전수
받았다.
불사성황은 빙모와 뇌왕에게 상극의 절기를 전수하며 그들이 부부가 되어
함께 불사마류(不死魔流)를 이어가기를 원했다.
하나 신(神)의 영역에 육박하던 초인 불사성황이었건만 모든 것이 그의 안
배대로만은 되지 않았다.
빙모와 뇌왕은 불사성황의 생시에는 그의 뜻대로 결혼하여 금슬좋은 부부관
계를 유지했다.
하나 문제는 불사성황의 사후(死後)에 일어났다. 불사성황이 사망하자 호승
심이 강한 빙모와 뇌왕은 누가 불사성황의 정통전인인가를 놓고 서로 대립
하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또 한 명의 여인까지 끼어들어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잠후(潛后)!

이것이 제삼의 여인의 이름이었다. 그녀는 바로 불사성황의 아내였던 여인


이었다.
잠후가 빙모와 뇌왕, 두 부부의 암투에 끼어든 이유는 하나의 향로 때문이
었다.

-마황혈정(魔皇血鼎)!

바로 그것이었다.
마황혈정은 결코 평범한 향로가 아니었다.
불사성황은 생시 자신의 절기를 모두 전수해 줄 전인을 구하지 못한 것을
통한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는 빙모나 뇌왕, 그리고 아내인 잠후에게도 전
수하지 않은 초극마공을 그 향로에 새겨 놓은 것이었다.
즉, 마황혈정에는 고금최강의 절예가 숨겨져 있는 것이었다.
잠후는 남편 불사성황이 죽자 당연히 아내인 자신이 남편의 유물인 마황혈
정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빙모와 뇌왕이 그것을 용납할 리 없었
다.
결국 삼 인 사이에는 일대격전이 벌어졌으며, 그 결과 빙모와 뇌왕은 양패
구상했고 잠후는 희생치 못할 중상을 입었다.
하나 잠후는 죽어가면서도 마황혈정을 탈취하여 불사마류(不死魔流)의 수호
영물인 불사익룡(不死翼龍)을 타고 남해로 날아가 버렸다.
그 불사익룡이 바로 철운비가 얻은 수호익룡의 어미였고 절정마도의 잠마별
부(潛魔別府)에 죽어 있던 그 익룡(翼龍)이었다.
물론 사대마맥 중 남해 잠마혈맥은 불사성황의 아내 잠후(潛后)의 후예들이
었다.
한데 잠후는 불사익룡을 타고 불귀마해를 날아 건너다가 자칫 실수하여 마
황혈정을 바다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곳이 바로 이 용형마도의 근해였다.
천여 년 전, 뇌왕(雷王)의 후예 태양천마는 우연히 마황혈정이 불귀마해에
빠졌음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안 즉시 그는 남해를 건너 이곳 용형마도
로 왔다.
천우신조랄까? 태양천마는 간신히 마황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하나 그 직후 두 명의 무서운 적수가 잇따라 나타났다.
먼저 나타난 여인은 바로 잠마여제(潛魔女帝) 궁비연(宮飛燕)이었다.
당연히 태양천마와 잠마여제 사이에는 일장 격투가 벌어졌다. 그것은 실로
경천동지할 대격전이었다.
사실 태양천마 숙야염은 내공면에서 잠마여제보다 약간 우세했다. 하나 그
차이는 극히 미미하여 양인은 초를 싸우도록 승부를 내지 못했다.
두 남녀는 오랜 싸움으로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바로 그때 또 다른 무서운 여마종이 들이닥쳤다.

-빙하서시(氷河西施) 설옥빈(雪玉斌)!

그녀는 바로 양극쌍려 중 빙모의 전인이었다.


빙하서시는 나타나자마자 즉시 손을 써서 태양천마와 잠마여제를 급습했다.
태양천마와 잠마여제,
비록 그들이 아무리 초인경에 이른 고수자들이라 해도 이미 이만 초를 싸워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다.
결국 잠마여제가 먼저 빙하서시의 빙하천강(氷河天剛)에 휘말려 용암 속으
로 추락하고 말았다.
뒤이어 빙하서시의 빙하천강은 태양천마를 휩쓸었다. 그때 태양천마에게는
이미 빙하천강을 피할 여력이 없었다.

태양천마 숙야염의 통한 어린 글은 다음과 같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결국 본좌는 그 계집의 빙하천강에 격중되어 반신이 얼어붙고 말았다. 하


나… 그 계집도 자칫 방심하다가 본좌의 뇌정인(雷霆印) 공력에 격중되었
다. 노부는 곧 죽을 것이나… 빙하서시도 결국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거기에서부터 글은 급격히 흐려지고 있었다. 그것은 태양천마의 내공이 거


의 소멸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결국 태양천마는 불사마맥의 후예들인 자신들 삼 인 중 누구도 마황혈정을
얻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한 칸의 석실을 지어 그곳에 마황혈정
을 감추고 그 석실을 열화대진(熱火大陣)으로 방호한 것이었다.
"…!"
철운비는 얼마 남아 있지 않은 벽면의 글을 다시 읽어 내려갔다. 글은 흐릿
하게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연자(緣者)가 아니면… 누구도 마황혈정을 얻지 못하고… 설사 얻는다 해


도 그분 불사성황(不死聖皇)님만한 자질을 지닌 자가 아니면 마황혈정의 절
기를 얻지 못한다. 빙하서시나 잠마여제, 그리고 노부 숙야염… 누구도 마
황혈정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것을… 죽음에 이르러서야 알다니 애석하기
이를 데 없다.
혹여… 후인이 이 글을 발견하거든 본좌가 남긴 뇌정륜을 거두어 대설산(大
雪山) 천년빙궁(千年氷宮)에 돌려 주기 바란다. 뇌왕일맥(雷王一脈)은 한시
도 빙모일맥(氷母一脈)을 잊은 적이 없다는 말과 함께…>

태양천마의 글은 거기에서 끝나 있었다. 아마도 태양천마는 그 글을 쓴 직


후 빙하천강이 심장을 침습하여 사망한 듯했다.
벽면의 글을 다 읽고 난 철운비는 고개를 흔들며 나직하게 탄식했다.
(씁쓸한 얘기로군. 한낱 솥(鼎) 하나 때문에 사형매(師兄妹)와 사모(師母)
들이 서로 죽이고 죽다니…!)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벽면에서 시선을 뗐다.
(어쨌든 놀랍다. 불사마맥을 온전히 이은 것도 아니고 반쪽 전인인 태양천
마가 사대마맥 중 누구보다도 강했다니…!)
철운비는 새삼 경탄의 시선으로 태양천마의 유해를 주시했다.
태양천마-!
그는 비록 해골로 화했으나 여전히 그에게서는 사해팔황(四海八荒)을 호령
하던 당당한 일대패왕의 위엄이 느껴졌다.
한동안 태양천마의 유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철운비는 문득 흠칫했다.
(아차! 내가 마황혈정의 비사에 정신이 팔려 검왕(劍王)이란 친구를 잊었
군!)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제서야 그는 검왕 벽황이 부상당해 혼절해 있
음에 생각이 미친 것이었다.
철운비는 급히 검왕 벽황의 옆으로 다가갔다.
"…!"
검왕은 여전히 두 눈을 꼭 감은 채 반듯이 누워 있었다. 창백하게 변한 안
색으로 인해 그의 입술은 유난히 붉어 보였다. 그 모습은 철운비로 하여금
야릇한 흥분을 느끼게 했다.
(아무리 봐도 너무 잘 생겼다. 이 친구 정말 사내인가?)
철운비는 검왕의 조각같이 아름다운 얼굴을 한동안 멍하니 내려다 보았다.
그러다 그는 흠칫하며 정신을 차렸다.
(부상자를 앞에 놓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그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고소를 지었다. 이윽고 그는 손을 뻗어 검왕의 저
고리 고름을 풀었다.
(우선 추궁과혈이라도 하자!)
사락…
그는 검왕의 저고리 고름을 풀어 좌우로 벌렸다.
순간,
"엇!"
철운비는 흠칫했다. 겉옷 안의 검왕의 가슴 부위가 흰 천으로 꼭꼭 감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흰 천으로 꼭 감아 놓긴 했으나 검왕의 가슴 부위가 볼록
하게 솟아 있는 것은 숨길 수 없었다.
"설마… 계집이었단 말인가?"
철운비는 그것을 보며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저고리 안으로 드러난 검왕의
우유빛 뽀얀 피부는 철운비를 더욱 더 당혹하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철운비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어디… 확인해 볼까?"
그는 검왕의 가슴을 가린 흰 천으로 손을 가져갔다.
"…!"
파르르…!
순간 두 눈을 꼭 감고 있던 검왕의 검미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철운비는 미
처 보지 못했다.
철운비는 이윽고 검왕의 가슴에서 흰 천을 끌러냈다.
출렁…!
순간 꼭 눌려 있던 한 쌍의 육봉이 탄력있게 튀어나왔다. 사발을 엎어놓은
듯 풍만하면서도 소녀의 그것같이 모양 좋은 유방이었다. 특히 그 육봉 위
에 오도마니 앉은 두 송이의 젖꼭지는 제법 큼직하여 탐스럽기 이를 데 없
었다.
철운비는 그것을 내려다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빌어먹을… 감쪽같이 속았군. 이 작자, 검왕이 아니라 검후였군!)
그러다 문득, 그는 히죽 웃으며 검왕(劍王), 아니 검후(劍后)의 풍만한 가
슴을 노려보았다.
(나를… 속인 대가로… 실례를 해볼까?)
그는 짐짓 음흉하게 입맛을 다시며 손가락으로 검후의 젖꼭지를 매만졌다.
순간 눈을 꼭 내리감은 검후의 옥용이 새빨개지는 것을 철운비는 미처 보지
못했다.
검후의 젖꼭지를 매만지던 철운비는 짓궂게 히죽 웃었다. 이어 그는 고개를
숙여 검후의 젖꼭지로 입술을 가져갔다.
헌데 그의 입술이 막 젖꼭지를 핥으려는 순간이었다.
철… 썩!
"어이쿠…!"
철운비는 갑자기 볼에 불이 번쩍함을 느끼며 뒤로 벌렁 나뒹굴었다.
"나… 나쁜 자식!"
후드득!
동시에 반듯이 누워 있던 검후가 울먹이며 어둠 속으로 벼락같이 떠올랐다.
"감히 나 벽황혜의 몸에 음심을 품다니… 각오해 둬랏!"
스스스…!
검후는 싸늘한 음성으로 외치며 어둠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그녀의 음성은
제법 독살스러웠으나 별로 독기는 실려 있지 않았다.
"벽황혜? 그것이 진짜 이름이었나?"
철운비는 얼얼한 뺨을 어루만지며 벽황혜가 사라진 곳을 주시했다. 비록 잠
깐의 만남이었으나 벽황혜의 인상은 화인(火印)같이 철운비의 가슴 깊숙이
새겨졌다.
-벽황혜(霹皇慧)!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 아닌가?

절벽, 용형마도(龍形魔島)의 중심부에는 오십여 장 넓이에 달하는 절벽이


자리하고 있었다.
꽈르르르!
도끼로 찍어낸 듯 쩍 갈라진 대지의 틈바구니 아래로는 시뻘건 용암이 무섭
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스으… 스으… 고오오!
또한 그 용암으로부터 무서운 열기를 지닌 열풍과 화염이 일어나 수백 장을
치솟고 있었다. 무쇠라도 순간적으로 녹여 버릴 지독한 열기의 열화강풍이
었다.
"…!"
지금 한 명의 여인이 절벽 끝에 표표히 선 채 그 열화강풍 저편을 주시하고
있었다.
일신에는 붉은 전포를 걸쳤으며 머리에 황금투구를 쓴 고고한 기품의 미소
부, 혈해성모 궁월영! 바로 그녀였다.
화라락! 스으… 스으…
강맹한 열화강풍은 궁월영의 전포를 태워 버릴 듯 흔들고 있었다. 하나 궁
월영은 그 자리에 표표히 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때였다.
"성모(聖母)! 여기 계셨소?"
스스스!
문득 한 줄기 낭랑한 음성과 함께 궁월영의 옆으로 한 명의 소년이 내려섰
다.
철운비, 바로 그였다.
"…!"
궁월영은 투구 속의 서늘한 시선으로 한 차례 철운비를 돌아보았다. 이어
그녀는 문득 턱을 들어 열화강풍(熱火剛風)의 저편을 가리켰다.
"음세황은 저곳으로 갔어요. 지금 본녀는 막 그 자를 쫓아가려던 참이었어
요!"
철운비는 형형한 시선으로 열화강풍 너머를 주시했다.
"마황… 혈정이 저곳에 있소?"
철운비의 물음에 궁월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요. 하지만 저 뒤편은 화산(火山)이라 음세황은 더 달아날 길이 없어
요. 이제 저 열화강풍을 건너가 그 자를 제거하는 일만 남았어요!"
빠직!
기품 어린 봉목에 어울리지 않게 그녀의 두 눈에는 독살스런 살기가 번뜩였
다. 그녀는 음세황에게 당한 치욕을 평생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철운비는 그런 궁월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곳에는… 나 혼자 다녀오겠소!"
"…!"
그 말에 궁월영은 흠칫하는 기색이었다.
철운비는 그런 그녀를 향해 히죽 웃었다.
"계집에게 위험한 일을 맡긴다면 그것은 사내대장부의 체면문제요!"
스읏!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망설임없이 지면을 박차고 열화강풍 속으로 날아갔
다.
"후훗! 오래 기다리지 않으셔도 될 것이오! 일각이 가기 전에… 마황혈정과
음세황의 목을 보게 될 테니까!"
콰아아…!
그는 열화강풍을 뚫고 날아가며 호탕하게 웃었다.
"…!"
츠- 읏!
철운비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궁월영의 봉목이 스산한 한망으로 번뜩였다.
"물론 그래야지! 나의 충견(忠犬)!"
그녀의 입술 사이로 아주 잔혹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죽는 것은… 음세황 뿐만이 아니다! 네놈도… 마황혈정을 내게 갖다주는
직후 죽게 될 것이다. 바득…! 나 혈해성모의 고귀한 육체를 거절한 대가로
…!"
그녀는 원독의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이를 갈았다.
계집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궁월영, 그녀는 전날 밤 철운비가 자신의
유혹을 거절했다는 이유 때문에 극도의 수치와 살의(殺意)를 지니게 된 것
이었다.
스으… 스으… 호라락!
강맹한 열화강풍은 마치 천 마리 화룡이 난무하듯 끊임없이 치솟아 흐르고
있었다. 젓벽 끝에 표표히 선 궁월영의 전포자락은 열화강풍에 찢어질 듯
펄럭이고 있었다.
하나 여인의 깊은 독심(毒心)은 그것마저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한 칸의 석실(石室),
콰아…
석실 외곽으로는 용암 연못으로부터 치솟아 오르는 열화강풍이 폭풍같이 흐
르고 있었다.
그 석실의 끝에는 하나의 석대가 놓여져 있고 그 위에 하나의 향로가 놓여
있었다.
전체가 온통 피를 칠한 듯 붉은 향로…!
높이는 두 자 정도, 그것이 세 마리의 용이 떠받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
었다. 또한 향로의 표면에는 수많은 용(龍)의 형상이 수 놓여져 있었다. 일
견하여 혈해성전에 있던 용형혈정과 흡사해 보였다.

<마황혈정(魔皇血鼎)!>

그렇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저 고금제일인 불사성황(不死聖皇)의 전설이 서


린 마황혈정이었다.

문득,
"으음…! 이 중에는… 한 가지 무서운 초극마공의 구결이 감추어져 있는데
… 너무 난해하여 무어가 무언지 모르겠다!"
석실의 한쪽에서 괴로움에 지친 한 줄기 신음성이 들렸다. 마황혈정의 일
장 앞에는 한 명의 독비인이 가부좌를 튼 채 괴로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쌍뇌모황 음세황!
바로 그였다.
그의 신색은 실로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오른팔이 어깨에서부터 잘려나
가 그의 상반신은 온통 피투성이었다. 게다가 열화강풍을 통과하여 화상을
입은 듯 그의 모발과 장포는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으며 피부 곳곳에 물집이
맺혀 있었다.
하나 음세황이 지금 괴로와 하는 이유는 몸의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그를
괴롭히는 것은 다름아닌 마황혈정이었다.
마황혈정의 표면에 새겨진 용문(龍紋)에는 불사성황이 남긴 초극마공의 정
수가 감추어져 있었다.
쌍뇌모황 음세황은 혈해군벌 제일의 두뇌를 지닌 자였다. 하지만 그런 그의
초절한 지혜로도 마황혈정의 초극마공구결의 존재만 어렴풋이 감지될 뿐이
었다. 그 이상을 알아낸다는 것은 무리였다.
바로 그 사실이 음세황을 번뇌(煩惱)케 만들고 괴롭게 만드는 것이었다.
음세홍은 고통스럽게 안면을 이지러뜨리며 둔중한 신음을 발했다.
"크으으… 저 중의 초극마공을 얻어야 혈해성모와 철가 애송이놈에게 복수
할 수 있는데… 구결(口訣)의 그림자조차 헤아릴 수 없다니…!"
주르르!
중얼거리는 그의 오공으로 선혈이 꾸역꾸역 흘러내렸다. 그것은 그의 내부
가 극심한 번뇌와 심마에 침습당한 때문이었다.
"바득… 반드시 알아낸다! 그래서 기필코 혈해성모, 그 오만한 계집을 깔아
뭉개고 말겠다!"
음세황은 두 눈에서 줄기줄기 광기를 흘리며 이를 갈았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네놈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다, 음세황!"
돌연 한 줄기 스산한 음성이 석실의 입구쪽에서 들렸다.
언제 나타났을까?
스으… 스으…
열화강풍 속에 한 명의 적포소년이 우뚝 선 채 무서운 눈으로 음세황을 노
려보고 있었다.
철운비, 바로 그였다.
그는 열화강풍 속에 서 있었으나 그것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 표정이었
다. 그것은 그가 입고 있는 만년혈만의 가죽으로 만든 장포 때문이었다. 그
피의(皮衣)는 수화(水火)에서 몸을 지켜 주는 효용이 있었다.
"철… 운비!"
쿵쿵!
철운비의 모습을 발견한 음세황은 마치 유령을 본 듯 공포의 표정으로 비칠
비칠 물러섰다.
그 모습에 철운비는 싸늘하게 웃었다.
"후훗! 그나마 마황혈정을 보고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라!"
그는 장발을 흩날리며 성큼 석실 안으로 들어섰다.
바로 그 순간,
"죽… 어랏!"
파핫!
뒤로 비칠 물러서던 음세황은 돌연 발악하듯 외치며 성한 좌수를 맹렬하게
내쳤다.
핑!
찰나 그의 소매 속에서 하나의 작은 나무상자가 튀어나와 철운비의 이마로
벼락같이 날아들었다.
"…!"
꽈릉-!
철운비는 거의 본능적으로 마주 일장을 후려쳤다.
파삭! 찌- 익!
순간 음세황이 날린 목갑이 박살나며 그 안에서 한 가닥 날카로운 기성이
일었다.
츠- 읏!
동시에 무엇인가 하나의 둥근 물체가 벼락같이 철운비의 이마로 날아들었
다.
"허억!"
철운비는 흠칫하며 경악성을 토했다.
그 사이에 놀랍게도 그 둥근 물체는 철운비의 호신강벽을 그대로 꿰뚫고 날
아들어 그의 이마에 달라붙는 것이 아닌가?
아! 그것은… 한 마리의 거미였다. 하나 그것은 보통 거미가 아니었다. 전
체가 푸르스름한 옥빛을 띤 거미, 놀랍게도 그것은 귀엽고 예쁜 소녀의 얼
굴을 닮아 있었다.

-인면지주(人面蜘蛛)!

바로 그것이었다.
인면지주를 날린 음세황은 득의의 표정을 지었다.
"캇! 네놈도 별 수 없이 나의 귀여운 미인제왕주(美人帝王蛛)의 제물이 되
는구나!"
그는 신형을 휘청하는 철운비를 바라보며 음악한 웃음을 흘렸다.
철운비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이마 위에 붙어 있는 인면지주를
올려다 보았다.
"이놈은… 인면지주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미인제왕주로 남만에서만 나는
놈인데 어떻게 네 손에 들어갔단 말이냐?"
그는 의혹과 불신의 눈빛으로 음세황을 주시했다.
그 말에 음세황은 광기 어린 눈을 번뜩이며 득의의 표정을 지었다.
"곧 죽을 놈이니 가르쳐 주마. 지옥마교의 지옥천존이란 작자는 이미 남만
의 패자(覇者) 살황독종(殺荒毒宗)까지 손에 넣었다. 그 놈은… 본좌가 지
옥천존에게 선물받은 것이다!"
"그… 래?"
철운비는 묘한 표정으로 돌연 히죽 웃었다.
"좋은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그 대가로 편히 죽여주마!"
콰아아작!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돌연 그의 왼쪽 소매에서 하나의 쇠사슬이 달린 핏
빛 낫이 벼락같이 튀어나와 음세황의 허리를 그어갔다.
지옥혈겸(地獄血鎌)!
그것은 바로 지옥혈겸이었다.
파앗!
찰나지간 지옥혈겸은 튀어나올 때보다 더 빠르게 철운비의 소매 속에로 되
날아 들어갔다.
"…!"
음세황은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뜬 채 철운비의 소매를 주시하고 있었다.
분명 지옥혈겸이 스쳤건만 그의 몸에는 아무런 상처도 나 있지 않았다.
"너… 어떻게… 미인제왕주에게 물리고도… 내공을…?"
그는 불신과 의혹이 뒤얽힌 눈빛으로 철운비를 노려보며 말을 더듬거렸다.
철운비는 그 말에 히죽 웃었다.
"아! 이것 말인가?"
파앗!
그는 지력으로 이마에 붙은 인면지주를 한 차례 가격했다.
찍!
그러자 인면지주는 고통의 비명을 내지르며 나뒹굴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었다. 철운비의 지력은 능히 한 자 두께의 만년한철을
관통시킬 수 있는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한데 그것을 정통으로 맞고도 인면지주의 몸에는 별다른 상처가 나지 않았
다.
"…!"
철운비는 힐끗 바닥의 인면지주를 일견했다. 이어 그는 이마를 가린 장발을
쓸어올리며 히죽 웃었다.
"죽은… 철면천황 초패강의 사인(死因)을 보고 미리 준비를 했었지!"
그의 이마에는 한 장의 용(龍)의 비늘이 붙어 있었다.

-불사용린(不死龍鱗)!

그것은 바로 절정마도에 있는 잠마별부(潛魔別府) 앞에 죽어 있던 불사익룡


의 시체에서 얻은 것이었다.
익수룡은 매 천 년마다 한 장씩의 불사용린이 생긴다. 그것은 하늘과 땅 사
이에 가장 단단한 물체였다. 그 무엇으로도 불사용린에 손상을 입히지 못했
다.
미인제왕주의 독기는 철벽도 녹이는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불사용린을 어쩌지는 못했다.
철운비는 그 사실을 알고 미리 불사용린 하나를 이마에 붙여 놓았던 것이
다.
옛날, 불사성황의 부인 잠후를 태우고 남해로 온 불사익룡은 모두 열 장의
불사용린을 남기고 죽었다. 즉, 불사익룡은 만년(萬年)을 살고 죽은 것이었
다.
그에 비해 철운비가 타고 다니는 수호익룡은 불사용린이 두 장밖에 없었다.
자기 에미에 비하면 수호익룡은 아직 어린애에 불과한 것이다.

음세황의 안면이 낭패함으로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빌어… 먹을…! 초패강… 그 놈이… 끝내 나를… 죽이는… 구나!"
그는 철운비의 이마에 붙어 있는 불사용린을 노려보며 부득 이를 갈았다.
퍼- 억!
갑자기 그의 허리춤에서 피분수가 좌우로 확 일었다. 동시에 그의 몸이 허
리에서 상하로 쩍 갈라지며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지옥혈겸은 너무 빨리 음세황의 몸을 두 동강 내버렸기에 그는 한 동안 숨
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철운비는 처참한 형상으로 최후를 맞은 음세황의 모습을 묵묵히 내려다 보
았다.
"죄업이 대가다. 나를 원망해도 할 수 없다, 음세황!"
그는 침중한 표정으로 탄식했다.
문득 그의 뇌리로 미인제왕주에 물려 죽은 천면천황 초패강의 얼굴이 떠올
랐다.
(초패강의 원한을 갚아 주었으니… 내가 부용을 범한 죄가 조금이나마 강해
졌을까?)
철운비는 고소를 지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어 그는 천천히 마황혈정 앞으로 다가갔다.
"이것이… 그 말썽 많은 마황혈정이었군!"
그는 기광을 빛내며 마황혈정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마황혈정의 표면에 새겨진 무수한 용(龍)의 형상은 용형혈정의 그것과 비교
될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하고 정교했다. 비늘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조각되
어 있어 금방이라도 그 용들은 생생하게 살아 움직일 듯했다.
아니, 철운비의 눈에는 순간적으로 그 용들이 움직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번- 쩍!
"…!"
순간 그의 뇌리로 한 줄기 강렬한 영감이 스쳐 지나갔다.
"불사… 초연심결(不死超然心訣)!"
철운비의 입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생소한 한 가지 내공심결의 이름이 흘러
나왔다.

∑ 제 16 장 악독(惡毒)한 여심(女心)

-불사초연심결(不死超然心訣)!
철운비는 마황혈정의 표면에 새겨진 용(龍)의 형상들이 움직이며 순간적으
로 한 가지 구결을 형성한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 환상의 구결이 바로 불
사초연심결이었다.
"…!"
철운비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다시 용문의 형상을 살펴보았다. 하나 그 순
간 순간적인 영감을 안개같이 흩어져 버렸다.
철운비는 곤혹감을 금치 못했다.
"정말… 요상한 물건이로군! 내가 환상을 본 것일까?"
그는 침음하며 불사초연심결을 회상하려 했다. 하나 그것의 구결은 흐릿하
게 떠오르다 이내 안개에 싸인 듯 흩어지고 말았다.
철운비는 미간을 모으며 고소를 지었다.
"대단한 기연을 놓쳤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영감을 반추하다
보면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어 그는 조심스럽게 마황혈정을
집어들었다.
"미인(美人)을 오래 기다리게 하면 실례지!"
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혈해성모 궁월영을 생각하며 히죽 웃었다. 이어
그는 마황혈정을 안고 석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짜악!
한데 그때 그의 발 끝에서 한 소리 날카로운 소성이 일었다.
"…!"
철운비는 흠칫하며 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발 끝에는 예의 미인제왕주
가 빤히 철운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미인제왕주는 석실 밖으로 흐르는 열화강풍의 두려운 듯 힐끗힐끗 그것을
돌아보고 있었다. 독충들이 불을 무서워하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철운비는 눈썹을 찡긋했다.
"데리고… 나가 달란 얘기냐?"
그는 미인제왕주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찌… 익!
그러자 놀랍게도 미인제왕주는 철운비의 말을 알아 들은 듯 고개를 끄덕이
며 낮게 우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에 철운비는 경이로운 표정을 지었다.
(영득한 놈, 아니 계집인데?)
그는 자기도 모르게 빙긋 웃었다. 자세히 보니 미인제왕주의 얼굴은 제법
귀엽고 예쁘장했다.
철운비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좋아! 데려다 줄 수는 있지만… 나를 물지 않는다고 약속해야만 한다!"
찍…!
그러자 미인제왕주는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철운비는 그 모습에 미소지었다.
(영물(靈物)이다! 못된 인간보다 낫군!)
그는 몸을 숙여 미인제왕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미인제왕주는 작은
몸을 팔짝 뛰어 철운비의 손바닥 위로 기어올랐다.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미인제왕주는 곧 용린보갑의 소맷자락 속으로 기
어들어 갔다.
철운비는 고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좋은 친구를 얻었군! 그것도 계집으로…!)
이어 그는 호신강벽을 일으켜 몸 주위를 방호하며 천천히 열화강풍 벽으로
걸어들어갔다.

[…!]
열화강풍 밖에서는 혈해성모 궁월영이 초조한 표정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늦는데…! 음세황과의 싸움이 어려운 것일까?)
그녀는 투구 속에서 고운 아미를 살짝 모았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철운비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음을 깨닫고 내심 흠칫했다.
(내가… 그 어린 사내 자식을 걱정하다니…!)
그녀는 붉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바로 그 때였다.
콰아아!
돌연 열화강풍이 물살 갈라지듯 양쪽으로 쩍 갈라졌다.
"핫하! 조금… 늦은 것 같은데…?"
이어 한 줄기 호탕한 웃음이 궁월영의 귓전을 울렸다. 그와 함께 철운비가
열화강풍을 꿰뚫고 천신(天神)같이 날아나왔다. 그의 두 팔에는 예의 마황
혈정이 안겨 있었다.
"…!"
그것을 본 궁월영의 봉목에 언뜻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약속대로… 마황혈정을 가져왔소!"
철운비가 선풍을 끌며 궁월영의 앞으로 내려섰다. 내려서자마자 그는 안고
있던 마황혈정을 궁월영에게 내밀었다.
(이것으로 잠마일족에게 받을 것도 줄 것도 없게 되었다!)
그는 마황혈정을 궁월영에게 건네 주며 음울하게 눈을 번뜩였다.
"마… 황혈정!"
궁월영은 흥분으로 몸을 가늘게 떨며 섬섬옥수를 내밀었다.
그녀는 왼쪽 옥수로 마황혈정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동시에,
쩌- 저정!
"죽어… 랏!"
갑자기 궁월영은 독살스런 일갈과 함께 우수로 맹렬하게 철운비의 가슴을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그런 그녀의 손 끝에서 순간적으로 시뻘건 낙뢰가
번쩍 작렬했다.

-잠마혈인(潛魔血印)!

잠마혈맥 최후최강의 파괴공력이 바로 그것이었다.


"헉! 당신이…!"
철운비는 너무도 돌연한 궁월영의 급습에 두 눈을 경악으로 부릅떴다. 하지
만 그것은 너무도 창졸간의 일이었을 뿐 아니라 방심한 상태인지라 도무지
피할 수가 없었다.
퍼- 엉!
"크- 흑!"
다음 순간 한 소리 굉렬한 폭음과 함께 철운비는 입에서 피를 뿌리며 뒤로
퉁겨 나갔다. 헌데 공교롭게도 그가 퉁겨진 곳은 바로 용암이 들끓는 단애
였다.
쐐- 애액!
허공에서 휘청하던 철운비의 신형은 그대로 단애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창졸지간에 그의 모습은 용암의 소용돌이 속에 파묻혀 사라졌다.
"…!"
궁월영은 철운비가 파묻혀 사라진 용암 속을 멍하니 내려다 보았다.
마황혈정을 든 왼손을 축 늘어뜨린 채 하염없이 단애를 내려다보는 궁월영,
주르르!
문득 그녀의 커다란 봉목으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때 나를… 안았으면 네 녀석은 나 궁월영의 정인으로 평생 부귀영화를
누렸을 텐데… 이 모두 네 자업자득이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어 그녀는 붉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잘근 깨물었다.
"너를… 잊지는 않겠다. 영원히! 비록 부부는 못 되었어도… 나 궁월영은
너를 위해 평생 정절을 지키며 살 것이다!"
회한과 원망, 갈등이 뒤엉킨 그녀의 음성이 물기로 흠뻑 젖어 들었다. 그
음성은 공허하게 텅 비어 주위를 울렸다.
궁월영은 볼 위로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하나 그 눈물은 이
내 열화강풍에 말라 버려 다만 눈물자국만 얼룩져 남을 뿐이었다.
"안녕… 신비잠룡!"
스읏!
가늘게 떨리는 한 줄기 중얼거림과 함께 궁월영은 지면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 올라갔다. 삽시에 그녀의 모습은 허공 저편으로 까마득히 사라져갔다.
콰아아! 고… 오오…!
일장 참극이 벌어진 단애 위로 열화강풍만이 광폭한 소용돌이를 이루며 무
심하게 흐르고 있었다.
무심하게…!

궁월영이 단애 위에서 사라진 뒤 일다경 후,


"아아! 세황(世皇) 오라버니의 종적이 이리로 이어졌는데…!"
돌연 한 줄기 우울한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스- 읏!
이어 하나의 날렵한 인영이 단애 위로 훌훌 날아 내렸다.
여인! 그녀는 회색의 장포에 창백한 안색을 한 미인이었다.

-번뇌화(煩惱花) 음사향!

그 여인은 바로 전능기환전의 여제갈(女諸葛)이라는 음사향이었다.


화라락…!
음사향은 열화강풍에 회포자락을 펄럭이며 절벽 저편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지혜 가득한 봉목은 무엇 때문인지 모를 불길한 예감으로 가볍
게 찌푸려져 있었다.
(저 안쪽에… 무엇인가 있다. 저곳은 아마도 마황혈정이 감춰진 장소 같은
데… 왜 이리 마음이 불안할까?)
음사향의 창백한 입술 사이로 소리없이 신음이 흘렀다. 음울한 상념이 그녀
의 교구를 가득 휘감아 떨리게 하고 있는 것이다.
(오라버니께서… 저 안에 들어가신 것 같은데… 아아… 설마 그 분께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신 것일까?)
음사향은 얄팍한 입술을 잘근 물었다.
파- 앗!
이어 그녀는 절벽 끝을 박차고 날아올라 열화강풍의 장막 속으로 뛰어들었
다.
쩌러렁! 고오오…!
열화강풍의 무서운 소용돌이가 음사향의 가녀린 교구를 휘감는 찰나, 그녀
의 몸 주위로 열 겹 회색 강벽(剛壁)이 폭발하듯 번져나와 열화강풍을 차단
했다.
피- 이잉!
그녀는 회색의 십 층 강벽에 방호된 채 마치 평지를 걷듯이 열화강풍을 밟
으러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그런 음사향의 경공은 아주 놀라운 것으로 무
영종의 진전을 이은 철운비라도 흉내낼 수 없을 정도였다.

잠시 후,
"오라… 버니!"
열화강풍의 저편에서 음사향이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아마도 철운비에
격살당한 음세황의 처참한 시신을 발견한 때문일 것이다.
"흐윽! 복수… 하겠다! 전능일맥의 희망인 세황오라버니를 이렇게 만든 자
를…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음사향의 오열이 열화강풍을 뒤흔들었다. 그녀의 오열에는 처절한 비애와
분노가 뒤섞여 있어 열화강풍마저 흐트릴 정도였다.
번뇌화 음사향!
또 하나의 은원이 그렇게 잉태되고 있었다.
우르르…! 쩌러렁!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용암연에서 치솟는 열화강풍은 여전히 흉흉한 기세
로 흐르고 있었다.

용암의 연못 그 아래에는 놀랍게도 하나의 동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무쇠도


녹이는 용암 속에 동굴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츠으… 츠으…!
용암은 동굴 주위를 무섭게 휘돌고 있었으나 기이하게도 동굴 속으로는 침
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 동굴이 용암과는 상극의 물체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만년한옥(萬年寒玉)-!
동굴은 바로 천지간의 극음지기의 절정인 만년한옥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
이다. 그 때문에 용암의 무서운 열기도 그 동굴을 녹여내지 못하고 있는 것
이다.
용암 연못 속에 거대한 만년한옥의 덩어리로 형성된 동굴이 있다는 것은 놀
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만년한옥의 동굴에는 무서운 용암의 열독(熱毒)
이 침습하는 것은 고사하고 허연 서리가 가득 서려 있었다.
용암의 바다 속에 그런 비경이 있다는 것은 대자연만이 부릴 수 있는 신비
라고 할 수 있었다.
빙동의 입구,
"크으… 내가 죽지 않았단 말인가?"
괴로운 신음소리가 빙동을 울렸다.
한 명 소년이 빙동 입구에 쓰러져 있었다. 그는 바로 철운비였다. 혈해성모
궁월영의 암격을 받아 용암연에 떨어지고도 그는 죽지 않은 것이다.
용암연에 빠지는 순간 철운비는 전공력을 일으켜 몸 주위에 천중의 강벽을
일으켜 몸을 방호했다. 거기에다 그가 걸친 만년혈만의 피의가 몸을 지켜
주어 철운비는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형상은 차라리 죽은 것 만도 못한 상태였다. 그의 전신
모발이란 모발은 모조리 타버렸고 피부 또한 용암의 열화독강(熱火毒剛)에
녹아 문드러져 버렸다.
용암의 열독은 아주 지독하여 그의 얼굴은 이목구비조차 제대로 구분 못할
정도로 문드러져 있었다. 격심한 화상 때문에 철운비는 그저 한 덩어리 고
깃덩어리로 보였다.
하지만 외상보다 더욱 심한 것은 열독에 침습당한 그의 내상이었다.
무려 일천여 장이나 되는 용암을 통과하여 추측이 불가능할 정도의 엄청난
양의 열화독강의 철운비의 내부도 파고 들었다. 그 열화독강이 얼마나 지독
한지 만년혈만의 보혈을 복용하여 얻은 천년잠력이 그것에 모조리 타버렸을
정도였다.
천년내공을 능가하는 거대한 열화지력-! 그것이 지금 철운비의 심맥과 내장
을 온통 태워 버리고 있었다.
츠으… 츠으…!
철운비의 전신에서는 연신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검은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열화지력이 철운비의 심맥과 내장을 태운 연기였다.
이 상태라면 그는 일각이 안 되어 내장이 온통 재가 되어 죽고 말 것이다.

"궁… 월영(宮月影)! 나를 죽여야만 네 자존심의 상처를 보상받을 수 있었


느냐?"
철운비는 반듯이 누운 채 천정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그는 궁월영이 왜 자신을 용암연으로 밀어 넣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철운
비가 자신을 취하지 않은 것에 궁월영의 자존심을 무참한 타격을 받았고 그
결과 그녀는 철운비를 죽일 작정을 하게 된 것이다.
"후훗! 철운비야! 철운비야! 굴러온 염복을 걷어찬 덕에 이 꼴이 되었으니
… 누구를 탓하겠느냐?"
철운비는 공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죽어가는 그의 눈 위로 몇 사람의 얼굴이 연이어 떠올랐다.
정든 얼굴들…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은… 자신의 원수이고 또한 의모(義
母)이기도 한 사황녀(邪皇女) 수운월이었다.
그 다음으로 떠오른 얼굴은 아버지 고독패왕 철무정이었으며… 부용부인 곽
부용이었다.
슬픈 곽부용의 옥용이 떠오르자 철운비의 가슴을 칼로 저미는 고통이 느껴
졌다.
(미안… 하오, 부용! 당신을 또 한 번 울리게 되었구료!)
철운비는 고통스럽게 신음을 흘렸다.
가엾은 곽부용…! 그녀를 위해서라도 살아야만 하는데… 지금 철운비에게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보다 부용부인 곽부용을 또 한 번 울려애만 한다는 사
실이 그를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헌데,
(이게… 어디서 나는 향기지?)
돌연 철운비는 흠칫 정신을 차리며 코끝을 벌름거렸다. 죽어가는 그의 코끝
으로 한 줄기 강렬하고도 그윽한 연꽃의 향기가 감도는 것이 느껴졌던 것이
다.
연꽃의 내음은 이루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그윽하면서도 강렬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 향기를 돌이키자 타들어가던 철운비의 내부로 한 가닥 청량한 기
운이 번져나갔다. 그것은 실로 신비로운 현상이었다.
(이 동굴 안쪽에… 무엇인가 있다. 어쩌면 그것이 나를 살려 줄 수 있을지
도 모른다!)
철운비의 죽어가던 눈에 강렬한 빛이 일어났다.
(살아야만… 한다. 부용을 위해서라도!)
철운비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부용부인 곽부용의 슬픈 눈동자를 떠올리며
사력을 다해 동굴 안쪽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생(生)에의 강렬한 욕망과 점점 강렬해지는 연꽃 향기가 기적같이 그의 몸
을 차츰차츰 동굴 안쪽으로 이동시켰다.

천추 같은 고통의 시간이 지난 후, 철운비는 드디어 동굴의 끝에 이를 수


있었다.
"저… 저럴 수가!"
동굴 끝에 이른 철운비의 두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동굴의 끝에는 하나의 투명한 얼음 벽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데, 그 투명한
얼음벽 속에는 놀랍게도 한 명의 여인이 잠자듯이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철운비는 이 용암연 속에의 빙동에서 인간을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
다. 그것도 여인을…
빙벽 속의 여인은 전신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었다. 그 때문에 여
인의 뇌살적인 몸매가 적나라하게 들여다 보였다.
가냘픈 몸매와는 대조적으로 아주 큼직한 한 쌍의 젖무덤, 한줌밖에 안 될
듯이 보이는 허리, 팽팽한 하복부와 그 가운데 귀엽게 파인 배꼽 풍만한 둔
부, 미끈한 허벅지…
그 허벅지가 모아지는 곳에 여인의 신비한 둔덕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데… 외당 방초 무성한 그녀의 도독한 구릉에는 기이하게도 단 한 올의
체모도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 둔덕은 하얀 옥덩이 같이 보이고 그 옥덩이 같은 구릉 아래로
오묘한 홈이 파여 있는 것까지 그대로 들여다 보였다.
보드라운 살 틈으로 한 쌍 붉은 꽃잎까지 살풋 내다보여 철운비는 자기도
모르게 숨결이 거칠어짐을 느꼈다.
한데 여인은 비단 그곳에만 체모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 그 어디
에도 단 한 올의 체모도 보이지를 않았다. 머리카락은 물론 겨드랑이의 액
모나 피부에도 전혀 모발이 보이지를 않았다.
아마도 그 여인도 철운비같이 용암연을 통과한 듯했으며 그 과정에서 전신
모발이 모조리 타버린 듯이 보였다.
여인은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왼손에는 하나의 청동방
패를 들고 있을 뿐이었다.
직경 한 자 반 정도의 둥근 청동방패에는 머리를 풀어 헤친 아주 아름다운
나찰(羅刹)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나찰의 문양!
그것은 천 년 그 이전에 살았던 한 명의 여마맥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저것은… 불사성황의 아내였던 마모(魔母), 잠후(潛后)의 상징이 아닌가?)
철운비는 숨을 멈추었다.
청동방패의 문향은 바로 불사성황의 아내였던 잠후의 표시였다. 철운비는
태양천마가 남긴 글에서 그것을 알아냈었다.
그 사실은 철운비로 하여금 아주 놀라운 것을 깨닫게 만들었다.
(저 방패는… 바로 불사성황이 사랑하는 자기 아내, 잠후에게 만들어 준 최
강(最强)의 호신지병, 마모천둔(魔母天遁)이다.)
놀라움으로 철운비의 두 눈이 한껏 부릅떠졌다. 그가 놀라는 것은 그 청동
방패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들고 있는 나녀의 신분 때문이었다.

-마모천둔(魔母天遁)!

이것이 청동방패의 이름이었다.


그것의 원 주인은 바로 잠후였었다.
그 옛날, 잠후는 뇌왕(雷王), 빙모(氷母)와의 싸움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고
남해에 이른 직후 사망하게 된다.
잠후의 사망 뒤, 마모천둔은 그녀의 제자들에게로 이어졌으며 그것은 이내
남해 잠마혈맥(潛魔血宗)을 지키는 수호마병(守護魔兵)이 되었다.
하지만 그 마모천둔은 천여 년 전에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잠마여제 궁비연!
바로 그녀가 마모천둔을 지닌 채 용형마도를 찾아 떠났다가 영영 되돌아 오
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지금 얼음벽 속에 갇혀 있는 나녀가 누구인지를 철운비는 마모천둔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이다.
철운비가 놀란 것은 바로 그 나녀의 신분 때문이었다.
(저… 여인이 바로 잠마여제(潛魔女帝)시라니…!)
철운비는 숨을 죽이며 얼음벽 속의 미인을 바라보았다.

-잠마여제(潛魔女帝) 궁비연(宮飛燕)!

아아! 바로 그렇다.
얼음벽 속의 나녀는 바로 잠마혈맥 사상 최강의 여제왕이라는 잠마여제였
다.
천 년 그 이전, 궁비연은 마황혈경을 놓고 뇌왕의 태양천마와 충돌하여 양
패구상의 지경에 이르렀었다.
그때 빙모의 후예인 빙하서시가 들이닥쳤으며 궁비연은 빙하서시의 빙하천
강(氷河天剛)에 휘말려 이곳 용암연에 떨어지게 되었다.
아무리 내공이 막강했던 궁비연이라 해도 용암 속에 떨어졌으니 무사했을
리 없었다. 그녀는 비록 용암에 타 죽지 않는다고 해도 철운비 이상으로 다
쳤어야만 했다.
그러나 전화위복이랄까? 용암에 떨어지기 직전 잠마여제는 빙하서시의 빙하
천강에 격중되어 전신이 꽁꽁 얼어붙은 상태였다.
그 빙하천강이 오히려 잠마여제를 구했던 것이다. 빙하천강의 무서운 한빙
지기는 일천 장, 용암의 통로로 떨어지는 잠마여제를 죽음에서 구해 주었었
다.
다만 용암의 열독(熱毒)은 너무 강해서 그녀의 전신 모발만은 단 한 올도
남기지 않고 태워 버렸을 뿐이었다. 그녀의 머리와 모발 뿐 아니라 은밀한
그곳의 체모도 한 올 남아 있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철운비는 마모천둔을 통해 그같은 전말을 모두 추측할 수 있었다.
그는 놀라움을 가라앉히며 잠마여제의 뇌살적인 나신에서 시선을 떼었다.
잠마여제는 고루황의 연인이었던 사이가 아닌가? 그것은 곧 그녀가 철운비
에게 사조모(師祖母)뻘이 됨을 의미한다. 그런 잠마여제의 부끄러운 나체를
직시한다는 것은 불경한 짓일 수도 있었다.
(인연이란 끈질기구나. 후후, 고루황 조사께서 운명하시면서도 잊지 못하던
저 잠의 여제왕을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다니…!)
철운비는 씁쓸하게 고소를 지었다.

스으… 스으!
그때 예의 연꽃 향기가 급격히 강렬해지며 빙굴을 가득 메었다. 철운비는
흠칫하며 향기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왼쪽 동굴 벽, 얼음이 그득한 만년한옥의 빙벽에… 놀랍게도 한 송이
연꽃이 되어 있었다.
붉디붉은 주먹만한 크기의 연꽃…! 그것은 얼음벽에서 마치 기적같이 돋아
나 있었다. 잎사귀도 없고 다만 한 줄기 대공 위에 달린 타는 듯 붉은 연꽃

그것을 보고 철운비는 믿어지지 않는 표정이 되었다.
"빙하… 혈련이란 말인가?"
철운비는 입을 딱 벌리며 벽 앞으로 기어갔다.

-빙하혈련(氷河血連)!

이것이 그 붉은 연꽃의 이름이었다.


얼음과 눈 속에서 만 년 만에 한 번 피운다는 전설의 영물, 그것이 대설산
(大雪山) 언덕가에 존재하다는 것은 다만 떠도는 전설로만 여겨졌었다.
그것이 놀랍게도 용암의 연꽃 속에 자리한 이 빙동에 꽃을 피우고 있는 것
이다.
빙하혈련은 만 년 동안 극음의 정기를 흡수하여 꽃을 피운다. 그것의 효능
은 한 장의 꽃잎으로라도 죽은 시체를 부활시킨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열매였다.
만 년 만에 맺는 빙하혈련의 열매, 즉 만년빙련실(萬年氷蓮實)이라고 이름
붙여진 그 열매가 불사(不死)의 영효를 지녔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뿐만 아니라 무공을 연마한 자가 그것을 복용하면 십갑자의 빙하신공(氷河
神功)을 이룰 수 있다.
그 전설의 빙하혈련이 지금 활짝 만개하여 철운비의 눈앞에 있는 것이다.
(글이… 아닌가?)
빙하혈련으로 다가가던 철운비의 눈길이 빙벽 아래에 멈추었다. 빙하혈련이
피어 있는 아래에 섬세한 필체의 글이 빽빽이 적혀 있었다.
그 글들은 천 년 이전에 쓰여진 글들이고 기록자가 잠마여제 궁비연임을 철
운비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잠마(潛魔)의 여제(女第) 궁비연이 통한으로 이 글을 남긴다.>

글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대부분의 내용이 철운비가 이미 아는 내용들


인데 그것은 궁비연이 남긴 일종의 유언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중략…
빙하혈련을 발견한 본녀는 뛸 듯이 기뻤다. 그러나 어쩌랴? 빙하혈련이 꽃
을 피우려면 아직 일천 년은 더 있어야만 하는 것을…! 아아! 하늘은 정녕
나 궁비연을 버린 것인가…? 일천 장 깊이의 용암연을 탈출하려면 초절정의
한빙기공(寒氷氣功)을 연마해야만 하는데 오직 빙하혈련이 만 년 만에 맺는
만년빙련실만이 그런 능력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빙하혈련이 열매를 맺으려
면 일천 년을 더 기다려야 하니 이를 어쩐단 말인가?
… 중략…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다만 빙하서시(氷河西施)란 사악한 계집에게 복수
를 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 분할 뿐이다. 나는… 이대로 죽을 수 없고… 그
래서 도박을 할 작정이다. 모질고 각박한 나의 운명에 대항하여…
…중략…
이제 나는 불사환정마법(不死환精魔法)으로 천 년의 잠에 들 것이다. 본 여
제가 깨어나는 시간이 요행히 만년빙련설이 숙성되는 때이기를 빌 뿐이다.
-잠마여제(潛魔女帝) 궁비연(宮飛燕) 절필.>

벽상의 글은 그렇게 끝나고 있었다.


잠마여제 궁비연!
그 불운한 천년미인은 이 빙동을 빠져 나가지 못함을 알자 한 가지 대법을
펼쳐 천 년의 잠에 빠진 것이다. 그녀는… 놀랍게도 죽은 것이 아니라 다만
잠이 들어 있을 뿐이었다.

-불사환정마법(不死還精魔法)!

그것은 불사마맥에 전해 내려오는 일종의 귀식대법(龜息大法)이었다. 신체


의 생리작용을 극한까지 떨어뜨려 가사상태로 들 수 있는 마법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불안한 대법이었다. 불사성황은 그 마법을 창안하던
도중에 타계했었다. 그래서 그 불사환정마법을 시전하여 잠이 들었다가 다
시 깨어날 수 있는지는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잠마여제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불사환정마법을 펼쳐 긴긴 천 년의 잠에 빠진 것이고, 천 년의 세월
이 흐르는 동안 두터운 얼음의 벽이 그녀를 가두어 버린 것이다.

세상에는 믿어지지 않는 불가사의한 일도 많다.


철운비는 글을 읽고 해연히 놀랐다. 잠마여제 궁비연이 죽은 것이 아니라
다만 천 년의 긴 잠을 자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한데… 철운비가 놀라고 있을 때였다.
투- 둑!
돌연 빙하혈련의 향기가 열 배 강렬해지더니 연꽃잎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
했다. 붉디붉은 연꽃잎…! 그것들이 뚝뚝 떨어져 내리며 그 안쪽에서 한 알
의 붉은 열매가 드러났다.
호도알만한 크기의 타는 듯 붉은 연꽃 열매-

-만년빙하혈련실(萬年氷河血蓮實)!

바로 그것이었다. 빙하혈련이 만 년 만에 맺은 극음의 결정이 지금 완숙된


것이다.
천행이랄까? 철운비는 그 만년빙련실이 완성되는 순간에 이 빙동에 이르렀
던 것이다.
툭-!
철운비가 놀라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만년빙련실도 줄기로부터 뚝 떨어져
내렸다. 철운비는 엉겁결에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아들었다. 순간 만년빙련
실에서 지극히 강렬한 향기가 일어나 철운비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서늘하고도 그윽한 내음, 그것을 들이키자 철운비의 타들어 가는 내장으로
오싹한 청량감이 퍼져나갔다.
(이것만이… 나를 살릴 수 있다.)
철운비는 본능적으로 만년빙련실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의 입에 들어간 만
년빙련실은 삽시에 한 모금 이슬로 변해 목구멍으로 흘러내려 갔다. 한데,
"크- 윽!"
만년빙련실을 삼킨 철운비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돌연 내부로부터 무서운
냉기가 일어나 삽시에 그의 전신을 꽁꽁 얼려 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으으… 지… 독한데…!"
철운비는 이를 딱딱 부딪히며 전신을 떨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용암의 열화
독강에 타들어 가던 그의 내장이 이번에는 순간적으로 얼음덩이가 되어가는
것이다.
그 고통을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엄청난 것이었다. 팔다리가 끊어져 나가
도 눈깜짝하지 않을 철운비이건만 그 뜨겁고 차가운 고통에는 아득히 정신
을 잃어 버릴 지경이었다.
쩌저정…!
삽시에 철운비의 전신으로 한 겹 얼음이 뒤덮었다. 만년빙련실의 만년빙기
가 그의 전신 팔만사천 모공을 통해 흘러나와 한층, 얼음의 벽을 형성한 것
이다.
(제… 길, 너무 성급했다. 이러다가 얼음덩이가 되어 죽는 것이나 아닐까?)
철운비는 덜덜 떨며 이를 악물었다.
그 때였다.
스으… 스으!
돌연 그의 왼손 끝에서 한 가닥 따스한 온기가 일어 팔목 위로 거슬러 올라
가기 시작했다.
(뇌… 정륜(雷霆輪)!)
철운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예의 온기는 바로 태양천마의 시신에서 얻은
뇌정륜에서 번져 나오는 것이었다.
철운비는 덜덜 떨며 뇌정륜을 왼 손목에서 빼어 내었다.
보잘것 없는 검붉은 쇠고리… 그것을 어루만지자 놀랍게도 만년빙련실의 만
년빙기가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것은 대체로 무엇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철운비는 놀라며 뇌정륜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그 때였다. 뇌정륜을 자세히 살피던 철운비의 눈에 뇌정륜에 깨알 같은 글
이 적혀져 있는 것이 들어왔다. 그 글들은 오래 전에 절전된 고대천축의 범
문이었다.
철운비는 만년빙기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잊으려고 온 정신을 모아 그 고대
범문을 판독하기 시작했다.

<뇌정륜은 뇌신(雷神), 제석천(帝釋天)의 호법천병(護法天兵)이라고 한다.


뇌정륜이 뇌정도(雷霆刀)로 변신하는 날 뇌신(雷神)의 재림(再臨)이 도래한
다는 전설은 천축 뇌정신문의 천년신화다.
본… 황(本皇)은 뇌신(雷神)의 후예로 자처하는 그들 오만한 뇌정의 무리에
게 치욕을 주기 위해 뇌정신문(雷霆神門)을 파괴하고 그 전리품으로 뇌정륜
과 반부(半符) 뇌왕경(雷王經)을 중원으로 가져왔거니와, 뇌왕경 중의 제법
쓸 만한 절기 한 가지를 이에 기록해 놓는 바이다.>

광오한 어투로 아득한 전설의 편린(片鱗)을 적어놓은 글, 그것이 저 위대한


초인 불사성황이 기록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철운비는 그 글이 누가 쓴 것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것은 그
다음에 적힌 한 가지 상고기공인 구결 때문이었다.

-뇌정… 개벽… 천강결(雷精開闢天剛訣).

이것이 그 상고기공의 이름이었다.


천축 뇌정신문의 천년뇌공! 위대한 불사성황마저 감탄하게 한 천축 무림사
상 최강의 법력(琺力)이 그것이었다.
무릇 뇌(雷)는 하늘과 땅 사이에 가장 강맹한 기운을 의미한다. 뇌정개벽천
강결에는 그 뇌정의 힘을 인간의 몸으로 일으킬 수 있는 법력(法力)을 적고
있었다.
뇌정의 파괴력!
그것을 일으킬 수 있다면 하늘과 땅 사이에 모든 것을 깨뜨릴 수 있을 것이
다.
우르르… 쩌저정!
"…!"
돌연 뇌정륜을 들여다보는 철운비의 몸 주위로 시퍼런 벼락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입술은 끊임없이 뇌정개벽천강의 구결을 되뇌이고 있었으며
시간이 갈수록 그의 몸 주위로 이는 시퍼런 뇌정흔은 격렬해져만 갔다.
용암의 열화독강-! 만년빙련실의 만년빙기에 일시 눌려졌던 그것이 뇌정개
벽천강의 구결에 의해 용암이 폭발하듯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츠으… 츠으!
또한 그 시퍼런 뇌정흔 사이로 새하얀 서릿발이 함께 뻗쳐 나오기 시작했
다. 뇌정개벽천강의 뇌정지력에 맞서 만년빙련실의 만년빙하지력의 극한까
지 이른 증거였다.
지금 철운비인 내부에는 도저히 융합될 수 없는 두 가지 상극의 기운이 무
섭게 뒤엉켜가고 있었다.
츠으… 츠으…!
그의 전신 팔만사천모공에서 검붉은 연기가 꾸역꾸역 피어올랐다. 그것들은
뇌정지력과 빙하지력에 철운비의 내부에 쌓여 있던 뇌폐물들이 타버린 연기
들이었다. 비단 노폐물들 뿐만이 아니라 철운비의 경맥과 혈도들조차 순간
적으로 타버리고 바스러졌다, 그만큼 그 음양(陰陽)의 양극지기는 강력했
다.
쩌- 저적!
이어 흉측하게 녹아붙였던 철운비의 피부들이 뱀 껍질같이 벗겨져 나갔다.

-탈태환골(奪胎換骨)!
철운비는 또 한 번의 기연을 맞고 있는 것이다. 그를 태워 죽일 뻔한 용암
의 천년열독이 오히려 그를 불사의 몸으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전화위복이랄까? 이제 그는 맨몸으로 용암에 빠져도 다치지 않는 불사지체
(不死之體)를 지니게 될 것이다.

∑ 제 17 장 풍운(風雲)의 대륙(大陸)

그러나,
"크으윽…!"
불사지체(不死之體)의 기연은 둘째치고 지금 철운비는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의 전신이 엄청난 두 가지 역도(力道)의 횡포에 사시나무같이 떨렸다. 그
의 반신(半身)은 얼음굴에 빠진 듯하고 다른 반신은 불로 지져지는 것만 같
았다.
더욱 못 견딜 것은 그의 전신심맥으로 폭발할 듯이 팽창하는 가공할 잠력
(潛力)이었다.
무려 천년내공과 맞먹는 역도, 그것은 인간의 몸으로 수용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잠력이었다.
(이러다가는… 내 몸이 폭사하고 말겠다.)
고통의 혼미 중에서도 철운비는 이를 악물었다. 몸 속에서 날뛰는 잠력을
어딘가에 토해내지 않으면 곧 죽을 것만 같았다.
문득 그런 철운비의 혼미한 눈으로 뽀얀 동체가 들어왔다. 하나의 방패를
들고 반듯이 누워 있는 전라의 미인, 바로… 잠마여제 궁비연이었다.
그녀의 나신을 뒤덮고 있던 얼음벽은 이미 모두 녹아 버린 후였다. 철운비
의 몸에서 일어난 뇌정개벽천강의 열력은 그렇게 강렬했던 것이다.
"흐흐…!"
잠마여제의 나체를 본 철운비의 두 눈이 욕망으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지
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거대한 양극잠경(兩極潛勁)을 토해낼 대상 뿐이었
다.
북… 북…!
철운비는 용린보갑을 찢어내듯 벗어던지며 잠든 잠마여제에게로 다가섰다.
탈태환골로 벗겨진 죽은 피부가 용린보갑과 함께 허물같이 떨어져 나갔다.
그 허물 아래로 옥같이 매끄러운 새로운 피부가 드러났다. 그와 함께 불끈
거리며 드러난 그의 남성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거대해져 있었다.
"흐흐… 부용!"
철운비는 눈이 벌개져 잠마여제 곁에 이르렀다. 욕정에 미친 그의 눈에는
지금 이 순간 잠마여제가 부용부인 곽부용으로 보였다.
부용부인은 이미 자신의 것이 된 여인이 아닌가? 철운비는 주저없이 잠마여
제의 나신을 덮쳐갔다.
따당…!
마모천둔이 궁비연의 팔에서 빠져 옆으로 굴렀다. 모양 좋은 그녀의 젖무덤
이 어린 폭군의 손에 마구 이지러졌다.
"흐으…!"
철운비의 손길 아래 잠마여제의 나신은 무참히 유린당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백옥같은 풍만한 허벅지가 부끄럽게 좌우로 한껏 벌려졌다. 한 올의
잔티도 없는 뽀얀 둔덕 아래의 오묘한 여인의 비궁이 살포시 벌어져 드러났
다.
철운비는 눈이 벌개져 그곳으로 바싹 마른 입술을 가져갔다. 잠마여제의 은
밀한 옹달샘은 삽시에 철운비의 유린으로 흥건히 적셔져 갔다.
집요하게 혀와 입술을 놀리던 철운비는 히죽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어 그는 잠마여제의 복부 위로 몸을 실었다. 풍만한 여제왕의 육체가 기
분 좋은 탄력으로 그의 몸 아래에 느껴졌다.
철운비는 타는 듯한 일부를 잠마여제의 꽃잎 사이로 가져갔다.
두 개의 육체가 닿는 순간 철운비의 몸이 움찔 경직되었다. 더할 수 없이
보드랍게 느껴지는 살점의 감촉,
"으음… 부용!"
철운비는 심호흡을 하며 여인의 허리와 풍만한 둔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는 서서히 힘을 주어 자신의 너무도 뜨겁고 단단하게 팽창하여 고통스럽게
만 느껴지는 일부를 여체로 밀어 넣었다.
"…!"
격렬한 긴축감이 섬뜩한 한기와 함께 철운비의 전신으로 퍼져갔다.
보통 사람이라면 손만 대도 전신이 꽁꽁 얼어 버릴 것 같은 격렬한 냉기.
그러나 철운비에게만은 그것은 아주 기분 좋은 청량감이었다.
그는 그 청량감과 야릇한 긴축감을 즐기며 자신의 몸을 끝까지 여체에 밀어
넣었다. 마침내 두 개의 몸이 한 치의 틈도 없이 결합되었다.
철운비는 두 팔로 상체를 버틴 채 자신과 결합한 여체를 내려다 보았다.
혼미스런 그의 눈에 여인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보였다. 슬픈 눈동자의 곽
부용, 냉오한 미인 냉철화, 혈해성모 궁월영, 그리고 마지막으로 떠오른 얼
굴은… 의모인 수운월이었다.
"당신을… 증오하오!"
철운비의 입에서 짐승같은 으르렁거림이 흘러나왔다. 그와 함께 그는 무서
운 기세로 여체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그의 하체가 핍박할 때마다 잠마여체
궁비연의 나신은 파도에 휩쓸린 조각배같이 뒤흔들렸다.
"헉… 헉!"
빙굴은 삽시에 짐승같은 헐떡임으로 가득찼다. 뜨거운 열기가 빙굴의 냉기
를 산산이 바스러뜨리기 시작했다.

"우우웃!"
돌연 한 소리 용(龍)이 울부짖는 듯한 장쾌한 강소성이 아득한 용암의 연못
저 아래에서 터져 솟구쳤다.
고오오…! 콰르르르…!
이어 용암의 소용돌이로부터 한 쌍의 인영이 빛살같이 치솟아 올랐다. 그
한 쌍의 인영은 열화강풍을 쩍 가르며 단번에 백여 장을 날아올랐다.
"아아… 태양을 다시 보게 되다니… 꿈은 아니겠지?"
열화강풍 위로 훌훌 날아오르며 한 인영이 만감이 서린 음성을 토해내었다.
화르르…! 스스슥…!
이어 두 인영은 쌍쌍이 단애 위로 날아내려 섰다.
일남일녀(一男一女)-!
그들은 아주 특이하게 생긴 일남일녀였다.
여인, 나이는 이십대 중년 정도일까?
낮뜨겁게도 그녀는 상의만 걸치고 있었다. 붉은 빛이 도는 피의로 간신히
둔부까지만 덮치고 있어 고혹하기 이를 데 없는 차림이었다. 기이하게도 그
녀의 머리에는 한 올의 모발도 나있지 않았다.

-잠마여제 궁비연.

여인은 바로 잠마여제였다. 그녀가 천 년의 긴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녀와 함께 서 있는 사내는 물론 철운비였다. 철운비는 지금 용린보갑의
바지만을 걸친 모습이었다.
바지만 걸치고 허리에 지옥혈겸을 찬 그의 모습은 다소 우스꽝스럽게 보였
다.
(한 달…! 내 평생 결코 잊지 못할 한 달일 것이다.)
철운비는 감회 어린 시선으로 용암인 연못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그의 머리
에는 꽤 긴 붉은 윤기가 도는 머리카락이 자라 있었다.
그가 만년빙련실로 목숨을 건진 것은 이미 한 달 전이었다.
그는 내부의 잠경을 토해내기 위해 잠마여제를 범한 뒤 얼마 안 되어 그녀
는 천 년의 잠에서 깨어났다.
그 후 잠마여제는 빙하혈련의 꽃잎을 복용하고 현음강살(玄陰剛煞)을 연마
하였으며 두 사람은 한 달 만에 용암연을 탈출하게 된 것이다.

"…!"
용암연에서 눈을 떼고 돌아서던 철운비는 흠칫했다. 잠마여제 궁비연이 망
연한 표정으로 사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을 발견한 때문이다.
천 년은 길고 긴 시간이다. 그 사이 용형마도의 지형도 완전히 바뀌어 궁비
연에게는 그저 낯설기만 한 것이다.
"너무도… 긴 시간이 지났구나!"
궁비연은 쓸쓸히 중얼거렸다.
그녀는 한숨을 흘리며 철운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본… 여제와 이어졌던 모든 인연의 끈은 이미 끊어져 먼지로 화한 지 오래
겠지?"
반짝!
궁비연의 위엄스러운 눈꼬리로 언뜻 이슬이 맺혔다.
천 년의 시공은 모든 은원과 인연의 끈을 삭여 버린 것이다. 지금 이 하늘
아래 그녀, 잠마(潛魔)의 여제(女帝)와 관련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을 느끼는 순간 격렬한 고독감이 궁비연을 감싼 것이다.
"…!"
궁비연은 자기도 모르게 두 팔로 가슴을 감싸안으며 바르르 몸을 떨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철운비는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가슴을 저미는
듯한 연민의 정이 그의 삭막하던 가슴을 찌른 것이다.
"이제…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철운비가 우울하게 입을 열었다.
궁비연은 망연한 표정으로 남쪽을 바라보았다.
"절정… 마도에 한 번 들러야겠지? 옛 친구의 묘에 인사라도 해야 하니…"
"성모… 천도에는…!1"
철운비의 말에 궁비연은 살래 고개를 저었다.
"잠마혈맥과… 나의 인연은 이미 천 년 전에 끝났다. 이제… 나와 인연이
이어지는 것은 절정마도라는 황막한 섬 하나와… 그대… 뿐이야!"
츠- 읏!
궁비연은 아주 형형한 시선으로 철운비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철운비는 찔끔하였다. 그녀의 눈빛에서 철운비는 그녀가 모든 것
을 알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여자의… 몸이란 아주 예민하지, 비록… 천 년 동안 잠들었었어도…!"
궁비연은 낮게 말하며 철운비를 쏘아보았다.
그녀는 철운비가 자신을 범한 것을 알고 있었다.
"죄… 송합니다!"
철운비는 얼굴이 벌개져 더듬거렸다.
그 모습에 궁비연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미… 지난 일이니 마음에 둘 것 없다. 후일… 내가 중원에 들어가면 비
바람이나 피할 수 있는 작은 집 한 채나 지어다오!"
화라락…!
말을 마치기도 전 궁비연은 단애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휘이이이잉!
그녀는 흡사 무게없는 깃털같이 해풍을 타고 까마득이 치솟아 올랐다.
"몸조심… 하거라. 너는… 이 넓은 하늘 아래에서 나와 인연의 끈을 맺고
있는 단 한 명의 친인이니…!"
궁비연은 훌훌 날아오르며 쓸쓸하게 말했다.
피- 이잉!
그런 그녀의 신형에서 하나의 방패가 떨어져 내려 철운비에게로 날아왔다.
마모천둔(魔母天둔)-!
바로 그것이었다.
철운비는 급히 마모천둔을 받아들었다. 그 사이에 궁비연은 바다를 날아건
너 유황독강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집이나… 한 채 마련해 두라고?"
철운비는 마모천둔을 쓰다듬으며 얼굴이 벌개져 중얼거렸다. 궁비연이 남긴
말이 무엇인지 깨달은 때문이다.
(천년 이전에 사해를 호령하던 여제왕을 첩(妾)으로 두게 될 판이니… 이걸
염복이라고 해야 하나 여난이라고 해야 하나?)
철운비는 고소를 지으며 궁비연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헌데 그가 궁비연의 풍만하던 몸을 떠올릴 때였다.
구어어어억!
돌연 용형마도 저편에서 굉렬한 용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천… 왕(天王)!"
철운비는 기쁨으로 얼굴이 환해지며 용음이 들린 곳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고오오!
그런 그의 두 눈에 마리 거대한 익룡이 열화강풍을 산산이 바스러뜨리며 자
신을 향해 쏜살같이 쏘아내려오는 것이 들려왔다.
수호… 익룡!
그것은 바로 잠마혈맥을 지키는 수호영물 수호익룡이었다.

봄(春)-!
대륙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던 삼엄한 동장군의 횡포도 이제 멀리 장성 너머
로 물러간 뒤였다. 따사로운 춘광이 얼어붙었던 대지를 녹이며 생명의 소생
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림(武林)은 바야흐로 이제 길고 암울한 겨울에 들어서고 있었다.
살륙과… 공포의 겨울…
그것은 한 명 무서운 대마인(大魔人)에 의해 전개된 것이었다.

-지옥천존(地獄天尊)!

누구도 그의 진정한 모습도… 이름도 알지 못했다.


암울한 흑의와 봉면으로 겹겹 감싸인 신비 속의 마왕-! 이 년 내에 그가 이
룬 명성은 가히 신화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이 악명이든 무엇이든간에

그가 이룩한 정복과… 파괴의 신화는 이미 오백 년 전의 아수마황이나 십
칠 년 전의 고독패왕의 그것을 능가한 지 오래였다.
지옥천존은 아수마황이 오패왕에 당했던 죄절같은 것도 겪지 않은 채 이미
대륙의 구 할을 점령한 상태였다.
정복되지 않은 곳은 이제 오패천(五覇天)- 저 오패왕의 후예들인 오대무벌
(五大武閥)의 영토뿐이었다.
대소림사가 지옥천존 단 일 인에게 재기불능의 치명적 타격을 받았다는 얘
기는 이미 구문이 된 지 오래였다.
아무도… 그를 좌절시키지 못했다. 그것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첫째로 그는 아주 신비하여 무림열사들의 표적권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점이
다.
둘째로 지옥천존의 막하에는 환우에서 가장 거대하고 무서운 세력이 포진하
고 있었다.

<지옥… 마교(地獄魔敎)!>

후자는 그들의 군세가 십만이라고도 하고 또는 백만이라고 했다. 어찌되었


든 확실한 것은 지옥마교에는 아수라같이 막강한 고수자들이 구름같이 있다
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아수마황도… 고독패왕도 갖지 못했던 것이었고…
지옥마교의 무리들은 지옥천존의 대정복행을 열 배 쉽게 도와 주고 있었다.
그러나 지옥천존의 신화를 가능케 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막강한 능
력이었다. 그가 그 옛날 아수마황의 진전을 십이성이었음은 이미 비밀이 아
니었다. 오히려 그는 아수마황 이상으로 강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지옥천존이 아수마황의 절기에 못지 않은 또다른 절기를 연마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찌되었든 무림의 겨울은 아주 길고도 혹독할 것이다. 마신(魔神)같이 무
서운 저 지옥천존이 누군가에게 쓰러지기 전까지 그 겨울은 끝나지 않을 테
니까.

-오대무벌(五大武閥)!

기이하게도 그들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운중 폭풍성은 이미 유명무실해져서 그렇다고 해도 다른 사가(四家)의 침묵
은 숱한 의혹과 추측을 난무케 했다.
북산(北山)의 사자철림(獅子鐵林)도…
청해(靑海) 유리성궁(琉璃聖宮)도…
남황(南荒) 벽력부(霹靂府)나 전능기환전(全能機幻殿)도 그저 지옥천존과
지옥마교의 횡행을 지켜볼 뿐이었다.
과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대무벌은 이미 지옥마교에 요격당하여 무력화된 것인가? 아니면 그들은
지옥천존을 쓰러뜨릴 일대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무도 알지 못했으며 그래서 불안의 열병은 더욱 더 극성을 부리고
있었다.
그러는 중 세월은 무심히 흘러 봄도 깊어 여름의 문턱으로 접어들고 있었
다.
그리고 풍운(風雲)의 밖에서도 움트고 있었다.
세 곳, 변황과 해외의 세 곳에서 무서운 겁운(겁雲)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
작한 것이다.

-막북(漠北) 적붕호황천(赤鵬護皇天).

첫 번째 풍운은 바로 머나먼 대막(大漠)의 저편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막북의 붉은 대붕(赤鵬)-! 그들이 실로 사십 년 만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이 년 전 실종되어 죽었다고 알려진 막북의 전설적 패왕, 적붕천황(赤鵬天
皇)이 사십여 년 만에 막북으로 돌아왔다고 전한다.
그 즉시 막북 적붕호황천은 재무장을 시작했다. 그들 적붕의 후예들은 흡사
불사조같이 부활한 상태였다.
적붕천황이 돌아온 지 이 년이 지난 지금, 적붕호황천은 사십 년 전보다 오
히려 두 배 더 강한 모습으로 재등장했다.
그들이 사십 년 전에 폭풍성과 동귀어진하여 멸망했다는 소문은 한갖 헛것
에 불과했음을 무림인들은 깨달아야만 했다.
적붕화황천은 재차 대륙정복을 도모할 것이라고 했으며… 장성 일대가 적붕
호황천의 전사(戰士)들로 새까맣게 덮였다는 소문이 파다한 상태였다.

두 번째의 풍운은 남해(南海)로부터 북상중이었다.

-남해(南海) 혈해군벌(血海軍閥)!

그들이 천 년 만에 부활하여 대륙으로 접근중인 것이다.


혈해성모(血海聖母) 궁월영-!
이제 그 이름을 모르는 자는 무림내에 전무했다. 그녀는 일천 척의 전선에
남해의 고수자들을 가득 태운 채 북상중이었다.

-중원(中原)의 쥐새끼들이 우리의 영웅 구룡혈황을 시해했다. 그 빚은…반


드시 받아내야만 한다. 잠마(潛魔)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궁월영은 그렇게 남해의 영웅들을 독려하며 북상중이었다.


지옥마교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는 거대한 군세의 혈해군벌-!
그들이 바야흐로 대륙패권을 노리고 천 년 만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
다.
과연… 누가 있어 혈해군벌의 북상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인가?

마지막 세 번째 풍운은 신강(新疆)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한 명… 무서운 패웅(覇雄)이 돌연 나타나 신강과 성숙해 장악했다고 한다.

-흑룡패왕(黑龍覇王)!
이것이 그 정복자의 이름이었다.
흑룡(黑龍)의 패왕(覇王)-!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전무했다. 진짜 이름도… 출신도… 아무도 알지 못
했다. 혹자는 그가 사십 년 전에 중원을 침공했다가 실종된 팔황마전(八荒
魔殿)의 전대제왕, 팔활마성(八荒魔聖)의 제자라고도 하지만 확인할 수 없
었다.
신비 속의 패왕… 그의 흑룡패황이라는 벌호는 그가 늘 흑룡이 수놓인 장포
만은 걸치고 있기 때문에 붙은 것이었다.
어쨌든 그의 출현을 변황 일대에서는 신화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흑룡패황은 단 일 년 만에 신강과 천산남북, 그리고 성숙해와 서장일대의
제파를 정복했다.
서북무림(西北武林)에서 이제 흑룡패왕에게 정복되지 않은 곳은 전무한 상
태였다. 그것은 흑룡패왕이 막하에 백만(百萬)에 이르는 세력을 두고 있음
을 의미하기도 했다.
백만(百萬)의 강병(强兵)…
흑룡패왕은 그 거대한 세력을 하나의 조직으로 결맹시켰다고 한다.

<서북팔황연맹(西北八荒聯盟).>

이것이 그 조직의 공식 명칭이었다.


백만의 맹도를 거느린 지상최대의 대결맹(大結盟)-!
서북팔황연맹이 고금 이래 나타났던 그 어느 조직보다도 거대하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했다. 그 초거파가 놀랍게도 단 일 년 사이에 결성된 것
이다.
과연… 흑룡패왕은 누구인가?
누구이기에 그같은 기적을 가능케 한 것일까?
또한 그가 서북무림을 통일하여 사상 유래없는 거대한 조직을 결성한 무엇
때문인가?
진실을 아는 자는… 전무했다. 다만 막연한 추측만이 불길하게 대륙을 떠돌
뿐이었다. 그것은 이런 것이었다.

-흑룡패왕의 궁극적인 표적은… 대륙일 것이다. 적북호황천이나 혈해군벌의


그것과 다름없이…
-머지않아 지옥마교와 그들 변황의 서장 사이에 무서운 격돌이 일어날 것이
다. 그들은 서로를 죽여 대륙을 피로 물들게 할 것이고 결국은 파멸할 것이
다. 그들의 적(敵)은 물론 무림과 함께…

절곡(絶谷)-!
병풍을 세워 놓은 듯한 까마득한 절벽 사이로 하나의 절곡이 자리하고 있었
다.
지옥(地獄)으로 들어가는 입구일까? 지표로부터 무려 일천여 장이나 꺼져
내려간 그 절곡에는 햇살조차 제대로 비쳐들지도 못했다.
한데 놀랍게도 그 절곡의 끝에는 하나의 석전(石殿)이 자리하고 있었다.
온통 이끼로 뒤덮인 황량한 고대석전-!
알 수 없는 음습한 귀기(鬼氣)가 그 석전을 구비구비 감싸고 있는 듯했다.
석전의 정면, 이끼에 덮인 석문(石門)이 자리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그
석문 위에는 몇 자의 글이 반쯤 지워진 채 이끼에 가려 있었다.

<지옥… 마전(地獄魔殿)!>

대전체(大篆體)의 그 글은 이런 뜻이었다.
지옥… 마전이라니…?
설마 이곳이 저 사대마맥 중 지옥마맥과 관계가 있는 곳일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한데…!
뚜벅뚜벅…
음울한 발자국 소리를 끌며 한 명의 인물이 문득 지옥마전(地獄魔殿)으로
들어섰다.
머리 끝에서부터 발 끝까지 온통 검은 천으로 휘감은 자, 보이는 것은 몽면
사이로 번뜩이는 한 쌍의 눈빛이었다.
눈(眼)… 그런 그 자의 두 눈은 흡사 독(毒)이 발라진 비수같이 새파란 빛
을 띤 채 섬뜩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누구인가?
지옥천존(地獄天尊)! 바로 그였다.
대륙풍운의 주역인 제일마종! 그가 이 지옥의 입구 깊은 곳에 나타난 것이
었다.

(오늘은… 결행해야만 한다, 기필코…)


걸음을 옮겨 지옥마전의 안쪽으로 들어서는 지옥천존의 두 눈이 더욱 새파
래졌다.
무엇을 결행한다는 것일까? 최강의 마인이라는 그의 두 눈에 은은히 흔들림
이 스쳐갔다.
(그가… 나 벽우뢰(碧宇雷)로 강하게 만들어 준 것도 결국은 나를 이용하여
오대무벌(五大武閥)을 쓰러뜨리기 위해서였다.)
지옥천존 벽우뢰… 그는 복면 속에서 입술을 잘근 물었다.
(위대한 폭풍일맥(暴風一脈)의… 몰락도 사실 노조(老祖)의 암수에 의해 이
루어진 것이다. 그것을… 안 이상 복수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그가 나를
더 이상 강할 수 없게 만들어 준 은인이라고 했다.)
뚜벅… 뚜벅…!
지옥천존은 걸음을 옮기며 아주 괴로운 눈빛이 되었다. 그것은 지금 그가
자신의 가장 가까운 친인을 제거할 결심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심중의 갈등과는 상관없이 그의 걸음걸이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
다. 마치 태산이 미끄러지는 듯한 보법… 그것은 지옥천존이 이미 절정(絶
頂)에 이르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내가 가는 길은 결국 아수라(阿修羅)의 길이고… 파멸(破滅)의 길이다. 하
지만 그것을 안다고 해도 가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사랑하는 딸… 황혜(皇
慧)를 위해서라도…!)
소리없는 한숨이 지옥천존의 입가로 흘렀다.
그리고… 그는 한 칸 석실 앞에 이르러 있었다.

석실(石室)-!
온통 음울한 귀기와 어둠에 덮인 석실이었다.
넓은 석실 저 끝에는 아수라기 새겨진 석벽이 하나 있었다. 두 눈을 부릅뜨
고 세상을 향해 재앙을 내치려는 자세의 흉흉한 아수라의 형상이었다.
"…!"
지금 그 아수라를 마주보고 한 명 노인이 앉아 있었다.
회색의 장포… 회색의 머리카락… 깡마른 체격인데 오른팔이 무엇인가에 잘
려져 나간 독비(毒臂)의 노인이었다.
노인은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노인의 입가로는 미미
한 미소가 배어 흐르고 있었다.
(우리 지옥마교가 군림할 때가 임박했다. 후훗! 오대무벌은 곧 뢰(雷)가 내
대신 쓰러뜨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옥마맥의 천년심원을 방해할 그 무
엇도 지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리라.)
독비노인의 얄팍한 입술가로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고독패왕이 있으나… 아수(阿修) 조사(祖師)께서 제거해 주실 것이니 걱정
할 필요는 없고… 적당한 때를 보아 뢰(雷)도 제거한다. 후훗! 그 후에 아
무도 모르는 우리 지옥마맥(地獄魔脈)의 세 가신(家臣)들을 움직여 일거에
대륙을 정복하는 것이다.)
독비노인의 숨결이 다시 거칠어졌다. 그의 일족인 천년야망의 완성이 목전
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는 때문이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화약… 냄새?)
빠- 직!
독비노인의 두 눈이 번쩍 떠지며 무서운 광망이 번개같이 일어났다. 한 가
닥 지극히 강렬한 화약냄새가 맡아진 것이다.
독비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눈에 석실 입구를 가득 메우
며 서 있는 한 명 흑의인이 보였다.
지옥천존이었다.
"…!"
지옥천존은 암울한 눈빛으로 독비노인을 바라보고 있는데 화약냄새는 그의
소매 속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뢰(雷)?"
독비노인은 심중의 동요를 누르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지옥천존이 대답했다.
"성(城)의… 뇌옥에서 팔황마성(八荒魔聖)이란 자를… 만났소이다."
"무엇이?"
순간 독보노인의 전신에 격렬한 파문이 일었다.

-팔황마성(八荒魔聖)!

그는 사십여 년 전 중원을 침공했던 실종된 신강(新疆) 팔황마전(八荒魔殿)


의 전대지존(前代至尊)이 아닌가? 헌데 무엇 때문에 팔황마성의 이름이 이
괴노인을 그렇게 놀라게 만드는 것일까?
어찌되었든, 독비노인의 그 같은 반응은 지옥천존에게 한 가지 사실을 확인
시켜 주는 것이었다. 사십 년 전에 있었던 의혹스러운 무림비사의 진상을…
"역시… 노조(老祖)셨구료. 본가와… 새황쌍천(塞荒雙天)을 동귀어진시킨
것이…!"
지옥천존의 입에서 으르렁대는 듯한 나지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스- 윽!
동시에 지옥천존의 오른손이 장포의 소매에서 빠져나왔고, 그런 그의 손에
하나의 둥근 구슬이 들려 있었다.
검붉은 빛을 띤 주먹만한 구슬-! 독비노인이 맡은 화약냄새는 바로 그것으
로부터 흘러나온 것이었다.
"벽력… 굉천뢰(霹靂宏天雷)! 남황(南荒) 벽력부(霹靂府)의…?"
그 구슬을 본 순간 독비노인의 노안에 격렬한 경악의 파문이 일었다.
빠라랑! 빠지지직!
동시에 독비노인의 전신으로 새파란 천충의 강벽이 달무리같이 일어났다.

-천층마벽(千層魔壁)!

그것은 인간이 만든 것 중 최강이라 불리는 지옥일맥의 호신기공이었다.


그러나,
"늦었소, 노조!"
지옥천존은 음울하게 일갈하며 검은 구슬을 석실 안쪽으로 던져내었다.
"안… 돼!"
콰콰- 쾅! 번- 쩍!
눈을 멀게 할 듯한 섬광(閃光)과 굉렬한 폭음 속에서 독비노인의 처절한 비
명이 터졌다.
콰르르르… 우두두둑!
웅장했던 고 대석전이 일순 모래성이 무너지듯 괴멸되어 갔다. 그것은 벽력
굉천뢰라는 작은 구슬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가장 강력한 화기이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
지축이 지진을 만난 듯이 뒤흔들리고 화염이 일천 장을 치솟았다.

그리고,
스으으…!
치솟는 화염을 타고 한 명 흑의인이 절공으로부터 훌훌 날아올랐다. 그는
물론 지옥천존이었다.
화염을 타고 떠오르며 지옥천존은 아주 괴로운 눈으로 무너지는 지옥마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잘… 가시오, 지옥… 노조!"
지옥천존의 입에서 문득 우울한 신음이 배어 흘렀다.

-지옥노조(地獄老祖) 능황(陵皇)!

아아! 바로 그러했다. 지옥마전의 석실에 있던 그 독비노인은 바로 지옥노


조 능황이었다.
이십여 년 전, 군림천하의 야망을 꿈꾸다가 고독패왕이라는 젊은 승부사에
패해 죽었다고 알려진 전설적인 마황-!
그러나, 지금 그는 화염지옥이 되어가고 있는 지옥마전에 파묻혀 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기른 야수의 손에 의해서…
"후훗! 지옥마맥은…노조의 뜻대로 무림을 제패하게 될 것이오."
훌훌 날아오르며 지옥천존은 음울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직후에 한 명 어린 여아(女兒)의 손에 지옥일맥은 영원히 지
상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오! 후후! 천년검후라는… 폭풍의 후예에 의해…!"
지옥천존의 눈가로 비장한 광망이 번져나왔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황혜야! 어서… 강해지거라! 이 애비를 쓰러뜨려야 대륙여제(大陸女帝)라
불릴 수 있는 만큼…"
고오오…!
지옥천존의 신형이 까마득히 멀어져 갔다. 한 줄기 비장한 독백만을 남긴
채…

무너지는 지옥마전(地獄魔殿)!
대륙(大陸)의 운명이… 지금 또 한 차례 반전되는 순간이었다.

번-쩍! 꽈르르릉!
횡포한 우뢰성과 시퍼런 뇌전(雷電)에 대지(大地)가 몸살을 앓고 있었다.
쏴아아… 콰르르르릉!
장대발 같은 빗줄기…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도록 뽀얗게 일어나는 우연
(雨煙)!
인세(人世)의 종말이라도 온 것일까? 땅 위의 모든 추악한 것들을 쓸어내려
는 듯이 그렇게 소나기가 퍼붓고 있었다.
아직 초저녁이건만 장대 같은 빗줄기에 가려 사위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번- 쩍!
시퍼런 뇌전이 도끼같이 천공을 가르며 지나갔다.
어느 이름모를 산등성이 위에는 세찬 빗줄기에 금방이라도 떠내려간 듯 한
채의 사당이 서 있었다.
토지묘(土地廟)-!
그 사당은 바로 토지신을 모시는 토지묘였다.
피- 이잉!
문득 세찬 빗줄기를 뚫고 하나의 인영이 토지묘를 향해 질주해 왔다.
빛살 같은 속도로 다가서는 인물, 그 자는 한 명의 여인이었다.
나이는 이십대 중반 정도일까? 일견하여 아주 당당한 체격을 지닌 여인이었
다. 육 척에 가까운 키, 딱 벌어진 어깨, 잘못 보면 사내로 오인할 정도로
훤칠한 체격의 여인이었다.
하지만 사내같은 체격과 달리 여인은 상당한 미인이었다. 큼직큼직한 오관,
짙은 눈썹, 전체적으로 시원스러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 거녀(巨女)는 특이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당당한 몸에는 검붉은 전포를
걸치고 있는데 그 전포자락에도 포효하는 사자의 형상이 수놓아져 있었다.
"하아… 하아…!"
스스슥…
거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토지묘 앞에 내려섰다. 무엇엔가 쫓기는 듯
여인의 큼직한 봉목은 불안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쏴아아…!
세찬 빗줄기가 여인의 전신을 흠뻑 적시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아랑곳
하지 않고 빠르게 토지묘 주위를 살폈다.
"이대로라면… 반나절이 못 되어 거령수황(巨靈獸皇), 그 자에게 잡히고 만
다!"
여인은 피로한 기색으로 입술을 잘근 물었다.
거령수황이라니…? 여인은 저 지옥천존의 세 그림자는 지옥삼패 중 거령수
황에게 쫓기고 있단 말인가?
"안 돼! 무슨 일이 있든 소주군(少主君) 아기씨를 지옥마교의 무리에서 넘
길 수는 없어!"
여인은 단호한 표저을 지으며 가슴섶을 내려다 보았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
부분에는 한 명 어린 사내아이가 여인의 전포자락 안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
다.
그 사내아이를 들여다 보며 여전사의 두 눈이 결의의 빛으로 번뜩였다.
"주군 철사대제(鐵獅大帝)님이 실종된 지금, 위대한 사자철림(獅子鐵林)의
운명은 아기씨께 달렸다. 절대로… 아기씨를 지옥의 무리에게 넘기지 않는
다!"
스- 윽!
중얼거리며 여전사는 빠르게 토지묘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사자철림(獅子鐵林)!

그 적포 여전사와 어린아이는 바로 저 오대무벌 중 북산(北山) 사자철림의


인물일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토지묘로 들어간 여전사는 빠르게 토지묘 안을 돌아보았다. 토지묘는 오랫
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아주 퇴락하고 황량했다.
번- 쩍!
빠르게 주위를 돌아보던 여인은 번뜩 몸을 날려 토지묘의 대들보 위로 날아
올라갔다. 그리고는 가슴섶의 어린아이를 조심스럽게 꺼내 대들보 그늘에
내려 놓았다.
"조금만…기다려 주세요. 거령수황을 유인한 뒤에 꼭 모시러 오겠어요!"
여인은 아이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어린아이는 수혈이 짚인
듯 미동도 않은 채 곤히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사자철림의 열조들이시여! 소주님을 돌보소서.)
스- 윽!
여인은 마음 속으로 기원하며 토지묘를 빠져나왔다.
쏴아아…!
밖에는 여전히 장대살 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한데, 여전사가 막 토지묘에서 나오는 순간이었다.
"흐흐흐…"
빗소리를 뚫고 어디선가 음험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소리는 적어
도 십 리 밖에서 발출된 것인데도 마치 바로 귓전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여인의 안색이 일변했다.
"거령… 수황! 그 자가 벌써…"
파- 앗!
여인은 신음하며 그 즉시 지면을 박차고 남쪽으로 날아갔다. 어린 주인을
조금이라도 마수에서 멀리 떼어 놓아야 한다는 생각 외에 아무것도 그녀의
뇌리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흐윽!)
채 십 리를 달리지 못해서 여인은 급급히 멈춰서야만 했다.
여인의 십여 장 앞,
스으… 스으!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 하나 거대한 인영이 악귀같이 우뚝 서 있었기 때문이
다. 그 자는 전신이 시뻘건 털에 뒤덮인 흉측한 형상의 반인반수의 괴인이
었다.

-거령수황(巨靈獸皇)!

그 자는 바로 지옥삼패의 둘째 거령수황이었다. 인간의 여자와 성성이 사이


에서 태어난 반인반수의 마인! 그 거령수황이 여인 앞에 우뚝 서 있는 것이
다.
"거…거령수황!"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비칠 물러섰다.
그런 여인을 거령수황은 흉흉한 핏빛 눈으로 노려보았다.
"흐흐, 사자철림의 암컷, 철사신녀(鐵獅神女) 적아황(赤娥皇)! 여기까지가
네년의 한계야!"
거령수황은 음침하게 말하며 성큼 여인 앞으로 다가섰다.

-철사신녀 적아황!

이것이 여전사의 이름이었다. 그녀는 저 오대무벌 중 북산 사자철림의 신진


제일고수자였다.
본래 적아황은 사자철림 막씨(莫氏)일족을 모시는 가신(家臣)의 딸이었다.
한데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신력(神力)과 자질을 그녀를 사자혈림의 당대가
주인 철사대제(鐵獅大帝) 막붕(莫鵬)이 우연히 발견하게 된다. 그 결과 그
녀는 막붕의 제자가 되었으며 파격적으로 사자일맥의 비전무공까지 전수받
기에 이르렀다.
사자철림에는 두 가지 초절기가 있다.
사자신권(獅子神拳)이라는 패도무적의 권법(拳法), 철사군림십팔풍(鐵獅君
臨十八風)이라는 절기들이다.
철사신녀 적아황은 그 중에서 철사군림십팔풍의 도법을 팔성 정도 연마하였
고, 그래서 한 자루 칼만 들면 사부인 철사대제 외의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한다.
북산의 암사자-!
그렇게 불리는 여걸이 바로 적아황인 것이다.

"자! 이제 순순히 사자철림의 어린 놈, 막사후(莫獅吼)를 어디에 숨겼는지


말해라! 괴로움을 당하기 전에…"
스- 읏!
거령수황은 흉신악살같이 적아왕 앞으로 다가섰다.
비칠 뒤로 물러서던 적아황의 입술이 잘근 물려졌다.
"지옥에나 가서 알아봐라! 원숭이 새끼!"
적아황은 악을 쓰며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번쩍!
다음 순간 그녀의 요대에서 한 자루 칼이 튀어나와 벼락같이 거령수황을 그
어갔다. 그 칼은 부드러운 면철로 만들어져 그녀의 허리에 감겨 있었던 것
이다.
츄리릿! 쉬- 아악!
번갯불 같은 도광이 순간적으로 일천 가닥이나 일어나 거령수황을 뒤집어
씌워졌다.
철사군림십팔풍!
사자철림이 자랑하는 그 무적도법이 펼쳐진 것이다.
그러나 적아황의 도세가 지척에 이르렀건만 거령수황은 팔짱을 낀 채 미동
도 하지 않았다.
(미… 친 놈!)
그런 거령수황의 태도에 적아황이 냉소를 지를 때였다.
번- 쩍!
"카아아!"
돌연 측면으로부터 하나의 시커먼 그림자가 벼락치듯 뛰어들어 거령수황을
가로막았다.
카카캉!
다음 순간 철벽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적아황과 같이 퉁겨져 나갔
다. 분명 그녀의 칼은 그 검은 인영을 베었건만 오히려 어이없이 퉁겨나간
것이었다.
적아황이 깜짝 놀랄 때였다.
"크크녠…"
콰릉!
그 검은 그림자는 섬뜩한 괴성과 함께 손 끝에서 한 무더기 시커먼 안개 같
은 것을 토해내며 적아황에게 덮쳐들었다. 그 시커먼 안개에서 역겨운 비린
내가 일어나 적아황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독… 장(毒掌)?"
파- 앗!
적아황은 질겁을 하며 즉시 뒤로 몸을 퉁겨내었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한 걸음 늦은 상태였다.
"흐- 윽!"
쿠- 웅!
적아황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 독장을 한 모금 들이마셨고 그 순간 온몸
에서 힘이 쭉 빠져 지면으로 나뒹굴었다.
지면에 나뒹군 후에야 적아황은 자신을 그토록 무기력하게 쓰러뜨린 상대를
알아볼 수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흑영은 전신이 먹물을 바른 듯 시커먼 묵인인데 한 쌍 눈 만
이 시퍼런 녹색의 인광을 뚝뚝 떨구고 있었다.
그 자를 본 적아황의 입에서 절망의 신음이 흘렀다.
"살황… 독종의 천독강시(千毒疆屍)?"
신음을 토하며 적아황의 겨우 일어나던 몸이 도로 쓰러졌다. 그런 그녀의
전신 피부가 삽시에 검푸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극독에 중독
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천독강시(千毒疆屍)!

이것이 갑자기 나타난 묵인(墨人)의 정체였다.


천독강시는 전설로만 전해 오는 일종의 강시였다. 생시에 무림고수였던 시
체에 천 가지 극독을 투여하고 사방을 시전하면 천독강시가 된다.
천독강시가 된 시체는 생시에 지녔던 것보다 다섯 배 강한 내공을 지니게
된다고 한다. 거기에 그들은 숨결에조차 무서운 독강이 배어 흐른다.
천독강시가 흘리는 독강은 무쇠라도 무식시키며 어떤 호신기공이라도 눈같
이 녹여 버린다. 가히 무적의 마물(魔物)! 그것이 바로 천독강시였다.
백 년 전!
묘강(苗疆)의 패자인 살황독종이 그 천독강시를 앞세워 중원을 침공한 적이
있었다.
당시 살황독종은 단 열 구의 천독강시를 중원에 보냈었다. 그러나, 오대무
벌을 주축으로 한 중원연합군은 무려 일만 명의 사상자를 낸 후에야 그 열
구의 천독강시를 제거할 수 있었다.
그 전율스러운 마물이 지금 적아황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 제 18 장 우중(雨中)의 정사(情事)

"지옥… 천존이 묘강의 살황독종까지 손을 뻗혔다더니… 사실이었군!"


적아황은 쓰러진 채 절망의 표정이 되었다.

-묘강(苗疆) 살황독종(薩荒毒宗)!

그 이름은 곧 천하독문(天下毒門)의 하늘을 의미한다.


독문(毒門)의 하늘!
천 년 간 무림에 나타났던 모든 종류의 독공(毒功), 용독술(用毒術)이 거의
모두 살황독종에서 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중원대륙의 외곽지대인 변황!
그곳에도 무림이 있으며 그 변황무림은 천 년 간 네 개의 문파에 의해 지배
당해 왔었다. 살황독종도 그 중 하나로 이들을 통틀어 변황사패라고 한다.

<변황사패(邊荒四覇)!>

신강(新疆) 팔황마전(八荒魔殿)!
막북(漠北) 적붕호황천(赤鵬護皇天)!
서천(西天) 뇌정마찰(雷霆魔刹)!
묘강(苗疆) 살황독종(薩荒毒宗)!

이들이 바로 변황의 네 마리 맹룡, 변황사패다.


그 변황사패 중 가장 무서운 세력을 꼽으라면 무림인들은 주저없이 묘강 살
황독종을 선택할 것이다.
온통 비밀의 장막에 싸인 만독(萬毒)의 하늘…! 그들이 도대체 얼마나 강하
고 무서운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저 천독강시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살황독종은 가히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헌데 그 살황독종마저 지옥천존의 영향하에 있는 듯하니 얼마나 놀라운 일
인가? 철사신녀 적아황이 절망하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흐흐읏! 이제 사자철림의 어린 놈을 어디에 숨겼는지 말할 기분이 되었느
냐?"
거령수황이 음산한 눈빛으로 적아황의 몸을 쓸어보며 다가섰다.
세차게 퍼붓는 빗발에 이미 젖을대로 젖은 전포자락이 적아황의 풍만한 몸
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그 때문에 그녀의 뇌살적인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보였다. 풍만한 젖무덤, 팽팽한 하복부, 미끈하게 뻗어내린 허벅지
와 그 사이의 탐스런 구릉까지…
"흐윽…!"
적아황은 거령수황의 벌개진 눈빛이 자신의 몸 위로 스쳐 지나감을 느끼고
부르르 떨었다.
[죽… 죽여라! 내 입을 열게 하느니 그 쪽이 빠를 것이다!]
적아황은 이를 갈며 거령수황을 노려보았다.
[흐흐! 과연 그럴까?]
거령수황은 짐승의 그것같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음험하게 웃었다.
[네년을 애원하게 만들 방법쯤이야 얼마든지 있지!]
그자는 충혈된 눈을 희번덕이며 털이 숭숭한 손가락으로 적아황의 목젖을
눌렀다.
[악!]
목젖이 눌려진 적아황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하며 입을 쩍 벌렸고 거령수황
은 그런 그녀의 벌려진 입에 한 알의 알약을 억지로 밀어 넣었다.
[쿨룩!]
그 환약이 목을 넘어가자마자 기이한 열기가 전신으로 스물스물 번져감을
느끼고 적아황의 안색이 일변했다.
"내게… 무… 무엇을 먹었느냐?"
적아황이 거령수황에게 악을 쓰듯 묻자 거령수황은 음산하게 웃으며 그녀의
기해혈(氣海穴)을 눌러 내공을 흩어 버렸다.
"흐흣, 독은 아니니 걱정마라. 오히려 너를 극락으로 보내줄 좋은 약이니
까!"
"설마… 최음제?"
경악의 표정을 짓던 적아황의 전신이 뻣뻣이 굳어졌다.
열기(熱氣)!
예의 스물슬물 일어나던 열기가 돌연 급격히 증폭되어 그녀의 전신으로 번
져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열기는 아주 본능적이고 강력한 것이었다.
적아황은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그 변화만으로도 거령수황이 자신에게
부용시킨 것이 어떤 종류의 약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흐윽…! 아아아!"
적아황은 삽시에 본능의 욕화에 휘말려 들었다. 그녀는 전신으로 퍼져가는
열기에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전포를 쥐어 뜯으며 몸부림쳤다.
전포의 저고리가 그녀의 손길에 뜯기듯 벌어졌다. 그러자 출렁이며 나타나
는 한 쌍의 육봉…
그녀의 속살은 북산의 암사자라는 별호와 달리 아주 희고 보드라웠다. 그
희디흰 가슴에 우람하게 솟은 한 쌍의 젖무덤은 차라리 압도적으로 당당했
다.
그리고 사지를 비트는 사이에 그녀의 치마도 어느덧 허벅지까지 밀려 올라
가 있었다. 눈이 내린 듯 뽀얀 허버지가 붉은 전포자락과 대비되어 더욱 희
게 보였다.
적아황의 그 허벅지는… 아주 풍만하고 모양이 좋았다. 그 희멀건 속살은
보는 것 만으로도 뇌살당할 지경이었다.
"으음…!"
보고 있던 거령수황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앓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욕정으로 번들거리는 그의 두 눈은 적아황의 허벅지 사이를 노려보고 있었
다.
(더는… 못 참겠다. 사자철림의 어린 놈을 찾는 것은 뒤로 미루어야만 겠
다!)
거령수황은 신음하며 적아황의 아랫도리로 손을 가져왔다. 적아황의 비에
젖은 치마자락이 허리 위까지 밀려 올라갔다. 그러자 드러나는 적아황의 아
랫도리…!
"…!"
거령수황의 숨결이 순간적으로 멈추어졌다.
우람한 젖가슴이나 한아름은 됨직한 허벅지와는 달리 그녀의 허리는 아주
가늘고 날렵하여 한줌밖에 안 되어 보였다.
그 잘룩한 허리 아래로는 아주 풍만하고 평퍼짐한 둔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탐스런 둔부의 전면에는 군살 하나 없는 팽팽한 아랫배와 도도록
히 살찐 둔덕이 모습을 드러냈다.
절로 꿈틀대는 육감적인 둔부, 한아름이나 됨직한 우람한 허버지는 빗물에
젖어 갓 씻어낸 무같이 싱그러워 보였다.
그 탄력 넘치는 허벅지가 살짝 벌어진 사이로… 사내라면 누구나 꿈에도 그
리는 무릉도원이 숨어 있었다.
아랫배가 끝나는 곳, 그리고 육중한 허벅지가 갈라지는 곳에 자리한 살진
두덩이는 도도한 자태로 불룩 솟아 있었다.
헌데 그녀의 남달린 높고 살찐 둔덕에는 기대했던 만큼 무성한 방초의 숲은
없었다. 그 둔덕 일대에는 그저 겨우 파릇파릇한 춘초가 소복이 나 있을 뿐
이었다.
솜털같은 체모에 덮인 구릉, 그 때문에 그 붕긋한 구릉 아래의 절벽 중앙에
파여진 여체의 오묘한 홈이 가려지는 것 없이 한 눈에 드러나 보였다.
보드라우면서도 깊숙이 갈라진 도끼 자국, 그 부드러운 금 사이로 분홍빛
꽃잎이 부끄러운 자태로 살짝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지금 한 쌍의 붉은 꽃
잎은 빗물과 적아황 자신의 뜨거운 체온으로 인해 수증기에 덮인 채 붉은
이슬을 토해내고 있었다.
"흐흐…!"
거령수황은 헐떡이며 적아황의 예쁜 무릎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는 서서히 좌우로 벌렸다.
"흐윽! 안… 돼!"
자신의 은밀한 곳이 외간 사내의 시야에 드러나는 것을 느끼며 적아황은 비
몽사몽간에 헐떡이며 저항했다. 하지만 이미 욕화에 휘말린 적아황의 저항
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녀의 허벅지는 더 이상 불가능할 정도로 활짝 벌려져 세워졌다. 사내를
받아들일 태초의 자세가 된 그녀의 아랫도리로 여전히 세찬 빗줄기가 쏟아
졌다. 빗물을 그녀의 하복부로부터 사타구니 쪽으로 이루며 흘러내렸다.
"으음…!"
거령수황은 빗물이 흘러내리는 적아황의 내밀한 곳을 노려보며 욕정을 참지
못하고 으르렁거렸다. 탄력넘치는 허벅지가 벌어짐에 따라 꼭 붙어 있던 적
아황의 옹달샘도 수줍게 입을 벌려 그 안쪽에 숨어 있던 오묘하고도 깊은
부분을 내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누구의 손길도 닿은 적이 없는 처녀의 깊은 옹달샘, 그것을 노려보던
거령수황은 목이 타는 듯 얼굴을 그 여체의 깊은 옹달샘으로 가져갔다.
검붉은 털이 돋은 거령수황의 손이 적아황의 도톰한 둔덕을 좌우로 해쳤다.
드러나는 여체의 옹달샘에서는 뜨거운 온천수가 토해지고 있었다.
거령수황은 가늘게 몸을 떨며 그 옹달샘으로 입술을 가져갔다. 순결한 여체
가 짐승같은 욕정에 더럽혀지려는 순간이었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카아악!"
돌연 옆에 서 있던 천독강시가 날카로운 괴성을 질렀다.
파- 앗!
그와 함께 천독강시는 득달같이 좌측의 숲을 향해 덮쳐 들어갔다.
"무슨 일이냐?"
거령수황은 흠칫하며 적아황의 허벅지 사이에서 얼굴을 들었다.
꽈르르릉!
"크아아아-!"
그 순간 굉렬한 폭음이 일며 숲 속으로 덮쳐갔던 천독강시가 배는 빠른 속
도로 되퉁겨져 나왔다. 튕겨져 십 장 밖으로 나뒹군 천독강시의 무쇠보다
단단한 가슴 부근에는 붕조(鵬鳥)의 발톱자국 같은 붉은 상처가 나 있었다.
(저럴 수가…!)
거령수황은 불신의 빛으로 두 눈을 물들이며 벌떡 일어섰다. 그는 꿈에도
천독강시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강자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것이
다.
거령수황이 놀라 굳어져 있을 때였다.
"네… 가 거령수황이라는 지옥천존의 개냐?"
음울한 음성과 함께 한 명의 소년이 숲속에서 성큼 걸어나왔다.
나이는 십 팔구 세 정도일까? 일신에 허름한 폐포를 걸쳤고 어깨 정도까지
이르는 장발을 기른 소년이었다. 그의 머릿결에는 은은히 붉은 기운이 도는
데 그것에 반쯤 가려진 소년의 용모는 아주 영준했다.
소년의 용모는 너무 준미하여 요사스럽게 보일 정도였다. 한 번 그를 본 여
인이라면 아마도 평생 그 처절하도록 아름다운 인상을 잊지 못하리라.
만일 아주 안목이 뛰어난 자라면 알아볼지도 모른 것이다. 소년의 그 요악
한 아름다움이 한 가지 상고의 미공(美功)을 연마한 때문임을…!
그 미공의 이름은 고루옥형미황공(고루玉形美皇功)이었다.
고루옥형미황공-!
소년은 바로 철… 운비였다.

(애송이… 아닌가?)
거령수황의 흉측한 안면이 와락 이지러졌다. 적아황의 탐스런 육체를 즐기
려던 것을 방해한 것이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애송이였다는 사실이 그를
분노케 한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자칫 철운비가 저 무서운 천독강시에게 상처를 입힌 초고수
자임을 잊고 말았다.
"바득…! 죽어랏! 애송이!"
꽈- 릉!
거령수황은 대갈일성하며 철운비를 향해 일장을 후려쳤다. 솥뚜껑만한 그
자의 손바닥이 활짝 벌려진 채 철운비의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그 기세는
마치 태산이 무너져 내리는 정도로 위맹했다.

-거령철마장(巨靈鐵魔掌)!

그것이 거령수황의 독문절기이고 환우삼대장법의 하나인 거령신장(巨靈神


掌)이었다.
철운비는 한 눈에 그 자의 일장이 쌍뇌모황(雙腦謨皇) 음세황의 그것에 못
지 않음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철운비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거령수황 만큼 강하던 음세황도
죽인 그였다. 하물며 그의 내공은 용암연에서의 기연으로 두 배 강해져 있
는 상태가 아닌가?
"패왕… 철수공이라고 아느냐?"
거령신장의 역도가 지척에 이르렀을 때 철운비는 싸늘히 냉갈했다.
피- 이잉!
동시에 그의 폐포 소맷자락이 갑자기 철판같이 빳빳해져 앞으로 그어졌다.
그의 그 일수는 느린 듯해 보였으나 순간적으로 거령수황의 왼쪽 어깨를 후
려치고 있었다.
퍼- 퍼퍽!
"케- 에엑!"
무참한 비명과함께 선혈이 확 피어 오르며 거령수황의 왼쪽 팔이 어깨로부
터 박살나 버렸다. 수운월의 소수마강에도 부서지지 않았던 그 자의 거령마
강이 한갖 소맷자락에 박살나 버린 것이다.
"크윽! 그것은… 고독패왕의 독문절기인데…!"
후두둑!
거령수황은 뒤쪽으로 퉁겨져 나가며 공포에 질린 비명을 토해냈다. 그를 공
포에 떨게 만드는 것은 철운비의 무서운 공력 때문이기 보다는 그가 펼친
무공의 내력 때문이었다.
-패왕철수공(覇王鐵袖功)!
아아! 그것이야말로 저 무서운 승부사 고독패왕의 초극패왕이 아니던가? 고
독패왕의 이름이 떠오르는 순간 이미 거령수황의 아랫도리는 흥건히 젖어
있었다.
(달아…나야만 한다! 저놈이 고독패왕과 관계 있는 놈이라면…!)
파- 잇!
그는 그 즉시 지면을 박차고 뒤쪽으로 날아 올라갔다.
"천독… 강시! 놈을… 막아라!"
거령수황은 공포에 악을 쓰며 숲 저편으로 미친 듯 날아올랐다.
"카- 아앗!"
동시에 명령을 받은 천독강시가 괴성을 지르며 철운비에게 덮쳐왔다.
츠츠츳!
구름같이 일어나는 천독마강-! 천독강시의 몸에서 일어나는 그 천독마강에
스치자 수목이건 암석이건 가릴 것없이 녹아내렸다. 실로 무서운 독강(毒
剛)이었다.
철운비의 안색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천독강시의 천독
마강은 무시할 수 없다.
"독(毒)에는… 불(火)! 가랏, 뇌정… 개벽천강(雷精開闢天剛)!"
폭갈과 함께 철운비의 우수가 내리쳐졌다.
버… 번쩍! 빠지지직!
그의 손끝에서 시퍼런 뇌정혼이 일어나 그대로 천독강시를 후려쳤다.
꽈- 르릉!
시퍼런 낙뢰가 천독강시를 강타했다.
"크아아악!"
직후 천독강시의 처절한 비명이 산야를 뒤흔들었다.
푸스스!
천독강시의 몸이 시퍼런 불꽃에 감싸이더니 다음 순간 역겨운 연기와 함께
재로 무너져 내렸다.
뇌정개벽천강-!
천축 뇌정신문의 그 천년항마뇌력이 천독강시를 순간적으로 태워 버린 것이
다.

"뇌정(雷霆)으로 바스러뜨리지 못하는 것은 없지!"


철운비는 중얼거리며 철사신녀 적아황에게로 다가섰다.
"아흐흑…!"
적아황은 여전히 자기 몸을 쥐어뜯으며 욕정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우람한 유방, 희멀건 허벅지가 철운비를 순간적으로 당황하게 만들었다.
"최음제에라도 당한 것일까?"
철운비는 당혹한 표정으로 적아황을 내려다 보았다.
적아황의 키는 철운비보다 오히려 한 뼘은 더 컸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몸
매는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철운비는 자기도 모르게 하체 일부가
쇳덩이 같이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활짝 벌려진 허벅지, 빗물이 흘러내리는 여체의 옹달샘…, 현혹당하지 않는
다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난감하군! 우선 혈도나 풀어 주고 어찌해 봐야겠군!"
철운비는 고소하며 적아황의 기해혈을 풀어 주었다.
헌데 그것이 잘못이었다.
"흐윽! 제발… 나좀 어떻게…!"
적아황이 득달같이 철운비를 휘감았다.
"억!"
철운비가 당황하여 빠져 나가려고 했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적아황은 무서
운 힘으로 철운비를 휘감으며 하체를 밀착시켜 왔다. 비에 젖은 탄력있는
여체, 향긋한 살내음, 그것은 실로 견디기 힘든 공격이었다.
"으… 음!"
철운비의 이성도 삽시에 무너져 내렸다. 한창 양기가 솟구치는 나이인 그는
참지 못하고 그대로 적아황의 풍만한 젖무덤을 와락 이지러뜨리며 여체를
내리눌렀다.
그 사이 적아황은 떨리는 손으로 철운비의 바지를 벗겨 내리고 있었다.
삽시에 빗물에 젖은 맨살과 맨살이 닿았다.
그와 함께 적아황은 상상을 불허하도록 거대한 철운비의 일부에 놀라 숨을
멈췄다. 그의 일부는 거대할 뿐 아니라 달군 쇳덩어리같이 뜨거웠다.
"흐윽…! 어서…!"
적아황은 몸부림쳤다.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비궁을 손가락으로 개방하고
그곳으로 철운비를 이끌었다.
퍼덕…!
철운비의 일부가 예민한 살점에 적아황은 불덩어리에 닿은 듯 사지를 퍼득
였다.
"으음…!"
철운비도 어느덧 욕화에 휘말려 있었다. 그는 적아황의 허리를 두 팔로 끌
어안았다. 그리고 하체에 힘을 주어 거칠게 적아황의 몸 속으로 자신의 일
부를 밀어 넣었다.
이미 뜨거운 열탕으로 변한 적아황의 깊은 샘은 충분히 철운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흡사 우마의 그것같이 거대한 철운비의 불덩이는 미끈
덩한 늪 속으로 거침없이 진입해 들어갔다.
"아흐윽… 아파!"
뜨겁게 맥동하는 철운비의 육괴가 육체의 관문을 돌파하는 순간 적아황의
입에서 고통스런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우람한 육체가 마치 작살에라
도 꿰뚫린 듯 세차게 퍼득이며 몸부림쳤다.
(처녀… 였나?)
하체의 일부로 격렬히 조여오는 긴축감과 묘한 파열감에 철운비는 일순 당
혹했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였고 그는 몸부림치는 적아황을 찍어누르며 자
신을 적아황의 몸에 끝까지 밀어 넣었다.
고통에 못 이겨 적아황의 허벅지가 뻣뻣이 경직되었고, 두 개의 몸이 결합
된 부분에서 배어흐른 붉디붉은 선혈이 빗물을 따라 흘렀다.
"으음… 허억!"
철운비의 악물린 입술 사이로도 앓는 듯한 신음이 터져나왔다. 적아황의 동
굴이 엄청난 힘으로 그의 일부를 조여대었기 때문이다. 적아황의 그곳은 강
인해 보이는 외형처럼 특별한 힘을 갖고 있었다.
자신의 불덩이를 완전히 밀어 넣는 순간 철운비는 적아황의 동굴 전체가 조
여대고 흡인하는 위력에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동굴 전체가 요동치며 마구 휘감아 조이는 데는 철운비도 아찔한 현기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잠시 경직되었던 철운비의 몸이 이내 좀 더 큰 쾌락을 갈구하며 서
서히 적아황의 몸 위에서 파도를 타기 시작했다.
"하악! 아흐윽… 아아!"
어린 폭군에게 내리 눌리며 적아황은 하얗게 눈을 치떴다. 그녀의 사지는
뱀같이 철운비를 휘어감으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은 대지같이 드넓고 풍요했다.
철운비는 그런 적아황의 몸 속으로 한없이 녹아들며 일렁였다.
쏴아아…!
자신보다 더 큰 여체를 핍박하는 철운비의 등 뒤로 세찬 빗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아학… 더… 더… 흐응… 아아…"
"흐음… 험…!"
두 남녀가 내뿜는 뜨거운 숨결에 숲 속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 열기는 영원
히 계속될 듯 뜨겁게 이어져 갔다.
쏴아아…! 우르릉…!
소나기는 여전히 기세 좋게 대지를 두드리고 있었다.

토지묘,
"이 녀석이… 철사대제의 아들이란 말이지?"
철운비는 신탁에 걸터앉아 품에 안고 있는 어린아이를 내려다 보았다.
한 달이 갓 넘었을까? 아주 귀여운 사내아이가 철운비의 팔 안에서 곤히 잠
들어 있었다.
오동통하고 영리해 보이는 사내아이, 그 아이가 바로 북산 사자철림의 어린
후계자인 막사후(莫獅吼)였다.
(남해에서 돌아오지마자 오대무벌의 후예와 조우하다니… 나란 놈은 아무래
도 오대무벌과도 꽤나 인연이 많은 모양이군!)
철운비는 고소하며 막사후의 귀여운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는 수초익룡을 타고 막 남해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러다가 우연찮게
적아황이 위기에 빠진 것을 구해 주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어린아이는 아주 뛰어나다. 나 적아황의 일생을 맡기기에 충분할 만큼
…!)
철사신녀 적아황!
북산(北山)의 암사자는 그녀답지 않게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
것은 하체에서 전해오는 은은한 통증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 어린
소년에게 깔려 몇 번인가 혼절했었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저희 사자철림은 이미 지옥천존의 마수에 장악당한 상태예요. 다른 사대무
벌들의 사정도 본림보다 그다지 좋지는 않을 거예요."
적아황은 내심의 동요를 숨기려 말을 꺼냈다.
"흐음… 어째서 오대무벌이 지옥마교의 횡행을 방관만 하고 있나 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군!"
철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안고 있는 막사후에게
서 떠나지 않았다.

열흘 전, 사자철림의 자신의 처소에서 막 잠이 들려던 적아황에게 한 명 여


인이 은밀히 찾아왔다.

-사자천후(獅子天后) 당숙빈(唐叔賓)!

바로 철사대제의 정실이고 막사후의 생모인 그녀였다.


당숙빈은 가보인 철사패도(鐵獅覇刀)와 막사후를 적아황에게 건네주며 북산
에서 가능한 멀리 떠나라고 명령했다.
적아황이 놀라 이유을 물었으나 당숙빈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참담
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순간 적아황은 아주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사자철림의 당대 임주이고 그녀 자신의 사부인 철사대제 막붕! 그 무렵 그
의 행동이 전과 많이 달랐음을 적아황은 깨닫고 아연실색했다.
가짜…!
어쩌면 지금의 철사대제라는 자는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추측은 맞았다.
철사대제 막붕! 그는 언젠가 실종되고 그 자리를 가짜가 차지한 것이다.
여자의 몸은 아주 미묘하다. 사자천후 당옥빈은 가짜와 몇 번 동침한 후예
그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적아황에게 가보와 아들을 맡겨 탈출하도록
한 것이다.
그것이 적아황이 거령수황에게 쫓기게 된 이유이고… 물론 가짜 철사대제는
지옥마교에서 파견한 자일 것이다.

"아마도… 주모님은 그 직후에 자진하셨을 거예요."


주르르…
적아황의 큼직한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오대무벌까지 이미 지옥천존의 수하에 장악당했단 말인가?)
철운비는 침음하며 토지묘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의 영민한 머리는 아주
빠르게 모종의 계산을 하고 있었다.
"북산에 함께 가 주겠어!"
철운비는 여전히 시선을 토지묘 밖을 향해 던진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그래 주시겠어요?"
적아황의 봉목이 기쁨으로 환해졌다. 철운비가 도와주겠다고 하자 그녀는
이미 북산 사자철림을 지옥마교의 수중에서 탈환한 듯한 기분이 되었다.
어느덧… 자기도 모르게 철운비는 그녀에게 있어 절대전능의 존재로 새겨져
있는 상태였다.
철운비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우리… 귀여운 사후(獅吼)에게 집과 어머니를 돌려 주어야 하지 않겠어?"
"아아… 은공!"
털썩! 적아황은 환희에 몸을 떨며 철운비의 발 아래 무너져 내렸다.
철운비는 그런 그녀의 젖은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토지묘 밖을 노려보았다.
(지옥… 천존! 곧 당신을 만나게 될 것 같군!)
빠직!
철운비의 두 눈에서 아주 강한 뇌기가 흘렀다.
쏴아… 쏴아…!
토지묘 밖에서는 여전히 장대살 같은 빗줄기가 대지를 두드리고 있었다.

-북망산(北邙山)!

본래의 이름은 망산(邙山)이었으나, 고도(古都) 낙양(洛陽)의 북방(北方)에


있다 해서 북망산이라 불리우는 귀역이다.
고래로 북망산은 낙양성민들의 공동묘지로 사용되어 온 곳이었다. 멀리는
춘추시대로부터 시작하여, 가깝게는 당세에 만들어진 무덤들이 북망산 전역
을 벌집같이 뒤덮고 있었다.
그래서인가? 북망산은 인간들이 죽어간다는 사후세계인 명부(冥府)의 대명
사로 회자되고 있는 귀역(鬼域)이었다.
사자(死者)들의 안식처인 북망산, 그 망자들만의 귀역인 이곳에는 한 가지
의 전설이 담겨져 있었다.
그것은 북망산 어딘가에 있다는 한 곳의 신비스런 비역에 관한 전설이었다.

<귀왕대탑(鬼王大塔)!>

이것이 그 신비지의 명칭이었다.


귀왕대탑은 명부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북망산에 묻힌 사자들의 영혼들 모
두가 그곳을 통하여 명부로 들어간다고 전하여지는 망령(亡靈)의 안식처가
바로 귀왕대탑인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귀왕대탑에는 하나의 마물(魔物)이 자라고 있다고 전해져 내
려온다.
죽어 북망산에 묻힌 시신들의 시독을 흡수하며 자란다는 마물,

-천년귀왕(千年鬼王)!

이것이 그 마물이 이름이었다.


천년귀왕은 수많은 시독정(屍毒精)을 흡수하며 천 년의 잠을 자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언제이고 그 천년귀왕이 천 년의 잠에서 깨어날 것이고… 그 순간
무림천하는 천년귀왕의 귀기에 지배당할 것이다.
전설의 요지는 대략 이런 것이었다.

-귀왕대탑(鬼王大塔)!
-천년귀왕(千年鬼王)!

그 공포스런 전설이 언제부터 세상을 떠돌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귀왕대탑의 전설이 저 사대마맥과 모종의 연관이 있다는 사실만이 알려졌을
뿐이었다.
과연 북망(北邙)의 전설은 다만 허구일 뿐일까?
그도 아니면, 전설대로 언제인가 천년귀왕이라는 마물이 유령천하를 위해
천 년의 긴 잠에서 깨어날 것인가?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삼경(三更),
북망산 전역은 어둠의 장막에 뒤덮여 음산한 귀기를 흩뿌리고 있었다.
푸스스스…!
여기저기서 번쩍이는 새파란 인광…
우- 우-우-!
암흑을 꿰뚫고 번져오르는 귀기스런 귀곡성…!
사자(死者)들만의 지옥계(地獄界)가 펼쳐져 있는 이곳 북망산이었다.
한데,
"아직도 귀왕초인(鬼王超人)의 종적은 확인되지 않았나요?"
문득 어둠 속에서 음울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섬뜩하도
록 무미건조한 음성이었다.
북망산의 남단에 자리한 자그마한 구릉 위,
스으… 스으…!
언제부터인가 한 명 하얀 소복(素服)의 여인이 귀영(鬼影)인 듯 서 있었다.
화르르…!
전신을 을씨년스런 소복으로 감싸고 있는 그녀의 허리께까지 내려온 긴 수
발은 야풍에 산발되어 심해의 수초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소복여
인의 용모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없었다.
츠으으…!
다만 눈(眼)! 산발한 머릿결 사이로 번뜩이는 한 쌍의 봉목(鳳目)만이 뚜렷
이 드러나 있을 뿐이었다. 헌데 기이하게도 소복여인의 눈빛은 짙푸른 밀림
지대를 연상시키는 듯한 초록빛이 아닌가?
이 여인은 대체 누구인가? 새하얀 소복을 입고 이 깊은 야시(夜時)에 이 망
자의 귀역인 북망산중에서 을씨년스런 귀기로움을 연출하고 있는가?
소복여인의 전면에는 십여 명의 괴인(怪人)들이 서 있었다. 하나같이 수수
깡처럼 깡마른 자들인데 몸에는 모두 상복이 걸쳐져 있었다.
파… 츠으…!
그리고 그들의 푸르뎅뎅한 안색의 사자처럼 썩어가는 안면의 가운데에 자리
한 해골처럼 움푹 패인 눈가에서는 푸르스름한 인광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괴인들이 일종의 사악한 사공(邪功)을 연마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현상이었다.

"오대귀왕(五大鬼王)이 귀왕초인(鬼王超人)을 호위하여 이 북망산역에 진입


한 것은 확인되었습니다. 귀모(鬼母)시여!"
한 명 앙복해 있던 깡마른 괴인이 공경한 어투로 소복여인에게 말하고 있었
다.
귀모(鬼母)!
소복여인의 이름이 귀모란 말인가?
귀신의 어머니라니…! 소복여인은 어떤 내력을 지녔기에 그같이 끔찍한 이
름을 지니게 된 것일까?
"그런데 왜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도 없단 말인가요? 오대귀왕의 전서가 도
착한 지 벌써 삼각이 지났거늘…"
소복여인 귀모는 초조한 신색으로 상복괴인들을 돌아보았다.
스으으…!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그녀의 녹색 눈빛은 보는 이의 심혼마저 얼려 버릴
정도로 섬뜩한 것이었다.
그런 그녀를 올려보며 예의 상복괴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북망산역을… 이미 지옥천존이 지휘하는 일천 명의 지옥전사(地獄戰士)들
로 천라지망이 펼쳐져 있는 상태입니다!"
"…!"
"아마도 오래귀왕은 그 자들의 천라지망에 틈이 생기길 기다리며 외곽에 잠
복중일 것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지옥천존!"
빠- 직!
입술을 지그시 깨어무는 소복여인, 귀모의 녹색 눈에서 뇌혼 같은 신광이
작렬한 것은 순간적인 일이었다.
귀모라 불리운 이 소복여인은 지옥천존이란 인물에게 어떤 사무친 원한이
내재되어 있는 것일까?
(빠득! 지옥천존, 네놈이 감히… 대종사(大宗師)를 시해하고 지옥마맥(地獄
魔脈)을 배신하다니…!)
귀모의 눈빛은 점점 무서워지고 있었다.
헌데, 배신자라니? 귀모라는 이 소복여인도 지옥마백과 어떤 연관이 있는
듯하지 않은가?
(놈은 가증스럽게도 대종사를 시해했을 뿐만 아니라… 지옥마맥의 충성스런
가신(家臣)인 우리 귀왕일맥(鬼王一脈)마저 토벌하여 후환을 제거할 작정이
다!)
귀모는 문득 회한의 시선으로 어두운 야천(夜天)을 올려다 보았다.
(이 모든 원인은… 대종사께서 인재를 아끼시는 마음에 우리 지옥마맥의 원
수인 오대무벌의 후예를 제자로 받아들인 때문이다. 하지만…)
복받쳐 오르는 혈한(血恨) 때문일까? 여인의 깨물린 입술가로는 한 줄기 혈
혼이 선명하게 그어져 있었다. 허나 그녀는 아픔도 잊은 채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대종사를 쓰러뜨린 것만으로 모든 것이 네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지옥
천존!)
귀모의 시선으로 푸르스름한 녹광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귀왕초인만 제대로 도착하면… 곧 천년귀왕(千年鬼王)이 눈을 뜰 것이고…
네놈은 감히 위대한 지옥일맥을 배신한 대가가 어떤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
끼게 될 것이다!)
귀모의 숨결은 차츰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 때문일까?
화르르르…
그녀의 산발에 있는 긴 머릿결이 물결치듯 흔들렸다.
그때,
"이제… 그만 탑(塔)으로… 들어가시지요. 이곳은 안전하지가 않습니다!"
예의 상복괴인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지옥천존… 그 자가 언제 이곳까지 육박해 올지 모릅니다, 귀모시여…"
하나 그의 어런 염려에도 귀모는 차가운 냉소로 일축해 버렸다.
"흥! 걱정할 것 없어요. 비록 본녀가 그 자를 죽일 수는 없지만 그 자 역시
본녀를 어쩌지는 못하니까요."
귀모의 오연한 말(言)! 실로 광오하지 않은가?
지옥천존!
그가 누군가? 환우최강이라 불리는 일대효웅이 아니던가? 헌데, 그런 지옥
천존과 싸워 비록 이기지는 못하나 그렇다고 패배하지 않는다는 이 귀모라
는 여인의 신분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본녀는 이곳에서 오대귀왕이 오는 것을 좀 더 기다리겠어요. 그대들은 먼
저 귀왕윤회대진(鬼王輪廻大陣)으로 들어가 있어요!"
귀모는 상복괴인들에게 한 곳을 가리키며 하명했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후훗… 늦었다. 그 누구도… 살아서 귀왕대탑에 돌아가지 못한다!"
돌연 어둠 속에서 한 마디의 나직한 냉소가 흘러오는 것이 아닌가?
그 직후,
"커- 억!"
쿵!
돌연, 한 명의 상복괴인이 두 눈을 부릅뜬 채 앞으로 고꾸라지고… 그런 상
복괴인의 등판에는 섬뜩한 청색의 장인(掌人)이 선명하게 찍혀져 있었다.
어디선가 무형(無形)무성(無聲)의 무서운 장력이 날아와 상복괴인의 내부를
순간적으로 으스러뜨린 것이었다.
"지옥… 참(地獄斬)!"
쓰러진 상복괴인의 등판에 새겨진 청색 장인을 일별한 귀모의 전신으로 격
렬한 파문이 일었다.
그 때였다.
"네가… 노조(老祖)의 숨겨 놓은 제자인 유령귀모(幽靈鬼母)냐?"
뚜벅…!
우울한 음성과 함께 어둠 속에서 한 명의 훤칠한 흑의복면인이 걸어나왔다.
눈빛이 아주 파란 자였는데 그의 전신에서는 무어라 형언키 어려운 음습한
마기류(魔氣流)가 흐르고 있었다.
그가 나타난 직후,
"지…지옥천존!"
"피하십시오 귀모님!"
츠- 파- 팟!
쐐애액!
상복괴인들은 경악성을 토하면서도 거의 반사적으로 신형을 날려 지옥천존
과 귀모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빠득! 죽어랏, 배신자!"
"카앗! 절로 귀왕(鬼王)의 영토에 나타나다니…!"
콰- 쾅!
빠- 지지직!
그와 함께 상복괴인들의 손 끝에서 수십 줄기의 시퍼런 인광이 일어 지옥천
존이 전신을 강타해 들어갔다. 그 기세는 가히 수만 근의 거암을 산산이 바
스러뜨릴 만큼 가공한 것이었다.
상복괴인들… 그들은 이미 하나하나가 일문의 종사만큼이나 막강한 자들이
었다.
그러나,
스- 윽!
지옥천존은 힐끗 그들을 바라보며 귀찮다는 듯이 슬쩍 소맷자락을 휘둘렀
다.
"캐- 액!"
"크아아악-!"
퍼- 억!
후드득…
다음 순간 별다른 소리도… 아무런 기세도 없었거늘 십이 인의 상복괴인들
중 다섯이 무형의 강기벽에 가슴이 으깨어져 십이 장 밖으로 날아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수마황(阿修魔皇)님의 무형…파멸마강(無形破滅魔剛)이다. 물러서랏!"
쐐- 액!
지켜보던 유령귀모는 경악성을 토하며 벼락같이 살아남은 상복괴인들의 앞
을 가로막았다. 그와 함께 그녀는 연약한 섬섬옥수를 열십자로 교차시키며
지옥천존에게로 밀어내었다.
피차 양인의 손 끝에서는 아무런 파공성도, 기척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허나, 다음 순간,
콰드득! 우르르- 르릉!
고막을 터뜨린 것 같은 굉렬한 굉음이 터져올랐다.
꽈르르르…! 쩌___ 쩌억!
지면은 대지진을 만난 듯 뒤흔들리고 굉렬한 강풍의 소용돌이가 방원 일백
장 이내를 감싸오르며 휘돌아갔다.
그 미증유의 잠력의 대폭풍에 휘말린 백 장 내의 모든 수목과 암석들은 산
산이 으깨어져 한 줌의 가루가 되어 흩날려 갔으니…
실로 가공할 장면이었다.

"…!"
파라라- 락!
그 휘몰아치는 돌풍 속에서 지옥천존은 흑포자락을 찢어질 듯 펄럭이며 우
뚝 선 채 전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미 사방의 어디에도 유령귀모와 그 수
하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 지옥천존의 두 발은 발목까지 깊숙이
지면을 파고들어 있었다.
(역시… 노조(老祖)답군! 나의 천 년 내공이 담긴 일격을 정면으로 받아내
고도 무사할 또 한 명의 제자를 길러냈다니…!)
지옥천존은 소리없이 신음을 흘렸다.
이어 그는 씁쓸한 신색으로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때,
"왜… 그 계집이 귀왕윤회대진으로 피신하는 것을 막지 않았소 교주?"
스읏!
한 줄기 중후한 음성이 울림과 함께 한 명, 초로의 인물이 지옥천존의 등
뒤로 나타났다.
나이는 오십대 중반쯤 돼 있을까? 일신을 고풍스런 자포(紫袍)로 감쌌고,
네모 반듯한 중후한 얼굴에 눈꼬리가 긴 봉목의 인물이 있다. 일견키에도
아주 심기가 깊고 신중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귀왕윤회대진(鬼王輪廻大陣)은 안쪽에서 진을 해체하기 전에는… 밖으로부
터는 깰 수 없는 것이오 부교주!"
지옥천존은 여전히 야천을 응시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의 말에 자포중년인의 눈가로 놀람의 빛이 스쳤다.
"놀랍… 습니다! 그 찰나의 순간에 유령귀모의 수하들 중에 아(我)측의 간
세를 섞어 들여보내셨다니… 물론 그 정도의 능력을 지닌 간세라면… 막하
의 회의사신(灰衣死神) 외에는 달리 없겠지요?"
자포인은 경탄 어린 탄성을 토했다.
하나 지옥천존의 신색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한 눈에 본좌가 보낸 간세의 정체까지 알아내다니… 역시 부교주는 천뇌마
야(千腦魔爺)라 불리워도 조금의 손색도 없소!"
지옥천존의 칭찬하는 말투도 여전히 음울한 것이었다.
"과찬이시오, 교주!"
천뇌마야라 불리운 자포중년인은 고소를 지으며 지옥천존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헌데 지옥천존의 등 뒤를 바라보는 천뇌마야의 시선으로 언뜻 섬뜩
한 냉기가 스쳐가는 것이 아닌가?
(후후…! 물론 본좌는 똑똑하오! 교주가 아는 것보다 최소한 다섯 배 이상
…)
천뇌마야의 눈엔 한 줄기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결코 이인자가 될 수 없
는, 정상을 바라는 자 만이 가질 수 있는 야망의 불꽃이었다.
(어서… 환우의 패자가 되시오. 그 직후 나 음천세(陰千世)가 교주의 기업
을 감사히 접수해 줄 것이니…)
천뇌마야의 표정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다만… 그의 두 눈만이 차갑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하늘 밖의 하늘이랄까?
환우제일의 대효웅인 지옥천존! 그의 그늘 속에는 또 다른 야망의 불꽃이
은밀히 타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옥천존은 내심을 읽을 수 없는 깊은 눈빛으로 유
령귀모 등이 사라진 북망산의 북단을 주시하고 있었다.
수많은 무덤 그림자의 저편…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하나의 탑그림자가
음산하게 떠올라 있었다.
천뇌마야란 자의 시선도 어느덧 그것을 주시하고 있었다.

-천뇌마야(千腦魔爺) 음천세!

지옥마교의 부교주라는 이 인물… 주목해 볼 가치가 충분한 인물이었다.


∑ 제 19 장 신비(神秘)의 인물(人物), 치우노조(痴愚老祖)

북망산(北邙山)의 서천(西天),
구워어억!
문득 어두운 밤하늘을 은은하게 떨어 울리는 웅혼한 용(龍)의 울음소리가
있었다.
콰아아…!
야천(夜天)을 가르며 하나의 괴조가 육중한 동체를 드러낸 것은 순간적인
일이었다. 괴조는 한 번의 날개짓으로 일천 장을 날아들고 있었다.

-수호익룡(守護翼龍)!

그렇다. 그것은 바로 남해 잠마월맹의 수호영물인 수호익룡이었다.


콰드득…! 우르르르!
수호익룡은 빠르게 북망산의 서쪽 구릉으로 날아 내려가고 있었다.
"천왕(天王)! 왜 이래? 무얼 발견하기라도 한 것이냐?"
문득 수호익룡의 등에서 짜증스럽다는 듯한 소년의 음성이 들려왔다.
물론 그는 철운비였다.
철운비는 검미를 찌푸린 채 급강하하는 수호익룡의 목에 매인 대라철삭(大
羅鐵索)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런 철운비의 등 뒤에는 한 명의 훤칠한 체격의 적포여전사 차림의 여인이
한 팔로 철운비의 허리를 감고, 한 손으로 어린 사내아이를 안은 채 꼭 붙
어 있었다.

-철사신녀(鐵獅神女) 적아황!

적포여전사는 바로 그녀였다. 그리고, 그녀의 품에 안겨 있는 사내아이는


북산 사자철림(獅子鐵林)의 어린 후계자인 막사후였다.
철운비는 약속대로 철사신녀 적아황과 막사후를 북산의 사자철림으로 데려
다 주려 북상중이었다.
헌데, 이 북망산의 상공을 지날 때 느닷없이 수호익룡이 제멋대로 하강하기
시작한 것이다.

구워어억!
그 사이 수호익룡은 하나의 절곡을 향해 유성같이 날아내렸다.
(피비린내…!)
철운비는 문득 절곡으로부터 역겨운 피비린내 섞인 음풍이 솟구쳐 올라오는
것을 느끼고 흠칫했다.
"되었다 천왕! 이쯤에서 멈추어라!"
철컹!
철운비는 쥐고 있던 대라철삭을 한 차례 세차게 흔들며 수호익룡에게 명령
했다.
구워어억!
콰드드득!
순간 절곡을 향해 쏘아내려 가던 수호익룡은 급격히 반동하여 허공에 멈추
었다.
(저 아래에서 무슨 일인가 벌어진 모양인데…!)
츠- 읏!
철운비는 수호익룡 등 위에 우뚝 선 채 어둠에 뒤덮인 절곡을 내려다 보았
다.
"저는… 어찌할까요?"
그런 철운비를 보며 적아황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녀는 저 북산 사
자철림의 제일여전사다. 그녀 역시 절곡으로부터 올라오는 음풍 속에 피비
린내가 섞여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사후에게 저 아래에서 일어난 일을 보여 주고 싶지 않으니 나 혼자 갔다
오겠어!"
철운비가 돌아서며 말했다.
"아빠빠…!"
그러자 적아황의 품에 안겨 있던 막사후가 해맑게 웃으며 철운비에게 안기
려고 사지를 바둥거렸다.
막사후의 귀여운 모습에 철운비는 절로 미소를 지었다.
"안 돼! 아저씨는 지금 사후와 놀아 줄 수 없으니 고모와 함께 있어라!"
철운비는 포동포동한 막사후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천왕이 조용한 곳에 데려다 줄 테니 그곳에서 잠시 쉬며 기다리도록…!"
스- 윽! 화르륵!
철운비는 이어 적아황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에 주저없이 까마득한 절
곡으로 뛰어 내렸다.
"조심…!"
적아황이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는 사이 이미 철운비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파묻혀 버린 뒤였다.
적아황은 하얘진 표정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쁜… 자식! 나를 이렇게 놀라게 하다니…!"
구워어억!
콰아아…!
적아황이 한숨을 쉴때 수호익룡은 다시 커다란 날개를 휘저어 암천으로 떠
올라갔다.

절곡-!
그곳에는 북망산의 다른 곳과 다름없이 온통 무덤들로 뒤덮여 있었다. 지난
여름 장마에 무너진 것인지 여기저기 무덤들이 파헤쳐져 있었고 훼손된 무
덤에서는 썩은 관목과 허연 백골들이 삐져 나와 있어 섬뜩한 분위기를 풍겼
다.
"지독… 한데!"
철운비는 그 파헤쳐진 무덤들 사이에 우뚝 선 채 검미를 찌푸리고 있었다.
그의 발치에는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끔찍한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시체들… 다섯 구의 끔찍하고 기이한 시체들이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끔찍하다는 것은 시체들의 두개골이 무엇인가에 으스러져 있다는 것이고,
반면 기이하다는 것은 그 시신들이 바람 빠진 풍선을 연상시키듯 말라 비틀
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마치 물기를 모두 증발시킨 물고기같이 죽어 있는 다섯 구의 시신들… 심지
어 으스러진 두개골에서 흘러나온 희뿌연 뇌수까지도 푸석푸석한 먼지같이
메말라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자들은… 몸 안의 정기란 정기는 모두 말라붙어 죽어 버렸다! 이것은
대체 어찌된 일인가?)
철운비는 시신들을 일별하자 해연히 놀라며 유심히 시선을 던졌다.
시체가 된 오 인은 모두 하얀 상복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들의 피부는 한결
같이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철운비는 한눈에 그 자들이 일종의 사악한 마공을 연마했음을 알아보았다.

<귀(鬼)>

시체들이 걸치고 있는 상복의 소맷자락에는 그런 글씨가 수놓여져 있었다.


철운비는 검미를 모으며 신형을 일으켰다.
"정말 기이한 현상이군! 누가 어떤 수법으로 이 자들을 죽인 것일까?"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헌데, 그 때였다.
"흐흐! 그게 그렇게도 궁금한가, 애송이?"
돌연 철운비의 등 뒤로 괴악스런 노인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
철운비는 깜짝 놀랐다. 꿈에도 하늘 아래에서 자신의 이목을 속이고 바로
지척에까지 접근할 수 있는 자가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그였기에 그
놀라움은 자못 큰 것이었다.
철운비는 등 뒤로 서늘한 감을 느끼며 신형을 돌렸다. 그런 그의 삼 장 앞
에 한 명의 괴인이 쓰러진 비석 위에 걸터앉아 철운비를 바라보고 있었으니

(헛!)
그 인물을 보는 순간 철운비는 내심 헛바람을 삼키며 비실비실한 걸음으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것은… 그 인물의 모습이 너무도 끔찍했기 때문이다.
먼저 이 괴인은 한 팔이 어깻죽지부터 잘려져 나간 독비인(獨臂人)이었다.
게다가 그의 전신은 불에 데인 듯 끔찍한 화상(火傷) 자욱으로 뒤덮여 있었
다.
검붉게 녹아내린 피부, 한 올의 터럭도 없는 머리… 그것은 도저히 생자의
모습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노인에게 살이 있다는 흔적을 보이는 것은 한 쌍의 눈뿐이었다.
츠으…!
무참히 녹아 버린 외양과는 달리 노인의 두 눈 만은 깊이를 추측할 수 없는
푸르스름한 빛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뻑… 뻐… 억!
괴노인은 남은 한 손으로 연신 담뱃대를 빨고 있었다. 그 때마다 담뱃대 끝
에선 뻘건 불빛이 일어나 어둠 속으로 명멸해 가고 있었다.
철운비가 놀라고 있을 때,
"끌끌…! 젊은 놈의 간이 콩알보다도 작군! 노부의 행색이 좀 남다르다고
그렇게 놀라다니…"
노인은 혀를 차며 철운비를 바라보았다.
(조금… 남다르다고?)
철운비는 어이가 없었다.
(귀신이라도 당신을 보면 놀라 까무라칠걸!)
그는 괴노인의 말에 고소를 머금고 말았다.
그 덕에 그의 놀란 가슴은 차츰 진정되고 있었다.
"노인장은… 누구십니까?"
철운비는 노인의 안색을 살피며 말을 꺼냈다.
"버릇이 없는 놈이로구나! 제 소개는 않고 늙은이보고 누구냐고 묻다니…!"
탁…! 탁…!
순간 괴노인은 담뱃대로 비석을 두들기며 느닷없이 호통을 쳤다.
철운비는 그의 꾸중에 머쓱한 표정으로 얼른 포권을 취했다.
"소인은… 운비(雲飛)! 철… 운비라고 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철… 운비? 네가 철가(鐵家)란 말이냐?"
괴노인의 눈가로 한 줄기 경이의 빛이 스쳐갔다.
철운비는 그런 그의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내가 철씨란 것에 저리 놀라다니… 이 노인은 혹시 아버님을 알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
철운비의 가슴 저 깊은 곳에서는 의문의 기운이 구름처럼 솟아 올랐다. 허
나, 그는 결코 그것을 내색지 않았다.
"네 녀석의 이름을 알았으니 내 소개도 해야지? 노부는 너무 오래 살아 본
명은 잊었다. 그래서 최근에 새로운 이름을 하나 지었는데… 치우… 노조
(痴愚老祖)가 그것인데… 어떠냐?"
그때 괴노인은 둔누을 야릇하게 빛내며 말했다.
"치우… 노조요?"
철운비는 피식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치우(痴愚)!
그것은 곧 어리석고 모자란다는 뜻이 아닌가?
철운비는 노인이 자신의 본래 신분을 알리고 싶어하지 않음을 깨닫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옆으로 물러서며 예의 시신들을 가리켰다.
"그런데… 노인장께서는 저들을 누가 죽였는지 아십니까?"
치우노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물론… 알지! 저 놈들은 노부가 보는 앞에서 죽었으니까!"
그의 말에 철운비의 검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노인장은 저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계셨단 말입니까?"
철운비가 비난조로 말했으나 치우노조는 어디까지나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흉수는 아주 무서운 마녀였다. 만일 노부가 저 놈들을 구하려고 했으면 노
부마저 그 마녀의 손에 정기를 몽땅 뺏앗겨 저 놈들 꼴이 되었을 것이네!"
괴노인의 말에 철운비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도저히 그 깊이를 알 수 없
는 내공의 소유자인 이 독비괴노인이 감당할 수 없는 상대가 있다는 것이
언뜻 믿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그 장본인이 사내도 아닌 여자라는 것이 아
닌가?
경악하던 철운비는 곧 정신을 추스르며 되물었다.
"그럼… 이들을 죽인 자가 계집이었단 말입니까?"
치우노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 계집은 마치 유령같이 나타나 저 놈들의 머리통을 박살냈는데
너무 촉망중이라 어떻게 생겼는지도 제대로 보지 못했지! 노부가 본 것은
다만 그 계집의 두 손이 눈같이 희었다는 것 뿐이었어."
"소수… 마공(素手魔功)?"
철운비는 경악의 표정으로 침음성을 발했다.
이어, 그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시신들의 사인을 재확인했다.
철운비는 그제서야 말라 비틀어진 시체들이 사인을 알아낼 수 있었다. 다섯
명의 상복 괴인들은 바로 배교의 소수마공에 격살된 것이었다.

-소수마공(素手魔功)!

저 배교(拜敎)의 사황쌍려(邪皇雙麗) 중 소수여황이 남긴 저주마공! 소수마


공이 극심에 이르면 순간적으로 인간의 내부에 있는 모든 정기를 흡수해 버
릴 수 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물론, 그 정도의 경지에 이르면 소수마공을 익힌 자는 이미 인성(人性)을
상실해 버린 상태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으음…!"
철운비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을 흘렀다.
(하늘 아래 소수마공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나와 사황녀 수운월… 그 분 정도
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란 말인가?)
철운비의 뇌리는 얽힌 실타래처럼 혼란스러워졌다.
이 년 전, 사황녀 수운월은 소수마공이 적힌 소수마경을 자신에게 주고 죽
어가지 않았던가? 따라서 이 지상 위에 소수마공을 알고 있는 자는 자신뿐
이라 생각했던 철운비였다.
헌데, 누군가가 그 소수마공으로 살인을 한 것이다. 그것도 초극의 화후에
이른 소수마공으로…
(흠…! 요놈은 보면 볼수록 신비한 데가 많은데…)
치우노조는 연신 담배를 빨며 혼란스런 표정으로 철운비를 주시하고 있었
다.
(철(鐵)씨 성에… 노부의 사랑하는 딸을 닮은 외모… 거기에 배교비전의 소
수마공까지 알고 있다니…!)
일순 노인의 눈빛이 아주 강하게 증폭되었다.
그때, 철운비가 고개를 번쩍 치켜들며 치우노조에게 물음을 던졌다.
"그 여인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 마녀(魔女)는 이들을 순간적으로 몰살시키고 이놈들이 호위하던 한 명
어린 놈을 쫓아갔다."
"이들이 누군가를 호위하고 있었습니까?"
치우노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왕(鬼王)의 초인(超人)이라던가 무언가… 하는 놈인데… 아마 이미 그
마녀에게 잡혔을 것이야!"
치우노조의 말이 여기에 이를 때였다.
"호호호홋!"
돌연 서북쪽에서 찌르는 듯한 여인의 교소가 울려 퍼지는 것이 아닌가? 그
것은 아주 요악한 사기가 물씬 배여 있는 웃음이었다.
순간 철운비의 안색이 일변했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파- 앗!
이어 그는 즉시 지면을 박차며 여인의 교소가 들려온 서북쪽의 능선을 날아
넘어갔다.
"허허… 성질이 급한 놈이로군! 제 아비만큼이나…"
치우노조는 철운비가 사라진 복쪽을 보며 혀를 찼다.
헌데 이상한 일이 아닌가? 노인은 마치 철운비의 친부인 고독패왕을 아는
듯이 말하지 않은가? 모를 일이었다.

"귀모(鬼母)… 그 아이는 아직도 사람 보는 눈이 모자라는군! 끌끌… 전능


기환전(全能奇幻殿)의 전능환룡(全能幻龍) 음세룡(陰世龍) 정도를 천년귀왕
의 재목으로 선택하다니… 철운비라는 저 어린 놈이라면 몰라도…"
치우노조는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섯 구의 시신쪽으로 다가갔다.
"애통하구나! 너희들의 충정은 결국 헛것이 되고 말았으니… 오대귀왕(五大
鬼王)!"
그는 시체들을 내려보며 한숨 섞인 중얼거림을 토했다.
헌데, 오대… 귀왕이라니…?
그렇다면 이 시체가 된 다섯 괴인이 바로 저 유령귀모란 여인이 기다리던
오대귀왕이란 말인가?
주르르…!
치우노조의 흉측한 볼 위로 두 줄기의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린다. 온갖 회
한이 담긴 눈물이었다.
노인… 그는 대체 누구이길래 오대귀왕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가? 알 수 없
는 일이었다.

밤(夜).
음습한 북망산의 밤은 점점 깊어가고 있었다. 과연 이 밤에 또 어떤 괴사가
벌어질 것인지…!

북망산의 어느 절벽,
"으… 으! 아… 안 돼! 다가오지 마라!"
한 명의 소년이 절벽을 등진 채 공포로 절율하고 있었다. 나이가 십 칠팔
세쯤 되었을까 한 영준한 미소년이었다. 하지만 영활하고 음침한 눈빛은 그
의 성격이 아주 교활하고 영악함을 보여 주고 있었다.
지금 그 소년은 공포 어린 시선으로 전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둠 속,
스으…!
한 쌍의 새하얀 손(素手)이 스물스물 움직이며 소년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
다.
어둠 속에 떠 있는 새하얀 손, 그것은… 너무나도 공포스러워 소년의 전신
은 뻣뻣하게 굳어져 있었다.
"호호… 호!"
파- 앗!
문득 허공에 뜬 소수(素手)의 뒤쪽에서 요악스런 웃음이 터지며 새하얀 소
수는 마침내 소년의 목을 움켜 쥐었다.
"캐- 액!"
당연한 결과로 소년이 두 눈이 튀어나올 듯이 부릅떠지고… 숨통이 넘어가
는 듯한 비명이 사위를 울린 것은 순간적인 일이었다.
빠- 지지직! 츠츠츠… 츳…!
놀랍게도 하얀 손에 목이 쥐켜진 미소년의 전신 피부가 급격히 쭈그러 들었
다. 그것은 소년의 순양지정(純陽之精)이 급격히 체외로 빠져나가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삽시간에 소년의 피부는 노인의 그것처럼 말라 비틀어졌다. 부릅떠진 소년
의 눈은 급격히 생기를 소실해 가고 있었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멈… 췄!"
돌연 사나운 폭갈이 밤하늘을 뒤흔들었다.
피- 잉!
이어 한 명의 폐포소년이 질풍같이 절벽을 향해 폭사해 드는 것이 아닌가?
그는 바로 철운비였다.
절벽으로 날아들던 철운비의 눈가로 우선 비쳐든 것은 한 명의 검은 옷을
걸친 산발한 여인이 예의 소년의 이마를 움켜쥐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여인은 전신을 칠흑같이 검은 흑의로 감싸고 있었다. 그 때문에 흡사 한
쌍의 소수만이 암흑 속에 둥실 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 일으키고 있었
다.
(급… 하다!)
철운비는 한눈에 예의 미소년이 이미 죽기 일보직전의 상태에 놓여 있음을
직감했다.
"요… 악한 것! 잠마(潛魔)… 폭풍참(暴風斬)!"
철운비는 질풍같이 여인의 배심으로 걸쳐 들며 일장을 후려쳐 갔다.
콰- 르르… 릉!
그의 손 끝에서 폭풍같은 잠경이 폭발하듯 일며 여인의 등으로 작렬했다.

-잠마폭풍참(潛魔暴風斬)!

남해 잠마혈맥의 최후최강의 마공!


철운비는 현재 그것을 혈마옥잠을 통해 얻어 육성 정도를 연성한 상태였다.
비록, 그 화후가 육성이라 하나 그 위력은 능히 작은 산 하나를 날려보낼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위력을 지녔다. 그 잠마일맥의 마공 잠마폭풍참이
펼쳐진 것이었다.
콰- 아아- 앙!
굉렬한 폭음이 사위를 떨어울리고, 잠마폭풍참의 거대한 역도(力道)가 그대
로 마녀의 등에 작렬했다.
콰드득-!
순간 잠마폭풍참에 휘말린 마녀의 몸은 나뭇잎 같이 튕겨져 옆의 절벽 속으
로 박혀 버렸다.
"끄- 윽…!"
쿵!
순간 예의 소년은 그대로 지면으로 나뒹굴었다.
"이봐! 괜찮은가?"
슷…!
철운비는 급히 소년의 앞으로 날아내리며 상세를 살폈다. 하나 소년은 이미
체내의 모든 정기를 그녀에게 갈취당해 고목같이 말라 비틀어진 상태였다.
"쯧! 굳었군!"
철운비는 혀를 차며 신형을 일으키려다 문득 이채를 발했다.
"이건…?"
예의 소년이 무엇인가를 움켜쥐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것은… 무쇠
로 만든 귀신 형상의 철가면이었다.
철운비는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귀신가면을 집어들었다.
철가면의 안쪽은 강력한 충격에 의해 뭉그러진 상태였고, 그것만큼이나 뭉
그러진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귀왕철면(鬼王鐵面)!

그 아래에는 보다 작게 새겨진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귀왕철면에 영혼이 새겨진 자… 곧, 귀왕대탑과 귀모의 주인이 되리라!>

대충 이런 내용의 글이었다.
(귀왕철면? 이건 무엇에 사용하는 것일까?)
철운비는 고개를 갸웃하며 이리저리 귀왕철면을 뒤집어 보았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콰- 콰쾅!
한 줄기 폭음과 함께 절벽의 일부가 박살나며 돌가루가 분분히 휘날렸다.
그곳은 바로 예의 소수의 마녀가 잠마폭풍참에 튕겨져 박혀들어간 자리였
다.
"호호호- 홋!"
이어 비산하는 사석 속에서 분노 서린 여인의 교성이 떨쳐졌다.
스- 읏!
그와 함께 무너지는 절벽 속에서 하나의 왜영이 유령같이 떠올랐다.
"죽지… 않았다니! 잠마폭풍참에 휘말리고도…!"
철운비는 불신과 경악의 시선으로 왜영을 응시하며 침음성을 흘렸다.
소수마녀는 터럭 하나 다치지 않은 상태였다. 비단 다치지 않았을 뿐 아니
라 그녀가 걸치고 있는 흑의조차 조금의 손상도 없었으니…
철운비는 그제서야 여인이 걸친 흑의가 천잠사(天蠶絲)로 짠 것임을 알았
다.
"나… 아프게 했어! 죽일… 테야!"
피- 이잉!
미녀는 더듬거리는 교갈을 터뜨리며 유령같이 철운비의 앞으로 짓쳐들었다.
"…!"
철운비는 느닷없이 공세에 대경하며 손 끝에 뇌정개벽천강을 극한으로 일으
켰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화라락…!
불어오는 산풍이 마녀의 산발한 머리끝을 허공으로 흩날리고… 머릿털로 가
려졌던 여인의 얼굴이 철운비의 동공으로 확산되어 투영되었다.
"허- 억! 당… 신은…!"
그 순간 드러난 소수마녀의 얼굴을 본 철운비의 두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
다. 놀랍게도 그 마녀의 얼굴은 철운비가 꿈에도 잊지 못할 한 여인의 그것
이었던 것이다.
대체 그녀가 누구이기에 철운비가 그토록 놀라는 것인가?

"어… 머니!"
철운비의 입에서 단말마의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가 망연자실해 있는 찰나,
"호홋! 죽…엇!"
빠-직!
여인의 흑포자락 속에서 분칠을 한 듯 새하얀 섬섬옥수가 벼락같이 튀어나
와 철운비의 가슴을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콰드득…!
"크-흑!"
철운비는 자신의 가슴 일부가 여인의 소수(素手)에 그대로 박살남을 느끼며
뒤로 날아갔다.
쿠- 웅!
철운비는 이십여 장이나 퉁겨져 지면으로 모질게 팽개쳐졌다. 그런 그의 가
슴은 거북의 등껍질같이 쩍쩍 균열되어 있었다.
소수마공(素手魔功)!
그 미증유의 파멸마력(破滅魔力)이 철운비의 모든 호신지력(護身之力)을 산
산이 바스러뜨린 것이었다.
"수운… 월! 당신이었습니까? 소수(素手)의 마녀(魔女)가…?"
철운비는 미약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다가 그대로 차츰 혼절의 나락으로 침잠
되어 갔다.
불신(不信)!
도저히 믿기지 않는 현실(現實)을 도피하듯…

-수운월(水雲月)!

아아… 그랬던 것이다!


소수마녀(素手魔女)는 바로 철운비 자신의 양모(養母)였던 사황녀(邪皇女)
수운월이었던 것이다. 핏덩이인 자신을 친부모의 품에서 유괴해 냈던 원수,
그러나 동시에 그를 지금처럼 길러준 은인이기도 한 애증의 대상…!
이 년 반 전 진회하의 낙월정에서 지옥천존의 손에 죽은 줄 알았던 바로 그
사황녀 수운월이 지금 무서운 마녀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호호…! 죽… 일 테야!"
슷…!
소수마녀… 아니 사황녀 수운월은 살광을 번뜩이며 혼절한 철운비에게로 날
아들었다.
파- 츠으!
그녀의 요악스럽도록 아름다운 두 눈에서는 새파란 사광(邪光)이 폭사되고
있었다.
그런데,
"…!"
철운비의 앞으로 날아내린 수운월의 교구가 돌연 뻣뻣하게 굳어져 갔다.
그녀의 혼미스럽던 봉목으로는 경이의 빛이 스쳐가고… 망연한 그녀의 시선
은 기절해 있는 철운비의 안면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가늘게 잔경련을 일으키는 긴 속눈썹…
이윽고,
"무… 정(無情)! 철무정…"
한숨처럼 새어나오는 이름 하나가 있었다.
수운월은 흡사 실성이라도 한 듯 그 이름을 되뇌이고 있었다. 그녀는 철운
비를 그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마음 속 정인(情人)이던 철무정(鐵無情)으로
착각한 것일까?
헌데,
"철무정… 철무정… 오호호홋!"
피- 이잉!
수운월이 발작하듯 웃어제치며 돌연 지면을 박차고 허공으로 비상(飛上)해
올랐다.
"그를… 죽였어! 내 손으로… 호호홋! 철무정! 그를…"
광기(狂氣)마저 서린 그녀의 교소는 삽시간에 아득히 멀어져 갔다.
순식간에 하나의 점(点)으로 화(火)해가는 사황녀(邪皇女) 수운월… 그녀가
어떻게 이리 변했단 말인가? 정녕 모를 일이었다.

수운월이 사라진 직후,


"소수… 마녀가 이곳에서 누군가를 습격한 듯한데…"
스- 읏!
음울한 음성과 함께 하나의 왜소한 인영이 장내로 날아내렸다.
그 인영은 새하얀 소복으로 가녀린 교구를 감싼 창백한 안색의 미부(美婦)
였는데 기이하게도 그녀의 눈빛은 짙은 녹색(綠色)이었다.

-유령귀모(幽靈鬼母)!

여인은… 바로 그녀였다.
북망산의 전설인 귀왕대탑의 안주인인…!
"저 아이로구나!"
유령귀모는 장내로 날아내린 후 쓰러져 있는 철운비를 발견하고는 급히 다
가섰다.
직후,
"이… 이것은…!"
그녀는 철운비의 한 손에 귀왕철면(鬼王鐵面)이 쥐여 있는 것을 발견하며
안색을 일변시켰다.
"귀왕… 초인(鬼王超人)!"
유령귀모는 경악성으로 토하며 철운비의 상세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녀는
철운비를 귀왕초인으로 착각한 것이었다.
"죽지… 않았다니… 소수마공에 정면으로 격중당하고도…!"
유령귀모는 경이의 시선으로 철운비를 내려다 보았다.
비록 핏기없이 창백하나 요악스럽도록 아름다운 철운비의 용모! 그것을 직
시하는 순간 여인의 숨결은 어떤 야릇한 열기를 느끼며 거칠어질 수밖에 없
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서… 둘러야 한다! 즉사하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두면… 일각이 못 가 죽고
말 것이다!"
츠- 팟!
다급한 옥음을 토하며 이내 유령귀모는 철운비를 끼고는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장내는 다시금 을씨년스런 적막감에 휩싸이고…
수운월에게 순양지정을 갈취당한 진짜 귀왕초인의 비쩍 마른 시체만이 쓸쓸
히 나뒹굴고 있었다.
∑ 제 20 장 유령천인총(幽靈千人塚)의 전설(傳說)

"우… 우…!"
"크아악!"
콰- 콰콰- 쾅!
북망산의 적막은 처절한 비명과 섬뜩한 대마후(大魔吼)에 의해 갈가리 찢겨
지고 있었다.

<귀왕대탑(鬼王大塔).>

신비의 장막에 겹겹이 싸여 있던 천년귀역(千年鬼域)! 바로 그것이 지금 혈


풍(血風)에 휘말리고 있는 것이었다.
본래… 귀왕대탑은 한 가지의 무서운 천고절진(千古絶陣)으로 방호되어 있
었다.

-귀왕윤회대진(鬼王輪廻大陣)!

하늘 아래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진세(陣勢)라는 고금오대병진(古今五大兵


陣) 중의 하나가 그것이었다.
헌데, 그 귀왕윤회대진의 일부가 돌연… 내부로부터 와해된 것이니…
이유는 지극히 간단했다. 누군가가 진세의 내부에서 귀왕윤회대진의 중추에
해당하는 것 중 일부를 손상시켰기 때문이었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여하튼… 일단 귀왕윤회대진에 틈이 생
기자 외곽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지옥마교(地獄魔敎)의 무리들이 물
밀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일천인(一千人)…
광기(狂氣) 서린 시퍼런 마안(魔眼)을 희번뜩이며 짓쳐드는 무리(群)… 그
자들은 흡사 흉신악살같이 귀왕대탑의 문하인들을 쓰러뜨리며 쇄도해 들어
왔다.

-지옥전사(地獄戰士)!

그 일천 명에 달하는 흑의인들은 지옥전사라 불리는 지옥마교(地獄魔敎) 최


강의 전사(戰士)들이었다.
지옥전사들은 지옥천존이 친히 조련시킨 마인(魔人)들이었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지옥천존은 지옥전사들 개개인에게 일종의 마약(痲藥)을 복용시켜
무서운 마물(魔物)로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그 마약은 인성(人性)을 말살시키고 인간의 내부에 응축된 잠력(潛力)을 일
시에 격발시키는 작용(作用)을 지닌 악물(惡物)이었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나 지옥전사들은 터무니 없을 정도로 막강하고 흉폭했
다. 개개인이 무려 오갑자(五甲子)에 육박하는 내공을 지닌 무서운 살인 기
계들이 바로 지옥전사들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 공포의 살인마물들이 한둘도 아니고 무려 일천(一千)에 달
하는 숫자로 귀왕대탑을 포위하며 육박해 오고 있는 것이었다.
콰-드드득! 쿠쿠쿠- 쿠쿠!
귀왕윤회대진은 와해직전의 상태로 치달리고…
지금 귀왕대탑을 일천 명의 지옥전사(地獄戰士)들로부터 지켜줄 것은 그 어
떤 곳에서도, 그 어떠한 인물로도 불가능해 보였으니…
천년(千年)의 귀역(鬼域)… 귀왕대탑(鬼王大塔)!
과연 그 신비(神秘)의 전설(傳說)에도 종말(終末)은 오는가…?

귀왕대탑의 지하에는 세인(世人)들이 감히 상상도 못할 광대한 지하미로(地


下迷路)가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그 미로는 고대(古代) 어느 제왕(帝王)이 자신의 무덤이 도굴꾼들에게 도굴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든 미로였다.
이름하여 유령미궁(幽靈迷宮)!
한 번 빠지면 유령(幽靈)이 되어서야 빠져나올 수 있다는 절지가 그곳이다.
귀왕대탑!
그것은 바로 유령미궁(幽靈迷宮)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실상 귀왕대탑은 유령미궁을 속이기 위한 눈속임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
만 귀왕대탑 밑에 유령미궁이 숨겨져 있음을 아는 자는 귀왕문하(鬼王門下)
들 중에도 그리 많지 않았다.
헌데…

"흐음…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문득 한 줄기 음울한 음성이 유령미궁의 침잠한 적막을 깨뜨렸다.
스으…!
이어 한 줄기 회색 인영이 유령미궁의 어느 미로(迷路) 끝으로 나타났다.
회색(灰色)!
그 인물은 머리 끝에서부터 발 끝까지 온통 회색인 인물이었다. 심지어는
걸치고 있는 의복뿐만이 아니라 머릿결, 눈썹, 심지어 음산하게 번뜩이는
가늘게 찢어진 두 눈까지 회색인 인물이었다.
그 회색인(灰色人)의 옆구리에는 동영(東瀛) 은밀종(隱密宗)의 무사들이 쓰
는 길고 짧은 한 쌍 기형도(奇形刀)가 찔러져 있었다.
누구인가?

-회의사신(灰衣死神) 잔독(殘毒)!

바로 그 자였다. 지옥천존의 세 그림자 중 하나라는 좌수도법(左手刀法)의


달인(達人)인…!
귀왕대탑을 방호하던 귀왕윤회대진을 파해시킨 장본인이 그임은 주지의 사
실이었다. 지옥천존은 유령귀모를 습격하여 그 와중에 잔독을 귀왕대진 안
으로 침투시켰었다.
헌데… 귀왕대탑을 공격하고 있어야 할 그가 어떻게 이 유령마궁에 나타난
것일까?
"훗훗, 귀왕윤회대진을 깨뜨려 주었으니 천존(天尊)의 명령은 수행한 셈이
다. 하지만 아직 내게는 한 가지 더 할 일이 있다!"
스- 읏!
회의사신은 음산하게 웃으며 미로로 전진해 갔다.
미로의 바닥에는 두터운 먼지가 깔려 있었으나 그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그 위로 지나갔다. 그것은 회의사신이 최고 수준의 잠입추종술을 지녔기 때
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미궁(迷宮)의 어딘가에는 천년시균(千年屍菌)이 자라고 있다. 내게는…
그것이 필요하다!"
스스스…!
회의사신은 독사같이 가는 눈을 번뜩이며 전진해 갔다. 일견 느린 듯하지만
그의 신형은 흐르는 안개같이 질주해 가고 있었다.
헌데… 천년시균(千年屍菌)이라니! 그것이 정말 이 유령미궁 어딘가에 있단
말인가?

-천년시균(千年屍菌)!

그것은 일종의 버섯(芝菌)이다.


하지만 그것은 보통의 버섯들과는 아주 다른 장소에서 아주 다른 물질을 영
양분으로 하여 자란다.
본시 사람이 죽으면 그가 평생 쌓은 단기(丹氣)나 정기(精氣)만은 한 군데
로 모여 결정을 이룬다고 한다. 그것이 시정(屍精)이라고 하는데 무림인이
죽으면 생시 그의 내공이 그 시정으로 응집된다고 한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 시정이 지균(芝菌)의 씨앗을 만나면 시균(屍菌)이 된
다고 한다. 천년시균은 그 시균이 천 년 동안 수많은 시정(屍精)을 흡수하
며 자란 것을 말한다. 전설 속에만 나오는 영물이 바로 천년시균인 것이다!
만일 그것을 무림인이 복용하면 십갑자 내공(十甲子內功)과 함께 유령청명
강살(幽靈淸冥剛煞)이라는 무서운 마공(魔功)을 얻게 된다고 한다.
그 천년시균이 정녕 이 유령미궁의 어디에 있단 말인가? 혹여 귀왕대탑에서
자라고 있다는 천년귀왕(千年鬼王)이란 것은 그 천년시균(千年屍菌)과 관계
가 있는 것이 아닐까?

"…!"
회의사신은 퍼뜩 걸음을 멈추고 전면을 주시했다.
그는 지금 아주 습습관 막다른 밀로에 이르러 있었다. 사면의 벽은 습기를
잔뜩 머금은 이끼들로 뒤덮여 있었다.
헌데… 그 이끼들 틈으로 벌겋게 녹이 슨 철문(鐵門)의 잔해가 언뜻 보이는
것이 아닌가?
(제대로… 온 것일까?)
회의사신은 가는 눈을 흥분으로 번뜩이며 녹슨 철문 앞으로 다가섰다. 그
철문에는 다 삭아들어가는 글이 여러 개 적혀 있었다.
회의사신은 조심스레 이끼를 떼어내며 그 글들을 읽어 내려갔다.

<유… 령… 천인…총(幽靈千人塚).>

먼저 그런 글이 눈에 띄었다.
"유령천인종(幽靈千人塚)! 역시 여기가 그 옛날 불사성황(不死聖皇)에 도전
했다가 몰살한 유령천사(幽靈千邪)들의 무덤이군!"
잔독의 숨결이 흥분으로 거칠어졌다. 그는 조심조심 이끼를 떼어가며 철문
에 쓰인 글을 읽어 내려갔다.

-이곳은 천하사도(天下邪道)의 가장 수치스럽고 또한 가장 존엄한 역사가


잠든 곳이다. 무릇 그대가 일천사종(一千邪宗)의 후예라면 감히 범접하여
어지럽히는 일이 없어야 한다.

-분하지만… 불사성황(不死聖皇)은 너무나 강했다. 우리 일천사종(一千邪


宗)의 종사들은 놈의 팔 하나를 잘라내는 대가로 몰살을 당해야만 했다.
-당세에는 우리 유령일천사황(幽靈一千邪皇)이 패했다. 하지만 후세의 싸움
에서는 결코 지지 않으리라. 우리의 심원이 담긴 유령천년검(幽靈千年劍)이
현세하는 날 그 무엇도 유령의 위대한 힘에 대항치 못하리라. 비록 불사성
황(不死聖皇)이 부활한다고 해도…

광기 서린 글들…
그것은 세인들이 알지 못하는 한 가지 아득한 상고시대의 비사를 나타내고
있었다.
천 수백 년 전! 하늘과 땅 아래 존재했던 가장 위대한 무인이 있었다.

<불사… 성황(不死聖皇)!>

고금사대마맥 중에서도 최강으로 통하는 불사마류(不死魔流)! 그 불사마류


의 역사를 통틀어서도 가장 막강했다는 대마종!
그는 대륙(大陸)뿐만 아니라 사해팔황까지 정복하여 불사마류가 하늘 아래
가장 위대함을 보였었다. 수많은 강자, 문파가 그에게 도전했으나 그 누구
도 불사성황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 숱한 도전 도중에 천하일천사종(天下一千邪宗)의 도전도 있었다.

-유령천사(幽靈千邪)!

달리 유령일천사황(幽靈一千邪皇)이라 불리는 일천 명의 사파종주들… 그들


은 유령사황聯(幽靈邪皇聯)이라는 결맹을 맺고 불사성황에 도전했었다.
그러나 도전의 결과는 파멸이었다. 유령천사는 불사성황의 팔 하나를 망가
뜨렸으나 그 대가로 몰살을 당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 무참한 일전으로 사파의 맥은 이백 년 이상 단절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천 년 전, 한 쌍 부부가 우연히 이 유령미궁(幽靈迷宮)의 일부를 발
굴하여 유령천사가 지은 두 권의 비급을 얻게 되었다.

-적목철경(赤目鐵經)!
-소수마경(素手魔經)!

이것은 그들 부부가 얻은 비급으로 각기 유령천사(幽靈千邪)의 절기 중 서


열 십 위 안에 드는 비급들이었다.
그 후 그들 부부는 그 두 권 비급을 바탕으로 배교(拜敎)를 세워 멸절되었
던 사도(邪道)를 부흥시켰었다.
그들이 바로 후일 배교의 시조(始祖)로 불리는 사황쌍려(邪皇雙呂)였다.
잊혀진 전설(傳說)들… 그것이 다 삭아들어가는 철문에 빼곡히 기록되어 있
는 것이다.

(드디어…)
회의사신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이 안쪽에는 유령천사(幽靈千邪)의 시신이 묻혀 있고… 그들의 시정(屍精)
을 먹고 자란 천년시균(千年屍菌)이 있다.)
회의사신은 흥분을 삭이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천년시균만 얻으면… 더 이상 번뇌살황(煩惱殺皇)의 추격을 두려워하지 않
아도 된다.)
스- 읏!
염두를 굴리며 잔독은 왼손을 철문을 향해 내밀었다.
빠지직… 푸스스!
그의 깡마른 좌수 끝에서 무형경력이 일어나 녹슨 철문을 이지러 뜨렸다.
철문의 모서리가 비틀어지며 서서히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스- 읏! 화라락!
어디선가 극히 경미한 파공성이 일어남을 회의사신은 감지했다. 그 파공음
은 아주 미약하여 잔독이 아니었으면 감지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 말고도 어떤 자들이 이 유령천인총의 비밀을 알고 있단 말인가?)
회의사신은 흠칫하며 급히 모든 행동을 중지했다.
이내 그의 예의 파공음이 유령천인총 저편에서 들려오는 것을 알아내었다.
그는 철문의 뜯어진 모서리로 눈을 가져가 유령천인총을 들여다 보았다.
"…!"
그런 그의 몸이 흠칫 경직되었다.
(저… 계집은…!)
회의사신의 가는 두 눈이 놀라움을 담고 유령천인총 안쪽을 노려보았다.

철문의 안쪽은 넓은 지하광장이었다. 천연적인 지하동굴인데 여기저기 인공


이 가해진 흔적이 보였다.
헌데,
해골-! 지하광장 가운데는 수많은 해골들이 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일견하여 천여 구를 헤아리는 해골들이 마치 하나의 산(山)같이 광장 중앙
에 쌓여 있었다.

-유령일천사황(幽靈一千邪皇)!

아아! 그렇다. 그 해골들은 바로 저 유령사황련(幽靈邪皇聯) 일천사종(一千


邪宗)의 시체였다.
불사성황에게 패퇴하여 죽음에 이르게 된 유령천사(幽靈千邪)들은 분하고
분하여 자신들의 유해를 땅에 묻지조차 않았던 것이다.
바로 그 천 년 이전의 대사황들인 유령천사들의 유골이 지금 지하광장에 해
골의 산을 이룬 채 누워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유령천인총의 본모습이었
다.
헌데,
스으… 스으…!
유령천사의 시체로 이루어진 해골산의 가장 높은 곳에서는 무엇인가 푸르스
름한 광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청색의 빛무리…! 그것은 흡사 살아 있는 물체같이 이리저리 요동을 치고
있었다.
언뜻 그 청망(靑芒) 속에서 용(龍)의 형태로 한 물체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
다. 실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회의사신(灰衣死神) 잔독을 놀라게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
의 작은 눈은 지금 막 유령천인총(幽靈千人塚)으로 들어서는 한 명의 여인
을 노려보고 있었다.
본래 잔독이 발견한 철문 저편에는 또 하나의 문이 있었다. 지금 그 문으로
한 명 여인이 총총히 들어서고 있었다.
새하얀 소복, 산발한 검은 머릿결… 백지에 그린 듯 아름답고 창백한 미모
의 여인인데 기이하게 그녀의 한 쌍 봉목은 녹색이었다.
녹안(綠眼)의 여인…
(유… 령… 귀모(幽靈鬼母)!)
회의사신은 찬바람을 들이켰다.
여인… 그녀는 바로 유령귀모였다. 지옥마류(地獄魔流)의 비밀가신(秘密家
臣) 중 한 명인 북방 귀왕대탑의 여왕(女王)-!
그녀가 지금 급한 표정으로 유령천인총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
녀의 옆구리에는 한 명 소년이 죽은 듯이 늘어져 안겨 있었다.
전신 피부가 거북등같이 쩍쩍 갈라진 소년… 물론 그는 소수마공(素手魔功)
에 격중당한 철운비였다.
그리고 유령귀모의 등 뒤로 두 명의 괴인이 따라 들어서고 있었다.
얼굴이 숯같이 검은 노파와 그와 반대로 분을 칠한 듯 새하얀 얼굴의 노인
이 그들이었다.
(귀왕대탑의 전대마인들인 흑백쌍시(黑白雙屍)로군!)
회의사신은 내심 앓는 듯한 신음을 삼켰다.
(치잇! 천년시균을 눈 앞에 놓고도 헛물켜게 생겼지 않은가?)
그는 낭패한 기색이 되었다.
유령귀모가 유령천인총에 나타났음은 그녀의 목적이 회의사신 자신과 같음
을 의미했다.
유령귀모도 천년시균이 필요한 것이다. 아니 그녀는 오래 전부터 천년시균
을 지켜오며 그것을 사용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저 계집은 천년시균을 저 어린 놈에게 복용시킬 작정이군!)
잔독은 철문 틈으로 유령천인총 안을 노려보며 신음을 흘렸다.
그때 유령귀모는 막 철운비를 바닥에 눕히고 있었다.
"소수마공에 정통으로 격중당하고도 아직 살아 있다니… 과연 귀왕초인(鬼
王超人)입니다!"
흑백쌍시가 철운비를 내려다보며 혀를 내둘렀다.
소수마공이 얼마나 무서운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들이다. 헌데 철운비는
그 소수마공에 심장부위를 격중당하고도 죽지 않은 것이다.
비단 즉사하지 않았을 뿐더러 급격히 상세가 호전되고 있었다. 철운비의 몸
안에 내재된 만년혈만(萬年血鰻)의 보혈(寶血)이 손상당한 철운비의 심맥을
빠르게 복구시켜가고 있었다.
그것을 알 리 없는 유령귀모의 녹안으로 당혹의 빛이 배어나왔다.
(이 자는 나의 상상 이상이다!)
철운비를 내려다보며 유령귀모의 숨결이 흐트러졌다.
(전능기환전(全能奇幻殿)이 대륙패왕(大陸覇王)으로 이 자를 길러왔다는 소
문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보기 전에는 믿지 않았는데… 실제는 소문 이
상이었다.)
유령귀모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한숨을 쉬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그 하나는 철운비의 용모가 너무 영준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의 요악스
럽고도 아름다운 모습은 이미 화인(火印)같이 유령귀모의 방심에 새겨진 후
였다.
하지만 그녀를 정말 놀라게 하는 것은 철운비의 자질이 그녀의 상상을 초월
한다는 사실이었다.
지금 그녀는 철운비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전능환룡(全能幻龍) 음세룡(陰世龍).

그는 전능기환전이 감추고 있는 잠룡(潛龍)이었다.


본래 오대무벌 중 하나의 전능기환전에는 세 명의 뛰어난 인재가 있다고 한
다.
이름하여 전능삼영(全能三英)이라 불리는 세 명의 기재(奇才)들!

-음세황(陰世皇).
-음사향(陰麝香).
-음세룡(陰世龍).

바로 이들이었다.
그들은 친남매지간이고 전능기환전의 당대전주 천수제왕(千手帝王)이 그들
의 아버지였다.
전능삼영은 발군의 지혜와 능력을 지녔는데 밑으로 내려갈수록 두 배씩 더
뛰어나다고 한다.
음세황이 뛰어나나 누이동생인 음사향에 미치지 못하고 그 번뇌화 음사향은
또 막내인 음세룡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전능기환전의 어린 잠룡(潛龍)-!
그가 전능환룡 음세룡이었다.
천수제왕은 장차 대륙패왕으로 음세룡을 기르고 있었다.
천수제왕은 아주 심기가 깊은 자였다.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도 대륙의 패자
가 되지 못함을 알고 야심을 안으로 감추어 왔었다.
그러다가 음세룡을 낳았고 그 음세룡에게 자신의 꿈을 걸고 있었다. 그 음
세룡을 귀왕대탑에서 유괴한 것이었다.

유령귀모-
그녀는 지옥천존이 자신의 주인인 지옥노조를 위해한 사건이 발생하자 복수
를 맹세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복수의 도구로 천수제왕의 자랑인 음세룡이
선택된 것이다.
유령귀모는 음세룡에게 천년시균을 복용시켜 지옥천존을 제거하게 할 계획
이었다.
그러나 그 전능환룡 음세룡이 소수마녀, 아니 수운월에 의해 시체가 되었음
을 그녀가 알 리 없었다.

스- 읏!
철운비를 내려다보던 수운월은 선뜻 신형을 날려 해골의 산 위로 올라갔다.
유령천사(幽靈千邪)의 유골 꼭대기…
스으… 스으…!
그곳에서는 푸르스름한 빛에 덮여 하나의 버섯이 자라고 있었다. 일견하여
용(龍)의 형상을 한 버섯이었는데 자세히 보면 그 지균(芝菌)에는 한 쌍의
붉은 뿔과 수염까지 달려 있었다.
거기에다 반투명한 몸에서는 푸른빛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여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이 보였다.
-천년시균(千年屍菌)!

그렇다. 그것이 바로 천년시균이었다.


그 천년시균에는 그 옛날 환우를 주름잡던 일천 명 일대사종들의 내공과 정
기가 고스란히 응집되어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귀왕대탑에서 천 년 간 잠자
고 있다는 천년귀왕(千年鬼王)의 정체였다.
천여 년 전, 지옥마맥(地獄魔脈)의 한 마왕이 우연히 이 유령천인종을 발견
하게 하였다. 그 마종은 유령천인종에게 천년시균이 자라는 것을 발견하자
한 명 가신에게 그것을 지키게 하였다. 그 가신(家臣)이 바로 유령귀모의
선조였던 것이다.
귀왕일맥(鬼王一脈)!
그들은 언젠가 그들의 주인인 지옥마맥을 위해 사용하려고 천년시균을 지켜
온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것을 사용할 때가 온 것이다.

(천년시균에는 지독한 시독(屍毒)이 함유되어 있어 복용한 자를 백치로 만


들고 만다!)
유령귀모의 녹색 봉목이 갈등으로 흔들렸다.
천년시균!
그것은 십갑자의 내공을 주는 대신 그 독성으로 인하여 복용한 자로 백치를
만들고 만다. 그것은 유령귀모만이 아는 비밀이었고 그녀 자신이 직접 천년
시균을 복용 못하는 이유였다.
그 사실이 유령귀모를 갈등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녀의 방심을 처음으로 흔
들어 놓은 사내… 그 철운비에게 천년시균을 복용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지
옥천존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파- 앗!
유령귀모는 입술을 잘근 물며 천년시균을 따내었다.
카- 아앙!
쇳소리를 내는 용음이 일며 용의 형상을 한 지균이 그녀의 손에 들려졌다.
그것은… 유령귀모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바둥거렸다.
아니 유령귀모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나를 용서해라!)
스- 읏!
누구에게 하는지 모든 용서를 빌며 유령귀모는 해골더미 아래로 날아 내렸
다.
그리고는 인사불성이 된 철운비의 입가로 천년시균을 가져갔다.
츠으…!
철운비의 타액이 닿자 천년시균은 순간적으로 한 모금 푸르스름한 액체로
변해 그의 입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
스- 윽!
유령귀모는 철운비의 얼굴에 귀왕혈면을 씌워 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었건만 그녀의 옥용에는 기쁜 빛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녹색 봉목은 슬픈 빛으로 가득했다.
"쌍로(雙老), 귀왕초인을 부탁해요!"
유령귀모는 철운비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깨어나는 즉시… 귀왕섭령대법(鬼王攝靈大法)으로 그의 의지를 장악하도록
해요!"
"귀모… 께서는…!"
흑백쌍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령귀모가 침잠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지옥천존! 그 자가 이미 멀지 않은 곳까지 육박해 왔어요. 나는 그 자를
막으러 가겠어요!"
말을 하며 유령귀모는 몸을 돌렸다.
"조… 조심하십시오!"
"제발… 모험은 하지 마시기를… 곧 귀왕초인이 그 자… 지옥천존을 상대할
것이니…!"
흑백쌍시가 근심 서린 표정으로 간절하게 말했다.
"고마와요, 쌍로!"
유령귀모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였다.
스스스!
이어 그녀는 한 가닥 희뿌연 안개같이 유령천인총을 빠져나갔다.

헌데 유령귀모가 사라진 직후였다.


"으음… 간발의 차이로 천년시균(千年屍菌)을 놓치다니…"
한 소리 스산한 신음소리가 측면에서 들렸다.
"엇! 어떤 놈이냐?"
"누구냐?"
흑백쌍시는 대경하여 홱 돌아섰다.
언제였을까? 유령천인총 한쪽에 한 명의 회의인이 유령같이 서 있었다.
마치 지면에서 솟아난 듯 나타난 회의인… 물론 그는 회의사신(灰衣死神)
잔독이었다.
그는 이제까지 자신을 능가하는 고수인 유령귀모(幽靈鬼母) 때문에 나타나
지 못하고 은신하고 있다가 지금에서야 나타난 것이다.
"흑파(黑婆)! 귀왕초인을 지키시오!"
파- 앗!
흑백쌍시 중 백면(白面)의 노인이 노갈을 지르며 잔독에게 덮쳐들었다.
츠츠츳! 카가강!
노인의 소맷자락 속에서 깡마른 손이 갈고리같이 튀어나와 잔독을 휩쓸어
갔다.
작렬하는 희뿌연 손그림자, 그것은 일종의 부시독장(腐屍毒掌)으로 스치기
만 해도 살은 썩어 문드러지게 한다.
그러나…
"흥! 유령귀모(幽靈鬼母)라면 모르나 늙은이들은 본좌의 상대가 아니다!"
잔독은 냉잔하게 웃으며 슬쩍 좌수(左手)를 기형도의 손잡이에 가져갔다.
번- 쩍!
"크- 아악!"
순간 한 줄기 검망(劍茫)이 믿어지지 않는 속도로 허공을 가르고 그 뒤로
노인의 처절한 비명이 뒤따랐다.
화드득… 퍼퍽!
피비린내가 확 일어나며 두 동강 난 백면 노인의 몸뚱이가 바닥으로 나뒹굴
었다.
실로 믿어지지 않는 쾌검(快劍)이었다. 백면노인도 자신의 몸이 두 동강 난
사실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었다.
"영감…!"
흑백쌍사 중 흑파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죽… 죽이겠다! 동영의 오랑캐놈!"
쩌러렁…! 쐐애액!
이어 흑파는 발악하듯 외치며 떠올라 회의사싱에게 덮쳐들어왔다. 그녀의
덮쳐드는 기세는 마치 아수라의 그것 같았다.
허나… 고수자들의 대결에서 흥분하는 것만큼 치명적인 것은 없다. 하물며
상대는 하늘 아래에서 가장 냉혹한 살수(殺手) 중 한 명 아닌가?
퍼- 억!
재차 검광이 어둠을 가르자 흑파의 허리도 두 동강 나 지면으로 나뒹굴었
다. 삽시에 유령천인총은 역겨운 피비린내로 가득했다.
"으음… 천고기연(千古奇緣)이 이렇게 허망하게 사라지다니…"
철컹…
피비린내 속에서 잔독은 분함을 금치 못하는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칼을 도
갑에 끼워 넣었다.
이어 그는 독사같은 눈을 번뜩이며 누워 있는 철운비에게로 다가갔다. 철운
비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이 살기로 시퍼래졌다. 실로 간발의 차이로 그는
천년시균을 빼앗긴 것이다.
유령귀모!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는 잔독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
다.
저 무서운 지옥천존의 무형파멸마강(無形破滅魔剛)조차 정면으로 받아내던
그녀였다. 잔독의 검이 아무리 빨라도 그녀를 이길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유령귀모가 천년시균을 철운비에게 복용시키는 것을 두 눈 벌
겋게 뜨고 지켜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흑백쌍시를 도륙하고서도 그의 분은 다 풀리지를 않았다.
"바득! 네놈도… 살려두지 않겠다!"
잔독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철운비를 노려보았다.
철운비의 얼굴에는 예의 귀왕철면이 씌워져 있었다. 그 때문에 잔독은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눈 앞에 누워 있는 소년이 이 년 전 조룡탄에서
자신이 좌수도법(左手刀法)의 진전을 건네 준 그 소년임을…
츠- 읏!
잔독은 독기 서린 눈으로 장도(長刀)를 뽑아들었다.
"잘… 가랏! 귀왕초인(鬼王超人)!"
그는 으르렁거리며 장도를 머리 위로 쳐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모든 분노를
실어 철운비의 목을 내리치려고 했다.
헌데 바로 위기일발의 순간,
"후훗… 그래서는 안 되네, 잔독(殘毒)!"
돌연, 한 소리 음울한 웃음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이… 목소리는…!)
잔독의 안색이 홱 변하고 그의 등줄기로 한 줄기 오싹 한기가 스쳤다.
귀에 익은 목소리… 그러나 더욱 그를 놀라게 하는 것은 상대가 전혀 기척
없이 바로 그의 뒤까지 다가왔다는 사실이었다.
최고의 살수(殺手)인 잔독이다. 그런 그의 이목을 속이고 다가설 수 있는
자는 하늘 아래 다섯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부교주(副敎主)?"
문득 잔독의 입에서 불신의 경악성이 터지고,
꽈르르릉!
거의 동시에 잔독의 등판으로 무지막지한 경력(硬力)이 작렬했다.
천 개의 칼날(千刀)같이 파고드는 무서운 파멸지력(破滅之力)! 그것에 제대
로 격중된다면 일장철벽도 종이같이 찢기리라.
"우우웃! 단천일도류(斷天一刀流)!"
피- 이잉! 버- 언쩍!
잔독의 입에서 폭갈이 터지고 그의 신형이 질풍같이 측면으로 휘돌았다.
폭발하는 경력!
뇌전(雷電)보다 오히려 빠른 검광이 그 속에서 뻗쳐나갔다. 가히 하늘 아래
에서 가장 빠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쾌검(快劍)이었다.
그러나,
"크읏!"
퍼-- 퍼퍽!
피무지개가 확 일어나며 환우제일쾌검을 시전한 장본인인 잔독의 신형이 허
공으로 퉁겨져 나갔다.
후두둑…!
부스러진 뼈와 살, 선혈을 흩뿌리며 용케 날아 내리는 잔독… 그의 옆구리
는 무참하게도 뭉텅 으스러져 나가 있었다.
"당… 당신이 왜…!"
지면에 내려선 잔독은 불신과 회의의 눈으로 자신이 섰던 곳을 노려보고 있
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는 자신의 왼쪽 옆구리가 으스러져 내장조각이 흘
러나오는 것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였을까?
화라락!
여전히 인사불성인 철운비의 옆에는 한 명의 자포(紫袍) 중년인이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아주 중후한 인상의 인물인데 입가로 사람 좋아 보이는
온화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상대의 옆구리를 뜯어발겨 놓고도 태연히 웃고 있는 자포인… 그것은 자포
인의 심성이 외양과는 딴판으로 지독히 잔인신랄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
다.
"천뇌… 마야(千腦魔爺)! 천존(天尊)의 적을 구하다니… 미… 쳤군!"
문득 잔독의 입에서 상처 입은 짐승의 그것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천뇌마야(千腦魔爺)!

아아! 바로 그였다. 지옥마교의 부교주이며 제일모사(第一謀師)라는 그 자,


천뇌마야가 나타난 것이다.
헌데 그가… 무엇 때문에 철운비, 아니 귀왕초인을 구한 것인가?
"후훗… 잔독! 과연 명불헌전(名不虛傳)이야!"
천뇌마야가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가슴자락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의 자포의 가슴부위는 길게
찢어져 있었다. 물론 방금 잔독이 펼친 일검에 베어진 것인데 그의 찢긴 장
포자락 속으로 자색의 비늘(鱗)을 엮어 만든 갑주가 드러나 보였다.
그 자색갑주를 본 잔독의 눈꼬리가 놀라움으로 파르르 떨렸다.
"자린… 호천보갑(紫鱗護天寶甲)! 그것은 전능기환전의 천년비보(千年秘寶)
인데…"
번- 쩍!
중얼거리던 잔독의 안색이 홱 변한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그의 안색은 순
식간에 십여 차례나 변했다.
"설… 마! 당신은… 천수제왕(千手帝王)?"
잔독의 입에서 쥐어짜는 듯한 신음이 배어 흘렀다.

-자린호천보갑(紫鱗護天寶甲)!

그것은 오대무벌 중 전능기환전의 비전호신기보였다. 그것은 대대로 전능기


환전의 가주가 호신을 목적으로 입곤 했었다.
오백 년 전, 전능일족의 수장이던 전능기황(全能機皇)은 그 자린호천보갑
덕분에 아수마황의 지옥혈겸 아래에서도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최강의 호신지보-_ 자린호천보갑, 그것을 보는 순간 잔독은 한 가지 무서운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후훗… 자네 추측대로야! 진짜 천뇌마야는 십 몇 년 전에 이미 땅에 묻혔


다네!"
천뇌마야… 아니 그로 환신한 자포인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잔독은 그런 자포인을 보며 처절한 표정이 되었다.
"무… 섭군! 천존이 무서운 줄은 이미 알았지만… 당신네 음씨(陰氏) 일족
은 그보다 더… 웨엑!"
휘청,
잔독은 탄식을 하다가 한 모금 선혈을 토해내었다. 그가 토해낸 선혈 속에
는 으스러진 내장조각까지 점점이 섞여 있었다.
"필경… 그 귀왕초인도… 당신네 일족과 관계있는 자이겠지?"
잔독은 장도를 지팡이삼아 몸을 바로 세우며 고소를 지었다.
자포인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어. 이 녀석은 본좌의 막내아들이지! 하핫… 장래의 대룩패왕(大陸覇
王)이기도 하고 말이야."
자포인은 득의한 듯 껄껄 웃었고 반면 잔독의 얼굴은 또 한 번 이지러졌다.
"전능환룡(全能幻龍) 음세룡(陰世龍)이었군!"
잔독은 부지불식간에 몸을 떨었다. 그는 한 가지 놀라운 비밀을 또 알게 된
것이다.
실상 음세룡은 귀왕문하들에게 납치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납치된 척했을
뿐이었다. 물론 그 목적은 천년시균을 얻어 십갑자의 무적내공(無敵內功)을
지니는 것이었다.
모든 안배는 전능일족의 손 안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 한 가
지… 잔독이나 자포인도 모르는 사실 외에는…

"나의 아들은… 이미 천년시균을 복용하여 십갑자의 내공을 지니게 되었다.


그 경지는 내공만으로는 지옥천존에게도 밀리지 않는 경지이지."
자포인은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후훗… 하지만 내 아들이 지옥천존과 싸우는 일은 없을 것이야. 그 전에
놈은 본좌의 손에 제거될 테니까!"
하늘과 땅을 뒤엎어 버릴 만한 일이 자포인의 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
나왔다.
그런 말을 들으며 잔독은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눈앞의 인물은 이미 십여 년 전에 지옥마교의 제이인자를 제거하고 그 자리
를 차지한 인물이다. 그가 지옥천존을 죽이겠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결
코 아니었다.
가능한 상황이라면 더 이상 놀랄 대상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무섭소! 정녕… 무섭소!"
잔독이 진심으로 감탄성을 토했다. 그의 찬사는 결코 위장이나 가식이 아니
었다.
잔독은 냉잔한 미소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가주는 한 가지 실수를 했소. 그것은… 아직 나를 살려두었다는
사실이오."
퍼- 억!
잔독은 말을 하며 가볍게 뒷발을 굴렀다.
순간 한 무더기 안개가 폭발하듯 일어나 삽시에 그의 신형을 휘감아 버렸
다.
"동영마교(東瀛魔敎)의… 둔신환무(遁身幻霧)라는 잡기(雜技)인가?"
돌발한 사태에도 자포인은 히죽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안개는 이미 엷어졌는데 이미 그 어디에도 잔독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자포인은 그것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 표정이었다.
"후훗… 약속을 하지! 자네는… 북망산을 벗어나지 못하고… 본좌를 다시
보게 될 것이야!"
자포인은 아무렇게나 중얼거렸다.
스-- 윽!
이어 그는 철운비의 옆으로 다가가 몸을 숙였다.
"으으음…!"
그때 철운비의 입에서 가래가 끓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쩌-_ 저적!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데 그런 그의 피부가 급격히 벗겨져 나가고
말았다.
탈태환골-!
철운비는 천년시균의 영효로 또 한 차례 탈태환골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뼈마디가 어긋나는 소리가 연신 들리고 소수마강에 격중당한 상처도 급격히
아물어 갔다.
"훌륭… 하다!"
자포인은 흡족한 표정으로 철운비의 변화를 내려다 보았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소매에서 하나의 옥병을 꺼내었다. 그 옥병에는 푸른빛
을 띤 액체가 반쯤 들어 있었다.
"천년시균(千年屍菌)의 시독(屍毒)은 이 공청석유(空靑石乳)가 해독시켜 줄
것이다."
자포인은 철운비의 입술을 벌리고 병 속의 액체를 흘려 넣어 주었다.
"으으…!"
공청석유가 흘러 들어가자 혼탁하던 철운비의 눈빛이 급격히 맑아졌다.
자포인은 그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네가 한 일은 잘 알고 있겠지? 우선… 귀왕대탑(鬼王大塔)과 유령귀모(幽
靈鬼母)를 장악하여 지옥천존과 맞설 만한 세력을 구축하는 것이다. 그 후
의 일은 네 누이를 통해 연락하겠다."
스- 윽!
말을 마치고 자포인은 유령천인총의 입구로 걸어갔다.
"전능기환전의 오백 년 염원이… 네 양 어깨에 달려 있음을… 잊지 말아라!
아들아!"
스- 으…!
자애로운 음성을 남기고 자포인은 유령천인총에서 사라졌다.
(나보고… 아들이라고… 그는 누구지?)
자포인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철운비의 눈빛이 혼탁하게 번뜩였다.
그는 천년시균의 강력한 약기운에 비몽사몽간을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런 그로서는 자포인이 누구며 그가 왜 자신에게 호의를 보였는지 알 까닭이
없었다.
(누구인가… 그는…?)
철운비는 끝없이 염두를 굴리다가 이내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어 갔다.
우르르릉!
그의 내부에서는 천녀시균의 십갑자 잠력이 노도같이 폭주하고 있었다.
유령천인총(幽靈千人塚)-_!
이곳은 상고 일천사종(一千邪宗)의 한이 잠들어 있는 천 년의 무덤 유령천
인총이었다.

∑ 제 21 장 귀왕초인(鬼王超人)의 탄생(誕生)

콰콰콰쾅--!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
산악이라도 허물어뜨릴 듯한 강대한 무형잠경이 폭풍같이 사면을 휩쓸어 갔
다.
콰드드득! 우두둑…!
그 무형잠경이 이르는 곳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몇 장 두께의 석
벽도 청강석(靑剛石)의 석주(石柱)도… 무형잠경의 폭풍에 휘말린 모든 것
들은 종잇장같이 찢기고 수수깡같이 꺾여져 나갔다.
무서운 잠력, 그것은 놀랍게도 두 명의 인물이 일으키고 있었다.
고대(古代) 제왕(帝王)의 지하능실(地下陵室)이었던 듯한 어느 석전,
수많은 돌기둥들이 늘어선 그곳에서 지금 두 명의 인물이 무서운 기세로 충
돌하고 있었다.
안색이 아주 희고 눈빛이 기이하게도 녹색의 여인, 그리고 머리 끝에서부터
발 끝까지 검은 천으로 휘감은 몽면인 그들은 바로 유령귀모와 지옥천존이
었다.
"…!"
"…!"
꽈르르르릉!
두 사람은 십 장을 격하고 마주서서 초식을 발휘하고 있었다.
보통사람들에게 십 장이란 거리는 아주 먼 거리다. 하지만 두 사람 같은 초
고수자들에게는 십 장이란 거리는 아차하는 사이에 목숨이 날아갈 만큼 극
히 짧은 거리밖에 안 되었다.
후두둑… 쩌저정!
양인은 느릿느릿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 때마다 하늘을 가르고 땅을 뒤
엎어 버릴 듯한 무서운 역도가 일어나 상대방에게 밀려갔다.
일견 아무런 위력도 없어 보이는 초식들… 그러나 두 사람의 한초식 한 초
식마다에는 형언불가의 파괴력이 실려 있었다.
어느 한쪽이라도 현재 위치에서 한 걸음이라도 물러서면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 누적되어 있던 역도가 일시에 작렬하여 그의 몸을 산산이 바스러뜨
려 버릴 것이다.
그리고 형세는 완전히 유령귀모쪽이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두두둑… 파스스…!
유령귀모가 걸치고 있던 소복이 지옥천존의 무형파멸마강의 역도에 갈가리
찢겨나가고 있었다. 그 뿐 아니라 그녀의 살갗도 쩍쩍 갈라지며 상체가 점
점 뒤로 젖혀져 갔다.
(아아! 틀렸다! 이제는 삼합(三合)을 더 견디기 힘들다!)
유령귀모의 녹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녀가 비록 여인답지 않게 강한 것
은 사실이지만 지옥천존에게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이십합을 못 견디고 이 지경이라니… 귀왕초인으로도 저 자를 상대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주르르…!
유령귀모의 오공에서 선혈이 흘러나왔다.
(지옥… 삼가신(地獄三家臣)이 연수를 해야만 어찌해 볼 수 있는데… 아아
… 이제는 틀렸다!)
유령귀모는 내부의 진동으로 정신이 혼미해져감을 느끼며 신음을 흘렸다.
그런 그녀를 지옥천존의 두 눈이 스산하게 노려보았다.
"이제… 끝낼 때가 되었다. 유령귀모!"
쩌저정…!
지옥천존의 손 끝에서 지금까지의 그것보다 두 배 강한 역도가 일어나 곧장
유령귀모에게로 무찔러져 왔다.
콰드득…!
그 지옥참의 무서운 역도는 순간적으로 유령귀모의 열 겹 호신강벽을 박살
내 버렸다.
(끝… 인가?)
유령귀모는 지옥참의 역도가 젖가슴 사이로 후벼파고 들어옴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더 이상… 그녀에게는 저항할 능력이 없었다. 곧 그녀의 아름답던
젖무덤은 무참하게 으스러져 나갈 것이다.
한데,
"우우웃!"
용(龍)이 울부짖는 듯한 폭갈이 터진 것은 바로 그 때였다.
꽈르릉…!
그와 함께 눈을 시리게 하는 시퍼런 빛무리가 측면에서 폭발하듯 일어나 지
옥참(地獄斬)의 역도와 충돌했다.
"유령… 청명강살(幽靈靑冥剛殺)?"
언뜻 지옥천존의 놀라움 실린 경호성이 터지고…
콰르르르릉!
이어 터진 엄청난 폭음에 모든 소성이 파묻혀 버렸다.
콰콰쾅! 콰드드득!
잠력이 소용돌이가 백 장을 휘감고 웅장하던 지하석전 전체가 순간적으로
붕괴되어 버렸다.
무너지는 바윗덩이들… 그 속에서 두 명 인물이 십 장을 격하고 마주서 있
었다.
놀라움으로 흔들리는 지옥천존의 앞에는 언제인가 한 명의 괴인이 유령같이
나타난 우뚝 서 있었다. 전신이 시퍼렇고 사이한 광망에 덮인 인물인데 얼
굴에는 흉측한 귀신의 가면이 씌워져 있었다.
철운비(鐵雲飛), 바로 그였다.
그의 옆구리에는 피투성이가 된 유령귀모가 축 늘어진 채 안겨 있었다. 그
녀가 지옥참에 쓰러지는 순간 철운비가 나타나 구한 것이다.
"귀왕… 초인(鬼王超人)이냐?"
지옥천존이 신음하듯 물었다.
콰콰쾅…!
거대한 암괴가 그와 철운비 사이로 무너져 내려 두 사람을 갈라놓은 때문이
었다.
콰콰쾅! 우두두둑…!
뒤흔들리는 지축… 무너져 내리는 바윗덩이들… 한번 들어가면 유령이 되어
서야 빠져나올 수 있다는 유령미궁(幽靈迷宮)은 서서히 붕괴 되어가고 있었
다. 천 년의 신비를 영원히 지저에 묻어 버리려는 듯이…
콰르르르…!

어둠 속,
"아아! 흑백쌍시가 자신들의 의무를 제대로 수행했구나!"
미약한 여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반쯤 무너진 유령미궁의 지하미로에 석벽을 기대고 유령귀모가 힘없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저고리는 갈가리 찢겨나가 소담스러운 젖무덤이 수줍게 드러나 보였
다. 하지만 그녀는 드러난 젖무덤을 가릴 생각도 않고 앞 쪽을 바라보고 있
었다.
"…!"
그녀의 앞에는 철운비가 등을 돌린 채 우뚝 서서 어두운 미로 저편을 바라
보고 있었다.
그는 지금 천이통(天里通)의 공력을 발휘하여 유령미궁 내의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아깝군! 지옥천존(地獄天尊)과 나의 무공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
였는데…!)
츠- 읏!
귀면 속에서 철운비의 두 눈이 섬연히 번뜩였다. 그의 천이통 공력은 유령
미궁 내에 자신과 유령귀모만이 남아 있음을 감지한 것이다.
지옥천존-!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 그 자신의 운명(運命)의 적수(敵手)!
철운비는 이 년 내내 한시라도 빨리 그와 만나기를 바래 왔었다.
그리고 드디어 이곳 유령미궁에서 만났는데… 일합(一合)을 주고받은 뒤에
부득불 헤어져야만 했던 것이다.
(나의 내공은… 이곳에서 한 단계 더 높아졌다. 그런데도 그를 압도하지 못
했으니…)
철운비는 귀왕철면 속에서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그의 왼손은 아직도 얼얼한 상태였다. 천년시균을 복용하여 그의 내공은 일
층 강력해졌는데도 지옥천존과의 충돌에서 적지 않은 타격을 받은 것이었
다.
철운비가 상념에 잠겨 있을 때,
"귀… 왕초인(鬼王超人)! 이제 본녀를 유령미궁 밖으로 옮겨 가세요!"
철운비의 뒤에서 유령귀모가 미약한 음성으로 명령했다.
(귀왕… 초인(鬼王超人)?)
철운비는 움찔하며 돌아섰다.
유령귀모가 가냘프게 숨을 몰아쉬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옥용
은 더욱 더 하얘져 있는데 숨을 몰아 때마다 찢긴 저고리 사이로 드러난 자
그마한 젖무덤이 아래 위로 일렁였다.
철운비는 흘깃 그 젖무덤을 쓸어본 뒤 냉연하게 말했다.
"누가 귀왕초인(鬼王超人)이란 말인가?"
철운비의 말에 유령귀모의 옥용이 일변했다.
"무슨 말이에요? 설마 쌍로가 귀왕섭령대법(鬼王攝靈大法)을 펼치지 않았단
말…"
경악성을 흘리던 유령귀모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츠- 읏!
귀왕철면 사이로 음울하게 번뜩이는 철운비의 두 눈은 그의 이지(理智)가
아무런 금제도 당하지 않은 명철한 상태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당… 당신은 누구지요?"
유령귀모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철운비는 냉철하게 대답했다.
"나는… 철운비(鐵雲飛)라고 하지. 귀왕초인도 무어도 아닌…"
"철… 운비(鐵雲飛)?"
유령귀모의 입에서 숨넘어가는 듯한 신음이 토해졌다.
전혀 생소한 이름…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유령귀모는 비로소 자신이 오해를
하여 전혀 엉뚱한 사람에게 천년시균을 먹였음을 깨달았다.
"이…이런 어이없는 일이…음…움세룡(陰世龍)이 아니었다니…!"
유령귀모는 실성한 듯 중얼거렸다.
철운비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음울하게 말했다.
"당신이 본인을 구한 모양인데… 그 은혜는 나중에 반드시 갚도록 하겠어.
그렇지만 나를 보고 귀왕초인이니 뭐니 하면 곤란해!"
철운비는 말하며 선뜻 신형을 돌렸다.
"지옥천존과 지옥마교의 무리들은 모두 사라졌으니 본인도 이만 가 보아야
겠어."
뚜벅… 뚜벅!
철운비는 말을 하며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모습은 이내 미로 저
편으로 사라져 갔다.
"흐윽! 이… 이런 엉터리 같은 일이…!"
사라지는 철운비의 뒷모습을 보며 유령귀모는 참담한 표정이 되었다.
"다… 틀렸다. 천년시균(千年屍菌)을 어처구니없게 써 버렸으니 이제 무엇
으로 지옥천존에게 복수를 한단 말인가?"
유령귀모는 처절하게 흐느꼈다.
유일한 희망이던 천년시균, 그것이 사라진 이상 그녀에게 저 마신(魔神)같
이 무서운 지옥천존을 상대할 방법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그것을
통감하며 유령귀모는 땅 끝으로 굴러떨어지는 듯한 절망감을 느꼈다.
한데 그 때였다.
"헛허… 너는 실패하지 않았다, 귀모(鬼母)!"
돌연 어디선가 한 소리 창노한 노인의 음성이 들렸다.
유령귀모는 깜짝 놀라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였을까?
츠읏! 츠읏!
그녀 왼쪽의 무너진 돌더미 위에 긴 담뱃대를 입에 문 한 명 괴인이 걸터앉
아 유령귀모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깨에서 잘려나간 오른팔, 전신이 화상으로 흉측하게 녹아 버린 괴인,
치우노조-!
그 괴인은 바로 북망산 기슭에서 철운비와 만났던 그 독비노인이었다. 놀랍
게도 치우노조는 철운비의 천이통 공력에도 감지되지 않은 채 그곳에 나타
난 것이다.
그는 긴 담뱃대를 뻑뻑 빨며 자애로운 눈길로 유령귀모를 내려다 보고 있었
다.
부르르!
노인의 눈빛을 접하는 순간 유령귀모의 전신으로 격렬한 파문이 스쳐지나
갔다.
"아아… 대종사(大宗師)! 정녕 대종사(大宗師)이시옵니까?"
유령귀모는 놀라움과 격정으로 신음을 토해내었다. 그리고는 천 근 같은 몸
을 일으켜 노인 앞에 오체복지(五體伏地)하였다.
자그마한 유방이 먼지 쌓인 돌바닥에 짓눌려졌으나 유령귀모는 그것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녀의 뇌리는 지금 엄청난 충격과 흥분으로 진공상태가 되
다시피한 상태였다.
죽었다고 생각한 노주군(老主君)-!
그가 지금 그녀 앞에 있는 것이다.
모습은 화상을 입어 끔찍하게 변했으나… 노인의 눈을 보는 순간 유령귀모
는 그 노인이 누구인지 즉시 알아본 것이다.
대종사(大宗師)!
유령귀모에게 그렇게 불릴 인물은 하늘과 땅 사이에 단 한 명뿐이었다.

-지옥… 노조(地獄老祖) 능황(陵皇)!

영원한 지옥마맥의 절대자!


그 외에 누가 있어 유령귀모를 돌바닥 위에 오체복지시킬 수가 있겠는가?
"헛허… 사실 노부는 너를 야단치러 왔던 길이었다. 전능기환전의 음세룡이
란 이무기 새끼를 귀왕초인(鬼王超人)으로 선택한 네 아둔함을 말이야!"
노인은 껄껄 웃었다. 그는 아주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그것은 그가 방금
자신의 외손자의 늠름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허허… 사실 네가 천년시균을 먹인 녀석은 장차 지옥마가(地獄魔家)로 이
어나갈 놈이야! 천년시균은…제대로 주인을 만난 게지."
노인은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그에 따라 유령귀모의 옥용도 순간적으로 서너 차례 변했다.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노인을 올려다 보았다.
"흐윽… 설마 그 어린 놈…아니 그분께서 혈지(血芝) 공주(公主)님의 후예
시란 말씀이십니까? 고독패왕과의 사이에서 태어나신…?"
노인은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다! 녀석은 지옥마맥의 단 하나뿐인 혈육이고… 헛허… 장차 너
를 첩(妾)으로 거둘 지아비이기도 하느니라…!"
"처… 첩(妾)이라니요…!"
질겁하는 유령귀모의 모습에 노인은 흐뭇하게 웃으며 담뱃대를 돌에 두드렸
다.
"노부와 함께 가자. 헛하… 너를 설사 지옥천존이라도 해치지 못할 정도로
강하게 만들어 주마."
"대… 종사…!"
유령귀모의 교구가 흥분으로 떨렸다.
노인은 자애롭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장차 나 능황(陵皇)의 손주며느리가 될 네가 누군가에게 진다면… 헛허…
그것은 노부의 자존심 문제가 아니냐?"
"…!"
노인의 창노한 웃음소리가 공허한 유령미궁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 웃음소리에 유령귀모의 옥용은 한층 빨개졌다.
지옥노조 능황-!
한때 하늘 아래에서 가장 강했던 지옥마가의 그 종주가 바로 그 추괴한 노
인의 이름이었다.
지옥노조(地獄老祖)… 능황!

-북산(北山),

산동(山東) 산서(山西) 이북에는 광대한 산림지역이 끝없이 전개되어 있다.


그 나무의 바다(林海)는 산해관(山海關)을 너머 저 멀리 장백산맥까지 이어
진다. 그곳을 고래로 북산(北山)이라 일컫는다.
북산(北山) 일대의 지형은 험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역대 열국(列國)의 중
앙정부의 힘조차 그곳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그 대신, 북산의 곳곳에는 혈의(血義)를 중심으로 한 여러 개의 군벌(軍閥)
이 자생해 왔다.
그 군벌들은 중원 중앙정부와의 암중묵계로 독자적인 율법(律法)으로 북산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들을 일컬어 북산군벌(北山軍閥)이라고 한다.
북산군벌은 대략 일천여 개의 혈족군벌(血族軍閥)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중 가장 용맹한 일족이 철사(鐵獅) 막가(莫家) 일족이었다. 즉, 사자철
림(獅子鐵林)이 바로 그들이었다.
오백 년 전, 사자철림의 당시 당주였던 사자천존(獅子天尊)은 아수마황(阿
修魔皇)의 횡행에 분연히 칼을 들고 일어나 야수마황의 야망을 와해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그 결과 사자천존(獅子天尊)의 후예들은 위대한 오대무벌(五大武閥)의 하나
로 꼽히게 되었고 오백 년 간 북산 일천군벌(一千軍閥)의 맹주(盟主)의 지
위를 지켜왔다.
강대한 사자의 일족…
그들이 바로 사자철림(獅子鐵林)의 막씨일족이었다.
북산(北山)… 사자철림(獅子鐵林)!

산해관(山海關) 남서(南西)-_
하나의 나즈막한 구릉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구릉 위에는 한 그루의 거대
한 천년고목이 우뚝 서 있었다. 그 둘레가 무려 십 장이나 되는 거목(巨木)
이었다.
지금 그 거목 아래에는 삼인(三人)이 앉고 서 있었다.
일남이녀(一男二女), 사내는 허름한 폐포에 흉악한 귀신 형상의 철가면을
쓴 소년이었다. 그의 허리춤에는 한 자루의 핏빛 낫(鎌)이 걸려 있었다.
철운비(鐵雲飛)-!
바로 그였다.
철운비의 뒤에는 당당한 채격의 아름다운 여전사(女戰士)가 서 있었다.
물론 그녀는 사자철림의 제일여전사(第一女戰士)- 철사신녀(鐵獅神女) 적아
황이었다. 그녀의 품에는 어린 막사후가 손가락을 입에 문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귀왕철면(鬼王鐵面)을 쓴 철운비는 지금 나무 뿌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한 명의 여인이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부복해 있었
다. 나이는 삼십대 초반 정도, 사내 못지 않게 당당한 체격에 일신에 붉은
갑주를 걸친 여전사였다.
여인의 가슴을 방호하고 있는 청동갑주에는 포효하는 암사자의 머리 모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북산(北山) 사자철림의 여전사 조직인 적사
여황단(赤獅女皇團)의 표식이었다.
적사여황단은 사자철림에 소속된 모든 여인들을 통괄하여 지휘한다.
그 단주(團主)는 대대로 사자철림의 당주 부인이 맡아왔다. 물론 당대단주
는 사자천후(獅子天后) 당숙빈이었다.
청동갑주의 여전사는 아주 강한 눈빛으로 철운비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
다.
"주모님은 어딘가에 연금당해 계신 상태인데… 그 곳이 어딘지 아직 확인하
지 못했습니다."

-담철화(潭鐵花)!

이것이 여전사의 이름이었다.


적사여황단의 가장 용맹한 열 명의 여걸- 적사십화(赤獅十花)의 첫째인 여
전사가 바로 그녀였다.

담철화의 말을 듣고 있던 철사신녀 적아황은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분노에


몸을 떨며 물었다.
"주모님이 연금당하다니… 어찌 그런 일이 가능했지요?"
그녀가 철운비와 함께 수호익룡을 타고 이곳 북산(北山)에 닿은 것은 반나
절 전이었다. 닿은 즉시 그녀는 사자철림(獅子鐵林) 중 그래도 믿을 수 있
는 적사여황단에 암호를 날렸다.
담철화는 바로 적아황이 보낸 그 암전을 받고 이곳에 나타난 것이었다.
적아황의 물음에 담철화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사흘 전에… 갑자기 주모께서 임주님을 습격한 모양이야. 임주는 주모님의
단검에 가슴이 찔려 중상을 입었으나 다행히 목숨에 지장이 없으셨어."
그녀는 곤혹한 표정으로 적아황과 그녀의 팔 안에 잠든 어린 주인을 바라보
았다.
"그 직후 주모님은 자살을 기도하셨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모처에 연금당하
셨다고 해. 하지만… 아직도 주모가 왜 임주님을 암격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해!"
그녀는 말을 하며 철운비와 적아황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직감적으로 그녀
는 철운비와 적아황이 이번 일의 내막을 알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것을 감지한 그녀는 두 사람이 그 내막에 대해 말해 주기를 바라는 눈치
였다.
하나,
"…!"
"…!"
철운비와 적아황은 곤혹한 표정만 지을 뿐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그들은 난감한 심정이었다. 두 사람은 차마 철사대제 약붕이 가짜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사자천후 당숙빈-!
그녀는 가짜 철사대제와 한 달 넘게 동침해 왔다. 위대한 오대무벌의 하나
인 사자철림의 안주인의 정조가 가짜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힌 것이었다. 철
운비와 적아황은 차마 그것을 발설할 수 없었다.
사자천후 당숙빈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그 일은 철운비와 적아황, 두 사람의
가슴 속에만 감추어져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철운비는 적아황을 바라보았다.


"나는… 사후(獅吼)의 엄마를 찾아 보겠어. 당신은 담부인의 도움을 받아…
쥐새끼들을 토벌할 준비를 하도록…!"
그는 침중한 음성으로 말하며 나무 뿌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옥… 팔식(地獄八式)을 써도 좋으니… 비밀을 아는 자는 모두 제거하도
록… 가능한 조용히!"
"지옥… 팔식을?"
적아황은 뜻밖이라는 듯 놀라움으로 눈을 크게 떴다.
이곳까지 오는 사이 그녀는 철운비에게서 팔식(八式)의 도법(刀法)을 전수
받았다.

-지옥팔식(地獄八式)!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저 지옥혈겸(地獄血鎌)에 감추어진 지옥마맥의 이대절학 중 하
나였다. 지극히 잔혹하고 신랄하여 철운비도 연마하기를 꺼린 무서운 마공
인 것이다.
하지만 철운비는 그것을 적당히 개조하여 적아황에게 전수했으며, 적아황은
현재 지옥팔식 중 사식(四式)을 연마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초식상으로는 무림에 적수가 드물 정도였다. 만일 그
녀가 지옥팔식을 모두 연마해 내면 누구도 그녀를 이기지 못하리라.

철운비는 침중한 음성으로 담철화에게 물었다.


"적사여황단에서 조사해 보지 못한 곳은 어디어디오?"
"중죄인은 가두는 참회마전(懺悔魔殿)정도…!"
말을 하던 담철화는 흠칫했다.
피- 이잉!
마치 연기같이 철운비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시야에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초… 인(超人)이로군!"
담철화는 입을 딱 벌리며 경악의 신음을 발했다.
그런 그녀의 소매를 적아황은 고소하며 잡아 끌었다.
"자, 우리도 서둘러야지요!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요지를 점령해야 하니까
요."
담철화는 멍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가자!"
다음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여인은 교구를 날려 소리없이 그 자리
에서 사라졌다.

<참회마전(懺悔魔殿).>

사자철림의 중죄인을 가두는 뇌옥(牢獄)이다. 이곳 참회마전에 갇히는 자들


은 구제불능의 중죄인들이었다. 따라서 참회마전에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고 한다.
암울한 죽음의 공포가 서린 지옥(地獄)의 형장! 그곳이 바로 참회마전이었
다.

참회마전의 깊은 곳,
타닥… 타닥!
송진을 굳혀 만든 횃불이 검은 그을음을 내며 타오르고 있었다.
한 칸의 장방형의 석실인 이곳은 일견하여 고문실인 듯 각가지의 형구들이
사면 벽에 걸려 있었다.
석실의 한쪽에는 이글이글 불꽃을 일으키며 타오르는 화로가 놓여 있다. 화
로 안에는 십여 개의 인두와 쇠꼬챙이가 벌겋게 달아오른 채 꽂혀 있었다.
그리고 석실의 한쪽 벽,
"…!"
한 명의 여인이 두 팔이 쇠사슬에 묶인 채 축 늘어져 있었다.
그녀의 형상은 실로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제멋대로 헝클어져 산발한
머리.
얼굴은 풀어 헤쳐진 머리카락으로 인해 보이지 않았다.
여인은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벌거벗은 그녀의 몸은 온
통 지독한 고문을 당한 흔적으로 얼룩져 있었다. 찢기고 불에 탄 여인의 몸
뚱이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특히, 여인의 부끄러운 곳은 뭇 사내들에게 지독한 난행을 당한 듯 온통 검
붉은 선혈로 물들어 있었다.
여인은 대체 누구일까? 어떤 죄를 졌기에 이렇듯 처참한 형상으로 무참하게
짓밟혔단 말인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형상으로…

그긍…!
문득 둔중한 굉음과 함께 석실의 철문이 열렸다. 이어 서너 명의 사내가 안
으로 걸어들어 왔다. 흉신악살같이 험악한 인상의 사내들이었는데 그들은
근육질로 번들거리는 상체를 벌거벗고 있었다.
그 자들의 앞에는 중후한 인상을 지닌 사십 전후의 적포(赤袍) 중년인이 앞
장서 걸어 들어왔다.
일문종사의 기품을 지닌 당당한 체구의 인물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자는 눈빛이 극히 차갑고 음험한 인상이었다.
그 자는 최근 가슴부위를 다친 듯 적포자락 사이로 흰 천을 가슴에 감고 있
는 것이 보였다.
석실로 들어선 적포중년인은 숱한 사내들에게 윤간을 당해 핏자국으로 물든
여인의 아랫도리를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너무… 험하게 다룬 것이 아니냐?"
그의 말에 장한들은 찔끔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여인을 윤간한 것은
그 자들의 짓인 듯했다.
장한들 중 한 명이 급히 변명하고 나섰다.
"아주 지독한 계집이었습니다 영주(令主)! 최후의 방법으로… 그런 것인데
… 저희들에게 모두 서너 차례씩 당하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흐음…!"
적포인은 괴로운 표정으로 낮게 신음했다.
(미안하오 숙빈… 순순히 그것을 내놓았으면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
데… 하지만 이왕 시작한 것, 나는 무슨 수를 쓰든 그것을 얻을 것이고…
그 후 이놈들을 도륙내어 그대의 원한을 갚아줄 것이오.)
그의 눈가로 만가지 상념과 함께 언뜻 잔혹한 살광이 스쳐 지나갔다.
한데… 숙빈이라니…?
그렇다면 쇠사슬에 묶여 고문을 당하고 있는 여인이 바로 사자천후(獅子天
后) 당숙빈이란 말인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천하 오대무벌(五大武閥)의 안주인인 그
녀가 이런 처참한 모습이 되어 있으리라고 누가 믿겠는가?
적포인…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이 자가 바로 가짜 철사대제(鐵獅大帝)
막붕(莫鵬)이란 말인가?

"깨워라…!"
가짜 막붕의 입에서 한 소리 차가운 명이 떨어졌다.
"옛!"
촤아…!
즉시 대답과 함께 한 명의 장한이 즉시 한 통의 찬물을 당숙빈에게 끼얹었
다.
순간,
"음…!"
당숙빈은 미약한 신음과 함께 진저리를 치며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물에 젖은 머리카락 사
이로 아주 아름답고 기품있는 미부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흉한들은 고문을
하면서도 그녀의 얼굴에까지는 손을 대지 않은 듯 얼굴은 비교적 깨끗한 편
이었다.
하나, 여인으로서 가장 치욕스런 짓까지 당한 그녀의 얼굴 어디에도 생기라
고는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창백하게 질려 처절하기 이를 데 없는 그
녀의 모습은 오히려 야릇한 충동까지 느끼게 했다.
힘겹게 고개를 든 당숙빈의 초점 잃은 눈동자가 적포인에게 머물렀다.
순간, 그를 알아본 당숙빈은 악을 쓰듯 처절한 음성으로 외쳤다.
"어서 나를… 죽… 여라! 막거명(莫巨命)! 당신이 아직도… 사자철림(獅子
鐵林)의 제자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막거명(莫巨命)…!
당숙빈은 그 가짜의 정체를 알고 있는 듯했다.
한데, 놀라운 일이었다. 막거명(莫巨命)이라 불리운 적포인! 그 자는 지옥
마교(地獄魔敎)에서 파견된 자가 아니고 사자철림(獅子鐵林)의 내부 인물이
란 말인가?
가짜 철사대제(鐵獅大帝), 즉 막거명이란 자는 음험한 눈빛을 번뜩이며 당
숙빈을 바라보았다.
"나는 북산군벌(北山軍閥)을 움직일 수 있는 북산풍운번(北山風雲幡)이 필
요하오! 그것은 어디에 감추었는지 말하기 전에는… 당신은 결코 죽지 못하
오, 형수님!"
그는 당숙빈의 턱을 들어 올리며 음울한 어조로 말했다.

-북산풍운번(北山風雲幡)!

그것은 한 자루 깃발의 이름이었다.


겨우 네 자 길이밖에 안 되는 검은 천잠사로 짠 깃발이지만 그것은 수십만
명의 무림고수들의 목숨을 좌우할 수 있는 위력을 지닌 것이었다.
북산풍운번(北山風雲幡)은 바로 북산군벌(北山軍閥)의 맹주령이었다. 북산
군벌을 이루는 일천 군소군벌과 그 막하 오십여만의 고수들이 북산풍운번
(北山風雲幡)의 명령 일하에 죽고 살 수 있었다.
그 북산풍운번은 북산군벌의 맹주인 사자철림(獅子鐵林)이 대대로 소유해
왔다. 그것은 모종의 장소에 감추어져 있었고 그 장소를 아는 자는 하늘 아
래 단 이인(二人)뿐이었다.
철사대제(鐵獅大帝) 막붕(莫鵬)과 그의 아내인 사자천후(獅子天后) 당숙빈,
바로 그 두 사람이었다.

당숙빈의 처절하도록 창백한 얼굴에 야멸찬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


"명! 가문을 버리고 지옥마교(地獄魔敎)의 개(犬)가 된 버러지! 내 몸을 가
루로 만들어도 북산풍운번(北山風雲幡)을 얻지 못한다!"
그녀는 원한의 이를 갈며 막거명의 얼굴에 침을 뱉았다.
"…!"
막거명은 피하지 않고 그대로 당숙빈의 침을 얼굴에 맞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자의 눈빛만큼은 섬뜩하리만치 잔
혹해졌다.
"당신은… 내게 북산풍운번이 감춰진 곳을 가르쳐 주게 될 것이오 형수님!"
그는 음산하게 말하며 뒤로 물러섰다.
"호호! 꿈도 꾸지 마라 막거명! 너희 짐승같은 무리들에게 이미 더럽혀질대
로 더럽혀진 몸이거늘… 무어가 두렵겠느냐? 마음대로 해봐라!"
당숙빈은 발작적으로 웃어제꼈다.
하지만 막거명은 냉혹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함부로 장담은 하는 게 아니오 형수! 내게는… 당신의 입을 열게 할 마지
막 방법이 있거든!"
말과 함께 그는 뒤의 장한들에게 손짓을 해보였다. 그러자 즉시 장한들은
당숙빈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몸을 벽에서 끌어내렸다.
이어, 그녀의 발가벗은 몸을 옆의 쇠침상 모서리에 엎드린 자세로 눕히고
두 팔은 벌려 침상 모서리에 묶었다. 그리고 두 발목은 침대 기둥의 하단에
묶었다.
마치 짐슴의 암컷같은 자세가 되어 버린 당숙빈의 창백한 얼굴이 파르르 경
련을 일으켰다.
어떤 불길한 예감이 그녀를 엄습한 것이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그녀는 달덩이같은 둔부를 막거명과 사내들에게 보인 자세로 다리를 활짝
벌린 부끄러운 모습이 되어 무기력하게 꿈틀대며 저항했다. 필사적으로 벌
려진 다리를 오무리려고 해봤으나 소용이 없었다.
사내들은 달덩이같은 둔부 사이로 보이는 당숙빈의 무참한 부분을 노려보며
눈이 벌개졌다. 자신들의 무참한 짓으로 더럽혀진 그녀의 여자부분을 보며
이미 흉칙한 일부가 노골적으로 반응을 보이는 자들도 있었다.
막거명도 짐승의 암컷같은 자세로 엎드려 둔부를 꿈틀대는 당숙빈의 야릇한
모습을 바라보며 도착적인 눈빛이 되었다.
그러다가 그 자는 밖을 향해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데리고 와라!"
크르르!
그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갑자기 흉폭한 맹수의 으르렁거림이 밀실을
울렸다.
이어 목이 쇠사슬에 매인 한 마리 거대한 맹견이 두 명의 장한들에 의해 끌
려 들어왔다.
송아지만한 거대한 몸집의 맹견은 무엇 때문인지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채 입가로 연신 거친 숨결을 토하고 있었다.
"악…!"
고개를 등 뒤로 돌려 그 맹견을 본 순간 당숙빈의 입에서 자지러질 듯 날카
로운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녀의 창백한 옥용은 온통 분노와 공포로 새하얗
게 질렸다.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고 혀를 빼문 입가로 거품같은 침을 흘리는 그 맹견
의 뒷다리 사이에는 보통 때는 볼 수 없는 흉측한 일부가 불쑥 드러나 있었
다.
아마도 맹견은 흥분제를 먹은 듯 두 눈이 욕정으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
다. 괴상망측하고도 시뻘건 그놈의 일부는 보기에도 끔찍했다.
다량의 흥분제를 복용하여 한껏 발정한 맹견의 모습을 본 당숙빈은 막거명
이 말한 최후의 방법이 무엇인지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옥용이 새파랗게 질린 채 몸을 바둥거렸다.
"막… 거명! 네… 네놈이 이런 짐승만도 못한 짓을…!"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소리쳤다. 막거명은 인간도 아닌, 짐승의 숫컷으로
하여금 그녀를 욕보이게 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팔 하나 제대로 들어올릴 힘이 없는 당숙빈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실로 부질없는, 말로밖에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저항뿐이었다.
막거명은 힘없이 몸을 바둥거리는 당숙빈을 차가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이어 그는 장한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시작… 해라!"
"옛…!"
장한은 대답과 함께 맹견의 목에 매어진 쇠사슬을 쥔 손을 약간 늦추었다.
크르르…!
그러자 맹견은 흉흉한 기세로 으르렁거리며 당숙빈이 묶인 침상을 덮쳐 갔
다. 발정할대로 발정한 그놈에게는 상대가 동족이든 아니든 관계가 없었다.
오직 본능의 욕구를 충족시킬 대상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악!"
맹견이 자신에게 덮쳐드는 순간 당숙빈은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눈을 질
끈 감고 말았다.
하지만 맹견은 당숙빈의 하체 바로 앞까지 이르러 더 전진하지 못했다. 맹
견의 목에 매인 사슬을 움켜쥔 사내가 의도적으로 쇠사슬을 더 이상 풀어
주지 않은 때문이다.
크르르!
지척에 엎드려 있는 욕정의 대상을 덮치지 못한 맹견은 길길이 날뛰며 앞으
로 덮쳐가려고 했다.
비록 맹견이 직접 덮친 것은 아니지만 당숙빈은 발정한 그놈의 거친 숨결을
바로 둔부 뒷쪽으로 느끼며 그대로 반 실신하고 말았다.

∑ 제 22 장 사자철림(獅子鐵林)의 비극(悲劇)

막거명(莫巨命)은 짐승의 암컷같은 자세로 엎드린 채 반 실신한 당숙빈의


옆으로 다가가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손으로 그녀의 턱을 쳐들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대에게 이미 못할 짓이 없는 나요. 끝내 북산풍운번(北山風雲幡)을 감춘
곳을 말하지 않으면… 당신은 색다른 상대와 함께 하룻밤을 지내게 될 것이
오!"
순간 당숙빈의 축 늘어진 몸이 소스라치듯 놀라며 경련을 일으켰다.
"흐윽! 저주… 한다. 내가 죽어 귀신이 되더라도… 이 복수는 꼭 하고 말
것이다!"
그녀는 질끈 눈을 감으며 악을 썼다.
그런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막거명은 일순 낭패의 빛을 지었다. 당숙빈에게
이미 어떤 협박도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는 깨달은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막거명의 가슴 깊은 곳에서 악마의 그것같은 충동이 불
끈 치솟았다.
"망할년!"
철썩!
막거명은 당숙빈의 뺨을 후려치며 일어섰다. 그나마 원형을 유지하고 있던
당숙빈의 고운 얼굴에 벌건 손자국이 나며 입과 코로 선혈이 흘러나왔다.
"흐흐! 이번 기회에 그 짓을 해보고 싶은 것이렷다! 오냐! 네년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나를 탓하지 마라!"
그자는 흉측하게 안면을 이지러뜨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어 그는 맹견의 쇠
사슬을 쥔 장한을 향해 씹어 뱉듯 말했다.
"저 계집이 원하는대로 해 주어라!"
"옛! 영주님!"
흉한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철컹!
이어 그는 맹견의 목을 묶은 쇠사슬을 놓았다. 옆의 다른 장한들은 곧 벌어
질 장면을 상상하며 야릇하게 눈을 번뜩였다.
크르르…!
순간 쇠사슬이 풀린 맹견은 사나운 기세로 으르렁대며 그대로 당숙빈을 덮
쳐갔다.
"악…!"
당숙빈의 입에서 찢어질 듯 날카로운 비명이 터졌다. 비록 각오를 한 상태
였지만 막상 맹견이 덮쳐오자 자신도 모르게 두려움과 공포로 비명을 터뜨
린 것이다.
맹견은 그런 당숙빈의 등으로 성큼 올라탔다. 등에 느껴지는 역겹고 뜨거운
숨결을 느낀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필사적으로 몸을 바둥거렸다.
"흐윽!"
자신에게 가해질 언어도단의 만행을 떠올리며 당숙빈의 두 눈이 처절한 공
포와 절망으로 하얗게 치떠졌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죽… 일 놈들!"
쥐어짜는 듯 사나운 한 소리 폭갈이 무섭게 석실을 뒤흔들었다.
번- 쩍! 빠지직!
동시에 중인들의 눈에 석실 밖에서 한 줄기 시퍼런 뇌정(雷霆)이 폭사되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카- 아악!
직후 한 줄기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당숙빈을 찍어누르던 맹견이 예의 뇌정
흔(雷霆痕)에 스쳐 순간적으로 재로 변해 버렸다. 실로 그것은 찰나지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억!"
"누… 누구냐?"
순간 중인들은 대경하여 홱 돌아섰다.
그런 그들의 눈에 석실 벽에 한 명의 괴인이 유령같이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다 낡은 폐포에 귀신 형상의 철가면을 쓴 인물, 그는 한 손에 검붉은 낫
(鎌)을 들고 있었다. 공포스런 귀면(鬼面)에 낫까지 들고 있어 그 인물은
마치 전설 속에 나오는 악귀나찰같이 보였다.
"네… 놈은 누군데…!"
막거명이 대갈하며 분노의 표정으로 썩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염라대왕이나… 만나 봐라. 내가 누군지는… 그가 가르쳐 줄 것이다!"
귀면인(鬼面人)- 철운비의 폭갈에 막거명의 음성은 오간 데없이 파묻혀 버
렸다.
번- 쩍!
철운비의 손에 들린 낫, 즉 지옥혈겸(地獄血鎌)이 벼락같이 석실 안을 그어
버렸다.
"크아___악!"
"케에엑…! 지… 옥혈겸(地獄血鎌)?"
다음 순간 처절한 비명과 피보라가 확 퍼져올랐다.
쿵… 쿵!
이어 끔찍하게도 찢긴 인육과 팔다리가 사방으로 튀었다.
아… 보라! 없었다. 찰나지간에 석실에는 서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막거명을 비롯한 흉한들 전원이 지옥혈겸에 갈가리 찢겨 피 속에 나뒹굴고
있지 않은가? 실로 처참하고도 놀라운 광경이었다.
"흐…윽!"
그때 당숙빈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듯 공포와 경악으로 봉목을 치떴다.
그 모습에 철운비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부인을… 보고 싶어하는 귀여운 녀석이 있소!"
그는 천천히 당숙빈을 향해 다가섰다. 하지만 당숙빈은 이미 충격에 눈을
치뜬 채 기절해 있었다.
"휴…!"
철운비는 당숙빈의 처참한 모습에 진저리를 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그는 당숙빈의 벌거벗은 몸을 침상에서 풀어냈다. 그리고 자신의 폐포
를 벗어 당숙빈의 나신을 덮어준 뒤 그녀를 옆구리에 끼었다.
바로 그 때였다.
"침입자다!"
"카앗! 감히 참회마전(懺悔魔殿)에 뛰어들다니… 죽으려고 환장했구나!"
화라락!
분분한 사내들의 외침과 함께 석실의 입구로 수십 명의 장한들이 속속 무기
를 꼬나들고 들이닥쳤다.
철운비는 몰려드는 장한들을 흘깃 돌아보았다.
"갑… 시다, 부인!"
이어 그는 기절한 당숙빈을 안고 석실의 입구로 날아갔다. 몸을 날림과 함
께 그의 손 끝에서 잠마폭풍참(潛魔暴風斬)의 무서운 파멸폭풍(破滅暴風)이
일어나 석실의 입구를 강타했다.
콰콰- 쾅!
"케- 에엑!"
"큭! 마… 신(魔神)이다!"
철운비의 일격에 석실의 입구 주위 수십 장이 폭음과 함께 박살나 날아갔
다. 그 안에 있던 장한들도 피모래가 되어 날아가 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
다.
철운비는 노기충천해 있었다.
"나… 를 막지 마라! 본인은 지금 무척 화가 나 있어. 막으면… 누구라도
이같이 만들어 준다!"
피- 잉!
그는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 노호를 터뜨리며 전면으로 폭사해 나갔다.

철운비가 사라진 직후,


"크으! 저… 놈이 바로 거령수황(巨靈獸皇)을 상하게 하고 적아황(赤峨皇)
과 막사후(莫獅吼)를 구해간 고독패왕(孤獨覇王)의 후예인가?"
고통과 경악이 뒤섞인 미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스윽…
이어 시체들 중에서 한 명이 전신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채 비틀거리며 일
어섰다.
막거명(莫巨命), 바로 철사대제(鐵獅大帝) 막붕(莫鵬)으로 위장한 그 자였
다.
그는 안면을 처참하게 일그러뜨린 채 옆구리를 움켜쥐고 비틀거리며 일어섰
다. 놀랍게도 그는 지옥혈겸에 정통으로 옆구리를 스치고도 즉사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옆구리가 한 자 가량 찢어져 내장까지 끊어졌으나 죽을 정도는 아니었
다. 그런 그 자의 적포 안쪽에 언뜻 검은 빛의 보갑(寶甲)이 비춰 보였다.
"천잠사(天蠶絲)로 잔 천잠보갑(天蠶寶甲)까지 찢어 버리다니… 혹시 그 놈
이 쓴 낫이 바로 지옥혈겸(地獄血鎌)이 아닐까?"
막거명은 극도의 공포로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석실을 빠져나갔다.
하나 문득 그의 눈빛이 아주 교활한 빛으로 번뜩였다.
"어쩌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지도 모르겠는데… 막사후를 놈이 구한
것을 알면 당숙빈은 북산풍운번(北山風雲幡)을 그놈에게 맡기려 할지도…!"
공포에 떨던 막거명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흐흐… 아직 승부가 끝난 것은 아니다, 애송이…!"
그는 음흉하게 중얼거리며 석실 밖으로 사라져 갔다.

-석림(石林),

사자철림(獅子鐵林)의 총단 북방 오십여 리에 자리한 하나의 계곡이다.


그 계곡은 온통 수많은 비석들로 뒤덮여 있었다. 작은 것은 한 자에서부터
큰 것은 무려 십여 장에 이르는 거대한 비석들… 세워진 연대도 천 년 이전
부터 며칠 전에 세워진 것까지 다양했다.
그렇다. 이곳은 바로 사자철림(獅子鐵林)의 역대 전사(戰士)들이 파묻힌 묘
지였다. 비석으로 가득하다 하여 석림(石林)이라 이름 붙여졌다.
석림은 사자철림의 제일금지(第一禁地)였다. 석림에 허가없이 들어가는 것
은 북산 일대의 제일금기였다. 그것은 석림이 바로 철사일족(鐵獅一族) 천
년투혼(千年鬪魂)의 상징인 탓이었다.

이경(二更) 무렵,
짙은 어둠이 석림 일대를 뒤덮고 있었다. 주위는 적막했다. 너무 적막하여
수많은 비석들로 뒤덮인 석림은 귀기마저 감돌았다.
피- 이잉!
문득 하나의 인영이 적요를 깨며 석림의 상공을 유성같이 흘러갔다. 마치
한 마리 천마(天馬)같이 석림의 중지로 날아드는 그 인영은 바로 철운비였
다.
그의 두 팔에는 당숙빈이 축 늘어져 있었다.
"바로… 저기예요!"
당숙빈은 힘겹게 말하며 철운비가 질주하는 전면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하나의 거대한 비석이 우뚝 서 있었다. 높이는 무려 십 장, 수백
년 간 풍상에 씻겨 원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변모된 거대한 비석이었
다.
철운비는 어둠 속에서도 그 비석의 전면에 새겨진 흐릿한 글을 읽을 수 있
었다.

<제 십오대 북산제왕(北山帝王) 사자천존(獅子天尊) 막천형(莫天形) 지위


(之位).>

글의 내용은 그러했다.
사자천존(獅子天尊) 막천형(莫天形)-!
그렇다! 그 비석은 위대한 사자철림(獅子鐵林)의 패왕 사자천존(獅子天尊)
의 비석이었다.
그가 다른 네 명의 세외기인들과 함께 분연히 검을 들어 아수마황을 요격함
으로써 북산 사자철림은 천하 오대무벌의 일가가 되었고 지난 오백 년 간
북산무림의 맹주로 위명을 떨쳐올 수가 있었다.
화라락!
철운비는 당숙빈을 안고 훌훌 사자천존의 비석 앞으로 내려섰다.
"왜 이곳으로 오자고 하셨소?"
그는 웅장한 사자천존의 비석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대륙을 구했던 위대한
투사의 비석을 바라보는 철운비의 가슴에는 회오리 같은 상념이 일었다.
그때, 당숙빈이 미약한 음성으로 철운비의 상념을 깨뜨렸다.
"은공… 께서는 이 천한 계집의 생명인 사후(獅吼)를 구해 주셨어요. 그래
서 한 가지 물건을 드려 그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려고 해요!"
그녀는 처절한 눈빛으로 자신의 위대했던 선조의 유적을 올려다 보았다.
"이 신단(神壇)을 옆으로 밀어 보세요. 그 안에… 은공께 드릴 선물이 있어
요!"
그녀는 사자천존의 비석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주르르…!
그런 그녀의 파리한 뺨으로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못난 후손을… 용서하소서! 저는 더 이상 북산풍운번(北山風雲幡)을 지킬
수가 없어 그것을 이 젊은 초인(超人)에게 맡기려 하나이다!)
깊은 죄책감으로 당숙빈의 눈빛이 처절하게 물들었다.
"…!"
철운비는 침중한 안색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당숙빈을 조심스
럽게 바닥에 내려 놓고는 말없이 비석 앞에 놓인 신단으로 다가섰다.
신단은 넓이가 삼 장 이상으로 족히 십만 근은 나가 보였다.
그그긍…!
하지만 철운비가 그것을 슬쩍 밀자 신단은 가볍게 옆으로 밀려났다.
신단이 밀려난 자리에는 하나의 길다란 공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공간
안에는 다섯 자 길이의 하나의 철함(鐵函)이 하나 들어 있었다.
"…!"
철운비는 조심스럽게 철함을 집어 들어 열어 보았다.
철컹…!
쇠소리와 함께 철함이 열려졌다.
순간 철운비는 흠칫했다.
(깃발(幡)이 아닌가?)
철함 속에는 하나의 깃발이 단정하게 접혀져 있었다. 깃봉의 길이는 네 자
정도, 그 위에 폭이 한 자, 길이 석 자 정도의 깃폭이 달려 있었다.
"…!"
철운비는 한눈에 깃폭이 천잠사로 짜여져 있음을 알아보았다.
팟! 쩌러렁!
그는 깃발을 집어 들어 펼쳐 보았다.
깃폭의 사면에는 일천 개의 작은 칼(刀)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깃폭의 전면, 사자(獅子)와 늑대(狼), 그리고 독수리가 뒤엉킨 위에
검은 구름이 뒤덮인 삼수쟁패풍운도(三獸爭覇風雲圖)가 정교하게 수놓여져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철운비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훌륭… 한데!"
그는 한눈에 그 문양 중에 극히 오묘한 세 가지 구결(口訣)이 숨겨져 있음
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풍운제왕결(風雲帝王訣)!
그 같은 이름의 삼식(三式)의 초식이 바로 그것이었다.
천 년 그 이전, 북산(北山)을 놓고 쟁패했다는 북산삼황(北山三皇)의 최후
절기가 바로 그것들이었다. 하지만 지난 천 년 간 그 풍운제왕결(風雲帝王
訣)을 연마해 낸 자는 아무도 없었다.
철운비는 한동안 풍운제왕결(風雲帝王訣)을 살피다가 깃폭의 뒷면을 바라보
았다. 그곳에는 깨알같은 글로 일천 개의 문파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사자철림(獅子鐵林)!
-낭인맹(狼人盟)!
-금시천궁(金翅天宮)!
……

이름하여 북산일천군벌(北山一千軍閥)!
그들의 서명이 크지 않은 깃폭에 가득 적혀 있었다. 그 서명은 일천 개의
문파가 자신들의 운명을 그 깃발의 주인에게 위탁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철운비는 그것을 깨닫고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열 관 정도 무게의 별로 볼품없는 깃발… 하지만 그것에는 놀랍게도 북산
일대 오십만 군웅들의 생명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느끼자 철운비는 북산풍운번(北山風雲幡)이 수천억 관의 무게로 느
껴졌다.
이윽고 그는 침중한 표정으로 당숙빈의 앞으로 다가섰다.
"나는 이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부인!"
그는 무거운 어조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말에 당숙빈은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천첩의 바깥 분이 모살(謀殺)당하신 이상… 그것을 소지할 자격이 있는 사
람은 이 북산(北山)에 이미 없어요.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가세요. 북산풍
운번(北山風雲幡)을 지닌 이상… 이제 한시라도 북산군벌 오십만 정영을 은
공의 수족으로 부릴 수 있어요!"
"하지만…!"
철운비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렸다.
그러자 당숙빈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말했다.
"정… 부담스러우시다면… 그것을 천첩의 아들 사후(獅吼)가 성인이 될 때
까지 만이라도 갖고 계세요. 이것은… 천녀의 마지막 부탁이에요!"
"음…!"
철운비는 낮게 침음하며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후일 사후가 사자철림(獅子鐵林)의 지존(至尊)이 될 때까지 제가
보관하는 것으로 하지요!"
그 말에 당숙빈은 비로소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후훗! 누구 마음대로… 그것을 갖겠다는 것이냐 애송이…?"
돌연 어디선가 한 줄기 음산한 음성이 들려왔다.
"막… 거명(莫巨命)!"
순간 당숙빈은 안색이 하얗게 변하며 부르짖었다.
철운비도 흠칫하며 음성이 들린 곳을 주시했다.
언제 나타났을까?
화라락…!
하나의 비석 위, 흠뻑 피에 젖은 적포의 중년인이 오만하게 팔짱을 낀 채
우뚝 서 있었다.
막거명(莫巨命)!
그 자는 바로 철사대제(鐵獅大帝) 막붕(莫鵬)으로 위장했던 인물이었다.
철운비는 막거명의 출현에 뜻밖이라는 기색을 지었다.
"참회… 마전에서 죽지 않았었느냐?"
그는 귀왕철면 사이로 두 눈을 싸늘하게 번뜩이며 막거명을 노려보았다.
막거명은 철운비의 말에 냉소를 터뜨리며 이를 갈았다.
"흥! 철사후예는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다! 참회마전에서 본좌가 죽지 않았
기 때문에 이제 네놈이… 죽어 주어야 한다 애송이!"
말과 함께 그는 손을 쳐들었다.
화라락! 스스스…
그러자 돌연 사방의 비석 뒤에서 아홉 명의 노인이 떠올라 철운비와 당숙빈
을 에워쌌다.
그들은 머리와 수염이 온통 눈이 내린 듯 새하얀 노인들로싸 도무지 나이를
추측할 수 없었다. 전신이 마치 늙은 사자(獅子)들 같은 당당한 위엄과 패
도적인 눈빛을 지닌 노인들이었다.
철운비는 검미를 모았다.
(저… 쥐새끼 같은 놈이 어떻게 거리낌없이 나타났는가 했더니 믿는 데가
있었군!)
그는 나타난 아홉 명의 노인을 돌아보며 내심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그는 노인들이 풍기는 기도에서 그들이 막거명보다 최소한 두 배 이상 강한
내공을 지닌 고수들임을 알아 본 것이었다.
"구대장로…!"
그때 노인들을 본 당숙빈이 옥용이 새하얗게 변하며 비칠 물러섰다.
철운비는 그런 당숙빈을 얼른 부축하며 내심 흠칫 놀랐다.
(구대장로? 그렇다면 이 노인들이 사자철림 최강의 고인들이라는 북산구무
황(北山九武皇)이란 말인가?)
그의 뇌리에 철사신녀(鐵獅神女) 적아황(赤娥皇)에게서 들은 아홉 초고수들
의 이름이 떠올랐다.

-북산구무황(北山九武皇)!

그들은 모두 백 세 이상 먹은 전대고인들로써 사자철림(獅子鐵林) 최강의


고수들이었다.
그들은 평소 사자철림의 깊은 곳에 자리한 원로원(元老院)에 칩거하여 무림
의 일에 관여치 않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이는 때는 단 한 가지 경우 뿐이었다. 그것은 사자철림에 존폐
의 위기가 닥쳤을 때 뿐이었다.
북산구무황(北山九武皇)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지만 한 번 움직이면 아무도
그들을 막지 못한다고 한다.
그들은 개개인이 더 이상 강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 고인들이었다. 그 때문
에 북산구무황 중 두 명 이상 동시에 출수하면 어느 누구도 당하지 못한다
고 한다.
비록 지옥천존(地獄天尊)이라 할지라도…
한데 그 북산(北山)의 전설적 고수들인 북산구무황(北山九武皇)이 지금 이
곳 석림(石林)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함인가?
북산풍운번(北山風雲幡)-!
그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었다.
철운비는 막거명과 북산구무황을 쓸어보며 철면 속에서 입술을 실룩거렸다.
(일이 더럽게 되었군!)
막거명-! 그자는 지금 철사대제(鐵獅大帝) 막붕(莫鵬)의 형상을 한 정교한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다. 그것은 지극히 정교하여 자칫 철운비조차 속아 넘
어갈 뻔했다. 당연히 북산구무황도 막거명을 조금도 의심치 않고 있었다.
철운비는 난감한 듯 내심 염두를 굴렸다.
(자칫 아무것도 모르는 저 늙은이들과 명분없는 드잡이질을 하게 생겼다!)
그는 북산구무황 뒤의 막거명을 노려보았다.
(피를 보지 않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다! 일시에 저 가짜를 제압해야
한다!)
철운비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쯧! 천후(天后)! 북산풍운번(北山風雲幡)을 외인에게 넘겨 주다니 이 무슨
짓이오?"
"천후(天后)가 사후(獅吼)의 실종으로 심신이 불안정한 상태임을 아나… 이
번 일은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소!"
북산구무황들이 당숙빈을 바라보며 침통한 어조로 한 마디씩 했다.
"흑…!"
하지만 철운비에게 부축된 당숙빈은 눈물만 흘린 뿐 무어라 변명조차 하지
못했다. 어찌 자신이 가짜 철사대제(鐵獅大帝)에 의해 유린당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자신의 입으로 차마 밝힐 수 없는 수치스런 일이었다.
철운비는 그렇듯 처절한 당숙빈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눈
빛이 아주 냉혹하게 굳어졌다.
그는 십 장 저편의 막거명을 노려보며 싸늘하게 냉갈했다.
"쥐새끼같은 놈! 너는… 한 가지 실수를 했다! 그래서… 네놈은 죽어야만
한다!"
[뭐라고?]
그의 말에 막거명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둘만 합치면 환우무적(環宇無敵)이라는 북산구무황이 아닌가? 그들이 안중
에도 없다는 듯한 철운비의 태도는 막거명이 보기에 얼마나 어이없는 것인
가?
하나 그런 철운비의 모습에 웬지 모를 섬뜩한 느낌이 막거명의 뇌리를 스쳤
다.
"내가… 무슨 실수를 했단 말이냐, 애송이?"
그는 내심의 동요를 감추려 짐짓 허세를 부리며 일갈했다.
빠직!
철운비의 눈빛이 더 한층 강하고 냉혹해졌다.
"네놈의… 실수는 바로 다시 본인의 앞에 나타났다는 점이다!"
번쩍!
말의 여운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신형은 벼락치듯 떠올라 막거령을 향해
덮쳐갔다. 그 속도의 기쾌함은 뇌전(雷電)의 빠르기가 무색할 정도였다.
"어엇!"
"놈! 멈춰랏!"
순간 대경한 북산구무황은 일시에 몸을 떠올리며 맹렬하게 장력을 내쳤다.
콰르르릉! 쩌러렁!
아홉 쌍의 철장(鐵掌)에서 쇳소리 나는 장력이 폭풍같이 일어나며 철운비를
후려져 갔다. 철운비의 신형은 순간적으로 북산구무황의 장력에 휘말리는
듯 보였다.
한데,
"무영… 극품(無影極品)!"
돌연 철운비의 입에서 한 소리 노호가 터지며 허공에 떠올른 그의 신형이
갑자기 배로 빨라졌다.
아! 그것은 실로 신기(神技)였다. 그렇지 않아도 기쾌하기 이를 데 없던 철
운비의 신형이 한 줄기 흰 광채로 변해 그대로 북산구무황의 포위망을 벗어
났던 것이다.
"어엇! 저것은 녹림(綠林)의 늙은 도적 무영종(武影宗)의 경공이다!"
"극품무영보법(極品無影步法)을 십성(十成) 이상 익힌 자가 있다니…!"
북산구무황은 철운비의 가공할 경공에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억!"
쿠- 웅!
그 직후 십 장 밖의 비석 위에 서서 관전하던 막거명이 비명과 함께 아래로
뚝 떨어졌다. 북산구무황의 포위망에서 빠져 나온 철운비가 한 줄기 질풍같
이 막거명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었다.
북산구무황은 대노함을 금치 못했다.
"임주(林主)! 괜찮소?"
"바득! 하늘과 땅도 모를 놈이로군! 감히 사자철림(獅子鐵林)의 당주를 해
치려 하다니…!"
화라락!
피- 이잉!
그들은 노호를 내지르며 일제히 철운비의 뒤를 따랐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헉! 너… 너는!"
"이럴 수가…!"
철운비를 추적하려던 북사구무황이 노안을 부릅뜨며 급급히 신형을 멈추었
다. 그들의 시선은 방금 철운비에게 스쳐 떨어진 막거명에게 향하고 있었
다.
비틀거리며 일어서고 있는 막거명의 얼굴에서 한 장의 얇은 인피면구가 반
쯤 뜯겨져 나가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철운비는 무서운 속도로 막거명을 스쳐가며 그 자가 쓴 인피면구의 일부를
찢어낸 것이었다.
막거명의 면구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철사대제(鐵獅大帝)와는 전혀 다른 얼
굴이었다.
나이는 대략 사십 전후 정도, 명가의 후예인 듯 단정한 용모이나 전체적으
로 편협한 인상의 얼굴이었다.
그때,
"헉…!"
북산구무황의 시선에 의아함을 느끼고 무심결에 얼굴로 손을 가져가던 막거
명의 전신에 일순 격렬한 파문이 일었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이 얼굴에 쓴
인피면구가 뜯겨져 나간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막거명의 안면이 당혹함과 낭패함으로 휴지조각같이 와락 어지러졌다.
북산구무황의 경악은 극도에 달했다.
"거… 명(巨命)! 너는… 죽었다고 알려진 임주(林主)의 이복 동생인… 거명
(巨命)이… 아니냐?"
"네… 네가 어떻게 임주의 형상을 하고 있단 말이냐?"
그들은 너무도 엄청난 충격과 경악에 입만 딱 벌릴 뿐이었다.
"흥! 이제야 아셨군. 그 자는 지옥천존(地獄天尊)에 의해 귀림의 철사대제
(鐵獅大帝)와 뒤바뀐 것이오!"
그때 한쪽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철운비가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
그의 손에는 막거명이 썼던 반 쪽의 인피면구가 들려 있었다.
그는 방금 막거명을 죽일 수도 있었다. 하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어쨌든
이 일은 사자철림 내부의 문제임으로 북산구무황 등이 해결하기를 바란 것
이었다.

-옥사자(玉獅子) 막거명(莫巨命).

그 자는 철사대제(鐵獅大帝) 막붕(莫鵬)의 이복동생으로 그는 야심이 큰 인


물이었다.
하나 적자(適子)가 아닌 서자(庶子)로 태어난 까닭에 사자철림의 임주가 될
자격도 없을 뿐더러 문중 인물들에 의해 조롱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것은
막거명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한(恨)으로 남았다.
그러던 십 년 전, 그의 이복형인 철사대제(鐵獅大帝) 막붕이 드디어 사자철
림의 임주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바로 그날 밤 막거명은 북산풍운번(北山風雲幡)을 훔쳐내어 사자철림을 떠
났다. 그는 북산풍운번으로 북산군벌(北山軍閥)이 다른 세력들을 조종하여
철사대제에 대항할 생각이었다.
하나 그는 이내 철사대제에 의해 추종당했다. 그리고 일장의 격투 끝에 북
산풍운번을 뺏기고 천장단애로 떨어졌다. 그때 그는 죽었다고 알려졌다.
한데 놀랍게도 그가 철사대제로 변신하여 나타난 것이 아닌가?

"우하하하핫!"
돌연 막거명은 어깨를 흔들며 미친 듯 웃어제꼈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며 광기 서린 눈으로 중인들을 돌아보았다.
"흐흐! 그렇소! 바로 나요! 십 년 전 당신들의 잘난 가주인 막붕에 의해 천
길단애로 밀려 떨어진 막거명이오!"
그는 악을 쓰듯 외치며 북산구무황을 돌아보았다. 그의 음성은 격분으로 떨
리고 있었다.
"막붕은 늘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었소! 그의 어머니가 정실이고 나의 어
머니가 첩(妾)이라는 이유 때문에… 아버님은 물론… 막대한 부와 권력까지
도…!"
찌- 익!
이어 막거명은 거칠게 반쪽의 인피면구를 마저 얼굴에서 찢어냈다. 그러자
제법 영준하고 단아한 중년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의 안면근육이 거칠게 실룩거렸다.
"어머님이… 당신들의 냉대 속에 쓸쓸히 돌아가셨을 때 나는 그 분의 영전
에 맹세했었소! 언젠가는 북산군벌을 내것으로 만들고 말겠다고…"
그는 광기 번들거리는 눈으로 외치며 북산구무황을 돌아보았다.
"…!"
"…!"
북산구무황은 지나친 충격으로 석상같이 굳어져 멍한 표정으로 막거명을 바
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막거명의 두 눈은 원한과 격분으로 한껏 부릅떠졌다.
"죽어가던… 나를 지옥천존이 구해 주었고… 그의 도움으로… 북산군벌이
내 손에 들어오기 직전이었는데…!"
츠-- 읏!
그는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철운비를 바라보았다.
"네… 놈이 모든 것을 망쳤다! 바득! 이 빚도 꼭 갚고 만다! 어린 놈!"
그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철운비에게 악을 썼다.
그때 북산구무황 중 한 명이 문득 정신을 차리며 노갈을 터뜨렸다.
"바득! 거명! 임주님을… 어떻게 했느냐?"
그 말에 막거명은 음산하게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막붕? 흐흣! 그 놈은 이미 한 줌의 독수(毒水)로 화한 지 오래일 것이다!
천존(天尊)이 시전한 무형지독(無形之毒)에 중독되어 쓰러졌으니까!"
"흐- 윽!"
쿵…!
순간 장권 밖에서 듣고 있던 당숙빈의 안색이 백짓장같이 변해 힘없이 무너
져 내렸다. 남편 철사대제가 살아 있으리라는 한 가닥 희망이 막거명의 그
한 마디에 산산이 깨진 것이었다.
"죽…일 놈! 비록 배가 다르다고는 해도 림주는 네 형이거늘…!"
"네놈이… 사자철림(獅子鐵林)을 망치는구나! 용서할 수 없다!"
그와 함께 북산구무황이 노갈을 터뜨리며 일시에 막거명을 향해 덮쳐갔다.
"멈춰랏!"
피- 잉!
순간 막거명은 훌쩍 십 장 뒤로 물러서며 폭갈을 터뜨렸다. 그런 그 자의
손에는 어느새 한 알의 검붉은 구슬이 들려 있었다.
그것을 본 북산구무황은 대경함을 금치 못했다.
"벽력… 굉천뢰(霹靂宏天雷)다!"
그들은 경악의 외침을 발하며 급급히 멈춰섰다.

-벽력굉천뢰(霹靂宏天雷)!

그렇다! 막거명이 든 것은 저 남황(南荒) 벽력부(霹靂府) 최강의 화기(火


器)라는 벽력굉천뢰(霹靂宏天雷)였다. 그것이 폭발하면 수십 장 내의 모든
것이 한꺼번에 박살나 버린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북산구무황은 부득불 멈춰서지 않을 수 없었다.
막거명은 북산구무황의 그런 모습에 득의의 음소를 터뜨렸다.
"나는… 반드시 돌아온다! 돌아와서 오늘의 빚을 꼭 갚고야 말겠다!"
말과 함께 그는 슬며시 뒷걸음질쳤다.
"행여나 해서 하는 얘긴데… 본인을 쫓아올 생각은 하지 마라! 그 순간 이
벽력굉천뢰는 가루가 되고 말 테니까!"
막거명은 중인들을 돌아보며 냉갈을 터뜨렸다. 그러다 문득 그의 시선이 한
쪽의 비석 아래에 쓰러져 있는 당숙빈에게 이르렀다.
순간 그의 입가에 음탕한 미소가 번졌다.
"흐흐… 형수님! 당신의 그 맛은 본인이 안아본 어떤 계집보다 좋았소. 곧
… 다시 내게 안길 날이 올 테니… 서운해하지 마시오."
파앗!
말을 마침과 함께, 그는 지면을 박차고 석림 밖으로 날아 나갔다.
한데, 그가 막 하나의 비석을 날아 넘을 때였다.
"바득! 어딜 가려느냐 막거명! 이곳이 네 무덤이거늘…!"
돌연 한 줄기 사나운 여인의 교갈이 터져나왔다.
휘- 익!
그와 함께 한 명의 적포여인이 비석의 뒤쪽에서 벼락같이 치솟아 올랐다.
그녀는 사내를 무색케 하는 당당한 체격의 여인이었다.
그 거녀를 본 순간 막거명의 두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네년은… 적… 아황!"
그는 대경하며 경악성을 터뜨렸다.

-철사신녀(鐵獅神女) 적아황!

나타난 여인은 바로 그녀였다.


"죽어랏! 지옥… 벽전풍(地獄霹電風)!"
콰- 득!
적아황은 나타나자마자 날카롭게 교갈을 터뜨리며 허리춤에 대었던 우수를
맹렬하게 떨쳐냈다.
쩌- 어엉! 빠지직!
그녀의 허리춤에 감겨 있던 철사패왕도(鐵獅覇王刀)가 시퍼런 도광(刀光)을
끌며 막거명을 그어냈다.

-지옥벽전풍(地獄霹電風)!

그 도식(刀式)은 바로 철운비가 적아황에게 가르쳐 준 지옥구류(地獄九流)


의 도법 중 제일식이었다. 그 기쾌하고 잔독신랄함은 가히 환우무적이라 할
수 있었다.
막거명이 경악했을 때 지옥벽전풍의 벼락같은 도광은 이미 벽력굉천뢰를 든
그 자의 오른팔을 휩쓸고 있었다.
"안… 돼! 크- 아악!"
다음 순간 막거명의 입에서 폐부를 쥐어짜는 듯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후두둑!
그와 동시에 시뻘건 피가 허공으로 확 번지며 막거명의 오른팔이 어깨에서
부터 성둥 잘려져 허공으로 퉁겨졌다. 물론 벽력굉천뢰를 여전히 움켜쥔 그
상태로였다.
막거명의 팔과 함께 지면으로 떨어지는 벽력굉천뢰를 본 북산구무황은 안색
이 홱 변했다.
"위험하다 아황아!"
그들은 대경하며 일제히 소리쳤다. 다급한 순간이었다.

∑ 제 23 장 다시 만난 남장미녀(男裝美女)

벽력굉천뢰(霹靂宏天雷)를 쥔 막거명의 팔이 그대로 땅에 떨어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일시에 대폭발이 일어나 거
막명은 물론 적아황까지도 산산조각이 날 형편이었다.
북산구무황은 경악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바로 그 때였다.
"우-- 웃!"
피-- 잉!
이를 지켜보던 철운비가 맹렬하게 신형을 쏘아가며 오른손을 휘둘렀다.
아…! 어느덧 그의 오른손에는 하나의 푸른 벽옥(碧玉)의 낚싯대가 들려 있
지 않은가?
피-- 잉!
그 벽옥의 낚싯대는 돌연 이 장 길이로 늘어났다. 동시에 그 끝에서 천잠사
의 낚싯줄이 기쾌무비하게 뻗어나갔다.
벽옥마간(碧玉魔竿)-!
낚싯대는 바로 그것이었다.
파-- 앗!
찰라지간 철운비의 손에서 뻗어나간 벽옥마간은 십 장 밖의 벽력굉천뢰와
막거명의 팔을 벼락같이 휘감아냈다. 그것은 실로 간담을 조이는 아슬아슬
한 광경이었다.
"훗…!"
"역시… 무영종(無形宗), 그 늙은 도적의 후예로군!"
북산구무황은 그제서야 가슴을 쓸어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황! 나를 말려죽일 작정이오?"
화라락!
그때 철운비는 벽력굉천뢰를 가까스로 회수하며 표표히 철사신녀 적아황의
앞으로 내려섰다.
적아황은 서글서글한 눈으로 철운비를 바라보며 생긋 미소지었다.
"당신이… 벽력굉천뢰를 무사히 회수할 줄 믿었어요!"
그 말에 철운비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소를 지었다.
"한 번 더 그런 경솔한 짓을 하면 볼기를 때려 줄 거요!"
이어 그는 전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오른팔이 잘린 막거명이 비칠
비칠 일어서고 있었다. 그의 안면은 분노와 고통으로 참담하게 일그러져 있
었다.
"네년… 놈들이… 나 막거명을 죽이는구나!"
그는 절망과 원한이 서린 눈으로 철운비와 적아황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문득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히죽 웃었다.
"흐흐… 이승에서는… 졌으나 저승에서는 반드시 네놈들을 이기고 말겠다!"
그는 악을 쓰듯 말하며 돌연 왼손으로 자신의 정수리를 힘껏 후려쳤다.
퍼-- 억!
순간 둔탁한 소리와 함께 막거명의 머리가 수박같이 으스러져 버렸다. 선혈
과 함께 허연 뇌수가 사방으로 확 번졌다. 머리가 으스러진 막거명은 두 눈
을 찢어져라 부릅뜬 채 무섭게 철운비를 노려보았다.
쿠-- 웅!
그러나 그는 곧 둔탁한 음향과 함께 뻣뻣하게 앞으로 고꾸라졌다. 삽시에
주위의 밤공기는 역겨운 피비린내로 가득 뒤덮였다.
"…!"
철운비와 적아황은 아무 말도 없었다.
다가선 북산구무황도 죽어 넘어진 막거명의 시체를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자칫 북산군벌을 파멸시킬 뻔한 패륜아(悖倫兒)가 중인들의 앞에 시체로 변
해 누워 있는 것이었다. 시체를 바라보는 중인들의 가슴 속은 마치 무거운
쇳덩이가 들어찬 기분이었다.
한데 그때,
"흐윽…"
돌연 한 소리 짤막한 신음이 중인들의 뒤에서 들려왔다.
"…!"
중인들은 흠칫하며 홱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들은 대경실색했다. 사자천후(獅子天后) 당숙빈이 바닥에 모로 쓰러
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혀를 깨문 듯 입가로 꾸역꾸역 선혈을 쏟고 있
지 않은가?
"주… 모님!"
"이… 이런! 자진(自盡)을 하시다니…"
적아황과 북산구무황은 대경하여 분분히 당숙빈에게로 날아갔다.
철운비는 그 모습에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손에 든 북산풍운번을 만지작
거렸다.
(이 모두가… 지옥천존의 야심에서 비롯된 불상사다.)
그는 귀왕철면 속에서 입술을 잘근 깨물며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더 이상 불행해지는 사람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당신을 쓰러
뜨리고 말 것이오 지옥천존!)
그는 지옥천존의 모습을 떠올리며 내심 결심을 굳혔다.
스-- 읏!
문득 밤하늘로 한 줄기 유성이 길게 꼬리를 끌며 지나가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북산(北山), 사자일족(獅子一族)의 대지인 북산이었다.

자칫 북산군벌(北山軍閥)을 파멸에 이르게 할 뻔한 일단의 겁풍은 소리없이


제거되었다.
사자철림 내에서 철사대제(鐵獅大帝)가 가짜였음을 아는 인물은 모두 열 명
뿐이었다.
북산구무황과 적아황, 바로 그들이었다.
지옥마교에서 파견된 마인(魔人)들과 막거명의 추종자들은 적사십화(赤獅十
花)가 이끄는 적사여황단(赤獅女皇團)의 여전사들에 의해 한 명도 남김없이
제거되었다.
그들 북산의 암사자들은 어렴풋이 사건의 전말을 깨달았으나 내색지 않고
신속하게 사자철림을 정화(淨化)하는데 성공했다.
의혹은 영원히 그녀들의 가슴 속에만 감추어지게 될 것이다. 가엾은 그녀들
의 주모 사자천후(獅子天后) 당숙빈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당숙빈은 혀를 물었으나 다행히 자진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혀를 완전히 끊어 놓을 힘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화위복이랄까? 기력이 쇠진할대로 쇠진한 것이 오히려 그녀를 죽음에서
건져준 것이었다.
그리고… 철사대제(鐵獅大帝) 막붕(莫鵬)은 여전히 전과 다름없이 사자철림
과 북산군벌(北山軍閥)의 업무를 관장하고 있었다.
그는 물론 철운비의 환신(幻身)이었다. 그의 천면(千面) 절기는 이미 무영
종(無影宗) 이상의 경지에 이른지라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가 철사대제로 환신한 것은 당숙빈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서였다. 그것
은 북산구무황의 제일이었고 철운비 자신의 의사이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어느덧 보름의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철운비는 그동안
사자철림의 세력을 효율적으로 재조직하였다.
그것이 곧 닥쳐올 지옥마교(地獄魔敎)와의 일전에 대비하기 위해서임을 아
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황혼(黃昏),
스으… 스으…
진홍빛 노을이 사자철림의 총단인 철사부(鐵獅府)의 후원 가득히 흐르고 있
었다. 홍화(紅火)를 밝힌 붉디붉은 노을은 환상적인 색채를 이루며 타오르
고 있었다.
철사부 후원의 한쪽에는 아름다운 누각이 잘 정돈된 정원에 둘러싸여 있었
다. 그림같이 평화롭고 운치있는 광경이었다.
"까르르…!"
그 평화로운 경치 속에서 해맑은 어린아이의 웃음소리가 노을 속으로 번져
갔다.
어린아이, 한 명의 어린 사내아이가 정원의 잔디밭 위를 아장아장 걷고 있
었다. 바로 철사대제의 아들 막사후(莫獅吼)였다.
막사후는 보기 좋은 발그레한 얼굴로 뒤뚱거리며 나비를 쫓아다니고 있었
다.
"…!"
두 명의 여인이 흐뭇한 표정으로 그런 막사후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크고 작은 몸매의 두 여인, 그녀들은 누각 안에 있었다. 철사신녀 적아황,
그리고 사자천후 당숙빈이 그녀들이었다.
당숙빈은 파리한 안색으로 창가의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생기없던
그녀의 봉목은 제법 윤기를 띠고 있었다.
그녀는 따뜻한 정이 일렁이는 눈으로 어린 아들의 모습을 쫓고 있었다.
적아황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안도의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행이야. 사후아기씨가 주모(主母)에게 생의 의욕을 되살려 주고 있다!)
그녀의 입가에는 미미한 미소가 어렸다.
그때,
"아빠빠…"
돌연 정원의 막사후가 환히 웃으며 한쪽으로 뒤뚱뒤뚱 달려갔다.
막사후가 달려가는 곳은 정원의 입구인 월동문 쪽이었다. 그 월동문으로 막
한 명의 장한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네모 반듯한 위맹한 얼굴에 검붉게 전포를 걸친 그 인물은 철사대제 막붕!
아니, 그로 환신한 철운비였다.
막사후는 철운비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달려갔다.
철운비는 미소지으며 달려온 막사후를 번쩍 안아들었다.
"하하! 우리 사후는 하루가 다르게 무거워지는데…"
그는 유쾌한 듯 껄껄 웃었다. 이어 그는 막사후를 안고 누각 안으로 들어섰
다.
그러자 침상 위에 누워 있던 당숙빈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
"일어서지 마시오 부인!"
하지만 철운비는 일어나려던 당숙빈을 저지하며 막사후를 그녀에게 안겨 주
었다.
당숙빈에게 안긴 막사후는 배가 고팠는지 당숙빈의 저고리를 작은 손으로
파헤쳤다. 막사후의 고사리 같은 손에 의해 당숙빈의 저고리가 옆으로 벌어
지며 한 쌍의 풍만한 젖무덤이 나타났다.
"…!"
당숙빈은 자신의 젖무덤이 철운비의 시야에 드러나자 옥용을 빨갛게 붉혔
다. 그러나 애써 가리지는 않았다.
막사후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숙빈의 젖무덤에 얼굴을 묻고 열심히
빨기 시작했다. 그의 작고 앙증맞은 고사리 손은 빨지 않는 어머니의 다른
한쪽 젖가슴을 남에게 뺏길세라 꼭 움켜쥐고 있었다.
"…!"
당숙빈은 애정이 충만한 따뜻한 눈으로 젖을 빠는 어린 아들을 내려다 보았
다.
철운비는 침상 옆에 앉아 두 모자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후 막사후는 당숙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잠이 들어 버렸다. 그제서야
철운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작별… 인사를 드리러 왔소!"
"…!"
그의 말에 순간적으로 당숙빈의 교구가 경직되었다. 하나 이내 그녀는 평정
을 회복하고 막사후가 풀어헤쳐 놓은 저고리를 여몄다.
"벽력… 부(霹靂府)로 가시렵니까?"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물었다.
철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벽력부의 가장 강력한 화기인 벽력굉천뢰가 어떻게 지옥마교
의 손에 들어갔는지 알아볼 생각입니다."
그는 잠든 막사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지옥천존은 오대무벌을 비롯한 수많은 문파에 그
마수를 뻗어 놓은 상태일 것이오. 그 자와 싸우기 위해서는 먼저 각파에 뻗
힌 그 마수들을 제거하여 지옥마교를 철저히 고립시켜야만 하오!"
말을 하는 철운비의 눈빛이 아주 강해졌다.
그는 북산에 와서야 왜 오대무벌이 지옥마교의 횡행을 방관하고 있는지 알
아차렸다.
지옥천존은 교묘한 수법으로 오대무벌을 장악한 상태였다.
그 지옥천존의 지옥마교와 싸우기 위해서는 먼저 오대무벌에 침투한 마교의
무리를 제거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언제… 떠나시려는지요?"
문득 당숙빈이 기어들어가는 낮은 음성으로 철운비에게 물었다.
철운비는 말을 하는 그녀의 음성이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어느덧 철운비가 당숙빈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인물
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철운비는 그것을 깨닫고 내심 고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게 될 것이오. 그래서 미리… 작별 인사를 드리러
왔소이다!"
그는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그는 침중한 음성으로 말하며 잠시 당숙빈을 내려다 보았다. 이어 그는 돌
아서 천천히 누각을 걸어나갔다.
"상공…"
그런 그의 뒤를 적아황이 급히 쫓아나갔다.
"…!"
그제서야 당숙빈은 고개를 들어 월동문을 나서는 철운비를 주시했다.
철운비는 뒤따라 온 적아황의 손을 마주잡고 월동문 밖으로 사라졌다.
이미 살을 섞어 사실상의 부부가 된 두 사람이다. 당분간 헤어져 있어야 하
는 그들에게는 남은 시간이 너무나 짧기만 한 것이다. 두 남녀는 자신들만
의 공간으로 숨어들어가 아쉬운 열정을 불사를 것이다.
"내일… 아침에 떠난다고…"
당숙빈은 철운비와 적아황이 사라진 월동문을 주시하며 망연한 음성으로 중
얼거렸다.
문득 그녀의 슬픈 봉목에 뽀얀 물안개가 서렸다. 그와 함께 파리한 그녀의
입술 사이로 소리없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무사히… 돌아와요. 그때… 당신이 이 비천한 계집과 사후(獅吼)를 구해
줄 보답을 해드릴 테니…!)
그녀는 모종의 결의로 봉목을 빛내며 잠든 어린 아들을 꼬옥 껴안았다.
스으… 스으…
진홍빛 노을이 두 모자의 주위로 한 폭의 그림처럼 깔리고 있었다.

-야인산(野人山),

묘강(苗疆)과 중원의 경계를 이루는 험산(險山)이다. 야인산은 저 험하디험


하다는 사천(四川)의 촉산(蜀山)이 무색할 정도로 험준하기 이를 데 없었
다.
게다가 야인산은 열대인 남황(南荒)에 속한 지역인지라 온통 원시림으로 뒤
덮어 있었다. 그 원시림 속에는 각가지 독충과 독물, 그리고 독장(毒腸)이
도사리고 있어 자칫 길을 잘못 들면 영영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험험하기 이를 데 없는 험산 야인산, 그곳에는 하나의 거대한 가문(家門)이
도사리고 있었다.

-남황(南荒) 벽력부(霹靂府)!

바로 그들이었다.
저 오대무벌 중 남방을 지배하는 패자(覇者),
본래, 벽력부 뇌가(雷家)의 발원지는 서역(西域)이었다. 흑자는 그들이 천
축(天竺)에서 귀화한 일족이라고도 했다. 어쨌든 벽력뇌가(霹靂雷家)가 중
원일족이 아님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벽력천왕(霹靂天王) 뇌합극(雷合極)!

아수마황(阿修魔皇)을 쓰러뜨린 벽력부의 시조, 그는 처음 서역에 벽력부를


세웠었다.
그러나 백 년 전 벽력부는 이곳 남황 야인산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것은
묘강(苗疆) 살황독종(煞荒毒宗)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백 년(百年) 전, 묘강 살황독종은 천독강시(千毒疆屍)를 앞세워 중원을 침
습했었다.
아무도… 그 천독강시를 상대할 수 없었다. 오직 벽력부의 절정화기만이 그
들을 태워 죽일 수 있었다. 본래 독(毒)은 불(火)에 약한 법이 아닌가?
결국 살황독종의 독인(毒人)들은 벽력부의 화기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다
시 묘강으로 쫓겨갔다.
그 후 벽력뇌씨 일족은 살황독종을 견제하기 위해 서역에서 이곳 야인산으
로 이주했다.
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살황독종은 호시탐탐 중원진출을 시도해 왔다.
하나 그 때마다 그들은 벽력부에 의해 저지당하곤 했다.
살황독종의 입장에서 보면 벽력부는 그야말로 눈의 가시같은 존재였다.
반면 중원무림에 있어 벽력부는 남방을 지키는 수호신(守護神)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 일족이 바로 남황 벽력뇌가(霹靂雷家)의 일족이었다.
남방무림의 수호신인 벽력부(霹靂府)의 뇌가…
그러나… 지금 그 벽력부에 음울한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음을 중원은 까마
득히 모르고 있었다.
까마득히…

황혼 무렵, 주위는 온통 불을 지핀 듯 붉디붉었다.


구웍--!
문득 북천(北天)으로부터 하나의 점이 급격히 야인산을 향해 다가왔다.
그 점은 순식간에 커져 야인산의 상공에 이르렀다.
수호익룡(守護翼龍)!
그 점은 바로 수호익룡이었다.
수호익룡의 위에는 철운비가 폐포자락을 펄럭이며 앉아 있었다.
"저곳이 야인산 중 가장 험하다는 마천령이로군!"
그는 전면을 주시하며 중얼거렸다.
수호익룡이 날아가는 쪽에는 마치 병풍을 세워 놓은 듯 거대한 석벽이 밀림
사이에 우뚝 서 있었다. 높이는 무려 수천 장, 그것은 얼마나 높은지 구름
도 석벽의 중간 부분까지밖에 이르지 못했다.
철운비는 그 석벽을 주시하며 내심 중얼거렸다.
(저 마천령(魔天嶺) 너머에 벽력부가 있다고 했지!)
그는 급격히 다가가서는 마천령의 웅자를 보며 섬연하게 눈을 번뜩였다.
(벽력부의 시조 벽력천왕(霹靂天王) 뇌합극은 본래 천축인이었다. 혹시…
그는 저 천축(天竺)의 전설적 문파 뇌정신문(雷霆神門)의 후예가 아닐까?)
문득 철운비는 자시의 오른손목을 쓰다듬었다. 그곳에는 하나의 검붉은 환
(環)이 채워져 있었다. 바로 뇌정륜(雷霆輪)이었다.

-천축(天竺) 뇌정신문(雷霆神門)!

그 이름을 지금까지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천하의 모든 극양기공은


바로 그를 뇌정신문에서 파생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나 뇌정신문은 일천 수백 년 전 저 고금제일마종(古今第一魔宗) 불사성황
(不死聖皇)의 내습을 받아 궤멸되었다. 따라서 지금은 뇌정신문의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었다.
다만 사백 년 전 중원을 한바탕 뒤흔들어 놓았던 서장(西藏) 뇌정마찰(雷霆
魔刹)이 그 뇌정신문의 한 지류가 아닐까 생각될 뿐이었다.

철운비는 검미를 모은 채 내심 염두를 굴렸다.


(어쩌면… 이번 남황행(南荒行)에서 벽력부가 뇌정신문과 어떤 연관이 있는
지 알 수 있겠지!)
그 사이 수호익룡은 어느덧 마천령의 지척에 이르러 있었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번--- 쩍!
마천령 아래의 원시림 속에서 무엇인가 강렬한 광망이 백 장 높이로 치솟아
올랐다.
(저것은…!)
순간 그 광망을 발견한 철운비의 눈빛이 일변했다.
천 겹으로 치솟아 오른 광망은 나타날 때보다 더 빠르게 사그라 들었다.
그것을 본 철운비는 경악했다.
"천층검망(千層劍芒)! 저것은 어검술(馭劍術)로 일어나는 검기(劍氣)의 일
종이다!"
그는 신음하듯 중얼거리며 밀림을 내려다 보았다. 예의 광망이 누군가 일으
킨 강렬한 검기임을 알아 본 것이었다.
철운비 자신도 상승의 경지에 이른 검법을 연마했었다.
하나, 그렇다고 해도 방금의 그것 같은 검기는 일으킬 수 없었다. 아마도
그같은 천층검망을 일으킬 수 있는 자는 무림을 통틀어 다섯도 안 될 것이
다.
그 순간 철운비의 뇌리로 퍼뜩 한 명의 인물이 떠올랐다.
(흐음…잘하면 옛친구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철컹…!
그는 미소지으며 수호익룡이 목에 매인 대라철삭을 한 차례 흔들었다.
"천왕(天王)! 내려가자!"
그 말이 떨어짐과 함께,
구웍!
콰아아…!
수호익룡은 주인의 의도를 알고 곧장 검기가 치솟은 밀림을 향해 쏘아 내려
갔다.

마천령 아래--
어찌된 일인지 사방 백 장여가 온통 초토화되어 있었다. 아름드리 거목들이
모두 두 동강 난 채 어지러이 쓰러져 있었다.
놀랍게도 거목들은 모두 일 장 높이로 끊어져 넘어져 있었다. 그것은 누군
가가 무서운 검기(劍氣)로 백 장 내의 모든 수목을 일격에 넘어뜨린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츠으… 츠으…!
넘어진 나무들은 급격히 검은 독수로 녹아 내리고 있었다. 무엇인가 지극히
강렬한 독기(毒氣)가 그 나무들을 녹여내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면 장내의
흙과 암석들도 검은 독기로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장권의 끝,
"크크크…!"
"카아…!"
"…!"
기괴한 음향과 함께 세 개의 인영이 대치하고 있었다.
전신이 온통 먹물을 칠한 듯 시커먼 두 명의 괴인들이 좌우로 벌려선 채 한
명의 인물을 포위하고 있었다.

-천독강시(千毒疆屍)!

그렇다! 그 괴인들은 바로 살황독종에서 만든 천독강시들이었다. 숨결까지


무쇠라도 부식시킬 수 있는 독기가 실려 있다는 공포스러운 마물(魔物)들!
그 천독강시가 놀랍게도 이곳 벽력부의 영토인 야인산에 나타난 것이었다.
두 명의 천독강시들은 한 명의 검수(劍手)를 포위하고 있었다. 허름한 마의
에 빛바랜 영웅건을 이마에 두른 아주 아름다운 용모의 미검수였다.
"…!"
그는 한 자루 고검(古劍)을 내려뜨린 채 고개를 갸우뚱한 모습으로 서 있었
다.
기이했다. 미검수(美劍手)는 지금 그 무서운 천독강시들과 맞서고 있건만
그의 눈빛은 그저 허허로울 뿐이었다. 반쯤 감은 그의 눈은 조는 듯 마는
듯 내려뜨려진 고검의 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폭풍… 군림(暴風君臨)!>

고색창연한 고검의 검신에는 그와 같은 흐릿한 글이 새겨져 있었다. 그 글


은 고검이 아주 대단한 내력을 지닌 것을 나타내 주었다.

-폭풍제왕검(暴風帝王劍)!

검의 이름은 그러했다. 그것은 오백 년 전 폭풍검후(暴風劍后)라는 사상최


강의 여검수가 아수마황의 심장을 꿰뚫어 버리는데 사용했던 검중제왕(劍中
帝王)이었다.
한데 미검수는 대체 누구이기에 폭풍검후의 유물이었던 그 제왕지검(帝王之
劍)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삐-- 이익!
문득 어디선가 한 줄기 날카로운 호각성이 숨막힐 듯한 적막을 갈가리 찢어
발겼다.
"카-- 악!"
직후 두 명의 천독강시가 괴성을 내지르며 미검수를 덮쳐 들었다.
치지직…!
그 자들의 손 끝에서 시커먼 독강(毒剛)이 벼락같이 일어나 미검수를 후려
쳤다.
천독묵강(千毒墨剛)---!
천종극독(千種極毒)의 정화가 응결된 그것에 스치면 금강지신이라 할지라도
단번에 녹아 버린다.
한데 미검수는 천독묵강이 짓쳐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두 눈을
반쯤 내리깔고 검 끝만 주시하고 있었다.
파츠츠…!
순식간에 천독묵강은 미검수의 전신에 작렬했다.
아니 작렬한 듯이 보였다.
천독묵강이 그의 전신을 강타하기 직전,
번- 쩍… 비이잉!
미검수의 전신에서 돌연 검붉은 노을이 폭발하듯 천 겹으로 일어났다.
쩌러렁…!
동시에 천층으로 일어난 그 붉은 노을은 순간적으로 천독묵강을 안개같이
흩어져 버렸다.
"단철… 신강(丹鐵神剛)!"
어디선가 한 마디 놀란 신음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위이잉!
그와 함께 미검수의 폭풍제왕검이 언뜻 허공을 그어냈다.
퍼퍽!
"카아악!"
다음 순간 검은 피가 확 퍼지며 천독강시 중 한 명이 허리부근이 성둥 베어
져 나뒹굴었다. 도검불침이라는 천독강시이건만 미검수의 일검에 무기력하
게 두 동강 난 것이었다.
"카아아…!"
쐐-- 액!
그것을 본 나머지 한 명의 천독강시는 두려운 표정으로 급급히 뒤로 퉁겨져
달아났다. 순간적으로 천독강시는 백 장 저편의 밀림으로 날아 들어갔다.
한데,
"돌아… 가랏!"
그 밀림 속에서 냉막한 일갈이 터지며 하나의 인영이 섬전같이 떠올랐다.
츠츠츠…
전신이 온통 시뻘건 화망에 뒤덮여 떠오르는 인영, 바로 철운비였다.
"뇌… 정인(雷霆印)!"
꽈르릉…!
그의 손 끝에서 일순 시퍼런 뇌정이 일어나 천독강시를 후려쳤다.
퍼-- 억! 푸스스…!
순간 뇌정개벽천강에 격중된 천독강시는 그대로 재가 되어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피-- 잉!
화락! 천독강시를 재로 바스러뜨린 철운비는 질풍같이 허공을 밟아 미검수
의 앞으로 날아내렸다.
그때 미검수는 폭풍제왕검을 등에 짊어진 검갑에 막 집어 넣고 있었다.
"검왕! 방금 그 단철패왕천강(丹鐵覇王天剛)은 누구에게… 배웠소?"
철운비는 격동된 어조로 말하며 미검수를 주시했다.
검왕(劍王)…!
그렇다! 그 미검수는 바로 철운비가 용형마도(龍形魔島)에서 만났던 검왕
(劍王) 벽황(碧皇)이라는 신비검수였다.
"…!"
검왕 벽황은 서글서글한 눈빛으로 철운비를 마주보았다. 그, 아니 그녀의
허무하던 눈빛이 그 순간 기쁨으로 반짝 빛을 발하는 것을 철운비는 미처
보지 못했다.
"남황에서… 그대를 다시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벽황은 잔잔하게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그 말에 철운비는 검미를 모으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나는 당신이 어떻게 단철패왕천강을 알고 있는지 물었소!"
철운비가 재차 그렇게 묻자 벽황은 고개를 갸웃하며 미소지었다. 이어 그녀
가 동요없는 조용한 음성으로 태연히 말했다.
"이 세상에서 제게 단철패왕천강을 가르쳐 주실 만한 분이 몇이나 있겠어
요?"
그녀의 말에 철운비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설… 마! 아버님의 제자란 말이오?"
벽황은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어요. 나는… 사제(師第)의 아버님이신 그 분께 단철패왕천강을 배웠
어요!"
"사… 제(師第)?]
철운비는 거듭되는 놀라움으로 입을 딱 벌린 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알기로 눈 앞의 이 남장여인은 하늘 아래 가장 강한 여고수였다. 그녀
는 아마도 머지않아 천년검후(千年劍后)의 보좌에 이를 것이다.
그 최강의 여검수가 바로 철운비의 아버지 고독패왕(孤獨覇王) 철무정(鐵無
情)의 제자를 자청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알 것 같았다. 철운비는 그제서야 아직도 젊기만한 벽황이 어
찌 그렇듯 막강한지 이해가 되었다.
그때 벽황이 서글서글한 눈빛으로 철운비를 주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더 알려 주자면… 이 사저(師姐)의 본이름은 황혜(皇慧)! 벽황혜
예요."
그녀는 정감이 깃든 낮은 음성으로 말하며 어린 사제를 바라보았다.
"벽… 황혜!"
철운비는 더듬거리며 그녀의 이름을 되뇌었다.
문득,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해 줄 테니… 우선 이리로 와봐요!"
검왕, 아니 검후(劍后) 벽황혜(霹皇慧)는 폭풍제왕검을 짊어진 채 표표히
교구를 날려 한쪽으로 날아갔다.
"…!"
철운비도 급히 그녀를 뒤따라 하나의 바위 뒤로 날아갔다.
바위 뒤,
"…!"
한 명의 소년이 가부좌를 튼 채 운공하고 있었다.
나이는 철운비보다 두세 살 어려보이는 십 오륙 세 정도, 중원인과는 달리
윤곽이 뚜렷하고 두 눈 부위가 움푹 파인 영준한 소년이었다.
소년은 일신에 붉은 적포를 걸치고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그의 눈썹은 물론
머리카락까지도 은은한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츠으… 츠으!
운공하고 있는 소년의 몸 주위로 불꽃같이 강렬한 화망(火網)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천독강시의 독기에 중독된 듯했는데 지금 내공으로 그 독기를
태우고 있었다.
철운비는 그 모습을 보고 내심 해연히 놀랐다.
(저것은… 벽력부 비전의 벽력뇌강(霹靂雷剛)이 구성(九成)에 이르면 나타
나는 현상이다!)
그는 형형한 눈빛으로 적포소년을 주시했다.
(나보다 어린 나이인데… 저 정도의 성취를 이루다니… 이 아이의 신분은
무엇이란 말인가?)
놀라움과 함께 의아함을 금치 못하는 철운비의 귀에 문득 벽황혜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 아이는 벽력부의 당대 부주인 벽력잠룡(霹靂潛龍) 뇌천강(雷天剛)이에
요!"
"벽력잠룡(霹靂潛龍) 뇌천강(雷天剛)?"
철운비는 흠칫 놀라며 벽황혜를 돌아보았다.
"이 아이가 벽력부의 부주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벽력부의 당대가주는 벽력
천공(霹靂天公) 뇌패천(雷覇天)이 아니던가요?"
"얼마 전까지는 그랬지요!"
벽황혜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철운비는 그녀의 말에 직감전으로 벽력부에 무슨 변고가 일어난 것을 감지
했다.

-벽력천공(霹靂天公) 뇌패천(雷覇天)!

당대 벽력부의 부주로써 극양기공과 화기제조술에 천하제일의 인물이었다.


그의 벽력뇌강(霹靂雷剛)은 그 옛날 그의 시조 벽력천왕(霹靂天王) 뇌합극
이상이라고 알려졌다.
한데 뇌패천은 일 년 전 누군가의 초청을 받고 야인산 밖으로 나갔다가 지
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벽황혜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철운비에게 설명했다.


"지금까지는 벽력천공의 아내인 벽력대부인(霹靂大婦人) 뇌온향(雷溫香)이
남편 대신 벽력부를 관장해 왔는데 최근 더 이상 벽력부의 지존 자리를 비
워둘 수 없다는 벽력부 원로들의 주장으로 이 아이가 제 십대 벽력지존(霹
靂至尊)이 된 거예요!"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철운비는 기광을 번뜩였다.
(흠…이것봐라? 뇌천강이 벽력지존(霹靂至尊)의 되자마자 살황독종의 천독
강시들에게 암격을 받다니…무엇인가 흑막이 있는데…!)
그는 내심 염두를 굴리며 형형한 눈으로 벽력잠룡 뇌천강을 주시했다.
츠으… 츠으…!
그때 뇌천강의 전신을 감싼 벽력화망이 더욱 짙어졌다.
그에 따라 뇌천강의 전신 팔만 사천 모공에서 검은 땀이 배어 흘러나왔다.
그것은 벽력뇌강의 극양지기에 독기가 녹아나는 현상이었다.
천독묵강을 내공으로 태울 수 있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뇌천강은 벽
력지존(霹靂至尊)으로서 손색이 없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주르르…!
헌데 문득 뇌천강의 감은 눈썹 사이로 한 줄기 눈물이 배어 흘렀다.
그 모습에 철운비는 흠칫했다.
(울다니…! 이 어린 친구에게 무언가 남에게 말못할 사정이라도 있는 것인
가?)
그의 눈으로 언뜻 한 줄기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번-- 쩍!
그때 운공하던 뇌천강이 벽력화망을 거두며 감았던 눈을 떴다.
"검왕대형(劍王大兄)!"
이어 뇌천강은 자신의 앞에 벽황혜가 서 있는 것을 보자 안도의 빛을 지으
며 벌떡 일어섰다. 벽황혜와 뇌천강은 이전부터 서로 알고 있던 사이인 모
양이었다.
철운비는 그런 그들의 모습에 내심 고소를 지었다.
(검왕대형(劍王大兄)이라고? 저 친구 천하의 검왕(劍王)이 여자인 줄 알면
까무러치겠군.)
벽황혜는 문득 철운비를 향해 한쪽 눈을 찡끗해 보였다.
이어 그녀는 뇌천강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걱정 마라! 천독강시는 우형과 이 사람이 제거했다."
"…!"
뇌천강은 철운비가 천독강시를 죽였다는 말에 놀란 눈빛으로 철운비를 돌아
보았다.
철운비는 내심 고소를 지었으나 포권하며 말했다.
"철… 운비라고 하오. 검왕대형의 사제지요."
뇌천강은 다시금 놀란 표정으로 철운비와 벽황혜를 돌아보았다.
"이 분 형께서도 운중(雲中) 폭풍성(暴風城)의 후예라니 놀랐습니다."
그 말에 이번에는 철운비가 흠칫 놀랐다.
(사저께서… 멸망했다고 알려진 운중(雲中) 폭풍성(暴風城)의 후예였단 말
인가?)
그는 뜻밖의 놀라운 사실에 이채 어린 눈빛으로 벽황혜를 주시했다.
그때 벽황혜가 두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 우선 이곳을 이탈해야겠다. 주위에 살황독종의 또 다른 매복이 있을지
도 모르니…"
스읏!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폐포를 펄럭이며 마천령을 향해 몸을 날려갔다.
화라락! 퍼-- 이잉!
철운비와 뇌천강도 서로를 돌아본 뒤 벽황혜를 뒤따라 떠올랐다. 삽시에 크
고 작은 세 인영은 마천령을 타고 구름 속으로 사라져 갔다.

∑ 제 24 장 벽력부(霹靂府)의 밤

헌데 철운비 등 삼인(三人)이 사라진 직후,


"으음… 천독강시가 이토록 무기력하게 쓰러지다니… 저 어린 놈들의 정체
는 무엇이란 말인가?"
문득 어디선가 한 줄기 괴악한 음성이 들려왔다.
스스스…
이어 장내에 한 명의 괴인이 나타났다. 그자는 전신이 온통 먹물을 칠한 듯
새카만 묵인(墨人)이었는데 한 손에는 작은 피리를 들고 있었다.
언뜻 보아 괴인의 모습은 천독강시와 비슷했다. 하나 천독강시와 두 가지
틀린 점이 있었다.
먼저 괴인은 눈빛이 섬뜩한 녹색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 자의 몸에서는 천독강시들이 흘리던 것 같은 독장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 자의 내공이 이미 반박귀진의 경지에
이르러 독공(毒功)으로 일어난 독기를 심맥 안으로 갈무리한 때문이었다.
또한 그것은 괴인의 독문의 전설적 경지인 독신지경(毒身之境)에 이르렀음
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괴인은 철운비 등이 사라진 마천령을 올려다보며 침음성을 발했다.
"운중 폭풍성(暴風城)이 과거 오대무벌(五大武閥) 중 최강이었음은 사실이
지만 저같은 어린 괴물들을 둘씩이나 길러 내지는 못할 텐데…!"
그 자의 눈이 섬뜩한 살기로 번들거렸다.
"어쨌든… 네 년놈들은 나 암흑독종(暗黑毒宗)의 손에 죽는다. 본좌의 사랑
스런 천독강시들을 해친 대가로…!"
스스스!
말을 마침과 함께 괴인의 신형이 엷어지더니 이내 장내에서 사라져 버렸다.
암흑독종(暗黑毒宗)…
이것이 그 자의 이름이었다.

마천령 너머에는 한 채의 거대한 석성(石城)이 자리하고 있었다.


전체가 온통 타는 듯 붉은 적강석(赤剛石)으로 지어진 석성이었는데 석성을
감싼 붉은 빛의 성벽이 수십 리에 뻗쳐 있어 마치 한 마리 거대한 화룡(火
龍)이 또아리를 튼 듯한 형상이었다.

-벽력부(霹靂府)!

그렇다. 그곳이 바로 오대무벌 중 남방의 패자 남황(南荒) 벽력부(霹靂府)


뇌가의 총본영이었다.
일견하여 벽력부의 건축양식은 중원의 그것이 아닌 듯했다. 둥그런 지붕을
인 전각들의 형태는 흡사 서역이나 천축의 그것을 연상케 했다.
스으… 스으…
황혼의 끝자락이 서산마루에 걸려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황혼의 잔양
(殘陽)에 젖어들어 벽력부의 전체는 온통 불에 타는 듯 붉게 빛나고 있었
다.
벽력부의 정문,
"…!"
"…!"
몇 명의 인물이 초조한 기색으로 서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늙은 노인들이
었다.
그 노인들의 전면에는 한 명의 미부(美婦)가 초조한 기색으로 서성대고 있
었다.
나이는 삼십대 후반 정도, 일신에 타는 듯 붉은 궁장을 걸친 미부였다.
헌데 기이하게도 그녀의 눈썹과 머릿결은 모두 타는 듯 붉은 빛이었다. 적
발(赤髮) 적미(赤眉)인 이 미부는 매우 아름다왔다. 눈썹이 유난히 짙고 눈
꼬리가 위로 치솟아 성격이 드세보였으나 그것이 오히려 매력적이었다.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한 덩어리의 타오르는 불길을 보는 듯했다. 열
정적이고 화려한 아름다움, 그것은 젊음보다 더 빛나보였다.

-벽력대부인(霹靂大婦人) 뇌온향(雷溫香),

이것이 여인의 이름이었다.


그녀가 바로 벽력천공(霹靂天公) 뇌패천(雷覇天)의 아내이고 벽력잠룡(霹靂
潛龍) 뇌천강(雷天剛)의 생모가 되는 여인이었다.
남편 벽력천공이 일 년 전에 실종된 후부터 그녀는 벽력부를 관장해 왔다.
최근 아들 벽력잠룡 뇌천강이 신임 벽력지존(霹靂至尊)이 되었으나 당분간
은 그녀가 계속 수렴청정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쐐--액! 화라락!
문득 마천령의 좌측 능선으로 세 개의 인영이 질풍같이 날아올랐다. 그들은
바로 철운비와 벽황혜, 그리고 뇌천강이었다.
삼 인은 벽황혜를 선두로 질풍같이 벽력부로 다가섰다.
"강아!"
화락!
아들을 발견한 벽력대부인 뇌온향은 환하게 웃으며 삼 인을 향해 마주 날아
갔다.
"아아! 무사했구나, 나의 아들…!"
뇌온향은 와락 뇌천강을 끌어안으며 안도의 오열을 터뜨렸다.
철운비는 몸을 멈추며 뇌온향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나갔다.
(이 여인이… 벽력대부인(霹靂大婦人) 뇌온향인가?)
뇌천강은 그런 어머니 뇌온향의 가슴에 푹 파묻힌 형상으로 안겨 있었다.
헌데,
"…!"
철운비는 뇌온향에게 안긴 뇌천강의 표정이 아주 복잡한 것을 놓치지 않았
다. 뇌천강의 눈빛은 어떤 연민과 고통의 빛으로 젖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철운비는 음울한 눈으로 뇌온향 모자를 지켜보았다.
그때,
"숙모님! 그동안 격조했습니다!"
문득 벽황혜가 앞으로 나서며 뇌온향에게 포권했다.
뇌온향은 그제서야 이들을 놓아 주며 환히 미소지었다.
"이게 누구야? 장래의 만검조종(萬劍祖宗) 아닌가요?"
그녀는 반갑게 벽황혜의 손을 잡았다. 벽황혜는 일 년 전 남방을 여행하던
중 며칠인가 벽력부에 머물며 신세를 진 적이 있었다.
이윽고 인사를 나눈 벽황혜는 철운비를 뇌온향에게 소개했다.
뇌온향은 철운비에게 시선을 돌리며 온화하게 미소지었다.
"폭풍성은… 복도 많군요. 검왕(劍王) 조카만 해도 인세에 보기드문 기재인
데 철소협 같은 천고기재를 제자로 두었다니…!"
그녀는 진심으로 부러운 듯 말하며 철운비를 주시했다.
"…!"
그녀의 시선을 접한 철운비의 얼굴로 절로 붉어졌다. 푸근한 뇌도향의 인상
에서 문득 그는 얼굴도 못 본 어머니의 모습을 연상한 것이었다.
뇌온향은 무척 기쁜 표정이었다.
"자! 어서 들어가요. 오랜만에 검왕 조카도 오고 했으니 잔치라도 벌여야지
요."
그녀는 따뜻하게 웃으며 돌아섰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철운비는 순간적으로 뇌온향의 미간 사이로 분홍빛
점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본 그는 내심 흠칫했다.
(저것은… 일종의 고(蠱)에 중독된 현상이 아닐까?)
그는 검미를 모으며 염두를 굴렸다. 그 사이 뇌온향 등은 이미 저만큼 앞서
걷고 있었다.
철운비는 침음하며 눈을 번뜩였다.
(흐음! 이것은 관찰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데…?)
그는 내심 중얼거리며 급히 걸음을 옮겨 중인들의 뒤를 따랐다.

밤(夜), 짙은 어둠이 장막처럼 벽력부를 뒤덮고 있었다.


삼경 무렵, 만물이 깊은 잠에 빠진 적막한 시각이었다. 하지만 벽력부의 후
원에 자리한 한 채의 전각에서는 밤을 잊은 듯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불이 밝혀진 창문은 반쯤 열려져 있었다. 그 열려진 창문으로 두 명이 마주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철운비와 벽황혜, 바로 그들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연신 커다란 잔에 화주(火酒)를 가득 부어 둘이키고 있었다. 두 사
람의 곁에는 이미 텅 비어 버린 술동이가 이십여 개나 나뒹굴고 있었다.
철운비도 벽황혜도 술기운이 올라 얼굴이 불같이 달아올라 있었다. 하나,
그들은 멈출 생각도 없이 계속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술이 올라 붉어진 벽황혜의 옥용은 한층 더 아름답고 고혹적이었다. 두 사
람은 초저녁부터 술을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중에는 벽황혜가
어떻게 고독패왕(孤獨覇王)의 제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 있었
다.

이년(二年) 전,
고독패왕은 아주 심하게 다친 몸으로 운중산을 지나다 벽황혜를 만났다. 그
는 지옥천존과의 싸움에서 중상을 입기는 했으나 죽을 정도로 다치지는 않
았다.
사실 하늘 아래 고독패왕을 죽일 수 있는 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
다.
고독패왕과의 일전에서 지옥천존도 심각한 중상을 입었다. 그리고 그는 일
천 명의 수하 중 구 할 이상을 잃었다.
허나 그 일전으로 고독패왕은 이미 중원에는 지옥천존과 지옥마교를 상대할
어떤 세력도 존재치 않음을 깨달았다.
그것을 깨달은 그는 후일을 도모키 위해 변황(邊荒)으로 가던 길이었다.
그리고 그 도중에 벽황혜를 만난 것이었다.
벽황혜를 만난 고독패왕은 한눈에 그녀가 천년검후(千年劍后)의 재목임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그는 폭풍성에 한 달 간 머물러 벽황혜에게 무공을 전
수해 주었다.
벽황혜가 시전했던 단철패왕신공(丹鐵覇王神功)도 바로 그 중의 하나였다.
그런 한 달 후, 고독패왕은 다음과 같은 한 마디를 남기고 장성(長城) 너머
로 길을 떠났다.

--나는… 신강(新疆)으로 간다. 그곳에는 이십 년 넘게 이 사부를 기다리고


있는 여인이 있다!

그런 말을 남긴 채…
그것이 이 년 전의 일이었다. 그 후 벽황혜도 수련을 위해 폭풍성을 떠났
다.
그러나 금릉(金陵)에까지 이르게 된 벽황혜는 그곳에서 낙월정(落月亭)의
참사를 듣고 실종된 금릉일관옥(金陵一貫玉)이 바로 자기 사부의 아들임을
알게 된 것이었다.
문득,
"덥… 구나!"
화락…!
술기운이 오름대로 오른 벽황혜는 몽롱한 눈으로 철운비를 바라보며 머리에
쓴 영웅건을 풀어 버렸다. 그러자 삼단 같은 머릿결이 물결치듯 그녀의 어
깨로 흘러내렸다.
이어, 벽황혜는 자신의 가슴을 더듬거리더니 저고리의 옷고름까지 풀어 버
렸다.
그 모습에 철운비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사… 사저!"
그는 급히 말리려 했다.
허나 이미 늦고 말았다. 벽황혜의 저고리가 양 옆으로 벌어지며 눈같이 희
고 탐스러운 그녀의 젖무덤이 드러났다.
그녀의 젖가슴은 별로 크지는 않았다. 허나, 소담스럽고 탄력있는 육봉은
탐스럽기 이를 데 없었으며 젖꼭지 또한 유난히 큼직하여 눈길을 끌었다.
철운비는 용형마도에서 이미 벽황혜의 젖무덤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허
나 그럼에도 그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내가… 밉지 않아, 사제?"
벽황혜는 야릇한 눈길로 철운비를 바라보며 물었다.
철운비는 고혹적이기 이를 데 없는 벽황혜의 모습에 얼굴이 벌겋게 변한 채
더듬거렸다.
"아… 아름다우십니다. 세상 누구보다도…!"
그의 당황하는 모습에 벽황혜는 문득 깔깔 웃었다.
"호호… 사제는 아부에도 능숙하군! 그런 의미로 한 잔 더…!"
그녀는 술잔에 술을 가득 채우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자 몽롱하던 그녀
의 눈빛이 더욱 흐려졌다.
"나는… 천년검후(千年劍后)가 되는 것이 꿈이야. 하지만… 마지막 단계에
서 한 가지 장애에 부딪쳐 좌절당하고 말았지."
벽황혜는 혼미한 눈빛으로 철운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지간한 그녀건만
술기운에 이미 몸을 주체치 못할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철운비는 실로 당혹함을 금치 못했다. 허나 그 당혹함을 감추기 위해 더듬
거리며 물었다.
"그 난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웃지 마라! 바로… 육… 욕(肉欲)…!"
쿠-- 웅!
거기까지 말하던 벽황혜는 기어코 모로 쓰러지고 말았다. 허나 벽황혜는 그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이내 인사불성이 된 듯 잠에 곯아떨어져 벌렸다.
"육… 욕(肉欲)이라고…?"
철운비는 벽황혜의 말에 얼굴이 벌겋게 변한 채 더듬거렸다.
그는 이내 벽황혜가 말한 의도를 알아차렸다. 벽황혜는 철운비에게 자신을
안게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 이상 욕정(欲情)으로 고민하는 일없
이 검후(劍后)의 경지에 이를 작정이었다.
허나 그녀는 맨정신으로 안길 용기가 없어 술을 마신 것이었다.
철운비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내심 탄식했다.
(당신은… 제게 친누님같이 소중한 분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범할 수가
없습니다 사저!)
그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그는 자신의 장포를 벗어 벽황혜의 벗
은 상체를 덮어 주었다.
"바람이라도… 쏘이고 와야겠군."
슥!
철운비는 우울하게 중얼거리며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가 나간 직후,
(바보!)
또륵…!
문득 꼭 감은 벽황혜의 긴 속눈썹 사이로 따뜻한 이슬이 배어 흘렀다.
그녀는 실상 술에 취한 것이 아니었다. 술에 취하기에는 그녀의 내공과 수
련이 너무 심오했다.
(입 안에 들어온 고기도 못 먹는 멍청이! 그래서 내가 네게 빠진 것인지도
몰라 나의… 운비(雲飛)!)
벽황혜의 입술가로 문득 따뜻한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언제고 날 품게 만들고 말겠어! 사부님이신 고독패왕에게 입은 은
혜를 조금이나마 갚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두 손으로 자신의 젖가슴을 꼬옥 끌어안았다.
밤(夜), 남황(南皇)의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철운비는 밤공기를 마시며 전각의 지붕 위에 표표히 서 있었다. 한 채의 높


은 전각 끝을 외발로 밟고 선 그는 술기운을 바람결에 날려 버리고 있었다.
방금 보았던 벽황혜의 탐스런 알몸과 대담한 고백이 그의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비록 술기운을 빈 것이라고는 하지만 정말 대단한 분이시다 사저는…! 저
분을 모시고 살려면 앞으로 고생 꽤나 하겠구나!)
철운비는 고소를 머금었다. 결국은 자신이 벽황혜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
할 것이라는 것을 그는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었다.
헌데,
(야행인(夜行人)…?)
피--- 이잉!
그의 눈에 하나의 인영이 언뜻 남쪽으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 인영은
얼마나 빠른지 언뜻 스치는가 싶었는데 이미 벽력부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몸매로 보아 계집 같은데… 따라가 볼까?)
스읏!
철운비는 심호흡을 한 후 질풍같이 신형을 떠올려 야행인이 사라진 곳으로
날아갔다.
그의 경공은 단연코 천하최강이었다. 벽력부의 곳곳에는 수많은 고수들이
매복하고 있었으나 아무도 그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삽시에 벽력부 밖으로 날아 나간 철운비는 곧 하나의 인영이 전면으로 날아


가는 것을 발견했다.
그 인영은 철운비가 본대로 여인이었다. 허나 얼굴을 천으로 가리고 있어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피이잉…!
여인은 철운비가 미행하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유성같이 어느 산곡(山谷)으
로 날아들었다. 그 산곡의 끝에는 하나의 은밀한 동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여인은 그 동굴 안으로 거침없이 날아들어 갔다.
철운비는 유령같이 여인을 뒤따랐다.
(밀회장소로는 썩 어울리는 곳이군…!)
그는 고소를 지으며 소리없이 동굴로 접근해 갔다.
그가 막 동굴의 입구에 이르렀을 때였다.
"흐흐 어서 오시오 부인! 오늘 밤에도 당신이 본좌를 찾아오리라고 예상하
고 있었지."
문득 동굴의 안쪽에서 음산한 사내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어,
"암흑… 독종(暗黑毒宗)! 나를 농락하고 벽력굉천뢰(霹靂宏天雷)를 얻었으
면 되었지 왜 내 아들까지 해치려고 했느냐?"
분노와 회한이 담긴 날카로운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순간, 철운비는 흠칫했다.
(이… 목소리는…!)
여인의 목소리가 귀에 익어 그는 내심 경악하면서 빠르게 동굴의 벽에 붙어
서며 안쪽을 들여다 보았다.

동굴은 별로 깊지 않았다. 십여 장 정도 길이의 동굴이었는데 그 끝에는 한


칸의 석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석실의 바닥에는 짐승가죽이 깔려 있어 제법
아늑하게 보였다.
지금 그 석실에는 일남일녀가 마주보고 서 있었다.
철운비가 쫓아온 여인은 그에게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 아주 풍만한 몸매
를 지닌 그 여인은 일신에 타는 듯 붉은 전포를 걸치고 있었다.
"흐흐흐! 만나자마자 앵앵대기요 부인?"
그 적포여인의 앞에는 한 명의 괴인이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마주 서 있다.
전신이 먹물을 칠한 듯 검은 피부를 지닌 괴인이었는데 그자의 눈빛은 섬뜩
한 녹색을 띠고 있었다.

-암흑독종(暗黑毒宗)!

바로 그 자가 아닌가? 천독강시를 조종하여 벽력잠룡(霹靂潛龍) 뇌천강(雷


天剛)을 습격했었던…!
철운비는 숨을 죽인 채 동굴 안의 광경을 지켜보았다.
(벽력… 대부인(霹靂大婦人)!)
그리고 적포여인의 뒷모습을 자세히 살펴본 철운비는 경악으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는 너무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신음을 토할 뻔했다.

-벽력대부인(霹靂大婦人) 뇌온향,

적포여인은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벽력부의 전권을 한 손에 움켜쥔 여걸! 한데, 믿어지지 않게도 그녀가 이런
은밀한 곳에서 외간남자와 밀회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상대는 바로
벽력부와 견원지간인 묘강 살황독종(煞荒毒宗)의 인물이 아닌가?
(설마했는데… 저 음탕한 계집이 벽력굉천뢰를 유출시킨 장본인이었군!)
철운비는 소리없이 신음하며 뇌온향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그의 명석한
두뇌는 이내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지옥천존은 이미 살황독종에까지 마수를 뻗친 상태였다. 철운비는 용형마도
에서 쌍뇌모황(雙腦謀皇) 음세황에게 그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다.
결국 벽력굉천뢰는 살황독종을 거쳐 지옥마교에 흘러들어간 것이었다.
다만 한 가지 철운비로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있었다.
벽력대부인 뇌온향-!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가 무엇 때문에 뇌가(雷家)의
율법을 어기고 벽력굉천뢰를 살황독종에게 넘겼는가 하는 것이었다.

철운비가 내심 염두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흐흣 뇌부인, 아직도 본좌가 그대의 사랑스런 아들을 암습한 이유를 모르
겠소."
암흑독종이 문득 음흉하게 웃으며 뇌온향의 풍만한 몸매를 아래 위로 쓸어
보았다.
그 자의 시선이 몸을 더듬자 뇌온향은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이…이유라니? 그럼 너는 강(剛)아를 해칠 생각은 아니었느냐?"
그녀는 당혹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 말에 암흑독종은 녹색 눈을 음탕하게 번뜩이며 히죽 웃었다.
"흐흐… 물론이오! 그대와 나는 이미 몸을 섞어 부부나 마찬가지인데 내가
왜 그 아이를 죽이겠소? 그것은 다만 경고였을 뿐이오!"
"…!"
뇌온향의 교구가 일순 수치로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전후 사정으로 미루어보아 그녀는 이미 여러 차례 암흑독종과 몸을 섞은 듯
했다. 그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고귀한 벽력부의 여제(女
帝)가 믿을 수 없게도 외간남자와 사통해 온 것이었다.
"경고… 라고? 설마 그…그것을… 달란 말이냐?"
뇌온향은 분노에 치를 떨며 암흑독종을 노려보았다.
암흑독종은 능글맞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벽력열화진경(霹靂熱火眞訣)! 그것을 내게 넘기시오! 그렇지 않으
면 본좌의 충성스런 천독강시(千毒彊屍)들이 이번에는 정말로 부인의 사랑
스런 아드님을 헤치게 될지 모르오."
"벽력… 열화진결(霹靂熱火眞訣)!"
순간 뇌온향은 옥용이 분노와 경악으로 핼쓱하게 변했다.

<벽력열화진결(霹靂熱火眞訣)!>

그것은 지금의 벽력부를 있게 한 무상지보였다.


오백 년 전, 벽력천왕(霹靂天王) 뇌합극은 우연히 반부의 천축고경(天竺古
經)을 얻었다. 그 반부의 비급에는 한 가지 상승의 극양신공구결(極陽神功
口訣)과 화기제조술이 수록되어 있었다. 뇌합극은 그 반부의 비급을 연마하
여 벽력일문(霹靂一門)을 세웠다.
그 반부의 고경(古經)이 바로 벽력열화진결(霹靂熱火眞訣)이었다.
벽력열화진결의 절기는 살황독종의 독공(毒功)과는 상극이었다. 만일 벽력
열화진결이 살황독종에 넘어가면 살황독종은 거칠 것없이 대륙을 향해 북침
해 올 것이다.
뇌온향은 누구보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안… 돼!"
한순간 벽력대부인 뇌온향은 거의 발작적으로 외쳤다.
빠-- 직!
그와 함께 그녀의 봉목에서 폭발하듯 화광이 일며 그녀의 묶은 머리카락이
창날같이 치솟아 올랐다.
"벽력… 열화진결을 네놈에게 건네 주느니… 차라리 네놈과 동귀어진하고
말겠다."
쩌저정!
뇌온향은 벽력뇌강(霹靂雷剛)을 극한으로 일으킨 채 맹렬한 기세로 암흑독
종을 향해 덮쳐들었다. 그런 그녀의 기세는 마치 한 덩어리 불(火)의 정령
(精靈)같이 보였다.
하지만 암흑독종의 표정에서는 조금의 동요도 찾아볼 수 없었다.
"흐흐… 너는 내게 반항하지 못할 텐데…! 옴마니 반메흠 옴 아 홈 사바하
…!"
그는 음산하게 웃으며 입 안으로 무엇인가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악!"
쿠-- 웅!
순간 맹렬하게 덮쳐들던 뇌온향이 갑자기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뚝 떨
어져 나뒹굴었다.
그때 철운비는 보았다. 바닥으로 나뒹군 뇌온향의 미간에 분홍빛 점이 선명
하게 떠오르는 것을!
뇌온향의 이마에 떠오른 그것은 마치 누에고치의 형상으로 흡사 살아 있는
듯 뇌온향의 미간에서 꿈틀거렸다.
그리고 무엇인가 사이한 주문을 외우는 암흑독종의 검은 미간 사이에도 뇌
온향의 그것과 똑같은 분홍빛 점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을 본 철운비는 경악하며 숨을 죽였다.
(고… 독(蠱毒)이다!)
그는 뇌온향의 이마에 떠오르는 분홍점이 일종의 고독(蠱毒)에 중독된 현상
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제서야 그는 뇌온향이 왜 가문의 율법을 어기고 벽력굉천뢰를 외부에 유
출시켰는지 알게 되었다.
벽력대부인 뇌온향, 그녀는 바로 묘강에서만 난다는 일종의 고충(蠱蟲)에
제압당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시술자는 암흑독종, 그 자일 것이다.
"흐윽… 아아아…"
그때 바닥에 쓰러진 뇌올향은 숨넘어갈 듯 헐떡이며 괴롭게 몸부림치고 있
었다. 그녀의 옥용은 불에 달군 쇳덩이같이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또한 그녀의 두 눈은 욕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으며 붉은 입술 사이로 숨막
힐 듯 거친 헐떡임이 새어나왔다. 뇌온향이 중독된 고독은 아마도 욕정(欲
情)을 자극하는 작용을 하는 듯했다.
"제… 제발… 나좀 어떻게 해줘요."
뇌온향은 참을 수 없는 듯 자신의 손으로 저고리를 마구 풀어헤치며 암흑독
종을 향해 애원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당당한 벽력부의 안주인도 무엇도 아니었다. 그저 그
녀는 발정한 한 마리 짐승의 암컷일 뿐이었다.
찌직… 찍…!
마침내 뇌온향은 욕정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전포를 갈가리 찢어발겼다.
삽시에 전포의 저고리가 찢겨나가며 눈같이 희고 풍만한 뇌온향의 젖무덤이
물결치듯 출렁이며 나타났다.
물이 오를대로 오른 중년여인의 속살은 한 번 본 사내라면 뇌살당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탐스러웠다.
"흐흐…!"
어느덧 암흑독종의 녹색 눈도 타는 듯한 욕정으로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
다.
"흐흐… 본좌가 말했었지! 네년은 영원히 내 손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그는 음탕하게 히죽 웃으며 뇌온향에게 다가갔다.
뇌온향은 이미 이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어… 어서… 제발…!"
그녀는 사내가 다가서자 반듯이 누워 허벅지를 활짝 벌려 세우며 숨을 헐떡
였다.
지금 그녀는 자신을 향해 다가서고 있는 사내가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못하
는 상태였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자신의 욕정을 충족시켜 줄 사내
뿐이었다.
암흑독종은 그런 뇌온향의 모습에 득의의 웃음을 흘렸다.
"흐흐… 벽력열화진결을 손에 넣는 것은… 한 차례 즐긴 후라도 상관없겠
지!"
그는 두 눈을 욕정으로 번들거리며 자신의 앞에 무방비 상태로 누워 있는
탐스러운 여체를 노려보았다.
이어 그는 활짝 벌려 세운 뇌온향의 아랫도리로 먹물을 칠한 듯이 시커먼
손을 가져갔다.
화락…!
뇌온향의 붉은 치마가 암흑독종의 손길에 의해 뒤로 걷혀졌다. 그러자 뽀얗
고 풍만한 뇌온향의 아랫도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곧게 쭉 뻗은 종아리… 한아름이나 될 듯 풍만하고 희멀건 허벅지… 그 위
쪽으로 펑퍼짐하게 벌어진 둔부와 팽팽한 하복부는 사내를 숨죽이게 만들었
다.
헌데 놀랍게도 치마 속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기름진 복
부 아래로 여인의 부끄러운 곳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알맞게 살이 올라 도도록한 두덩과 그 아래로 이어진 계곡을 뒤덮은 무성한
방초, 뇌온향은 눈썹과 머리칼 뿐 아니라 부끄러운 곳의 체모까지도 붉은
빛이었다. 그것은 실로 기묘한 자극을 주는 모습이었다.
"흐음…!"
암흑독종은 침을 꿀꺽 삼키며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이어 그는 검은 손을
뻗어 뇌온향의 허벅지를 좌우로 활짝 열어젖혔다.
마침 뇌온향은 동굴의 입구 쪽으로 하체를 벌리고 누워 있었다. 그 바람에
철운비는 본의 아니게 뇌온향의 부끄러운 곳을 그대로 보고 말았다.
무성한 붉은 방초 사이로 한 쌍의 붉은 꽃잎을 내민 여체의 깊게 갈라진 비
궁이 화살같이 철운비의 두 눈에 쏘아져 들어왔다.
(빌어… 먹을…!)
철운비는 당황하며 급히 시선을 돌려 버렸다. 어쨌든 일문의 주모인 벽력대
부인 뇌온향의 부끄러운 곳을 본다는 것이 죄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 악!"
그때 암흑독종이 어떻게 했는지 뇌온향의 입에서 자지러지는 듯한 교성이
터져나왔다.
"…!"
흠칫하며 고개를 돌린 철운비의 얼굴이 금방 벌겋게 변했다. 암흑독종의 머
리가 활짝 벌려진 뇌온향의 아랫도리에서 교묘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본
것이었다.
암흑독종의 입술과 혀가 움직일 때마다 뇌온향은 사지를 허위적거리며 비명
을 내질렀다.
삽시에 뇌온향의 은밀한 부위는 그녀 자신의 체액과 암흑독종의 타액으로
흥건히 젖어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아… 악!"
뇌온향은 마침내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크게 사지를 허위적거리다가 축 늘
어뜨렸다. 암흑독종의 집요한 공격에 그만 실신하고 만 것이었다.
"흐흐…"
그제서야 암흑독종은 히죽 웃으며 뇌온향의 하체에서 얼굴을 뗐다. 부끄럽
게 사지를 활짝 벌린 채 혼절한 뇌온향의 깊고 농염하게 무르익은 옹달샘에
서는 뜨거운 이술이 꿀물처럼 배어 흐르고 있었다.
"흐흣… 오늘은 각별한 맛이 있겠는데…"
암흑독종은 하체만 벌거벗은 뇌온향을 음탕하게 내려다 보았다.
이어 그는 서둘러 하의를 벗어내렸다. 그러자 시커멓고 흉측한 그의 남성이
불끈 튀어나왔다.
암흑독종은 욕정에 번들거리는 눈으로 곧 뇌온향의 풍만한 몸 위로 올라갔
다. 그리고 그는 한 손으로 뇌온향의 젖은 꽃잎을 양 옆으로 벌리고 그곳으
로 자신의 흉칙한 일부를 가져갔다.
"흐흐…!"
암흑독종은 자신의 예민한 일부가 더할 수 없이 보드러운 살점에 닿는 전율
적인 감촉에 몸을 떨었다.
이어 그는 서서히 하체에 힘을 주어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순간 실신한 뇌
온향의 허벅지가 한 차례 퍼뜩 경련을 일으켰다.
"으음…!"
그와 함께 암흑독종의 입에서도 앓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격렬하
게 조여드는 여체의 감촉에 몸을 떨며 자신을 깊숙이 여체 속으로 밀어 넣
기 시작했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헛!)
돌연 암흑독종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전율을 느끼며 부르르 몸을 경련했다.
눈빛! 한 쌍의 비수 같은 눈빛이 자신의 등으로 날아와 꽂히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초절정의 내공을 지녔기 때문에 감지할 수 있었다.
"웬… 놈이냐?"
팟!
다음 순간 암흑독종은 벼락같이 뇌온향에게 떨어지며 홱 돌아섰다.
헌데 돌아선 그의 두 눈이 한껏 부릅떠졌다.
언제 나타났을까? 동굴의 입구를 가득 메우고 한 명의 인영이 우뚝 서 있었
다.
그 인물은 밤하늘을 등지고 있어 언뜻 모습을 알아볼 수 없었다.
츠-- 읏!
다만 한 쌍의 심장을 바스러뜨릴 듯 무섭게 번뜩이는 눈빛만이 보일 뿐이었
다.
"너는… 케-- 엑!"
노갈을 내지르던 암흑독종의 입에서 비명이 터진 것은 바로 직후였다.
퍼-- 억!
그의 오른팔이 무엇인가에 썽둥 잘려져 어깨로부터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닌
가? 아! 어느 사이엔가 나타난 인영의 왼손에 한 자루 쇠사슬이 달린 낫
(鎌)이 들려 있었다.
전체가 온통 피를 칠한 듯 시뻘건 낫(鎌)…! 암흑독종의 오른팔을 베어 버
린 것은 바로 그 낫이었다.
낫이 날아드는 속도는 너무 빨라 암흑독종이 경각했을 때는 이미 자신의 오
른팔이 동체에서 떨어져 나간 후였다.
"지옥… 혈겸(地獄血鎌)!"
쿵쿵…!
암흑독종은 공포의 비명을 지르며 뒤로 비칠비칠 밀려났다. 그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자신의 팔 하나가 잘려졌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지옥혈겸(地獄血鎌)!

그렇다. 나타난 인영, 그는 바로 철운비였다.


"네놈을 사주한 자가… 지옥천존이렷다!"
뚜벅…!
철운비는 흡사 아수라같이 흉흉한 기세로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네… 네놈이었군!"
그제서야 철운비를 알아본 암흑독종의 녹색 눈이 광기로 번뜩였다.
그는 상대가 어린 소년이라는 사실에 어느 정도 두려움이 가셨다. 두려움이
반감되자 암흑독종은 철운비에게 자신의 한 팔을 잃었다는 사실에 격렬한
분노를 느꼈다. 그는 무섭게 눈을 부릅뜨며 이를 갈았다.
"바득! 본좌의 팔을 베다니… 네놈의 목을 내놓아랏!"
그는 폭갈과 함께 허공을 격하고 맹렬히 왼손을 찍어냈다.
번-쩍!
그 자의 장심에서 돌연 녹색(綠色) 광망(光茫)이 무섭게 번뜩였다.
빠직--!
그와 함께 한 가닥 검은 색의 빛줄기가 벼락치듯 날아들어 철운비의 어깨를
관통했다.
"녠!"
순간 철운비는 둔중한 신음과 함께 쓰러질 듯 휘청 뒤로 물러섰다.
암흑독종의 이 일격은 너무 빨라 철운비가 경각했을 때는 이미 어깨를 관통
당한 후였다.
순간적으로 철운비의 왼쪽 어깨가 시커멓게 물들었다.
따당!
그와 함께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지옥혈겸이 소리를 내며 지면으로 나뒹굴었
다.
"암흑… 천독강전(暗黑千毒剛箭)?"
철운비는 순간 한 가지 전설적인 독공(毒功)을 떠올리며 경악의 표정을 지
었다.

∑ 제 25 장 암흑독종(暗黑毒宗)의 죽음

-암흑천독강전(暗黑千毒剛箭)!
그것은 독문(毒門) 오대독공(五大毒功)에 드는 것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지
력(指力)으로써 그 빠르기가 가히 전광(電光) 같다.
그것에 일단 격중되면 순간적으로 전신이 썩어 버린다. 다만 암흑천독강전
은 극도의 내공소모를 일으켜 한 번 시전한 뒤 다시 펼치려면 한 달 동안
요양해야만 한다.
철운비를 격중시킨 것은 바로 그 암흑천독강전이었다.
"카앗! 아는 것이 너무 늦었다, 애송이!"
피-- 잉!
그때 암흑독종에 재차 발악하듯 외치며 비틀거리는 철운비에게 덮쳐들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철운비가 아니라 철운비가 들고 있던 지옥혈겸(地獄血
鎌)이었다.
한데 철운비가 그 지옥혈겸을 떨어뜨리자 암흑독종은 거리낄 것없이 덮쳐든
것이었다.
"바득… 녹아랏! 묵린독장(墨鱗毒掌)!"
치지직!
암흑독종은 거칠게 흉갈을 터뜨리며 왼손으로 벼락같이 철운비의 정수리를
후려쳤다.
순간 그의 손바닥에서 시커먼 독장이 벼락치듯 일어나 철운비에게 작렬했
다.
(죽였다!)
암흑독종은 득의의 미소를 떠올리며 철운비의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비이이-- 잉! 쩌러렁!
돌연 철운비의 몸 주위로 검붉은 노을이 천 겹으로 폭발하듯 일어났다.

-단철패왕신공(丹鐵覇王神功)!

지상최강의 호신기공이라고 할 수 있는지 고독패왕(孤獨覇王)의 절기가 펼


쳐진 것이었다.
터-- 엉!
한순간 암흑독종의 묵린독장은 단철패왕신공에 부딪혀 마치 철벽을 두드리
는 듯한 굉음과 함께 퉁겨나갔다.
"허억!"
뜻밖의 광경에 암흑독종은 대경하여 안색이 홱 변했다. 그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며 급히 동굴 밖으로 퉁겨져 나갔다.
하지만 그때,
"어딜… 가느냐?"
돌연 철운비의 고개가 번쩍 들려지며 한 소리 폭갈이 터져나왔다.
콰득!
그와 동시에 그의 오른손이 맹렬히 암흑독종의 아랫도리를 향해 그어졌다.
"케-- 에엑!"
암흑독종의 입에서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터져나온 것은 그 직후였다. 철
운비의 손 끝에서 폭풍같은 무형의 잠력이 일어나 암흑독종의 아랫도리를
휩쓴 것이었다.

-잠마폭풍참(潛魔暴風斬)!
남해 잠마혈종(潛魔血宗) 최강의 파멸공력이 펼쳐진 것이었다.
후드득… 퍼퍼퍽!
다음 순간 분쇄된 살점과 뼈조각이 검붉은 피와 함께 허공으로 확 번져올랐
다.
"크아아!"
쿠웅!
이어 암흑독종의 입에서 재차 처절한 비명이 터지며 그의 몸이 동굴 밖으로
내팽개쳤다.
아! 실로 끔찍했다. 잠마폭풍참에 휘말려 암흑독종의 아랫도리는 허리까지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으스러져 버린 것이 아닌가?
"으아아악! 내 다리… 내 다리…!"
지면으로 나뒹군 암흑독종은 처절하게 부르짖으며 몸을 바둥거렸다.
"흐응! 남의 고통은 몰라도 네놈 자신의 사지가 떨어져나간 고통은 아는구
나!"
슥!
그때 철운비가 차갑게 냉소하며 암흑독종의 옆으로 날아 내렸다.
암흑독종은 고통으로 안면을 참담하게 일그러뜨리며 눈을 부릅떴다.
"크윽… 네놈은 분명… 암흑천독강전에 격중되었을 텐데…!"
그는 철운비를 노려보며 불신과 공포의 빛을 띠었다.
그 모습에 철운비는 싸늘한 냉소를 흘렸다.
"암흑천독강전 정도는 나를 죽이지 못한다!"
찌익!
그는 왼쪽 어깨의 폐포자락을 뜯어냈다. 그런 그의 어깨에는 사발만한 크기
의 검은 점이 새겨져 있었다. 바로 암흑천독강전에 관통당한 흔적이었다.
하나 보라! 기이하게도 그 점은 급격히 작아지고 있었다. 그것은 철운비의
내부에 있는 만년혈만(萬年血饅)의 보혈이 작용하여 독기를 밀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에 암흑독종은 경악하며 입을 딱 벌렸다.
"불… 사지체(不死之體)였다니…!"
그의 눈이 절망의 빛으로 물들었다.
"독문(毒門)의… 천적(天敵) 불사마종(不死魔宗)이… 부활하다니… 이 사실
을… 독황야(毒皇爺)께서 알아야 하는데…"
그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철운비를 바라보며 더듬거렸다.
철운비는 눈썹을 꿈틀했다.
"독… 황야(毒皇爺)? 그 자가 누구냐?"
그는 냉담한 눈빛으로 암흑독종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순간 암흑독종은 잔인한 표정으로 바득 이를 갈았다.
"캇! 네놈이 불사지체는 무어든… 독황야께서 복수를 해주실 것이다. 본좌
는 뇌가계집을 데리고 먼저 지옥에 가서 네놈을 기다리겠다!"
퍼억!
발악하듯 외침과 함께 돌연 그 자는 성한 왼손으로 자신의 심장을 후벼팠
다.
"엇!"
돌연한 그의 태도에 철운비는 대경했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암흑독종이
스스로 심장을 박살내고 나뒹군 후였다.
철운비는 안색이 일변했다.
(큰일이다. 고독(蠱毒)은 시술자가 죽으면 중독당한 숙주까지 함께 죽고 만
다는데…!)
그는 급히 동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고독을 시술한 암흑독종이 죽은 이상
뇌온향까지 죽게 된 것이었다.
한데, 철운비가 막 동굴 안으로 달려 들어가려 할 때였다.
"그럴… 필요없소 철형(鐵兄)!"
문득 동굴 위의 석벽에서 비통한 일갈이 터졌다.
(벽력잠룡 뇌… 천강!)
철운비는 안색이 홱 변하며 내심 부르짖었다. 그는 급히 석벽 위를 올려다
보았다.
과연 동굴이 있는 석벽 위 한 명의 적포소년이 눈물을 흘리며 서 있었다.

-벽력잠룡(霹靂潛龍) 뇌천강!

바로 그였다. 벽력부의 어린 지존(至尊)인 그가 비통하게 눈물을 흘리며 서


있는 것이었다.
철운비는 당혹함을 금치 못했다.
"뇌제(雷弟)… 알고 있었군!"
그는 무겁게 신음하며 뇌천강을 올려다 보았다. 그는 직감적으로 뇌천강이
어머니 벽력대부인 뇌온향의 불륜(不倫)을 알고 있음을 감지했다.
그렇다.
뇌천강은 자신의 어머니 뇌온향이 암흑독종에게 겁탈당해 온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석 달 전 어느날 밤, 잠이 안와 후원을 거닐던 뇌천강은 어머니 뇌온향의
침실에서 누군가 빠져 나가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급히 뇌온향의 침실로 달려갔을 때는 이미 참사가 벌어진 후였다. 커
다란 침상 위에 무참하게 유린당한 여체가 혼절한 채 널브러져 있었다.
물론 그녀는 뇌천강의 어머니인 뇌온향이었다.
하의가 벌거벗겨진 채 혼절한 뇌온향의 하체는 지독한 난행을 당한 듯 온통
선혈로 물들어 있었다.
그 처참한 어머니의 모습은 어린 뇌천강에게는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하나 더욱 그를 놀라게 한 것은 뇌온향이 그 날 이후 밤마다 누군가를 찾아
가 몸을 섞고 돌아온다는 사실이었다. 뇌천강은 그런 어머니가 가엾기도 하
고 저주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뇌온향은 어디까지나 그 자신의 어머니였다. 따라서 뇌천강은 지금
까지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고 혼자 괴로워 해온 것이었다.

뇌천강은 비통한 표정으로 철운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머니께 환희마고(歡喜魔蠱)를 시전한 암흑독종이 죽은 이상… 어머니도
곧 절명하시게 될 것이오. 그것이 차라리 그 분께 좋을지도 모르는 일이오!
"
그렇게 말하는 뇌천강의 두 눈에는 섬뜩한 광기가 번졌다.
"어머니의 일은… 세상이 알아서는 안 되는 벽력부의 치욕이오. 한데… 유
감스럽게도 철형(鐵兄)은 그것을 알고 말았소!"
슥!
그는 문득 소매에서 하나의 구슬을 꺼내들었다.
그것을 본 철운비는 외쳤다.
"벽력… 굉천뢰(霹靂宏天雷)! 무엇 하려는 거요!"
뇌천강이 꺼내는 것, 놀랍게도 그것은 벽력굉천뢰였던 것이다.
뇌천강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철운비를 바라보았다.
"용서하시오! 우리 벽력뇌가(霹靂雷家)의 명예를 위해 철형을 살려 보낼 수
가 없소!"
그는 수중의 벽력굉천뢰를 번쩍 쳐들었다.
그 모습에 철운비는 낭패한 표정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일이…!)
그는 벽력굉천뢰가 얼마나 무서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폭발하면 삼십 장 내의 모든 것이 박살나고 만다. 철운비가 아무리
무영종(無影宗)의 경공절기를 연마했어도 순간적인 그 벽력굉천뢰의 폭발권
을 벗어날 수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위기의 순간,
"그래서는… 안 돼."
돌연 뇌천강의 등 뒤에서 한 소리 탄식성이 일었다.
동시에 뇌천강은 한 가닥 싸늘한 검기가 내심으로 스며들어 순식간에 전신
혈도를 막아 버림을 느끼고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 무형검기를 발출
하여 뇌천강을 제압해 버린 것이었다.
그 정도의 검기(劍氣)를 지닌 인물은 하늘과 땅 사이에 단 일 인 뿐이었다.
"사저!"
철운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절벽 위를 올려다 보았다.
언제 나타났을까?
화라락…!
뇌천강의 뒤에 한 명의 마의 검수가 옷깃을 펄럭이며 표표히 서 있었다.
지극히 허허로운 눈빛의 미검수, 물론 그는 남장한 벽황혜(碧皇慧)였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때 벽황혜는 탄식하며 뇌천강의 손에서 벽력굉천뢰를 빼앗아 주머니 속에
넣었다.
화라락…!
이어 그녀는 혈도를 찍힌 뇌천강을 옆구리에 끼고 깃털같이 철운비의 옆에
내려섰다.
"신세를… 졌습니다, 대사저!"
철운비는 벽황혜를 향해 고소를 지어 보였다.
그 말에 벽황혜는 아미를 모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제는… 일을 악화시키기만 했어. 나도 이 자를 생포하려고 기회를 엿보
고 있었는데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다니…!"
그녀는 탄식하며 암흑독종의 시체를 내려다 보았다.
철운비는 침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방법이… 없습니까? 벽력대부인을 살릴 수 있는…"
"한 가지 있기는 한데… 그것을 쓸지 어떨지는 이 아이에게 물어 보아야만
한다!"
탁!
말과 함께 그녀는 뇌천강의 아혈을 풀어 주었다.
그리고 뇌천강에게 물었다.
"듣기만 해라. 뇌소제는 어머니를 살리고 싶으냐?"
"물론… 이오. 그 분은 어쨌든 나를 낳아 주신 분이오."
주르르…
그렇게 대답한 뇌천강의 눈으로 한 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벽황혜는 나직하게 탄식하며 다시 물었다.
"하지만 살아난다고 해도 백치가 될지도 모르는데 괜찮느냐?"
"…!"
뇌천강은 그 말에 일순 멈칫했다. 하나 이내 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보
였다.
그러자 벽황혜는 다소 가벼워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되었어 결정되었으니 서둘러야만 한다!"
이어 그녀는 암흑독종의 시체로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에 철운비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벽황혜는 암흑독종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대답했다.
"고독을 숙주의 몸에서 몰아내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시술자가
주술(呪術)로 불러들이는 것이오. 둘째는 일종의 약물로 기생하던 숙주의
몸에서 몰아내는 방법이 그것이지!"
"시술자인 암흑독종이 죽었으니 방법은 후자밖에 없겠군요."
철운비의 말에 벽황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묘강 살황독종에는 용연향(龍延香)이라는 영약이 있는데 그 향을 쏘
이면 고독은 숙주의 몸에서 빠져나가지…!"
"용연향이라…"
철운비는 나직한 어조로 뇌까렸다.
그러다 문득 그는 의아한 듯 검미를 모았다.
"하지만 암흑독종이 죽은 이상 아무 소용도 없지 않습니까? 고독은 그 주인
이 죽으면 함께 죽어 버린다는데…"
벽황혜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암흑독종은 죽었으나… 고독은 아직 죽지 않았어…"
말과 함께 그녀는 암흑독종의 미간을 식지로 힘껏 눌렀다.
빠지직!
그러자 뼈 바스라지는 소리가 들리며 두개골 사이로 한 마리 작은 분홍빛
고충(蠱蟲)이 기어나왔다. 그것은 일견하여 누에벌레같이 생겼는데 아주 작
고 귀여운 형상이었다.
문득, 벽황혜는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용연향을 구할 때까지 이놈을 누군가가 자신의 몸에 기생(寄生)시켜 주어
야 하는데…"
그녀는 말과 함께 의미있는 눈빛으로 철운비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철운비의 안색이 일변했다.
"나보고… 이놈을 맡으란 말씀입니까?"
벽황혜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놈은 암컷이라 사내의 몸에서만 기생하는데 어쩌지? 그렇다고 뇌소제에
게 맡길 수도 없고…"
"끙…"
철운비는 낭패한 기색으로 앓는 듯한 신음을 발했다.
(제길… 단단히 걸렸군!)
그는 난감한 듯 울상을 지었다.
그때 벽황혜가 철운비의 손가락을 쥐더니 암흑독종의 이마 위에서 오돌오돌
떨고 있는 고독에 갖다댔다. 그러자 분홍빛의 작은 고독은 냉큼 철운비의
손가락으로 달라붙더니 이내 눈이 녹듯 그의 손가락으로 스며 들어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철운비는 고소를 지었다.
(오나 가나 계집들에게 봉변만 당하는구나!)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독이 스며든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벽황혜는 그런 철운비의 모습을 바라보며 야릇하게 미소지었다.
"일단 위기는 넘겼으나 한시라도 빨리 용연향을 구해야만 해. 그렇지 않으
면 난처한 일이 벌어지니…"
그녀는 의미심장하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이어 그녀는 총총히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벽황혜가 사라지자 그곳에는 철운비와 뇌천강만 남게 되었다. 어색한 침묵
이 두 사람 사이에 무겁게 흘렀다.
그러다 문득 뇌천강이 먼저 침묵을 깨며 고개를 떨구었다.
"용서… 하시오 철형(鐵兄)!"
철운비는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마음에 두지 마오. 이미 잊어버렸으니…!"
뇌천강은 그 말에 씁쓸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어머님을… 부탁합니다. 그 분이 살아나시든 어쨌든 철형의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소이다!"
"…!"
철운비는 말없이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그때 동굴 안에서 벽황혜가 혼절한 뇌온향을 끼고 나왔다. 벌거벗겨졌던 뇌
온향의 몸에는 어느새 적포가 단정히 입혀져 있었다.
"우선… 부(府)로 돌아가자!"
슥!
벽황혜는 뇌온향을 끼고 먼저 날아올랐다.
"…!"
철운비와 뇌천강은 서로를 일견한 뒤 말없이 벽황혜의 뒤를 따랐다.
한바탕 혈풍(血風)이 몰아쳐 지나간 절곡에는 다시 암울한 적막이 찾아들었
다.
무참하게 죽어 널브러진 암흑독종의 시신에서 흐른 독혈(毒血)의 역겨운 냄
새만이 적막 속을 떠돌 뿐이었다.

여명(黎明), 짙은 어둠 속에 횟가루를 뿌린 듯 뿌옇게 날이 밝아오고 있었


다.
안개(霧),
스으… 스으…
차가운 새벽 안개가 습기를 머금고 피어 오르고 있었다. 미명의 야인산(野
人山)은 온통 짙은 안개 속에 뒤덮여 있었다.
암흑동종이 철운비에게 참살당한 절곡(絶谷)에도 무심하게 안개가 흐르고
있었다.
한데,
"…!"
언제부터인가 하나의 그림자가 안개 속에 유령같이 서 있었다.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온통 천으로 휘감은 인물이었는데 얼굴을 감싼 검은
몽면 사이로 섬뜩한 푸른색의 눈이 공포스럽게 번뜩이고 있었다.
전신이 온통 숨막히는 마기(魔氣)로 뒤덮인 괴인,

-지옥… 천존(地獄天尊)!

바로 그였다. 천지간에 그런 전율적인 분위기를 지닌 인물은 그 한 사람뿐


이었다.
츠으…!
지옥천존은 새파랗게 번뜩이는 녹안으로 발 끝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앞
에는 심장이 으스러진 한 구의 시신이 끔찍한 형상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암흑독종(暗黑毒宗)! 바로 그의 시신이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독혈로
사방 십 장의 지면이 온통 검게 타들어가 있었다.
지옥천존은 번뜩이는 녹안으로 암흑독종의 시신을 살펴보았다.
(이것은… 지옥혈겸(地獄血鎌)에 당한 흔적이다!)
그는 한눈에 그것을 알아보고 소리없이 신음했다. 그는 암흑동종의 끊긴 팔
을 주시했다.
어깨로부터 잘린 그 자의 상처에서는 기이하게도 전혀 피가 흘러나오지 않
고 있었다. 그것은 상처부위의 피가 지옥혈겸에 순간적으로 흡수당한 것 때
문에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놈… 이었나? 이 년 전… 금릉에서 만났던…!)
문득 지옥천존의 눈빛이 가늘게 경련했다.
그의 눈 앞에 한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창백한 안색에 음울한 눈빛을 지
녔던 소년…
철운비의 모습을 떠올리며 지옥천존은 내심 침중하게 중얼거렸다.
(고루… 마정(固陋魔井)에서 고독패왕의 방해로 놓쳤을 때… 언젠가 그 어
린 놈이 나의 천적이 되어 나타난 것을 예감하기는 했으나… 너무 빠르게
육박해 오는군!)
그의 눈빛이 아주 강해졌다.
고루성전에서 철운비를 놓친 후 지옥천존의 뇌리에서는 그의 모습이 떠난
적이 없었다.
예감이랄까? 언젠가 그 어린 소년이 자신의 운명적인 적수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시도 떨쳐 버리지 못했다.
(철… 운비(鐵雲飛)라고 했지…!)
문득 지옥천존은 음울한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너… 어린 놈은 결국 내 손에 죽으리라. 천하무림은… 곧 나 벽우뢰의 손
에 정복당할 것이므로… 후훗!)
그는 몽면 속으로 스산한 웃음을 흘렸다.
그때,
"신첩… 이옵니다!"
스스스!
문득 요악한 여인의 음성과 함께 하나의 갸날픈 인영이 깃털같이 지옥천존
의 앞으로 내려섰다.
여인(女人), 그녀는 전신이 훤히 비쳐 보이는 나삼을 걸친 미소부였다. 풍
만하고 뇌살적인 몸매에 요악하도록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여인이었는데 살
짝 벌어진 나삼의 가슴섶 사이로 나찰(羅刹)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나찰관음(羅刹觀音)!

바로 그녀였다.
지옥천존의 그림자인 지옥삼패(地獄三覇)의 막내 요녀(妖女)!
나찰관음은 지옥천존에게 나긋하게 허리를 숙이며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어제저녁… 벽력부에 두 명의 젊은 무사들이 왔었는데… 그 중 한 자는 사
경(四更) 무렵 급히 남쪽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지옥천존의 녹안이 순간 번쩍 빛났다.
"그 자들의 이름은 확인했느냐?"
그 말에 나찰관음의 눈빛이 문득 야릇해졌다.
"그것이… 한 자는 철운비(鐵雲飛)라 하고… 다른 한 자는 잘 알려진 신진
제일고수 검왕(劍王)…"
지옥천존이 그녀의 말을 막았다.
"떠난 쪽은… 철운비(鐵雲飛) 쪽인가?"
"그렇습니다. 아마도 그 어린 아해는 묘강의 살황독종(薩荒毒宗)을 향해 간
듯합니다!"
나찰관음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용… 연향 때문이겠지!"
따각!
지옥천존은 암흑독종의 바스라진 두개골을 발로 툭 차며 스산하게 중얼거렸
다.
그는 한눈에 암흑독종의 몸에서 환희마고(歡喜魔蠱)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
다. 그리고, 그것으로 모든 것을 추측해 낼 수 있었다. 그것은 지옥천존 자
신이 오히려 암흑독종보다 더 고명한 용독(用毒)의 달인이었기 때문이다.
문득, 지옥천존은 모종의 결심을 한 듯 내심 중얼거렸다.
(그래! 그 어린 용(幼龍)이 더 이상 자라게 방치할 수는 없다. 묘강(苗疆)
이라면 놈을 제거하기에 적합한 장소지!)
츠으!
그의 눈가로 섬뜩하도록 스산한 한광이 스쳐 지나갔다.
"…!"
그것을 본 나찰관음의 봉목이 순간적으로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지옥천존은 스산한 음성으로 나찰관음에게 명했다.
"묘강의… 도화독모(桃花毒母)에게 전서를 보내라. 한 마리 잠룡(潛龍)이
갈 것이니… 붙잡아 두라고. 독… 황야(毒皇爺)가 도착할 때까지…!"
"…!"
나찰관음의 교구가 일순 파르르 경련했다. 하나 그것은 극히 순간적이라 지
옥천존도 눈치채지 못했다.
"분부대로…!"
나찰관음은 두 손을 풍만한 가슴에 모으고 고개를 깊숙이 숙여 보였다.
스스…
그녀는 곧 날렵하게 교구를 날렸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모습은 자욱한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나찰관음이 사라지고 나자 지옥천존은 허리를 숙여 암흑독종의 시신에 왼손
을 갖다냈다.
파사삿!
다음 순간 돌연 암흑독종의 시신이 새하얀 백골로 변해 부서져 내렸다.
그것은 암흑독종의 시체에 깃들어 있던 모든 독기가 순간적으로 증발되어
일어난 현상이었다. 심지어는 흙에 스며들었던 독혈(毒血)의 독기까지 일시
에 증발해 버리고 말았다.
물론 그 독기를 받아들인 것은 지옥천존이었다. 가공스럽게도… 그는 전율
스런 위력의 독공(毒功)까지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오갑자에 이르는 암흑독종의 천독지공(千毒之功)을 흡수한 지옥천존의 눈가
로 만족한 빛이 흘렀다.
"후훗! 철운비! 곧… 본좌를 만나게 되리라! 살황독종(薩荒毒宗)의 땅… 묘
강(苗疆)에서 후후훗!"
스스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이 뿌옇게 변하더니 이내 장내에서 사라져 버렸다.
사람의 자취가 사라진 절곡에는 다시 음습한 안개와 괴괴한 적막만이 떠돌
고 있을 뿐이었다.

-묘강(苗疆).

달리 안남(安南)이라 불리는 상하의 땅!


묘강이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삼국시대였다. 저 촉한(蜀漢)의
무후(武侯) 제갈공명이 묘강의 영주 맹획(孟獲)을 일곱 번 잡았다가 일곱
번 놓아준 칠종칠금(七從七襟)의 고사(古事)가 바로 그것이었다.
열대와 밀림의 거친 대지… 묘강, 그 묘강을 지배하는 것은 하나의 초거대
세력이었다.

<살황… 독종(薩荒毒宗)!>

바로 그들이었다.
만독(萬毒)의 하늘… 그들은 달리 묘강천독연맹(苗疆千毒聯盟)이라고도 불
린다.
일천 개의 군소국가와 부족, 문파가 모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천독연맹이라
불리는 것이다.
살황독종은 가히 묘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묘강에는 수많은 군소국
가들이 있으나 그들 중 살황독종의 통제를 받지 않는 국가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살황독종은 그렇게 천 년 이상 묘강을 지배해 왔다. 자연히, 살황독종의 종
사는 신(神)같이 숭앙을 받아왔다.
당대의 독종(毒宗)은 묘강독성(苗疆毒聖)이란 인물이었다. 백 년 전, 열 명
의 천독강시를 중원으로 보내 한바탕 파란을 일으킨 장본인이 바로 그였다.
그는 살황독종 사상 최강의 고수라 할려진 인물이었다. 그의 나이 백오십이
가까우나 아직까지 묘강 아래에서는 신(神)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묘강독성은 이미 독공 최후단계인 독종독인지경(毒宗
毒人之境)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경지는 십 리 밖의 적을 눈짓 한 번으로
녹여낼 수 있는 경지였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묘강독성은 문인들의 앞에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대신 그는 독종(毒宗)의 상징인 독왕번(毒王幡)을 한 명의 젊은 패웅에게
주어 그로 하여금 살황독종을 다스리게 했다.

-독… 황야(毒皇爺)!
이것이 새로운 살황독종 종사의 이름이었다.
그는 아주 신비한 인물이었다. 다만 독황야라 불릴 뿐 그의 모든 것은 비밀
에 싸여 있었다.
혹자는 그가 묘강독성(苗疆毒聖)이 중원의 공략을 위해 비밀리에 키운 제자
라고도 하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어쨌든 독황야는 몇 년 사이 가히 초인적인 능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묘강독성에 못지 않은 뛰어난 독공(毒功), 빈틈없이 치밀한 심기 등으로 독
황야는 이내 묘강 제부족들을 진심으로 심복화시켰다.
묘강의 풍운아(風雲兒)-- 독황야(毒皇爺)!
살황독종의 문인들은 그 독황야가 그들의 천 년 숙원인 중원정복을 이루어
줄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살황독종의 독인들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독황야라는 이름 아래 파
멸의 암운(暗雲)이 서서히 묘강 전체를 뒤덮고 있음을…

노을, 황금빛 노을이 묘강의 광활한 밀림 위로 번지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바다 같은 밀림의 한쪽에 하나의 아늑한 계곡이 자리하고 있었
다. 그것은 마치 호리병 형상으로 지면에서 오십여 장 깊이로 푹 꺼진 형태
였다.
스으… 스으…
헌데 그 계곡 전체에는 흐릿한 복숭아꽃(桃花) 빛깔의 안개가 흐르고 있었
다.
그것은 일종의 독장이었다. 복숭아꽃같은 색인 그 독장의 이름은 도화독장
(桃花毒腸)이라 한다.
그리고 도화독장에 덮인 계곡이 도화곡(桃花谷)임을 모르는 묘강인은 아무
도 없었다.
또한 그 도화곡에 한 명의 무서운 여인이 살고 있음도…
까아악!
문득 날카로운 새소리가 저녁 하늘을 울렸다.
피-- 이잉!
이어 한 마리 신조가 도화곡을 향해 빛살같이 내리꽂혔다. 그놈은 전체가
온통 타는 듯 붉은 독수리로써 천독적응(千毒赤應)이라는 살황독종의 영조
(靈鳥)였다.
피-- 이잉!
천독적응은 거리낌없이 도화독장을 꿰뚫고 내려가 도화곡의 한 곳으로 날아
들었다.
죽옥(竹屋)--
한 칸의 정갈한 대나무집이 도화곡의 끝에 자리하고 있었다. 반월영의 연못
가에 자리한 아담한 죽옥이었다.
카아악!
천독적응은 그 죽옥을 향해 빛살같이 날아들었다.
"…!"
여인, 한 명의 여인이 죽옥의 창가에서 천독적응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이는 대략 삼십 전후, 일신에 화려한 도화무늬의 나삼을 걸친 이 미소부
는 마치 한 송이 만개한 도화를 보듯 요염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치렁치렁한 수발을 발 끝까지 드리우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
었다.
나삼여인은 초생달 같은 눈썹을 찌푸리며 날아드는 천독적응을 바라보았다.
"아아! 무심한 분, 이제야 연락을 보내시다니…!"
그녀는 빨간 입술 사이로 단내를 토하며 섬섬옥수를 쳐들었다.
피이잉… 화라락!
들어올린 나삼여인의 섬섬옥수로 천독적응이 날렵하게 내려앉았다. 천독적
응의 발목에는 한 장의 전서가 묶여 있었다.
나삼여인은 흥분된 마음을 억지로 누르며 천독적응의 발목에서 천을 풀어
읽기 시작했다.
한데,
"…!"
전서의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나삼여인의 표정이 점차 변해갔다. 기대에서
실망, 그리고 원망의 빛으로…
그것은 전서의 내용 때문이었다.

<…中略… 놈은 우리 사대독황(四大毒皇) 중 둘째인 암흑독종(暗黑毒宗)을


죽인 초고수요. 따라서 정면충돌 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시오. 독모(毒母)
의 도화독분(桃花毒粉)이면 그 놈을 사로잡을 수 있으리라 믿소. 나… 독황
야(毒皇爺)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를 바라오.>

전서의 내용은 그러했다. 그것은 바로 중원에 가 있던 독황야가 보낸 것이


었다.
"독… 황야!"
서신을 읽고 난 나삼여인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중얼거렸다.
푸스스!
그와 함께 서신이 그녀의 손 안에서 한 줌의 재로 부서져 내렸다. 나삼 속
으로 터질 듯 무르익은 풍만한 육체가 파르르 떨림을 일으켰다.
나삼여인의 커다란 봉목이 새파란 독기를 발산했다.
"무… 정한 자! 반 년 만에 겨욱 보낸 연락이 중원에서 오는 사내놈을 제압
하라는 명령이라니…!"
그녀의 봉목이 애증과 서글픔으로 뽀얗게 흐려졌다. 나삼여인은 오래 전부
터 독황야에 대한 열정을 키워온 듯했다.
하나 그것은 그녀의 일방적인 감정이었을 뿐이다.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여
인의 방심에 썰렁한 한기와 함께 꾸역꾸역 증오의 독기가 피어 오르는 것이
었다.
"도화… 독분은 사내를 짐승으로 만든다. 철운비라는 자가 정말 그렇게 무
서운 자라면… 정조를 잃을 각오까지 해야만 하거늘… 내게 거리낌없이 이
런 명령을 내리다니…!"
나삼여인은 분노의 표정으로 바득 이를 갈았다. 무르익을대로 무르익은 그
녀의 풍만한 젖무덤이 나삼 속에서 크게 출렁였다.
이어 그녀는 붉은 입술을 꼬옥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한 번만… 더 당신의 명령을 따르지! 그러고도 당신의 마음을 얻
지못하면… 내 손으로 당신을 파멸시키고 말겠어! 나… 도화독모(桃花毒母)
의 손으로…!"
도화독모(桃花毒母)-!
나삼여인은 오연하게 고개를 발딱 쳐들며 저녁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고개를 쳐든 그녀의 모습은 더 이상 방금 전의 나약한 아녀자가 아니었다.
오만함과 독기로 가득한 여장부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부디… 나 도화독모를 화나게 하지 않는 것이 좋아! 그렇지 않으면… 나의
위대하신 조부님의 손을 빌어 당신을 철저히 파멸시켜 버릴 테니까… 독황
야 나으리…!"
츠으!
오연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는 도화독모의 두 눈으로 스산한 한광이 일어 저
녁 하늘로 뻗쳐 올랐다.
도화곡(桃花谷)…
이곳은 운명이 도화독모라 이름붙인 묘강제일미녀(苗疆第一美女)의 거처였
다.

정오 무렵,
콰-- 아아…!
갑자기 하늘이 새카맣게 변하더니 장대 같은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것은 열대지방에서 매일 한 차례씩 쏟아지는 폭우였다.
쏴아아…!
빗줄기는 흡사 묘강밀림 전체를 떠내려 보낼 기세로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
다.
어느 야트막한 구릉,
"흐음… 대단한 기세인데…!"
한 명의 소년이 팔짱을 낀 채 우뚝 서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온 치렁한 장
발, 일신에 낡은 폐포를 걸친 소년이었다.
철운비-- 바로 그였다.
그는 구릉 위에 우뚝선 채 폭우가 쏟아지는 광활한 밀림을 내려다 보고 있
었다.
스으… 스으…
그의 일 장 주위로는 빗물이 침투해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몸 주위에서 일어나는 무형강기의 벽이 빗물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흐음… 살황독종의 중심지까지는 왔지만 어디 가서 용연향을 구할지 난감
한데…?)
철운비는 검미를 모으며 습관적으로 이마를 긁었다.
그런 그의 이마에는 하나의 흐릿한 분홍 점이 떠올라 있었다. 물론 그것은
환희마고(歡喜魔蠱)였다.
철운비는 벽력부를 떠난 지 사흘 만에 이곳에 닿았다. 사흘 동안 환희마고
는 수시로 철운비를 당혹하게 만들곤 했다.
그것은 보통 때는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하나 환희마고는 수시로 깨어나
철운비의 본능을 자극하여 날뛰곤 했다.
본래 환희마고는 이성(異性)의 음정(淫精)을 먹고 사는 놈이었다. 즉 철운
비가 여인을 안으면 그때 생기는 음양정기를 먹고 사는 것이었다.
당연히 사흘 동안 철운비는 한 번도 환희마고를 만족시켜 주지 못했다. 그
때문에 환희마고의 발작은 점점 빈번해지고 그 강도도 강해져 갔다.
철운비는 의지력으로 그것을 제어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간 고역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빌어먹을… 빨리 용연향을 찾아 이놈을 몰아내든지 해야지, 원, 이러다가
나 자신도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겠는데…!)
철운비는 자신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고소를 지었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크아아아…!"
어디선가 한 줄기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
철운비는 그 소리에 흠칫 정신을 차렸다.
빗줄기가 워낙 드센지라 보통사람 같았으면 듣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 철운
비의 민감한 이목은 순간적으로 그 비명이 들린 위치를 파악해 냈다.
철운비는 번쩍 기광을 발했다.
(가보자! 잘하면 살황독종의 무리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스읏!
그렇게 결심한 순간 그의 신형이 흔들리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쏴아아…!
빗줄기는 여전히 세차게 묘강의 밀림 위를 두드리고 있었다.

∑ 제 26 장 천독사망편(千毒死亡鞭)

석곡(石谷)--
높은 석벽 아래 자리한 험한 골짜기였다.
쏴아…!
이름모를 그 석곡(石谷)에도 거센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한데 아! 이럴 수가…! 낮은 곳으로 흐르는 빗물은 끔찍하게도 검붉은 핏빛
이 아닌가? 빗물이 핏물로 화해 흘러내리다니…
문득,
"크으…! 자면독왕(紫面毒王)! 네… 네놈까지 살황독종(薩荒毒宗)을 배신하
다니."
분노와 고통에 이지러진 음성이 미약하게 들렸다.
하나의 바위 아래, 한 명의 노인이 고통스럽게 바르작거리고 있었다. 당당
한 체격에 네모 반듯한 얼굴을 한 초로의 노인이었는데, 지금 그의 모습은
너무도 끔찍하여 도무지 살아 있는 인간의 몸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츠… 츠으…
노인의 사지는 마치 얼음이 녹듯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있었다. 무엇인가 강
렬한 극독이 노인의 뼈와 살을 녹여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노인의 전신 피부도 급격히 녹아들어가 근육과 뼈가
허옇게 드러나고 있었다. 실로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빗물이 검붉게 변한 것은 노인의 몸이 녹아내린 독혈(毒血)이 섞였기 때문
이었다.
한데 그런 노인의 처참한 모습을 잔인하게 내려다보며 히죽 웃고 있는 자가
있었다.
"후훗! 아직도 주둥이는 살아 있구나, 개비독장(開臂毒掌)!"
그자는 일견하여 이십 오륙 세 정도 되어보이는 청년이었다. 제법 영준한
용모를 지녔는데 기이하게도 얼굴이 검붉은 자색(紫色)이었다. 또 가늘고
날카로운 눈매와 얄팍한 입술은 잔인한 인상을 물씬 풍겼다.
자면청년(紫面靑年)의 오른손에는 날카로운 비늘이 솟은 하나의 채찍이 감
겨 있었다.

-천독사망편(千毒死亡鞭)!
이것이 채찍의 이름이었다. 그것은 천 가지 독물에 담궈 만든 것으로 스치
기만 해도 금강불괴를 녹이는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살황독종의 호법신병(護法神兵)으로 지옥혈겸(地獄血鎌)과 함께 천하팔천병
(環宇八天兵)의 하나에 드는 마병 천독사망편!
그것을 이 자면청년이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개비독장(開臂毒掌)이라 불린 노인의 사지가 흐물흐물 녹아드는 것은 바로
그 천독사망편(千毒死亡鞭)에 스쳤기 때문이었다.
개비독장 또한 절정독공을 익힌 고수자였다. 하건만 천독사망편의 무서운
독기에 침습당해 자신이 녹아들고 있는 것이었다.

"크으…! 자면독왕! 살황독종을 배신하여 얻은 대가가 무엇이냐? 그… 천독


사망편이 독황야(毒皇爺)로부터 받은 대가냐?"
개비독장은 처참한 형상으로 죽어가며 자면청년, 자면독왕을 노려보았다.
그의 두 눈은 온통 회한과 통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면독왕은 히죽 웃으며 수중의 천독사망편을 한 차례 흔들었다.
"물론 천독사망편도 그 중의 하나였지만… 보다 큰 대가는… 도화독모(桃花
毒母) 사고(師姑)와… 묘강의 패권이다!"
그는 몹시 흡족한 듯 득의의 웃음을 터뜨렸다.
"뭐…뭐라고?"
"으하핫! 독황야께서는 곧 대륙의 주인이 되실 분이다. 그때 가서 이 묘강
의 패권은 나 자면독왕(紫面毒王)의 것이 될 것이다! 물론 묘강제일미인(苗
疆第一美人)이라는 도화독모의 육체까지도…!"
"미… 미쳤군!"
광소를 터뜨리는 자면독왕을 올려다보며 개비독장은 절망의 표정을 지었다.
"독… 황야는 중원… 놈이다. 그 놈의 궁극적인 목표가… 묘강무림의 파멸
임을 아직도 알아차리지 못하느냐?"
그는 자면독왕을 노려보며 사력을 다해 외쳤다. 하나 그런 그의 눈꺼풀도
이미 녹아내려 버린 후였다.
자면독왕은 돌연 웃음을 뚝 그치며 잔혹한 눈으로 개비독장을 내려다 보았
다.
"헛소리를 더 이상 들어줄 만큼 본좌는 한가하지 못하다? 마지막 관용으로
늙은이가 더 이상 고생하지 않도록 일격에 죽여 주마!"
파-- 앗!
그는 말을 마침과 함께 들고 있더 천독사망편을 한 차례 흔들었다. 그러자,
일장이 넘는 천독사망편이 살아 있는 물체같이 뻣뻣하게 일어섰다.
"흐흣! 노독종(老毒宗)이 감금된 곳을 발견한 것이 죄다! 이제… 죽어라!"
쐐액!
파-- 츠츳!
자면독왕은 잔혹하게 웃으며 천독사망편으로 맹렬히 개비독장의 두개골을
후려쳐 냈다.
(크…도화곡(桃花谷)이 지척인데 여기까지 와서 죽게 되다니…!)
개비독장은 통분으로 두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의 두개골 위로 떨어지는 천독
사망편을 올려다 보았다.
한데 천독사망편이 막 개비독장의 두개골을 강타하기 직전이었다.
"악독… 하구나!"
돌연 측면에서 싸늘한 일갈이 터져나왔다.
쩌-- 정!
동시에 한 줄기 검붉은 지강(指剛)이 벼락치듯 날아와 천독사망편을 옆으로
퉁겨 버렸다.
콰드득…!
옆으로 퉁겨진 천독사망편은 하나의 천근 거석에 부딪혀 그 바위를 순간적
으로 녹여 버렸다.
"웬… 놈이냐?"
피-- 잉!
순간 자면독왕은 노갈을 내지르며 홱 돌아섰다.
언제 나타났을까? 삼 장 밖의 바위 위에 한 명의 폐포소년이 우뚝 서 있었
다.
음울하게 눈을 번뜩이며 장내를 내려다보고 있는 인물, 바로 철운비였다.
(이놈… 예삿놈이 아니다!)
빠직!
철운비를 발견한 자면독왕은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철운비의 주위로 흐
르는 무서운 무형강류(無形剛流)를 느낀 것이었다.
하나 그는 별로 거리끼는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손에 금강
지체라도 녹여내는 천독사망편이 있기 때문이었다.
자면독왕은 안면을 실룩이며 이를 갈았다.
"바득! 감히 나 자면독왕의 일을 방해하다니… 죽어랏!"
파-- 앗!
그는 노갈을 내지르며 지면을 박차고 날아올라 철운비를 덮쳐갔다.
파라랑--!
그의 손에 들린 천독사망편이 벼락치듯 철운비를 후려쳐 갔다.
하지만 철운비는 냉담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네가… 사대독황(四大毒皇)의 막내 자면독왕이냐?"
스읏!
그는 냉갈과 함께 오른손을 쳐들어 채찍을 막아갔다.
그것을 본 개비독장은 대경실색했다.
"막아서는 안 되오! 그것은 천독…!"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미 천독사망편은 철운비의 팔뚝을 후
려치고 있었다.
(이겼다!)
순간 자면독왕의 입가에는 득의의 미소가 번졌다. 천독사망편을 맨 몸으로
맞고 살아난 자는 하늘 아래 전무하다는 것을 믿는 탓이었다.
그러나…
따-- 당!
천독사망편이 철운비의 팔뚝을 후려치는 순간 요란한 쇳소리가 들렸다.
화드득…!
그와 함께 철운비의 폐포의 소맷자락이 천독사망편에 갈가리 찢겨나갔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직경 한 자 반 정도의 둥근 청동방패가 드러났다.
터-- 엉!
천독사망편은 그 청동방패, 마모천둔(魔母天遁)에 부딪혀 강렬한 반진력에
허공으로 퉁겨져 나갔다.
자면독왕은 대경했다.
(안 좋다…!)
그는 천독사망편을 쥔 손아귀가 마모천둔의 반진에 파열됨을 느끼며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그 순간,
"적붕… 쇄강조(赤鵬碎剛爪)라고… 아느냐?"
철운비가 쩌렁한 냉갈과 함께 왼손으로 허공을 격한 채 맹렬하게 그어냈다.
쩌저정!
그러자 그의 손가락 끝에서 시뻘건 붕조(鵬爪) 형상의 강기가 폭발하듯 일
어나 자면독왕의 가슴을 그어 버렸다.
다음 순간,
"크-- 아악!"
후두둑…!
자면녹왕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아! 그는 늑골이 드러날 정도로 확 뜯겨져 나간 채 퉁겨진 것이 아닌가?
"흐윽… 막북(莫北) 적붕호황천(赤鵬護皇天)이냐?"
피-- 이잉!
허공으로 퉁겨져 나가던 자면독왕은 공포의 신음과 함께 그대로 몸을 뒤집
어 저편으로 날아갔다. 그의 모습은 삽시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나, 철운비는 스산한 눈빛으로 그 자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 추격하지는
않았다.
"살황독종의 사대독황(四大毒皇)이 대단한 자들이라고 들었는데… 실망스럽
군!"
그는 문득 음울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뇌리에는 벽력부를 떠나기 전
벽황혜에게서 들은 사인(四人)의 독공고수의 이름이 떠올랐다.

-사대독황(四大毒皇)!

--독황야(毒皇爺)!
--암흑독종(暗黑毒宗)!
--도화독모(桃花毒母)!
--자면독왕(紫面毒王)!

그들이 바로 사대독황(四大毒皇)이었다.
사대독황은 묘강 살황독종을 이끌어 나갈 다음 세대라는 네 명의 고수들로
써 각기 한 가지씩의 독특한 독공절기를 지녀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다는
자들이었다.
그 중 암흑독종은 천독강시(千毒疆屍)를 부리는 것과 암흑천독강전(暗黑千
毒剛箭)으로 유명한 자인데 얼마 전에 철운비에게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그 자가 패사한 것도 순전히 방심하다가 기습을 당해 죽은 것이었
다. 그것도 철운비가 환우팔천병(還宇八天兵) 중 하나인 지옥혈겸을 지녔기
때문에 어이없이 격살당한 것이다.
한 예로 철운비조차 그 자가 시전한 암흑독강전에 피하지도 못하고 격중당
했지 않은가? 만일 철운비가 백독불침의 능력이 없었으면 죽음을 면치 못했
을 것이다.
하물며 암흑독종의 암흑천독강전은 살황독종 오대독공(五大毒功)중 겨우 서
열 사 위의 것에 불과함에랴…!
자면독왕(紫面毒王)--!
방금 달아난 그 자도 사대독황(四大毒皇)의 일 인이었다. 하지만 그 자 역
시 창졸지간 철운비의 적붕쇄강조(赤鵬碎彊爪)의 공력에 당해 놀라 달아난
것이었다. 만일 정식으로 싸웠다면 철운비도 꽤 고전했을 것이다.

"크으… 이… 이보게, 부… 부탁이 있네!"


문득 무심한 표정으로 우뚝 서 있는 철운비의 발 아래서 미약한 신음이 들
렸다.
"…!"
철운비는 그제서야 개비독장을 내려다 보았다. 개비독장의 얼굴은 피부가
완전히 녹아내려 하연 두개골이 다 드러난 끔찍한 모습이었다.
철운비는 부지불식간에 진저리를 쳤다.
(지독하군! 이것이 천독사망편의 위력인가?)
그는 침중하게 신음하며 개비독장의 옆에 앉았다.
"부탁이라는 것이 무어요?"
철운비의 물음에 개비독장은 죽어가는 처절한 모습으로 힘겹게 입을 열었
다.
"나… 는 위대하신 묘강독성(苗疆毒聖) 대종사님의 삼십육호법천장(三十六
護法天將) 중 셋째인… 개비독장(開臂毒掌)… 이네!"
"개비… 독장!"
철운비는 나직이 노인의 이름을 뇌까렸다.
개비독장은 꺼져갈 듯 미약한 음성으로 쥐어짜듯 말을 이었다.
"도화곡의… 도화독모(桃花毒母) 공주님께… 전해 주게. 그 분의 조부님이
시고 위대한… 살황독종의 대종사이신… 독성(毒聖)께서… 유황… 곡(硫黃
谷)에… 감금…"
철운비의 안색이 순간 홱 변했다.
"묘강독성이 감금되었단 말이오?"
"그… 렇네… 흉… 수는…"
개비독장의 음성이 급격히 낮게 꺼져들었다.
"흉수는 누구요?"
철운비는 개비독장의 입가에 귀를 기울이며 다급히 물었다.
"그… 놈… 독… 황…!"
주르르! 사력을 다해 거기까지 말한 개비독장은 그만 숨이 끊어지고 말았
다.
철운비는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가장 중요한 내용을 듣지 못했군!"
그는 침음하며 몸을 일으켰다.
츠으으!
그 사이 개비독장의 몸은 급격히 녹아들었다. 피부에 이어 근육이 녹더니
이내 뼈까지 녹아내렸다. 남은 것은 겨우 몇 줌의 머리카락뿐이었다.
철운비는 침중한 표정으로 개비독장의 시신이 놓였던 곳을 주시했다.
(지옥… 천존! 그 자의 마수가 결국 이 묘강무림까지 몰아 넣고 있는 것일
까?)
그는 문득 곤혹한 표정을 지었다.
(개비독장의 말로는 묘강독성이 유황곡이란 곳에 감금되어 있다고 했다. 우
선 그곳에 가보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이 자의 말대로 도화곡에 가서 도화
독모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만 하나…?)
그는 침음하며 내심 염두를 굴렸다.
그러다 그는 결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유황곡이란 곳은 위치도 모르니 우선 도화독모나 만나보자!"
다음 순간 철운비는 즉시 몸을 날렸다. 그의 신형은 이내 빗줄기 속으로 아
득히 흩어져 갔다.
쏴아아…?
빗줄기는 점차 약해져 가고 있었다.
하나 이미 개비독장의 시체는 어디에도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스으… 스으…
짙은 안개가 온통 밀림을 뒤덮고 있었다. 폭우가 그치자 남방의 뜨거운 태
양이 다시 작렬하며 대기를 온통 한증탕같이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꾸역꾸
역 일어나는 안개는 너무 짙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였다.
피-- 이잉!
헌데 그 짙은 안개 속으로 하나의 인영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철운비, 바로 그였다.
(낭패인데… 길을 잃은 것 같다!)
그는 고소를 지으며 안개 속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촤아아…!
돌연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나직한 인기척까지 들리는 것이 아
닌가?
"…!"
철운비는 반가운 마음에 급히 물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신형을 옮겼다.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코끝으로 문득 흐릿한 복숭아꽃 향기가 떠돌았다.
하지만 철운비는 미처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주위의 안개가 급격히 엷어지며 흐릿하게나마 주위의 경물이 보였다.
촤르르!
그 사이 예의 목소리는 더욱 가깝게 들리고 있었다.
철운비는 눈을 번뜩이며 하나의 바위 위로 뛰어올랐다. 물소리는 바로 그
바위 뒤에서 들렸던 것이다.
한데,
(욱!)
바위 위로 뛰어오르던 철운비는 질겁하고 말았다. 그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바위에서 미끄러져 내릴 뻔했다.
바위 뒤에는 철운비가 상상도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은 하나의 아늑한 계곡의 끝이었다. 전면에는 온갖 기화이초가 만발한
넓은 화원이 그림같이 자리하고 있었다. 또한 화원의 중간에는 제법 연못이
파여져 있었다.
그 연못가에는 그림같이 아늑한 한 채의 죽옥(竹屋)이 서 있었다. 마치 별
세계를 보는 듯 아름답고 환상적인 광경이었다.
스으… 스으…
게다가 흐릿한 분홍빛 안개가 그 연못의 주위를 휘감고 있어 더욱 신비스러
움이 더했다.
한데,
촤아아…
예의 연못 속에는 하나의 뽀얀 동체가 유영하고 있었다. 여인(女人), 한 명
의 여인이 전라의 몸으로 수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빙기옥골의 뽀얀 피부, 터질 듯 무르익은 탐스러운 동체…
그리고, 수초같이 넓게 퍼져 하늘거리는 긴 머릿칼… 그 모습은 마치 한 마
리 인어(人魚)를 연상시켰다.
"…!"
철운비는 상상치도 못했던 그 신비로운 광경에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마치 무엇에 이끌려 들 듯 연못 속을 내려다 보았다.
투명하도록 연못의 물 속으로 인어같이 움직이고 있는 뇌살적인 여체, 그
여체의 신비로운 율동에 철운비는 자신이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연못 속의 여인은 철운비가 지켜보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듯 태연히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한데, 그 때였다.
쉬-- 이잇!
돌연 연못가의 풀숲에서 하나의 길죽한 물체가 나타나 빠르게 연못 속의 여
인을 향해 접근해 갔다. 그것은 전체가 알록달록한 한 마리의 독사(毒蛇)였
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철운비는 대경했다.
(위험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조심… 하시오!"
피-- 이잉!
그는 다급한 일갈과 함께 번개같이 지력을 떨쳐내 여인을 향해 접근하는 독
사의 머리를 으스러뜨렸다.
"까-- 악!"
그제서야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던 여인은 죽은 독사를 발견하고 날카롭게
비명을 내질렀다. 이어 그녀는 너무 놀라 까무러친 듯 그대로 물 속으로 잠
겨들었다.
그 모습에 철운비는 안색이 일변했다.
"이런…!"
화라락! 그는 즉시 바위를 박차고 연못을 향해 쏘아갔다.
촤아아…!
이어 그는 물 속에 잠겨드는 여인의 허리를 끌어안고 연못 밖으로 날아나왔
다. 물기 젖은 더할 수 없이 탄력있는 여체의 감촉이 철운비를 당혹하게 만
들었다.
(묘강까지 와서 별꼴을 다 당하는군!)
그는 교소를 지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윽고 그는 조심스럽게 여인을 연못가의 풀밭 위에 뉘였다. 그제서야 그는
여인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여인은 아주 묘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어찌 보면 완숙한 중년여인 같
기도 했고 또 어찌 보면 순진무구한 소녀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나 아주 풍만한 몸매로 미루어 여인은 상당히 나이가 들었음을 알 수 있
었다.
터질 듯 탄력있고 탱탱한 유방, 미끈하고 팽팽한 하복부, 적당히 살이 오른
뽀얀 허벅지…
"…!"
뇌살적인 굴곡을 이룬 여체에 시선이 닿자 철운비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졌다.
여인의 머리는 아주 길고 풍성했다. 그 젖은 머릿칼이 그녀의 젖가슴과 허
벅지 사이의 은밀한 곳을 살짝 가리고 있었다. 하나 그 모습이 몸매가 완전
히 드러난 것보다 오히려 더 뇌살적이었다.
철운비는 내심 당혹함을 금치 못했다. 당장이라도 기절한 여체를 범하고 싶
은 충동이 불끈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정말… 묘한 계집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부동심(不動心)이 흔들리다니…!)
그는 내심 나직한 신음을 발했다. 이어 그는 혼절한 여인의 뺨을 손바닥으
로 두드렸다.
"소저! 정신 차리시오!"
그는 여인의 귀에 대고 큰소리로 외쳤다.
순간,
"…!"
여인의 두 눈이 기다렸다는 듯 반짝 떠졌다.
츠읏!
그런 그녀의 봉목에서 요악한 도화빛이 광망이 인 것은 그 직후였다.
그 모습에 철운비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급히 여인에게서 떨어지려
했다.
순간,
"호홋! 늦었다, 어린 놈!"
여인의 붉은 입술 사이로 요사한 교소가 터지며 한 줄기 강렬한 도화향(桃
花香)이 철운비의 얼굴을 확 뒤집어 씌웠다.
"크-- 읏!"
피-- 잉!
철운비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급급히 십 장 뒤로 퉁겨져 나갔다. 하나
그 때는 이미 늦어 그의 전신이 불덩이에 빠진 듯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
했다.
철운비는 대경했다. 그는 자신이 한 가지 지극히 강렬한 음독(淫毒)에 중독
된 것을 깨닫고 급히 내공을 일으켜 저지하려 했다.
하지만 한 번 일어난 본능의 욕화는 그의 전신으로 폭발하듯 급격히 퍼져나
갔다.
"호홋! 헛수고 하지 말아라! 도화독분(桃花毒粉)은 음양교합으로 토해내기
전에는 해독이 불가능하니까!"
슥!
누워 있던 여인이 깔깔 웃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철운비는 혼미 중에 이를 부득 갈며 여인을 노려보았다.
"네… 네가… 도화독모(桃花毒母)였느냐?"
여인은 요염한 자세로 철운비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본녀가 이 도화곡(桃花谷)의 주인인 도화독모 단려화(丹麗花)다!"

-도화독모(桃花毒母) 단려화(丹麗花)!

그렇다. 여인은 바로 도화독모였다. 묘강제일미인(苗疆第一美人)이며 사대


독황(四大毒皇)의 둘째라는 여장부가 바로 그녀였다.
철운비는 어이없이 그녀의 독수(毒手)에 떨어진 것이었다.
철운비는 혼미해져 가는 정신을 가다듬으려 안간힘을 썼다.
"나… 나는 그대와… 원한이 없는데… 왜 이런 짓을… 하느냐?"
그는 입술을 깨물며 더듬더듬 말했다.
그러자 도화독모의 봉목에 일순 새파란 독기가 떠올랐다.
"나를… 원망하지 말아라! 독황야(毒皇爺)가 원해서 너를 제거하려 하는 것
이니…"
"독… 황야(毒皇爺)?"
철운비의 몸에 한바탕 경련이 스쳐갔다.
(독황야(毒皇爺)라니… 그 자가 어떻게 내가 묘강으로 오는 것을 알고 도화
독모에게 나를 요격하게 했단 말인가?"
그의 머리는 일순 뒤죽박죽이 되었다.
그때 도화독모가 선뜻 철운비를 향해 다가섰다.
"네게… 개인적인 사원(私怨)은 없다. 하지만… 나 도화독모의 염원을 이루
기 위해서는 너를 죽여야만 한다!"
그녀는 철운비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빠지직…!
그런 그녀의 섬섬옥수가 순간적으로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도화쇄심독인(桃花碎心毒人)에 죽는 것을…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해라!"
이어 도화독모는 분홍빛으로 물든 섬섬옥수를 쳐들었다.
곱게 색칠을 한 듯 아름다운 분홍빛의 섬섬옥수, 하나, 그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가장 무서운 독공(毒功) 중 하나가 응집되어 나타난 현상이었다.

-도화쇄심독인(桃花碎心毒人)!

고금오대독공(古今五大毒功)의 서열 제 삼 위에 드는 독공으로써 그것에 격


중된 자는 지극한 쾌락을 느끼는 가운데 전신근육이 오그라들어 죽게 된다.
특히 무서운 것은 그것이 만독불침인 자에게라도 통용된다는 점이었다. 그
것은 도화쇄심독인이 강력한 흥분제의 일종인 도화지정(桃花之情)을 흡수하
여 연마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천하제일독종(環宇第一毒宗)이라는 묘강독성(苗疆毒聖)을 죽일 수 있는 독
공(毒功)이 있다면 오직 도화쇄심독인(桃花碎心毒印) 뿐이라고 할 정도였
다. 그만큼 도화쇄심독인은 무서운 독공이었다.
빠지직…
일순 도화독모의 교수가 금방이라도 분홍빛 이슬이 배어 흐를 정도로 그 색
깔이 짙어졌다.
그녀는 철운비가 완전히 저항능력을 상실했다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
는 전혀 경계심을 갖지 않고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철운비를 향해 도화쇄심
독인을 밀어냈다.
한데, 그 때였다.
번-- 쩍!
혼탁하던 철운비의 두 눈에서 무서운 신광이 폭발했다.
(흑…!)
순간 그 가공할 눈빛에 도화독모는 움질했다.
그때 철운비의 입에서 돌연 쥐어짜는 듯한 으르렁거림이 터져나왔다.
"맹호(猛虎)는 사람을 해칠 뜻이 없거늘… 우매한 인간이 맹호를 건드리는
구나!"
우두둑… 쩌저정…!
동시에 그의 머리칼이 순간적으로 시커멓게 변하며 창날같이 곤두섰다.
그 모습에 도화독모의 안색이 일변했다.
(위험… 해!)
한 줄기 불길한 예감이 그녀의 교구를 강타했다.
피이잉!
그와 함께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지면을 박차고 뒤로 퉁겨져 나갔다.
바로 그 순간,
"뇌정… 파천황(雷霆破天荒)!"
푸--하아악! 버--번쩍!
철운비의 입에서 하늘과 땅을 무너뜨릴 듯 엄청난 폭갈이 터져나왔다. 동시
에 그의 전신에서 일천 개의 태양이 폭발하듯 가공할 화염이 터져 솟구쳤
다.

-뇌정개벽천강(雷霆開霹天剛)!

십이성의 뇌성개벽천강이 철운비의 몸에서 터져나온 것이었다.


후두둑… 파스스…!
뇌정개벽천강의 열화강풍이 순간적으로 백 장 방원을 휩쓸었다.
그 열화강풍이 스친 곳은 모든 것이 삽시에 재로 부서져 내렸다. 수목은 물
론 바위와 연못가에 서 있던 도화독모의 죽옥까지도 열폭풍에 휘말려 재로
날아갔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츠츠츠… 치지직!
십여 장 넓이의 연못물까지 순식간에 수증기로 증발하여 연못의 바닥이 드
러나는 것이 아닌가?
실로 엄청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이럴 수가…!"
독화독모는 벼락같이 백 장 밖으로 물러난 채 입을 딱 벌리고 서 있었다.
그녀는 한 순간에 재로 변해 버린 자신의 도화곡을 믿어지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위험을 감지하는 여인의 본능이 그녀를 살려냈다. 하지만 아깝게도 그녀의
탐스럽던 수발은 열폭풍에 휘말려 태반은 재가 되어 버렸다.
머리카락이 타버리는 바람에 그녀의 풍만하고 뇌살적인 몸매가 그대로 드러
났다. 하나, 도화독모는 미처 그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그만큼 놀라움
과 충격이 너무도 컸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어찌 이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자는 정녕 인간인
가…?"
그녀는 마치 실성한 듯 중얼거렸다.
하나 그녀의 시야 어디에도 철운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철운비는 자신
의 모든 분노와 욕화를 순간적으로 뇌정개벽천강으로 폭출시키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도화독모는 충격이 가시지 않은 놀라운 눈빛으로 망연히 서 있었다.
그때,
"이제야… 왜 본좌가… 그를 도화독분으로 요격하라고 시켰는지 이해가 가
오?"
돌연 한 소리 음울한 음성이 등 뒤에서 들렸다.
순간,
"대… 사형(大師兄)!"
도화독모는 안색이 변하며 홱 돌아섰다.
언제 나타났을까? 그녀의 뒤에는 한 명의 훤칠한 장한이 우뚝 서 있었다.
아주 중후한 인상의 인물이었는데 그의 얼굴에는 푸르스름한 기운이 은은하
게 떠돌고 있었다.

-독황야!

그가 바로 독황야였다. 묘강 살황독종(薩荒毒宗)의 풍운아… 그가 나타난


것이었다.

도화곡(桃花谷)의 북방, 수많은 바위가 난립한 하나의 계곡이 자리하고 있


었다.
난석곡(亂石谷)의 깊은 곳,
츠으… 츠으…
난립한 바위 사이로 시뻘건 화광(火光)이 배어흐르고 있었다.
하나의 바위 위,
"…!"
머리를 산발한 한 명의 인물이 가부좌를 튼 채 운공하고 있었다.
철운비, 바로 그였다.
지금 그의 전신 피부는 마치 달군 쇠같이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또한 그가
일신에 걸친 폐포는 풍선같이 부풀어 올라 있었다.
츠으… 츠으…
철운비의 몸 주위로는 천 겹의 붉은 노을이 끝없이 명멸하고 있었다.

-뇌정천층화막(雷霆千層火幕)!

그것은 뇌정개벽천강을 일으킬 때 일어나는 화강(火剛)의 흔적이었다. 철운


비는 지금 뇌정개벽천강으로 내부의 도화독분(桃花毒粉)을 태우고 있는 것
이었다.
한데 문득,
"크으… 이런 곳에 숨어 있었군!"
스윽!
운공하고 있는 철운비의 뒤로 한 명의 청년이 사악한 웃음을 흘리며 다가섰
다.
얼굴이 자색을 띤 청년이었는데 그 자의 한 손에는 날카로운 비늘이 돋은
채찍이 둘둘 감겨 있었다.
자면독왕(紫面毒王)!
그 자는 바로 사대독황의 막내인 젊은 효웅 자면독왕이었다.
"바득! 네놈이 감히 나 자면독왕의 몸에 상처를 남겼겠다! 그 대가는… 네
놈의 머리통을 박살내 주마!"
자면독왕은 흉흉한 기세로 철운비를 향해 다가섰다. 자면독왕은 철운비에게
당한 상세를 치료하다가 뇌정화망을 발견하고 이곳에 이른 것이었다.
쩌러렁!
그 자의 손에 들린 천독사망편이 쇳소리를 내며 빳빳이 일어났다. 자면독왕
은 음산하게 웃으며 천독사망편을 들어올렸다.
"죽어랏!"
그리고는 철운비의 정수리를 노리고 맹렬히 후려쳐 내렸다.
쐐-- 애액!
천독사망편이 시커먼 그림자로 끌며 철운비의 정수리로 파고들었다. 그것에
서 일어나는 살인독기가 뇌전천층화망을 얼음같이 녹여버리며 철운비를 후
려쳐갔다.
위기의 순간,
"그래서는… 안 된다!"
돌연 한 소리 차가운 일갈이 측면에서 일었다.
푸--하악! 쩌저정!
돌연 무서운 검기(劍氣)의 덩어리가 폭발하듯 일어나 천독사망편을 후려쳤
다.
따다당!
"크-- 읏!"
순간 철독사망편이 자면독왕의 손아귀에서 퉁겨져 나가며 자면독왕은 쓰러
질 듯이 옆으로 밀려났다. 그 자의 호구는 강력한 진동을 견디지 못하고 파
열되어 피를 흘리고 있었다.
"누… 구냐?"
자면독왕은 가슴이 서늘해져 일갈하며 홱 돌아섰다.
그런 그의 좌측에는 언제였는지 한 명의 검수(劍手)가 옷깃을 펄럭이며 표
표히 서 있었다.
미인을 무색케 하는 영준한 외모의 미검수… 그는 고개를 약간 갸웃한 자세
로 한 자루 고검(古劍)을 내려뜨리고 서 있었다.
폭풍… 제왕검(暴風帝王劍)!
미검수의 손에 들린 고검의 검신에 언뜻 그런 명문이 새겨져 있는 것이 자
면독왕의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본 자면독왕의 안색이 홱 변했다. 그의 뇌리로 한 명 무서운 검수
(劍手)의 어름이 떠오른 것이다.
"너… 천년… 검왕(千年劍王)?"
자면독왕이 비칠 물러서며 앓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미검수, 즉 벽황혜의 눈빛이 아주 차갑게 번뜩였다.
"본좌에게… 불경하는 것은 그래도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운비(雲飛) 사
제를 해치려 한 자는… 결코 용서치 않는다. 비록… 그가 마신(魔神)이라
해도…!"
스-- 읏!
냉갈하며 벽황혜는 폭풍제왕검을 슬쩍 들어올렸다.
"안… 돼!"
파-- 앗!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자면독왕은 악을 쓰며 뒤로 퉁겨져 올라갔다.
쩌-- 어엉! 번-- 쩍!
그 순간 폭풍제왕검으로부터 천 개의 태양이 폭발하는 듯한 검기가 일어나
떠오르는 자면독왕을 휩쓸었다.

-폭풍파멸검강(暴風破滅劍剛)!
폭풍일맥의 가장 무서운 절정검예가 완벽에 가까운 형태로 펼쳐진 것이다.
"카-- 악!"
퍼-- 퍼퍽!
단말마의 비명… 폭풍검강이 작렬하며 뻗혀 지나간 곳으로 선뜻 핏빛 무지
개가 흩어졌다. 자면독왕의 전신이 푹풍검강에 휘말려 순간적으로 허공에서
산화되어 버린 것이다.
실로 무서운 검기(劍氣)였다. 그러나 진정 무서웠던 것은 벽황혜의 분노였
다.
무적(無敵)의 여제왕… 자면독왕을 형체도 없이 바스러뜨린 것은 바로 그녀
의 분노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데, 벽력부를 지키고 있을 그녀가 어떻게 이곳 묘강(苗疆)에 나타난 것일
까?
그 이유는 벽황혜 그 자신만이 알 것이다.

∑ 제 27 장 독황야(毒皇爺)의 비밀(秘密)

"으음! 걱정이 되어 뒤따라 와 봤더니 결국은 이 지경이라니…"


슥--
벽황혜(碧皇慧)는 탄식을 삼키며 철운비의 곁으로 다가갔다.
부르르--!
순간 혼미에 빠진 철운비의 전신으로 격렬한 경련이 스쳐갔다. 여인의 그윽
한 살내음이 철운비의 잠재된 본능을 자극한 것이었는데…
"…!"
벽황혜는 그런 철운비를 보며 흠칫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철운비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한눈에 알아차린 것이었다.
뜻밖에 상황에 대한 당혹과 두려움이 여인의 본능을 잠시 휘저어 간 후…
(그래 차라리 잘 된 일인지는 몰라…)
내심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벽황혜의 옥용에 추상(秋霜)처럼 쓸쓸한 미소
가 피어올랐다.
(운비 사제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욕정을 풀어 줄 여자의 몸…! 이 기회에
나의 몸을 운비에게 줘 버리자!)
벽황혜는 그런 결심을 굳히며 철운비의 곁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으… 으으…!"
철운비의 악다문 입술을 비집고 짐승의 억눌린 비명 같은 신음이 새어 나오
고 있었다.
그런 그의 신음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며 벽황혜는 그의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어 한 쌍의 소수(素手)로 머리에 둘러 있던 영웅건을 풀었다.
화락!
그러자 삼단같은 수발이 그녀의 어깨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 순간을 기점
으로, 준미한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던 벽황혜의 인상이 가히 우물(尤物)이
라 불릴 만한 절세가인(絶世佳人)으로 바뀌는 것이 아닌가?
일컬어 가로되 미여취우(眉如翠羽)하고 기여백설(肌如白雪)하며 요여속소
(腰如束素)한 경국지색이 바로 벽황혜를 두고 이루어진 말이리라!
"…!"
출렁이는 수발을 잠시 어루만지던 그녀의 손은 망설임없이 상의의 고름을
풀어냈다.
사르륵… 사륵…!
예전의 어느 시객(詩客)도 여인의 옷 벗는 소리를 최고의 아름다운 소리가
격찬했거니와… 그 소리와 더불어 신비의 장막을 드러내는 여체의 곡선은
또 다른 찬미의 절정이었다.
이러한 모습을 보지 못하고 혼미에 빠져 있는 철운비는 실로 불운한 사내임
에 분명했는데…
그녀의 손길을 따라 유백색의 젖가리개가 제거되자,
철렁!
아프게 눌려 있던 한 쌍의 젖무덤이 탄력적으로 튀어 나왔다. 그 정점의 두
끝에서 유두는 도발적으로 고개를 치켜들고 파르르 떨었다.
"으으…"
여인의 속살내음이 자욱해지자 철운비의 숨결은 급격히 거칠어져 갔다.
사르륵!
계속해서 하의를 풀어내는 벽황혜도 더불어 쿵쾅거리는 심장의 고동에 옥용
을 붉게 물들었다.
(이런 모습으로 내 몸을 주고 싶지는 않았어. 하지만…)
그녀는 이제 유백색 고의 하나만을 걸친 전라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미 선택의 여지는 없는 거야.)
그녀의 소수가 파르르 떨며 유백색의 고의를 아래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지금 운비에게 여자의 몸이 제공되지 않는다면 그는 걷잡을 수 없는 욕화
에 전신의 혈맥이 터져 죽고 말 테니까…!)
손바닥만한 고의를 발치로 밀어내는 그녀의 눈에서 무언가 영롱한 것이 흘
러내렸다.
또르르--
그것은 눈물이라기 보다는 이슬이란 보편적 표현이 더욱 어울리는 슬픔이었
다.
벽황혜는 떨리는 손으로 철운비의 왼손을 살며시 쥐었다. 도화지독에 중독
된 그의 손은 불덩이인 양 뜨거웠다.
"나를… 가져요, 운비!"
벽황혜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속삭이며 철운비의 손을 끌어 자신의 젖
가슴에 대주었다.
번-- 쩍!
순간 굳게 감겨 있던 철운비의 눈이 부릅떠졌다.
"끄-- 으--!"
이글거리는 그의 눈은 이미 인간의 눈이 아니었다. 어떤 악마… 혹은 한 마
리 야수만이 지닐 수 있는 흉폭한 음욕이 타오르고 있었다.
"흐-- 윽!"
벽황혜의 얼굴이 한 순간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철운비의 우악스런 손길이
그녀의 자그마한 유방을 으스러뜨릴 듯 움켜쥔 것이다.
"시… 싫어!"
벽황혜의 입에서 격렬한 거부의 목소리가 터져나올 때에…
"흐흐흐…!"
철운비는 흉소를 터뜨리며 그녀를 온 몸으로 덮치고 있었다. 대개 일반적인
상황하의 여인들이란 행위의 원활함을 도모하기 위하여 애액을 분비하는 법
이다. 그것은 일을 처음 당하는 처녀라 해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녀들이 심리적으로 준비가 돼 있지 않은 경우… 즉, 강간이라든
가 그와 유사한 상황하에서의 신체반응은 판이하다. 그녀들의 심리는 위축
되기 마련이며 그런 상황하의 신체는 본질적으로 행위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범례는 벽황혜에게도 그대로 적응되고 있었다.
"아-- 악!"
파괴의 고통이라 했지만 이런 유의 고통을 그녀는 전혀 예상해 본 적이 없
었다. 맹세하건대, 생살을 째고 들어오는 비수라 해도 결코 이처럼 고통스
럽지는 않을 것이다.
"시… 싫어! 아-- 악!"
그녀의 반항은 격렬했으나,
"흐흐흐…!"
야수성에 지배당하고 있는 철운비를 뿌리친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일이
되어 있었다.
그런 상상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동토(凍土)를 뚫고 새싹이 돋듯 미미한
느낌의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는 것은 정말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아흑… 아아…!"
벽황혜는 그 소중한 느낌이 문득 끼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철운비의 등을 굳
게 끌어 안았다.

"놈의 종적은… 이리로 이어졌어요!"


요악스러운 음성 하나가 대기를 진동시킨 순간,
스-- 읏!
한 쌍의 남녀가 허공을 밟으며 난석곡(亂石谷)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여인은 도화(桃花) 문양의 나삼으로 풍염한 몸매를 감싼 미소부(美少婦)였
고, 사내는 훤칠한 체격에 얼굴이 푸르스름한 중년인이었다.
이들은…?
그렇다. 바로 도화독모(桃花毒母)와 묘강의 젊은 패왕(覇王)인 독황야(毒皇
爺)였다.
도화독모는 철운비의 뇌정대력천강에 탐스럽던 머리칼의 태반을 그을린 무
참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옥용은 기쁨으로 인해 환희에 빛나
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찬사를 들었기 때문이었는
데…
휘휙!
도화독모는 붉은 입술에서 단내를 토하며 난석곡으로 비쾌하게 신형을 날려
갔다.
"호호! 멀리 못 갔어요. 그 중원의 어린 놈은 저 안 있는 모양이에요!"
도화독모는 짐승의 숨소리 같은 헐떡임을 들으며 독황야의 앞을 질러가기
시작했다.
허나 그 뒤를 따르는 독황야의 안면에는 잔 경련이 미미하게 일고 있었다.
도화독모는 미처 듣지 못했으나, 독황야는 철운비의 헐떡임 뿐 아니라 고통
과 환희성이 함께 실린 여인의 신음까지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어린 놈이… 어떤 계집을 능욕하고 있는 모양인데… 계집의 음성이 어
쩐지 귀에 익은 것은…)
독황야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이것이 내 착각이기를 바랄 뿐이다!)
스윽! 독황야는 웬지 불길한 기분을 억누르며 난석곡의 끝으로 쏘아가는 도
화독모의 신형을 따라 잡기 시작했다.

"…!"
부르르--!
독황야의 전신에 격렬한 파문이 스쳤다.
그의 찢어질 듯 부릅떠진 눈이 주시하고 있는 곳은 은밀한 바위 틈은 두 사
람이 나란히 눕기에도 비좁아 보였는데…
"아흑…! 아흐윽!"
하의만 벗은 철운비가 완전히 벌거벗은 벽황혜를 찍어 누르고 미친 듯이 날
뛰는 모습이 쏘아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허억!)
철운비 밑에 깔린 채 애처롭게 바둥대는 벽황혜를 본 순간 독황야는 뒷통수
를 둔기에 강타당하는 듯한 충격에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저 어린 놈에게 능욕당하는 대상이 황혜… 황혜였다니…!)
독황야의 얼굴은 더 이상 무참해질 수 없으리만큼 일그러졌다.
그는 벽황혜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아니 그런 표현은 옳지 않다! 잘 아는 정도가 아니라 벽황혜는 독황야에게
있어 생명이라고 해야 옳기 때문이다.
헌데 그런 벽황혜가 지금 철운비의 밑에 깔려 폭행을 당하고 있는 것이니…
독황야의 전으로 천 개의 종이 일시에 울리는 듯한 굉렬한 진동음이 울려왔
다.
그런 속에서 도화독모의 당혹에 찬 음성이 들려왔다.
"대사형(大師兄)! 왜 보고만 있느 거죠? 저 어린 놈이 미쳐 날뛰고 있을 때
제압해야…"
지껄이던 도화독모의 안색이 돌변한 것은 그 때였다.
쩌렁… 빠지직!
눈빛!
눈빛만으로 살인을 할 수 있다면 도화독모는 천참만륙되고 말았으리라.
그런 살인적인 안광을 폭사하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독황야를 마주 본 도
화독모의 안색은 순간적으로 하얗게 탈색되어 갔다.
"대… 대사형!"
그녀의 음성은 가늘게 떨려 나오고 있었는데…
그런 도화독모를 향해 독황야는 음울한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를 제거하려던 계획은… 취소한다. 그대신…"
독황야는 잠시 말을 멈추며 시퍼런 전광(電光)이 토해지는 도화독모의 동공
깊은 곳을 주시했다.
"사매는… 나와 함께 어느 한 곳에 가 주어야겠다!"
"무슨 말…?"
도화독모는 종잡을 수 없는 공포에 질려 주춤 물러섰다.
다음 순간,
파-- 앗!
독황야의 중지(中指)가 섬전 같은 속도로 도화독모의 마혈(麻血)을 찔러갔
다.
"악!"
도화독모는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마혈을 제압당했다. 거리가 가깝기는 했
으나 그보다 독황야의 수법이 너무도 탁월했기 때문이다.
"다… 당신이 이럴 수가…!"
부릅떠진 도화독모의 눈에 경악과 분노의 빛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독황야를 노려보며 모로 쓰러졌다.
슥--!
독황야는 쓰러지는 도화독모의 교구를 안아 들어 옆구리에 꼈다.
"네가 할 일은 모두 끝났다. 마지막 한 가지만 남겨 놓고는…!"
독황야는 그렇게 내뱉으며 신형을 돌렸다.
"아아아…!"
"헉… 헉…!"
돌아선 그의 귓전에 철운비와 벽황혜의 뜨거운 헐떡거림이 파고 들었다. 그
런 소리를 듣는 독황야의 표정은 괴이하게 일그러져 있었는데…
"휴-- 우!"
그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터져나온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지면을 박차고
비조처럼 솟아 오르고 있었다.
그 속에서 흐르는 그의 사념,
(행복… 하거라! 황혜… 나의… 딸아…!)

--나의 딸아!

독황야(毒皇爺)!
그의 어린 사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의문은 안개처럼 사위에
자욱이 깔리는데…
스-- 으--!
그의 신형은 순식간에 난석곡 밖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독황야의 도화독모가 나타났던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헉헉…!"
"아흑…!"
철운비와 벽황혜의 뜨거운 숨소리는 난석곡의 바위 틈을 끝없이 떠돌고 있
었다.

계곡--!
스으… 스으…
짙은 유황(硫黃) 연기가 온통 자욱이 뒤덮고 있는 비역(秘域)! 유황이 부글
부글 꿇고 있는 연못이 도처에 널려진 이 계곡은 초열지옥을 방불케 했다.
뼈를 부식시키고 내장을 녹여낸다는 저주의 운무! 유황독무는 풍우(風雨)의
영향권 속에서도 그 특성을 상실치 않는 악마의 독무로 일컬어지고 있었으
니…

<유… 황곡(硫黃谷)!>

천 년의 풍상(風霜)과 유황독의 침식에 문자가 마모되어 희미한 비석 하나


가 곡구(谷口)의 유황연기 속에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이곳은 버려진 땅… 생명과 육체가 있는 그 모든 것은 결단코 살아 남지 못
하는 절대절명의 사지(死地)였다.
하여 강호인이라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유황곡을 금역(禁域)으로 여기고 있
었던 것인데…
슈-- 슥!
비조처럼 빠른 인영 하나가 유황곡의 마위(魔位)를 무시하고 곡내를 쏘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
푸르스름한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중년인, 그는 바로 독황야(毒皇爺)
였다.
독황야의 옆구리에는 여전히 도화독모가 축 늘어진 채 안겨 있었다.
유황곡의 끝,
뭉클뭉클…!
곡내의 다른 어느 곳보다도 더욱 자욱한 유향연이 피어 오르고 있었는데,
그 독무 사이로 하나의 동굴이 어렴풋이 드러나 있었다.
흡사 지옥으로라도 통할 것 같은 시커먼 동굴, 독황야는 그 동굴로 서슴없
이 들어 섰다.
뚜벅… 뚜벅…
신법(身法)을 배제한 육중한 걸음걸이는 공명이 훌륭한 굴내의 대기에 부딪
쳐 끝없는 방향을 다중으로 형성했다.
최초의 예상과는 달리 동굴은 그리 깊지 않았다.
똑… 똑…!
간간히 낙수를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비동(秘洞)은 십 장 정도의 길
이에서 그 끝을 드러내고 있었다.
헌데 그 동굴의 끝에는 한 명의 노인이 앉아 있지 않은가?
전신은 먹물을 쏟아 놓은 듯 온통 흑빛 일색인데 기이하게도 바닥까지 드리
워진 머리칼과 긴 눈썹은 눈(雪)처럼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도대체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괴노인(怪老人)은 석벽을 뒤로 한 채 두 눈
을 감고 좌정해 있었다.

"오랜만에 뵙옵니다. 사부!"


독황야는 노인의 이 장 앞에서 음울한 음성으로 말을 건냈다.
"왜… 또 왔느냐? 아직도 이 사부에게서 빼앗아 갈 것이 남아 있더란 말이
냐?"
순간 전혀 입술을 움직이지 않는 노인의 입에서 괴악한 호통이 터져나왔다.
그것은 노인이 내공으로 공기에 파동을 일으켜 만들어 낸 음성으로 복화술
의 원리와 비슷한 데가 있는 것이었다.
그런 노인의 어깨를 자세히 관찰하면 한 가닥 만년한철(萬年寒鐵)이 노인의
비파골을 꿰뚫고 후면의 석벽에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헌데… 분명 사부라 했던가?
묘강일대의 젊은 패왕 독황야의 사부라면…?

-묘강독성(苗疆毒聖)!

이 노인이 바로 천하독종(天下毒宗)들의 살아 있는 신(神)이라 일컬어지는


묘강독성(苗疆毒聖) 단태독(丹太毒)이란 말인가?
과연 그것이 사실이라면… 천하는 실로 경악을 토해야만 하리라!
독문(毒門)의 영원한 제왕(帝王)이라는 묘강독성이 이토록 처참한 모습으로
이런 절지(絶地)의 비동에 갇혀 있다니…! 실로 상상을 절하는 사실이 눈
앞에 전개되고 있었다.
"사부님께… 만나게 해줄 사람이 있어 데리고 왔소이다."
독황야(毒皇爺)가 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지 않은 음성으로 말했다.
"…"
순간 묘강독성은 불길한 예감에 흠칫하며 눈을 떴다. 그런 그의 눈에 도화
독모(桃花毒母)가 인사불성이 된 채 독황야의 옆구리에 끼어져 있는 것이
들어왔다.
"여화(麗花)!"
묘강독성의 입에서 칼을 맞은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순간적으로 묘강독
성의 검은 얼굴이 여러 차례 뒤틀려졌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이지러졌다.
그의 시선은 이미 손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묘강독성의 노안은 회한을 담
고 독황야로 주시하고 있었다.
"내가… 끝까지 너를 잘못 보았느냐? 우뢰(雨雷)! 그래도 나는 네가 여화를
사랑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노독종(老毒宗)의 입에서 괴로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노부는… 네가 여화에게만은 잘해 주리라 믿었다. 그래서 네가 노부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어도… 너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철컹!
묘강독성이 몸을 떨자 그의 비파골을 꿰뚫은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었
다.
그 소리를 들으며 독황야의 눈가로 괴로운 상념의 빛이 언뜻 스쳐갔다.
"용서… 하시오 사부, 제자의 마음은 똑같이 차가와진 지… 오래요."
"으음…!"
사제(師弟)는 동시에 신음을 흘렸다.
그들 사이에 미움 같은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씁쓸한 희한의 고통
만이 있을 뿐…
"사매를… 해치지는 않을 것이오. 제자에게 한 가지 물건을 주시기만 한다
면…"
독황야가 침울하게 말을 이었다.
"무엇을 달란 말이냐? 노부에게 네가 탐낼 아무것도 남아 있지를 않았거늘
…"
묘강독성이 허탈하게 되물었다.
독황야는 스산하게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독황지정(毒皇之精)! 제자는 그것이 필요하오."
"독황지정!"
묘강독성의 안색이 홱 변했다. 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여러 차례 뒤바뀌었
다.

-독황지정(毒皇之精)!

그것은 일종의 내단(內丹)이었다.


살황독종의 종사들은 죽음에 이르게 되면 자신의 평생 독공의 정화를 하나
의 독단(毒丹)으로 응결시켜 후세에 남기곤 하였다.
역대 독종들은 선대의 그 독황내단에 자신이 연마한 독공을 첨가하여 다시
다음 대에 넘겨 주었다.
그렇게 천년(千年)! 독황지정은 이제 완전히 하나의 내단 형태를 이루게 되
었다.
만일 누군가 그 독황내단의 독황지기(毒皇之氣)를 완전히 내공으로 융해시
킨다면 그는 가히 독신(毒神)이 된다고 한다. 그 경지는 한 모금의 숨결로
백 리 사방의 모든 생명체를 녹여 버릴 수 있는 정도의 지경이다.
하나 천 년 간 누구도 그 독황지정의 융해를 시도해 본 자가 없었다.
독황지정은 곧 살황독종의 역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을 녹이는 것은 선
대에 대한 불경이 될 수 있으므로 역대 독종들은 그저 그것을 소중히 보전
하기만 했을 뿐이었다.

"우뢰! 너는 정녕 독하구나."
묘강독성은 문득 탄식을 흘렸다.
"독황지정을 꺼내려면 내 스스로 심장을 으스러뜨려야 함을 알면서도 그것
을 달라다니."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의 노안은 이내 결의의 빛으로 번뜩였다.
"원한… 다면 주마! 그 대신… 려화(麗花)를 다치지 않겠다고 야속해라!"
츠-- 읏!
묘강독성의 두 눈에서 형형한 지광(紫光)이 떠올라 독황야를 노려보았다.
독황야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오! 위대한… 폭풍세가의 이름을 걸고…"
푹풍세가…!
그 이름이 독황야의 입에서 나오자 묘강독성의 노안에 안도의 빛이 흘렀다.
그는 누구보다도 눈 앞에 선 제자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맵고 독하나 명예만큼은 목숨보다 중하게 여김을…
"후하하! 좋아! 어쨌든 너는 나 단태독(丹太毒)의 제자이고 살황독종의 후
예다. 너를 위해 무엇을 주지 못하겠느냐?"
묘강독성은 미친 듯이 광소를 터뜨렸다. 이어 그는 무섭게 독황야를 노려보
자 가슴을 앞으로 내밀었다.
"자! 독황지성을 받으라! 나의 제자여!"
퍼-- 억!
묘강독성은 대갈하며 깡마른 오른손으로 자신의 왼쪽 가슴을 후벼팠다.
우두둑…! 퍼-- 어억!
뼈와 살이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뜨거운 피분수가 확 일어나 독황야와 도
화독모를 뒤집어 씌웠다.
(용서… 하시오 사부!)
독황야는 미미하게 떨며 눈을 감았다. 그런 그의 두 볼로 한 줄기 뜨거운
물기가 흘러내렸다.
(제자는… 좀더 악독한 마종(魔宗)이 되어야 하오…! 아수라(阿修羅)로 불
리어 손색이 없기 위해 독황지정이 필요하단 말이오.)
독황야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냉혹하던 두 눈이 가득 물기로 젖어 있었다.
(사부에게 진 빚은… 사매를 통해 돌려 드리리다.)
독황야는 중얼거리며 안고 있던 도화독모를 내려 놓았다. 그리고는 쓰러진
묘강독성에게로 다가섰다.

황혼 무렵,
"으음 아무래도 한 걸음 늦은 것 같습니다 사저!"
스스스…
화다다닥…!
우울한 탄식성과 함께 두 명의 인물이 유황곡의 동굴 앞에 내려섰다.
철운비와 벽황혜! 바로 그들 두 사람이었다.
도화독분(桃花毒粉)으로 인해 한바탕 격렬한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눈 그
들이었다.
철운비는 겸연쩍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친누이 같은 아버지의 제
자… 그녀를 범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못내 불경을 저지를 것만 같은 죄책
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반면 벽황혜의 표정은 아주 묘했다. 부끄러워하고는 있지만 무엇인가 큰 짐
을 벗은 듯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그녀의 유현하던 눈빛은 이제 오히려 평범하게 변해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천년검후로서 최후의 관문을 통과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벽황혜는. 이제 인간이 이룰 수 있는 마지막 단계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래! 늦은 것 같구나!"
동굴 안쪽을 들여다 보며 벽황혜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한 가닥 역겨운 피비린내가 동굴 안쪽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두 사람은 예측하고 있었다.
철운비가 앞서 동굴로 들어섰다. 그 뒤로 벽황혜가 그림자같이 따랐다.

"으… 음!"
문득 철운비가 신음을 흘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검푸른 독혈이 동굴의 바닥
을 흥건히 적시고 있는 중에 두 명의 인물이 쓰러져 있었다.
심장 부분이 무참히 으스러진 백발의 괴인, 그리고 인사불성이 되어 누워
있는 풍만한 몸매의 미소부…
물론 그들은 묘강독성과 도화독모, 두 조손이었다.

-묘강독성(苗疆毒聖) 단태독(丹太毒)!

명실상부한 천하제일독종(환宇第一毒宗)! 그는 비파골을 꿰뚫은 쇠사슬 때


문에 반쯤 앞으로 기울어진 형태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 처참한 모습은 철운비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게 만들었다.
(천하제일독종! 당신이 이 무슨 처참한 몰골이외까? 제자 하나 잘못 두어서
…!)
철운비는 암울히 탄식했다. 그는 이미 묘강독성을 누가 이렇게 했는지 짐작
하고 있었다.
독황야(毒皇爺)…!
그가 어쩌면 지옥천존과 동일인일지도 모른다는 추측까지도 그는 하고 있었
다. 지옥천존 외에 천하최강의 독공고수자인 묘강독성을 위해할 수 있는 자
가 그의 뇌리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제대로 안장이나 해드려야겠습니다. 무림의 후배된 도리로…!"
철운비는 탄식하며 묘강독성에게 다가갔다.
이어 묘강독성을 묶고 있는 쇠사슬을 끊으려고 했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안 돼! 그것을 끊으면… 벽 뒤의 지심화맥(地心火脈)이 폭발하여 너희들까
지 날아간다."
한 소리 미약한 음성이 철운비의 귓전을 두드렸다.
"헛…!"
철운비는 기절초풍하며 선뜻 물러섰다.
묘강독성! 놀랍게도 그가 힘겹게 눈을 뜨며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맙소사. 심장이 부서지고도 살아 있다니…!)
철운비와 벽황혜는 입을 딱 벌렸다.
아연하게도 단태독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그것은 그가 연마한 기오막측
한 독문절기 덕분이었다. 물론 그는 곧 죽을 것이지만 심장이 부서지고도
즉사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어지간한 철운비조차 기절초풍하게 만들었
다.
"좋구나! 허허! 죽기 전에 그 독한 녀석보다 더 뛰어난 자결을 지닌 아해들
을 보게 되다니…!"
단태독은 철운비와 벽황혜를 쓸어보며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독… 황야입니까? 노선배를 이렇게 만든 자가?"
철운비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하지만 단태독은 대답을 하지 않고 도화독모 쪽을 바라보았다.
"놈은… 노부에게서 독황지정(毒皇之精)을 가져갔다. 저 아이의 목숨을 미
끼로…!"
단태독이 괴롭게 말했다.
"독… 황… 지정!"
철운비와 벽황혜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들도 독황지정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었다.
"독황지정을 얻은 이상 아무도 그 놈을 죽이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 독공
만이 그 놈을 견제할 수 있을 뿐이지."
"그것이 무엇입니까?"
철운비가 급히 되묻자 단태독은 안면을 실룩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보채지… 말아라! 노부는 곧 죽게 되었으므로 그것을 네게 말해 줄 작정이
니까."
"…!"
단태독의 말에 철운비는 겸연쩍게 얼굴을 붉혔다.
그런 철운비의 모습에 단태독은 은은히 미소를 지었다.
"네가… 누구이든 그것은 상관없다. 지금부터 말해 주는 최후독공으로 그
놈을 견제해 주기만 하면 된다."
이어 단태독은 철운비의 의향은 묻지도 않고 한 가지 기오막측한 독공구결
(毒功口訣)을 구술하기 시작했다.
철운비는 급히 정신을 모아 그 독공구결에 귀를 기울였다.

-묵마독황인(墨魔毒皇印).

이것이 그 최후 독공의 이름이었다.


고금오대독공(古今五大毒功)의 서열 제 일 위 독공이 바로 그것이었다.
오대독공의 서열 이 위는 자극천독강벽(紫極千毒剛壁)이라는 독공인데 독황
야가 연마한 독공이 바로 그것이었다.
독공의 서열만으로는 지극천독강벽이 묵마독황인을 당하지 못한다. 하지만
독황야가 독화지정을 가져간 이상 독공 서열은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독황지정은 무서운 것이다.

단태독의 눈에서 급격히 생기가 사라졌다. 그가 겨우 묵마독황인의 구결을


모두 구술했을 때는 이미 그의 숨결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여기… 까지가… 노부의 최선이다. 노부의 숨이 끊어지면… 그냥 이곳에…
묻어… 주게."
단태독이 거의 들리지 않는 음성으로 말했다.
철운비는 그런 단태독에게 급히 물었다.
"독황야가… 지옥천존입니까?"
그는 물으면서도 단태독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을 기대했다.
한데… 아주 의외로 단태독은 미약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그의 중원에서의 신분은 무엇입니까?"
철운비는 놀라며 재차 물었다. 그리고는 단태독의 입술이 아주 미약하게 떨
리는 것을 보고 급히 귀를 단태독의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 철운비의 귓전으로 단태독의 극히 미약한 음성이 흘러들었다. 그것은
… 아주 놀라운 내용이었다.
"폭풍… 성(暴風城)… 벽… 우뢰…"

유황곡--!
츠으… 휘르르…!
극독한 유황독장이 흐르는 속에 무덤이 하나 생겼다.
동굴을 허물어뜨려 만든 무덤, 물론 그것은 묘강독성 단태독의 무덤이었다.
"흐윽! 복수… 하겠다! 반드시…!"
지금 그 무덤 앞에서 오열하는 한 명의 여인이 있었다. 꿇어엎드린 미소부
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도화독모(桃花毒母) 단려화--!
묘강독성의 일점혈육인 묘강제일미인, 그녀의 방심은 독황야라는 인물에 인
해 갈가리 찢겨진 상태였다. 마음을 준 연인에게 조부를 잃은 그녀의 심정
이 어찌하겠는가?
오열하는 단려화를 벽황혜가 달래고 있었다.
"…!"
철운비는 조금 떨어져서 두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복잡하게 빛나는 그의
눈은 지금 도화독모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벽황혜 쪽을 보고 있었다.
(아아… 정녕 지옥천존이… 황혜누님의 아버님이란 말인가?)
철운비의 입가로 소리없는 한숨이 흘렀다.

폭풍성… 벽우뢰!

묘강독성은 죽어가며 그렇게 말했다. 그의 음성은 너무 미약하여 벽황혜는


듣지 못하고 철운비만이 들을 수 있었다.
묘강독성 단태독은 독황야 신분이 폭풍성의 후예인 벽우뢰라고 말하려 했을
것이다.
벽우뢰--!
그는 전대 폭풍성의 성주였으며 벽황혜의 아버지가 되는 인물이었다.
벽우뢰는 이십여 년 전에 죽었다고 알려졌었다. 그 이름이 놀랍게도 이곳
남만에서 부활한 것이다.
독황야(毒皇爺)--!
놀랍게도 그가 벽우뢰였고 그것은 곧 지옥천존이 벽우뢰임을 의미하는 것이
다.
무림을 초토화시키고 있는 지옥마교의 대마왕--! 그가 오대무벌 중 한 가문
의 문주라니… 철운비는 가슴에 쇳덩어리가 들어찬 기분이었다.
(이 비밀은…내 가슴 속에만 감추어져 있어야 하리라! 영원히…)
스으…
철운비는 우울하게 한숨을 쉬며 벽황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나의 사랑하는 사저께서 번민하는 것을… 나느 두고 보지 못한다. 어떤 대
가를 치루든… 지옥천존이 벽우뢰… 그분이라는 비밀은 지켜져야만 한다.)
철운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하늘을 보았다.
이미 어두워진 밤하늘…
츠으… 츠으…!
그 밤 하늘로 유황독장의 장막이 겹겹으로 흐르고 있었다.
유황의 계곡…!
이곳은 천하제일독종(還宇第一毒宗)이 잠든 묘강의 절지--
유황곡이었다.

∑ 제 28 장 대륙사강(大陸四强), 겁풍(劫風)의 주역(主役)들

대륙(大陸)의 풍운(風雲)은 시시각각으로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변황(邊荒)--!
그곳에서 일어난 세 줄기 겁풍이 드디어 중원대륙을 강타하기 시작한 것이
다.

--남해(南海) 혈해군벌(血海軍閥)!
--막북(漠北) 적북호황천(赤鵬護皇天)!
--신강(新疆) 서북팔황연맹(西北八荒聯盟)!

그들의 중원무림에 대한 전면적 침공이 초여름을 기해 발동하였다. 최초의


공세는 남해(南海)로부터 가해졌다.

혈해성모(血海聖母) 궁월영(宮月影)--!
그녀는 혈해구룡과 남해의 십만장병을 이끌고 중원의 남단인 십만대산 근역
에 상륙했다. 그녀는 혈해구룡과 남해의 십만장병을 이끌고 중원의 남단인
십만대산 근역에 상륙했다.
그녀는 표면적으로는 구룡혈황의 복수를 부르짖었으나… 그녀의 진정한 목
적이 천 년 간 내려온 중원정벌임은 불문가지의 사실이었다.
어쨌든 혈해군벌의 기세는 가히 파죽지세였다. 아무도 혈해군벌을 막지 못
했다. 십만대산에 교두보를 구축한 혈해군벌은 노도와같이 그 세력권을 확
장해 나갔다.
한 달이 채 못 되어 천남(天南)과 강남(江南) 일대가 팔 할 가까이 혈해군
벌의 수중에 평탄되었다.
이미 지옥마교(地獄魔敎)의 횡행으로 황폐해질대로 황폐해진 강남무림에 지
옥마교보다 오히려 무서운 혈해군벌을 맞서 싸울 저력이 있을 리 만무했다.
지옥마교조차도 노도같은 혈해군벌의 기세에 별 저항도 못하고 강북도 패퇴
한 상태였다. 이제 강남에서 혈해군벌에 맞설 세력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
다.
있다면 남황의 벽력부(霹靂府)나 서촉(西蜀)과 동정호(洞庭湖) 일대를 장악
하고 있는 전능기환전(全能奇幻殿) 정도 뿐이었다.
그러나 저 지옥마교의 횡행조차 방관하던 오대무벌이다. 더구나 벽력부는
살황독종을 견제하느라 중원(中原)에 신경을 쓸 입장이 못 되는 듯 보였다.
결국 혈해군벌에 맞설 세력은 전능기환전 정도밖에 없었다. 그리고 전능기
황전도 실로 오랜만에 모종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본래 전능기환전의 주세력권은 오대호(五大湖)와 장강(長江)일대의 수로(水
路)였다.
혈해군벌의 입장에서 보면 강북(江北)의 지옥마교와 한판 승부를 벌이려면
장강은 꼭 장악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 장강을 건너려면 전능기환전과의 충
돌은 불가피하게 보였다.
거기에 전능기환전도 장강을 양보할 의사는 없는 듯했다. 이미 각지에 퍼져
있던 전능기환전의 가신(家臣)과 병력들이 속속 동정 군산으로 집결하고 있
는 것이 감지되고 있었다.

-장강대회전(長江大會戰)!

항차 무림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지도 모를 일대회전(一大會戰)이 지금 임박


해 있는 것이다.
과연 오대무벌 중 가장 신비하다는 전능기환전이 혈해군벌의 노도 같은 기
세를 저지할 수 있을 것인가?
무림인들의 관심은 온통 장강일대에 쏠리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또 다른 겁풍(劫風)이 북방으로부터 몰아치기 시작했다.

적붕… 호황천(赤鵬護皇天)!

그들이 사십 년 만에 다시 장성을 넘어 남하를 시작했다.


적붕천황(赤鵬天皇) 단목천뢰(丹木天雷)!
막북과 대초원의 살아 있는 무신(武神)! 그가 백발을 흩날리며 친히 원정군
의 선봉에 서서 장성을 넘었다.
적붕호황천의 군세는 사십 년 전 그것보다 다섯 배 강대하다고 했다.
목격자들에 의하면 음산(陰山) 산맥일대와 팔당령(八達嶺)일대가 적붕호황
천의 전사들로 새카맣게 뒤덮였다고 했다.
그들의 남하는 필연적으로 사자철림(獅子鐵林)의 북산군벌(北山軍閥)과 지
옥마교의 북방군단(北方軍團)의 저지에 부딪치게 되었다.
하지만 북산군벌과 지옥마교의 저항은 이내 일소되었다.
북산군벌(北山軍閥)--!
그들은 일부 저항을 보였으나 웬일인지 적붕호황천과의 정면충돌을 회피하
고 있었다.
그 때문에 지옥마교는 자의 반 타의 반 적붕호황천과 일대격전을 치루어야
만 했다. 음산산맥의 남방산록에서 적붕호황천과 지옥마교의 북방군단은 전
면적인 격전을 넘었다.
결과는 적붕호황천의 승리였다. 지옥마교의 북방군단은 일만의 지옥전사(地
獄戰士)들을 잃고 괴멸되고 말았다.
비록 지옥전사들이 강하기는 하지만 적붕호황천의 전체 군사를 맞서 싸우기
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음산의 일전에서 적붕호황천도 심각한 타격을 받은 듯이 보였다.
그들은 주춤하며 음산산맥 일대에 잠시 머물고 있는 상태였다.
-서북팔황연맹(西北八荒聯盟)!

천하… 최대최강의 조직!


그들도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옥문관과 청해성(靑海省) 등 서북연방일
대는 서북팔황연맹의 무사들로 뒤덮인 상태였다.
청해(靑海) 유리성궁(琉璃聖宮)--!
오대무벌중 서천의 패자인 그들이 초긴장하여 서북팔황연맹에 맞서고 있으
나 유리성궁의 힘 만으로 서북팔황연맹의 백만강영을 막아내리라고 믿는 사
람은 거의 없었다.

격변하는 풍운(風雲)--!
바야흐로 대륙 전체가 광풍에 휘말려 들어가려는 상태였다.
무림도상의 인심은 흉흉해질대로 흉흉해졌다.
지옥마교(地獄魔敎)와 변황(邊荒)의 세 초강파--!
그 대륙풍운의 주역들을 무림인들은 대륙사강(大陸四强)이라고 불렀다.

<대륙… 사강(大陸四强)!>

이제 오대무벌 정도의 이름은 그 새로운 이름에 비견되지도 못했다.


무림의 운명은 그들 대륙사상의 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들
네 개의 초강세력들이 충돌하면 그 누가 이기든 중원무림은 초토화되고 말
것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그들… 대륙사상의 전면적 충돌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누가 있어 그들의 충돌을 저지할 수 있단 말인가? 누가…
그러는 중 계절은 무심히 깊어가고 있었다.

폭염이 대륙을 초열지옥같이 만들고 있을 때, 돌연 서쪽으로부터 한 가지


놀라운 소문이 전해져 왔다.
그것은 하나 고대의 무림(武林)에 관한 것이었다.

<마황총(魔皇塚)!>

그 무덤은 마황총이라고 불렀다.


청해(靑海)와 대설산(大雪山) 사이의 어느 빙곡(氷谷)에서 그것은 발견되었
다고 한다.
마황총은 천 년(千年) 이전에 살았던 어떤 초인(超人)의 것이라고 전해졌
다.
초인! 당연히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은 불사성황(不死聖皇)이라는 이름이었
다.
불사마종(不死魔宗)의 위대한 대마종, 마황총은 그의 무덤이 아닐까? 그런
의아심이 무림인들의 뇌리에 회오리같이 일어났다.
그와 함께 무림인들은 꾸역꾸역 청해성으로 물러가기 시작했다. 행여나 저
고금제일고수였던 불사성황의 일초반식의 무공이라도 얻을 수 있는 기연을
만날까 하여…
마황총의 발굴은 그렇게 대륙사강이 일으킨 팽팽한 긴장 속에 한 가닥 돌풍
을 일으키며 점점 그 파문을 넓혀갔다.
과연 마황총이란 것이 정녕 불사성황의 무덤인가? 그것이 정차의 무림정세
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과연,

동정호에서 멀지 않은 장강(長江)의 연안,


강남(江南) 쪽의 하안 위로 한 채 웅장한 석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황룡보(黃龍堡)!

이것이 그 석성의 이름이었다.


황룡보는 본래 강남의 유수한 명문(名門)인 황룡검문(黃龍劍門)의 총단이었
다. 그것을 한 달 전에 혈해군벌이 점령하여 중원총단으로 쓰고 있었다.
혈해성모 궁월영은 이곳 황룡보에서 전열을 재정비하여 장강을 건너려 하고
있었다.
그 황룡보주 위에는 수많은 군막이 세워져 있었다. 비록 황룡보가 웅장하기
는 하지만 십수만의 혈해군벌 무사들을 전원 수용하지는 못하는 때문이었
다.

삼경(三更)--!
으스름 달빛이 황룡보 일대를 조요하고 있었다.
스-- 읏!
문득 황룡보의 후원으로 한 줄기 인영(人影)이 흐르듯 날아들었다. 황룡보
의 곳곳에는 수많은 고수자들의 이목이 번뜩이고 있었으나 아무도 그 인영
(人影)이 후원으로 날아드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 인영의 경공
은 기오막측한 것이었다.
스스스!
"…!"
그 인영은 후원에 자리한 가산(假山) 아래 유령같이 몸을 세웠다.
언뜻 달빛 아래 드러나는 얼굴은 아주 해맑은 얼굴에 눈빛이 요악스러운 장
발소년이었다.
그는 바로 철운비였다.
묘강에 있더 그가 어떻게 이곳 장강 연안에 나타난 것일까?
(흐음 궁월영! 이 계집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일까?)
츠-- 읏!
철운비는 검미를 찌푸리며 형형한 눈초리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는 혈해
성모 궁월영을 노리고 황룡보에 잠입한 것이다.
어쨌든 그는 혈해군벌의 맹주인 구룡혈황이다. 혈해군벌이 궁월영의 야심으
로 인해 피를 흘리는 것을 그는 원치 않고 있으며 그 목적을 위해 궁월영을
제압할 작정으로 황룡보에 잠입한 것이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궁월영은 황룡보의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 뿐만 아니라
혈해구룡의 종사들까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웬지모를 불길한 예감이 철운비의 뇌리를 스쳐갔다.
(이 계집…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일까?)
철운비는 소리없이 신음하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곳은 아늑한 후원이었는데 아마도 황룡보의 안주인이 기거하던 곳인 듯했
다.
단아하게 치장된 후원으로 달빛이 은가루같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그 후원
한쪽에 한 채 전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저곳에도 없다면… 궁월영은 지금 황룡보 내에 있지 않다!)
철운비는 음울하게 눈을 번뜩이며 전각을 향해 몸을 날렸다.

"…!"
전각의 정실로 들어서던 철운비의 몸이 문득 굳어졌다. 그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여인의 규방이었다. 규방의 한쪽에는 침상이 자리하고 있는데… 지
금 그 침상 위에 한 명 미부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주 가냘퍼 보이는 미소부, 그녀는 철운비가 아주 잘 아는 여인이었다.
(부… 용!)
철운비의 눈빛이 흔들렸다.

-부용부인(芙蓉婦人) 곽부용!

바로 그녀였다. 천황군도의 도주 철면천황 초패강의 아내였다가 철운비의


첩이 된 슬픈 여인,
그녀는 석 달 정도 사이에 매우 수척해져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냘프던
그녀의 몸은 애처로울 정도로 수척해져 있었다. 철운비의 사망소식이 곽부
용의 여린 방심을 마치 비수같이 난자했을 것이다.
그녀는 오늘 밤도 울다가 잠이 든 듯 수척한 뺨 위로 두 줄기 눈물자국이
나 있었다.
"으… 음!"
철운비의 입에서 앓는 듯한 신음이 흘렀다. 곽부용의 애처로운 모습에 그는
가슴 저미는 듯한 고통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소리없이 침상으로 다가가 걸터앉았다.
(나 때문에 이렇게 몸이 상하다니…)
철운비는 곽부용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곽부용에 대한 연민과 사랑
의 정이 그의 가슴에 뭉클 솟아올랐다.
철운비가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으음…!"
곽부용이 낮게 숨을 몰아쉬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사라락…!
그 때문에 그녀의 치맛자락이 좌우로 갈라져 철운비의 눈 아래 드러났다.
"…!"
철운비는 언뜻 숨을 죽였다. 치마 사이로 드러나는 뽀얀 허벅지, 그 위로
은가루 같은 달빛이 쏟아져 철운비의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가냘픈 겉모습과 달리 탐스럽고 풍만한 곽부용의 허벅지, 그것을 보자 철운
비의 단전 부근에서 불길이 후끈 일었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이었
다.
철운비는 낮게 신음을 흘리며 떨리는 손을 곽부용의 아랫도리로 가져갔다.
사락…!
분홍 치마가 그의 손길에 위로 걷혀 올라갔다. 그러자 곽부용의 소담스러운
아랫도리가 달빛 아래 눈부시게 드러났다.
한줌의 끊어질 듯한 세류요, 그 아래 팽팽한 아랫배와 미끈한 허벅지가 자
리하고 있었다.
철운비는 옆으로 돌아누운 곽부용의 다리를 조심스럽게 바로 눕혔다. 그녀
는 순순히 몸을 돌려 반듯이 누웠다. 그녀의 흐드러지게 풍만한 허벅지 사
이의 도도록한 둔덕은 손바닥만한 붉은 고의로 가려져 있었는데 고의 틈으
로 몇 가닥 체모가 드러나 보였다.
철운비는 행여 곽부용이 깰까보아 조심조심 고의를 벗겨내렸다.
곽부용은 체모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그저 보송보송한 춘초들이 그녀의 부
끄러운 계곡 주위에 적당히 깔려 있을 뿐이었다.
그 보드라운 방초사이에 수줍게 숨어 살짝 꽃잎을 벌리고 있는 곽부용의 비
소를 보며 철운비는 자신의 일부가 끊어지는 듯 아프게 충혈되는 것을 느꼈
다.
몸 속의 혈액이 용암처럼 들끓어 숨을 헐떡이며 그는 자신의 하의를 벗었
다. 그러자 삽시에 극한까지 팽창된 그의 실체가 기세좋게 튀어나왔다.
불근거리는 순양지물을 드러낸 그는 흥분으로 떨리는 두 손으로 곽부용의
예쁜 무릎을 쥐어 조심스럽게 양옆으로 벌렸다.
그의 손길에 따라 곽부용의 미끈한 두 다리는 자연스럽게 좌우로 벌려 세워
졌다. 그와 함께 허벅지가 모이는 곳에 자리한 깊은 계곡의 균열도 함께 벌
어져 내밀한 속살을 들어내었다.
치마가 걷혀져 아랫도리만 드러낸 곽부용의 자태는 실로 도발적이엇다. 철
운비는 무방비 상태로 민망하게 벌려진 곽부용의 다리 사이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그리고는 곽부용이 깰세라 한 손으로 몸을 지탱하고 다른 한 손은 그녀의
은밀한 곳으로 가져갔다.
더할 수 없이 부드라운 살점이 그의 손 끝에 만져졌다. 헌데 까칠한 체모에
덮인 그곳은 놀랍게도 촉촉히 젖어 있었다.
철운비의 손가락이 조심조심 곽부용의 꽃잎을 개방했다. 그리고 그곳으로
끊어질 듯 아프게 팽창한 그의 남성이 접근했다.
이미 촉촉히 젖어 있는 곽부용의 그곳은 별 무리없이 철운비의 굴강한 실체
를 받아들였다. 두 개의 몸이 정확히 합치게 되고 철운비는 서서히 몸을 내
리눌렀다.
"으… 음!"
악다문 철운비의 입에서 앓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예민한 곳에 느껴지
는 격렬한 긴축감과 미끈덩한 점막의 느낌은 그를 삽시에 열락의 도가니로
밀어 넣었다.
그의 장대한 실체가 동굴의 입구를 통과하는 순간 곽부용의 여체는 한 차례
퍼뜩 경련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아무 저항도 없었다. 오히려
마치 연체동물같은 곽부용의 깊은 곳은 뜨겁게 진입군을 흡인해 들였다.
철운비는 미끈덩하고 열탕같은 곽부용의 비궁이 주는 쾌감에 전율하며 자신
을 실체를 여체 깊숙이 삽입시켰다. 두 개의 몸이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착
되었다.
"으… 음!"
철운비가 완전히 자신의 강인한 실체를 완전히 삽입하는 순간 곽부용은 헐
떡이며 몸부림쳤다. 하체에 느껴지는 육중한 중압감에 그녀는 퍼뜩 정신이
깨었다.
(흐… 윽!)
잠이 깨는 순간 그녀는 숨이 넘어갈 듯이 놀랐다. 누군가 자신 위에 올라타
고 있으며 하체 일부에서 형언할 수 없는 둔중한 충만감이 느껴진 것이다.
자신의 몸 속에서 조심조심 움직이는 사내, 행여나 자신이 깰까봐 숨소리도
크게 내지 않고 있는 상대가 누군지 곽부용은 거의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운비… 아아! 나의 운비…!)
격렬한 충격이 곽부용을 휩쓸었다.
죽은 줄로만 믿고 있던 자신의 젊은 주인, 그의 몸가락이 지금 자신의 내부
를 가득 체우고 있는 것이다.
(꿈이라면… 깨지 않기를…!)
곽부용은 그것이 꿈일까 두려워 차마 눈을 뜨지 못했다.
"으음! 부… 용!"
그런 곽부영의 입에서 철운비의 숨결이 점점 급박해져 갔다. 그와 함께 곽
부용의 내부에 들어찬 철운비의 실체도 점점 빠르고 격렬하게 움직였다.
마치 동굴을 찾아드는 뱀처럼 자신의 하체를 출입하는 정인의 행위에 곽부
용의 몸에서도 작은 폭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순간,
"아아… 운비! 더… 더 깊이…!"
와락…!
곽부용은 절규하듯 부르짖으며 철운비의 허리를 휘감았다.
"부용…!"
곽부용의 반응에 철운비는 움찔 놀랏다. 그녀가 깨어난 줄을 그제서야 깨달
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반응에 자극받아 더욱 강하고
빠르게 곽부용의 육체를 압박해갔다.
스으… 스으…!
월광이 사랑의 행위에 몰두하는 두 남녀의 몸 위로 은가루같이 부서져 내렸
다.

폭풍일과(暴風一過)--!
한 차례 격렬한 열풍이 지나간 규방에 정적이 돌아왔다. 곽부용은 철운비의
넓은 가슴에 꼬옥 파묻힌 채 할딱이고 있었다. 그런 곽부용의 머리를 쓰다
듬으며 철운비는 그간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궁월영이 장강을 넘었단 말이오!"


문득 철운비는 아연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혈해성모 궁월영! 그녀가 하루
전에 은밀히 장강을 건넜다고 곽부용이 말한 것이다.
"성모는… 혈해구룡의 종사들과 백 명의 혈해마녀들을 이끌고 장강너머의
모처를 습격하러 갔어요!"
곽부용이 철운비에게 안긴 채 말했다.
그런 그녀의 눈빛은 조금 독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혈해성모가 철운비를 해
치려 했다는 사실이 곱기만 하던 그녀의 방심에 독기를 심어준 것이다.
궁월영…
그녀는 이틀 전 모종의 정보를 입수한 듯했다.
황룡보에서 멀지 않은 장강 저편에서 하나의 패장(覇莊)이 있는데 궁월영의
목표는 바로 그 폐장이었다.

-은황장(隱皇莊)!

이것이 그 폐장의 이름이라고 했다.


(은황장에… 어떤 자가 있기에 궁월영이 직접 요격을 하러 간 것일까?)
철운비는 검미를 모으며 염두를 굴렸다. 그의 뇌리로 퍼뜩 하나의 이름이
떠오른 것은 그 때였다.
(지옥… 천존?)
철운비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의 안색이 잠깐 사이에 여러 차례 변했다.
(궁월영이 직접 움직일 만한 대상은… 지옥천존 외에는 없다.)
철운비의 입가로 소리없이 신음이 흘렀다. 불길한 예감이 그의 심령에 격렬
한 파동을 일으키며 지나갔다.
(지옥… 천존은 자신의 행적이 적에게 노출될 정도로 허술하게 움직이는 인
물이 결코 아니다. 궁월영이 얻은 정보는 틀린 것이거나… 아니면…)
철운비는 침상에서 뛰어내려 의복을 추스렸다.
(함정! 궁월영은 십중팔구 함정에 빠진 것이다!)
철운비는 신음을 흘렸다. 그는 지옥혈겸을 추스리고 마모천둔을 집어들었
다.
곽부용도 심상치 않음을 느낀 듯 일어나 철운비의 무장을 도와 주었다.
"그 계집… 성모를 구하러 가실 생각이신가요? 당신을 해치려 했던 그녀도
…?"
곽부용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궁월영으로 인해 자신의 정인이 험지에 뛰
어드는 것이 그녀는 죽도록 싫은 것이다.
철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그녀는 잠후의 후예요. 비록 내게 독한 짓을 했어도… 구하지 않
을 수 없소!"
철운비는 말을 하며 곽부용의 뺨을 어루만졌다.
"걱정마시오! 이 밤이 새기 전에… 그 독한 계집을 이리로 끌고와 볼기를
때려줄 작정이니까!"
철운비는 싱긋 웃어보인 뒤 질풍같이 규방을 날아나갔다.
피-- 이잉!
흡사 유성이 흐르듯 철운비의 신형은 어두운 암천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
곽부용은 창가로 다가가 철운비가 날아간 곳을 바라보았다. 근심 서린 그녀
의 봉목으로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요. 당신은 꼬옥… 성모를 구해오실 거예요!)
눈가에서 일어난 미소는 이내 곽부용의 얼굴 전체로 번져갔다. 그녀를 미소
짓게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철운비에 대한 애정과 신뢰였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있었다.

장강(長江)의 북방에 세상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하나의 황량한 계곡이 자


리하고 있었다.
그 계곡의 끝에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다 허물어져가는 하나의 장원(莊
園)이 어둠 속에 벌려서 있었다. 오랫 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퇴
락할대로 퇴락한 황폐한 장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처음 세워졌을 때 대단히 웅장하고 화려했던 것을 엿볼 수
있었다.
사경(四更) 무렵, 짙은 먹구름이 겨우 고개를 내민 반월(半月)마저 가려 주
위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스스스스!
"…!"
"…!"
그 짙은 어둠 속에서 백여 개의 그림자가 유령같이 폐장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일신에 붉은 전포를 걸친 백 명의 여인들이었는데 자세히 보면 그 여인들의
눈빛에는 초점이 없었다. 텅 비어 그 여인들의 공허한 동공은 그저 망연히
열려 있을 뿐이었다.

-혈해마녀(血海魔女)!

백 명의 적포여인들은 바로 혈해성전(血海聖殿)을 수호하던 여전사들인 혈


해마녀(血海魔女)들이었다. 영원한 젊음을 얻는 대신 이지를 상실한 백치의
여전사들인…!
혈해마녀들은 숨소리 하나 내는 법없이 폐장으로 접근해 들었다.

<은황장(隱皇莊).>

그 장원은 바로 은황장(隱皇莊)이었다.
화라락!
은황장이 내려다 보이는 나지막한 구릉 위에는 십 인의 남녀가 옷깃을 펄럭
이며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일행의 맨 앞에는 고통스런 전포에 붉은 투구를 깊숙이 눌러쓴 한 명의 여
인이 서 있었다.

-혈해성모(血海聖母) 궁월영!

바로 그녀였다.
"…!"
궁월영은 깊숙이 눌러쓴 투구 아래로 봉목을 유현하게 빛내며 은황장을 주
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는 아홉 명의 남녀가 서 있었다. 바로 남해 혈군벌을 이루는 혈
해구룡(血海九龍)의 종사들이었다.
그 중에는 신임 인황군도(人皇群島)의 총수가 된 빙서시(氷西施) 냉철화(冷
鐵花)와 주작군도(朱雀群島)의 여제 주작천후(朱雀天后) 등의 모습도 보였
다.
문득 주위의 침묵을 깨고 주작천후가 나직한 음성으로 궁월영에게 말했다.
"다시 한번 재고에 보는 것이 어떨까요? 저는 아무래도 저곳에 지옥천존(地
獄天尊)이 있다는 그 정보에 의심이 가요!"
하나 궁월영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지 않았다.
"정보는… 확실해요. 지옥천존은 지금 저곳에 머물고 있고…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힘든 천재일우(天載一遇)의 기회예요."
그녀는 낮으나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옥천존만 제거할 수 있으면 우리의 중원정벌은 반 년 앞당길 수 있어요.
"
듣고 있던 주작천후는 아미를 모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예의 정보는 전능기환전(全能機幻殿)에서 흘려보낸 이간계일 수도
…"
그녀의 말을 궁월영이 단호한 음성으로 끊었다.
"겁이 난다면…이곳에서 기다려도 좋아요. 주작도주(朱雀島主)!"
스읏!
말을 마침과 함께 궁월영은 더 이상 망설임없이 몸을 날려 은황장 쪽으로
날아갔다.
주작천후는 그런 궁월영의 뒷모습을 망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주작도주… 라고?)
그녀는 입 안으로 나직이 뇌까렸다.
주작천후와 궁월영은 어머니들이 자매인 이종자매 사이였다. 궁월영의 가장
절친한 친인이 바로 주작천후인 것이다. 그 때문에 궁월영은 그런 주작천후
에게 주작도주라는 공식적인 칭호를 쓴 적이 없었다.
한데 지금 궁월영이 처음으로 이종 언니인 주작천후를 주작도주라고 부른
것이다.
궁월영이 웬일인지 자신에게조차 거리를 둔다는 사실에 주작천후는 고개를
흔들며 서글프게 미소지었다.
(그녀는 변했어. 용형마도(龍形魔島)에서 돌아온 이후로…!)
그때,
"흐음… 이제 별 수 없이 따라갈 수밖에 없군. 어쨌든… 그녀는 잠마(潛魔)
의 종사시니…!"
청룡제왕(靑龍帝王) 곽붕이 고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어 그는 즉시 몸을 날려 궁월영을 뒤따라 날아갔다.
스스스!
그러자 주작천후를 비롯한 다른 팔 인 역시 묵묵히 그 뒤를 따라 몸을 날렸
다. 어쨌든 궁월영은 그들이 지키고 복종해야 할 주군인 것이다.
삽시에 구 인의 모습은 은황장 안쪽으로 사라졌다.

헌데 그 직후였다.
"드디어 걸려들었구나, 혈해성모(血海聖母)!"
문득 한 줄기 스산한 여인의 음성이 주위를 울렸다.
스스스…
이어 십 인이 섰던 구릉 위로 문득 하나의 가냘픈 인영이 날아올랐다. 그
인영은 일신에 마의(魔衣)를 걸친 가냘픈 체격의 여인이었는데 기이하게도
그녀의 눈빛은 짙은 회색이었다.

-번뇌화(煩惱花) 음사향,

바로 그녀였다.
오대무벌 중 전능기환전(全能機幻殿)의 전주인 천수제왕(千手帝王)의 둘째
딸로써 가장 지혜롭다고 알려진 여제갈인…!
음사향의 잿빛 봉목은 싸늘한 독기를 품고 은황장을 노려보았다.
"용형마도(龍形魔島)에서 유일하게 살아나온 자는 궁월영… 그 계집뿐이었
다. 그것은 세황(世皇) 오빠를 시해한 범인이 그 계집임을 의미하는 것이
다!"
그녀는 낮고 차가운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혈해성모(血海聖母) 궁월
영이 쌍뇌모황(雙腦謀皇) 음세황을 죽였다고 믿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은황장으로 궁월영을 유인한 것은 바로 그녀란 말인가?
"저 안에 지옥천존은 없다. 그대신… 지옥천존이 만든 한 명의 무서운 마인
(魔人)이 은신하고 있지!"
음사향의 얄팍한 입술에 한 줄기 섬뜩한 미소가 떠올랐다.
"호호… 궁월영! 네년은 물론 네 수하들까지 그 마물(魔物)의 손에 갈가리
찢겨 죽으리라! 이 모두… 나의 사랑하는 오라버니를 기해한 대가다."
그녀는 냉혹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득의의 웃음을 지었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정녕 마음이 독한 계집이구나. 너는…"
돌연 음산한 사내의 음성이 음사향의 뒤에서 들렸다.
(이 목소리는…!)
순간 음사향의 교구가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그녀의 회색눈이 놀라움으로
크게 흔들렸다.
슥!
그녀는 빠르게 돌아섰다.
그런 그녀의 삼 장 뒤에는 어두운 밤하늘을 등지고 하나의 훤칠한 그림자가
서 있었다.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를 온통 새카만 천으로 휘감은 인물이었는데 그의 검
은 몽면 사이로 한 쌍의 시퍼런 마안(魔眼)이 섬뜩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지… 옥… 천존(地獄天尊)!"
돌아선 음사향의 입에서 일순 숨넘어 갈 듯한 신음이 터져나왔다.
스-- 팡! 피이-- 잉!
동시에 그녀는 맹렬하게 양 소매를 떨치며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녀의
소매 속에서 십여 자루의 반투명한 비수(匕首)가 일시에 퉁겨져 나가며 지
옥천존을 무찔러갔다.

-투명엽도(透明葉刀)!

전능기환전(全能機幻殿)의 가장 무서운 살인암기!


투명엽도는 백여덟 가지의 극독에 담그어 제련한 것으로 호신강기고 무엇이
고 할 것없이 순식간에 녹여 버린다.
그 때문에 어떤 고수라도 투명엽도에 스치기만 해도 전신이 독수로 녹아내
리고 만다.
한데 음사향은 그것을 한 자루도 아니고 무려 십여 자루나 일시에 내쳤다.
그것은 그녀가 그만큼 지옥천존을 잘 아는 까닭이었다.
그녀는 투명엽도가 지옥천존을 쓰러뜨리지 못한다 해도 최소한 곤란하게는
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천수제왕이… 너를 잘못 가르쳤구나!"
지옥천존의 입에서 스산한 일갈이 터져나왔다. 그는 날아드는 투명엽도에는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다. 대신 그는 물러서는 음사향을 향해 슬쩍 오른손을
내뻗었다.
쩌-- 러렁--!
순간 그의 손 끝에서 벼락치는 듯한 굉음이 일며 형언불가의 무형잠경이 음
사향을 무찔러갔다.
그 광경에 음사향의 입에서 공포의 경악성이 터졌다.
"무형… 파멸마강(無形破滅魔剛)! 아악!"
퍼펑!
후두둑…!
애처로운 비명과함께 음사향의 교구가 피무지개를 뿌리며 십 장 저편으로
퉁겨졌다. 그런 그녀의 가슴부위 의복은 갈가리 찢겨졌으며 오공에서 선혈
이 비오듯 토해졌다.
지옥천존의 무형파멸마강(無形破滅魔剛)이 순간적으로 음사향의 내부를 뒤
흔들어 놓은 것이었다.
파파팟!
그 직후 음사향이 발출한 열 자루의 투명엽도도 일제히 지옥천존의 몸에 박
혔다.
하지만,
스-- 읏!
지옥천존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가볍게 앞으로 날아오르며 퉁겨지는 음사향
을 향해 무형파멸마강을 무찔러냈다. 그는 늘 전능기환전의 이 꾀주머니를
눈의 가시같이 여겨왔고 이 기회에 그녀를 아주 말살시켜 버릴 작정을 한
것이었다.
"인간도… 아니군!"
음사향은 절망의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무찔러오는 지옥천존을 바라보았다.
투명엽도를 열 자루씩이나 맞고도 멀쩡한 지옥천존이 그녀의 눈에는 인간으
로 보이지 않았다.
하나 그녀가 알 리 없었다.
지옥천존이 천하최강의 독공고수임을…
"이제… 죽어라, 음가의 어린 계집!"
꽈르릉…!
그때 지옥천존의 입에서 잔혹한 일갈이 터짐과 함께 처음 것보다 두 배 강
력한 무형강력이 음사향을 휩쓸어갔다.
"아…!"
음사향은 신음과 함께 질끈 눈을 감았다.
무형파멸마강에 한 차례 가격당한 그녀에게는 피할 힘도 저항할 능력도 남
아 있지 않았다.
바로 그 위기의 순간,
"지옥… 천존!"
꽈르릉…!
돌연 한 소리 폭갈과 함께 측면에서 하나의 그림자가 벼락같이 날아들어 무
형파멸마강을 맞받아쳤다.
꽈-- 르릉…!
다음 순간 고막을 파열시킬 듯 굉렬한 폭음이 지축을 뒤흔들었다. 그와 함
께 주위의 돌과 모래들이 마구 날아올라 장내를 뽀얗게 뒤덮었다.
"귀왕… 초인(鬼王超人)?"
맹렬한 돌풍과 마구 날리는 사석 속에서 지옥천존은 한 소리 경악성을 토하
며 비틀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런 그의 눈에 한 명의 소년이 훌쩍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
는 얼굴에 귀면(鬼面)을 쓴 소년으로 그의 옆구리에는 어느새 피투성이로
변한 음사향이 안겨 있었다.
철운비-- 물론 그였다.
"다시… 봅시다 지옥천존!"
피-- 이잉!
허공에서 잠시 움찔하던 철운비는 한 소리 냉갈과 함께 백 장 저편으로 날
아갔다. 몇 번 도약하는 사이 이내 그의 모습은 지옥천존의 시야에서 사라
져 버렸다.
"…!"
지옥천존은 목석같이 그 자리에 굳어진 채 철운비가 사라진 곳을 주시했다.
(목소리가… 귀에 익다! 설마… 귀왕초인(鬼王超人)이 바로 그녀석이란 말
인가?)
그는 망연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그의 눈길로 한 줄기 고소가 떠올랐다.
(허허 어쨌든… 나는 대단한 놈을 사위로 둔 것 같다.)
사위! 그렇다.
지옥천존은 철운비가 바로 귀왕초인(鬼王超人)이란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었
다.
그 때였다.
"어찌… 할까요? 추살을 해야 하지 않을런지…!"
문득 지옥천존의 뒤에서 한 줄기 조심스런 음성이 들려왔다. 그의 뒤에는
언제인가 한 명 독비(獨臂)의 거구괴인이 공손히 시립하고 있었다.
전신에 붉은 털이 숭숭 돋은 반인반수(半人半獸)의 괴인, 그는 바로 지옥천
존의 세 그림자들인 지옥삼패 중 거령수황(巨靈獸皇)이었다.
지옥천존은 거령수황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없다. 그보다는 은황장에 잠입한 쥐새끼들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
하다."
그는 뒷짐을 지며 음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이 길로 청해(靑海)의 마황총(魔皇塚)으로 가볼 생각이다. 은황장
의 일은… 그대에게 맡긴다!"
그는 말하며 하나의 뿔피리를 꺼내 거령수황에게 내밀었다.

-초혼… 마적(招魂魔笛).

뿔피리의 표면에 그와 같이 글이 음각되어 있는 것이 언뜻 보였다.


"존… 명!"
거령수황은 무릎을 꿇어 공손히 뿔피리를 받아들었다.
지옥천존은 녹안을 음울하게 번뜩이며 입을 열었다.
"아직… 흡혈강시의 존재가 외부에 알려지면 곤란하다! 은황장에 들어간 쥐
새끼들은 한 놈도 남김없이 제거해야만 한다! 지옥십마황(地獄十魔皇)이 너
를 도울 것이다."
짜악!
말과 함께 그는 한 차례 손뼉을 쳤다.
스스스…!
"…!"
"…!"
순간 어둠 속에서 문득 십 인의 괴인이 유령같이 나타나 지옥천존의 앞에
시립했다.
그들을 본 거령수황은 순간 흠칫 몸을 떨었다. 그 자신조차 지옥십마황(地
獄十魔皇)이란 십 인의 괴인이 주위에 있었음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기 때
문이었다.
또한 그 자들의 잔혹무정한 눈빛을 보고 그들이 결코 지옥천존보다 크게 뒤
떨어지지 않는 초고수자들임을 알아본 것이었다.
(과연… 무섭다. 천존 막하에 이런 알려지지 않은 고수들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니…)
거령수황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때 지옥천존이 재차 음울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내… 기대를 두 번씩이나 무산시키는 일이 없으리라 믿는다, 거령수황!"
그는 말을 마친 듯 걸음을 옮겼다.
스읏!
한 걸음 옮겼는가 싶자 그의 모습은 어느새 일 마장 저편으로 나가 있었다.
(물론 두 번씩 실수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 천존!)
거령수황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지옥천존의 뒷모습을 주시했다.
"갑시다, 지옥십마황(地獄十魔皇)!"
슥!
이어 그는 지옥십마황을 한 차례 돌아본 후 은황장을 향해 거구를 날렸다.
"…!"
"…!"
지옥십마황은 대답도 없이 유령같이 거령수황의 뒤를 따랐다. 장내는 다시
죽음같이 괴괴한 적막 속으로 빠져들었다.

은황장(隱皇莊)의 후면에는 은황장이 내려다 보이는 단애 위에 두 사람이


마주앉아 있었다.
가슴이 흠뻑 피에 젖은 음사향은 바위에 기댄 채 힘없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앞에는 귀왕철면(鬼王鐵面)을 쓴 철운비가 침중한 눈빛으로 앉아 있
다.
(심장이 다치지 않아 다행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음사향의 찢어진 저고리로 손을 가져갔다.
찌익…!
이어 그의 손에 의해 저고리가 찢겨지며 음사향의 젖가슴이 드러났다.
가녀린 체형 그대로 음사향의 젖가슴은 설익은 복숭아같이 자그마하고 귀여
웠다. 마치 아직 덜 성숙한 소녀의 그것과도 같은 분위기를 지닌 젖가슴이
었다.
하지만 지금 그 앙증맞고 아름다운 젖가슴 사이는 끔찍하게도 쩍 갈라져 늑
골이 들여다 보였다.
철운비는 먼저 혈도를 눌러 가슴의 상처를 지혈시켰다. 이어 그는 복부의
상처를 보기 위해 음사향의 치마를 마저 벗기려 했다.
한데 그가 막 치마끈을 풀려고 할 때였다.
"세룡! 정말 못되어 졌… 구나. 누나의 옷을 제멋대로 벗기려 하다니…"
눈을 감고 있던 음사향이 미약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기절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고통이 심해 말을 안하고 있었을 뿐이
었던 것이다. 그러다 철운비가 저고리에 이어 치마까지 벗기려 하자 억지로
입을 연 것이었다.
(세룡(世龍)… 이라고?)
순간 철운비는 음사향의 말에 질겁하며 손을 뗐다.
그는 이내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음사향은 지금 자신을 전능환룡(全能
幻龍) 음세룡(陰世龍)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귀왕철면 속의 철운비는
낭패한 표정이 되었다.
그때 철운비가 아무런 대답도 없자 음사향은 얼굴을 붉히며 탄식했다.
"천년시균(千年屍菌)을 복용하여 사종사황(邪宗邪皇)이 되더니… 이제 이
누나의 몸에 음신을 품을만큼 파렴치한이 되었느냐?"
그 말에 철운비는 자신도 모르게 황급히 변명했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다만 상처를…!"
그가 더듬거리자 음사향의 창백한 옥용에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괜히… 해본 소리야. 마음에 두지 마라. 그보다… 나는 걱정말고… 어서
은황장에 가보아라…!"
그녀는 말과 함께 반짝 눈을 떴다.
순간 그녀의 회색눈동자를 접한 철운비는 움찔했다. 웬지 음사향이 자신이
음세룡이 아닌 것을 알아차릴까봐 두려워진 것이었다.
그것은 그 자신이 음사향의 친오빠인 쌍뇌모황 음세황을 격살한데 대한 죄
책 때문일 것이다. 허나 다행히 음사향은 의심의 빛을 보이지 않았다.
"너는… 이 누나의 상상 이상으로 강해졌으니… 아버님이… 기뻐하실 거야.
"
말을 하던 그녀는 고통스러운 듯 옥용을 찡그렸다.
이어 그녀는 문득 철운비에게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은황장에…큰 오라버니를 시해한 궁월영이란 계집이 있다. 가서… 그 계집
의 목을 가져오너라."
"…!"
그녀의 말에 철운비는 흠칫하며 은황장을 내려다 보았다.
그가 머뭇거리자 음사향은 다시 재촉했다.
"내 걱정은 하지 마라. 지옥천존의 무형파멸마강(無形破滅魔剛)이 지독하기
는 하나 나를 죽일 정도는 아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철운비는 급히 대답하며 일어섰다.
그 때였다.
"세룡…!"
음사향이 문득 철운비를 불러세웠다.
"왜 그러십니까?"
철운비는 의아한 음성으로 물었다.
음사향은 진심 어린 음성으로 당부했다.
"조심… 하거라. 제발 세황오라버니가 돌아가신 지금… 너는 나의 희망이고
… 전부다."
그녀의 말에 철운비는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꼈다.
"명심하겠습니다, 누님!"
스읏!
대답과 함께 철운비는 자신의 동요를 보이지 않으려 질풍같이 은황장을 향
해 날아내려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음사향, 그녀의 봉목에 문득 의아한 빛이 어렸다.
(저것은…녹림(綠林)의 도수(盜帥) 무영종(無影宗)의 경공인데… 저 아이가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
그녀는 알 수 없다는 눈으로 철운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것을 알 리
없는 철운비는 유성같이 몸을 날려 은황장 쪽으로 사라졌다.

은황장(隱皇莊)의 지하--
그그긍…!
이끼낀 거대한 석문이 둔중한 굉음과 함께 열렸다. 이어 열린 철문으로 하
나의 날렵한 인영이 들어섰다.
혈해성모 궁월영-- 바로 그녀였다.
"…!"
석문 안으로 들어서던 궁월영은 일순 흠칫했다. 그곳은 사방 이십여 장에
달하는 석실이었다.
석실의 저편,

<흡혈마전(吸血魔殿).>

그와 같은 편액이 걸려 있었다.
편액 아래 하나의 거대한 석관(石棺)이 놓여 있었다. 전체가 시뻘건 피칠을
한 듯한 혈강석(血剛石)의 그 석관은 길이가 이 장 가까이나 되는 거대한
것이었다.
하나 궁월영을 놀라게 한 것은 그 석관이 아니었다.
시체! 석관의 주위에는 끔찍하게도 백여 구의 시체가 쌓여 있지 않은가?
남녀가 뒤섞인 백여 구의 그 시체들은 몸집으로 보아 그 시체들은 모두 나
이 어린 소년소녀들의 것인 듯한데 모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었다.
헌데 기이하게도 그 시신들은 마치 물기 빠진 물고기들같이 전신이 비쩍 말
라 비틀어져 있었다. 자세히 보면 시체들의 심장부분이 모두 으스러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소녀들의 시신은 아랫도리가 무참하게 으스러져 있었다. 그것은 소녀
들이 무엇인가 거대한 것에 난해당하고 죽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궁월영은 분노의 표정으로 석관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이게 다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슥!
그녀는 석관 앞으로 다가섰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비밀열쇠가 그 석관 안에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윽고 궁월영은 섬섬옥수를 내밀어 석관의 뚜껑을 밀어냈다.
끼기긱…!
그러자 기분나쁜 굉음과 함께 석관의 뚜껑이 천천히 열려졌다.
번-- 쩍!
바로 그 순간 감자기 석관 안에서 한 쌍의 시뻘건 혈광(血光)이 푹출했다.
"이… 이것은…!"
쿠-- 웅!
궁월영은 아연실색하여 석관의 뚜껑을 떨어뜨리며 비칠 물러섰다.
"크크크크…!"
그때 돌연 석관 안에서 십팔층 지옥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섬뜩한 괴성이 터
져나왔다. 이어 하나의 거대한 그림자가 천천히 석관 안에서 일어나 앉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에 궁월영은 아연실색했다.
"흡혈… 강시(吸血疆屍)?"
쿵쿵쿵!
그녀는 안색이 하얗게 변하며 비칠비칠 뒤로 물러섰다.
흡혈강시(吸血疆屍)…!
과연 그것은 무엇인가?

∑ 제 29 장 공포(恐怖)의 흡혈강시(吸血疆屍)

은황장(隱皇莊)의 실체는 지하에 있었다. 은황장의 지하(地下)에는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두 배 이상 광대한 지하장원이 촉조되어 있었다.
그 은황장의 지하장원은 누가 어떤 목적으로 지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주작천후(朱雀天后)는 지금 은황장의 어느 석로(石路)를 걸어가고 있었다.


지하의 밀로 곳곳에는 여러 가지 기관함정이 숨겨져 있었다. 몇 차례의 기
관함정을 통과하는 사이 주작천후는 어느덧 일행에게서 떨어져 혼자가 되었
다.
주작천후는 길게 뻗은 어둠 속으로 신중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기분 나쁜 곳이다. 지옥천존은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아미를 모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바로 그 때였다.
슥…!
돌연 전면으로 무엇인가 휙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피-- 잉!
주작천후는 반사적으로 전면을 향해 날아갔다.

(이럴… 수가…!)
부르르…!
막 하나의 모퉁이를 돌아서던 주작천후는 경악과 분노로 몸을 떨며 전면을
주시했다.
그곳은 하나의 막다른 골목이었다. 한데 미로 끝의 석벽에는 한 명의 여인
이 석벽에 기댄 채 죽어 있었다. 놀랍게도 여인은 궁월영을 수행해 온 백
명의 혈해마녀(血海魔女) 중 한 명이었다.
혈해마녀는 벽에 등을 기대고 원한의 시선으로 전면을 노려본 채 죽어 있었
다. 그녀는 자신의 장검으로 복부를 찔려 죽어 있었는데 그 장검이 몸을 관
통하여 등 뒤의 석벽에 박혀 있어 쓰러지지 않고 있었다.
한데 그 혈해마녀는 하의가 벗겨져 허연 아랫도리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데 그런 그녀의 하체 중심부는 온통 선혈로 물들어 있지 않은가?
찢겨진 치마 사이로 뽀얀 허벅지가 드러나 있는 것이 보였다. 그 허벅지 사
이는 무엇인가 둔기로 난자당한 듯 무참하게 찢겨 있었다.
주작천후는 그 모습에 치를 떨었다.
"어… 어떤 놈이 이런 끔찍한 짓을…!"
그녀는 분노로 교구를 부들부들 떨며 혈해마녀의 시신을 벽에서 떼어냈다.
한데, 그녀가 막 시신을 벽에서 떼어내는 순간이었다.
"흐흐흐…!"
돌연 그 벽에서 섬뜩한 음소가 들렸다.
"…!"
주작천후는 깜짝 놀라며 몸이 굳어졌다.
번… 쩍!
바로 그때 돌연 석벽에서 한 쌍의 시뻘건 눈(眼)이 떠올랐다.
눈 뿐만 아니었다.
눈에 이어 코, 입, 귀가 벽면으로 떠올라 하나의 얼굴 형태를 이루는 것이
아닌가?
그 광경에 주작천후는 대경했다.
(사… 술(邪術)!)
그녀는 아연하여 급히 벽면에서 떨어지려 했다.
"크크… 늦었다, 계집!"
직후 한 소리 잔혹한 음성이 주작천후의 귓전을 울렸다.
파-- 앗!
동시에 한 쌍의 손이 석벽에서 불쑥 튀어나와 주작천후의 양쪽 어깨 견정혈
(肩頂穴)을 움켜쥐었다.
"악…!"
쿵!
주작천후는 아차 하는 사이 견정혈을 제압당해 알고 있던 혈해마녀의 시신
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너… 너는 누구냐?"
그녀는 전신이 뻣뻣하게 경직됨을 느끼며 사력을 다해 물었다.
그러자 벽 속의 괴인이 잔혹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흐흐흣! 본좌를 즐겁게 해 주고 죽을 계집이니 알려 주마? 본좌는… 지옥
십마황(地獄十魔皇)의 일곱째인… 환영음마(幻影淫魔)이니라!"
"지옥… 십마황(地獄十魔皇)?"
주작천후는 낮게 뇌까리며 신음을 발했다.
찌--익!
그녀의 저고리가 날카로운 소성과 함께 찢겨져 나간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옷이 찢기며 그녀의 풍만한 젖무덤이 출렁 나타났다.
"하-- 악!"
순간 후의 입에서 자지러질 듯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환영음마(幻影淫魔)라 자칭한 벽 속의 괴인이 깡마른 손이 주작천후의 육봉
을 움켜쥐어 으스러뜨린 것이었다.
"흐흐… 나이는 제법 들었으나 몸매는 여전히 괜찮은 물건이로군!"
환영음마는 음흉하게 웃으며 주작천후의 젖무덤을 떡 주무르듯 이지러뜨렸
다.
"흐윽…!"
그 때마다 주작천후의 입에서는 고통의 비명이 터져나왔다.
찌-- 익!
마침내 주작천후의 치마와 고의마저 그 자의 손에 일시에 찢겨져 나갔다.
그러자 그녀의 희멀건 허벅지가 어둠 속에서 뽀얗게 드러났다.
"나… 나를 죽여라! 더 이상 치욕을 주지 말고…!"
주작천후는 수치와 절망으로 눈물을 흘리며 몸부림쳤다.
"흐흐… 죽는 것을 서두르지 마라! 한 차례 즐긴 후 먼저 지옥에 가 있을
네 동료들에게 보내줄 테니…!"
환영음마는 음탕하게 히죽 웃었다. 이어 그는 한 손을 주작천후의 허벅지
사이로 불쑥 밀어 넣었다.
"흐윽…!"
주작천후는 수치로 몸을 떨며 다급히 허벅지를 오므리려 했다. 하나, 그녀
에게는 이미 그럴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내 그녀의 허벅지는 벽면을 향해 부끄러운 자세로 벌어졌다.
마침내, 환영음마의 거친 손이 주작천후의 방초 무성한 둔덕 아래로 슬금슬
금 미끌어져 들어갔다.
"아흐윽…!"
주작천후는 이물질이 자신의 몸 안으로 파고듦을 느끼며 숨넘어 가는 비명
을 내질렀다.
"흐흐…!"
환영음마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이어 그는 주작천후의 몸
에 집어 넣은 손가락을 고요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주작천후의 사지가 반사적으로 퍼덕거렸다.
남달리 몸이 뜨거워 미망인이 된지 얼마 안 되어 음세황과 불륜을 저질렀던
그녀다. 그녀의 육체는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몸은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
다.
(아… 안 돼!)
주작천후는 자신의 의지를 배신하는 몸이 한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때 언뜻 그녀의 눈에 바닥에 쓰러진 혈해마녀의 시신이 쏟아져 들어왔다.
모로 벌려진 혈해마녀의 은밀한 곳은 온통 선혈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그것을 본 주작천후는 섬뜩한 공포에 몸을 떨었다.
"흐흐…! 곧 저 계집같이 만들어 주마!"
그때 환영음마가 음산하게 말하며 주작천후의 하체를 벽 쪽으로 끌어들였
다.
주작천후의 하체 부근의 석벽에는 하나의 흉측한 물건이 솟아 있었다. 비정
상적으로 거대한 그것은 도무지 인간의 그것이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주작천후는 언젠가 암컷과 교미를 하는 물소 수컷의 양물을 본 적이 있었
다. 헌데 벽 속의 괴인의 그것은 그 물소 수컷의 양물보다도 오히려 커보이
는 것이다.
그것을 본 주작천후는 안색이 하얗게 질리며 몸부림쳤다.
"제… 제발 나를 고이 죽여다오."
그녀는 울음 섞인 음성으로 호소했다.
하나 환영음마는 망설임없이 주작천후의 하체를 자신의 그것 위로 끌어올렸
다.
"하아악!"
순간 주작천후는 자신의 은밀한 옹달샘에 거대한 사내의 실체를 느끼고 전
율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흐흐…!"
환영음마는 음탕한 눈을 번뜩거리며 서서히 주작천후의 몸을 아래로 내리
눌렀다. 감당할 수 없는 흉기가 하체로 파고들자 이미 반실신한 주작천후의
아랫도리가 고통으로 퍼덕거렸다.
"흐흐! 역시 이년도 한 번 쓰고 버릴 물건에 불과해!"
주작천후의 육체가 자신의 흉기를 받아들이지 못하자 환영음마는 변태적으
로 키득였다. 그러면서도 힘주어 주작천후의 몸을 자신의 흉기위에 내리눌
렀다. 그대로가면 그녀 역시 하체가 파열되어 죽은 혈해마녀의 꼴이 될 것
이다.
한데… 바로 그 위기의 순간이었다.
피-- 이잉!
돌연 주작천후의 등 뒤로부터 날카로운 파공음이 일며 한 가닥 시뻘건 물체
가 섬광같이 벽면에 꽂혔다.
빠직!
"카아악…!"
이어 무언가 뼈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벽 속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
렸다.
"…!"
그 소리에 혼미하던 주작천후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앞을 바라보았다.
환영음마, 벽면에 돋아난 그 자의 얼굴은 온통 공포와 경악으로 이지러져
있었다. 그런 그 자의 미간, 한 자루의 핏빛 옥비녀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흐릿하게 핏빛 용(血龍)이 조각되어 있는 옥비녀였다.
"혈…혈마옥잠(血魔玉簪)!"
그 옥비녀를 본 순간 주작천후의 입에서 경악과 불신의 신음이 터져나왔다.

-혈마옥잠(血魔玉簪)!

그렇다. 환영음마를 격살한 옥비녀는 바로 잠마혈종(潛魔血宗)이 천 년 전


상실한 잠후(潛后)의 상징 혈마옥잠이었다.
(서… 설마…!)
주작천후는 어떤 한줄기 예감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저벅…!
그때 문득 육중한 발자국 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울렸다. 이어 하나의 무쇠
같은 팔이 마혈(痲穴)이 제압되어 굳어진 주작천후의 허리를 선뜻 휘감아
안았다.
"천후(天后)! 늦지 않아 다행이오."
듣기 좋은 소년의 음성이 주작천후의 귓전을 울렸다. 순간 주작천후의 옥용
이 환희와 수치로 새빨갛게 변했다.
"아아… 운비(雲飛)! 당… 당신이…!"
혈도가 풀린 그녀는 교성을 토하며 홱 돌아섰다. 그런 그녀의 눈에 자신의
자신의 허리를 휘감고 빙그레 웃고 있는 한 명 소년의 얼굴이 들어왔다.
어느덧 늠름한 청년의 티가 나는 미소년, 그가 누군기 확인한 순간 주작천
후의 가슴은 형언할 수 없는 안도감과 환희에 휘말렸다.
"아아… 운비… 당신이 살아 있었군요."
그녀는 와락 철운비의 목에 매달리며 오열을 터뜨렸다. 지금 그녀는 자신이
벌거벗은 몸이라는 것도, 눈앞의 소년이 자신의 상관인 구룡혈황(九龍血皇)
이란 사실도 까맣게 잊어 버렸다. 오직 그가 자신의 방심을 차지하고 있는
장본인이라는 사실만 그녀의 자각 속에 있을 뿐이었다.
"흑… 흑! 운비… 운비!"
주작천후의 입에서는 기쁨과 격정의 오열이 쉴새없이 터져나왔다.
음습한 미로는 그녀의 눈물로 금방 흠뻑 젖어드는 듯했다.

-흡혈마전(吸血魔殿),

"카아아…!"
콰르릉--!
심혼을 얼어붙게 만드는 끔찍한 괴성과 굉렬한 폭음이 흡혈마전을 뒤흔들었
다.
화드득! 퍼-- 퍼퍽!
가공할 경풍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비쩍 마른 소년 소녀들의 시신은 먼지로
바스라져 흩날렸다.
"흐윽… 천… 천년내공(千年內功)을 지녔다니…!"
화드득…!
그 가운데에서 하나의 인영이 경악과 고통의 신음을 토하며 허공으로 퉁겨
져 나갔다.
콰드득…!
그 가냘픈 인영은 모질게 석벽에 부딪혀 한 자 가까이나 석벽에 깊숙이 파
묻혀 버렸다.
천년공력! 미증유의 거력에 말려 석벽에 박혀 버린 인영은 바로 궁월영이었
다.
그녀의 몰골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입고 있던 전포는 갈가리 찢겨졌
으며 오공에서는 선혈이 꾸역꾸역 흘러내리고 있었다. 탐스럽던 머리칼은
제멋대로 흩어져 있었고 안색은 백짓장같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크크…!"
그런 궁월영의 앞으로 하나의 거대한 그림자가 성큼 다가섰다.
괴인…! 무려 일 장 오 척에 이르는 거구의 괴인이었다. 이 괴인의 전신은
온통 시뻘건 털로 뒤덮여 있었으며 두 눈에는 검푸른 마광(魔光)이 벼락치
듯 번뜩이고 있었다.
흡혈강시(吸血疆屍)!
그렇다. 그 괴인은 예의 석관에서 나온 흡혈강시였다.
궁월영은 다가서는 흡혈강시를 올려다 보며 절망의 표정을 지었다.
"지옥천존! 그 자가 이곳에서 흡혈강시를 만들고 있었다니…!"

-흡혈강시(吸血疆屍)!

그것은 전설에나 나오는 일종의 강시였다. 하지만 강시와 다른 점은 흡혈강


시가 보통인간과 똑같이 생리작용을 했다는 점이었다.
생시 고절한 내공을 지녔던 내가 고수에게 흡혈환혼마법(吸血幻魂魔法)이란
사법(邪法)을 걸어 만드는 것이 흡혈강시였다.
그 사법을 통과한 흡혈강시는 생시에 지녔던 것의 두 배 이상 강한 내공을
지니게 되며 어떤 병기와 신공으로도 상처입힐 수 없는 불사(不死)의 몸을
지니게 된다.
다만 한 번 죽었던 시체인지라 생리작용의 유지를 위해 인간의 생혈을 마셔
야만 한다. 그래서 흡혈강시라 불리는 것이다.
한데 그 전설의 흡혈강시가 지금 궁월영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 아닌가?

"흐읏! 혈해성모(血海聖母)! 흡혈강시와 일전을 겨루어 본 감상이 어떠하


냐?"
문득 흡혈강시의 뒤에서 한줄기 음흉한 음성이 들렸다. 그 곳에는 일 장에
가까운 거구의 괴인이 우뚝 서 있었다. 바로 거령수황(巨靈獸皇)이었다.
거령수황 또한 엄청난 거구였다. 하지만 흡혈강시에 비하면 그는 마치 어린
아이같이 보였다.
거령수황의 손에는 지옥천존에게서 받은 초혼마적(招魂魔笛)이 쥐어져 있었
다.
"천인… 공노할 놈들! 무엇이 부족하여 금기화된 흡혈강시까지 만들었단 말
이냐?"
궁월영은 비틀거리며 석벽에서 빠져나오며 거령수황을 노려보았다.
거령수황은 음흉하게 히죽 웃었다.
"흐흣! 세상은 넓고… 그래서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너무 강한 놈
들이 여럿있지. 고독패왕(孤獨覇王)이나… 적붕천황(赤鵬天皇), 흑룡패왕
(黑龍覇王)… 그리고 네년까지 그 중에 들지. 그런 너희들을 상대하기 위해
이 흡혈강시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득의의 표정으로 음침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궁월영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지옥… 천존! 그 자는 나의 상상 이상으로 무서운 자다. 그것을 이제야 깨
닫게 되다니…!)
그녀의 눈이 절망의 빛으로 물들었다.
거령수황은 그런 궁월영의 모습을 노려보며 문득 사악하게 웃었다.
"흐흣! 이제 죽어도 여한은 없겠지?"
이어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초혼마적을 입으로 가져갔다.
"흡혈강시가 인혈(人血)을 마시고 계집의 순음지정(純陰之精)을 취할 때가
되었는데… 마침 잘 되었다. 다른 계집을 찾을 것도 없이 네년으로 대신하
면 될 테니…!"
그는 두 눈을 음흉하게 번뜩이며 말했다.
"무어라고… "
순간 궁월영은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며 전율했다. 그제서야 그녀는 흡혈강
시의 마안이 욕정으로 이글거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본 궁월영은
비로소 소녀들의 시신에서 하체가 으스러져 있는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흡혈강시의 마성은 지극히 강했다. 그것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정기적으로
처녀지신인 여인의 순음지정을 흡수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궁월영은 분노와 수치로 옥용이 새빨갛게 변했다.
"개… 만도 못한…!"
그녀는 사력을 다해 거령수황을 덮쳐가려 했다.
삐-- 이익!
순간 거령수황의 입에 물린 초혼마적에서 한 소리 날카로운 소성이 터졌다.
"카아악!"
콰-- 득!
그러자 우뚝 서 있던 흡혈강시는 즉시 산악이 허물어져 내리는 기세로 궁월
영을 덮쳐들었다.
"아악!"
흡혈강시의 흉흉한 기세에 궁월영은 사색이 되어 날카로운 비명을 터뜨렸
다. 그녀의 봉목이 일순 공포로 크게 떨렸다. 절대절명의 위기였다.
헌데 바로 그 순간!
콰-- 쾅!
돌연 지축을 뒤흔드는 굉렬한 폭음이 흡혈마전을 뒤흔들었다.
쩌저적! 콰-- 드득!
이어 흡혈마전의 우측 석벽 일각이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우웃!"
"성모(聖母)님!"
피-- 이잉!
그리고 동시에 각기 다른 남녀의 폭갈과 경호성이 터지며 두 줄기 인영이
질풍같이 흡혈마전으로 날아들었다.
"어엇! 웬놈들이냐?"
그 돌연한 사태에 거령수황은 경악으로 두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꽈-- 릉!
그 순간 앞서 날아든 인영이 흡혈강시의 옆구리를 향해 벼락같이 일권을 무
찔러냈다.
버-- 번쩍! 쩌저정!
시퍼런 뇌전이 그 인영의 손 끝에서 일어나 흡혈강시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꽈-- 꽝!
"카-- 아앗!"
그러자 굉렬한 폭음과 함께 궁월영을 덮쳐들던 흡혈강시가 쓰러질 듯 휘청
하며 옆으로 서너 걸음 밀려섰다. 그런 흡혈강시의 옆구리에는 뇌전(雷電)
형상으로 시커멓게 탄 자극이 드러나 보였다.
직후,
"뇌정… 개벽천강(雷霆開闢天剛)을 맞고도 쓰러지지 않다니…!"
화라락!
예의 인영이 경악성을 흘리며 궁월영과 흡혈강시의 사이에 내려섰다. 흡사
천신(天神)같은 기세로 날아내린 인물은 바로 철운비였다.
"네… 네놈은…!"
순간 비로소 철운비를 발견한 거령수황은 공포의 표정으로 비칠 물러섰다.
갑자기 날아들어 궁월영을 구한 인물이 바로 한 달 전 자신의 한 팔을 날려
버린 장본인인 것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거령수황이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
"성모…!"
스스… 뒤따라 날아든 주작천후(朱雀天后)가 급히 궁월영에게로 다가가 그
녀를 부축했다.
궁월영은 주작천후의 부축을 받으며 멍하니 철운비를 바라보았다.
"이… 이럴 수가… 주… 죽지 않았다니…!"
그녀는 망연한 표정으로 실성한 듯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것이, 자신이 용
암 속으로 밀어 넣어 버린 철운비가 지금 멀쩡히 그녀의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궁월영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넋나간 듯 중얼거리다 그만 혼절하고 말았다. 내상과 놀라움, 그리
고 안도감이 뒤섞여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
주작천후는 한숨을 내쉬며 궁월영을 안아들었다.
그때,
"거령… 수황(巨靈獸皇)! 또 만나게 되었군!"
철운비가 음울한 시선으로 거령수황을 돌아보며 말했다.
거령수황은 안면을 흉하게 일그러뜨리며 이를 갈았다.
"바득… 잘 만났다, 애송이!"
그는 철운비를 노려보며 초혼마적(招魂魔笛)을 입에 가져갔다.
"크녠! 본좌의 한 팔을 자른 대가를… 오늘 치루게 해 주마!"
삐익!
말을 마침과 함께 그는 입에 대었던 초혼마적을 힘껏 불었다. 날카롭고 섬
뜩한 피리소리가 흡혈마전을 뒤흔들었다.
"카아아앗!"
순간 옆으로 물러섰던 흡혈강시가 흉폭한 괴성과 함께 맹렬히 철운비를 향
해 덮쳐들었다.
꽈르릉…!
흡혈강시의 솥뚜껑만한 손끝에서 도깨비불 같은 시퍼런 인광이 벼락같이 일
어나 철운비를 후려쳐 왔다.
"헉! 그… 것은…!"
순간 그 푸른 인광을 본 철운비의 안색이 경악으로 홱 변했다. 흡혈강시가
떨친 공력은 철운비 자신도 잘 아는 마공(魔功)이었기 때문이었다.
피-- 잉!
하지만 철운비는 놀라는 와중에서도 맹렬하게 마주 일장을 후려쳐냈다.
빠지직…!
그러자 그의 손끝에서도 흡혈강시의 그것과 똑같은 시퍼런 인광이 벼락같이
일어나 폭사되었다.
치지직… 빠가각!
다음 순간 쇠가 갈리는 듯한 섬뜩한 소성과 함께 시퍼런 인광이 허공에서
잇따라 작렬했다.
"크읏! 이럴 수가… 지옥명공강(地獄冥空剛)을 사용하다니…!"
후두둑…! 쿵쿵!
그 가운데에서 철운비는 경악의 신음을 발하며 쓰러질 듯 삼 장 밖으로 밀
려났다.
그런 그의 오른손은 온통 피투성이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너무 놀란
나머지 그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지옥명공강(地獄冥空剛)!

방금 철운비와 흡혈강시가 동시에 발휘한 것은 바로 지옥명공강(地獄冥空


剛)이었다. 그것은 철운비가 지닌 지옥혈겸(地獄血鎌)에 기재된 초마공이었
다.
지옥혈겸--
그것에는 지옥대팔식(地獄大八式)의 초식과 지옥명공강(地獄冥空剛)이 기록
되어 있었다.
지옥명공강을 일단 시전하면 시퍼런 인광이 일어난다. 그 인광에 부딪히면
금강석(金剛石)이라도 모래같이 부서져 버린다. 그래서 일명 겁화파멸흔(劫
火破滅痕)이라 불리는 지옥마류(地獄魔流) 최후 최강의 마공이 그것이었다.
지옥천존은 무저갱(無底坑)에서 지옥혈겸을 얻은 직후 무영종(無影宗)에게
그것을 탈취당했다. 자연히 당금 천하에서 지옥명공강을 알고 있는 사람은
철운비밖에 없어야 했다.
한데 놀랍게도 흡혈강시가 바로 그 지옥명공강을 펼친 것이었다. 그것도 화
후면에서 철운비보다 배는 능숙하게 펼친 것이 아닌가?
십갑자(十甲子)가 넘는 내공을 지닌 철운비조차 우습게 밀어붙이는 흡혈강
시의 존재는 실로 가공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철운비의 뇌리에 순간적으로 한 가지 놀라운 추측이 떠올랐다.


"서… 설마! 그란 말인가?"
그는 경악으로 두 눈을 부릅뜨며 흡혈강시를 바라보았다.
"크카아아!"
꽈릉--!
바로 그때 일격에 철운비를 쓰러뜨리지 못해 잠시 주춤하던 흡혈강시는 재
차 철운비를 향해 일장을 후려쳤다.
흡혈강시의 거대한 손이 마치 도끼(斧)같이 철운비를 뽀개어 왔다. 그것에
는 금강지체(金剛之體)라도 바스러뜨리는 지옥명공강의 파멸지력(破滅之力)
이 실려 있어 스치기만 해도 자신이 으스러질 형편이었다.
한데 그런 흡혈강시의 초식은 철운비가 너무나 잘 아는 초식이었다.
"지옥… 대팔식(地獄大八式)!"
철운비의 입에서 일순 숨넘어가는 듯한 신음이 터져나왔다.

-지옥대팔식(地獄大八式)!

아아! 놀랍게도 흡혈강시가 펼친 그 초식은 바로 지옥대팔식(地獄大八式)의


한 초였다.
철운비의 얼굴은 온통 경악으로 뒤흔들렸다. 그는 비로소 이 흡혈강시의 본
신이 누구였는지 확신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겁화파멸흔(劫火破滅痕)의 인광이 노도
같이 그의 전신으로 밀어닥치고 있는 것이었다.
철운비는 거의 반사적으로 왼손의 마모천둔(魔母天遁)을 들어 전면을 방어
했다.
쩌러렁…!
동시에 그의 우수에서는 시뻘건 혈강(血剛)의 덩어리가 일어나 흡혈강시의
가슴을 후려쳤다.
잠마폭풍참(潛魔暴風斬)--!
잠마혈종 최후최강의 파멸마공이 시전된 것이었다.
콰쾅--!
다음 순간 흡혈강시의 일격이 마모천둔(魔母天遁)의 표면을 두드리며 벼락
치는 듯한 굉음을 일으켰다.
"컥…!"
동시에 철운비의 입에서 나직한 고통의 신음이 터져나왔다. 마모천둔을 든
그의 왼팔의 뼈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부러진 것이었다.
그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모천둔이 태반의 충격을 반진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흡혈강시의 천년내공은 그대로 철운비의 팔을 부러뜨
린 것이었다.
그만큼 흡혈강시의 마력은 무서웠다.
화라락…!
왼팔이 부러진 철운비의 몸이 일순 가랑잎같이 뒤로 퉁겨져 날아갔다.
"칵!"
쿵… 쿵!
그와함게 흡혈강시 또한 고통의 비명과 함께 십여 보 뒤로 주르르 밀려났
다. 흡혈강시의 가슴패기도 늑골이 드러날 정도로 쩍 갈라져 있었다. 무방
비 상태로 철운비의 잠마폭풍참(潛魔暴風斬)의 일격에 가격당해 상처를 입
은 것이었다.
"운비…!"
그때 관전하던 주작천후가 처절하게 외치며 장내로 날아들었다.
피이잉!
그와 함께 그녀의 손에서 하나의 둥근 구슬이 날아가 흡혈강시를 후려쳤다.
꽈르릉…!
다음 순간 굉렬한 폭음이 터져오르며 흡혈강시는 온통 시뻘건 화염으로 뒤
덮였다.

-주작뇌주(朱雀雷珠)!

그 둥근 구슬은 바로 주작천도(朱雀天島) 비전의 화기(火器)였다.


저 남황 벽력부(霹靂府)만은 못하다 해도 주작군도(朱雀群島)의 화기제조술
은 남해 일대에서는 가히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주작군도의 여제인 주
작천후의 장기도 무공보다는 화기술(火器術)에 있었다.
그녀는 철운비가 위험하자 자신의 화기 중 주작뇌주(朱雀雷珠)를 던져낸 것
이었다.
"가… 갑시다, 천후(天后)!"
피-- 이잉!
직후 철운비는 날아드는 주작천후의 팔을 잡고 질풍같이 흡혈마전을 빠져나
갔다. 철운비 등 삼 인은 삽시에 부서진 석벽 틈으로 사라져 버렸다.
다음 순간,
"크읏! 놓치다니…!"
스슥!
거령수황은 분노의 표정을 지으며 무너진 석벽 앞으로 내려섰다.
하나 그는 감히 추적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다쳤다고는 하나 철운비가
방금 흡혈강시와 맞서 보인 신위는 그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흡혈강시를 상처낼 수 있는 자가 하늘 아래
존재하리라고는…
거령수황은 낭패함을 금치 못했다.
"그나… 저나 흡혈강시를 잃었으니 천존에게 무어라 변명하지?"
그는 침중하게 신음하며 돌아섰다.
화르르륵--!
흡혈마전, 그 중앙은 온통 시뻘건 화염으로 뒤덮여 불꽃 속에 타오르고 있
었다.
주각뇌주에는 강력한 인화(引火) 물질이 농축되어 있어 일단 폭발하면 무쇠
라도 녹여 버린다. 그것을 알고 있는 거령수황이기에 그는 흡혈강시도 이미
재로 변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한데,
"크크크…!"
돌연 화염 속에서 뱃속을 긁어내는 듯한 괴성이 들린 것은 그 때였다.
파-- 앗!
이어 주작뇌주의 불길이 돌연 어떤 강렬한 잠력에 산산이 흩어졌다. 그리고
연기 사이로 하나의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거령수황의 두 눈이 불신과 경악으로 한껏 부릅떠졌다.
"흡혈… 강시(吸血 屍)!"
그의 입에서 놀라움과 환희의 환성이 터져나왔다.
오오! 그렇다. 그 거대한 그림자는 바로 흡혈강시였다. 흡혈강시는 전신 모
발이 화염에 그을렸으나 다른 곳은 별로 다친 곳이 없어 보였다.
거령수황은 자신의 앞으로 다가서고 있는 흡혈강시를 바라보며 득의만면한
표정을 지었다.
"크하하! 과연…이다! 캇캇! 이 흡혈강시만 있으면 어떤 놈도 감히 우리 지
옥마교에 항거치 못하리라!"
그의 앙천공소는 쩌렁쩌렁하게 지하석실을 울렸다.

-흡혈마전(吸血魔殿)!

이곳은 가장 무서운 마물(魔物)이 탄생한 흡혈마전이었다.

"으음… 아수마황(阿修魔皇)! 그 자는 분명 아수마황이었다!"


문득 온통 경악과 회의가 서린 신음소리가 어둠 속을 울렸다.
스읏…!
이어 은황장(隱皇莊)으로부터 두 명의 인영이 질풍같이 날아나왔다. 바로
철운비와 주작천후였다.
철운비는 부러진 왼팔을 감싸쥔 채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주작천후가 궁월영을 안은 채 울상을 지으며 따르고 있었
다. 그녀가 울상을 짓고 있는 것은 철운비가 다쳤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다… 이 계집 때문이다!)
주작천후는 자신이 안고 있는 궁월영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화라락… 스스슥!
그 사이 철운비는 은황장의 외곽 구릉에 이르러 신형을 멈추었다.
그는 흐트러진 머리를 추스를 생각도 않고 은황장을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
누워 있는 은황장의 모습은 흡사 거대한 짐승이 누워 있는 듯했다.
철운비의 눈빛에는 아직도 놀라움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지옥… 천존! 그는 무저갱(無底坑)에서 지옥혈겸(地獄血鎌)과 마경(魔經)
만을 발굴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무저갱에서 얻은 가장 무서운 무기는…
바로 아수마황(阿修魔皇)이었다.)
그의 입가로 무거운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아수마황(阿修魔皇)!

아아! 그렇다. 흡혈강시(吸血疆屍)의 정체는 바로 아수마황(阿修魔皇)이었


다.
오백 년 전… 단신으로 대륙을 시산혈해(屍山血海)로 만들었던 사상 가장
잔혹했던 대마왕(大魔王)! 그는 오백 년 전 오패왕(五覇王)의 연수 합격에
패해 무저갱으로 몸을 던졌었다.
한데 그 아수마황을 지옥천존이 발굴하여 흡혈강시로 만든 것이었다. 아수
마황은 공포스럽게도 오백 년 전보다 두 배 강해진 상태였다.
오백 년 전만 해도 천하에 적(敵)이었던 그였다. 오대무벌의 시조들인 오패
왕(五覇王)이 연수를 해서야 겨우 쓰러뜨렸었으나 그의 마력이 얼마나 강했
는지 그후 오패왕도 모두 죽고 말았다.
하물며 그 당시보다 두 배 강해진 아수마황임에랴! 이제 누가 있어 그와 맞
설 수 있단 말인가? 십갑자의 내공을 지닌 철운비조차 단 이초(二招)를 견
디지 못하고 한 팔이 부러지고 말았지 않은가? 그만큼 흡혈강시가 된 아수
마황은 무서운 것이었다.
거령수황, 그의 말대로 지옥천존은 고독패왕(孤獨覇王) 정도의 고수를 상대
하기 위해 아수마황을 흡혈강시로 만든 것이었다.

철운비는 그것에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납덩이같이 무거워졌다.


한데, 그가 어둠 속의 은황장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아아! 정말 구룡혈황(九龍血皇)이시다!"
"주모(主母)께서 말씀하셨을 때는 완전히 믿지 않았는데… 정말 살아 계셨
군요!"
스스스… 화라락!
기쁨과 놀라움이 실린 환성과 함께 수많은 인영이 구릉 위로 날아올랐다.
(혈해… 구룡(血海九龍)!)
순간 철운비는 눈을 빛내며 빙글 몸을 돌렸다.
구릉 위로 분분히 날아드는 인물들은 바로 혈해구룡군도(血海九龍群島)의
종사들이었다.

∑ 제 30 장 성모(聖母)와 혈황(血皇)의 정사(情事)

혈해구룡(血海九龍)의 종사-!
그들 또한 적지 않은 고난을 겪은 듯했다. 그들의 의복은 여기저기 찢겨 있
었으며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얼굴은 환하
게 빛나고 있었다.
"맹… 주를 뵙습니다!"
"허허… 더욱 헌앙해지셨소이다 혈황(血皇)!"
혈해구룡의 종사들은 감격에 떨며 분분히 철운비에게 군례를 올렸다. 그들
중 빙서시(氷西施) 냉철화와 청룡제왕(靑龍帝王) 곽붕은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철운비는 미소로써 중인들에게 답례하며 문득 그들의 뒤편으로 시선을 던졌
다. 그 곳에는 한 명의 가냘픈 미소부가 천여 명의 혈해마녀(血海魔女)들에
호위된 채 그림같이 서 있었다.
부용부인 곽부용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철운비를 떠나보낸 뒤 안심이 안 되어 혈해마녀 전원을 이끌고 은황
장에게 왔었다.
그리고 은황장에 진입하여 지옥십마황(地獄十魔皇)에게 고전하고 있던 혈해
구룡의 종사들을 구한 것이었다.
"…!"
곽부용은 철운비와 시선이 마주치자 살짝 얼굴을 붉히며 살포시 웃었다. 그
런 그녀는 더 이상 가냘픈 아녀자로만 보이지는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그녀
에게는 혈해구룡의 노종사들조차 절로 고개 숙이게 하는 기품이 배어 흐르
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혈해군벌(血海軍閥)의 용사들에게 주모(主母)라 불리는 상태였
다. 그것은 그녀가 혈해군벌 내에서 철운비의 아내로 인정받고 있음을 의미
하는 것이었다.
철운비는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래 부용, 당신이야말로 정말 혈해군벌의 여주인으로 어울린다!)
그는 훈훈한 미소를 띠우며 곽부용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런 철운비의 모습을 바라보며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는 두 여인이 있었으
니… 그녀들은 바로 주작천후와 빙서시 냉철화였다.
(우리에게는… 그의 시선을 잡을 능력이 없는 것일까?)
그녀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우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스으… 스으…
어느덧 동녘이 환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황룡보(黃龍堡).>

짙은 먹장구름이 혈해군벌의 중원총단 격인 황룡보를 짓누르고 있었다.


우르릉…!
간간이 먹장구름 속으로 우뢰성이 일곤 했다.
황룡보의 의사청,
"…!"
그 넓은 의사청 안에 하나의 왜소한 인영이 외롭게 앉아 있었다.
혈해성모(血海聖母) 궁월영!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아직 내상이 완치되지 않은 듯 파리한 안색처럼 상좌에 앉아 있었
다. 그녀의 앞에는 여러 개의 태사의가 놓여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텅 비어
있을 뿐이었다.
궁월영은 쓸쓸한 눈빛으로 그 빈자리를 둘러보았다.
(모두… 내 곁을 떠났다. 주작천후까지도…!)
그녀는 문득 오한이 드는지 교구를 추스리며 우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커
다란 태사의 한쪽에 도사리고 앉은 궁월영의 교구가 유난히 조그맣게 느껴
졌다.
문득 그녀의 봉목이 묘한 빛으로 흔들렸다.
(살아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 나를 치욕스럽게 만든 그 어린
사내자식이…!)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내심 중얼거렸다.
철운비가 살아돌아온 사실 때문에 궁월영은 지금 모든 것을 상실한 지경이
되었다. 혈해구룡군도의 종사들은 궁월영에게 등을 돌리고 철운비를 혈해군
벌의 진정한 벌주(閥主)로 추대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당연히 궁월영은 격노해야 옳았다. 하나 기이한 일이었다. 궁월영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편안했다. 편안할 뿐 아니라 그녀는 철운비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알 수 없는 기쁨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궁월영 자신으
로서도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다.

"구룡(九龍)… 입니다. 들어가겠습니까!"


문득 의사청 밖에서 창노한 노인의 음성이 들렸다.
궁월영은 그제서야 흠칫하며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그것이 청룡제왕
(靑龍帝王) 곽붕의 음성임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윽고 궁월영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구 인(九人)이 의사청 안으로 들
어왔다. 바로 청룡제왕과 주작천후 등 혈해군룡군도의 종사들이었다.
"…!"
"…!"
혈해구룡(血海九龍)은 침중한 안색으로 궁월영의 앞으로 다가섰다. 이어 그
들은 궁월영을 향해 정중히 예를 올렸다. 이어 청룡제왕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이것이… 저희들이 뜻이외다, 성모(聖母)!"
그는 괴롭게 말하며 한 권의 두루마리를 궁월영에게 바쳐올렸다.
"연판장(連判狀)… 인가요?"
궁월영은 파리한 안색으로 무심하게 말하며 두루마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받을 생각이 없는 듯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는 보지 않고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연판장(連判狀), 혈해
구룡은 연서(連署)로 그 두루마리에 서명한 것이었다. 그 주된 내용은 성모
(聖母)로서의 존엄성은 인정하나 혈해군벌(血海軍閥)에 대한 실권은 배제시
킨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바로 궁월영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향후
지금까지 그녀가 지녔던 무상의 권위는 철운비나 그의 정실인 부용부인 곽
부용이 대신 행사하게 될 것이다.
그때 청룡제왕은 궁월영이 연판장을 받지 않자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
어 그는 연판장을 궁월영의 옆 탁자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그리고 그는 탄
식하듯 침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성모께서… 접수하시든지 않으시든지… 저희들의 뜻은 이미 결정되었음을
정식으로 통고드립니다!"
"통고… 라고?"
궁월영은 나직이 뇌까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문득 그런 그녀의 눈으로 한
가닥 결의의 빛이 스쳤다.
"가서… 당신들의 영웅을 불러와요. 이 안건은… 그와 협상하겠어요!"
그녀는 혈해구룡을 둘러보며 의연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의 말에 혈해구룡은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일시에 궁월영의 의
도가 무엇인지 감지할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궁월영의 눈가에 문득 야릇한 미소가 스쳐갔다.
"당신들은 형식적이라도 이 연판장을 본녀가 접수하길 바라겠지요. 그래야
구룡혈황(九龍血皇)의 권위에 손상이 가지 않을 테니까!"
그녀는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느덧 그녀는 잠마혈종(潛魔血宗)의 종사
로서의 위엄을 되찾고 있었다.
"구룡혈황(九龍血皇)을 위한다면…… 가서 그를 불러와요. 만일 그가 본녀
의 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아마도 혈해군벌은 둘로 갈라지게 될 거예요.
아직도… 본녀를 추종하는 충신들은 적지 않으니까…!"
궁월영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혈해구룡을 바라보았다.
반면 혈해구룡은 당혹한 빛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철운비가
모르게 그들 자신들의 지도자로 웅립하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궁월영의 의외로운 반격에 그것이 무산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혈해구룡이 당황함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였다.
"되었소! 그대들은 이제 그만… 물러가시오!"
돌연 한 소리 음울한 음성이 중인들의 뒤에서 들렸다.
"혈황(血皇) 저하!"
"맹주님!"
순간 혈해구룡은 낭패한 기색으로 일제히 돌아섰다.
언제 나타났을까? 의사청의 입구에는 철운비가 중인들을 바라보며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안색 역시 지극히 창백해 보였다. 또한 그는 왼팔을 붕대로 칭칭 감고
있었다. 왼팔의 뼈가 부러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철운비 같은 내가 고수에게 있어 그것은 별로 큰 부상이 아니었다.
단순히 골절되었을 뿐 내상은 입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철운비는 중인들을 둘러보며 침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성모와의 문제는… 본좌가 해결하겠소! 물러들 가시오!"
이어 그는 묵중한 걸음으로 의사청 안으로 들어섰다.
혈해구룡은 민망한 기색으로 고소를 지었다.
"분부에… 따르겠소이다!"
"물러가세… 형제들!"
그들은 철운비에게 깊숙이 허리를 숙여보였다. 이어 그들은 총총히 의사청
을 물러났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자 이내 넓은 의사청 안에는 철운비와 궁월영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철운비는 잠시 궁월영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만감을 담고
허공에서 서로 뒤엉켰다.
스슥!
그러다가 철운비는 갑자기 성한 손으로 자시의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궁월영의 안색이 홱 변했다.
"무… 무슨 짓이에요?"
하지만 철운비는 태연히 허리띠를 풀고 이어 상의를 벗으며 말했다.
"당신이 원한 게… 이것이 아니었소 성모?"
그는 냉소를 지으며 천천히 옷을 벗었다. 삽시에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
지 않은 나신이 되었다.
"흐윽…!"
순간 궁월영의 입에서 숨넘어가는 듯한 신음이 터져나왔다. 건장한 철운비
의 나신과 그의 거대한 실체를 본 궁월영은 어쩔 줄 모르며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무… 무엄하군요 혈황!"
그녀는 고개를 돌린 채 당황한 음성으로 교갈을 터뜨렸다. 하지만 철운비는
태연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주저없이 궁월영이 앉은 상좌쪽으로 성큼
걸어올라 갔다.
"흐윽…"
궁월영은 신음과 함께 사시나무 떨 듯 교구를 경련했다. 철운비의 건장한
나신이 그녀의 시야를 가득 가렸기 때문이었다.
철운비는 냉철한 시선으로 떨고 있는 궁월영을 내려다 보았다.
"나는 혈해군벌을 사랑하오. 나 때문에 혈해군벌이 분열되기를 원치 않소!
그래서… 분쟁의 원인을… 지금이라도 해소시킬 작정이오!"
말과 함께 그는 갑자기 궁월영의 긴 수발을 움켜쥐더니 거칠게 뒤로 젖혔
다.
"악… 아파요!"
순간 궁월영은 비명을 지르며 하얗게 눈을 치떴다. 그런 그녀의 눈에 자신
의 얼굴 위로 다가서는 철운비의 우람한 일부가 확 뛰어들었다.
철운비는 잔인하게 미소지으며 궁월영을 내려다 보았다.
"그날 밤… 당신이 원했던 일이오. 그대가 지금 원하든 원치 않든… 그때
당신이 바랬던 대로 해주겠소!"
이어 그는 궁월영의 몸을 거칠게 태사의에 쓰러뜨렸다.
"흐윽…"
궁월영은 쓰러진 자신 위로 거칠게 덮쳐드는 철운비를 느끼며 공포의 신음
을 내질렀다.
잠시 후,
"아… 악…! 흐윽…!"
의사청 안에서는 궁월영의 고통과 흐느낌이 뒤섞인 신음이 흘러나오기 시작
했다.
꽈르르릉!
그와 함께 문득 한 줄기 낙뢰가 암천을 가르며 뇌음을 울렸다.
쏴아아!
뒤이어 세찬 폭우가 무섭게 지면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흐윽… 아아… 싫어… 제발!"
의사청 안에서는 궁월영의 애처로운 흐느낌이 높아갔다. 그녀의 흐느낌에
이어 짐승의 그것 같은 철운비의 거친 숨소리도 함께 섞여나왔다.

의사청 밖,
"…!"
"…!"
몇 명의 왜소한 인영이 당혹한 표정으로 의사청에서 새어나오는 소리를 들
고 있었다. 부용부인 곽부용, 빙서시 냉철화, 그리고, 주작천후 등이 그녀
들이었다.
주작천후와 빙서시의 표정은 아주 볼 만했다. 두 여인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들이었다. 그녀들은 연신 어쩔 줄 몰라하며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반면 곽부용은 의외로 태연한 표정으로 의사청 안을 향해 귀를 기울이고 있
었다.
"흐윽… 하악!"
궁월영의 흐느낌은 점점 급박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고통스럽게
들렸으나 점점 그 소리는 야릇한 환희의 교성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것을 듣고 있던 빙서시 냉철화는 마침내 못 견디겠다는 듯 곽부용을 향해
원망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저… 정말… 너무하세요 주모(主母)님. 아무리 혈해군벌의 분열을 막기 위
해서라고 해도… 그 분 보고 성모를 안으라고 시키시다니요?"
그녀는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고인 채 말했다.
아… 그랬던가? 곽부용, 철운비에게 궁월영을 안으라고 시킨 것이 바로 그
녀였단 말인가?
곽부용은 빙서시의 항의에 극히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그이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어요!"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녀의 태연한 표정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쏴아아…꽈르릉--!
빗발은 더욱 거세어지고 있었다. 간간이 들리던 우뢰성도 점차 높아지는 듯
했다.
그 속에 궁월영의 흐느낌은 급박하게 절정을 치닫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철운비는 옷깃을 추스리며 성큼성큼 의사청 밖으


로 걸어나왔다.
"상공… 수고하셨어요!"
그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곽부용이 은은하게 미소지으며 철운비에게로 다가
섰다.
철운비는 그녀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나는… 청해(靑海)로 갈 생각이오!"
그 말에 언뜻 곽부술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지옥… 천존을 쫓아가시는 것인가요?"
철운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걱정마시오. 지옥천존이든 누구든 나를 다치게 하지는 못하오!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라도 무사한 모습으로 돌아오겠소!"
그는 염려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곽부용의 뺨을 가볍게 다독여 주었다. 이
어 그는 주작천후와 빙서시를 돌아보았다.
"부용을… 부탁하오."
말을 마침과 함께 그는 두 여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성큼성큼 빗 속으
로 걸음을 옮겼다. 이내 그의 모습은 여인들의 시야에서 아득히 사라졌다.
세 여인은 망연히 철운비가 사라진 곳을 주시했다.
그때 하나의 왜영이 비틀거리며 의사청 밖으로 걸아나왔다. 그 인영은 기둥
에 기대선 채 철운비가 사라진 곳을 주시했다.
의복이 제멋대로 흐트러진 여인은 바로 혈해성모 궁월영이었다. 궁월영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제발… 빨리 돌아오거라. 못된 자식…)
문득 그녀의 커다란 두 눈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돌아오기만 하면… 오늘 내게 한 못된 짓의 대가를 똑똑히 치르게 해줄 테
니까…!)
궁월영은 짐짓 독살스럽게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하나 그녀의 봉목 깊은 곳
에는 자기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꽈르릉--!
엄청난 우뢰음과 함께 문득 벽력이 의사청의 지붕을 강타했다. 그와 함께,
쏟아지는 빗발의 기세는 점점 더 거세어졌다.
궁월영은 말없이 그 폭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는 쉽게 그치지 않을 듯했
다. 철운비와 궁월영, 두 남녀의 마음에 남아 있는 앙금을 모두 씻어 버리
려는 듯…

-성숙해(星宿海)!

청해성(靑海省)과 대설산(大雪山)의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고원지대를 총칭


하는 이름이다.
비록 해(海)라고 불리우나 성숙해는 바다가 아니다. 성숙해에는 빙하기 때
생긴 수많은 빙호(氷湖)들이 있으며, 그 숫자는 하늘의 뭇 별 만큼이나 헤
아릴 수 없이 많다고 알려졌다.
그래서, 별(星, 宿)의 바다(海)-- 성숙해라 불리우는 것이었다.

<유리성궁(琉璃聖宮).>

오대무벌(五大武閥) 중 서방(西方)을 지배하는 대가문(大家門)! 그들은 청


해성 서단(西端), 성숙해의 입구에 자리해 있었다.
유리성궁의 시조는 잘 알려진 대로 오패왕(五覇王) 중 유리성모(琉璃聖母)
였다. 그 때문이었을까? 유리성궁은 오대무벌 중 유일하게 모계(母系)로 이
어지는 가문이었다.
즉, 역대 유리성궁의 지존은 여인들이었던 것이다.
그녀들은 유리성궁의 실권을 쥐고 있을 뿐 아니라 성(姓)까지 모계인 마씨
를 쌌다.
역대 유리지존의 남편들은 호화지존(護花至尊) 또는 화왕(花王)이라 불리웠
다. 남편이라 하나 호화지존들에겐 아무런 실권이 없었다. 그들은 다만 유
리지존의 대(代)를 이어주고 유리지존을 보호하는 역할만이 주어졌을 뿐이
었다.

-유리부인(琉璃婦人) 마옥령(瑪玉玲)!

그녀가 당대의 유리성궁의 지존이다. 지혜롭기는 하나 무공방면에는 그리


뛰어나지 않은 여인이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인 아주 뛰어난 용사(勇士)라 알려져 있었다.

-서천제일용자(西天第一勇者) 담철형(潭鐵形)!

그가 바로 유리부인 마옥령의 남편이었고, 당대 호화지존이 되는 인물이었


다.

성숙해의 동북방 고원에는 만년설(萬年雪)에 뒤덮여 있는 계곡이 하나 자리


해 있었다.
한데, 지금 그 만년설은 붉게 물들여 있지 않은가?
시체(屍體)… 계곡의 안은 백여 구가 넘는 시체들로 꽉 차 있었다. 그 시신
들에서 흘러나온 선혈은 설지(雪地)를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시체들은 모두 붉은 적포를 걸친 서역인들이었다. 그들의 옷자락에는 공통
적으로 하나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뇌정(雷霆)…!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두개골이 으스러져 죽어 있었다. 무엇인가 육중한 둔기에
가격당한 듯…,
적포인들의 시체는 계곡의 끝 부분을 포위하는 형상으로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계곡의 끝에는 십여 명의 인물이 서 있었다.
"…!"
빙벽을 등지고 선 한 명의 거한(巨漢)이 있었다. 그의 전신은 온통 핏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 거한을 십여 인의 적포인들이 포위하고 있었다.
거한은 아주 위맹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난전(亂戰)을 치른 듯, 그의 전
신엔 수많은 상처와 수많은 병기의 파편들이 꽂혀 있어 흡사 고슴도치를 연
상시키듯 끔찍한 몰골이었다.
거한은 한 자루의 피에 절은 다섯 자가 넘는 철궁(鐵弓)을 짚고 우뚝 서 있
었다. 아마도 그것이 그의 무기인 듯한데 그 철궁엔 허연 뇌수와 선혈이 얼
룩져 있었다. 장내의 적포를 걸친 시신들에게 죽음을 선사한 것도 바로 그
것이리라!
"분… 하다! 너희… 뇌정마찰(雷霆魔刹)의… 오랑캐들 따위에… 죽다니…!"
문득 거한의 신형이 비틀거리며 신음성을 흘렸다. 그의 입가로 흐르는 한
모금의 선혈에는 끊어진 내장 조각까지 섞여 있었다.
"옥령… 미안하오.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지켜 줄 수가…!"
쿠-- 쿵!
비틀거리며 쥐어짜듯 중얼거리던 거한은 일순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마치 천 년의 풍사을 견디던 거목이 쓰러지듯…
"으음…! 이제야 겨우 쓰러뜨렸군!"
"과연 서천제일패왕(西天第一覇王)답군! 우리 뇌정마찰의 최정예인 백팔뇌
룡(百八雷龍)을 모두 죽이고야 쓰러지다니…"
그제서야 적포인들은 침음성을 흘리며 쓰러진 거한에게로 다가들었다. 그들
은 목적을 이루었건만 기쁜 표정들은 결코 아니었다.
열 명의 적포인들 중 아홉은 나이를 추측키에도 힘든 노인들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아주 젊은 서역의 여인이었다.
나이는 이십 오륙 세쯤 됐을까? 큼직큼직한 이목구비를 지닌 절세의 미인
(美人)이었는데 서역의 여인답게 아주 풍만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피둥피둥 살이 오를대로 오른 젖무덤은 숨을 쉴 때마다 물결치듯 출렁이고
… 기이하게도 그녀의 눈빛은 불꽃같은 붉은 색이었다.
그때 한 명의 적포인이 쓰러진 거한의 몸을 뒤져서 한 개의 물건을 꺼내 들
었다.
열쇠! 그것은 반 자 길이의 열쇠였는데 전체가 황금으로 만들어져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역시! 마황금시(魔皇金匙)는 이 자 호화지존(護花至尊)이 지니고 있었습니
다 소종사님!"
예의 적포노인은 사뭇 흥분된 표정으로 황금 열쇠를 적안(赤眼)의 미녀에게
바쳐 올렸다.

-마황금시(魔皇金匙)!

이것이… 황금열쇠의 이름인가?


"드디어…!"
마황금시를 받아들며 적안미녀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조심스레
마황금시를 살피며 함박 웃음을 머금었다.
"호호홋! 결국! 이 마황총(魔皇塚)의 열쇠는 나 뇌정서시(雷霆西施) 적아라
(赤娥羅)의 손에 들어왔구나! 이것으로 뇌정마찰의 다음 대 찰주(刹主)가
누가 될지는 결정된 것이다!"
여인, 스스로를 뇌정서시 적아라라고 한 적안의 미녀는 득의의 교소를 금치
못하고 있었다.
뇌정마찰-! 그녀는 바로 서역의 마도명문(魔道名門)인 뇌정마찰의 여제자였
다.
적포노인들 중 한 노인이 아첨이 담긴 말로써 그녀를 더욱 교만스럽게 치켜
올린다.
"그렇습니다. 지금쯤 유리부인 마옥령과 그녀의 딸인 마비취(瑪翡翠)를 쫓
아간 열화마룡(熱火魔龍)은 헛물을 켜고 분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것
입니다!"
"허헛 그렇지! 이제… 대세는 결정된 것이야!"
"제 이십사대 뇌정찰주(雷霆刹主)는 소종사이십니다!"
노인들은 감회로운 듯 시선을 내리 깔며 중얼거렸다. 하나 정작 당사자인
뇌정서시 적아라의 눈빛은 시종 차갑게 침잠되어 있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 마황금시만 있으면… 저 인간같지도 않은 흑룡패왕
(黑龍覇王)과 맞설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뇌정서시 적아라는 마황금시를 보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녀의 사문인
뇌정마찰은 몇 달 전에 한 명의 무서운 초인에게 병탄된 상태였다.

-흑룡패왕(黑龍覇王)!

저… 서북팔황연맹(西北八荒聯盟)의 신화적인 초인! 그가 단신으로 뇌정마


찰로 난입해 들어 반나절 만에 뇌정마찰의 모든 강자들을 굴복시켜 버린 것
이었다.
뇌정서시 적아라가 평소 존경하던 사부 뇌정활불(雷霆活佛)도 흑룡패왕의
백 초도 받지 못하고 패배한 것이었다. 결국 뇌정마찰은 서북팔황연맹의 일
개 분단으로 몰락하는 치욕을 겪게 되었다.
(반드시… 흑룡패왕의 손에서 벗어나 독립하리라! 못난 사제 열화마룡은 본
문이 서북팔황연맹에 복속당한 것이 전화위복이라 말하나… 나는 그렇게 생
각하지 않는다.)
츠--읏!
적아라의 시선이 새하얗게 백열된 것은 순간적인 일이었다.
(우리는… 불사성황(不死聖皇)과도 당당히 맞서 싸웠던 위대한 뇌정신문(雷
霆神門)의 후예다! 타의에 굴복하기에는… 우리 뇌정일문 천년(千年)의 자
존심이 허용치 않는다!)
적아라의 풍만한 젖가슴이 흥분으로 일렁였다. 그러다가, 그녀는 돌연 고개
를 치켜올리며 수하들을 쓸어보며 입을 열었다.
"마황총(魔皇塚)으로 직행하는 거예요! 귀찮은 피라미떼들이 몰려들기 전에
…"
"예-- 옛!"
"존-- 명, 소종사!"
구 인의 적포노인들은 허리를 숙이며 신형을 날리려 했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가다니…! 너희들이 갈 곳은 이미 정해져 있는데 어딜 간단 말이냐?"
돌연 한 소리 음울한 음성이 적아라를 비롯한 중인들의 귓전을 울리는 것이
아닌가?
"누구냐?"
뇌정서시 적아라가 섬뜩한 느낌을 느끼며 교갈을 터뜨리고는 재빨리 교구를
들었다.
언제였을까?
화-- 라라락!
계곡의 끝에 자리해 있는 빙벽(氷壁)의 위에는 한 명의 흑포인이 옷깃을 펄
럭이며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검은 천을 휘감
고 있는 인물이었는데 검은 몽면 사이로는 시퍼런 한 쌍의 눈이 번갯불처럼
번뜩이고 있다.
지옥천존-!
지상(地上)에 이런 유의 인물은 오직 그밖에 존재할 수 없으리라. 바로 그
지옥천존이 이곳 성숙해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마황금시는 고맙게 접수하겠다! 그 대가로… 편히 보내 주마! 저승으로…"
스-- 읏!
지옥천존은 중얼거리듯 말하며 슬쩍 오른손을 저어갔다.
그와 중인들의 거리는 대략 삼십여 장, 삼십 장을 격하고 그가 손을 흔들자
뇌정서시 적아라와 적포노인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실소를 머금었다. 도대
체 그만한 거리를 두고 상대를 공격할 수 있는 인물이 있다는 것은 꿈에서
나 볼 수 있으리라.
하나 그런 인물은 존재했던 것이다. 그것은 꿈도 아닌 엄연한 현실이었다.
"미친… 놈이로군! 감히… 캐-- 애액!"
퍼-- 퍼--퍽!
비웃음을 흘리던 한 명 적포노인의 두개골이 박살나며 허연 뇌수가 분수처
럼 솟구쳐 올랐다. 무형무성(無形無聲)의 파멸강기(破滅剛氣)가 삼십여 장
을 격하고 날아들어 적포노인을 격살한 것이다.
그것을 일별한 적아라의 안색이 창백하게 일변했다.
"무형… 파멸마강(無形破滅魔剛)이다! 조심…!"
그러나, 그녀의 경호성은 이어지질 못했다.
"크-- 아-- 악!"
"캐애액!"
퍼-- 퍼퍽! 후드득…!
처절무비한 단말마가 사위를 찢어발기고… 역겨운 피비린내와 함께 뇌수와
육편의 시뻘건 선혈이 허공으로 뒤덮였다.
쿵…! 쿵!
일시에 계곡 내에는 서 있는 자라곤 단 일 인도 존재하지 않았다. 뇌정서시
적아라와 적포노인을 지옥천존의 무형패멸마강에 저항 한 번 못해 보고 몰
살당한 것이었다.
"으음! 갈수록 살심(殺心)이 드세진다!"
슷…!
지옥천존은 괴로운 눈빛으로 중얼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피-- 이잉!
순간 적아라의 손에 쥐어 있던 마황금시가 그의 손 안으로 가볍게 빨려들어
왔다.
"야수심결(野獸心訣)은 내공을 기하급수적으로 증폭시켜 주지만… 그 대신
나의 이성은 급격히 무디게 만든다!"
지옥천존은 마황금시를 집어들며 아주 괴로운 신색으로 중얼거렸다. 비록
마황금시를 얻었으나 그는 별로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야수심결(野獸心訣)!

그것은 지옥천존이 무저갱(無底坑)에서 지옥혈겸과 함께 발굴한 야수혈경


(野獸血經) 상의 마공심결이었다.
그것은 내공을 속성으로 증강시켜 주는 이점이 있었으나 그에 비례하여 심
성이 극악하게 변하는 단점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지옥천존이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야수심결을 스스로 제어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른 후였다.
(마황총(魔皇塚)에… 어쩌면 나를 파멸에서 구해줄 무엇인가가 있을지도 모
른다. 마인(魔人)이 되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내 사랑하는 딸 황혜까지
몰라보고 해치게 되면 곤란하지 않은가?)
그는 몽면 속에서 씁쓸한 고소를 머금었다.
"가자! 나찰(羅刹)!"
이어 지옥천존은 나직한 일갈과 함께 질풍같이 떠올라 서남쪽으로 신형을
폭사해 갔다.
"옛! 천존!"
패--액!
빙벽 뒤에서 하나의 왜영이 떠올라 지옥천존을 따랐다.
나찰관음(羅刹觀音)-!
여인은… 바로 그녀였다. 지옥삼패의 막내인,
피-- 이잉!
이인(二人)의 신형은 삽시간에 설원(雪原)의 저편으로 까마득히 사라져 갔
다.

지옥천존이 사라진 일다경 후,


구워-- 어억!
돌연 한 소리 거창한 용음(龍音)이 지축을 뒤흔들며 창공을 암흑으로 뒤덮
여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한 마리 거대한 익수룡(翼水龍)이 날개를 활짝 펴
며 계곡으로 날아 내렸다.
수호익룡(守護翼龍)-!
괴룡(怪龍)의 정체는 바로 수호익룡이었다.
"지독… 한데! 누가 이런 짓을 했지?"
화라락!
수호익룡의 등 위에서 침중한 음성이 들리며 한 명의 폐포청년이 훌훌 날아
내렸다. 그는 물론 철운비(鐵雲飛)였다. 그가 지옥천존의 뒤를 쫓아 이곳
성숙해에 이른 것이다.
(이것은… 무형파멸마강(無形破滅魔剛)에 당한 흔적이다! 그다지 오래지 않
은 시간 전에 지옥천존이 이곳을 지나갔군!)
무형파멸마강에 죽은 뇌정마찰의 고수들을 내려다보는 철운비의 시선에서
기광이 번득였다.
(지옥천존이 무슨 목적으로 이들을 죽였지?)
철운비는 검미를 모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헌데 그가 의혹의 빛으로 사위
(四圍)를 둘러볼 때였다.
"으으…!"
문득 미약한 신음성이 그의 귓전으로 스며드는 것이 아닌가?
"…?"
철운비는 청력을 돋우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신음성이 흘러나
온 곳은 죽은 줄 알았던 예의 거한이었다.
"대단한… 생명력인데! 이런 몸으로 아직 숨결이 남아있다니…!"
철운비는 해연히 놀라며 거한을 바로 누이며 그의 거궐혈에 내공을 불어 넣
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크으…! 그… 그대는…"
거한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힘겹게 눈을 떴다. 철운비는 거한의 생명
력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며 급히 물었다.
"귀하는 누구요? 부탁하실 일이라도 있소?"
거한은 억지로 시력을 모아 철운비를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무엇인
가 결정한 듯 띄엄띄엄 입을 열었다.
"나는 호화… 지존(護花至尊)… 담철형(潭鐵形)이라… 하오."
(호화지존 담철형!)
그의 말에 철운비는 흠칫했다.

-호화지존(護花至尊) 담철형(潭鐵形)!

서천제일용사(西天第一勇士)이며 당대 유리성궁(琉璃聖宮)의 궁주인 유리부


인(琉璃婦人) 마옥령(瑪玉玲)의 남편이 아닌가? 철운비도 그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실질적인 유리일족(琉璃一族)의 가주(家主)! 그런 그가 지금 자신의 팔 안
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 제 31 장 유리패왕궁(琉璃覇王弓)

"우리 부부는… 뇌정마찰(雷霆魔刹)의 무리에게 습격… 당했소. 놈들은…


마황총(魔皇塚)를 노리고… 우리를 공격했소!"
담철형이 쥐어짜듯 말했다.
"마황… 총(魔皇塚)의 열쇠?"
철운비의 안색이 재차 일변했다. 그런 그에게 담철형은 힘겹게 전말을 이야
기해 주었다.

한 달 전, 성숙해 서남방의 빙마곡(氷魔谷)이란 곳에서 하나의 무덤이 발견


되었다. 그것이 이른바 마황총(魔皇塚)이었다. 마황총은 얼음의 벽 속에 감
추어져 있었는데 지진으로 무너지면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마황총(魔皇塚)은 수많은 기관장치와 함정으로 방호되어 있어 접근
할 수가 없었다. 마황총에 몰려든 무림인들은 기관함정에 막혀 숫한 사상자
만 낸 채 마황총에서 물러서야만 했다.
그 중에는 유리성궁의 여제자들도 몇 명 있었는데 마황총을 물러나오던 그
녀들은 우연히 하나의 열쇠를 줍게 되었다.

-마황금시(魔皇金匙)!

그것이 마황금시였다. 마황금시의 표면에는 마황총 내부의 기관함정의 구조


가 자세히 새겨져 있었다.
그 마황금시를 얻은 유리성궁의 제자들은 은밀히 그것을 유리부인과 단철영
에게 전했다.
마황금시를 얻은 유리부인 부부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들은 한시라도 빨리
마황총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요란스럽게 수하들을 이끌고 움직이다가는 무림인들의 주목을 받아
시끄럽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극소수 엄선된 정예만을 이끌고 마황총으로
떠나게 되었다.
헌데 그들은 성숙해에 접어드는 순간 뇌정마찰의 고수들에게 습격을 받게
되었다.
중과부적… 숫적인 열세에 밀려 담철형과 유리부인은 둘로 나뉘어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담철형은 마황금시를 지닌 채 단신으로 이곳으로 피해왔다. 그리고 유리부
인과 딸 유리공주(琉璃公主) 마비취(麻翡翠)는 마황금시의 탁본을 지닌 채
계속 마황총 쪽으로 전진했다.
어느 한쪽이라도 뇌정마찰의 포위망을 돌파하면 마황총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그런 담철형을 추격해온 것은 뇌정마찰의 최정예인 백팔뇌룡(百八雷龍)과
뇌정서시 적아라였다. 결국 백팔뇌룡은 담철형의 유리패왕궁(琉璃覇王弓)에
전멸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격전으로 담철형도 회생불능의 중상을 입은 것이다.

"아내와… 딸아이를… 도와… 주시오.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대에게는


…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소!"
담철형이 간절히 말했다. 그의 피에 젖은 손은 철운비의 옷자락을 꽉 움켜
쥐고 있었다. 마치 그가 생명선이라도 된다는 듯이…
철운비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영부인과 영애를 도와드리겠습니다!"
철운비의 말을 들은 담철영의 눈가로 안도의 빛이 스쳤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는 이미 생기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고… 맙소. 그 대가로… 유리… 패왕궁(琉璃覇王弓)과… 호화철환(護花鐵
環)을… 그대에게 주겠소!"
담철형은 억지로 손을 들어올렸다. 그런 그의 손가락에는 하나의 쇠반지(鐵
環)가 끼워져 있었다.

-호화철환(護花鐵環)!

그것이 쇠반지의 이름이었다.


호화철환은 호화지존(護花至尊)을 상징하는 신물이었다. 그것을 지닌 자는
당대 유리성궁의 궁주를 아내로 얻게 된다.
호화지존은 자신이 선택한 후계자에게 그 호화철환을 넘겨줄 수 있는 권리
가 있다. 그것은 오백 년 간 내려온 불문율이었다.
그 옛날 유리성모의 남편이었던 초대 호화지존이 그랬듯이 지금 담철형도
철운비를 다음대 호화지존으로 지목한 것이다. 다만 철운비만이 그것을 모
를 뿐이었다.
철운비는 묵묵히 호화철환을 빼어 자신의 손가락에 끼었다.
"고… 맙네. 자네는… 이제 나 담철형의… 사위…"
담철형은 철운비가 호화철환을 끼는 것을 보며 안심한 표정이 되어 말하다
가 숨이 끊어졌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음성은 너무 미약하여 철운비는 미
처 그 내용을 듣지 못했다.
"편히… 잠드시기를…!"
철운비는 탄식을 하며 명복을 빌었다. 이어 그는 얼음바닥에 구멍을 파서
담철형의 시선을 안장했다. 만년설에 계곡에는 하나의 무덤이 새로 생기게
된 것이다.
철운비는 그 얼음무덤 앞에 앉아 유리패왕궁을 자세히 살폈다.
유리패왕궁(琉璃覇王弓)!
그것은 길이 다섯 자, 금강철모(金剛鐵母)라는 것으로 만들어진 철궁인데
오백 년 간 유리성궁을 지켜온 수호신병(守護神兵)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시윗소리만으로도 한 자 두께의 철벽을 무너뜨리는 위력이 있다고 한다.
지옥혈겸과 함께 환우팔천병(還宇八天兵)에 드는 절대신병이 바로 그것이
다.
(대단히 듬직한 놈이다.)
철운비는 유리패왕궁에 붙은 살점과 핏자국을 닦아내며 미소지었다. 그는
한 눈에 유리패왕궁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 놈은 지옥혈겸에는 없는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그 때문에 잔독신랄한
지옥혈겸보다는 유리패왕궁 쪽이 그의 적성에는 맞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서두르자! 부탁을 받았으니… 최선을 다해 유리부인과 그 딸을 도와 주어
야만 한다.)
철운비는 유리패왕궁을 등에 짊어지고 몸을 일으켰다.
헌데,
"…!"
막 걸음을 옮기려던 그는 다시 발을 멈추어야만 했다. 지옥천존에게 죽은
뇌정문하들의 시체더미, 그 중에서 무엇인가 미약하게 꿈틀거림을 발견한
것이다.
(무형파멸마강(無形破滅魔剛)에 격중되고도 죽지 않은 자가 있다니…)
철운비는 해연히 날아 급히 다가갔다.
(계집… 아닌가?)
철운비는 다시 한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생존자는 바로 뇌정마찰의 암사자, 뇌정서시(雷霆西施) 적아라였다.
적아라는 무형파멸마강에 휘말려 가슴 일부가 으스러진 상태였다. 하지만
몇 개인가 늑골이 부러진 중상이건만 그녀는 즉사하지 않은 것이다.
(상당한 수준의 공력을 지닌 계집이다. 저 지독한 지옥천존의 무형파멸마강
조차 이 계집의 호신강벽을 완전히 허물어뜨리지 못할 정도로…!)
철운비의 눈빛이 흔들렸다.
뇌정서시(雷霆西施) 적아라! 그녀는 어림잡아 육칠 갑자 정도의 내공을 지
니고 있었다. 그 수준은 철운비나 지옥천존의 내공에 비하면 보잘 것없을지
모르나 일반 무림인들에게는 경이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정도였다.
더구나 그녀는 많이 잡아야 이십오 세 전후로밖에 보이지 않는 젊은 여인이
었다.
(뇌정마찰의 제자 같은데… 귀찮게 되었다.)
철운비는 검미를 모았다. 갈 길이 바쁜 그였다. 하지만 죽어가고 있는 뇌정
서시를 그냥 두고 갈 수만도 없었다. 더구나 그녀는 자신과도 한 가닥 인연
이 있는 뇌정일맥(雷霆一脈)의 후예인 것이다.
"별… 도리가 없구나!"
철운비는 교소를 머금으며 뇌정서시 옆으로 앉았다. 그는 모로 쓰러진 뇌정
서시를 바로 눕힌 뒤 살점과 선혈이 엉겨붙은 저고리를 좌우로 벌렸다.
출렁…!
저고리가 벌어지자 한 쌍 거대한 육봉이 기다렸다는 듯이 출렁이며 튀어나
왔다. 피둥피둥한 젖무덤, 우유를 많이 마시고 육식을 주로하는 서역의 계
집인 탓인지 그녀의 몸은 살집이 아주 좋고 탐스러웠다.
(감촉이 꽤나 좋은 계집이다. 한 번 품어보고 싶을 만큼…!)
철운비는 고소하며 뇌정서시의 거궐혈에 장을 붙였다.
우르릉…!
그의 장심에서 우뢰성이 일며 뇌정개벽천강의 강맹한 역도가 그녀의 내부로
흘러들어 갔다. 뇌정개벽철강은 뇌정서시가 연마한 내공과 같은 부류의 것
이다. 그 때문에 그 역도는 쉽사리 뇌정사시의 내공과 융화되어 전신으로
퍼져갔다.
우두두둑! 꽈르르릉!
뇌정개벽천강의 막강한 힘은 순간적으로 그녀의 끊긴 심맥과 경략을 꿰뚫고
타통시켰다. 그 뿐이 아니었다. 그 노도같은 힘은 삽시에 뇌정서시의 생사
현관(生死玄關)까지 박살내 버렸다.
출렁…!
생사현관이 타통되는 충격으로 뇌정서시의 풍만한 몸이 퍼뜩 경련을 일으켰
다.
"휴우… 대충 끝났구나. 이제 죽든지 살든지 문제는 이 계집 자신에게 달린
문제다."
철운비는 손을 떼며 땀을 씻었다.
"깨어나면…내공이 갑자기 몇 단계 증강된 것을 알고 놀라리라!"
철운비는 고소하며 일어섰다. 일시에 상당한 양의 내공을 소모하였으나 그
의 안색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그의 내부에는 미처 내공으로 융해되지 않
은 수많은 영약들의 기운이 가득 고여 있는 상태였다. 그 때문에 그는 내공
의 과다소모로 탈진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지체했다. 어서 서두르자!)
철운비는 몸을 돌리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이어 그는 휘파람을 불어 어
딘가에서 쉬고 있을 수호익룡을 부르려고 했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머… 멈춰라, 중원의 사내놈!"
그의 뒤쪽에서 가냘픈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뇌정서시 적아라, 그녀가 힘겹게 일어나 앉으며 철운비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회복 능력은 철운비의 상상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네… 네놈이 나를 구했느냐?"
돌아보는 철운비를 노려보며 적아라는 이를 바득 갈았다. 중원인에게 도움
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녀를 화나게 만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쯧! 내가 확실히 사람을 잘못 구했군! 이거야 원, 구해준 것에 감사하기는
커녕 오히려 잡아먹을 기세이니…!"
철운비는 흩어진 장발을 쓸어올리며 혀를 찼다.
바로 그 때였다.
"…!"
부르르…
적아라의 풍만한 몸에 갑자기 격렬한 파문이 스쳤다.
그녀가 놀란 것은 두 가지 때문이었다.
먼저 요악하도록 아름다운 철운비의 용모가 그랬다.
그러나 정작 그녀의 숨을 죽이게 만든 것은 철운비의 손목에 걸린 하나의
검붉은 륜(輪)이었다.
뇌정(雷霆)의 무늬가 새겨진 쇠고리…
(뇌정륜(雷霆輪)! 저것은 분명 우리 뇌정일맥(雷霆一脈)의 전설신병(傳說神
兵)인 뇌정신륜(雷霆神輪)이다!)
적아라의 눈꼬리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뇌리는 교
활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당… 당신의 이름은 무어지?"
적아라는 흥분을 누르며 물었다.
철운비는 검미를 찌푸리며 되물었다.
"무엇 때문에 본인의 이름을 알려고 하지?"
적아라는 언뜻 당황했으나 이내 영활하게 대답했다.
"왜냐고? 어쨌든 너는 본녀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 이름이라도 알아야 후일
보답이라도 할 것이 아니냐?"
"보답이라면 벌써 충분히 했어."
철운비는 음흉하게 웃으며 적아라의 젖가슴을 가리켰다.
"그대의 젖가슴은 가히 천하일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어. 그것을 실컷 눈
요기 했으니… 하하! 감사는 오히려 내가 해야겠지!"
"무… 엄한…!"
적아라는 옥용이 새빨개져 황급히 젖가슴을 가렸다.
그런 적아라의 모습에 철운비는 짓궂게 웃으며 한 소리 날카로운 휘파람을
불었다.
구워어어억!
콰콰콰콰!
계곡 후면의 빙벽 뒤에서 수호익룡이 굉음을 내며 떠올랐다.
고오오오!
수호익룡이 일으킨 날개 바람에 얼음가루가 백 장을 치솟아 하늘을 하얗게
가려 버렸다.
"아…!"
수호익룡을 본 적아라는 너무 놀라 안색이 하얘졌다.
놀라는 적아라를 보며 철운비는 질풍같이 수호익룡의 등 위로 날아 올라갔
다.
"하하! 원한다면… 가르쳐 주지. 나는 운비, 철운비라고 한다! 인연이 있다
면… 다시 볼 수 있겠지!"
수호익룡의 등 위로 날아내리며 철운비는 호쾌하게 웃었다.
콰아아아…!
철운비를 태운 수호익룡은 이내 그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남쪽으로 날아
가기 시작했다.
"물론…! 당신은 반드시 나 적아라를 만나게 될 거예요. 뇌정지존(雷霆至
尊)!"
점으로 화해가는 수호익룡을 보며 적아라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뇌정… 지존(雷霆至尊)! 그는 언젠가 나타난다는 우리 뇌정일맥의 전설적
용자(龍者)인 뇌정지존이 틀림없다."
츠-- 으!
그녀는 붉은 눈동자를 형형하게 빛내며 중얼거렸다.
"철… 운비라고 했지? 후훗! 반드시… 당신을 내것으로 만들고 만다. 우리
뇌정일맥을 그 옛날 뇌정신문(雷霆神門)의 위대했던 시대같이 중흥시키기
위해서…"
적아라의 눈빛이 아주 강해졌다.
"후후! 마황금시는 못 얻었으나 장차 중요한 것을 얻을 열쇠를 얻게 되었
다."
적아라는 암코양이같이 눈을 번뜩였다. 그녀는 혀로 붉은 입술을 핥아 축이
며 수호익룡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하늘끝까지라도 쫓아가겠어! 호호! 당신을 나 적아라의 포로로 만들기 위
해서라면… 귀여운 뇌정지존(雷霆至尊) 나으리!"
적아라는 깔깔 웃으며 몸을 날렸다.
피-- 이잉!
그녀의 신형은 마치 한 줄기 붉은 뇌전같이 남쪽으로 폭사되어 멀어져 갔
다.
스으… 스으…!
겁풍이 휩쓸고 지나간 계곡에 다시 적막이 찾아들었다. 널려진 시체 위로는
하얀 얼음가루가 조화(弔花)같이 흩뿌려지고…

성숙해(星宿海) 남단의 어느 빙원(氷原)!


지금 그 얼음 벌판 위에서 기괴한 장면이 벌어지고 있었다. 여인! 한 명의
여인이 얼음 위에 사지를 벌리고 누워 있었다.
나이는 사십 전후… 나이에 비해 젊게 보이는 미부(美婦)인데 아주 기품있
고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마치 유리(琉璃)의 정형인 듯 깨끗하고
단아한 인상의 중년여인이었다.
한데, 그녀는 지금 가장 부끄러운 모습으로 얼음 위에 사지를 벌린 채 누워
있었다. 그녀의 사지는 활짝 벌려진 채 얼음 위에 쇠기둥에 묶여 있었다.
그런 여인의 몸에는 실오기 하나 걸쳐져 있지 않았다. 옷가지를 걸치지 않
은 풍만한 적나라하게 드러난 중년여인의 나신은 다만 보는 것만으로도 사
내를 뇌살시키기에 충분했다.
모양 좋고 풍만한 사발을 엎어 놓은 듯한 유방, 잘록한 허리와 기름진 하복
부…
그 아래로 방초무성한 계곡이 자리하고 있는데 지금 여인의 허벅지는 활짝
벌려져 있어 그곳의 은밀한 부부까지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오묘한 홈이
깊숙이 파인 여체의 비밀스런 부위가,
"흐흐…!"
지금 여인의 그곳을 훑어보며 음흉한 웃음을 흘리는 자가 있었다.
여인의 발치에는 한 명 적포를 걸친 청년이 팔짱을 낀 채 우뚝 서 있었다.
나이는 이십대 초반 정도, 당당한 체격을 지닌 자인데 머릿결에 은은히 붉
은 기운이 떠돌고 있었다.
"흐흣! 아직도 견딜 만한가, 마옥령?"
적포청년이 음잔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헌데,

-마옥령(魔玉玲)!

마옥령이라니… 지금 전라의 몸으로 누워 있는 미부가 바로 유리부인 마옥


령이란 말인가?
오대무벌 중 한 가문인 유리성궁(琉璃聖宮)의 지존! 그 고귀한 여인이 지금
가장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누워 있는 것이다.
"…!"
적포청년의 말에 유리부인의 나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뜨며 적포청년을 노려보았다.
"열화… 마룡(熱火魔龍)! 이 원한은 죽어 원귀가 되더라도 반드시 갚고 말
겠다."
마옥령은 이를 바득 갈며 신음을 흘렸다. 내상으로 종잇장같이 파리해진 그
녀의 두 볼 위로 원한과 치욕이 뒤섞인 눈물이 굴러내렸다.

-열화마룡(熱火魔龍)!

이것이 적포청년의 이름이었다. 그 자는 뇌정서시(雷霆西施) 적아라와 함께


서천쌍뢰(西天雙雷)라 불리는 뇌정마찰의 신예였다.
호화지존 담철형과 헤어진 유리부인은 열화마룡이 이끄는 천여 명의 강적들
과 고군분투하다가 제압당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열화마룡을 저지하는 사이에 그녀의 딸인 유리공주(琉璃公
主) 마비취(瑪翡翠)는 뇌정마찰의 포위망 밖으로 벗어난 상태였다.
"마옥령, 이제 그만 마비취가 어디 숨어 있는지 말하는 것이 어떤가? 본좌
도 어머니 같은 당신을 더 이상 괴롭히고 싶지는 않으니까!"
열화마룡이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짐짓 진중하게 말하고 있으나 그 자의
눈빛은 탐욕스럽게 마옥령의 나신을 쓸어보고 있었다.
마옥령은 그 자의 눈길에 옥용을 치욕으로 빨갛게 물들이며 이를 갈았다.
"나를 죽이더라도 비취가 숨어 있는 곳을 알 생각은 하지 말아라!"
"그래?"
열화마룡의 눈빛이 음흉하게 번뜩거렸다.
"흐흣! 끝내 고집을 부린다면… 내게도 생각이 있다!"
열화마룡은 음잔하게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뒤에는 십여 명의 장한
들이 서서 욕정으로 번들거리는 눈으로 마옥령의 벌거벗은 몸을 노려보고
있었다.
열화마룡은 그들을 향해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십흉(十兇)! 고귀한 유리지존께서 외로우신 것 같으니 상대해 드려라!"
열화마룡이 잔인한 표정으로 일갈했다.
"무… 무슨 짓을 할 생각이냐?"
마옥령의 안색이 밀랍같이 변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십흉(十兇)이란 흉한들이 침을 질질 흘리며 다가섰다. 그
자들의 눈은 욕정으로 벌개져 있고 하체의 일부가 불끈 일어서 있는 것이
마옥령의 눈에 들어왔다.
"흐흣! 곧 내게 감사하게 될 것이다, 마옥령. 그들 열 명에게 교대로 안기
는 기쁨을 맛보게 될 테니까!"
열화마룡은 음소하며 흉한들에게 명령했다.
"시작해라 십흉!"
순간 흉한들은 굶주린 짐승같이 일시에 마옥령에게 덮쳐들었다.
"아악!"
마옥령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졌다. 그녀의 벌거벗겨진 몸은 삽
시에 열 명의 흉한들에게 짓눌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흐흐흐!"
"크녠! 소종사님 덕분에 오대무벌의 여가주 되는 계집을 맛보게 되다니 운
이 좋군!"
흉한들은 광소를 터뜨리며 마옥령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아악! 이… 이 짐슨 같은…!"
사내들에게 주물리키고 유린당하며 마옥령은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그 사이 한 사내가 마옥령의 하복부로 올라탔다. 그 자는 시커먼 손으로 마
옥령의 은밀한 부분을 거칠게 개방했다.
"흐흐…!"
그리고는 자신의 거대한 시체를 벌려진 여체의 꽃잎 사이로 가져갔다.
"흐윽!"
불덩이같이 뜨거운 사내의 실체가 자신의 가장 예민하고 보드라운 살점에
닿음을 느끼며 마옥령은 전율했다.
(아아! 끝장이다. 능욕을 당하기 전에… 자진하는 수밖에 없다!)
마옥령은 눈물을 흘리며 혀를 깨물 작정을 했다. 그런 그녀의 허벅지를 안
고 사내는 거칠게 하체를 내리눌러왔다. 사내의 흉기가 하체로 밀려 들어옴
을 느끼며 마옥령은 전력을 다해 혀를 깨물려고 했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피-- 이잉!
돌연 아주 먼 곳에서 한 소리 날카로운 활시위 소리가 들렸다.
"케-- 에엑!"
퍼-- 어억!
순간 막 마옥령의 정조를 허물어뜨리려던 사내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뒤
로 벌렁 넘어졌다.
역겨운 피비린내, 그 자의 두개골이 무엇인가에 강타당하여 박살이 나 있었
다.
어디선가 한 줄기 무형의 강기가 날아들어 그 자의 두개골을 바스러뜨린 것
이다.
"어억! 조심해랏!"
"어떤 놈이냐?"
열화마룡과 아홉 명의 흉한들의 안색이 일변하여 사방을 돌아보았다.
문득 열화마룡의 눈이 좌측의 빙산(氷山)으로 향했다. 일천 장 저편에 자리
한 하나의 얼음산 위에 한 명의 청년이 옷깃을 펄럭이며 서 있는데 그 청년
의 한 손에는 한 자루 철궁(鐵弓)이 쥐어져 있었다.
그 청년은 막 그 철궁의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유리… 패왕궁(琉璃覇王弓)?"
열화마룡의 안색이 홱 변했고…
피--이잉!
그 순간 예의 비단폭을 찢는 듯한 활시위 소리가 메마른 성숙해의 하늘을
뒤흔들었다.
"케-- 에엑!"
퍼퍼퍽!
직후 한 명 흉한이 두개골이 박살나 뒤로 벌렁 넘어졌다.
"조… 조심해랏!"
열화마룡이 다급히 경호성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의 음성은 이내 흉한들의
처절한 비명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피-- 피핑!
"케-- 에엑!"
"크아아악!"
부서져 날아가는 두개골의 파편… 두부같이 으스러져 흩어지는 뇌수들… 삽
시에 방원은 아수라지옥으로 변해갔다.
"이… 이럴 수가… 이런 엉터리 같은…"
열화마룡은 실성한 듯이 중얼거렸다. 너무 놀란 그는 예의 청년이 사신(死
神)같이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네… 놈이 열화마룡(熱火魔龍)이렷다!"
철운비의 무서운 일갈이 하늘과 땅을 뒤흔들었다.
열화마룡은 그제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그 사이에 이미 철운비는 그 자의 이 장 앞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위-- 이잉!
유리패왕궁이 맹렬히 열화마룡의 정수리를 뽀개어 온 것도 거의 같은 순간
이었다.
"케-- 에엑!"
빠가각…! 퍼-- 어억!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열화마룡의 머리가 산산이 으스러져 날아갔다.
쿠--우웅!
머리통이 날아간 그 자의 시체는 철운비가 유리패왕을 거두어 들인 후에야
서서히 뒤로 넘어져 버렸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마다하지 않았
던 젊은 효웅의 어이없는 최후였다.
"…!"
유리부인 마옥령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련의 도살극을 넋이 나가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사지를 활짝 개방한 자세로 묶여 있는 그녀의 눈으로 다음 순간 격
렬한 파문이 일었다. 마신(魔神)같이 돌변한 철운비의 손에 들린 것은 그녀
자신의 남편이고 실질적인 유리성궁의 지존, 담철형의 독문병기가 아닌가?
그녀는 유리패왕궁을 보는 순간 모든 정황을 깨닫게 되었다.
"그… 그이가 변을 당하다니…!"
마옥령의 입에서 처절한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그런 그녀의 몸은 다음 순간
축 늘어지고 말았다. 감당 못할 충격과 슬픔으로 혼절해 버린 것이다.
"휴…!"
철운비는 낮게 신음하며 마옥형에게 다가섰다. 적나라하게 벌려진 슬픈 여
체… 철운비는 슬쩍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겉옷을 벗어 마옥령의 나신을 덮
어 주었다.
구우우…!
그런 철운비의 머리 위로 수호익룡이 선풍을 끌며 날아내렸다.

-빙마곡(氷魔谷)!

그것은 성숙해의 서남단, 아스라히 대설산(大雪山)의 산 그림자가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만년빙하(萬年氷河)의 계곡인 빙마곡은 온통 수천
장 두께의 얼음과 빙하로 뒤덮여 있었다.
그 빙마곡(氷魔谷)의 끝부분, 천장빙벽이 허물어져 내려 있는 틈으로 하나
의 동굴이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마황… 총(魔皇塚)!>

동굴 입구에는 대전체(大篆體)의 글이 깊숙이 음각되어 있었다.


천 년 이전에 새겨진 글인데 자세히 보면 예의 동굴로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인공에 의해 파여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마황(魔皇)의 무덤(塚)!
그렇다. 이곳이야말로 불사성황(不死聖皇)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마황총이었
다.
헌데,
스으… 스으…!
핏빛 황혼이 드리운 중에 마황총 주위에는 수많은 시신이 나뒹굴고 있었다.
서역과 중원의 복장이 뒤섞인 시신들… 그들은 한결같이 심장 부위가 으스
러져 죽어 있었다.
시신들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선혈은 역겨운 비린내를 풍기며 천년빙하를 물
들이고 있었다.

화라라락!
저녁 무렵의 차가운 삭풍에 옷깃을 날리며 한 쌍의 남녀가 마황총의 입구에
서 있었다. 그들은 다름아닌 철운비와 유리부인 마옥령이었다.
유리부인 마옥령은 철운비가 벗어 준 장포로 나신을 가린 채 서 있었다. 큼
직한 철운비의 장포에 푹 싸여 있는 마옥령은 슬픔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시
선으로 철운비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위에게 부끄러운 곳까지 전부 보이고 말다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
가?)
마옥령은 소리없이 한숨을 쉬며 얼굴을 붉혔다. 슬픔에 잠긴 그녀의 눈은
철운비의 손가락에 끼어진 호화철환(護花鐵環)을 보고 있었다.
호화철환이 그의 손에 끼어져 있음은 철운비가 마옥령 자신의 사위임을 의
미했다. 비록 당사자인 철운비는 모르고 있지만…
그런 미래의 사위에게 마옥령은 내밀한 금단의 부위까지 보이고 만 것이었
다.
(이들을 죽인 자는… 지옥천존이다.)
그때 철운비는 안색을 침중하게 굳히며 마황총 입구에 널려진 시신들을 조
사하고 있었다. 그는 한눈에 그 시신들이 지옥천존의 손에 죽은 것임을 알
아차렸다.
하지만 그는 마옥령이 걱정할까보아 그런 사실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는… 벌써 저 안에 들어가 있다. 이미 유리공주 마비취도 마황금시의 탁
본을 믿고 마황총 안으로 뛰어든 후일 것이다!)
철운비는 눈을 번득이며 마황총의 안쪽을 바라보았다.
"궁주께서는… 수호익룡(守護翼龍)과 함께 밖에서 기다리십시오. 마황총에
는 저 혼자들어가 따님을 구해 오겠습니다."
철운비는 마황총에 시선을 던진 채 침중하게 말했다.
"…!"
마옥령은 함께 가겠다고 말하려다가 소리없이 한숨을 쉬며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함께 들어가 보았자 철운비에게 부담만 될 것임을 아는 때문이었다.
"조심… 하세요, 제발!"
마옥령은 눈으로 철운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음성에는 미래의 사위
에 대한 애정과 우려가 가득 실려 있었다.
그것을 느끼고 철운비는 퍼뜩 돌아보았다.
(이 분은 마치 내 어머니라도 되신 듯하다.)
철운비는 고소를 지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그녀의 사위가 된 사실을 모
르고 있었다.
"하하…! 걱정마십시오! 아수라(阿修羅)라도 저를 해치지는 못하니까!"
철운비는 껄껄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유리패왕궁을 불끈 움켜쥔 채 마황총
의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그의 훤칠한 모습은 이내 마황총 내부로 사라져
갔다.
"…!"
마옥령은 철운비가 사라진 마황총을 근심 서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휴…!"
이윽고 그녀는 나직이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마황총의 깊은 곳, 하나의 철문(鐵門)이 육중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마황지문(魔皇之門).>

철문에는 그런 내용의 글이 대전체(大篆體)로 쓰여 있었다.


마황의 문(魔皇之門)--!
그 글은 남해의 용형마도에 태양천마(太陽天魔) 숙야염이 적어 넣은 것과
똑같은 내용의 글이었다.
내용뿐 아니라 자세히 보면 그 필체까지도 흡사했다.
과연 서로 다른 장소에 쓰여진 똑같은 필체의 글은 다만 우연일까?
"…!"
"…!"
마황지문 앞에 두 명의 인물이 서 있었다. 얇은 나삼만을 걸친 요사스런 분
위기의 미부, 그리고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검은 천으로 두른 장한… 그들
은 바로 지옥천존과 나찰관음이었다.
지옥천존은 뇌정서시에게서 탈취한 마황금시(魔皇金匙)로 이곳까지 다다른
것이다.
츠-- 읏!
지옥천존의 시퍼런 마안은 지금 마황지문의 한 옆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곳
에는 보다 작은 필체로 몇 자의 글이 적혀 있었다.
그 글의 내용은 이러했다.

<마황의 문(魔皇之門)에 들 수 있는 자는 뇌왕(雷王)과 빙모(氷母)의 후예


뿐이다. 그대가 양극쌍려(兩極雙呂)와 관계가 없다면 마황과는 인연이 없으
니 돌아갈 것을 권한다.>

그 글은 천 년 이전에 쓰여진 것인데 그 내용이 지옥천존을 노하게 만들고


있었다.
"흥! 운명조차 본좌를 어쩌지 못하거늘… 인연 운운하며 물러가라고 하다니
…!"
빠직!
지옥천존의 두 눈에서 지독한 안광이 작렬했다. 그의 눈빛은 점점 무서워져
가고 있지만 거기에 실린 기도는 그 전만 못했다.
편협해졌다고나 할까? 그것은 그의 심성이 아수심결(阿修心訣)에 침습당해
점점 황폐해져 가는 때문이다. 몇 구절의 낡은 고문을 보고 화를 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불사… 성황! 당신이 얼마나 잘났기에 이리도 오만한지 한 번 만나보리라!
"
쩌러렁…!
지옥천존의 손 끝에서 벼락치듯 파멸강기가 일어났다. 그는 손을 들어 마황
지문을 겨누었다.
(그러시면… 아니됩니다!)
보고 있던 나찰관음의 눈빛이 안타깝게 변했다.
하지만 그녀는 감히 지옥천존을 저지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은연중 지옥천
존을 사모하고 있으나 지금의 지옥천존은 그녀에게까지 두려움을 줄 정도로
편협신랄하게 변해 있는 것이다.
우르릉…!
마황지문이라는 만년한철의 문이 찢어질 듯 뒤틀렸다. 파멸마강을 실은 지
옥천존의 손이 점차 그것을 향해 밀려간 때문이다. 그대로 간다면 마황지문
은 이내 종잇장같이 찢겨나갈 것이다.
헌데…
번-- 쩍!
마황지문을 노려보던 지옥천존의 눈길이 돌연 천 가닥의 뇌전이 작렬하는
듯한 안광을 토해 버렸다.
"어떤… 쥐새끼냐?"
그의 입에서 벽력성 같은 폭갈이 터지고…
꽈르르릉…
마황지문을 겨누던 그의 오른손이 맹렬히 좌측의 석벽을 후려쳤다. 나찰관
음은 미처 듣지 못했으나 지옥천존의 귀에는 한 가닥 미약한 숨결이 느껴졌
다.
콰-- 콰쾅! 우르르-!
굉렬한 폭음이 일며 좌측 석벽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무너지는 석벽의
뒤쪽은 어두컴컴한 미로였다.
헌데,
"흐--윽!"
화드득…!
그 석벽 뒤쪽에서 하나의 가냘픈 인영이 선혈을 흩뿌리며 퉁겨져 나가는 것
이 두 사람의 눈에 언뜻 들어왔다.

∑ 제 32 장 고금제일마(古今第一魔)의 무덤

벼락같이 뒤쪽으로 퉁겨져 나간 그 왜영은 한 명의 소녀였다.


나이는 십 칠팔 세 정도인데 투명하도록 희디흰 피부에 조각 같은 미모를
지닌 소녀였다.
마치 맑고 깨끗한 유리의 정령을 연상케 하는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마음마
저 투명하게 물들일 듯했다.
후두둑…!
그 소녀는 피투성이가 되어 십여 장 뒤쪽으로 나뒹굴었다. 그녀가 걸친 의
복은 갈가리 찢겨졌으며 고운 피부는 끔찍하게도 쩍쩍 갈라졌다.
지옥천존의 무형파멸마강(無形破滅魔剛)이 순간적으로 그녀의 모든 호신지
력을 으스러뜨린 것이었다.
바닥으로 나뒹군 소녀를 본 순간,
"유리공주 마비취?"
나찰관음은 낮은 신음을 발하며 봉목을 치떴다.
그때,
"흐흣! 감히 본좌를 엿보다니… 살고 싶지 않았던 게로군!"
스--읏!
지옥천존이 두 눈을 잔혹하게 번뜩이며 소녀에게로 날아갔다.

-유리공주(琉璃公主) 마비취!
이것이 쓰러진 소녀의 이름이었다. 다음대 유리성궁의 궁주가 될 청해제일
미인(靑海第一美人)이 그녀였다.

"인간도… 아니군! 귀식대법을 펼쳤는데도 알아차리다니…"


유리공주 마비취는 자신에게로 다가서는 지옥천존을 바라보며 울컥 피를 토
해냈다. 그녀의 아름다운 봉목은 온통 공포와 절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지옥천존은 전율적인 마안을 번뜩이며 마비취를 내려다 보았다.
"죽음을 자초했으니 본좌를 원망치마라!"
쩍!
그는 우수를 번쩍 쳐들어 마비취를 내려치려 했다. 위기의 순간이었다. 헌
데 바로 그 때였다.
"안 되오!"
돌연 어둠 속에서 사나운 일갈이 터졌다.
동시에 한 가닥 시퍼런 뇌전(雷電)이 번뜩 작렬하며 마비취를 후려치던 지
옥천존을 강타했다.
꽈르릉… 꾸-- 꿍!
다음 순간 굉렬한 폭음과 함께 막강한 잠력의 회오리가 장내를 휩쓸었다.
"악…"
그 가공할 잠력의 회오리에 휘말려 마비취는 애처로운 비명을 지르며 나뒹
굴었다.
"읏…"
쿠-- 웅!
그와 함께 지옥천존은 신형을 크게 흔들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의
소맷자락은 시커멓게 타 있었다.
그 모습에 나찰관음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저럴 수가…! 천존을 밀어내는 자가 있다니…!)
화라락… 피-- 이잉!
그때 어둠 속에서 하나의 인영이 질풍같이 날아들어 쓰러진 마비취를 안아
들었다.
"철… 운비!"
순간 지옥천존과 나찰관음의 입에서 동시에 경악성이 터졌다. 나타난 인물,
그는 바로 철운비였던 것이다.
철운비는 마비취를 안아든 채 괴로운 표정으로 힐끗 지옥천존을 돌아보았
다.
이어 그는 다시 몸을 날리려 했다.
"놈! 가려거든 그 계집을 놓고 가랏!"
꽈-- 릉!
그 순간 지옥천존이 폭갈을 터뜨리며 벼락같이 일장을 내쳤다.
"웃!"
철운비는 급히 쥐고 있던 유리패왕궁을 휘둘러 그에 맞섰다.
터-- 엉!
묵직한 금속성이 귓전을 뒤흔들었다. 그와 함께 철운비와 지옥천존은 다같
이 한 걸음 휘청 물러섰다.
"크흣… 강해… 졌구나! 어린 놈!"
빠직!
지옥천존의 두 눈에서 무서운 살광이 푹출했다. 두 번씩이나 철운비에게 밀
리자 그의 내부에 잠재된 마성(魔性)이 폭발한 것이었다.
"흐흣! 좋아! 고독패왕이 너를 얼마나 잘 가르쳤는지 보자!"
지옥천존은 음산하게 일갈하며 성큼 철운비에게로 다가섰다.
츠으… 츠으…
그런 그의 몸에서 시퍼런 노을이 불꽃같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것은 그가 지옥명공강(地獄冥空剛)을 극한으로 끌어올렸음을 보여주는 그
모습에 철운비는 흠칫 놀랐다.
(지옥명공강까지 알고 있다니…!)
이어 그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침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천존(天尊)! 나는… 귀하와 싸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황혜(皇慧)누님
이…!"
"시… 끄럽다!"
지옥천존은 대갈을 터뜨리며 철운비의 말을 막았다.
"본좌는… 지금 작정했다! 그 아이를 울리더라도… 네놈을 죽이겠다고!"
꽈르릉…!
그의 몸 주위로 일어나던 겁화파멸강흔(겁火破滅剛痕)이 배로 증폭되며 가
공할 우뢰성을 일으켰다. 그 속에 번뜩이는 지옥천존의 눈빛은 이미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철운비는 소름이 오싹 끼쳤다.
(마…인지경(魔人之境)에 빠졌다! 그는 정말 나를 죽이려 한다!)
그는 긴장하며 급급히 전 내공을 끌어모았다.
"크하핫! 아수파천황(阿修破天荒)!"
직후 지옥천존의 입에서 쩌렁한 한 소리 폭갈이 터져나왔다.
푸-- 하악! 빠지직!
그의 몸에서 피어오른 파멸강혼이 폭발하듯 철운비의 전면으로 작렬했다.
그 기세는 무형파멸마강보다 무서웠다.
"우웃!"
철운비는 찬바람을 들이키며 황급히 마모천둔을 들어 전면을 방호했다.
꽈-- 꽝! 쩌저정…!
직후 고막이 터지는 듯한 가공할 굉음이 들썩 사위를 뒤흔들었다.
화드득… 우두둑…!
동시에 사십 장 내부의 모든 것이 폭음과 함께 박살나 날아갔다. 주위의 석
벽들은 종이가 찢기듯 일시에 무너져 내렸다.
"…!"
나찰관음은 사력을 다해 호신강기를 둘러 잠력의 파동을 막아내며 전면을
주시했다.
우두둑…!
무너져 내리는 바윗덩이 속,
"…!"
지옥천존이 아수라같은 형상으로 우뚝 서 있었다. 하나 그 앞 어디에도 철
운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 이야! 무사히 달아난 모양이구나!)
나찰관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이 년 전이었던가?

-당신을 내 첩으로 만들겠어!

그런 당돌한 말과 함께 멀어지던 어린 철운비의 모습을 나찰관음은 잊지 못


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이후, 그녀는 한시도 철운비를 잊은 적이 없었
다.
그런 철운비가 무사한 것을 알자 나찰관음은 안도감을 느낀 것이었다.
"으… 음!"
지옥천존은 으르렁대는 듯한 신음과 함께 천천히 돌아섰다.
(흑…!)
헌데 그 순간 나찰관음은 안색이 하얗게 변해 비칠 뒤로 물러섰다.
지옥천존의 얼굴을 가렸던 몽면이 방금의 충돌로 인해 찢겨나가 있었다. 찢
어진 몽면 아래로 드러난 지옥천존의 얼굴, 그것을 본 나찰관음은 몸서리를
쳤다. 지옥천존의 안색은 온통 시퍼렇게 물들어 있어 마치 하나의 쇳조각을
보는 듯했다.
츠… 으!
거기에 두 눈은 전율적인 마광으로 쉴새없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아! 끔찍
한 모습이었다. 그것은 도저히 인간의 모습이라 할 수 없는 공포스러운 것
이었다.
나찰관음의 놀라는 모습을 본 지옥천존은 문득 섬뜩한 얼굴에 한줄기 쓸쓸
한 미소가 흘렀다.
"내… 모습이… 보기 흉한 모양 이구나. 관음!"
"흉… 하지는 않아요. 다만… 평범하지 않을 뿐…!"
나찰관음은 급히 고개를 숙이며 더듬거렸다.
그 말에 지옥천존은 고소를 지었다.
"위로 해줄… 필요없다! 마성이 급격히 강해져 나의 얼굴뿐 아니라 마음까
지도 흉험해지고 있다."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방금… 나는 질투에 못 이겨… 나의 사위될 아이조차 죽이려 했다."
그의 말에 나찰관음은 흠칫했다.
"사위라면… 설마 그 어린아이가… 바로…!"
지옥천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가면… 나는 나의 뜻을 이루기 전에 그 옛날 아수마황(阿修魔皇)같
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네게 한 가지 부탁을 해야겠다."
"…!"
그는 가래 끓는 듯한 음성으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만일… 내가… 완전히 이성을 잃어 마인(魔人)이 된다면… 나를 죽여라.
네게 맡긴 열 알의 벽력굉천뢰라면… 나를 죽이기에 충분할 것이다."
"천… 존!"
나찰관음의 옥용이 하얗게 질렸다.
지옥천존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어 그는 돌아섰다.
"돌아… 가자! 이 마황총(魔皇塚)이란 곳도… 결국 나와는 인연이 없는 듯
하구나."
말을 마침과 함께 그는 묵중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따랑…!
문득 그의 손에서 하나의 황금열쇠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쇳소리를
냈다.
마황금시! 그것은 바로 마황금시였다.
"…!"
나찰관음은 바닥에 떨어진 나황금시를 바라보며 소리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그녀도 총총히 걸음을 옮겨 지옥천존을 뒤따라 갔다.
이내 두 사람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 분은… 점점 더 무서워져 가고 있다."


문득 어둠 속에서 한 줄기 괴로운 신음이 들렸다.
뚜벅…!
이어 어둠속으로 하나의 인영이 나타났다.
철운비 그였다. 그는 두 팔로 마비취를 안고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한데, 그의 모습은 실로 말이 아니었다. 의복은 갈가리 찢겨 있었으며 입가
에는 선혈까지 비치고 있었다. 방금 지옥천존과의 충돌에서 가볍지 않은 내
상을 입은 것이었다.
지옥천존의 마지막 일격은 아주 무서웠다. 그것은 흡혈강시가 된 저 아수마
황만큼 강했다.
철운비는 걸음을 옮기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분이 왜 지옥천존(地獄天尊)이 되었는지 이제는 이해가 간다. 하지만…
결국 그 분이 가는 길은 파멸로 향한 길이다.)
그는 지옥천존, 아니 벽우뢰가 왜 무림을 피로 씻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벽우뢰는 철저한 악인(惡人)으로서 인식될 작정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
서 자신의 딸인 벽황혜의 검에 쓰러질 작정이었다. 그렇게 되면 벽황혜는
무림을 구한 은인이 될 것이고 몰락했던 운중(雲中) 폭풍성(暴風城)은 불같
이 되살아날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는 철운비는 마음이 천근같이 무거웠다.
(그렇게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무슨 일이 있든 그 분을 막아야 한다.)
그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때 철운비의 앞에 문득 하나의 문이 나타났다. 일견하기에는 별다른 특징
이 없이 보이는 석문(石門)이었다.
스으… 스으…
하지만 그 문의 안쪽에서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배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기운은 지극히 강대하여 철운비조차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철운비는 내심 신음을 발했다.
(저 안에 무엇이 있기에 이런 기세가 흘러나오는 것일까? 설마… 이 안에
불사성황, 그분의 유해라도 있단 말인가?)
그는 검미를 모으며 전면의 석문을 바라보았다. 이어 그는 한 차례 심호흡
을 한 후 전면의 석문을 밀었다.
그긍…
의외로 석문은 쉽사리 열렸다. 철운비는 열린 석문 사이로 조심스럽게 들어
섰다.
(억!)
순간 그는 질겁하며 몸이 굳어졌다. 그의 눈은 온통 놀라움과 기쁨으로 가
득차며 전면을 주시했다.

그곳은 한 칸의 석실이었다.
별로 크지 않은 장방형의 그 석실의 중앙에는 하나의 거대한 향로(香爐)가
하나 놓여져 있었다.
높이 이 장에 가까운 그 거대한 향로는 철운비가 전에 본 적이 있는 마황혈
정(魔皇血鼎)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다만 크기가 더 크고 그 전면에 새겨진
모양이 좀더 복잡할 뿐이었다.
한데 그 향로의 앞에는 한 명의 여인이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은 채 마황혈
정의 모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갈하고 짧은 머리카락에 만년혈만의 껍질
로 만든 붉은 장포를 걸친 미소부. 그녀는 하늘 아래 오직 철운비만이 아는
여인이었다.
"여… 제(女帝)!"
철운비는 놀라움과 경이가 섞인 신음을 발하며 성큼 여인의 옆으로 다가섰
다.

-잠마여제(潛魔女帝) 궁비연!
놀랍게도 여인은 바로 천 년 만에 부활한 잠마여제 궁비연이었다. 한데, 남
해 절정마도에 있어야 할 그녀가 어떻게 이 마황총에 있는 것일까?
"이제야… 왔구나! 운비(雲飛)!"
문득 향로 앞에 앉아 있던 궁비연이 빙긋 웃으며 철운비를 돌아보았다.
"이게 어찌된 일이 십니까? 남해에 계신 줄 알았는데…!"
철운비는 마비취를 내려 놓고 반갑게 궁비연의 섬섬옥수를 움켜쥐었다.
그말에 궁비연은 문득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불사성황의 아내이셨던 잠후의 후예임을… 잊었느냐? 나는… 네게
성황조사님의 마지막 절기를 전해 주려고 이 마황총을 여는 불경을 저질렀
단다."
그녀는 전면의 거대한 향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순간 철운비는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마황총을… 연 것이 여제누님이셨습니까?"
그렇다. 세인들은 지진으로 빙마곡(氷魔谷)의 천년빙벽이 무너져 마황총이
나타난 줄 알고 있으나 사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잠마여제 궁비연!

그녀는 저 불사성황의 아내였던 잠후의 삼대손이었다. 당연히 그녀는 이곳


에 불사성황의 무덤인 마황총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절정마도에 들렸다가 중원에 들어온 궁비연은 자신의 정인인 철운비에게 많
은 강적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철운비를 위해 마황총을 발
굴할 작정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무지막지한 내공으로 천년빙벽을 깨고 마황총에 들어와 지
금까지 철운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눈 앞의 거대한 향로를 살펴보던 철운비는 일순 놀라운 눈빛을 지었다.
(이것은… 마황혈정을 확대시킨 것이다.)
거대한 향로는 진짜 마황혈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크기가 클 뿐 아
니라 그 중의 구결과 문양까지도 좀더 자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철운비의 두 눈이 경이와 놀라움으로 크게 떠졌다.
(불사… 초연신강(不死超然神剛!))
그는 마황혈정에서 한 가지 초극신공구결을 읽어내며 신음을 발했다.

-불사초연신강(不死超然神剛)!

그것은 철운비가 용형마도에서 언뜻 영감으로 보았던 바로 그것이었다. 이


불사초연신강이야말로 불사성황(不死聖皇)의 모든 것이 담긴 최후최강의 초
절기라고 할 수 있었다.
궁비연은 경이의 표정을 짓고 있는 철운비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시간은 많으니 서둘지 마라! 그보다 이리와 보거라."
그녀는 철운비를 끌고 마황혈정의 뒤로 돌아갔다.
"엇!"
순간 마황혈정을 따라 돌아간 철운비는 재차 놀라움의 탄성을 발했다.
마황혈정의 뒤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먼저 벽 쪽에 하나의 포단(蒲鍛)이 놓여 있었다. 그 포단은 무엇으로 만들
었는지 일천 수백 년이 지났건만 반들반들하게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포단의 중앙에는 방금까지도 누가 앉아 있었던 듯 움푹 파인 흔적이 나 있
었다.
하나 철운비를 놀라게 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포단 앞에 한 명의 여인이
꿇어 엎드린 자세로 화석(化石)이 되어 있었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듯 지극
히 차가운 인상의 미인이었다.
그녀를 본 순간 철운비는 언뜻 떠오르는 것이 있어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빙하… 서시(氷河西施) 설옥빈!"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궁비연은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녀가 바로 나의 천 년 전 적수였던 빙하서시였는데… 결국 대설
산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었구나."
"…!"
철운비는 말없이 궁비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빙하서시(氷河西施) 설옥빈,

그녀는 태양천마 숙양염과 잠마여제 궁비연을 쓰러뜨리는 데는 성공했다.


하나 그녀는 마황혈정(魔皇血鼎)을 얻지 못했다. 그 뿐 아니라, 그녀는 태
양천마 숙야염이 내친 뇌정개벽천강에 심각한 내상까지 입었다.
빙하서시는 사력을 다해 대설산의 빙하천궁(氷河天宮)으로 날아갔다. 하지
만 그녀는 미처 대설산의 빙하천궁에 이르지 못하고 이곳 성숙해에서 죽음
을 맞게 된 것이었다.
죽기 직전 그녀는 이곳에 마황종이 있음을 알고 그곳으로 들어와 죽음을 맞
았다.
빙하서시가 부복하고 있는 포단은 바로 불사성황의 유체가 놓여 있던 것이
었다. 하지만 불사성황은 우화등선한 듯 시체는 보이지 않고 포단만 남아
있었다.
빙하서시가 꿇어엎드린 채 죽어 있는 것은 제자된 도리로 조사의 무덤에 난
입한 죄를 빌기 위해서인 듯했다.
궁비연은 말을 마치며 문득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누구도 승자가 되지 못했어. 숙야염이나… 그녀도…!"
하나, 철운비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승자는… 누님이십니다. 당신으로 인해 불사마종(不死魔宗)의 맥이 이어지
게 되었으니…!)
그는 궁비연의 씁쓸한 옆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문득 궁비연은 그런 철운비의 시선을 느끼며 살짝 옥용을 붉혔다.
"너는… 불사지존(不死至尊)이 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잠후의 후예인…
나 궁비연의 몸을 가진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빨갛게 상기된 옥용으로 철운비를 주시하며 말했다.
"역대 잠후는 불사지존(不死至尊)에게만 몸을 허락한다. 너는… 네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나를 위해서라도 불사지존이 되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여제(女帝)! 아니… 잠후누님!"
철운비는 싱긋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궁비연은 그런 철운비의 시선에 고개를 푹 떨구었다. 이어 그녀는 총총히
혼절한 마비취 쪽으로 다가갔다.
"마침… 이 아이도 잘 데려왔다. 이 아이에게 빙모일맥(氷母一脈)을 잇게
하면… 설옥빈도 기뻐할 것이다."
그녀는 마비취를 안아들며 설옥빈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천 년 전의 적수… 빙하서시 설옥빈을 바라보는 궁비연의 봉목에는 만 가지
상념이 떠올랐다.
그것을 본 철운비는 조용히 다가가 궁비연을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풍만한
궁비연의 젖무덤이 그의 두 손 가득 기분 좋게 느껴졌다.
"쓸쓸하게… 해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맹세코…"
철운비는 궁비연의 귓가에 대고 뜨겁게 말했다.
"…!"
궁비연은 정인의 뜨거운 숨결을 느끼며 목덜미까지 붉어졌다.
스으…
문득 두 사람의 눈으로 포단 위에 하나의 인영이 서려 있은 듯한 환상이 스
쳐지나갔다.
아주 청수하고 위엄있는 중년인이 두 사람을 향해 웃음을 보내는 듯한 환
상, 하나 그것은 이내 스러져 버렸다.
그 환상에 철운비는 흠칫 놀랐다.
(불사… 성황이신가?)
궁비연을 안은 그의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마황총(魔皇塚)!

이곳은 고금제일마종(古今第一魔宗)이 잠든 곳, 그리고 새로운 불사지존이


탄생할 곳이었다.

가을(秋), 풍요한 수확의 계절이다. 만물이 결실을 맺고 대지가 풍성함으로


살찌는…
그러나, 강호는 바야흐로 피에 잠기고 있었다.

-지옥마교(地獄魔敎)!

그들은 가히 발악적인 광란을 보이고 있었다.


지옥전사들은 닥치는대로 살상과 파괴를 자행했다. 무차별적인 만행… 그들
은 무림인이고 양민이고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살상을 일삼았다.
지옥마교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열 배 더한 힘으로 무림을 휩쓸었다.
대륙사패(大陸四覇) 중 다른 세 문파가 일으킨 겁풍은 지옥마교의 그것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무림은 점차 초토화되어 갔다.
지옥마교의 기세에 밀려 장강까지 접근했던 혈해군벌은 다시 십만대산 근역
으로 퇴각한 상태였다.
더 이상 무림에는 지옥마교의 만행을 저지할 세력이 없는 듯 보였다.
아아… 무림! 무림은 온통 겁풍의 소용돌이에 말려 피의 도가니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 가운데, 가을은 깊어가고 있었다. 붉은 단풍이 대륙의 곳곳을 흐드러지
게 물들이고 있었다.

-복우산(伏牛山).

산서(山西)에 자리한 명산(名山)이다. 그 형상을 멀리서 보면 마치 소(牛)


가 엎드린 것 같다 하여 복우산(伏牛山)이라 불린다. 복우산은 아릅답고 수
려한 경치로 고래로 시인묵객들의 사랑을 받아온 명산이었다.
하지만 당대에 이르러 그 복우산은 가장 공포스러운 마역(魔域)으로 변하고
말았다.

-지옥마전(地獄魔殿)!

저 지옥마교의 성전인 지옥마전이 바로 복우산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었


다.
그로 인해 복우산은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긴 지 이미 오래였다. 오직 음
습한 흑포를 걸친 지옥전사(地獄戰士)들만이 복우산역을 횡행할 뿐이었다.
한데,
스으… 스으…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인영들이 복우산 전체를 포위한 채 지옥마전을 향해
밀려가고 있었다.
하나같이 뇌전 같은 눈빛을 지닌 인물들… 그들은 주로 네 방면의 인물들이
었다.
전능기환전에서 지옥마교를 뒤엎기 위해 기른 비밀고수들은 복우산 서쪽으
로부터 밀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동쪽으로부터 전혀 의외의 인물들이 다가서고 있었다.

-새북팔황연맹(塞北八荒聯盟)!
-막북(漠北) 적붕호황천(赤鵬護皇天)!

놀랍게도 그들 변황무림의 초강자들이 지옥마전으로 육박중이었다. 새북팔


황연맹의 흑룡패왕과 적붕호황천의 적붕천황이 동맹을 맺었다는 소문은 이
제 낡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변황의 강자들이 전혀 소문도 없이 복우산역까지 접근해 있음
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남쪽에는 여러 명의 여인들이 이끄는 가장 강력한 군단이 파죽지세
로 북상중이었다.
사실 그들은 하나의 조직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그 남쪽의 군단은 대충 네
개의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북산(北山) 사자철림(獅子鐵林),
-남황(南荒) 벽력부(霹靂府),
-묘강(苗疆) 살황독종(薩荒毒宗),

그리고, 가장 강력한 세력인 혈해군벌의 정예들이 그들이었다.


남방군단은 그것은 네 명의 여인들이 이끌고 있었다.
하나의 수레를 함께 타고 군단을 지휘하는 미인들…
사자천후, 벽력대부인, 도화독모, 그리고, 혈해성모 궁월영이 바로 그녀들
이었다.
"크아아악…!"
"으-- 아악!"
콰콰쾅--!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과 폭음, 여러가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복우산을
뒤흔들었다. 복우산의 적막이 산산이 깨진 지는 이미 오래 전이었다.
지옥전사들은 사력을 다해 저항했다. 하지만 그들의 저항은 급격히 와해되
어 갔다.
천하의 모든 강자들이 지금 복우산에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물며, 지옥마교의 정예들은 태반이 무림 각지로 퍼져 있었다.
굳이 네 개의 세력이 아니고 그 중 한두 개의 조직이 공격해 와도 지옥마교
에서 그들을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이제 지옥마교의 괴멸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복우산(伏牛山)의 서쪽 산록,
촤라락…!
"…!"
한 명의 여인이 옷깃을 펄럭이며 하나의 구릉 위에 표표히 서 있었다.
신비한 회색 동공을 지닌 여인,

-번뇌화(煩惱花) 음사향,

바로 그녀였다. 전능기환전의 여제갈인…!


실상 지금 지옥마교에 가해지고 있는 일단의 공세를 주도한 것은 바로 그녀
였다. 음사황은 각파를 교묘히 조종하여 일시에 지옥마교를 공격하게 한 것
이다.
물론 서북팔황연맹과 적붕호황천의 정예들이 지옥마교의 이목을 속이고 복
우산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녀의 안배 덕분이었다.
음사향의 안배는 단 하나도 빗나가지 않았다. 지옥마교는 완벽하게 무너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
음사향의 눈빛은 조금도 기쁜 빛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빛은 오히려 아주
심각해져 있었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땀에 절은 한 장의 쪽지가 쥐어져 있
었다.
그것은 열흘 정도 전에 그녀에게 전해진 것이고 발신지는 지옥마교의 총단
인 지옥마전(地獄魔殿)이었다.

-놈은 이미 마신지경(魔神之境)에 이르렀다. 이대로 간다면 그는 불사마인


(不死魔人)이 되어 무엇으로도 죽일 수 없게 될 것이다.

서신의 글은 아주 명필이었으나 초조한 빛이 가득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위험하지만… 이제 그 놈… 지옥천존을 암격할


것이다. 그 자의 반격에 나도 살아나기 힘들지 모른다. 하지만 결행하지 않
을 수가 없구나. 세룡과 사향, 너희 남매와 전능기환전의 천년영화를 위해
서는… 아비는 너희들을 사랑한다.>

서신은 그렇게 끝나 있었다.


그 글을 쓴 인물은 지옥마교의 제 이인자로 알려진 천뇌마야(千腦魔爺)였
다.
하지만 천뇌마야의 본래 신분이 전능기환전의 가주인 천수제왕(千手帝王)
음천세임을 아는 자는 천지간에 단 한 명뿐이었다. 그는 물론 천수제왕 음
천세의 딸인 번뇌화 음사향이었다.
(아아… 제발 무사하셔야 할 텐데… 내가 지옥마전에 이를 때까지라도…!)
음사향의 눈빛이 초조하게 흔들렸다.
(아버님이 초조해 하실 정도로 지옥천존이 강해져 있다면 아버님은 무사하
시기 힘들다. 천우신조가 없기 전에는…)
음사향의 입가로 소리없는 신음이 흘렀다.
그녀의 아미는 상큼 찌푸려져 있었다.
(세룡(世龍), 그녀석은 이 급한 때에 도대체 어디 가서 석 달씩이나 파묻혀
있는 것일까?)
그녀의 상념이 동생인 음세룡에게 이르렀을 때였다.
"크아아악!"
"조… 조심, 흡혈강시(吸血疆屍)다."
돌연 구릉 아래에서 처절한 비명과 경악성이 터졌다.
음사향은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카아아!"
그런 그녀의 눈에 한 명 전신이 시뻘건 털로 뒤덮인 거인이 아수라같이 그
녀가 서 있는 구릉 위로 날아오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흡혈… 강시!"
음사향의 교구가 뻣뻣이 경직되었다.

-흡혈강시(吸血疆屍)!

그 거인은 바로 흡혈강시가 된 아수마황이었다.


콰콰쾅--!
"크아아악!"
"막아랏! 죽음으로 소가주님을 지켜라!"
구릉 아래에서 숱한 인영들이 분분히 치솟아 흡혈강시를 막으려 했다.
그 인영들은 전능기환전의 가장 강한 고수들이며 음사향의 수신호위들이었
다. 그들은 둘만 모이면 지옥천존과도 맞설 수 있는 고수들이었다.
하지만,
빠라라랑! 쩌저정!
흡혈강시의 몸 주위로는 지옥명공강의 시퍼런 파멸강혼이 벼락같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것에 스치는 즉시 부서진 인육이 난무했다.
"크아악!"
"아아악!"
후두둑…!
삽시에 대기가 피비린내로 물들고 음사향의 수신호위들은 분신쇄골이 되어
거꾸러졌다. 그러나 수신호위들은 물러섬이 없이 몸을 던져 흡혈강시가 음
사향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산개해욧! 그 괴물은 그대들의 상대가 아니에요."
음사향은 처절하게 외치며 몸을 날리려 했다.
헌데,
"흐흐… 너는 본좌의 몫이다!"
돌연 음사향의 등 뒤에서 한 줄기 음잔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학…!)
음사향의 안색이 싹 변하는데 한 가닥 송곳같은 지력이 그녀의 배심혈을 강
타했다.
"악…!"
쿠-- 웅!
음사향은 단말마의 신음을 흘리며 허공에서 뚝 떨어져 내렸다.
"흐흐… 교활한 계집! 감히 지옥마전을 공격하고도 무사할 줄 알았느냐?"
쓰러진 음사향을 향해 한 명 독비괴한이 잔혹하게 웃으며 다가섰다.
"거령… 수황!"
음사향의 입에서 절망의 신음이 흘렀다.

-거령수황(巨靈獸皇)!

독비인은 바로 거령수황이었다. 그 자의 성한 왼팔에는 초혼마적(招魂魔笛)


이 들려 있었다. 그는 흡혈강시로부터 음사향의 수신호위들을 공격했고 그
러는 사이에 정신이 분산된 음사향을 제압한 것이다.
"흐흣… 네년들이 발악을 해봐야 흡혈강시가 있는 이상 본교를 어쩌지 못한
다."
거령수황은 히죽 웃으며 음사향에게 다가섰다. 그런 그 자의 눈에 음사향이
쓰러지며 치마가 허벅지까지 걷혀 올라간 것이 보였다.
포동포동하고 뽀얀 허벅지의 속살, 그것을 보며 거령수황의 두 눈이 욕정으
로 번들거렸다.
"크녠… 너의 충성스러운 수신호위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해 주어야겠다."
거령수황은 히죽 웃으며 음사향의 치마로 손을 가져갔다.
"무… 무엇을 할 작정이냐?"
혈도가 짚인 음사향이 다급히 부르짖었다.
찌-- 이익!
순간 그녀의 치마가 거령수황의 손에 길게 찢겨나갔다. 그러자 드러나는 음
사향의 아랫도리, 그녀의 하체는 가냘픈 겉모습과 달리 아주 풍만했다. 특
히 모양 좋고 큼직한 엉덩이는 아주 일품이었다.
풍만한 둔부의 전면에는 유달리 탐스럽게 불룩 솟은 둔덕이 붉은색 고의로
간신히 가려져 있었다.
"흐흐… 네 수신호위가 꿈에도 동경하던 너의 속살을 보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거령수황은 음흉하게 웃으며 그녀의 붉은 고의를 움켜쥐었다.
찌-- 직!
"악! 안 돼…"
음사향이 다급히 외쳤으나 그녀의 고의는 단번에 무릎 부근으로 벗겨져 내
렸다.
그러자 음사향의 부끄러운 곳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살찐 도독한 구릉 위
로 보드라운 체모가 아주 무성하게 돋아 있었다. 가녀린 체형과 달리 그녀
의 방초숲은 무성하고도 짙어 허벅지 사이의 계곡을 완전히 뒤덮고 있었다.
"흐흐…!"
거령수황은 방초의 계곡을 들여다 보며 꿀꺽 침을 삼켰다. 그리고는 그는
두 손으로 음사향의 무릎을 움켜쥐어 양 옆으로 벌렸다.
"흐윽… 안… 안 돼!"
음사향이 필사적으로 외쳤으나 그녀의 허벅지는 서서히 양 옆으로 벌려지기
시작했다. 언뜻 짙고 무성한 방초숲 사이로 분홍빛 살점이 들여다 보여 거
령수황은 꿀꺽 침을 삼켰다.
"흐흐… 고것…!"
그는 여체의 꽃잎 부분을 좀더 자세히 보기 위해 음사향의 방초숲을 좌우로
갈라 헤쳤다.
"으음…!"
갈라진 방초숨 사이를 노려보며 거령수황은 짐승같이 신음을 흘렸다. 살이
오른 여체의 비밀스런 부분이 그의 눈에 확 들어온 것이다.
"흐윽…!"
음사향은 수치를 견디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피-- 이잉!
눈을 감은 음사향의 귓전으로 어디선가 비단폭을 찢는 듯한 활시위소리가
들렸다.
"케-- 에엑!"
후두둑…!
이어 거령수황의 처절한 비명이 터지며 음사향의 아랫도리로 뜨거운 핏물이
확 번졌다.
음사향은 깜짝 놀라 눈을 반짝 떴다. 그런 그녀의 눈에 거령수황이 가슴패
기가 무엇엔가에 으스러져 삼사 장 밖에 날아가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구워어억!
동시에 서쪽 하늘로부터 한 소리 사나운 용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저… 것은…!"
음사향은 아연하여 서천을 바라보았다.
붉은 노을이 핏빛같이 번지는 서천(西天)--!
고오오… 콰아아!
한 마리 거대한 익수룡이 선풍을 끌며 다가서고 있었다.
그 익룡의 등에는 한 명 청년이 천신(天神)같이 우뚝 선 채 한 자루 철궁의
시위를 한껏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런 청년의 얼굴에는 하나의 흉측한 귀신
의 가면이 씌워져 있었다.
"세… 룡!"
음사향의 입에서 환희와 안도의 교성이 터졌다.
익수룡을 타고 나타난 청년은 음세룡, 아니 철운비였다. 마황총에서 불사초
연신강을 수습한 철운비가 마침내 이곳 복우산에 나타난 것이다.

∑ 제 33 장 불사지존(不死至尊)의 탄생(誕生)

피-- 이잉!
재차 비단폭을 찢는 듯한 활시위 소리가 황혼을 갈랐다.
꽈-- 르릉!
"카아아악!"
그 순간 굉렬한 폭음이 터지며 악귀같이 날뛰던 흡혈강시의 거구가 십 장
밖으로 나뒹굴었다.
유리패왕궁--!
그것에서 일어난 강맹한 무형강전(無形剛箭)이 흡혈강시에게 타격을 준 것
이다.
콰드드득!
아수마황의 거구에 부딪혀 하나의 바위가 박살나 버렸다.
"카아악!"
타격을 받긴 했으나 아수마황은 이내 용수철같이 벌떡 뛰어 일어났다.
고오오…!
그 사이 수호익룡은 아수마황의 머리 위까지 이르렀다.
철운비는 유현한 눈빛으로 흡혈강시가 된 아수마황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눈가로 동정의 빛이 흘렀다.
"그대의 지난날 악업이 크고도 깊어 죽어서도 흙에 묻히지 못하는구료! 아
수마황!"
철운비는 탄식을 하며 훌쩍 수호익룡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피-- 이잉!
그는 허공을 밟으며 곧장 흡혈강시의 정수리를 향해 날아내렸다.
"이제… 당신을… 땅으로 돌려보내 주겠소!"
스--읏!
철운비는 침중하게 말하며 아수마황의 정수리를 손 끝으로 내리쳐 갔다.
버-- 번-- 쩍!
그의 손 끝에서 희고 붉은 뇌정이 선뜻 일어나 아수마황의 정수리에 내리꽂
혔다.
"크- 아아아악!"
아수마황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그의 거구가 벼락을 맞은 듯이
뒤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쓰러지지는 않고 우뚝 굳어졌을 뿐이었다.
츠-- 으--!
아수마황의 눈에서 광기가 사라졌다. 이어 그의 몸에서 지옥명공강의 시퍼
런 불꽃이 모공을 통해 빠져나와 허공으로 흩어져 갔다.
비틀…
아수마황의 거구가 흔들했다. 그 순간 아수마황의 두 눈에 언뜻 살아 있는
사람의 그것 같은 생기가 돌아왔다.
"고… 맙… 다!"
다음 순간 믿어지지 않게도 아수마황의 입에서 아주 평온한 한 마디가 새어
나왔다. 아니, 철운비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퍼-- 억!
푸스스스…!
뒤미처 아수마황의 거구가 정수리로부터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머리가
사그러들고 이어 가슴, 복부… 하체까지 먼지로 스러졌다. 삽시에 그가 섰
던 자리에는 그저 한 무더기 먼지만이 수북하게 쌓여 있을 뿐이었다.
아수마황(阿修魔皇)!
가장 무섭고 잔혹했던 오백 년 전의 대마황! 그가 비로소 흙으로 돌아간 것
이었다.

"이… 인간도 아니군! 흡혈강시를 손짓 한 번으로 바스러뜨리다니…!"


문득 아수마황의 재를 내려다보고 있던 철운비의 귓전으로 온통 경악이 뒤
섞인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철운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비틀…!
거령수황이 흉측하게 이지러진 얼굴로 막 일어서고 있었다.
"이제… 그대의 악업도 끝낼 때가 된 듯하군!"
철운비는 귀왕철면 속에서 음울하게 말하며 성큼 거령수황에게 다가섰다.
"으으…!"
거령수황은 사색이 되어 비칠 물러섰다.
"주… 죽어랏!"
피-- 이잉!
그는 들고 있던, 이제는 쑬모없게 된 초혼마적을 발악하듯 철운비에게 던져
내었다.
파-- 앗!
그와 함께 그 자는 사력을 다해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철운비는 고소하며 날아드는 초혼마적을 후려쳤다.
"조심… 해라! 그 중에 암수(暗手)가…!"
보고 있던 음사향이 다급히 부르짖었다.
파- 삭!
하지만 철운비의 장력은 이미 초혼마적을 바스러뜨리고 있었다.
화-- 아악!
초혼마적이 산산이 부서지며 그 안에 감추어진 분홍색 분말이 철운비를 뒤
집어 씌웠다. 하지만 이미 만독불침인 철운비는 그것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다음 순간, 철운비는 갑자기 온몸이 후끈 달아오름을 느끼고 움찔했
다.
(음약인가? 끝까지… 추악하게 구는군!)
철운비는 씁쓰레한 표정을 지으며 선뜻 손을 들어 거령수황을 가리켰다. 그
자는 이미 백 장 저편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누워랏! 불사(不死)의 뜻이다!"
쩌-- 어엉!
철운비의 일갈과 함께 그의 손 끝에서 한 줄기 붉고 흰 뇌전이 허공을 갈랐
다. 그 뇌전은 벼락치듯 거령수황의 등으로 작렬했다.
퍼-- 엉!
"케-- 에엑!"
단말마의 비명! 거령수황의 몸이 허공으로 퍼뜩 퉁겨져 올라가더니 이내 한
줌 재로 흩어져 버렸다.
"무… 무섭구나! 그것은 무슨 무공이냐?"
음사향이 놀라 더듬거리며 물었다.
철운비는 그녀에게로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불사… 초연신강(不死超然神剛)의 정화… 양극천뢰(兩極天雷)라고 하오!"
"불… 불사초연신강!"
음사향은 옥용이 새빨개져서 더듬거렸다. 그녀의 아랫도리는 부끄럽게 벌거
벗겨져 있는 상태였다. 그 은밀한 곳을 친동생에게 보인다고 생각하자 그녀
는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음사향은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억지로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누나는… 마혈이 제압당했다. 수고스럽지만 해혈을…!"
부르르…!
말하던 음사향의 몸이 충격으로 부르르 떨렸다. 귀왕철면 안쪽에서 번뜩이
는 철운비는 철운비의 한 쌍 봉목이 본능의 욕망으로 벌개진 채 자신의 은
밀한 곳을 노려보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아실색했다.
"무… 슨 짓이냐? 세룡…!"
음사향은 수치와 분노와 당혹으로 옥용을 일그러뜨리며 외쳤다.
"흐윽…!"
그러나 이내 그녀는 외칠 기력도 상실한 만큼 충격을 받고 전율했다.
슥…!
철운비, 아니 음사향이 자신의 친동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가 천천흔 하
의를 벗어 버린 것이다. 드러나는 거대한 남성의 상징은 하늘을 향해 곤두
서 있고, 그것을 보고 음사향은 반 실신하고 말았다.
그 사이 철운비는 음사향의 허벅지를 양 옆으로 벌려 세우고 그 사이로 몸
을 실었다. 우마의 그것같은 거대한 육괴가 짙디짙은 방초로 덮인 음사향의
균열을 노리고 접근해왔다.
어느 틈엔가 음사향의 막혔던 혈도는 풀린 상태였다. 하지만 음사향은 너무
놀라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그 사이 철운비는 한 손으로 음사향의 꽃잎을 좌우로 벌리고 자신의 뜨거운
일부를 그곳으로 이끌었다.
보드라운 살점에 닿는 화끈한 열기… 그 순간 음사향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맹렬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안 돼! 아무리… 음약에 취했어도. 네가… 나를 이럴 수도… 아악!"
음사향의 저항은 단말마의 비명으로 끝났다. 그녀의 두 눈이 하얗게 치켜
떠지며 전신이 뻣뻣이 경직되었다.
느리게… 그러나 육중하게 자신의 몸 속으로 밀려들어 오는 불기둥… 음사
향은 달군 쇳덩이가 자신의 여린 살을 찢고 들어오는 듯한 격렬한 동통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를 반 실신케 만든 충격은 그것이 아니었다. 피를 나눈 친동생
음세룡에게 몸을 유린당한다고 믿고 있는 심리적 충격이 그녀를 시체로 만
들었다.
축 늘어진 음사향의 허리를 안고 철운비는 힘차게 율동을 일으키기 시작했
다.
그가 세차게 하체로 일렁일 때마다 음사향의 벌겨진 허벅지가 반사적으로
퍼득였다. 그와 함께 한 가닥 선혈이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흘러 바닥을 적
셨다.
"…!"
하지만 음사향은 그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 망연한 시선으로 자신을 능욕하
고 있는 철운비를 올려다 보았다.
문득,
(설… 마! 눈빛이… 틀리다.)
음사향은 퍼뜩 정신을 차리며 철운비의 눈동자를 올려다 보았다.
욕정으로 벌개진 철운비의 두 눈에는 그녀의 가문의 특징인 회색빛이 전혀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음사황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을 능욕하고 있는 철운비의 귀왕철면
을 벗겨냈다.
순간 드러나는 전혀 다른 얼굴,
"당… 당신은… 용형마도의… 그 꼬마!"
음사향의 입에서 숨넘어가는 듯한 신음이 흘렀다. 자신을 범하고 있는 상대
가 친동생인 음세룡이 아니라는 사실에 음사향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강제로 겁탈당한다는 수치심과 분노보다는 자신을 능욕하고 있는 상대가 자
신의 동생이 아니라는 사실에 그녀는 형언 못할 안도감을 느꼈다.
그때 철운비의 움직임이 급격히 급박해졌다.
"아흐윽…!"
음사향은 하얗게 눈을 뒤집으며 철운비의 어깨에 매달렸다. 격렬한 동통 속
에 아련히 피어오르는 쾌락의 파문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철운비의 행위
에 맞추어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으음…"
철운비는 짐승같이 으르렁대며 맹렬히 음사향 위에서 날뛰었다.
욕정으로 뒤엉킨 그의 뇌리로 마황총을 떠날 때 잠마여제 궁비연이 다짐해
주던 말이 암시같이 떠올랐다. 철운비가 음사향을 범한 것은 거령수황이 터
트린 음약 때문이기보다 그 암시 때문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무림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은 지옥천존도 누구도 아닌… 번뇌화(煩惱花)


음사향이란 어린 계집이다.
-교활한 전능일족 중에서도 가장 교활한 계집이 그녀이니… 너는 두 가지
길 중에서 한 가지를 택해 후한을 없애야 한다.
-단칼에 베어 죽이든지… 그것이 싫으면… 강제로라도 범해서 네 소유물로
만드는 것이다. 가능하면… 전자 쪽을 택하길 바라지만…

잠마여제 궁비연은 철운비가 음사향을 죽여 후환을 없이하기를 바라고 있었


다. 그 이유는 음사향이 단순히 천하제일의 재녀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음사향이야말로 그녀 궁비연이 장차 뭇 나이 어린 여아들과 함께 철운비의
소유권을 놓고 다툴 때 최강의 적수가 될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
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철운비는 음사향을 범해서 자신의 여인으로
만드는 쪽을 택했고… 그로 인해 잠마여제 궁비연은 여생을 우환속에서 살
게 된다.
음사향은 지혜로울 뿐 아니라 사내를 어떻게 휘어잡는지 가장 잘 아는 여인
이기에…!
"흐윽… 조금만… 조금만 더…!"
어느덧 철운비에게 유린당하고 있는 음사향의 신음소리는 고통이 아니라 환
희의 교성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지옥… 무저갱(地獄無底坑)!

그것은 햇빛조차 들지 않는 하나의 절곡 끝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옛날, 저 아수마황(阿修魔皇)이 오패왕의 합격을 받고 몸을 던졌던 그곳
은 마치 지옥의 입구같이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지옥무저갱의 옆에는 불길에 그을리고 무참히 무너진 하나의 석전이 자리하
고 있었다.

<지옥… 마전(地獄魔殿)!>

바로 지옥마교의 총단인 지옥마전이었다.


그것은 계곡 밖에 세워진 지옥마교의 총잔인 지옥마전과는 동명이소(同名異
所)였다.
외곽의 지옥마전을 세운 사람은 지옥노조(地獄老祖) 능황이었다.
반면 지옥무저갱 옆에 자리한 이 지옥마전을 세운 자는 오백 년 전의 아수
마황이었다.
그 지옥마전은 반 년 전쯤에 파괴된 상태였다. 한 알의 벽력굉천뢰가 오백
년의 풍상을 견디어 온 그 지옥마류의 성전을 무참하게 무너뜨린 것이다.
지옥천존 벽우뢰… 그가 사부인 지옥노조 능황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무너진
것이다.
그리고 지금…
꽈르릉…! 우르르…!
우뢰성이 진동하며 그 지옥마류의 성전이 있던 자리에서 천지변색의 대격전
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대 일--!
비범한 일남일녀가 한 명의 괴인을 협공하고 있었다.
함께 힘을 합쳐 괴인을 공격하고 있는 일남일녀, 그 중 사내쪽은 흑룡(黑
龍)이 수놓아진 장포를 걸치고 있는 중년인이었다.
호랑이의 눈, 용(龍)의 기품과 사자의 위엄을 한몸에 지닌 인물, 그의 기품
어린 용모를 보면 한눈에 그 인물이 황족임을 알 수 있으리라!

-고독패왕(孤獨覇王) 철무정!

그 외에… 달리 누가 있어 그 같은 기도와 위엄을 보이겠는가?


영원한 대륙제일의 패왕! 그가 흑룡패왕(黑龍覇王)이라는 또 다른 신분을
지니고 있음은 아직 비밀에 속하는 것이었다.
이 년 반 전--!
철무정은 중원에 지옥마교에 맞설 세력이 없음을 알고 신강으로 갔다.
신강(新疆)! 그곳에는 그를 이십 년 넘게 기다려온 한 명의 여인이 있었다.

-달란(達丹)의 여왕(女王)!

바로 그 옛날 철무정의 정혼자였으나 그에게서 버림받았던 불운한 달단족의


공주!
그러나… 그녀는 철무정이 자신을 버렸음에도 이십 년 동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이 그녀는 달단일족의 여왕이 되어 있었다.
또한 그녀는 저 신강 팔황마전의 전주(殿主)이기도 했다. 그녀의 조부는 바
로 사십 년 전 중원을 침공했다가 실종된 팔황마성(八荒魔聖)이었다.
신강에 이른 흑룡패왕은 달단여왕의 도움으로 단시일 내에 서역무림을 통일
한 것이다.
그 대가로 달단여왕이 얻은 것은 철무정의 아내라는 자리였다.
그녀는 지금 금릉의 흑룡왕부(黑龍王府)에서 남편과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
다리고 있었다.

꽈르르릉!
"으음…! 지독하구나!"
신음하는 철무정의 손 끝에서 우뢰성이 일어나며 단철신강(丹鐵神剛)의 붉
은 노을이 벼락치듯 일어났다.
그는 아주 괴로운 표정이었다. 철무정이 괴로워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다른
사람과 연수(連手)하여 적을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의 적은 물론 지옥천존 벽우뢰였다.
그리고 철무정과 함께 지옥천존을 상대하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검후(劍后)
벽황혜였다.
이미 전설의 천년검후가 된 벽황혜는 철무정 자신의 제자이며 또한 며느리
이기도 했다.
사상최강의 사제! 그들은 하늘 아래 가장 강한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허나, 그런 두 사람이 손을 합쳤건만 지옥천존을 쓰러뜨리지 못하고 있었
다.
"크하하핫! 모두… 죽인다!"
콰르르릉…! 파츠츠츠!
마성에 미쳐 날뛰는 지옥천존, 그의 심장에는 한 자루 독검(毒劍)이 손잡이
만 남기고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를 그렇게 만든 자는 다름아닌 전능기환
전의 당대전주인 천수제왕(千手帝王) 음천세였다.
상식대로라면 심장이 찔린 벽우뢰는 죽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
독중지독(毒中之毒)을 복용하여 죽지 않았다.
죽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는 단기간 사이에 두 배 강한 내공과 고금최강의
독강을 지니게 되었다. 그 수준은 흡혈강시가 되었던 아수마황을 두 배 능
가하는 경지였다.
천수제왕 음천세! 그는 지옥천존을 제거시키기는커녕 두 배 강하게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 독황지정의 독기가 벽우뢰의 뇌수까지 침범하
여 그는 광인(狂人)이 되어 버렸다.
파츠츠츠…!
쩌러러렁!
벽우뢰의 몸 주위로 자극천독강벽(紫極千毒剛壁)이 뇌전같이 휘돌고 있었
다. 그것은 스치기만 해도 금강지체도 녹여 버린다.
지금 지옥마전의 폐허 여기저기에는 몇 명의 인물들이 그 자극천독강벽에
휘말려 쓰러져 있었다.

-적붕천황(赤鵬天皇) 단목천뢰!

그는 바로 금릉 귀곡서원(鬼谷書院)의 주인인 귀곡선생(鬼谷先生)이었다.


그는 지금 전신이 시커멓게 변해 운기조식하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여장을
한 옥기린(玉麒麟) 단목혜린이 울상을 짓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한 명 추괴한 노인이 침중한 신색으로 앉아 있었다. 독비
에… 전신이 화상으로 일그러진 노인,

-지옥노조(地獄老祖) 능황!

바로 그였다.
그의 발치에는 한 명의 소복여인이 갸날프게 숨을 몰아쉬며 누워 있었다.
그녀는 바로 북망산의 여왕, 유령귀모(幽靈鬼母)였다. 그녀 역시 지옥천존
의 자극천독강벽에 휘말려 중독된 것이다.

(이대로 가면… 저 아이들도 오래 견디지 못한다!)


능황은 신경질적으로 담뱃대를 털며 흘깃 전장을 바라보았다.
지옥천존과 맞서고 있는 철무정과 벽황혜, 두 사람은 내공으로는 결코 지옥
천존에게 밀리지 않고 있었다.
다만 벽우뢰가 익힌 자극천독강벽(紫極千毒剛壁)의 소용돌이만은 상대하지
못할 뿐이었다.
철무정과 벽황혜의 옷깃도 이미 누렇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것은 두 사
람의 호신강벽조차 자극천독강벽에 녹아들고 있음을 의미했다.
(누군가… 저 독강의 벽을 허물어뜨려야만 한다.)
능황의 안면이 실룩였다. 그의 노안으로 섬뜩한 빛이 스쳤다.
(그래… 희연아… 네가 옳았다.)
능황은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눈가로 이미 죽어 고인이 된 사랑
하는 딸, 혈지(血芝) 능희연이 옥용이 떠올랐다.
(네가… 사랑하던… 무정… 저 아이를 도와 주고… 네 곁으로 가마!)
파-- 앗!
지옥노조 능황은 지면을 박차고 떠올랐다.
"허허헛! 노부와 함께 가자! 못난 제자야!"
콰드드득…!
능황은 광소를 터뜨리며 지옥천존의 자극천독강벽에 정면으로 부딪혀 갔다.
"안 되오, 장인어른!"
철무정의 입에서 절규하듯 호통이 일어났다.
장인어른…! 그 말을 들으며 능황의 추괴한 얼굴에 언뜻 미소가 떠올랐다.
꽈-- 르릉!
그 순간 지옥노조의 몸이 자극천독강벽과 충돌했다.
후두둑…!
놀랍게도 능황의 노구가 순간적으로 재로 변해 날아갔다.
"장인어른…!"
철무정이 비통하게 부르짖는 순간 공포스럽던 자극천독강벽이 산산히 흩어
져 버렸다.
(기회… 다!)
벽황혜의 봉목에서 뇌전이 일고,
스-- 읏!
폭풍제왕검이 수평으로 지옥천존의 목을 향해 날아들어갔다. 능황의 희생으
로 순간적으로나마 모른 호신마공이 와해된 지옥천존, 그에게는 폭풍제왕검
을 막아낼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벽우뢰!
그가 마침내 소원대로 딸인 벽황혜의 검에 목이 끊어질 순간이었다.
"…!"
자신의 목을 베어 오는 벽황혜를 보며 언뜻 광기 서린 벽우뢰의 눈으로 자
애로운 빛이 흘렀다. 일부나마 자극천독강벽이 흩어져 마성이 약해지면서
딸을 알아본 것일까?
쩌-- 어엉!
폭풍제왕검이 맹렬히 벽우뢰의 목을 후려쳤다.
헌데…
"안 되오!"
다급한 폭갈이 인 것은 그 때였다.
버-- 번쩍!
그와 함께 허공에서 한 가닥 붉고 흰 뇌전이 내리꽂혔다.
따-- 다당!
그 뇌전은 그대로 폭풍제왕검을 후려쳐 백 장 밖으로 날려 버렸다.
"운비(雲飛)--! 네가… 왜!"
벽황혜는 불신의 빛으로 눈을 치뜨며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피-- 이잉!
그런 그녀의 눈으로 한 명 청년이 번뇌와 음사향을 옆구리에 끼고 질풍같이
날아 내리는 것이 들어왔다. 그는 물론 철운비였다.
중인들이 아연실색할 때였다.
"크하하핫!"
벽우뢰의 입에서 아수라가 울부짖는 흉갈이 터졌다.
비이이잉!
파츠츠츠--!
자극천독강벽! 지옥노조 능황의 희생으로 일시 와해되었던 그것이 다시 복
구된 것이었다.
"아아! 다 틀렸다! 장인어른의 희생이 수포로 돌아가다니…"
"나를… 용서하시오! 양극… 천뢰(兩極天雷)!"
꽈르르릉!
떨어져 내리는 철운비의 입에서 괴로운 일갈이 일고 그의 손 끝에서 천 근
의 뇌정이 폭발하듯 일어났다.
"크아아아!"
꽈르르릉!
양극천뢰에 강타당하며 지옥천존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그의 자
극천독강벽이 순간적으로 재로 변하고 벽우뢰의 전신이 시커멓게 타버렸다.
"크아아아!"
휘-- 익!
그는 짐승같이 부르짖으며 한 쪽으로 달려갔다. 그가 달려가는 곳에는 지옥
무저갱이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어엇!"
"저… 저런…"
피-- 이잉!
중인들이 입을 딱 벌릴 때 지옥천존, 아니 벽우뢰는 지옥무저갱의 입구에
이르렀다.
"…!"
지옥무저갱의 입구에서 지옥천존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전신이 시커먼
피덩이가 된 벽우뢰… 그러나 그의 눈빛만은 지금 이 순간 아주 맑아 보였
다.
불사초연심결(不死超然心訣)! 그것은 비단 벽우뢰의 마공지력을 바스러뜨렸
을 뿐 아니라 그의 마성(魔性)까지 날려 버린 것이다.
"…!"
벽위뢰의 눈빛이 딸 벽황혜를 더듬었다. 이어 그의 시선은 막 지면으로 내
려서는 철운비를 향했다.
"…!"
"…!"
두 사람의 눈빛이 뒤엉키며 순간적으로 민감이 뒤엉켰다.
문득 지옥천존의 고개가 미미하게 끄덕였다.

--황혜(皇慧)를… 부탁하네!

벽우뢰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스-- 읏!
이어 벽우뢰의 몸은 서서히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의 발치에는 끝을 알 수
없는 무저갱이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벽우뢰의 모습이 꺼지듯이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마치
죽을 때는 자신의 시체를 보이기 싫어 떠난다는 거상(巨象)같이…
"…!"
"…!"
침묵이 장권을 뒤덮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모든 겁풍의 근원이었던 지옥천존 벽우뢰! 그 일대의 마왕이 사라졌건만 그
누구도 기쁜 빛이 아니었다.
벽이윽고 벽황혜가 소리없이 신형을 옮겨 철운비에게 다가섰다. 헌데 철운
비에게 다가서던 그녀는 흠칫했다.
주르르…!
철운비의 두 눈으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발견한 때문이다. 벽황
혜는 의아해 하면서도 철운비의 손을 꼬옥 쥐어 주었다.
"사제 왜 우는 게지? 기뻐해도 시원치 않거늘…!"
철운비는 벽황혜를 돌아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여인! 그러나 그녀의 키는 철운비의 어깨에 겨우 닿을
정도로 가냘펐다.
철운비는 눈물 젖은 눈으로 자신의 사저이며 아내인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그의 눈으로 따스한 애정이 번져 나왔다.
"아닙니다!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나온 것입니다!"
철운비는 웃으며 벽황혜의 어깨를 꼬옥 끌어안았다.
스으-- 스으!
포옹한 두 남녀 위로 황홀한 저녁노을이 내려앉았다. 마치 그들을 세상 모
든 풍파로부터 지켜 주기나 하려는 듯이…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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