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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 장 기녀(妓女)의 아들
-금릉(金陵)!
때는 만추(晩秋),
휘___ 이잉!
옷깃을 파고드는 차가운 삭풍이 고도 금릉을 휩쓸고 있었다. 가을도 깊어가
어느덧 잔혹한 겨울의 여신이 그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금릉의 북방에 위치한 종산(鐘山)을 넘어 불어오는 바람은 벌써 서슬퍼런
칼날같이 매서웠다.
만추의 금릉 일대에는 매서운 삭풍과 함께 흉흉한 살기(殺氣)가 감돌고 있
었다. 언제부터인가 수많은 무림인들이 꾸역꾸역 금릉 일대로 모여들고 있
었기 때문이다.
몰려든 무림인들의 눈은 하나같이 탐욕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과연 무엇
이 무림인들을 이토록 미치게 만드는 것일까?
그것은 한 가지 소문 때문이었다.
소문은 바로 그것이었다.
지옥혈겸(地獄血鎌)-!
그것이 대체 무엇인가? 무엇이기에 도검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무림인들
을 미치게 만드는 것인가?
이름 그대로 지옥혈겸은 한 자루의 낫(鎌)이다.
마치 피칠을 한 듯 시뻘건 색의 날을 지닌 이 한 자루의 낫은 지금으로부터
오백 년 전에 전무림을 혈풍의 겁난 속으로 몰아 넣었던 한 명 전율스러운
대마황(大魔皇)이 사용하던 병기였다.
-아수마황(阿修魔皇)!
-진회하(秦淮河)!
<낙월정(落月亭).>
-낙월부인(落月婦人) 수운월(水雲月)!
-십전잠룡(十全潛龍) 철운비(鐵雲飛)!
십전(十全)의 잠룡(潛龍)!
그같은 찬사로 불리었던 이 소년의 이름은 철운비(鐵雲飛)였다.
그는 범인의 천 배를 능가하는 지혜를 지녔다고 한다. 한 번 본 것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머리 속에 새길 수 있는 재능을 지닌 천고의 기재(奇才)인
그가 하지 못하는 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 없다고 했다.
적어도 세인들은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사실이었다.
철운비는 이미 오 세 때부터 금릉 교외에 자리한 귀곡서원(鬼谷書院)을 드
나들었다.
귀곡서원은 춘추전국시대의 대학자인 귀곡자(鬼谷子)가 세웠다는 서원의 이
름을 그대로 딴 학당(學堂)이다. 그만큼 귀곡서원은 최고의 기재들만이 입
교할 수 있는 곳이다.
몇 백 년 동안 귀곡서원이 세상에 뿌려 놓은 인맥(人脈)은 깊고도 넓다. 그
런 이유로 귀곡서원의 원생으로 선출되었다는 자체만으로도 출세가 보장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철운비는 그 귀곳서원에 불과 오 세의 어린 나이로 입교했던 것이다. 이는
전무후무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십 세가 되는 해부터는 더 이상 귀곡서원에
다니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천하를 통틀어 다섯 번째 안에 들
정도로 크다는 귀곡서원이건만 더 이상 철운비가 볼 책이 없기 때문이었다.
금릉 전체에서 가장 지혜로운 어린 천재 철운비!
그는 만인에게 있어 경이의 대상이었고 가희 인중의 용(人中之龍)같은 존재
였다.
그러나,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의 그는 탁월한 어린 부랑아일 뿐이
었다.
물론 그가 이렇게 타락하게 된 데에는 동기가 있었다.
이 년 전 어느날, 항상 철운비에게 뒤지기만 하던 어느 어린 수재(秀才)가
열등감에 못 이겨 내뱉은 한 마디 말이 십전잠룡(十全潛龍)을 십결잠룡(十
缺潛龍)으로 만들어 버렸다.
"…!"
눈(眼), 진물이 흐르는 한 쌍의 눈이 언제부터인가 낙월정을 나서는 철운비
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 눈의 주인은 바쁘게 진회하의 거리를 오가는 인파 속에 섞여 있었다.
그는 한 명의 노인(老人)이었다.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인상
인 이 노인은 너무도 평범하여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 오히려 이상
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문득 노인은 음울한 음성으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저 아이가 금릉일관옥(金陵一冠玉)이라 불리던 아인가?"
그의 눈은 철운비의 모습을 집요하게 쫓고 있었다.
헌데 자세히 보면 그의 눈가에 검은 그늘이 서려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심각한 내상을 입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기이하구나. 천한 기녀의 자식인데… 하늘과 땅 사이에 가장 막강
했던 한 명의 패왕(覇王)을 닮았다니…"
노인은 나직하게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짙은 의혹과 불신이 깃든 음성이었
다.
그런 노인의 눈가에는 짙은 회한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고독패왕(孤獨覇王)! 저주스러울 정도로 막강했던 고루마맥(固陋魔脈)의
후예! 이상하게도 저 어린 놈은 그 자, 고독패왕을 닮았다."
빠직!
돌연 진물 흐르는 노인의 눈에 강렬한 불꽃이 튀었다. 그것은 그가 한 가지
치욕스러웠던 기억을 되살린 때문이었다.
고독패왕(孤獨覇王)!
그가 어떤 인물이기에 금릉일관옥이라고도 불리는 철운비와 닮았다는 것일
까?
"어쨌든… 지금에 와서 무림의 파멸을 막을 자는 고독패왕이란 저주스러운
놈 외에는 없다. 그래서 이것을 그에게 전해야만 하는데… 종적을 찾을 수
가 없으니 문제다!"
노인은 알 수 없는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조심스럽게 가슴섶을 만졌다.
그의 가슴섶에는 무엇인가 들어 있는 듯 제법 불룩해 보였다.
노인은 음울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도망다니는 것도 지쳤다. 거기다 지옥천존(地獄天尊)이란 놈은 워낙
집요해서 열흘이 가기 전에 노부 무영종(無影宗)을 찾아낼 것이다."
무영종(無影宗)이란 이름을 지닌 노인의 늙은 눈이 암울한 절망으로 물들었
다.
그 사이 철운비의 모습은 어느덧 인파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헌데,
파츳…!
철운비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노인 무영종의 눈에 돌연 한 가닥 기광이
번뜩였다.
"그래… 그렇게 하면 된다!"
그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히죽 웃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
다.
"어찌되었든 이것을 다시 지옥천존이란 놈에게 돌려 줄 수는 없다! 그것은
… 밤의 제왕(帝王)인 나 무영종의 자존심이 용납지 않는다."
이어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철운비가 사라진 곳으로 걷기 시작했다.
"저 어린 놈을 이용하면… 지옥혈겸(地獄血鎌)을 지옥천존의 손에서 빼돌릴
수도 있다."
그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암울한 절망의 그늘이 깔려 있던 무영종의
주름 가득한 얼굴은 이 순간 기이한 생기를 띠었으며 기괴한 웃음까지 떠돌
았다.
"크녠! 지옥천존(地獄天尊)! 결국 네놈은 지옥혈겸을 얻지는 못하게 될 것
이다!"
그는 괴이한 웃음을 흘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어 그의 모습은 삽시에 인
파 속으로 사라져 갔다.
헌데 지옥혈겸이라니…!
무영종이라 자칭한 이 괴노인(怪老人)이 설마 저 고금제일마라는 아수마황
(阿修魔皇)의 천고마병 지옥혈겸(地獄血鎌)을 갖고 있단 말인가?
금릉 일대를 광란의 혈풍으로 몰아 넣고 있는…?
정녕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벽옥… 마간(碧玉魔竿)>
그 글의 뜻은 그러했다.
철운비는 십 세 이전에 이미 만권서(萬卷書)를 읽었다. 그래서 그 과두문의
해독이 가능했던 것이다.
벽옥마간(碧玉魔竿)이라 이름붙여진 낚싯대는 얼핏 보면 대나무같아 보였
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것은 대나무가 아니었다.
(벽옥마간이라! 그 늙은이가 이상한 물건을 남기고 갔군!)
철운비는 벽옥마간을 만지작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예의 마의노
인은 이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철운비는 고개를 갸웃하며 검미를 모았다.
"그러고 보니 그 늙은이와 부딪힌 것부터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 그 늙은이
가 내게 일부러 부딪혀 온 것 같단 말이야!"
그러나 이내 그는 고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어쨌든 이 벽옥마간이란 놈은 마음에 들었다. 그 늙은이를 다시 만나도 별
로 돌려 줄 마음이 없는 걸…!"
그는 히죽 웃으며 죽립을 다시 고쳐 썼다.
이어 그는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 천천히 진회하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조룡탄(釣龍灘)-!
이곳은 진회하 북서쪽에 위치한 험준한 협곡이다.
콰르릉… 쿠르르릉!
종산(鍾山)의 산록을 휘돌아 흐르는 물줄기는 장강과 합류하기 직전 흡사
용(龍)이 꿈틀거리는 것같이 거세고 힘찬 흐름을 보이고 있었다.
폭포같이 굽이치는 물줄기, 뽀얗게 일어나는 무수한 포말은 실로 일대장관
이었다.
그 옛날 한 명의 상고기인이 그곳에서 천년수룡(千年水龍)을 낚았다는 전설
이 있는 협곡이다. 그래서 그곳은 조룡탄(釣龍灘)이라 불려졌다.
"…!"
조룡탄 옆의 한 바위 위에는 폐포를 걸친 한 명의 죽립소년이 물가에 낚싯
대를 드리우고 앉아 있었다.
금릉일관옥(金陵一冠玉) 철운비, 바로 그였다.
이곳 조룡탄은 바로 철운비의 낚싯터였다. 언제부터인가 철운비는 남몰래
고독을 즐기게 되었다. 그러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 이곳 조룡탄이었다. 조
룡탄 일대의 지형은 극히 험해 인적이 얼씬도 하지 않는 탓이었다.
콰르르…!
조룡탄은 뽀얀 포말을 일으키며 기세 좋게 철운비의 앞으로 흘러가고 있었
다. 뿌연 물안개가 철운비의 온몸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그러나 철운비는 미동도 없이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물 속에 드리운 벽옥마간(碧玉魔竿)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조룡탄 건너편을 향하고 있었다. 그곳은 종산(鍾山)의 산록이
었다.
울창한 숲이 우거진 종산의 산록을 휘감고 한 채의 성채 같은 대장원이 우
뚝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철부(鐵府).>
∑ 제 2 장 낙월부인(落月婦人)의 비밀(秘密)
스읏!
회의사신(灰衣死神) 잔독의 좌수가 거의 칼의 손잡이에 이르렀다.
"…"
(…!)
철운비와 회의사신의 시선이 한 순간 허공에서 불꽃을 튀기며 뒤엉켰다.
철운비는 잘 알고 있었다. 회의사신의 손이 칼에 닿는 순간 자신이 몸뚱이
가 여지없이 두 동강날 것임을…!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죽립 아래의 그의 눈빛은 추호도 흔들림임을 보이
지 않았다. 그는 그저 남의 일인 듯 무덤덤한 표정으로 회의사신을 바라보
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어쩌면 그는 회의사신이 자신을 고통없이 죽여주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달리 조숙한 탓에 자신이 어머니와 그녀를 돈으로 산 어느 남정네 사이의
욕정의 산물임을 잘 아는 철운비다.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를 한스럽게 생각하는 그이기에 눈앞에 보
이는 죽음조차도 전혀 두렵지 않은 것이다.
두려움은 미련에서 나온다. 그럴진대 이 세상에 한 점 미련도 없는 철운비
에게 무슨 두려움이 있겠는가?
팟!
드디어 회의사신의 좌수가 사신쌍인(死神雙刃)의 손잡이에 닿았다. 절대절
명의 위기였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웬… 놈이냐?"
갑자기 회의사신은 어둠 속을 향해 대갈일성을 터뜨렸다.
번____쩍!
동시에 그의 허리춤에서 무서운 도광(刀光)이 폭출하며 벼락같이 허공을 그
어갔다. 그의 발도(拔刀)는 얼마나 빨랐는지 그저 한 줄기 빛이 번뜩이는
것만 볼 수 있었을 뿐이다.
따당…! 피유유우…웅!
직후 요란한 금속성과 함께 비단폭 찢어지는 듯한 소성이 적막한 밤하늘을
뒤흔들었다.
파____앗!
그와 함께 무엇인가가 회의사신의 칼에 부딪혀 한쪽 옆의 바위에 깊숙이 박
혔다.
그것은 한 장의 종잇장같이 얇은 쇳조각이었다. 크기는 손바닥만한 정도인
데 전체적으로 회색빛이 도는 반투명한 물체였다.
그 쇳조각을 본 순간,
"번뇌… 철편(煩惱鐵片)?"
부르르…!
회의사신의 전신에 격렬한 떨림이 일었다.
"번뇌… 살황(煩惱煞皇)! 그 자가… 나타나다니…!"
그는 마치 실성한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의 가늘게 찢어진 독사의 눈
에는 은은한 공포의 빛마저 서려 있었다.
철운비는 그런 그의 모습에 내심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번뇌살황(煩惱煞皇)? 그가 어떤 인물인데 저 아수라같은 자를 공포에 떨게
만든단 말인가?)
바로 그 때였다.
"흐흐! 잔독! 정말 오랜만이구나. 용기가 있다면… 봉황대(鳳凰臺)로 오너
라…!"
어둠 속에서 한 줄기 음울한 웃음소리가 일더니 점점 멀어져 갔다. 그것은
흡사 십팔층 지옥에서 울려나오는 듯 음산하고 공허한 웃음이었다.
회의사신 잔독의 전신이 일순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다.
"육합번뇌후(六合燔惱吼)! 정… 정말… 그 늙은이로군!"
그는 공포의 음성으로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히고 있었다.
문득 그는 철운비를 흘깃 돌아보았다. 그의 가늘고 매서운 눈은 더 이상 살
기를 띠고 있지 않았다.
(고독패왕(孤獨覇王)에게 죽은 줄 알았던 번뇌살황이 살아 있다니… 어쩌면
오늘 밤이 나의 마지막 밤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그의 눈길이 어두워졌다.
회의사신 잔독이 무서워하는 자는 하늘과 땅 사이에 단 일 인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인물은 십여 년 전 고독패왕(孤獨覇王)이라는 한 명의 무서운 승
부사와 싸워 패해 죽었다고 알려졌다.
-번뇌살황(煩惱煞皇)!
그가 바로 번뇌살황이었다.
더 이상 무서울 수 없다는 암살(暗殺)의 제왕! 중원의 모든 자객들이 신적
인 존재로 우러러보는 우상이 바로 그였다.
역시 자객도의 인물인 회의사신 잔독이 두려워하는 단 한 명의 인물이 바로
그 번뇌살황이었다.
"원한다면… 가 주마, 번뇌살황!"
철운비를 일별하던 회의사신은 음울하게 중얼거리며 허공으로 신형을 떠올
렸다.
스읏!
단지 그의 어깨가 한 번 흔들했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는 어둠 저편을 날아
가고 있었다.
"…!"
철운비는 회의사신의 절정경공에 너무도 놀라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한동안 회의사신이 사라진 곳을 망연히 주시
하고 있었다.
헌데 다시 고개를 돌리던 철운비는 흠칫했다. 그의 눈에 한 권의 낡은 책자
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회의사신이 서 있던 곳에 떨어져 있었다.
철운비는 의아함을 느끼며 그 책자를 집어들었다. 그것은 무엇인가 극히 부
드러운 가죽으로 만든 한 권의 비급이었다.
<좌수살법(左手殺法).>
-무영종(無影宗)!
진회하(秦淮河)-!
시간은 이미 사경(四更)이 지나 새벽이 다가오건만 여전히 진회하의 거리는
흥청대고 있었다.
눈을 어지럽히는 현란한 홍등의 불빛들, 기녀들의 뇌쇄적인 웃음소리와 취
객들이 질탕한 음성 속에 밤은 깊을 대로 깊어만 갔다.
<낙월정(落月亭).>
<잠룡헌(潛龍軒).>
-낙월부인(落月婦人) 수운월(水雲月)!
그렇다!
그녀가 바로 낙월부인 수운월이었다.
진회하 제일의 야화(夜花)!
그녀를 한 번 안아보지 못해 상사병이 걸린 고관대작들이 부지기수라는 것
은 잘 알려진 얘기였다.
그 소문이 결코 부끄럽지 않을 만큼 수운월은 빼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었
다.
수운월이 진회하게 처음 나타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십사 년 전이었다.
그때 수운월은 핏덩이인 철운비를 데리고 나타났다.
한데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그녀의 용모는 십사 년 전인 그 때나 지금이나
전혀 변함이 없는 것이 아닌가? 변한 것이 있다면 보기 좋게 살이오른 몸매
뿐이었다. 지금의 그녀는 예전에 비해 한층 완숙하고 풍만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혹자는 그녀가 무림의 전설로 내려오는 주안술(朱顔術)을 연마한 것이라고
도 했다.
그러나 정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온통 신비로운 비밀에 싸인 금릉제일염! 그녀가 바로 낙월정의 주인이기도
한 낙월부인 수운월이었다.
-사황녀(邪皇女)!
-철무정(鐵無情)!
-주천화(朱天華)!
금릉부증(金陵府中)의 뇌옥(牢獄)-!
음습하고 침침한 지하에 암울하게 뻗어 있는 통로 양편으로 수십 개의 뇌옥
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린애 팔뚝만한 철창이 쳐진 뇌옥 안은 수많은 죄수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음습한 지하뇌옥에 아침이나 밤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었다.
새벽 무렵, 싸늘한 한기 속에 뇌옥 안의 죄수들은 대부분 잠들어 있었다.
철컹…!
문득 뇌옥 입구의 육중한 철문이 쇳소리를 내며 열려졌다.
이어 크고 작은 두 개의 인영이 뇌옥 안으로 들어섰다. 음산한 인상에 관복
을 걸친 장한과 창백한 안색의 폐포소년이었다.
폐포소년은 물론 바로 철운비였다.
죽립을 벗어 버린 그의 모습은 수려하고 영준한 용모였다. 지나치리만치 희
고 깨끗한 피부, 선이 분명하고 단아한 오관, 약간 그늘진 눈매와 여인의
그것처럼 붉디붉은 입술의 조화가 마력적인 아름다움마저 풍긴다.
철운비를 대동한 관복의 장한는 금릉부중의 간수였다.
철운비는 어두운 통로를 따라 걸으며 무심한 시선으로 뇌옥 안을 둘러보았
다.
(이 안 어딘가에 그 늙은이가 있겠군!)
그때 그의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의 간수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말
했다.
"철운비! 네가 한 짓을 탓할 생각은 없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어. 천하의
금릉왕야(金陵王爺)의 외아들을 찌르다니… 쯧쯧!"
그는 안됐다는 듯 혀를 차며 철원비를 통로 맨 끝의 뇌옥 앞으로 데리고 갔
다.
뇌옥 안에 몇 명의 죄수들이 초라하게 쪼그린 채 잠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간수는 힐끗 철운비의 옆모습을 일별하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천화가 죽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만일 죽기라도 한다면 너는 참
수형이야!"
철컹!
그는 혀를 차며 철창문을 열었다.
철운비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이었다.
"그는 죽지 않소!"
그는 철창 안을 들여다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그 말에 간수는 의아한 눈으로 철운비를 내려다보았다.
"죽지 않는다고?"
철운비는 힐끗 간수를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죽지 않도록 찔렀으니까 죽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오?"
이어 그는 의아한 교정의 간수를 뒤로하고 성큼 철장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철운비는 의학에도 이미 정통해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인체의 어디를 찔
러야 죽지 않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실을 어찌 일개 간수가 알 수
있으랴?
철운비는 히죽 웃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그 색골 황족나부랑이 때문에 참수당한다면 정말 억울한 일이지.)
이어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뇌옥 안을 둘러보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간수는 알 수 없다는 듯 곤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철창문을 다시 열쇠로 잠궜다.
"어쨌든… 각오는 하고 있어라. 금릉왕야가 이 일을 그냥 넘기지만은 않을
테니까… 쯧쯧!"
이어 그는 혀를 차며 몸을 돌려 뇌옥에서 멀어져 갔다.
"…!"
하지만 철운비는 간수 쪽은 아예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는 간수가 사라지고 나자 눈을 빛내며 주위의 죄수들을 눈여겨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죄수들은 대부분 쪼그린 채 잠들어 있어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었
다.
(여기까지 오기는 왔는데 그 늙은이를 어떻게 찾아내지?)
철운비는 난감한 듯 검미를 모았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크녠! 왔구나 애송이!"
문득 한 쪽에서 괴악한 노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
철운비는 흠칫하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가 갇힌 뇌옥의 안쪽에서 한 명의 마의노인이 잠든 죄수들 틈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지극히 평범한 인상의 보잘 것없는 노인이었다. 허름한 마의에 구부정
한 허리, 그러나 기이하게도 그의 얼굴 전체에는 검푸른 기운이 서려 있었
다.
"역시… 늙은이었군!"
철운비는 입술을 실룩이며 마의노인 앞으로 다가갔다. 마의노인이 바로 저
녁 무렵 길거리에서 자신과 충돌하여 낚싯대를 바꿔치기한 장본인임을 알아
본 것이었다.
마의노인은 힘겹게 벽에 기대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바로 노부다. 네… 놈은 노부의 예상보다 빠르게 나타났다!"
그는 철운비를 바라보며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
철운비는 침중한 안색으로 마의노인의 앞에 앉았다. 그의 검미가 미미하게
찌푸러졌다.
(안 좋은데… 이 늙은이는 무엇인가 지독스러운 경력에 내부가 온통 으스러
졌다. 하루가… 가기 전에 죽는다!)
그는 내심 염두를 굴리며 소리없는 신음을 발했다. 그는 의술에 정통해 있
었다. 때문에 첫눈에 마의노인이 오래 살지 못할 것임을 간파한 것이었다.
문득 마의노인은 철운비의 침중한 눈빛을 느꼈는지 입술을 실룩이며 입을
열었다.
"빌어…먹을!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애송이! 천하의 무영종(無影宗)이 너
같은 어린 놈의 동정을 받을만큼 불쌍해지지는 않았다!"
그 말에 철운비는 고소를 지었다.
"어련하시겠소? 한데 무엇 때문에 나 철운비를 이곳까지 부른 것이오?"
마의노인, 무영종은 지체치 않고 대답했다.
"한 가지 물건을 노부 대신 다른 사람에게 전해 달라고 네놈을 불렀다."
말을 하며 그는 허리춤에서 하나의 물건을 뽑아들었다. 그것은 무명천으로
둘둘 만 물건으로 언뜻 보아 낫(鎌)같이 보였다.
"이것을… 고독… 패왕(孤獨覇王)이란 사람에게 전해 주면 된다. 그러면 우
리 사이에는 줄 것도 받을 것도 없게 되는 것이다!"
무영종은 숨을 헐떡이며 예의 낫같은 물건을 철운비에게 내밀었다.
"고독… 패왕?"
철운비는 물건을 받아들며 고개를 갸웃하며 되뇌었다. 무림의 일을 알지 못
하는 그로서는 당연히 고독패왕이란 이름을 알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강호의 물을 조금이라도 먹은 사람이라면 고독패왕이란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고 말 것이다.
십칠 년 전!
강호무림은 갑자기 세상에 나타난 한 명의 무서운 승부사(勝負士)가 일으킨
돌풍으로 풍비박산이 났었다.
-고독패왕(孤獨覇王)!
한 자루 철검(鐵劍)을 둘러메고 무림에 발을 들여 놓은 이 인물의 출신내력
에 대해서는 누구도 아는 바가 없었다.
알려진 것이라고는 그가 늘 혈혈단신이라는 점과 그의 애병(愛兵)인 녹슨
철검의 이름이 마종지검(魔宗之劍)이라 불린다는 사실뿐이었다.
고독패왕이란 이름도 그가 단 한 명의 방수도 없이 강호를 독행(獨行)한 데
서 연유한 이름일 뿐이었다.
그의 마종지검은 짧은 시간동안 실로 무수한 무림인들을 쓰러뜨렸다.
기라성 같던 뭇 무림명숙들이 그의 일초반식도 받지 못하고 거꾸러졌다.
가장 먼저 고독패왕의 손아래 패한 인물은 재림사황(再臨邪皇) 나극이란 인
물이었다.
-재림사황(再臨邪皇) 나극(羅極)!
-번뇌살황(煩惱煞皇)!
-소림(少林)의 활불 천뢰법존(天雷法尊)!
-녹림(綠林)의 제왕 녹림무영종(綠林無影宗)!
-마도연맹(魔道聯盟)의 총수 벽월천마존(碧月天魔尊)!
-황실제일인(皇室第一人) 나한천작(羅漢天爵)!
…!
인간으로서는 더 이상 강해질 수 없다고 믿던 숱한 일대종사들의 찬란한 영
명은 하루 아침에 허무하게 스러지고 말았다.
그 장본인은 고독패왕! 바로 그였다.
그는 승부에 미친 광인이라고 알려졌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다만 한 판의 승
부라고 했다. 그는 백 일 간 중원을 횡당했으며 일천 번 싸워 이기는 신화
를 이룩했다.
그의 최종적인 표적이 지난 오백 년 간 무림을 장악해 온 오패천(五覇天),
즉 오대무벌(五大武閥)임은 불문가지의 사실이었다.
하나 오패천을 쓰러뜨리는 것이 고독패왕의 최후 목표라고 믿는 사람은 그
리 많지 않았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과연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독패왕은 늦봄에 무림에 나타났으며 백 일이 지난 늦여름에 돌연 실종되
었다.
그는 오패천 중 사자철림(獅子鐵林)을 치기 위해 장강(長江)을 건넌 직후
실종되었다고 한다.
단 백 일(百日), 하나 그가 백 일 동안 일으킨 돌풍은 가히 충격적인 것이
었다. 혹자는 그가 오백 년 전 무림을 피로 씻었던 아수마황보다 오히려 강
할 것이라고 했다.
한데… 그런 고독패왕이 장강을 건너 직후 세인들의 이목에서 사라진 것이
었다.
숱한 추측이 난무했으나 아무도 시원하게 그 답을 말하지는 못했다.
광풍(狂風)처럼 전 대륙을 휩쓸고 사라진 고독한 패왕(覇王)!
그는 의혹의 신비한 장막 속으로 사라진 후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십칠 년 전의 일이었다.
"어엇!"
따당…!
무명천에 싸인 물건을 받아 들던 철운비는 신음과 함께 그것을 바닥에 떨어
뜨리고 말았다. 그 물건이 보기와는 달리 대단히 무거웠던 것이다. 놀랍게
도 그것은 수십 관의 무게로 느껴질 정도였다.
화라락…
철운비가 물건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낫을 싸고 있던 무명 천이 저절로 풀어
져 버렸다.
츠___ 읏!
순간 뇌옥 안은 삽시에 섬칫한 검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
철운비는 숨을 죽이고 눈앞에 드러난 그 물건을 들여다보았다.
역시 그것은 일종의 낫(鎌)이었다.
손잡이의 길이는 두 자, 그리고 날이 한 자 정도, 또한 손잡이의 끝에는 극
히 가느다란 쇠사슬이 한 타래 매달려 있었다.
낫은 전체적으로 칙칙한 핏빛을 띠고 있었으며 손잡이에는 기이한 문양(文
樣)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끔찍하게도 아수라(阿修羅)와 악귀(惡
鬼)들이 마구 날뛰는 형상의 문양이었다.
그 문양들 가운데 언뜻 갑골문자의 글이 드러나 보였다.
<지옥… 혈겸(地獄血鎌).>
"지옥… 혈겸!"
철운비는 피를 머금은 듯한 날을 지닌 낫(鎌)에 새겨진 이름을 나직이 뇌까
리며 신음성을 발했다.
무영종은 그런 그를 형형한 시선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역시 명불허전이군! 갑골문을 한눈에 해독하다니… 어쩌면 이놈은 지옥혈
겸에 감추어져 있다는 아수마맥(阿修魔脈)의 최후마공까지도 알아낼지 모르
겠다!)
그는 내심 혀를 내두르며 소리없는 신음성을 발했다.
이윽고 그는 철운비를 직시하며 괴악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장 무섭다는 여덟 자루의 병기, 환우팔천병(
宇八天兵) 중 서열 제삼위(第三位)의 마병이다."
"환우팔천병?"
철운비는 검미를 모으며 나직이 되뇌었다.
이어 그는 지옥혈겸의 손잡이에 새겨져 있는 아수라의 문양을 자세히 들여
다보았다.
(이 문양들 중에는 두 가지 구결(口訣)이 감추어져 있다. 일종의 내공심법
(內功心法)과 이 낫을 쓰는 초식인데… 잘 이해가 안 된다.)
그는 내심 염두를 굴리며 중얼거렸다.
그렇다. 철운비가 보고 있는 수라문양에는 하늘과 땅 사이에 가장 패도적인
두 가지의 무공구결이 감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천 년 간 그것을 알아낸 자는 전무했다. 그것은 지극히 난해하고 교
묘하여 누구도 발견할 수 없는 신비 속에 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철운비는 믿어지지 않게도 한눈에 그 존재를
어렴풋이 깨달은 것이 아닌가?
무영종이 그 사실을 알았으면 아미 기절초풍했으리라.
그러나 그것을 알 리 없는 무영종은 다시 입을 열어 설명했다.
"그것은… 오백 년 동안 무저갱(無底坑)이란 곳에 묻혀 있다가 최근 발굴된
것이다. 그것을 발굴한 자는… 지옥천존(地獄天尊)이란 자인데… 클클… 그
놈은 그것을 손에 넣은 직후 노부에게 빼앗겼다!"
그는 득의의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은 이미 짙은 죽음의 그늘이 가득 덮여 있었다.
그는 자신이 곧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철운비 역시 그것을 알아보았
다.
-무영종(無影宗)!
<천잔수종경(天殘水宗經).>
<천면무영경(千面無影經).>
그는 팔백 년 전의 인물이었다.
마도무림(魔道武林)에 사대마맥(四大魔脈)이 있다면 정도(正道)에는 대정팔
강(大正八强)이 있었다.
정파무림 사상 최강의 팔인(八人)!
그들이 바로 대정팔강이며 천잔조수는 그 대정팔강 중의 한 명이었다.
천잔조수의 특기는 두 가지로, 수공(水功)과 낚싯대 사용법이 그것이었다.
천잔조수의 수중공부(水中功夫)가 고금최강인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또한 그의 낚싯대를 이용한 초식은 그 괴이신랄한 변화론 단연 천년최강이
었다.
천잔조수의 독문병기는 바로 무영종이 철운비에게 미리 준 벽옥마간(碧玉魔
竿)이었다.
천잔조수가 남긴 천잔수종경에는 천잔조수의 수중무공과 사식(四式)의 조법
(釣法)등이 수록되어 있었다.
<천면무영경(千面無影經).>
아침(朝),
"철운비! 석방이다, 나와라!"
철컹!
뇌옥을 흔드는 한 소리 외침과 함께 쇠창살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
철운비는 예상했었다는 듯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예의 간수가 열린 창살의 문 밖에 서 있었다. 그의 음침한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는 철운비가 주천화를 찌른 것을 내심 고소해 하
고 있는 것이었다.
철운비의 예상대로 주천화는 죽지 않았다.
주천화의 아버지인 금릉왕야(金陵王爺) 주태사는 아들이 기녀(妓女)를 강제
로 능욕하려다가 기녀 아들의 칼에 찔린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가급적 그 사건을 덮어두려고 했다.
물론 그 모든 것은 철운비의 안배 속에 든 일이었다.
"…!"
철운비는 힐끗 뇌옥의 구석을 돌아보며 일어섰다. 그의 두 볼에는 흐릿한
눈물자국이 나 있었다.
뇌옥의 구석에는 무영종이 잠든 듯 돌아누워 있었다. 그는 자는 듯 보였으
나 실상 방금 전 숨이 끊어졌다.
-부탁… 한다 무림을!
스으… 스으…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짙은 안개가 금릉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해는 어느덧 한 뼘 이상 떠올라 아침을 재촉하고 있었다. 허나 온통 시야를
가리고 있는 짙은 안개 때문에 아직도 여명 무렵과 다를 바가 없었다.
"…!"
휘적휘적 뇌옥을 나서던 철운비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뇌옥 밖, 스으… 스으…
짙은 안개 속에 삼인(三人)이 그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이남일녀(二男一女).
검박한 옷차림의 백의미소부와 바퀴 달린 의자에 앉은 꾸부정한 노문사(老
文士), 그리고, 그 륜차(輪車) 뒤에 서 있는 훤칠한 키의 미장부가 그들이
었다.
백의미소부는 물론 철운비의 어머니인 낙월부인(落月婦人) 수운월이었다.
그리고 그녀와 함게 있는 노문사와 미장부 역시 철운비가 아주 잘 아는 인
물들이었다.
-귀곡선생(鬼谷先生).
-옥기린(玉麒麟) 단목린(丹木鱗).
"운비(雲飛)야!"
수원월은 촉촉히 젖은 시선으로 철운비의 앞으로 달려왔다. 그녀는 글썽글
썽하게 눈물이 고인 눈으로 철운비를 바라보며 그의 두 손을 꼭 움켜쥐었
다.
"에미… 때문에… 네가 욕을 보았구나!"
그녀는 못내 가슴이 아픈 듯 철운비의 머리를 한 손으로 쓰다듬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런 그녀의 손은 기이할 정도로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츠읏!
"…!"
"…!"
그런 수운월의 손을 바라보며 두 쌍의 눈이 야릇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바
로 귀곡선생과 옥기린 단목린의 눈빛이었다.
(소수(素手)…다! 가장 파괴력이 강한 사문(邪門)의 저주마공! 역시… 저
여아는 재림배교(再臨拜敎)의 후예인가?)
귀곡선생의 진물 흐르는 노안이 음유하게 번뜩였다.
(소수마공(素手魔功)은 오성(五成)까지는 괜찮으나 그 이상 성취가 진전되
면 심성이 극악하게 변한다. 보아하니 저 아이의 수준은 이미 오성(五成)의
화후에 이른 듯한데… 그대로 두면 무서운 대마녀(大魔女)가 탄생하겠군!)
그는 내심 앓는 듯한 신음을 발하며 중얼거렸다. 그의 노안은 낙월부인 수
운월의 소수(素手)를 보고 한 가지 무서운 전설을 떠올린 것이었다.
-소수여황(素手女皇)!
-고루대제(固陋大帝) 능잠(陵潛)!
<존(尊).>
-지옥천존(地獄天尊)!
∑ 제 4 장 소수마공(素手魔功)의 저주(咀呪)
금릉성의 동문(東門)___
철운비는 휘적휘적 동문을 나서고 있었다.
여전히 허름한 폐포에 죽립을 눌러쓴 모습인 그는 지금 귀곡서원(鬼谷書院)
으로 가는 길이었다.
귀곡서원은 금릉성의 동쪽에 있는 울창한 원시림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철운비가 귀곡서원으로 가는 것은 근 일 년 수 개월 만이었다.
천울림(天鬱林)이라 불리는 원시림 속에 자리한 귀곡서원은 강남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서원이었다. 그것은 귀곡서원에 일대석학 귀곡선생이 있기 때
문이었다.
귀곡선생의 지혜와 식견은 당대제일이라 알려졌다.
그러나 일 년 그 이전만 해도 귀곡서원에는 귀곡선생을 능가하는 초기재가
있었다.
그가 바로 철운비, 금릉일관옥(金陵一冠玉)이었다.
"…!"
성문을 나서던 철운비는 멈칫하며 걸음을 멈춰섰다.
성문 밖에 한 명의 거지노인이 잔뜩 몸을 쭈그린 채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너덜너덜하게 찢긴 허름한 마의(麻衣)를 걸친 거지노인은 추위 탓인지 머리
를 푹 숙이고 있어 얼굴은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다만 빛바란 회색머리와 주름이 가득한 목덜미로 미루어 그가 꽤 나이든 노
인임을 알 수 있었다.
철운비는 그 거지노인의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춰섰다.
(춥겠군!)
그는 연민의 시선으로 거지노인을 내려다 보았다.
거지노인의 주위로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노인을 거들떠 보는 사람은 없었다. 날씨가 춥고 음습한 탓
인지 사람들은 그저 걸음을 총총히 하며 바쁘게 오갈 뿐이었다.
철운비는 주위를 돌아보다가 문득 씁쓸한 고소를 지었다.
(별 수 없군. 내 옷이라도 벗어 줄 수밖에…!)
그는 망설임없이 자신의 낡은 폐포를 벗어 들었다. 거지노인이 추위에 떨고
있는 것을 보고 차마 그냥 지날 수 없었던 것이다.
"노인장, 이거라도 더 걸치쇼!"
철운비는 자신의 폐포를 거지노인의 어깨에 덮어 주었다.
한데 그가 막 폐포를 노인의 어깨에 덮어 주는 순간,
번___ 쩍!
돌연 숙여졌던 노인의 머리가 펴들리며 한 쌍의 시뻘건 불덩어리가 철운비
의 눈동자에 폭사되어 들어왔다.
눈(眼)-!
그 한 쌍의 시뻘건 불덩어리는 바로 거지노인의 눈이었다.
(윽!)
순간 철운비는 눈동자가 볼에 달군 쇠꼬챙이에 지져지는 듯한 아찔한 충격
에 신형을 휘청했다. 그만큼 거지노인이 눈빛은 강렬하고도 무서운 것이었
다.
"크크녠! 네놈이 일천구백구십구 명만에 처음이었다. 감히 노부… 재림사황
(再臨邪皇)에게 연면의 정을 보여준 놈은…!"
철운비에 뇌리로 마치 우뢰성 같은 음상이 들려왔다. 그것은 무서운 신념
(邪念)이 정제된 음성이었다. 범인이라면 그 한 마디의 사황파멸후(邪皇破
滅吼)에 심령이 바스러지고 말았으리라.
그러나 철운비는 그 정도 충격까지는 받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의지력이
범인에 비할 수 없을 만큼 강인했기 때문이었다.
(재… 림사황이라고?)
그는 두 눈을 부릅뜨며 거지노인을 주시했다.
그러나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한 쌍의 사악하고 시뻘건 눈뿐이었다. 그 외
의 아무것도 그의 시야 속에 잡히지 않았다.
철운비는 그 한 쌍의 눈을 노려보며 아득하게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 한 쌍의 눈은 마력적인 힘으로 철운비의 마지막 정신력마저 빼앗아 버린
것이었다.
직후,
"흐핫핫! 좋다 좋아! 이제는 고독패왕에게 흔쾌히 도전할 수 있다. 우리 재
림배교의 운명을 맡길 사종사황(邪宗邪皇)의 재목을 구했으니…!"
파____ 앗!
재림사황(再臨邪皇)이라 자칭한 거지노인은 사악한 광소를 터뜨리며 거칠게
철운비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실로 가공할 일이었다. 그의 일갈에 사방 십 리가 삽시에 지진을 만난 듯
들썩거리는 것이 아닌가?
"우웩!"
"케엑!"
그와 함께 그 주위를 지나던 행인들이 일시간에 모두 혼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십 리 내에 있는 관병들 또한 일제히 실신하여 쓰러졌다. 그만큼 재
림사황의 한 소리 장소에 실린 공력은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후핫핫! 철무정(鐵無情) 이놈! 조금만 더 기다려라. 조금만 더!"
피___이잉!
그때 재림사황은 앙천광소와 함께 철운비의 손목을 움켜쥐고 훌훌 날아올랐
다.
피이잉! 고오오!
삽시에 그의 모습은 철운비와 함께 까마득히 암천으로 사라져 버렸다. 마치
한 줄기 벼락이 지나는 것처럼…
-천울림(天鬱林)!
-재림사황(再臨邪皇) 나극(羅極)!
<사종삼보(邪宗三寶)!>
-적목천존(赤目天尊).
-소수여황(素手女皇).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부부였다. 그 중 소수여황이 전무림을 파괴시키려다 고루대제(固陋
大帝) 능잠(陵潛)에게 잡혀 죽은 일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적목천존과 소수여황 부부는 세 가지 물건을 남겼었다.
-사황철경(邪皇鐵經).
-소수마경(素手魔經).
-적목사령정(赤目邪靈精).
바로 그것이었다.
사황철경(邪皇鐵經)과 소수마경(素手魔經)은 사황쌍려 양인의 일신절기를
담은 비급이었다.
그 중의 사문절기(邪門絶技)들은 저 사대마맥의 초마공에 못지 않을 정도로
막강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었다.
그에 비해 적목사령정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것은 바로 적
목천존이 죽으며 남긴 일종의 원정내단이었다.
무려 천년수위에 육박하는 적목천존의 내공정수가 고스란히 담긴 내단이 바
로 적목사령정인 것이다.
천 년 전, 적목천존은 소수마공(素手魔功) 때문에 마성(魔性)에 빠진 아내
소수여황에게 암살되었다.
허나 죽기 직전 그는 자신의 필생내공을 하나의 내단으로 남겼다.
재림사황은 천 년 만에 적목천존의 시신에서 적목사령정을 얻어 재림배교를
연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그 적목사령정을 완전히 용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고독패왕의 도
전을 받아 패퇴하고 말았다.
당시 재림사황은 겨우 적목사령정의 일 할 정도를 용해했을 뿐이었다.
허나 그것만으로도 능히 그는 백 년 내 무적(無敵)을 구가했었다.
고독패왕에게 패한 후 재림사황은 본격적으로 적목사령정을 용해하려 했다.
그 용해방법은 바로 소수마경(素手魔經)에 수록되어 있었다.
헌데 그 직후 재림사황은 소수마경을 도난당하고 말았다.
-사황녀(邪皇女) 수운월(水雲月)!
-적목사령정(赤目邪靈精)!
<낙월정(落月亭).>
-거령수황(巨靈獸皇)!
∑ 제 5 장 귀곡서원(鬼谷書院)
<파천마령(破天魔鈴).>
-파천심황결(破天心荒訣)!
<천추각(千秋閣).>
<적붕진결(赤鵬眞訣).>
-적붕황(赤鵬皇) 단목천뢰(丹木天雷)!
-적붕진결(赤鵬眞訣),
-적붕건(赤鵬巾),
-적붕수호천병(赤鵬守護天兵),
그 세 가지가 바로 적붕삼보(赤鵬三寶)였다.
허나 그 중 전해지는 것은 적붕진결뿐이었다. 막북(漠北) 적붕호황천(赤鵬
護皇天)은 바로 그 적붕진결(赤鵬眞訣)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그들이 적붕황(赤鵬皇)의 직전 중 겨우 삼할만을 이었음을 의미한
다.
그러나 적붕호황천은 그 삼 할의 절기로도 천 년 간 변황최강(邊荒最强)으
로 군림해 왔다.
영원한 변황최강자 적붕황(赤鵬皇)의 천년비급!
그 적붕진결(赤鵬眞訣)이 놀랍게도 귀곡서원의 서탁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
는 것이었다.
"…!"
철운비는 호기심이 등해 적붕진결의 다음 장을 넘겼다. 그곳에는 한 가지
패도극강한 무공구결이 적혀 있었다.
-적붕쇄강조(赤鵬碎鋼爪) 구결진해(口訣眞解)!
-낙월정(落月亭).
"…!"
철운비는 낙월정 앞에 석상같이 굳어져 있었다. 그의 두 눈은 온통 경악으
로 부릅떠져 있었다.
아… 보라! 폐허, 낙월정 전체가 참담한 폐허로 변한 채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닌가?
그 화려하던 낙월정의 전각들은 모두 폭풍을 만난 듯 허물어지고 무너져 있
었다.
폐허로 변한 낙월정의 주위에는 금릉부(金陵府)의 관병들이 배치되어 일반
인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또한 일부 관병들은 폐허 속에서 기녀들의 시신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흉수는 두 명이었네!"
"한 놈은 전신에 붉은 털이 덮인 인간같지도 않은 거인(巨人)이었고 다른
한 명은 흑포를 뒤집어 쓴 몽면인이었네!"
"그놈들은 갑자기 나타나 낙월정을 삽시에 폐허로 만들었다네."
"그들은 무슨 낫(鎌)인가 하는 것을 내 놓으라고 했다는데… 영랑의 시신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네!"
철운비를 둘러싼 중인들의 말이 봇물 터지듯 한꺼번에 그의 귓전을 울렸다.
그러나 철운비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어… 머니…!)
그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두 주먹을 으스러져라 불끈 움켜쥐었다. 지금
그의 뇌리에는 어머니 낙월부인(落月婦人)의 안위에는 아무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것은 너무도 절실한 감정이었다.
그제서야 철운비는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증오하던 낙월부인 수
운월, 그녀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던가를…
철운비의 가슴은 미칠 듯한 격정과 다급한 긴장감으로 들끓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 그래! 어머님의 침실 아래에 지하밀실이 하나 있었다.)
번쩍!
그의 두 눈에서 벼락치는 듯한 안광이 작렬했다.
다음 순간 철운비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낙월정의 폐허 안으로 돌진
해 들어갔다.
"어엇! 이봐! 조심하게. 아직 무너지지 않은 곳도 있어!"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폐허를 지키던 관병들이 손을 내저으며 황급히 외쳤
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철운비가 폐허 안으로 뛰어든 후였다.
철… 컹!
철운비는 지하석실의 세 번째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짙은 피
비린내가 철운비의 코를 찔렀다.
철문의 안쪽에는 한 칸의 석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별로 넓지 않은 장방형의 석실인 그곳은 아무런 장식조차 없어 썰렁한 냉기
가 감돌았다. 한쪽에 놓인 한 좌의 돌침상과 자단목의 서가 하나가 전부였
다.
한데 석실 안을 들여다 보던 철운비의 두 눈이 격동으로 부릅떠졌다.
"어머니!"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참담한 외침을 발했다. 돌침상 위에 한 명의 혈인(血
人)이 단좌하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전신으로 꾸역꾸역 선혈을 흘러내고 있는 왜소한 체구의 여인, 아! 그녀는
바로 낙월부인(落月婦人) 수운월이었다.
"…!"
수운월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실로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의 의복은 갈가리 찢겨 풍만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풍염하고
탄력있는 유방, 잘룩하고 굴곡있는 허리, 그 아래의 은밀한 계곡과 미끈한
허벅지까지…
한데 보라! 끔찍하게도 그녀의 전신 피부는 거북등같이 쩍쩍 갈라져 있지
않은가? 무엇인가 강력한 역도가 순간적으로 그녀의 모든 호신지력을 박살
낸 듯했다.
그녀의 몸 부위 중 유일하게 무사한 곳은 두 팔뿐이었다. 희디흰 섬섬옥수
와 팔꿈치까지의 부위는 여전히 옥같이 매끈한 상태였다. 피 속에 떠올라
보이는 그녀의 두 손이 너무도 희어 섬뜩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운… 비(雲飛)! 그래… 네 쪽이 빨랐구나. 지옥… 천존(地獄天尊)보다…!"
단좌하고 있던 수운월이 힘겹게 눈을 뜨며 피에 젖은 눈으로 철운비를 바라
보았다.
"지… 지옥천존(地獄天尊)이었습니까? 어머님을 이렇게 만든 자가…!"
철운비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수운월의 앞으로 다가갔다.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수운월의 모습이 그의 가슴을 비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을 안겨 주
었다.
수운월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피에 젖은 눈으로 그윽이 바라보았다. 비통해
하는 아들의 모습은 수운월로 하여금 복잡한 감회에 엉켜들게 만들었다.
"그 자는 저것을 노리고… 습격해 왔지만 가져가지는 못했다."
그녀는 억지로 웃으며 석침의 한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예의 지옥혈겸(地
獄血鎌)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지옥천존(地獄天尊)-!
그는 금릉부 중의 뇌옥에서 무영종의 시신을 발견해 냈다. 그리고 무영종이
죽기 직전 철운비와 접촉한 사실을 간수의 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 직후 그는 수하의 지옥삼패와 함께 낙월정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철운비가 귀곡서원을 향해 출발한 후였다.
대신 지옥천존은 낙월부인 수운월을 포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운월의 무공도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소수마공(素手
魔功)은 이미 육성(六成)의 경지에 이른 상태였다. 그 정도만 해도 어떤 호
신기공이라도 박살낼 수 있었다.
금강불괴에 가까운 거령수황이 그녀의 일격에 쓰러진 것은 바로 그 때문이
었다.
그러나 지옥천존(地獄天尊)은 상상 이상의 강자였다.
지옥천존과 맞선 순간, 수운월은 미처 소수인(素手印)의 공력을 발출하지도
못하고 지옥천존의 지옥참(地獄斬)에 휘말리고 말았다.
마도의 전설인 사대마맥 중 지옥마맥(地獄魔脈)의 절기인 지옥참의 공력은
실로 가공할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그것은 수운월의 모든 호신지력을 바스러뜨리고 그녀의 내부를
상하게 만들었다.
치명적인 중상을 입은 수운월은 사력을 다해 잠룡헌(潛龍軒)으로 피신했다.
이어 그는 철운비의 침실에서 지옥혈겸을 찾아 이곳 밀실로 숨어든 것이었
다.
지옥천존은 곧 수운월을 추격했다. 하나 그는 일시간에 은밀하기 그지없는
이곳 지하밀실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관병과 사람들이 몰려들자 그
는 낙월정에서 사라진 것이었다.
물론 멀리 가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그는 어디선가 낙월정을 감시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철운비가 이곳에 들어온 것도 역시 그 자의 눈을 피하지는 못했으리
라.
"…!"
철운비는 망연한 표정으로 말을 잊고 말았다.
수운월의 말은 전혀 상관없는 타인의 이야기같이 공허하게 철운비의 귓전을
울렸다.
"용서해 달란 말은… 하지 않겠다. 하지만… 이것만은 믿어다오. 나는… 너
를 친아들같이 사랑했다!"
수운월은 쥐어짜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고통과 회한이 뒤덮인 그녀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배어 흐르고 있었다.
철운비는 그 모습을 망연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압니다. 당신이…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하지만…!)
그는 지그시 입술을 악물었다. 그의 눈가에도 축축한 물기가 번져 흘렀다.
(용서하십시오. 저는… 당신이 나의 생모(生母)와 아버님께 끼쳐 드렸을 고
통과 슬픔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꽉 움켜쥔 그의 두 손이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다. 그의 입에서는 차마 용
서한다는 그 한 마디 말이 나오지 않았다.
"…!"
수운월은 마른침을 삼키며 안타까운 눈빛으로 철운비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내 그녀의 눈빛은 참담하게 변했다.
(그래… 쉽사리 용서하지 못하겠지! 내가 너와 네 부모에게 한 짓을…!)
그녀는 절망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그녀는 서가를 향해 손을 뻗어 한 권의 비단책자를 집어들었다.
<소수마경(素手魔經).>
∑ 제 6 장 고루마정(固陋魔井)의 비밀(秘密)
진회하(秦淮河) 남단___
스으… 스으…
무성한 갈대숲이 끝간 데 없이 일망무제(一望無際)로 펼쳐져 있었다.
석양빛이 낮게 드리운 음울한 가을저녁,
휘___ 이잉…!
스산한 저녁 바람이 갈대숲을 흔들고 지나갔다.
문득,
"그… 그 분이 나의 아버님이란 말이지? 가장 위대했다던 그 전설적 승부사
가…?"
철벅… 철벅!
주위를 울리는 물소리와 함께 만감이 서린 소년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어
한 명의 소년이 강물에서 걸어나와 천천히 갈대밭으로 올라섰다.
전신이 흠뻑 물에 젖은 소년, 철운비!
바로 그였다. 지금 그의 허리춤에서는 예의 지옥혈겸이 묶여 있었다.
철운비의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새파랗게 질려보였다. 초겨울이 가까운 날
씨에 장시간 물 속을 헤엄쳐 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철운비는 지금 웃고 있었다. 그의 가슴
은 벅찬 감동으로 파도치고 있었다.
"고독패왕(孤獨覇王)! 그 분이 나의 아버님이시다. 아아…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는 주체할 수 없는 격동과 희열에 휩싸였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는 하루아침에 일개 천한 기녀의 아들에서 무림의
전설적 패왕(覇王)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닌가? 지금껏 그를 괴롭히던 신분의
열등감이 한 순간에 안개같이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한데 그 때였다.
"네가… 수운월(水雲月)이란 천한 계집의 아들이냐?"
돌연 한 줄기 음산한 일갈이 철운비의 상념을 깨뜨렸다.
"…!"
철운비는 흠칫 정신을 차리며 전면을 주시했다.
언제 나타났을까?
스으… 스으…
한 명의 흑포몽면인이 갈대꽃을 밟고 표표히 서 있었다. 전신을 온통 칠흑
같이 검은 천으로 감싼 인물이었다.
한 덩이 암운(暗雲)처럼 허공에 둥실 떠 있는 그 자의 모습은 흡사 지옥에
서 뛰쳐나온 아수라(阿修羅)의 그것이었다. 그의 전신에서는 전율적인 마기
(魔氣)가 뭉글뭉글 피어오르고 있었다.
철운비는 흑포몽면인이 나타나는 순간 갑자기 주위가 질식할 듯 무서운 위
압감에 짓눌리는 것을 느꼈다.
부르르!
그것을 느끼자 그의 신형이 부지불식간에 경련을 일으켰다.
"지… 옥… 천존(地獄天尊)?"
문득 철운비는 낮게 쥐어짜듯 중얼거리며 흑포몽면인을 주시했다.
"바로… 그렇다!"
흑포몽면인, 지옥천존은 몽면 속에서 음울한 어조로 대꾸했다. 몽면 사이로
드러난 그의 눈가에 서린 핏빛 노을이 한층 짙어졌다.
(대단한… 근골이다. 무영종(無影宗)이 이 어린아이를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구나!)
지옥천존은 빠르게 철운비의 근골을 살피며 몽면 속의 숨결이 다소 빨라짐
을 느꼈다. 그 역시 한눈에 철운비의 근골이 천하제일임을 알아본 것이었
다.
그는 핏빛 눈동자를 전율스럽게 번뜩이며 내심 염두를 굴렸다.
(이놈은… 제거해야만 한다. 지옥혈겸(地獄血鎌) 때문이 아니더라도… 장차
나의 대업(大業)에 결정적인 방해가 될 놈이 분명하므로…!)
빠직!
그의 검은 장포 속으로 일순 새파란 벼락이 흘렀다. 그것은 그가 손 끝에
전 내공을 모았기 때문이었다.
스읏!
지옥천존의 손이 서서히 앞으로 쳐들려졌다. 그와 함께 장포자락이 바람도
없는데 세차게 펄럭였다.
철운비의 전신이 숨막히는 긴장감으로 굳어졌다.
(피할… 길이 없다!)
그는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무공이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그로서는 지
옥천존의 살수를 도저히 피할 수 없다는 것을 통감했기 때문이었다.
빠지직!
마침내 지옥천존의 손이 장포 밖으로 드러났다. 희고 깡마른 그의 우수(右
手) 주위로는 불꽃같은 강흔(剛痕)이 일어났다.
지옥참(地獄斬)!
그것이 바로 무영종과 수운월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지옥마맥(地獄魔脈)의
천년마공(千年魔功)- 지옥참(地獄斬)의 정수(精髓)였다.
"잘… 가라 애송이!"
츠읏!
마침내 지옥천존은 휘황한 핏빛 안광을 토해내며 서서히 우수(右手)를 밀어
냈다.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마음이 독하시군 천존(天尊)!"
돌연 측면에서 한 소리 굉렬한 사자후(獅子吼)가 터졌다.
번___ 쩍! 콰아아아작!
동시에 한 명의 인물이 한 자루 철검과 한 덩이가 되어 일천 장 밖에서 벼
락같이 날아들었다.
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자후가 터졌을 때 그 신비인은 분명 일천 장 밖에 있었다. 한데, 그 음성
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는 지옥천존의 측면으로 육박하고 있지 않은가?
고오오!
일순 화산이 폭발하는 듯 굉렬한 검기의 폭풍이 장권을 휩쓸었다.
"고독… 패왕(孤獨覇王)?"
그와 함께 가공할 검기의 폭풍 속에서 지옥천존의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콰르르릉… 쩌저적…!
그리고 하늘과 땅이 일시에 허물어지는 듯한 굉렬한 폭음이 사위를 뒤흔들
었다.
아아… 보라! 그 한 차례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가자 사방 일천 장 내의 갈
대밭이 순간적으로 재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뿐이랴? 가공하게도 지면까지 쩍쩍 갈라져 균열이 일어났다. 그것은 도저히
인간과 인간의 힘이 충돌한 결과라고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크… 윽! 과연 무섭구나, 마맥검강풍(魔宗劍剛風)!"
직후 혼란의 장내를 뚫고 한 줄기 고통스런 신음성이 들렸다.
폐허로 변한 갈대밭 중앙에는 한 명의 인물이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
러질 듯 휘청거리고 있었다.
지옥천존(地獄天尊)!
바로 그였다.
그의 흑포는 갈가리 찢겨져 있었다. 찢겨진 흑포 사이로 그의 전신이 거북
등같이 쩍쩍 갈라져 있는 것이 보였다.
지옥천존은 이미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身)이었다. 그런 그이건만 돌연
나타난 신비인이 검기(劍氣)에 휘말려 무참하게 난자당한 것이었다.
대체 신비인(神秘人)은 얼마나 무서운 인물이기에 지옥천존정도의 인물을
이토록 무참하게 만들어 놓은 것일까?
한데… 없었다. 장내에는 지옥천존 혼자만이 우뚝 서 있을 뿐 예의 신비인
도 철운비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놓치지… 않는다 고독패왕! 비록… 당신이라 해도…!"
지옥천존은 북쪽을 주시하며 입술을 잘근 물었다.
파앗!
다음 순간 그는 지면을 박차고 그대로 북쪽으로 몸을 날려 까마득히 그 자
리에서 사라져 갔다.
종산(鍾山)의 북방, 험준한 산봉에 둘러싸인 하나의 폐허가 자리하고 있었
다. 그것은 이미 천년(千年) 이전에 폐허가 된 듯 거의 형태조가 유지하지
못한 석전(石殿)의 폐허였다.
화라락!
문득 어두운 암천(暗天)에서 하나의 장대한 인영이 폐허로 중앙으로 훌훌
날아 내렸다.
일신에 자색장포를 걸친 중년인으로 네모 반듯하게 각진 얼굴에 긴 눈꼬리
의 봉목을 지닌 인물이었다.
나이는 사십대 중반 정도, 만수지왕(萬獸之王) 사자(獅子)를 연상케 하는
중후한 인상의 중년이었다. 가슴 아래까지 기른 운기도는 검은 수염은 자포
인의 기품과 위엄을 한층 더해 주었다.
자포인의 어깨너머에는 한 자루 녹슨 철검(鐵劍)이 걸려 있었다. 또한 그의
장포의 소맷자락에는 한 마리 흑룡(黑龍)이 살아 있는 듯 생생하게 수놓여
져 있었다.
지금 자포인의 옆구리에는 한 명의 소년이 안겨 있었다. 흠뻑 물에 젖은 낡
은 폐포를 걸친 소년은 바로 철운비였다.
철운비의 가슴은 온통 벅찬 격동으로 들끓고 있었다.
(아아… 바로 이 분이시다!)
그는 자포인의 무쇠같은 팔에 안긴 채 만감이 뒤엉킨 눈으로 자포인을 올려
다 보았다. 그의 두 눈이 격렬한 파문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이 제왕(帝王)의 풍도를 지닌 자포인이 누군지 알아차렸
다. 그것은 비록 자포인에게 저격당한 지옥천존의 경악성을 듣지 못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핏줄, 그렇다. 그것은 본능적인 피의 흐름에서 느낄 수 있는 절실한 육감이
었다.
-고독패왕(孤獨覇王) 철무정(鐵無情)!
<고루… 성전(固陋聖殿).>
글의 내용은 그러했다.
고독패왕은 여전히 철운비를 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무영종(無影宗)이 금릉에 나타났을 때부터 모든 일이 본좌의 이목을 벗어
나지는 못했다. 어쨌든 지옥혈겸이 지옥일맥(地獄一脈)의 무리의 손에 넘어
가지 않아 다행이다."
뚜벅!
그는 진중한 음성으로 말하며 성문을 지나 폐허의 중앙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이끼에 덮인 하나의 석정(石井)이 자리하고 있었다. 여러 개의 돌
을 쌓아 만든 우물인 그것은 아주 오래된 듯 온통 검푸른 이끼로 뒤덮여 있
었다.
우물 옆에는 하나의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고루… 마정(固陋魔井).>
<고루성전(固陋聖殿)!>
-고루대제(固陋大帝) 능잠(陵潛)!
-고루마정(固陋魔井)!
-혈지(血芝) 능희연(陵姬燕).
그녀가 바로 그 장본인이었다.
어느 비오는 날 한 명의 미녀가 일단의 무리에 쫓겨 흑룡왕부(黑龍王府)로
뛰어들어 왔다.
혈지(血芝) 능희연, 후일 철운비를 낳게 되는 그녀였다.
능희연은 일단의 무서운 암중세력에게 쫓기고 있었다.
<지옥… 마교(地獄魔敎)>
그 비밀세력은 바로 지옥마교(地獄魔敎)였다.
지옥마교는 사대마맥(四大魔脈) 중 지옥마맥(地獄魔脈)의 후예였다.
그들의 마수(魔手)가 뻗히지 않은 곳은 천하에 없었다. 그대로 간다면 십
년 내 무림뿐 아니라 대명황실조차 지옥마교(地獄魔敎)에 장악당할 형편이
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철무정는 분연히 일어서서 지옥마교와 싸우게 되었다.
바로 고독패왕(孤獨覇王)이라는 위대한 이름이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무림인들은 그저 그가 무공에 미친 승부사라고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몇몇
고인들을 빼고 고독패왕의 손에 패사한 자들은 모두 지옥마교(地獄魔敎)에
서 뿌려 놓은 간세들이었다.
단 일년(一年), 그 사이 놀랍게도 지옥마교의 거대한 조직은 고독패왕 일
인에 의해 뿌리째 뒤흔들리고 말았다.
이에 대노한 지옥마교의 교주는 자신이 직접 나서 고독패왕을 제거하기로
작정했다.
-지옥노조(地獄老祖) 능황(陵皇)!
-고독패왕(孤獨覇王) 철무정!
<묵룡보패(墨龍寶牌)>
첨벙…!
끝이 없이 떨어지던 철운비의 몸이 돌연 수면과 충돌했다.
"크윽…!"
순간 철운비는 뼈를 에이는 듯한 지독한 한기에 신음성을 발하며 몸을 허위
적거렸다. 다행히 물은 별로 깊지 않았다.
위를 올려다 보니 손바닥만하게 하늘이 바라다 보였다. 그곳으로 빛이 들어
오고 있어 고루마정 안은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철운비는 시선을 모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쪽이군!)
문득 그는 눈을 빛내며 옆쪽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하나의 동굴이 흐릿
하게 드러나 보였다. 동굴은 아주 오래된 듯 온통 이끼로 가득 뒤덮여 있었
다.
한데 그것은 인공(人功)이 가해진 흔적이 나타나 보였다.
첨벙…!
철운비는 전신을 덜덜 떨며 그 동굴로 올라섰다.
동굴 속은 생각보다 건조했다. 그는 길게 뻗어 있는 동굴의 통로를 따라 걷
기 시작했다.
한데 그가 십여 장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을 때였다.
꽈르릉…!
돌연 둔중한 굉음과 함께 고루마정이 위로부터 붕괴되었다.
(아버님께서 지옥천존이 나를 추적하지 못하도록 퇴로를 끊어 놓으셨군!)
철운비는 부친 고독패왕을 생각하자 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부디 살아 계십시오! 소자가 단 한 번 만이라도 아버님이라 불러볼 수 있
도록…!"
그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중얼거렸다. 이어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겨 동굴 안
으로 걸어 들어갔다. 동굴 안에는 몇 개의 야명주가 박혀 흐릿한 빛을 뿌리
고 있었다.
"…!"
그 빛을 의지하여 철운비는 동굴의 양벽에 복잡한 문양(文樣)이 가득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일부가 이끼에 덮여 있었으나 대부분 이끼가 뜯겨져 있었다. 아마도
고독패왕이 그 문양을 읽기 위해 이끼를 뜯어낸 듯했다.
"…!"
철운비는 그 중 가장 가까운 문양 앞으로 다가갔다. 그 문양은 대전체의 글
로써 대충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고루대제(固陋大帝) 능잠(陵潛)-!
그는 고금최강자(古今最强者)로까지 거론되는 인물이었다. 그의 이름이 알
려진 것은 그가 전율스런 여사황(女邪皇) 소수여황(素手女皇)을 제거한 쾌
거 덕분이었다.
그의 고루절기(固陋絶技)는 천하최강이라 알려졌다. 그러나 실상 그의 고루
절기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천 년 그 이전, 고루대제의 사부 고루황(固陋皇)은 고루대제가 아직 젊었을
때 실종되고 말았다.
그 무렵 고루황은 남해(南海)에서 중원을 침습해 온 한 명의 무서운 마황
(魔皇)과 충돌했었다.
그리고, 그 후 또다시 사대마맥(四大魔脈) 중 불사마맥(不死魔脈)과 싸우러
가서 실종된 것이었다.
따라서 고루대제는 고루일맥의 완전한 절기를 얻지는 못했다. 고루대제가
얻은 것은 고루일맥 반부의 비급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반 쪽의 절기만으로도 그는 무적(無敵)이었다.
-고루철혈공(固陋鐵血功).
-철혈검결(鐵血劍訣).
-고루패왕참(固陋覇王斬).
-사멸마인(死滅魔刃).
-강시섭령술(彊屍攝靈術).
……
그와 같은 십종(十種)의 절기들!
이름하여 고루십종(固陋十宗)!
그것들은 모두 패도극강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 비례하여 그것들은 지극히 편협하고 잔독한 마공(魔功)의 냄새
를 물씬 풍겼다.
고루절기(固陋絶技)는 연마하는 사람의 성격을 편협하고 독선적으로 만드는
마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고독패왕 철무정이 고루절기를 연마하고도 마성에 빠지지 않은 이유는 그가
황실비전의 현문정종심결(玄門正宗心訣)을 연마했기 때문이었다.
철운비는 고루십종(固陋十宗)의 절기들을 훑어보았다. 무공에 관해서는 전
혀 문외한인 그가 쉽게 이해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문제점이 많았다. 그것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철운비는 우선 그것들을 훑어보는 것 만으로 그쳤다.
이어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겨 동굴의 끝으로 다가갔다.
동굴의 끝은 하나의 매끈한 석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한데 그곳에는 하나
의 가면이 걸려 있었다.
흉측한 고루(固陋) 형상의 가면은 고루황(固陋皇)이 남긴 두 가지 보물 중
하나였다.
-고루철검(固陋鐵劍).
-고루철면(固陋鐵面).
고루이보(固陋二寶)!
그 두 가지를 일컬어 그렇게 칭한다.
고루철면은 바로 고루일맥의 종사(宗師) 상징하는 것이었다.
고루대제 능잠은 그것을 사부 고루황에게서 직접 물려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고루철면(固陋鐵面)에 아예 손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고루철면의 아래에는 최근 새긴 듯한 두 가지의 구결이 금강지력(金剛之力)
으로 새겨져 있었다.
-단철패왕천강결(丹鐵覇王天剛訣)!
-패왕철수결(覇王鐵袖訣)!
<익룡연(翼龍淵).>
-익수룡(翼水龍)!
글의 내용은 대략 그러했다.
기록자는 바로 고루황(固陋皇)이었다.
수호익룡(守護翼龍)이라 일컬어지는 익수룡! 그것은 본래 남해 잠마혈맥의
수호영물이었다.
잠마혈맥은 저 사대마맥(四大魔脈) 중 가장 신비하다는 일족이었다.
천 년(千年) 그 이전, 당시 잠마일족(潛魔一族)의 종사는 야심을 품고 중원
에 들어왔었다.
그러나 그는 중원에 들어서자마자 한 명의 무서운 초인(超人)에 의해 가로
막히고 말았다. 그가 바로 고루황이었다.
고루황과 잠마(潛魔)의 후예는 무려 칠주칠야(七晝七夜)를 싸웠다. 그리고,
결국 반초 차이로 잠마(潛魔)의 후예가 고루황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잠마의 후예는 피눈물을 흘리며 다시 남해로 돌아갔다. 그때, 잠마의 후예
가 패배한 증거는 고루황에게 주고간 것이 바로 수호익룡(守護翼龍)이었다.
수호익룡을 받은 고루황은 그것을 어디에 쓸 것인가 고심했다. 그러다 결국
는 수호익룡을 대라철삭(大羅鐵索)으로 묶어 고루마정(固陋魔井)을 지키도
록 한 것이었다.
그것이 천 년 이전의 일이었다.
꾸워…!
문득 수호익룡이 석벽의 글을 읽고 있는 철운비의 등을 부리로 밀었다.
철운비는 몸을 돌리며 수호익룡의 부리를 다독여 주었다.
"좋아! 네 녀석과는 꽤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빙긋 미소지었다.
이어 그는 시선을 돌려 빛이 들어오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선… 이곳을 빠져나가고 보자!)
촤아!
생각을 마친 순간 그는 즉시 물살을 헤치며 앞으로 헤엄쳐 나갔다.
구우…!
그러자 수호익룡은 낮게 울부짖으며 철운비의 뒤를 뒤뚱뒤뚱 걸어 쫓아갔
다. 그 모습은 실로 우스꽝스러웠다.
아!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에 떠오르자 철운비의 이마에는 흡사 또 하나의 눈이 생겨난 듯했다.
그것은 신비롭고도 사이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기이한 모습이었다.
"구주… 팔황(九州八荒)을 뒤져서라도 나의 그 분을 찾아내겠다. 그러기 위
해서는… 정말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철운비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중얼거렸다.
"기왕 무공일도(武功一道)에 든 이상…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가장 강한 무적
자(無敵者)가 되겠다. 후훗! 그래야 위대하신 나의 아버님의 명예에도 누를
끼치지 않게 될 테니…!"
그는 어두운 하늘을 보며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그런 그의 눈에 당당한 제
왕(帝王)의 위엄을 지닌 한 중년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독패왕(孤獨覇王) 철무정!
-남해(南海).
<혈해군벌(血海軍閥)!>
-혈해구룡(血海九龍)!
혈해군벌(血海軍閥)…!
혈해구룡(血海九龍)…!
아득한 수평선…
사위 어디를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물, 푸른 바닷물 뿐이다.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 남해의 해경(海景)은 언제봐도 드넓고 시원하다.
황혼, 핏빛 일륜(日輪)이 서쪽 수평선으로 떨어지며 최후의 빛을 불사르고
있었다.
바다는 온통 붉은 핏빛이다. 마치 불을 질러 놓은 듯 물결은 걷한 불덩이에
휩싸여 있었다. 그것은 실로 일대장관이었다.
구___ 워어억!
문득 황혼에 잠긴 남해에 한 소리 창창한 괴성이 울려퍼졌다.
고오오!
그와 함께 북천(北天)으로부터 하나의 작은 점이 나타났다.
그 작은 점은 전광이 흐르는 듯한 속도로 바다 위를 가로질러 날아왔다.
아! 익수룡(翼水龍)!
그것은 전신이 온통 붉은 비늘로 뒤덮인 한 마리 상고 익룡이었다. 흡사 범
선의 돛같이 펄럭이는 익수룡의 거대한 무려 이십여 장이나 되어 보였다.
-수호익룡(守護翼龍)!
∑ 제 8 장 잠마별부(潛魔別府)의 천고기연(千古奇緣)
<잠마… 별부(潛魔別府).>
글은 그런 뜻을 담고 있었다.
철운비는 동굴벽을 주시하며 내심 염두를 굴렸다.
(잠마별부(潛魔別府)! 역시 이곳은 천 년 이전에 중원에 들어갔다가 고루황
에 패해 물러갔다는 잠마일맥(潛魔一脈)의 후예와 관계 있는 곳인가?)
구우우…!
그때 잠마별부(潛魔別府) 안에서 수호익룡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철운비는 흠칫 놀랐다.
"천왕(天王)! 무슨 일이냐?"
그는 급히 잠마별부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아…!"
철운비는 낮은 탄성을 발하며 눈을 크게 떴다.
잠마별부 안은 넓은 지하광장이었는데 그 광장의 끝에는 반쯤 열린 철문(鐵
門)이 보였다.
한데 철문 옆 하나의 거대한 괴수의 골격이 누워 있었다. 언뜻 보아 그 골
격은 수호익룡과 같은 익수룡(翼水龍)의 시체임을 알 수 있었다.
머리에서 꼬리까지의 길이가 십여 장, 가슴 부위 흉골의 높이만도 이 장에
가까운 거대한 골격이었다. 그 익룡의 골격 주위에는 손바닥 만한 운기 도
는 검붉은 비늘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한데 보라! 지금 수호익룡은 그 익룡의 시체 앞에 쭈그리고 앉아 눈물을 뚝
뚝 흘리고 있지 않은가?
그 모습에 철운비는 눈썹을 모았다.
(이것은 혹시 이 녀석 어미의 유해가 아닐까?)
그는 수호익룡과 예의 골격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천왕(天王)! 너무 슬퍼하지 마라!"
이어 그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수호익룡의 머리를 다독여 주었다.
그리고는 반쯤 열린 철문 사이로 다가가 반쪽을 들여다 보았다.
헌데,
(윽!)
철문 안을 들여다 보던 철운비는 질겁하고 말았다.
눈(眼)!
한 쌍의 새파란 눈이 철문 안쪽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눈빛은 흡사 예리하게 날선 두 자루의 칼날과도 같아 철운비를 대경실색케
했다.
철문 안은 한 칸의 석실이었다. 석실의 사면에는 수많은 고서(古書)들이 가
득 쌓여 있었는데 그것은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곰팡이 냄새를 풍기며 썩어
가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좌의 석대(石臺)가 놓여져 있었다. 예의 눈 주인은 바로 그
석대 위에 단좌하고 있었다.
나이는 삼십 전후 정도 되었을까? 극히 단아하고 영준한 용모의 문사(文士)
였다. 그는 너무 단정하고 영준하여 오히려 사악하게 느껴졌다.
그는 머리 위에 하나의 옥관(玉冠)을 쓰고 있었으며 일신에는 고통스러운
검붉은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그 검붉은 장포의 가슴에는 하나의 고루 형
상이 생생하게 수 놓여져 있었다.
석대 위의 적포문사를 자세히 살펴보던 철운비는 이내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시체(屍體)…!)
그렇다. 그 적포인은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시신이었다. 그가 살아 있는 듯
생생하게 보이는 것은 그 인물이 생전 화신지경의 내공을 연마했기 때문이
었다.
문득 철운비의 눈빛이 적포인의 가슴에 새겨진 고루형상의 무뇌에 머물렀
다.
(고루(固陋)! 혹시 이 분은 고루대제(固陋大帝)의 사부였던 고루황(固陋皇)
이 아닐까?)
그는 호기심으로 눈을 번뜩이며 성큼 석실 안으로 들어섰다.
적포인의 시신 앞에는 두 가지의 물건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한 권의 양피
비급과 붉은 빛이 도는 여인의 비녀였다.
옥비녀(玉簪)-!
그것에서는 맑은 핏빛이 우러나오고 있어 일견하기에도 예사 물건이 아님을
느끼게 했다. 비녀의 표면에는 수많은 용(龍)이 뒤엉킨 문양이 새겨져 있었
다.
"…!"
철운비는 한눈에 그 문양에 오묘한 현기가 서려 있음을 알아보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옥비녀를 집어든 후 그 아래의 비급을 살펴보았다.
<고루유전(固陋遺典).>
-고루황(固陋皇)!
-잠마여제(潛魔女帝) 궁비연(宮飛燕)!
-혈마옥잠(血魔玉簪)!
고루황의 글은 이제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철운비는 글을 읽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완전히 그 천 년의 비사(秘事) 속
으로 빠져드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의 시선은 다시 고루유전으로 옮겨졌다.
-잠마폭풍참(潛魔暴風斬)!
-절정마도(絶情魔島)!
<폭풍… 무적(暴風無敵)!>
폭풍(暴風)!
아아! 그렇다면 이곳이 바로 오대무벌(五大武閥) 중 하나인 운중(雲中) 폭
풍성(暴風城)이란 말인가?
-운중(雲中) 폭풍성(暴風城),
-청해(靑海) 유리성궁(琉璃聖宮),
-남황(南荒) 벽력부(霹靂府),
-북산(北山) 사자철림(獅子鐵林),
-전능기환전(全能機幻殿),
-폭풍검후(暴風劍后),
-벽력천왕(霹靂天王),
-유리성모(琉璃聖母),
-사자천존(獅子天尊),
-전능기황(全能機皇),
<새황쌍천(塞荒雙天)>
-막북(漠北) 적봉호황천(赤鵬護皇天),
-신강(新疆) 팔황마전(八荒魔殿),
폭풍성의 북단___
콰르르르!
하나의 웅장한 폭포가 무수한 검이 빗발치듯 절벽을 내리 긋고 있었다.
흰 선을 그으며 맹렬한 기세로 삼십 장을 떨어져 내리는 폭포… 그 폭포 아
래에는 하나의 연못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
언제부터인가 한 명의 인물이 그 연못 속에 허리까지 잠긴 채 우뚝 서 있었
다.
콰르릉…!
폭포가 일으키는 사나운 파문에도 미동도 않고 수면에 떠 있는 인물은 여인
이었다.
나이는 이십 오륙 세 정도 되었을까? 그녀는 여인임에 분명했으나 그 복장
과 차림새는 사내의 그것이었다. 아무렇게나 질끈 묶은 치렁한 장발, 헐렁
한 장포, 물에 젖은 마의가 여인의 몸에 착 달라붙어 몸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 주고 있었다.
터질 듯 풍만하게 부푼 젖가슴, 잘룩한 허리, 미끈하고 팽팽한 하복부, 누
구라도 한 번 보면 뇌살당하기 충분할 만큼 풍만하고 탐스러운 몸매였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을 보면 이내 그런 음심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말 것이
다.
그것은 여인의 용모가 너무 추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아름답기 때문
이었다. 아니, 그녀는 아릅답다는 표현보다는 기품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조각같이 단아하고 반듯한 그녀의 옥용에는 여제왕의 위엄과 기품
이 실려 있었다.
한데,
"…!"
지금 그 기품있는 미인의 아미는 고뇌로 이지러져 있었다.
(아아…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여인임을 잊기로 작정하지 않았느냐?
벽황혜(霹皇慧)야!)
그녀의 붉은 입술 가로 단내가 가쁘게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고뇌에 싸여 있었다. 그것은 그녀 내부에서 솟아오르는 본능의 욕구
때문이었다. 한창 물이 오를 나이의 젊은 육체가 그녀를 괴롭히고 있는 것
이었다.
여인 벽황혜는 고개를 흔들며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폭풍초극검결(暴風超極劍訣)이… 극성에서 막힌 것은 아직도 본능의 욕망
을 제어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이 본능의 시련을 극복하지 못하면… 천년검
후(千年劍后)의 꿈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녀의 조각같은 옥용이 괴롭게 이지러졌다.
-천년검후(千年劍后)!
-절정마도(絶情魔島)!
콰르릉…! 쏴아아…!
우뢰같은 굉음과 함께 거친 파도가 절정마도 주위를 사시사철 휘감고 있었
다.
저녁 무렵, 해가 막 기울기 직전이었다.
절정마도의 동단에는 하나의 암초가 거친 파도의 횡포에 씻길 듯 떠 있었
다.
그 암초 위에 한 명의 소년이 우뚝 선 채 낚시를 드리우고 있었다.
나이는 십 칠팔 세 정도 되었을까? 그는 하의만 걸치고 상체는 벌거벗고 있
었다.
그렇게 우람한 체격은 아니었지만 소년의 상체는 적당한 균형을 이룬 데다
가 햇볕에 적당히 탄 구리빛으로 아주 보기가 좋았다.
그의 어깨와 등에는 윤기 도는 치렁한 장발이 드리워져 있었다.
저녁 햇살 아래 드러난 소년의 용모는 십전(十全)! 그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너무도 완벽한 균형이 오히려 요악해 보이기까지 하는 준미한
얼굴, 그것은 가히 마력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철운비(鐵雲飛)!
소년은 바로 철운비였다.
그가 이곳에 온 지도 이미 일 년 반 이상이 지났다. 지금 그에게서는 처음
수호익룡을 타고 절정마도에 왔을 때의 나약함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건강하고 보기 좋은 구리빛 체격은 믿음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바다를 주시하고 있는 철운비의 두 눈은 짙은 우수와 고독이 깃들어
더욱 음울해 보였다.
지금 그는 거친 파도 속에 벽옥마간(碧玉魔竿)을 드리우고 있었다. 길길이
날뛰는 거친 파고 속에서 대체 그는 무엇을 잡으려는 것일까?
콰아! 쏴… 아아!
거칠고 맹렬한 파도는 수만 근의 압력을 담은 채 수시로 철운비의 몸뚱이를
가격해 왔다. 그러나 철운비는 마치 암초와 하나가 된 듯 조금도 요동치 않
았다.
-패왕부동결(覇王不動訣)!
-만년혈만(萬年血鰻)!
∑ 제 9 장 천황철부(天皇鐵符)와 만년혈만(萬年血鰻)
(사람이다!)
철운비의 날카로운 눈은 순간적으로 파도 속에 휘말려드는 물체가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파앗!
그것을 알아본 순간 이미 철운비의 신형은 그 쪽으로 폭사되고 있었다.
피피핑!
그는 길길이 날뛰는 파도의 끝을 밟으며 질풍같이 날아나갔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누구도 그 거친 파도 위를 그렇게 날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철운비는 수공(水功)에 있어 고금최강인 천잔조수(天殘釣修)의 절기
를 연마한 뒤에 천면마황(天面魔皇)의 무영보법(無影步法)까지 익힌 상태
다. 그러하기에 남해에서도 가장 험악한 절정마도의 파도 위를 날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한 순간,
"차___ 앗!"
파___ 앗! 화르르…!
철운비는 단번에 백 장을 날아 막 파도에 휘말리려는 그 인물을 잡아챘다.
휘___ 익!
이어 그는 벼락같이 몸을 다시 뒤집어 십여 장 밖의 암초 위에 내려섰다.
그 일련의 동작은 그야말로 벼락치듯 이루어졌다.
철운비의 숨결은 약간 거칠어져 있었다.
(누군데 이 절정마도의 주위에서 조난당한 것일까?)
그는 의아함을 느끼며 암초 위에 그 인물을 바로 뉘였다.
그 인물은 이십대 후반의 장한이었다. 네모 반듯한 얼굴에 짙은 눈썹을 지
녀 대단히 강직한 성품의 인물임을 느끼게 했다.
장한은 건장한 몸에 검은 철릭을 걸치고 있었다. 그것은 고대전사들이 입었
던 것과 같은 철릭으로 소매 끝에는 천(天) 자가 새겨져 있었다.
장한의 몸에는 별다른 상처가 없었다. 다만 그의 미간 사이에 무엇인가 깨
문 듯한 검푸른 흔적이 짙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독(毒)… 이다!)
철운비는 그 검푸른 점을 보며 나직한 신음을 발했다.
장한은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그의 사인은 중독사였다. 무엇인가 지극
히 강렬한 극독이 장한의 전신혈맥을 응고시켜 버린 것이었다.
(내 눈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 상처는 남만 특산인 인면지수(人面蜘蛛)가
문 상처다. 남만에만 사는 인면지주가 어떻게 남해에 나타났단 말인가?)
철운비는 침음하며 검미를 모았다.
-인면지주(人面蜘蛛)!
"이것은… 뭐지?"
문득 철운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장한의 소매 사이로 삐죽하게 나와
있는 쇳조각을 발견하고 그것을 집어들었다.
그것은 한 자 길이의 철편(鐵片)이었다. 얇고 긴 형태의 철편이었는데 그
전면에는 비상하는 용(龍)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천황(天皇).>
-만년혈만(萬年血鰻)!
바로 그것이었다.
한데 절정마도에 나타났던 만년혈만이 어떻게 이곳에 나타난 것일까? 게다
가 만년혈만은 이미 오래 전에 죽은 것이 아닌가?
청포노인는 경악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누가… 이 괴물을 죽였지?)
화르르…!
그는 곧장 만년혈만의 시신 위로 내려섰다.
한데,
"사람…?"
만년혈만의 시체를 살피던 청포노인은 다시 한번 경악하고 말았다. 보라!
만년혈만의 목부분, 한 명의 소년이 만년혈만의 목을 끌어안은 채 기절해
있지 않은가?
상의를 발가벗은 장발소년, 그는 바로 철운비였다. 그는 만년혈만의 목 아
래 부드러운 부분을 입으로 물어뜯은 채 기절해 있었다.
그런 그의 피부는 기이하게도 마치 뱀껍질같이 한 겹의 허물이 벗겨져 있지
않은가?
청포노인은 한눈에 그것이 탈태환골(脫胎換骨)의 현상임을 알아보고 아연함
을 금치 못했다.
(이 어린아이가 만년혈만의 피를 빨아먹어 죽었구나!)
이어 그는 철운비의 옆으로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철운비는 위기의 순간 만년혈만의 목을 끌어안고 정신없이 그 놈의 목부분
급소를 물어뜯었다. 그 덕분에 그는 만년혈만의 보혈을 대량으로 마시에 되
었고 만년혈만은 그로인해 죽게 된 것이었다.
청포노인의 안색이 경악으로 거듭 변했다.
(이 어린아이… 장차 영원히 마르지 않는 초인적인 내공을 지니게 된다. 몇
년 내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이 탄생하겠는데…!)
그의 눈빛이 흥분으로 떨렸다.
(허허… 지난밤 꿈에 한 마리 흑룡(黑龍)이 노부 청룡제왕(靑龍帝王)의 품
으로 날아들었는데… 그게 이 녀석일까?)
그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이어 그는 급히 철운비를 만년혈만의
시신에서 떼어냈다.
한데,
"…!"
부르르…!
갑자기 청포노인의 전신에 격렬한 경련이 일었다. 물 속에 잠겨 있던 철운
비의 다른 한 손이 하나의 쇠조각을 굳게 움켜 쥐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
었다.
그것을 본 청포노인은 경악과 충격으로 한껏 눈을 부릅떴다.
(천왕… 철부(天皇鐵符)! 이… 이럴 수가… 노부의 손녀사위 철면천황(鐵面
天皇)의 신부가 어떻게 이 아이의 손에 있단 말인가?)
그의 노구가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다.
촤아…!
그때 예의 거대한 범선이 물살을 헤치며 만년혈만의 시신 앞에 이르렀다.
"할아버지! 그게 무어죠?"
선수에서 부용부인이 상체를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청포노인은 흠칫했다. 그는 급히 철운비의 손에서 천황철부(天皇鐵符)를 빼
내 소매 속에 넣고 철운비를 안아들었다. 그리고 부용부인은 돌아보며 애써
담담한 신색으로 말했다.
"만년혈만이다! 이 소년이 만년혈만을 죽였구나!"
"옛? 만… 년혈만이라고요?"
"만년혈만!"
순간 부용부인과 선원들의 입에서 일제히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청포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선원들에게 명령했다.
"만년혈만을… 배에 실어라!"
스___ 읏!
이어 그는 철운비를 안고 범선 위로 가볍게 날아올랐다.
스으… 스으…
월광(月光)은 여전히 은가루 같이 해면을 비추고 있었다.
꿈결인가?
"…!"
철운비는 비몽사몽간에 아주 따뜻하고 보드라운 손이 자신의 이마를 쓰다듬
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
그는 그 손길이 수운월의 그것이라 느끼고 미소지었다. 그가 아주 어렸을
때, 때때로 그렇게 부드러운 수운월의 손이 그의 얼굴을 쓰다듬는 것을 느
끼곤 했었다.
수운월은 잠든 철운비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곤 했었다.
그녀가 왜 그랬는지 그때 철운비는 알지 못했다.
그러다 지옥혈겸이 일으킨 풍파로 수운월과 아버지 고독패왕과의 사이를 알
게 되며 철운비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수운월은 잠든 어린 철운비의 모습에 무정한 여인의 얼굴을 떠올리곤 했었
던 것이다.
그럴 때면 철운비는 늘 잠든 척했었다. 웬지 그래야 될 것 같이 느꼈고 또
잠든 척하고 있으면 수운월이 좀 더 오래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기 때문이
다.
한데 지금 철운비는 그 옛날 자신을 쓰다듬어 주던 수운월의 보드라운 손길
을 느낀 것이었다.
그 때였다.
"정신이… 드셨나요?"
문득 한 줄기 낯선 여인의 음성이 철운비의 귓전을 울렸다.
"…!"
철운비는 그것이 수운월의 음성이 아님을 느끼고 흠칫하며 눈을 떴다.
눈을 뜬 철운비의 시야에 아름답고 가냘픈 미소부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는 지금 한 칸의 아담한 방의 침상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미소부는
침상 옆에 앉아 조심스런 표정으로 철운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여자는… 누구지?)
철운비는 멍한 표정으로 미소부를 올려다 보았다.
문득 그는 자신이 누워 있는 방이 조금씩 흔들림을 느꼈다. 그것으로 그는
지금 어떤 배에 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때, 철운비를 내려다 보고 있던 미소부가 은은하게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
다.
"저는 천황군도(天皇群島)에서 온 곽부용(郭芙溶)이라고 해요. 벌(閥)내에
서는… 부용부인(芙溶婦人)이라고 불리지요."
그러나 철운비는 그녀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천황군도? 부용부인?)
그는 멍한 표정으로 내심 되뇌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부용부인 곽부용은 연민의 표정을 지었다.
"기억나지 않으세요? 도련님은 만년혈만을 죽였어요!"
그녀는 자연스럽게 철운비의 이마에 흩어져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며
말했다. 그녀의 손길은 동생을 대하듯 자연스러웠다.
철운비는 그것을 느끼고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래… 만년혈만! 그 놈이 덤벼들어 엉겁결에 목을 물어뜯었는데…)
그는 눈썹을 모으며 억지로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그때,
"부용아! 너는 잠깐 나가 있거라!"
문득 한 줄기 침중한 음성이 이 인의 귓전을 울렸다.
선실의 입구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거구의 청포노인이 우뚝 서 있었다.
스스로를 청룡제왕(靑龍帝王)이라 자칭한 바로 그 노인이었다.
"예…!"
곽부용은 청룡제왕이 나타나자 그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인 뒤 선실을 나갔
다.
"…!"
청룡제왕은 석실의 문을 등 뒤로 닫고 복잡한 눈으로 철운비를 주시했다.
이윽고,
"네… 이름은 무엇이냐?"
그는 태울 듯한 시선으로 철운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철운비(鐵雲飛)라고… 윽!"
철운비는 일어나 앉으려다 안색이 시뻘겋게 변하며 신음성을 발했다.
몸을 조금 움직이자 갑자기 내부에서 거대한 열기가 확 일어난 것이었다.
"움직이지 마라! 너의 내부에는 과다한 만년혈만의 보혈이 들어가 있어 좀
괴로울 것이다."
청룡제왕은 침중한 음성으로 말하며 철운비의 앞으로 다가서 한 손을 내밀
었다.
"이… 것을… 어디서 구했느냐?"
그의 손에는 예의 쇳조각 천황철부가 들려 있었다. 그는 천황철부를 내밀며
번개같은 눈빛으로 철운비를 주시했다. 거짓은 조금도 용납지 않겠다는 위
협이 그 눈빛 안에 깃들어 있었다.
하나 철운비는 태연히 그 눈빛을 받아냈다. 그리고 무심한 음성으로 잘라
대답했다.
"그것은… 한 장한의 시체에서 얻었소!"
"시… 체…!"
쿵쿵!
순간 청룡제왕은 안색이 백짓장같이 변하며 휘청 물러섰다. 그의 두 눈은
극도의 경악과 분노로 한껏 부릅떠졌다.
철운비는 격동하는 청룡제왕을 지켜보며 눈을 반짝 빛냈다.
(그 장한은 이 사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물이었겠군!)
이어 그는 냉정한 시선으로 청룡제왕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는… 절정마도 근역에서 중독사(中毒死) 한 채 표류하고 있었소. 그는
누구요?"
청룡제왕은 멍한 표정으로 철운비를 바라보았다.
문득 그의 노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이름은 철면천황(鐵面天皇) 초패강(楚覇强)! 혈해구룡(血海九龍) 중
천황군도의 제왕이며 혈해군벌(血海軍閥)의 제일용자(第一勇子)가 바로 그
다!"
청룡제왕은 처절한 음성으로 서서히 대답했다.
그러나 그런 그의 눈은 어느덧 평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것은 노인 청룡제
왕이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철운비는 청룡제왕의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혈해… 구룡! 그게 무어요?"
그는 냉철한 시선으로 청룡제왕을 주시하며 다시 물었다.
"남해에 살면서 혈해(血海)를 지배하는 구룡(九龍)을 모르느냐?"
청룡제왕은 검미를 모으며 철운비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내 철운비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음을 감지하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혈해구룡은 일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혈해군벌을 이루는 아
홉 개의 군도(群島)를 총칭하는 말이다!"
그의 설명은 대략 이러했다.
-쌍존(雙尊)
열화존(熱火尊), 현음존(玄陰尊),
-삼황(三皇)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
-사천신(四天神)
청룡천신(靑龍天神), 백호천신(白虎天神), 주작천신(朱雀天神), 현무천신
(玄武天神),
그들이 바로 잠마구종(潛魔九宗)이었다.
그들은 또한 양의(兩意), 삼재(三才), 사상(四象)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잠마구종은 각기 한 가지씩의 초절기를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쌍존(雙尊) 중 열화존(熱火尊)은 극양기공에서 천하무적이었
다.
천 년 그 이전, 잠마혈맥 여종사 잠마여제(潛魔女帝) 궁비연은 고루황에 패
해 피눈물을 흘리며 남해로 귀환했다.
그 직후 그녀는 잠마혈정이란 잠마일맥의 천년지보를 찾으러 용형마도란 곳
으로 갔다가 실종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의 여제자와 잠마구종은 언젠가
그녀가 돌아올 것을 믿으며 남해 각지에 뿌리를 내리고 기다렸다.
잠마구종은 남해 아홉 곳의 군도(群島)에 들어가 각기 독자적인 세력을 구
축했다.
그렇게 천 년의 세월이 지나며 잠마구종의 후예들은 더 이상 거대해질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해졌다. 그 아홉 군도를 총칭하여 혈해구룡이라 한다.
-혈해군벌(血海軍閥)!
-구룡혈황(九龍血皇)!
-철면천황(鐵面天皇) 초패강(楚覇强)!
-천황군도(天皇群島)
-철면천황(鐵面天皇) 초패강(楚覇强), 지황군도(地皇群島)
-쌍뇌모황(雙腦謀皇) 음세황(陰世皇), 인황군도(人皇群島)
-구지인마(九指人魔) 냉철성(冷鐵星),
-쌍뇌모황 음세황!
-구지인마 냉철성!
새벽 무렵,
쓰으… 쓰으…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바다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콰아아… 촤___!
그 안개를 꿰뚫고 청룡제왕의 거선은 미끄러지듯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한데,
"…!"
"…!"
안개 속으로 수많은 그림자들이 거선의 주위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 자들은
모두 물 속에 있었다. 일신에 검은 가죽옷을 걸치고 역시 검은 몽면으로 얼
굴을 가린 자들,
스으… 스으…
그들은 물 속에서 흡사 유령같이 움직이며 거선으로 접근해 들었다. 절정의
수공을 익힌 자들인 듯 그들이 움직이는 데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팟… 팟!
이윽고 거선의 아래에 닿은 그들은 손에 단 날카로운 갈고리로 배의 표면을
찍으며 배 위로 기어 올라갔다.
꾸역꾸역 소리없이 배로 기어오르는 그들의 모습은 흡사 거머리와 같았다.
그 순간,
"불… 불이야!"
"저… 적(敵)이다. 케___ 에엑!"
화르륵___!
배의 한쪽에서 돌연 불길이 확 일며 날카로운 경호성과 비명이 밤하늘을 찔
렀다.
이 무슨 돌연한 사태인가?
삽시에 선상은 아수라장으로 화하고 말았다.
화다닥! 화르르르…!
"크___ 아악!"
"웬놈들이냐? 크___ 악!"
무섭게 치솟는 화염과 찢어질 듯한 비명, 급급한 호통성이 마구 뒤섞여 터
져올랐다.
새벽의 적막은 무참하게 깨지고 주위는 온통 아비규환의 수라장이 되고 말
았다.
스… 스슥…!
새벽의 습격자들은 수도 없이 바다에서 떠올라 속속 배 위로 날아올랐다.
돌연한 사태에 놀라 당황하며 선실을 뛰쳐나오던 청룡군도의 전사들은 습격
자들이 휘두른 기형장도에 무참하게 쓰러졌다.
츠___ 팟!
"크___ 윽!"
"아아악___!"
잇따른 비명과 비명, 그 속에 마침내 지옥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아수라의 생지옥이…!
선미(船尾)!
"크___ 윽!"
쿠웅___!
한 명의 청포노인이 피를 뿌리며 뒤로 비칠 밀려났다. 그는 끝내 버티지 못
하고 한쪽 무릎을 꿇으며 갑판에 무너졌다.
청룡제왕(靑龍帝王) 곽붕(郭鵬)!
바로 그였다.
헌데 끔찍했다. 그는 복부가 길게 찢겨져 꾸역꾸역 선혈을 쏟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전신에는 별모양의 암기들이 수십 개나 박혀 있
지 않은가?
문득 비웃음이 깃든 스산한 냉소가 청룡제왕의 귓전을 울렸다.
"흐응! 청룡군도의 제왕이라는 늙은이의 실력이 고작 이 정도라니… 실망인
데?"
청룡제왕의 일 장 앞에 한 명의 괴인이 우뚝 서 있었다.
날렵하고 늘신한 체구, 다른 습격자들과 마찬가지로 검은 피의를 머리에서
발 끝까지 두른 자였다.
그 자의 이마 위에는 섬뜩한 핏빛 나비의 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피의괴인은 허리춤에 길고 짧은 두 자루의 얄팍한 장도를 차고 있었
다.
그 칼은 중원의 것이 아닌 동영 왜구들의 칼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츠___ 읏!
냉오한 태도로 팔짱을 끼고 있는 피의괴인의 몽면 사이로 한 쌍의 가는 눈
이 독사같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때,
"크으… 비겁한 놈! 암기 따위로 암습하다니… 그러고도 무사라 할 수 있느
냐?"
청룡제왕이 입가로 피를 토하며 부릅뜬 눈으로 피의괴인을 노려보았다.
그는 돌연하게 쳐들어 온 피의괴인이 발출한 암기에 격중되어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한 것이었다.
"흥…! 이기기 위해서는 무슨 수라도 쓸 수 있다! 그것이 위대한 동영마교
의… 율법이다…!"
피의괴인은 냉소하며 잔혹한 음성으로 잘라 말했다.
순간 청룡제왕의 안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너는… 역시… 동영마교(東瀛魔敎)의 왜구였느냐?"
그러나 피의괴인은 청룡제왕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장도(長刀)에 왼손을
가져갔다.
그 자는 좌수도법(左手刀法)을 연마한 듯했다.
∑ 제 10 장 성모천도(星母天島)의 풍운(風雲)
-혈해성전(血海聖殿)!
그곳이 바로 혈해성전이었다.
혈해성전에는 혈해성모와 일단의 여인들이 기거한다.
혈해성전이 있는 산봉 아래에는 구궁(九宮)의 방위로 아홉 채의 성(城)이
바다를 면하고 둘러서 있었다. 그 성채를 혈해구룡군도(血海九龍群島)가 각
기 하나씩 차지하고 있었다.
이름하여 호화구룡성(護華九龍城)____!
혈해구룡군도의 지존들은 매년 일정 기간 그 성에 머물며 혈해성모의 신변
을 경호하고 있었다.
쏴아…!
청룡군도의 전신이 물살을 헤치며 성모천도(聖母天島)의 유일한 포구에 닿
았다.
이윽고 선교가 내려지고 먼저 삼인(三人)이 포구로 내려섰다.
청룡제왕 곽붕, 부용부인 곽부영, 그리고 철운비였다.
청룡제왕은 살인혈접에게 당한 부상 때문에 철운비에 의해 부축되어 내려섰
다.
"…!"
청룡제왕을 부축하며 막 지면으로 내려서던 철운비의 두 눈이 번뜩 빛났다.
선창 저쪽에 한 명의 인물이 우뚝 선 채 그들 일행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
이다.
나이는 오십 전후 정도, 깡마른 체격에 회색장포를 걸친 인물이었다. 은은
한 냉소를 짓고 있는 얄팍한 입술, 일견하여 그는 지극히 강팍하고 냉혹한
인상을 풍기는 인물이었다.
"조심해라! 저 자가 구지… 인마(九指人魔) 냉철성(冷鐵星)이다!"
문득 철운비의 귓가에 청룡제왕의 침중한 전음성이 들려왔다.
(구지… 인마 냉철성! 삼황 중 인황(人皇)의 후예…!)
철운비는 청룡제왕을 부축하여 구지인마 쪽으로 다가서며 입 안으로 나직이
되뇌었다.
-구지인마 냉철성!
-빙서시(氷西施) 냉철화(冷鐵花)!
밤(夜), 깊은 밤이었다.
수호구룡성(守護九龍城)의 어느 밀실,
"아아… 흑…!"
숨넘어가는 여인의 신음이 뜨겁게 밤을 태우고 있었다.
하나의 넓은 상아침상 위에서 풍만한 여인의 동체가 뱀같이 꿈틀거리고 있
었다.
여인의 나이는 삼십대 중반 정도, 기품있고 완숙한 미모를 지닌 여인이었
다.
그녀의 도톰하고 육감적인 입술가에는 하나의 붉은 점이 돋아 있었다. 그것
은 여인의 매력을 한층 돋보이게 만들어 선정적인 아름다움마저 물씬 풍겼
다.
"아아흑… 싫어… 아아!"
여인은 희고 풍만한 몸을 뒤틀며 연신 달뜬 교성을 토해냈다.
그녀의 풍염하고 모양 좋은 유방이 하나의 손에 의해 제멋대로 이지러지고
있었다. 계집같이 희고 갸름한 그 손은 교묘한 움직임으로 여인의 유방을
주물러대고 있었다.
"하아… 음…!"
풍만한 젖무덤이 이지러지고 젖꼭지가 비틀릴 때마다 여인은 참을 수 없는
듯 숨넘어가는 교성을 발했다.
그러나 손의 주인은 말이 없다. 그는 달뜬 몸부림에 신음하는 여인의 모습
을 냉철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희고 갸름한 손, 그것같이 얼굴 역시 희고 단아한 중년의 사내였다. 그는
눈빛이 지극히 유현하여 심기가 깊어 보이는 인물이었다.
한데, 여인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인데 비해 사내는 회색장포에
옥관까지 머리에 쓴 단정한 차림이었다.
슥…
문득 사내의 한쪽 손이 여인의 유방을 떠나 아래로 이동했다.
눈같이 희고 깨끗한 피부, 적당히 살이 오른 허리, 팽팽한 하복부…, 사내
의 손길은 새털같이 부드럽게 여인의 나신을 쓸어 내려갔다.
"아… 흐윽…!"
사내의 손이 희멀건 허벅지 주위에 이르자 여인은 몸을 비틀며 숨을 헐떡였
다.
처음에는 수치심으로 꼭 붙어 있는 그녀의 탐스러운 하체는 사내의 손길에
따라 점점 벌어졌다. 윤기 도는 두 개의 옥주가 벌어짐에 따라 여인의 신비
지궁이 사내의 눈 아래 드러났다.
무성하고 까실까실한 체모가 덮인 둔덕, 그 둔덕 아래로 갑자기 절벽이 나
타났다. 그러나 그 절벽 아래는 무성한 방초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이때,
"제… 제발… 안으로…!"
사내의 손이 허벅지 바깥만 떠돌자 여인은 안타까운 듯 애원했다. 그 모습
에 사내의 입가에 비로소 득의의 미소가 번졌다.
"더… 벌려서… 세워라!"
그는 음침하게 명령했다.
"나… 나쁜 사람…!"
여인은 수치감으로 옥용이 새빨갛게 변하며 녠 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도 희멀건 허벅지를 한껏 벌려 세
웠다. 그 모습은 완전히 사내를 받아들이는 자세 그대로였다.
그녀는 안타깝게 사내를 갈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내의 눈은 여전히 무심
하고 냉정했다. 그는 한 줄기 조소마저 어린 냉랭한 눈빛으로 무방비 상태
로 개방된 여체의 비밀스러운 곳을 주시했다.
이윽고 그의 흰 손이 여인의 허벅지 안쪽으로 이동했다. 그곳의 방초 숲은
이미 따뜻한 온천수로 촉촉히 젖어 있었다.
사내의 손이 천천히 방초 사이를 헤쳤다.
"흐윽…!"
순간 여인은 사내의 손길을 느끼며 전율적인 신음을 발했다.
마침내 여인의 젖은 방초가 좌우로 갈라지며 신비롭고 은밀한 옹달샘이 드
러났다. 오묘한 꽃잎으로 둘러싸인 그곳에는 맑은 분홍빛 이슬이 배어 흐르
고 있었다.
한 순간,
"아악… 아흐윽…!"
여인의 입에서 갑자기 비명에 가까운 숨가쁜 신음이 터져나왔다. 그녀의 엉
덩이가 한껏 쳐들려지며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내는 여체의 보드라운 살점 속으로 손가락을 더욱 깊
이 진행시켰다.
"아아… 여… 여보…!"
그러자 여인은 거의 절규하듯 몸부림치며 숨가쁜 신음을 토해냈다.
사내의 교묘한 행위에 여체는 몇 번이고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거듭되는
격렬한 자극에 여인은 거의 반실신 상태가 되고 말았다.
"…!"
그제서야 사내는 손을 떼고 일어서 자신의 하의를 벗었다. 그러자, 비정상
적이라 할 만큼 흉측하고 웅대한 사내의 실체가 어둠 속에 드러났다.
사내는 활짝 개방된 여체 사이로 들어갔다. 이어 그는 두 손으로 여인의 허
벅지를 안고 여체의 깊은 곳에 자신의 일부를 접근시켰다. 더할 수 없이 보
드랍고 따뜻한 살점이 그의 예민한 일부에 닿았다.
"음…!"
사내 역시 약간 숨이 거칠어지며 낮은 신음을 발했다. 그는 흥분을 누르며
서서히 하체를 내리눌렀다.
"흐윽…!"
그러자 실신했던 여체가 재차 강렬한 충격으로 퍼덕이며 깨어났다.
사내는 그런 여체를 누르며 격렬한 긴축감을 즐겼다. 지그시 눈을 감은 그
의 입가에는 만족스런 미소가 어렸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
번쩍!
본능의 쾌락에 몰입해 가던 사내의 눈이 돌연 번쩍 떠지며 싸늘한 한망이
작렬했다.
"살인… 혈겁! 예의가… 없군!"
사내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음산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이어 그는 천천히
여인의 몸에서 자신의 일부를 이탈시켰다.
파앗!
그와 동시에 그는 빠르게 여인의 혼혈(昏穴)을 눌러 기절시켰다.
"후훗! 역시… 장래의 혈해제왕(血海帝王)답군 도주(島主)!"
문득 한 줄기 음울한 음성이 어둠 속을 울렸다.
스스스…
언제 나타났을까? 어두운 밀실의 천정에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 흑영은 마치 거미같이 천정에 달라붙어 있었다.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검은 피의를 걸친 몽면여인은 허리에 크고 작은 두
자루의 장도를 찌르고 있었다.
이 몽면여인은 누군가?
-살인혈접(殺人血蝶) 용천파!
-지옥… 천존(地獄天尊)!
-주작천후(朱雀天后)!
그긍…!
모황은 천천히 밀실의 석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밀실 밖에는 사 인(四人)의 거한들이 지키고 서 있다가 모황이 나타나자 즉
시 시립했다.
"사… 흉(四兇)! 저 계집을… 너희에게 맡긴다!"
모황은 사 인의 거인을 스쳐가며 무감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도주!"
"맡겨 주십시오!"
사 인의 거한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모황은 그들을 향해 무심히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곧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모황이 사라지고 나자 사 인의 거힌 사흉(四兇)은 고개를 들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런 그들의 눈은 한결같이 욕정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흐흣… 운이 좋은데? 그 고고한 주작군도의 암컷이 우리에게 내려지다니
…!"
"흐흐… 제일 먼저는 나다, 아우들!"
그들은 음탕한 웃음을 흘리며 꿀꺽 침을 삼켰다.
이어 그들은 흉흉하게 눈을 번들거리며 다투어 밀실 안으로 들어갔다.
철컹____!
소리를 내며 밀실의 문이 안으로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악! 너… 너희들이… 감히!"
"흐흐흐… 천후(天后)! 앙탈부릴 것 없다. 극락으로 보내 줄 테니…!"
"아아악!"
처절한 주작천후의 비명과 함께 사흉(四凶)의 음험한 웃음이 뒤섞여 밀실
밖으로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허나 그 소리는 밀실 밖 통로에서 밀폐된 채 외부에 조금도 새어나오지 않
았다.
깊은 밤, 밀실 안에서 어떤 짐승같은 만행이 벌어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
었다.
아무도…
∑ 제 11 장 지옥(地獄)의 밀실(密室)
유령인가?
스슥!
하나의 날렵한 인영이 소리없이 밤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이 주위 어디에… 음세황(淫世皇)의 처소가 있을 텐데…!)
인영은 빠르게 주위를 살피며 몸을 날렸다.
-지황부(地皇府).
-쌍뇌모황(雙腦謨皇) 음세황(淫世皇).
-구지인마(九指人魔) 냉철성(冷鐵星).
바로 그들 이인(二人)이었다.
구지인마는 철운비가 일 차 만나 본 바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 철운비는
쌍뇌모황 음세황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지황부(地皇府)에 잠입하려는 것이
었다.
스스스!
철운비는 이윽고 하나의 잘 가꾸어진 정원에 내려섰다.
한데, 그 때였다.
"후후훗! 대담한 놈이군! 감히 지황부를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다니…"
돌연 정원의 좌측에서 한 줄기 음산한 냉갈이 들려왔다.
"…!"
철운비는 일순 흠칫했다.
피____ 이잉!
그러나 그의 한 손이 벼락같이 좌측으로 그어졌다. 그의 소매 속에서 하나
의 검붉은 낫이 불쑥 튀어나와 빛살같이 허공을 갈랐다.
"엇!"
순간 어둠 속에서 나지막한 경탄성이 터졌다.
스… 슷!
이어 하나의 인영이 벼락같이 십 장 밖으로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흡사 한
마리 날렵한 암표범같이 물러서는 그 인물 역시 철운비와 같은 전신을 피의
로 휘감고 있었다.
짧고 긴 두 자루의 장도를 허리춤에 찌른 자객차림의 몽면인, 그를 본 순
간,
(살… 인혈접!)
철운비는 경악하며 발출했던 낫을 거두어 들였다. 그 낫은 끝부분에 극히
가는 쇠사슬이 연결되어 자유자재로 거두어 들일 수가 있었다.
그때,
"지옥… 혈겸인가?"
살인혈접은 몹시 놀란 듯 미미하게 몸을 경련하게 철운비를 주시했다.
"…!"
철운비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낫, 즉 지옥혈겸(地獄血鎌)을 소매 속에 넣으며 살인협접을 주시했다.
"후훗! 놀라운데? 동영 은밀종(隱密宗)의 제일상인(第一上忍)께서… 쌍뇌모
황의 신변을 지키다니…!"
그의 음성은 낮고 스산했다.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살인혈접의 두 눈에 놀라움의 빛이 스쳤다.
"너… 였군! 괴물 같은 애송이!"
그는 목소리만으로 상대가 철운비임을 알아보았다. 바로 지난 밤 자신의 칼
에 베이고도 죽지 않은 어린 괴물임을, 그것을 아는 순간 살인혈접의 눈에
서 전의가 사라졌다.
(불사지체뿐 아니라… 저 무서운 지옥혈겸을 지녔다니…! 정면으로 맞서서
는 손해만 볼 뿐이다!)
그는 내심 영악하게 염두를 굴렸다.
스슷!
다음 순간 그는 더 이상 지체지 않고 유령같이 뒷걸음질쳤다.
한데,
펄럭!
그가 움직이는 순간 그의 가슴 부위의 의복이 쩍 갈라지며 옆으로 벌어졌
다. 방금 전 살인협접은 단 한 발의 차이로 지옥협겸을 피했으나 그것의 무
서운 무형예기는 그의 옷깃을 잘라낸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 실로 뜻밖의 광경이 벌어졌다.
훌렁…!
벌어진 살인혈접의 피의 안 쪽에서 갑자기 한 쌍의 탐스러운 유방이 불쑥
튀어나온 것이 아닌가?
"어… 멋!"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낀 살인혈접은 아연하여 황망히 두 손으로 가슴을 가
렸다. 너무도 놀란 나머지 그녀는 부지불식간에 여인 본래의 날카로운 교성
을 토해냈다.
그 광경에 철운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계… 집이었나?)
그는 어이없음을 느끼며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그는 꿈에도 동영제일인자
가 계집임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놀라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잡아야… 한다! 그냥 보내면 시끄러워진다!)
스팟!
생각을 마치는 순간 철운비는 벼락같이 신형을 떠올려 살인혈접을 덮쳐갔
다.
-무영비폭(無影飛暴)!
-은밀장안술!
밀실____
"흐흐… 여… 역시 대단한데? 모황께서… 일 년 넘게 데리고 놀만하군!"
사내의 숨가쁜 헐떡임이 밀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침상 위,
"…!"
여인 주작천후가 발가벗은 채 축 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엄청난 충격으로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천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풍만한 몸은 연신 강한 압박에 출렁대고 있었다.
그녀의 복부 위,
"헉… 헉…!"
한 명의 건장한 사내가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주작천후는 풍만한 왼쪽 허벅지가 사내의 팔에 안긴 자세로 능욕당하고 있
었다. 그 때문에는 내밀한 부위와 그곳으로 드나드는 사내의 흉측한 일부가
간간이 드러나 보였다.
"흐흐…!"
갑자기 사내의 행위가 급격히 빨라졌다. 아마도 절정이 가까워진 듯했다.
그때,
"흐흣! 적당히 해라, 막내! 이 노대(老大)에게 또 한 번 기회를 주어야 하
지 않겠느냐?"
지켜보던 다른 사내가 음험하게 웃으며 말했다.
침상 주위에는 세 명의 사내가 낄낄거리며 주작천후의 무참한 모습을 바라
보고 있었다. 그 자들은 이미 모두 한 차례씩 주작천후를 능욕한 듯했다.
그러나 아직도 욕정을 다 채우지 못한 듯 한결같이 두 눈이 벌겋게 충만된
모습이었다.
그때,
"으… 음…!"
사내의 행위가 거의 발작적으로 빨라졌다. 그 행위의 격렬함으로 온통 침상
이 무너질 듯 흔들렸다.
부르르!
순간 축 늘어져 있던 주자천후의 허벅지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와
함께 사내는 주작천후의 내부가 무서운 힘으로 자신을 조여댐을 느끼며 두
눈을 한껏 부릅떴다.
한데,
"헤헤… 이 계집, 대단한 색골… 허억!"
음흉하게 뇌까리던 사내의 입에서 돌연 숨넘어가는 비명이 터져나왔다.
퍼____ 억!
동시에 사내의 목이 갑자기 싹둑 잘려지며 침상 저편으로 날아갔다.
후두둑…!
잘려진 사내의 목에서 피분수가 확 일어나 침상 위에 늘어져 있는 주작천후
의 하얀 동체를 삽시에 검붉게 물들였다.
"웬… 놈이냐?"
"허____ 억! 조심해라!"
순간 나머지 세 사내의 입에서 경악과 비명이 뒤섞여 터져나왔다.
스슥! 찌____ 찌직!
한 자루 시뻘건 낫이 돌연 빛발같이 허공을 난무하는 것을 본 것이었다.
퍼퍼퍽____!
"케____ 에엑!"
"크악…!"
쿵… 쿵…!
선혈이 분수처럼 터지며 끊어진 팔다리가 난무했다. 삼 인의 사내 그들은
처음의 사내와 같이 일제히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직후,
"버러지… 만도 못한 놈들…!"
스으…
문득 밀실 안으로 한 명의 야행인이 날아 내렸다.
한 자루 검붉은 낫을 손에 든 소년, 바로 철운비였다. 그는 살인혈접의 말
을 듣고 죽시 이곳으로 왔으나 이미 늦은 상태였다.
(쯧! 이 여인은 누군데 이런 난행을 당한 것일까?)
철운비는 딱한 듯 혀를 차며 침상으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본 주작천후의 몸은 온통 네 사내에게 무참하게 난행당한 흔적으
로 만신창이었다. 젖가슴은 숱하게 주물리키어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고 구
타를 당한 듯 입과 코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민망하게 활짝 벌어진 흐드러진 허벅지 안쪽의 계곡은 사내들의 배
설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네 명의 사내가 토해낸 희끄므레한 체액이 역류하는 여체의 적나라한 부분
을 직시한 철운비는 절로 얼굴이 벌개졌다. 어린 나이지만 이미 숱한 여자
를 경험한 그였다. 그러나 차마 직시하기에 민망하고 무참한 모습인 것이
다.
철운비는 혀를 차며 주작천후의 연마혈(軟痲穴)을 풀어 주었다.
그러나 연마혈이 풀리긴 했으나 주작천후는 그것조차 못 느끼는 듯 한동안
멍한 눈으로 천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흐… 윽!"
퍼____ 억!
그러다가 돌연 그녀는 오열을 터뜨리며 맹렬하게 자신의 천개혈(天蓋穴)을
내리쳤다.
파____ 앗!
하지만 그보다 빨리 철운비의 손가락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이내 주작천후의
오른손이 축 늘어졌다. 철운비는 그녀가 자진할 것을 예상하고 기다렸다가
재빨리 저지한 것이었다.
그는 침중한 음성으로 주작천후에게 말했다.
"나는 이곳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소! 자진을 하든 말든… 그것은 부인의
자유요. 하지만…!"
그는 일부러 말을 끊으며 주작천후를 내려다 보았다.
"혈해군벌의 운명이 부인의 손에 달려 있을 수도 있으니… 알아서 하시오.
속편하게 자진하고 말 것인지… 알아서 그대를 이렇게 만든 자에게 복수할
것인지…!"
스윽!
말을 마침과 함께 철운비는 무심하게 몸을 돌려세웠다.
"기… 다려요!"
순간 주작천후는 찢어지는 듯한 음성으로 외치며 황급히 침상에서 내려섰
다.
"악!"
쿵…!
그러나 그녀는 뾰족한 비명을 토하며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너무 지
독한 난행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철운비는 급히 다가가 주작천후를 부축했다.
"같이… 가요! 그… 짐승 같은 놈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어요!"
주작천후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철운비에게 안겼다.
철운비는 그런 그녀를 냉철한 눈으로 내려다 보았다.
(후훗! 물론 죽으면… 안 되지! 너는 본좌의 가장 골칫거리를 하나 덜어 준
소중한 계집이니…!)
그는 내심 사이한 웃음을 흘리며 침상 옆에 놓인 주작천후의 의복을 집어들
었다.
태어날 때부터 가장 천한 기녀와 창녀들의 틈에서 자란 철운비였다. 따라서
여인에 대한 그의 선입견은 아주 퇴폐적인 것이었다. 그의 뇌리에서 여인들
의 순정이나 애정에 대한 환상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였다.
하지만 주작천후가 어찌 철운비의 그런 내심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자신에 대한 철운비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 알면 아마 그녀는 수치심에 못
이겨 그 자리에서 혀를 물고 자진하고 말았을 것이다.
(빠드득…! 음세황! 복수하고 말겠다! 나 주작천후를 버린 대가로…!)
츠읏!
어느덧 주작천후의 봉목이 새파란 독기(毒氣)로 번뜩이기 시작했다.
피이잉____!
철운비는 암천을 가르며 질풍같이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의 오른쪽 팔에는
주작천후가 끼어 있었다.
"서둘러야 해요! 그 자가… 성모께 어떤 짓을 할지 몰라요!"
주작천후는 초조한 표정으로 철운비를 재촉했다. 주작천후를 안은 철운비는
지금 성모천도의 중앙에 자리한 혈해성전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혈해성모(血海聖母)의 거처인 혈해성전의 주위는 혈해마녀라는 일천 명의
여전사들에 의해 사시사철 방호되고 있었다.
혈해마녀(血海魔女)-!
그녀들은 하나하나가 혈해구룡군도의 도주들만큼 초절정의 무공을 지닌 여
전사들이었다. 아마도 그녀들은 지상에 존재하는 가장 막강한 조직일 것이
다.
그 혈해마녀들에 의해 방호되는 혈해성전은 가히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이 혈새성전에 들어가면 한 가지 통행패를 지녀야 한다.
<성모령(聖母令)>
바로 그것이었다.
성모령은 모두 세 개였다.
그 중 하나는 역대 구룡혈황들이 소지하게 되어 있었다. 당대 소지자는 바
로 철모(鐵母) 초절화였다.
성모령 중 또 하나는 다음 대 혈해성모가 될 후계자가 지니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혈해성모의 가장 절친한 친구에게 주어진다.
주작천후-!
그녀는 바로 당대 혈해성모의 하나뿐인 고우(故友)였다. 그래서 혈해성모는
마지막 세 번째 성모령을 주작천후에게 내렸다. 따라서 혈해구룡의 지존 중
수시로 혈해성전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주작천후뿐이었다.
쌍뇌모황(雙腦謨皇)-!
그 자가 노린 것은 바로 주작천후의 성모령이었다.
주작천후는 십 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독수공방해 왔다. 한창 물이 오른 나
이의 독수공방은 정말 견디기 힘든 노릇이었다.
쌍뇌모황은 그것을 이용하여 교묘히 주작천후에게 접근했다.
결국, 주작천후는 쌍뇌모황이 펼친 흥분제에 중독된 상태에서 그에게 몸을
허락하고 말았다.
그것이 일 년 전의 일이었다.
한 번 쌍뇌모황에게 몸을 허락한 주작천후는 체념 상태에서 수시로 쌍뇌모
황의 욕정이 제물이 되어 왔다.
그러나 그녀는 꿈에도 알지 못했다. 쌍뇌모황이 노린 것이 바로 자신이 지
닌 성모령임을!
그녀는 쌍뇌모황이 자신에게 애정을 갖고 있지 않다 해도 최소한 그 자가
관심을 두는 것이 자신의 육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한 가닥 자존심마저도 방금 전 무참하게 짓밟히고 말았
다. 쌍뇌모황은 오로지 주작천후에게서 성모령을 뺏을 생각으로 접근한 것
뿐이었다.
그 사실은 네 흉한들에게 윤간당한 치욕 이상으로 주작천후의 방심에 크나
큰 상처를 주었다. 그것은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마지막 자존심이었던 것
이다.
-혈해마녀(血海魔女)!
-유명조강(幽冥爪剛)!
<혈해성전(血海聖殿).>
-혈해성모(血海聖母) 궁월영(宮月影)!
-용형… 마도(龍形魔島)!
섬의 이름은 바로 그것이었다.
헌데 혈해성모 궁월영이 막 용형마도의 위치를 해도(海圖)에 그녀 놓는 순
간이었다.
스____ 윽!
돌연 한 줄기 극히 미세한 경풍이 뒤쪽에 일어나 궁월영의 배심으로 날아들
었다. 그 경풍을 극히 미세하여 잠마여제의 후예인 그녀조차 바로 지척에
이르러서야 감지할 수 있었다.
"…!"
궁월영은 일순 흠칫했다.
하나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녀는 이미 금강불괴의 몸으로 어떤
신병이기로도 그녀의 몸에 상처를 입히지 못한다. 게다가 그녀가 걸친 용린
전포(龍鱗戰袍)는 최고의 호신보갑이었다.
그것을 믿고 있는 궁월영은 경풍이 자신의 배심을 가격해도 별로 신경을 쓰
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 일은 왕왕 사람의 상상을 벗어날 때가 있는 법이다.
파____앗!
돌연 하나의 극히 미세한 침(針)이 궁월영의 용린전포를 꿰뚫고 들어와 그
대로 그녀의 등 뒤 명문혈(命門穴) 깊숙이 박혀 버리는 것이 아닌가?
"흑!"
쿠____ 웅!
순간 궁월영은 따끔한 통증과 함께 삽시에 전신의 모든 내공이 흩어짐을 느
꼈다.
명문혈은 인체의 삼백육십 개 대혈 중에서도 공력의 흐름을 통제하는 가장
중요한 요혈(要穴) 중 하나인 것이다.
"전능… 기환전(全能奇幻殿)의 전능용수침(全能龍鬚針)?"
그녀는 옥용이 하얗게 변하며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바로 그 직후,
"후훗! 그렇소! 바로 오대무벌(五大武閥)중 전능기환전의 보물인 전능용수
침이오! 그것 외에 성모의 잠마혈강(潛魔血剛)을 꿰뚫을 신병이기가 하늘
아래 달리 있겠소?"
한 줄기 음사한 음성이 궁월영의 귓전을 울렸다.
그와 함께 대전의 입구에 한 명의 회포문사가 유령같이 나타났다. 지극히
반듯하고 준미한 용모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유현한 눈빛을 지닌 인물이었
다.
"쌍뇌… 모황! 당… 신이… 감히…"
그 자를 본 순간 궁월영은 경악과 분노로 두 눈을 부릅떴다.
쌍뇌모황 음세황-!
그렇다! 회포문사는 바로 삼황(三皇) 중 지황(地皇)의 후예 쌍뇌모황(雙腦
謨皇)이었다.
∑ 제 12 장 용형혈정(龍形血鼎)의 비밀(秘密)
-고루황(固陋皇)!
-신비잠룡(神秘潛龍) 철운비(鐵雲飛)!
<천황부(天皇府).>
-구룡적황포(九龍赤皇袍)!
그 장포는 바로 혈해군벌의 맹주 구룡혈황(九龍血皇)을 상징하는 장포였다.
"갑갑하시더라도 잠시 참으셔야만 해요. 이것이 공자께서 삼십오대 구룡혈
황으로서 첫 번째로 성모님께 알현하는 것이니까요!"
곽부용은 손윗 누이같이 조용한 어조로 타이르며 철운비에게 구룡적황포를
입혀 주었다.
"…!"
철운비는 체념의 한숨을 내쉬며 고통스런 장포를 내려다 보았다.
문득 그는 부드럽고 온화한 표정의 곽부용을 바라보며 내심 고소를 지었다.
(이 여자는 꼭 친누님같다. 그러니 싫은 표정도 못 짓겠구나!)
조용하고 온화한 성품의 곽부용은 마치 손윗누님같아 철운비는 그녀를 함부
로 대할 수가 없었다.
청룡제왕은 한쪽에 앉아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 아이는 노부뿐 아니라 부용에게도 초패강의 대신이 되어줄 것 같아 다
행이다!)
그는 싱글벙글하며 굳이 자신의 내심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는 아름다운
손녀를 바라보며 내심 한 가지 일을 결심했다.
(부용은… 독수공방하기에는 너무 젊고 미인이 아닌가? 저 아이의 장래문제
도 철모와 깊이 한번 상의해 봐야겠다!)
그는 은은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그 때였다.
"냉… 철화(冷鐵花)입니다!"
한 줄기 찬바람 같은 차고 가는 여인의 음성이 들렸다.
스스슥…
이어 하나의 날렵한 인영이 삼인(三人)의 앞에 내려섰다.
-빙서시(氷西施) 냉철화(冷鐵花)!
-철모(鐵母) 초절화!
삼십사대 혈해군벌의 맹주였던 일세여장부!
그녀가 왔다는 말에 삼 인은 가슴이 철렁했다. 현재 철운비는 철모의 제자
로 위장한 상태였다.
하나 정작 철모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풍파의 불씨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청룡제왕은 냉철화를 바라보며 침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 분은 어디 계시느냐?"
냉철화는 고개를 저었다.
"알지 못합니다! 철모께서는 상륙하시자마자 누군가를 만나신다고 모처로
가셨습니다!"
그녀의 음성은 여전히 차갑고 분명했다.
그때 철운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두 번째 보고는 무엇이냐?"
"반도… 음세황(淫世皇)의 종적이 최종 확인되었습니다!"
냉철화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번- 쩍!
순간 철운비의 두 눈에 강렬한 신광이 뇌전같이 흘렀다.
"어디에… 있느냐 놈은?"
그는 흉흉하게 눈을 번뜩이며 다그쳐 물었다.
냉철화는 차가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벌(閥) 휘하의 순시선들이 정오 무렵 음세황이 한 척의 쾌속선을 타고 불
귀마해(不歸魔海)로 들어가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추적했으나… 그 자
는 아주 빠르게 불귀마해(不歸魔海)로 들어가 더 이상 추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불귀… 마해?"
철운비는 검미를 모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 듣고 있던 청룡제왕이 설명을 주었다.
"불귀마해란 이곳에서 북동쪽으로 오백여 리 떨어진 곳에 있는 죽음의 바다
를 일컫는 말이네!"
말을 하는 그의 안색이 극히 침중하게 변했다. 그 표정으로 미루어 철운비
는 불귀마해란 곳이 예사로운 곳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불귀마해(不歸魔海).
∑ 제 13 장 뜨거운 유혹(誘惑)
-천강산수(天剛散手)!
끼익…!
문득 문이 열리며 철운비가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한데 막 안으로 들어서던 그는 일순 흠칫했다. 그 밀실은 한눈에 여인의 규
방(閨房)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별로 요란하지 않으나 섬세하고 운치있게 단장한 규방이었다. 방의 한쪽에
는 작은 옥향로(玉香爐)가 하나 놓여져 있었고 그곳으로부터 분홍빛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옥향로 옆에는 하나의 커다란 상아(象牙)침상이 휘장에 드리운
채 놓여 있다.
"…!"
지금 침상 위에는 한 명의 궁중여인이 등을 돌린 채 앉아 있었다.
혈해성모 궁월영! 바로 그녀였다.
철운비는 순간적인 의혹에 사로잡혔다.
(이 계집은 왜 자기의 침실로 나를 부른 것일까?)
그는 잠시 멍청한 표정으로 문간에 서 있었다.
"들어왔으면… 문을… 닫아요!"
그때 침상 위에 궁월영이 돌아앉은 채 나직이 명령했다.
철운비는 그녀의 음성이 은은하게 떨리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
다.
철… 컹!
그는 문을 닫고 들어서며 손을 모았다.
"부르심을 받고… 오기는 했으나 장소가 마땅치 않…!"
말을 하던 철운비의 안색이 갑자기 홱 변했다.
사르르…!
돌연 궁월영이 섬섬옥수로 궁장 저고리의 고름을 풀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삽시에 저고리가 흘러내리며 궁월영의 뽀얀 속살이 드러났다. 놀랍게도 그
녀는 궁장 속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백설이 내린 듯 뽀얀 어깨의 피부, 살짝 드러나 보이는 풍만하고 모양 좋은
유방이 아찔하도록 유혹적이었다.
궁월영은 치마의 고름까지 거침없이 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철운비는 질겁하며 외쳤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성모? 혈해… 율법(血海律琺)을 깨실 작정입니
까?"
궁월영은 그 말에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대는… 본 성모의 순결을 지켜 주었어요. 그 보답으로 내 몸을 그대에게
… 줄 작정이에요!"
사르르…!
마침내 그녀의 치마가 완전히 흘러내렸다. 쥐면 꺼질 듯한 잘룩한 한 줌의
허리, 그 아래로 갑자기 넓어진 풍만한 둔부가 철운비의 눈에 확 쏘아져 들
어왔다.
(흑!)
동시에 철운비는 갑자기 아랫도리가 불끈 뜨거워짐을 느끼고 대경했다.
그제서야 그는 예의 옥향로에서 피어오르는 분홍빛 연기가 강렬한 최음향
(催淫香)이 섞여 있음을 깨달았다.
궁월영은 살며시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그대는… 내가 반도 음세황에 의해 가장 치욕스러운 모습이 될 것까지 보
았어요. 그 수치스러운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그대는 나를 가져야
해요!"
실상 그녀가 은혜를 갚기 위해 철운비에게 자기의 몸을 주겠다고 한 것은
그저 명분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그녀는 가장 부끄러운 모습을 철운비에게 보였다. 그것은 성모라 추앙받는
궁월영으로서는 죽어도 잊을 수 없는 치욕스런 기억이었다.
그 수치감을 보상받을 수 있는 길은 달리 없었다. 차라리 철운비에게 자기
의 몸을 주어 그 기억을 중화시켜 버리는 길 외에는…
그래서 궁월영은 철운비를 유혹했고 만일을 대비해서 최음향까지 피워 놓은
것이었다. 그녀는 최악의 경우 철운비가 욕정에 미쳐 자신을 범하기라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 일은 모두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었다.
철운비는 최음향 정도에 이성을 상실하기에는 너무 정신력이 강했다. 그것
은 다분히 만년혈만의 보혈과 적목사령정의 힘 때문이기도 했다.
츠읏!
문득 철운비의 눈빛이 아주 싸늘하게 변했다.
(성모라 불리는 고고한 계집도 역시 일개 음탕한 본성을 지닌 속물일 뿐이
란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들자 격렬한 분노가 그의 전신을 휩쌌다.
어린시절부터 기녀와 창녀들 틈에서 자란 탓에 여자의 본성에 대해 비뚤어
진 편견을 지니고 있는 그가 아닌가?
그가 알기로 여자라는 동물은 겉으로는 고고한 척하다가도 이익과 목적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음란해질 수 있는 천박한 암컷에 불과했다.
헌데 남해에 사는 모든 인간들로부터 성녀로 추앙받고 있는 혈해성모라는
이 여인조차도 지금 자신 앞에서 비천한 매음굴의 창기와 다름없는 짓을 하
고 있는 것이다. 그같은 사실이 주는 격렬한 분노는 최음향의 독성을 눌러
버렸다.
그는 차갑고 냉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는 여자를 좋아하오. 어느 정도냐 하면 열네 살 때부터 계집없이는 잠을
못 잘 정도로…!"
"…!"
부르르…
궁월영의 뒷모습이 어떤 불길한 예감으로 경직되었다.
철운비는 그런 그녀를 노려보며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계집을 좋아해도 내 스스로 맘에 드는 계집이 아니
면 안지 않소. 유감이지만… 성모를 안고 싶은 마음이 지금 내게는 없소.
용서… 하시기를!"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횡하니 돌아서 밀실을 나가 버렸다.
철컹…!
밀실의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흐윽…!"
순간 궁월영의 입에서 억눌렸던 오열이 기다렸다는 듯 터져나왔다.
그녀의 옥용은 최음향의 욕정과 철운비에게 당한 모멸감으로 무참하게 이지
러졌다.
"가… 감히 나 혈해성모를 거절하다니… 용서치 않겠다!"
그녀는 파르르 교구를 떨며 이를 갈았다. 그녀의 두 눈은 얼룩진 눈물과 독
기로 새파랗게 번뜩였다.
"나… 를… 죽기보다 더 치욕스럽게 만들다니… 바득! 그 대가를… 목숨으
로 치루게 되리라! 나쁜 자식!"
그녀는 전신을 바들바들 떨며 격하게 오열했다.
이어 그녀는 섬섬옥수로 자기의 유방을 움켜쥐었다. 최음향이 일으킨 격렬
한 욕화가 그녀의 전신을 엄습한 것이었다.
"흐윽! 죽… 인다! 반드시…!"
궁월영은 오열하며 옆으로 쓰러졌다. 쓰러지면서 그녀는 섬섬옥수로 미친
듯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모양좋은 유방이 그녀의 손길에 의해 제멋대로 이지러지고 하복부의 방초숲
은 금방 뜨거운 온천수로 촉촉히 젖어들었다.
궁월영은 피가 나도록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흐윽! 네놈은 철저하게 내게 이용된 후… 제거되리라! 나… 혈해의 성모를
모욕한 대가로…!"
그녀는 격하게 흐느끼며 떨리는 손을 하복부의 허벅지 사이로 가져갔다. 방
초숲이 그녀의 손 끝에 갈라지며 극히 보드랍고 따뜻한 살점이 만져졌다.
"아아… 흑!"
순간 궁월영은 흐느끼듯 교성을 토하며 몸을 활같이 휘었다. 벌려 세운 그
녀의 허벅지 사이로 명주고름 같은 섬섬옥수가 깊숙이 파고든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을 이미 뜨겁게 달아오른 꽃잎 속으로 밀어 넣으며 한
명의 사내에게 능욕당하는 착각 속에 빠졌다.
한 줄기 차가운 조소를 띄운 앳띤 미소년… 궁월영은 그 미소년이 자신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착각 속에 빠졌다.
미소년은 물론 철운비였다.
"흐윽… 나쁜… 놈! 더… 더 깊이… 아아흑… 아아…!"
궁월영의 격렬한 흐느낌은 끝이 없을 듯 뜨겁게 침실을 울렸다.
혈해성전!
이곳은 혈해의 성녀- 궁월영의 침전이었다.
<천강철경(天剛鐵經).>
<인황유명결(人皇幽冥訣).>
아침(朝),
구- 워어억!
돌연 한소리 창창한 용(龍)의 울음소리가 남해의 아침 바다를 뒤흔들었다.
고오오…!
이어 남쪽으로부터 한 마리 거대한 익룡(翼龍)이 벼락같이 날아왔다.
수레바퀴 같은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오는 익수룡(翼水龍), 바로 잠
마일맥의 수호영인 수호익룡이었다.
수호익룡은 아침 하늘을 가르며 쏜살같이 북쪽으로 날아갔다. 그 수호익룡
의 등 위에는 이인(二人)이 타고 있었다.
일신에 기이한 피의(皮衣)를 걸친 장발 소년과 고대전포를 걸치고 머리에
황금투구를 쓴 여전사(女戰士)였다.
그들은 철운비와 혈해성모(血海聖母) 궁월영, 바로 그들 두 사람이었다.
"…!"
궁월영은 철운비의 등 뒤에 단정히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
습은 더할 수 없이 고귀하고 성결해 보였다. 그녀의 모습 어디에도 간밤 욕
정에 몸부림치던 음탕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궁월영의 앞에는 철운비가 씁쓸한 표정으로 앉아 수호익룡의 목에 매인 대
라철릭을 움켜 쥐고 있었다.
(빌어먹을 계집! 뒤따라 올 수도 있는데 굳이 나와 함께 불귀마해(不歸魔
海)에 가겠다니 어제의 복수인가?)
그는 내심 투덜거리며 입술을 실룩거렸다.
그는 불귀마해로 달아난 쌍뇌모황(雙腦謨皇) 음세황을 추종하기 위해 수호
익룡을 불렀다.
한데, 궁월영이 막무가내로 함께 수로익룡을 타고 가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별 수 없이 그녀와 함꼐 수호익룡을 타게 된 것이었다.
철운비는 씁쓸한 표정으로 내심 중얼거렸다.
(부용부인에게는 안됐지만 불귀마해에서 음세황을 척살하는대로 나는 중원
으로 돌아간다!)
그는 문득 자신의 옷자락을 매만졌다. 그가 걸치고 있는 피의는 바로 만년
혈만의 가죽으로 만든 용린보갑(龍鱗寶甲)이었다.
곽부용을 떠올리자 철운비의 눈빛이 절로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곽부용은 밤새 철운비의 끝없는 요구에 시달려 몇 번이고 혼절했었다. 그녀
는 절정에 이를 때마다 죽은 남편의 이름을 불러 철운비를 당혹하게 만들었
다.
한데 철운비에게 밤새 그렇게 시달리고도 그녀는 새벽까지 바느질을 하여
용린보갑을 완성한 것이었다.
아침에 철운비가 눈을 떴을 때 곽부용은 용린보갑을 완성한 후 피로에 지쳐
그의 침상 옆에 쓰러져 잠들어 있었다.
그것을 본 철운비의 마음은 실로 복잡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의 갈등이 그의 내부를 어지럽혔다.
문득 철운비의 곽부용의 가냘픈 옥용을 눈 앞에서 지우며 씁쓸한 고소를 지
었다.
(부용부인에게는… 평생 갚지 못할 큰 빚을 졌다!)
"다… 왔어요! 불귀마해(不歸魔海)예요!"
문득 철운비의 뒤에서 궁월영의 무심한 음성이 들렸다.
그제서야 철운비는 흠칫 정신을 차리며 전면을 주시했다.
콰르르…! 쓰으… 쓰으…
수호익룡이 날아가는 전면에 뿌연 회색빛 운무가 장막같이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해저화산이 토해내는 유독한 유황독무(硫黃毒霧)였다.
또한 그것은 불귀마해가 시작된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스으… 스으…
음울한 회색의 유황독무는 마치 악령같이 바다를 뒤덮은 채 꿈틀거리고 있
었다. 그 가운데 흐릿한 섬들의 형상과 거친 파도가 철썩이는 것이 그림자
처럼 비쳐보였다.
아직 불귀마해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매케한 유황 냄새가 머리를 아
찔하게 만들었다.
철운비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지독한 곳인데… 음세황(淫世皇)은 왜 이런 곳으로 숨어 들었을까?"
그 말에 궁월영은 음울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저 안에는 하나의 섬이 있어요. 음세황은 그 섬으로 가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이에요."
철운비의 눈이 번득 빛났다.
"용… 형마도(龍形魔島)?"
궁월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나는 그곳의 위치를 용형혈정에서 천 년 만에 알아냈는데 그 직후
에 음세황의 암격을 받았어요!"
철운비는 말을 하는 궁월영의 숨결이 다소 거칠어지는 것을 느꼈다. 아마
궁월영은 음세황에게 당한 그 치욕스런 장면을 회상하는 듯했다.
구- 워어억!
콰아아…!
그때 수호익룡은 크게 경호성을 토하며 불귀마해의 권역으로 진입했다.
불귀(不歸)의 바다- 불귀마해(不歸魔海)!
잊혀진 천 년의 비지(秘地) 용형마도(龍形魔島)가 바로 그 중 어딘가에 있
는 것이었다.
∑ 제 14 장 신비(神秘)의 불귀마해(不歸魔海)
불귀마해의 중심부,
스으… 스으…
칙칙한 회색의 유황독무 가운데 하나의 섬이 떠 있었다. 또아리를 튼 용
(龍)의 형상을 한 그 섬은 전체가 검붉은 빛의 바위로 이루어져 음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또한 섬 주위로는 검붉은 바닷물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절독한 독무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콰르르… 콰… 아!
돌연 이 유황(硫黃)의 바다가 무엇 때문인지 격렬하게 출렁거렸다.
콰아아-!
이어 해수가 쩍 갈라지며 그 사이로 하나의 거대한 물체가 떠올랐다.
길이 십 수 장에 달하는 원통형의 거대한 물체인 그것은 전체가 검푸른 철
판으로 뒤덮여 있었다. 괴물체는 놀랍게도 그것은 일종의 배(船)였다.
-잠형용선(潛形龍船)!
<마황지문(魔皇之門).>
글의 내용은 그러했다.
그것은 일반인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글이었다.
하나 무림인에게는 달랐다. 그들에게는 실로 더할 수 없는 유혹을 지니고
있었다.
<마황혈정!>
-파옥묵강참(破玉默剛斬)!
-검왕(劍王) 벽황(碧皇)!
∑ 제 15 장 태양천마(太陽天魔)의 유물(遺物)
"태…태양천마(太陽天魔)!"
동굴 벽에 새겨진 글을 본 철운비는 아연실색하며 부르짖었다. 그는 얼마나
놀랐는지 하마터면 안고 있던 검왕을 떨어뜨릴 뻔했다.
-태양천마(太陽天魔)!
<뇌정륜(雷霆輪).>
그것은 범어(梵語)였다.
철운비는 그 글을 보며 의아한 듯 검미를 모았다.
(뇌정륜? 환(環)이라 해야 옳은 물건인데 왜 륜(輪)이라 이름붙였지?)
그는 언뜻 뇌정륜의 표면에 새겨진 뇌정흔에 오묘한 현기가 담겨 있음을 느
낄 수 있었다. 하나 그것은 현묘하기 이를 데 없어 일시에 이해할 수 없었
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다시 살펴보자!)
철운비는 뇌정륜을 왼쪽 손목에 걸었다. 이어 그는 다시 벽면으로 다가가
태양천마의 글을 살펴보았다.
글은 다시 이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불사성황(不死聖皇)!
바로 그였다.
불사성황은 가히 고금최강이라 할만큼 막강했던 인물이었다. 그의 지혜와
자질은 가히 영세무적(永世無敵)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대마맥 중 가장 강했던 불사마류(不死魔流)는 불사성황의
대(代)에 이르러 한 단계 더 강해졌다.
영세제일인(永世第一人)!
그렇게 불려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최강의 초인- 불사성황!
하나 하늘의 안배인가? 그는 죽음에 이를 때까지 자신의 절기를 전할 의발
전인을 얻지 못했다.
불사성황의 초마공은 너무나도 현오하여 어떤 기재도 불사성황의 절기의 단
오성(五成)도 연마하지 못했다.
불사성황은 백 년 간 환우를 주유하며 자신의 절기를 전할 기재를 찾아다녔
다. 하나 그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세상이 아무리 넓어도 고금제일이라
는 불사성황 만한 인재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는 그 과정에서 제법 뛰어난 한 쌍의 남녀기재를 얻게 되었다. 불
사성황은 자신의 절기를 둘로 나누어 그 두 남녀에게 전수했다.
-빙모(氷母).
-뇌왕(雷王).
-잠후(潛后)!
-마황혈정(魔皇血鼎)!
바로 그것이었다.
마황혈정은 결코 평범한 향로가 아니었다.
불사성황은 생시 자신의 절기를 모두 전수해 줄 전인을 구하지 못한 것을
통한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는 빙모나 뇌왕, 그리고 아내인 잠후에게도 전
수하지 않은 초극마공을 그 향로에 새겨 놓은 것이었다.
즉, 마황혈정에는 고금최강의 절예가 숨겨져 있는 것이었다.
잠후는 남편 불사성황이 죽자 당연히 아내인 자신이 남편의 유물인 마황혈
정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빙모와 뇌왕이 그것을 용납할 리 없었
다.
결국 삼 인 사이에는 일대격전이 벌어졌으며, 그 결과 빙모와 뇌왕은 양패
구상했고 잠후는 희생치 못할 중상을 입었다.
하나 잠후는 죽어가면서도 마황혈정을 탈취하여 불사마류(不死魔流)의 수호
영물인 불사익룡(不死翼龍)을 타고 남해로 날아가 버렸다.
그 불사익룡이 바로 철운비가 얻은 수호익룡의 어미였고 절정마도의 잠마별
부(潛魔別府)에 죽어 있던 그 익룡(翼龍)이었다.
물론 사대마맥 중 남해 잠마혈맥은 불사성황의 아내 잠후(潛后)의 후예들이
었다.
한데 잠후는 불사익룡을 타고 불귀마해를 날아 건너다가 자칫 실수하여 마
황혈정을 바다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곳이 바로 이 용형마도의 근해였다.
천여 년 전, 뇌왕(雷王)의 후예 태양천마는 우연히 마황혈정이 불귀마해에
빠졌음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안 즉시 그는 남해를 건너 이곳 용형마도
로 왔다.
천우신조랄까? 태양천마는 간신히 마황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하나 그 직후 두 명의 무서운 적수가 잇따라 나타났다.
먼저 나타난 여인은 바로 잠마여제(潛魔女帝) 궁비연(宮飛燕)이었다.
당연히 태양천마와 잠마여제 사이에는 일장 격투가 벌어졌다. 그것은 실로
경천동지할 대격전이었다.
사실 태양천마 숙야염은 내공면에서 잠마여제보다 약간 우세했다. 하나 그
차이는 극히 미미하여 양인은 초를 싸우도록 승부를 내지 못했다.
두 남녀는 오랜 싸움으로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바로 그때 또 다른 무서운 여마종이 들이닥쳤다.
-빙하서시(氷河西施) 설옥빈(雪玉斌)!
<마황혈정(魔皇血鼎)!>
문득,
"으음…! 이 중에는… 한 가지 무서운 초극마공의 구결이 감추어져 있는데
… 너무 난해하여 무어가 무언지 모르겠다!"
석실의 한쪽에서 괴로움에 지친 한 줄기 신음성이 들렸다. 마황혈정의 일
장 앞에는 한 명의 독비인이 가부좌를 튼 채 괴로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쌍뇌모황 음세황!
바로 그였다.
그의 신색은 실로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오른팔이 어깨에서부터 잘려나
가 그의 상반신은 온통 피투성이었다. 게다가 열화강풍을 통과하여 화상을
입은 듯 그의 모발과 장포는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으며 피부 곳곳에 물집이
맺혀 있었다.
하나 음세황이 지금 괴로와 하는 이유는 몸의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그를
괴롭히는 것은 다름아닌 마황혈정이었다.
마황혈정의 표면에 새겨진 용문(龍紋)에는 불사성황이 남긴 초극마공의 정
수가 감추어져 있었다.
쌍뇌모황 음세황은 혈해군벌 제일의 두뇌를 지닌 자였다. 하지만 그런 그의
초절한 지혜로도 마황혈정의 초극마공구결의 존재만 어렴풋이 감지될 뿐이
었다. 그 이상을 알아낸다는 것은 무리였다.
바로 그 사실이 음세황을 번뇌(煩惱)케 만들고 괴롭게 만드는 것이었다.
음세홍은 고통스럽게 안면을 이지러뜨리며 둔중한 신음을 발했다.
"크으으… 저 중의 초극마공을 얻어야 혈해성모와 철가 애송이놈에게 복수
할 수 있는데… 구결(口訣)의 그림자조차 헤아릴 수 없다니…!"
주르르!
중얼거리는 그의 오공으로 선혈이 꾸역꾸역 흘러내렸다. 그것은 그의 내부
가 극심한 번뇌와 심마에 침습당한 때문이었다.
"바득… 반드시 알아낸다! 그래서 기필코 혈해성모, 그 오만한 계집을 깔아
뭉개고 말겠다!"
음세황은 두 눈에서 줄기줄기 광기를 흘리며 이를 갈았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네놈에게는 그럴 기회가 없다, 음세황!"
돌연 한 줄기 스산한 음성이 석실의 입구쪽에서 들렸다.
언제 나타났을까?
스으… 스으…
열화강풍 속에 한 명의 적포소년이 우뚝 선 채 무서운 눈으로 음세황을 노
려보고 있었다.
철운비, 바로 그였다.
그는 열화강풍 속에 서 있었으나 그것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 표정이었
다. 그것은 그가 입고 있는 만년혈만의 가죽으로 만든 장포 때문이었다. 그
피의(皮衣)는 수화(水火)에서 몸을 지켜 주는 효용이 있었다.
"철… 운비!"
쿵쿵!
철운비의 모습을 발견한 음세황은 마치 유령을 본 듯 공포의 표정으로 비칠
비칠 물러섰다.
그 모습에 철운비는 싸늘하게 웃었다.
"후훗! 그나마 마황혈정을 보고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라!"
그는 장발을 흩날리며 성큼 석실 안으로 들어섰다.
바로 그 순간,
"죽… 어랏!"
파핫!
뒤로 비칠 물러서던 음세황은 돌연 발악하듯 외치며 성한 좌수를 맹렬하게
내쳤다.
핑!
찰나 그의 소매 속에서 하나의 작은 나무상자가 튀어나와 철운비의 이마로
벼락같이 날아들었다.
"…!"
꽈릉-!
철운비는 거의 본능적으로 마주 일장을 후려쳤다.
파삭! 찌- 익!
순간 음세황이 날린 목갑이 박살나며 그 안에서 한 가닥 날카로운 기성이
일었다.
츠- 읏!
동시에 무엇인가 하나의 둥근 물체가 벼락같이 철운비의 이마로 날아들었
다.
"허억!"
철운비는 흠칫하며 경악성을 토했다.
그 사이에 놀랍게도 그 둥근 물체는 철운비의 호신강벽을 그대로 꿰뚫고 날
아들어 그의 이마에 달라붙는 것이 아닌가?
아! 그것은… 한 마리의 거미였다. 하나 그것은 보통 거미가 아니었다. 전
체가 푸르스름한 옥빛을 띤 거미, 놀랍게도 그것은 귀엽고 예쁜 소녀의 얼
굴을 닮아 있었다.
-인면지주(人面蜘蛛)!
바로 그것이었다.
인면지주를 날린 음세황은 득의의 표정을 지었다.
"캇! 네놈도 별 수 없이 나의 귀여운 미인제왕주(美人帝王蛛)의 제물이 되
는구나!"
그는 신형을 휘청하는 철운비를 바라보며 음악한 웃음을 흘렸다.
철운비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이마 위에 붙어 있는 인면지주를
올려다 보았다.
"이놈은… 인면지주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미인제왕주로 남만에서만 나는
놈인데 어떻게 네 손에 들어갔단 말이냐?"
그는 의혹과 불신의 눈빛으로 음세황을 주시했다.
그 말에 음세황은 광기 어린 눈을 번뜩이며 득의의 표정을 지었다.
"곧 죽을 놈이니 가르쳐 주마. 지옥마교의 지옥천존이란 작자는 이미 남만
의 패자(覇者) 살황독종(殺荒毒宗)까지 손에 넣었다. 그 놈은… 본좌가 지
옥천존에게 선물받은 것이다!"
"그… 래?"
철운비는 묘한 표정으로 돌연 히죽 웃었다.
"좋은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그 대가로 편히 죽여주마!"
콰아아작!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돌연 그의 왼쪽 소매에서 하나의 쇠사슬이 달린 핏
빛 낫이 벼락같이 튀어나와 음세황의 허리를 그어갔다.
지옥혈겸(地獄血鎌)!
그것은 바로 지옥혈겸이었다.
파앗!
찰나지간 지옥혈겸은 튀어나올 때보다 더 빠르게 철운비의 소매 속에로 되
날아 들어갔다.
"…!"
음세황은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뜬 채 철운비의 소매를 주시하고 있었다.
분명 지옥혈겸이 스쳤건만 그의 몸에는 아무런 상처도 나 있지 않았다.
"너… 어떻게… 미인제왕주에게 물리고도… 내공을…?"
그는 불신과 의혹이 뒤얽힌 눈빛으로 철운비를 노려보며 말을 더듬거렸다.
철운비는 그 말에 히죽 웃었다.
"아! 이것 말인가?"
파앗!
그는 지력으로 이마에 붙은 인면지주를 한 차례 가격했다.
찍!
그러자 인면지주는 고통의 비명을 내지르며 나뒹굴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었다. 철운비의 지력은 능히 한 자 두께의 만년한철을
관통시킬 수 있는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한데 그것을 정통으로 맞고도 인면지주의 몸에는 별다른 상처가 나지 않았
다.
"…!"
철운비는 힐끗 바닥의 인면지주를 일견했다. 이어 그는 이마를 가린 장발을
쓸어올리며 히죽 웃었다.
"죽은… 철면천황 초패강의 사인(死因)을 보고 미리 준비를 했었지!"
그의 이마에는 한 장의 용(龍)의 비늘이 붙어 있었다.
-불사용린(不死龍鱗)!
∑ 제 16 장 악독(惡毒)한 여심(女心)
-불사초연심결(不死超然心訣)!
철운비는 마황혈정의 표면에 새겨진 용(龍)의 형상들이 움직이며 순간적으
로 한 가지 구결을 형성한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 환상의 구결이 바로 불
사초연심결이었다.
"…!"
철운비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다시 용문의 형상을 살펴보았다. 하나 그 순
간 순간적인 영감을 안개같이 흩어져 버렸다.
철운비는 곤혹감을 금치 못했다.
"정말… 요상한 물건이로군! 내가 환상을 본 것일까?"
그는 침음하며 불사초연심결을 회상하려 했다. 하나 그것의 구결은 흐릿하
게 떠오르다 이내 안개에 싸인 듯 흩어지고 말았다.
철운비는 미간을 모으며 고소를 지었다.
"대단한 기연을 놓쳤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영감을 반추하다
보면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중얼거렸다. 이어 그는 조심스럽게 마황혈정을
집어들었다.
"미인(美人)을 오래 기다리게 하면 실례지!"
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혈해성모 궁월영을 생각하며 히죽 웃었다. 이어
그는 마황혈정을 안고 석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짜악!
한데 그때 그의 발 끝에서 한 소리 날카로운 소성이 일었다.
"…!"
철운비는 흠칫하며 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발 끝에는 예의 미인제왕주
가 빤히 철운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미인제왕주는 석실 밖으로 흐르는 열화강풍의 두려운 듯 힐끗힐끗 그것을
돌아보고 있었다. 독충들이 불을 무서워하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철운비는 눈썹을 찡긋했다.
"데리고… 나가 달란 얘기냐?"
그는 미인제왕주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찌… 익!
그러자 놀랍게도 미인제왕주는 철운비의 말을 알아 들은 듯 고개를 끄덕이
며 낮게 우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에 철운비는 경이로운 표정을 지었다.
(영득한 놈, 아니 계집인데?)
그는 자기도 모르게 빙긋 웃었다. 자세히 보니 미인제왕주의 얼굴은 제법
귀엽고 예쁘장했다.
철운비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좋아! 데려다 줄 수는 있지만… 나를 물지 않는다고 약속해야만 한다!"
찍…!
그러자 미인제왕주는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철운비는 그 모습에 미소지었다.
(영물(靈物)이다! 못된 인간보다 낫군!)
그는 몸을 숙여 미인제왕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미인제왕주는 작은
몸을 팔짝 뛰어 철운비의 손바닥 위로 기어올랐다.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미인제왕주는 곧 용린보갑의 소맷자락 속으로 기
어들어 갔다.
철운비는 고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좋은 친구를 얻었군! 그것도 계집으로…!)
이어 그는 호신강벽을 일으켜 몸 주위를 방호하며 천천히 열화강풍 벽으로
걸어들어갔다.
[…!]
열화강풍 밖에서는 혈해성모 궁월영이 초조한 표정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늦는데…! 음세황과의 싸움이 어려운 것일까?)
그녀는 투구 속에서 고운 아미를 살짝 모았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철운비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음을 깨닫고 내심 흠칫했다.
(내가… 그 어린 사내 자식을 걱정하다니…!)
그녀는 붉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바로 그 때였다.
콰아아!
돌연 열화강풍이 물살 갈라지듯 양쪽으로 쩍 갈라졌다.
"핫하! 조금… 늦은 것 같은데…?"
이어 한 줄기 호탕한 웃음이 궁월영의 귓전을 울렸다. 그와 함께 철운비가
열화강풍을 꿰뚫고 천신(天神)같이 날아나왔다. 그의 두 팔에는 예의 마황
혈정이 안겨 있었다.
"…!"
그것을 본 궁월영의 봉목에 언뜻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약속대로… 마황혈정을 가져왔소!"
철운비가 선풍을 끌며 궁월영의 앞으로 내려섰다. 내려서자마자 그는 안고
있던 마황혈정을 궁월영에게 내밀었다.
(이것으로 잠마일족에게 받을 것도 줄 것도 없게 되었다!)
그는 마황혈정을 궁월영에게 건네 주며 음울하게 눈을 번뜩였다.
"마… 황혈정!"
궁월영은 흥분으로 몸을 가늘게 떨며 섬섬옥수를 내밀었다.
그녀는 왼쪽 옥수로 마황혈정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동시에,
쩌- 저정!
"죽어… 랏!"
갑자기 궁월영은 독살스런 일갈과 함께 우수로 맹렬하게 철운비의 가슴을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그런 그녀의 손 끝에서 순간적으로 시뻘건 낙뢰가
번쩍 작렬했다.
-잠마혈인(潛魔血印)!
-번뇌화(煩惱花) 음사향!
잠시 후,
"오라… 버니!"
열화강풍의 저편에서 음사향이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아마도 철운비에
격살당한 음세황의 처참한 시신을 발견한 때문일 것이다.
"흐윽! 복수… 하겠다! 전능일맥의 희망인 세황오라버니를 이렇게 만든 자
를…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음사향의 오열이 열화강풍을 뒤흔들었다. 그녀의 오열에는 처절한 비애와
분노가 뒤섞여 있어 열화강풍마저 흐트릴 정도였다.
번뇌화 음사향!
또 하나의 은원이 그렇게 잉태되고 있었다.
우르르…! 쩌러렁!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용암연에서 치솟는 열화강풍은 여전히 흉흉한 기세
로 흐르고 있었다.
-마모천둔(魔母天遁)!
-잠마여제(潛魔女帝) 궁비연(宮飛燕)!
아아! 바로 그렇다.
얼음벽 속의 나녀는 바로 잠마혈맥 사상 최강의 여제왕이라는 잠마여제였
다.
천 년 그 이전, 궁비연은 마황혈경을 놓고 뇌왕의 태양천마와 충돌하여 양
패구상의 지경에 이르렀었다.
그때 빙모의 후예인 빙하서시가 들이닥쳤으며 궁비연은 빙하서시의 빙하천
강(氷河天剛)에 휘말려 이곳 용암연에 떨어지게 되었다.
아무리 내공이 막강했던 궁비연이라 해도 용암 속에 떨어졌으니 무사했을
리 없었다. 그녀는 비록 용암에 타 죽지 않는다고 해도 철운비 이상으로 다
쳤어야만 했다.
그러나 전화위복이랄까? 용암에 떨어지기 직전 잠마여제는 빙하서시의 빙하
천강에 격중되어 전신이 꽁꽁 얼어붙은 상태였다.
그 빙하천강이 오히려 잠마여제를 구했던 것이다. 빙하천강의 무서운 한빙
지기는 일천 장, 용암의 통로로 떨어지는 잠마여제를 죽음에서 구해 주었었
다.
다만 용암의 열독(熱毒)은 너무 강해서 그녀의 전신 모발만은 단 한 올도
남기지 않고 태워 버렸을 뿐이었다. 그녀의 머리와 모발 뿐 아니라 은밀한
그곳의 체모도 한 올 남아 있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철운비는 마모천둔을 통해 그같은 전말을 모두 추측할 수 있었다.
그는 놀라움을 가라앉히며 잠마여제의 뇌살적인 나신에서 시선을 떼었다.
잠마여제는 고루황의 연인이었던 사이가 아닌가? 그것은 곧 그녀가 철운비
에게 사조모(師祖母)뻘이 됨을 의미한다. 그런 잠마여제의 부끄러운 나체를
직시한다는 것은 불경한 짓일 수도 있었다.
(인연이란 끈질기구나. 후후, 고루황 조사께서 운명하시면서도 잊지 못하던
저 잠의 여제왕을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다니…!)
철운비는 씁쓸하게 고소를 지었다.
스으… 스으!
그때 예의 연꽃 향기가 급격히 강렬해지며 빙굴을 가득 메었다. 철운비는
흠칫하며 향기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왼쪽 동굴 벽, 얼음이 그득한 만년한옥의 빙벽에… 놀랍게도 한 송이
연꽃이 되어 있었다.
붉디붉은 주먹만한 크기의 연꽃…! 그것은 얼음벽에서 마치 기적같이 돋아
나 있었다. 잎사귀도 없고 다만 한 줄기 대공 위에 달린 타는 듯 붉은 연꽃
…
그것을 보고 철운비는 믿어지지 않는 표정이 되었다.
"빙하… 혈련이란 말인가?"
철운비는 입을 딱 벌리며 벽 앞으로 기어갔다.
-빙하혈련(氷河血連)!
-불사환정마법(不死還精魔法)!
-만년빙하혈련실(萬年氷河血蓮實)!
-탈태환골(奪胎換骨)!
철운비는 또 한 번의 기연을 맞고 있는 것이다. 그를 태워 죽일 뻔한 용암
의 천년열독이 오히려 그를 불사의 몸으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전화위복이랄까? 이제 그는 맨몸으로 용암에 빠져도 다치지 않는 불사지체
(不死之體)를 지니게 될 것이다.
∑ 제 17 장 풍운(風雲)의 대륙(大陸)
그러나,
"크으윽…!"
불사지체(不死之體)의 기연은 둘째치고 지금 철운비는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의 전신이 엄청난 두 가지 역도(力道)의 횡포에 사시나무같이 떨렸다. 그
의 반신(半身)은 얼음굴에 빠진 듯하고 다른 반신은 불로 지져지는 것만 같
았다.
더욱 못 견딜 것은 그의 전신심맥으로 폭발할 듯이 팽창하는 가공할 잠력
(潛力)이었다.
무려 천년내공과 맞먹는 역도, 그것은 인간의 몸으로 수용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잠력이었다.
(이러다가는… 내 몸이 폭사하고 말겠다.)
고통의 혼미 중에서도 철운비는 이를 악물었다. 몸 속에서 날뛰는 잠력을
어딘가에 토해내지 않으면 곧 죽을 것만 같았다.
문득 그런 철운비의 혼미한 눈으로 뽀얀 동체가 들어왔다. 하나의 방패를
들고 반듯이 누워 있는 전라의 미인, 바로… 잠마여제 궁비연이었다.
그녀의 나신을 뒤덮고 있던 얼음벽은 이미 모두 녹아 버린 후였다. 철운비
의 몸에서 일어난 뇌정개벽천강의 열력은 그렇게 강렬했던 것이다.
"흐흐…!"
잠마여제의 나체를 본 철운비의 두 눈이 욕망으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지
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거대한 양극잠경(兩極潛勁)을 토해낼 대상 뿐이었
다.
북… 북…!
철운비는 용린보갑을 찢어내듯 벗어던지며 잠든 잠마여제에게로 다가섰다.
탈태환골로 벗겨진 죽은 피부가 용린보갑과 함께 허물같이 떨어져 나갔다.
그 허물 아래로 옥같이 매끄러운 새로운 피부가 드러났다. 그와 함께 불끈
거리며 드러난 그의 남성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거대해져 있었다.
"흐흐… 부용!"
철운비는 눈이 벌개져 잠마여제 곁에 이르렀다. 욕정에 미친 그의 눈에는
지금 이 순간 잠마여제가 부용부인 곽부용으로 보였다.
부용부인은 이미 자신의 것이 된 여인이 아닌가? 철운비는 주저없이 잠마여
제의 나신을 덮쳐갔다.
따당…!
마모천둔이 궁비연의 팔에서 빠져 옆으로 굴렀다. 모양 좋은 그녀의 젖무덤
이 어린 폭군의 손에 마구 이지러졌다.
"흐으…!"
철운비의 손길 아래 잠마여제의 나신은 무참히 유린당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백옥같은 풍만한 허벅지가 부끄럽게 좌우로 한껏 벌려졌다. 한 올의
잔티도 없는 뽀얀 둔덕 아래의 오묘한 여인의 비궁이 살포시 벌어져 드러났
다.
철운비는 눈이 벌개져 그곳으로 바싹 마른 입술을 가져갔다. 잠마여제의 은
밀한 옹달샘은 삽시에 철운비의 유린으로 흥건히 적셔져 갔다.
집요하게 혀와 입술을 놀리던 철운비는 히죽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어 그는 잠마여제의 복부 위로 몸을 실었다. 풍만한 여제왕의 육체가 기
분 좋은 탄력으로 그의 몸 아래에 느껴졌다.
철운비는 타는 듯한 일부를 잠마여제의 꽃잎 사이로 가져갔다.
두 개의 육체가 닿는 순간 철운비의 몸이 움찔 경직되었다. 더할 수 없이
보드랍게 느껴지는 살점의 감촉,
"으음… 부용!"
철운비는 심호흡을 하며 여인의 허리와 풍만한 둔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는 서서히 힘을 주어 자신의 너무도 뜨겁고 단단하게 팽창하여 고통스럽게
만 느껴지는 일부를 여체로 밀어 넣었다.
"…!"
격렬한 긴축감이 섬뜩한 한기와 함께 철운비의 전신으로 퍼져갔다.
보통 사람이라면 손만 대도 전신이 꽁꽁 얼어 버릴 것 같은 격렬한 냉기.
그러나 철운비에게만은 그것은 아주 기분 좋은 청량감이었다.
그는 그 청량감과 야릇한 긴축감을 즐기며 자신의 몸을 끝까지 여체에 밀어
넣었다. 마침내 두 개의 몸이 한 치의 틈도 없이 결합되었다.
철운비는 두 팔로 상체를 버틴 채 자신과 결합한 여체를 내려다 보았다.
혼미스런 그의 눈에 여인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보였다. 슬픈 눈동자의 곽
부용, 냉오한 미인 냉철화, 혈해성모 궁월영, 그리고 마지막으로 떠오른 얼
굴은… 의모인 수운월이었다.
"당신을… 증오하오!"
철운비의 입에서 짐승같은 으르렁거림이 흘러나왔다. 그와 함께 그는 무서
운 기세로 여체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그의 하체가 핍박할 때마다 잠마여체
궁비연의 나신은 파도에 휩쓸린 조각배같이 뒤흔들렸다.
"헉… 헉!"
빙굴은 삽시에 짐승같은 헐떡임으로 가득찼다. 뜨거운 열기가 빙굴의 냉기
를 산산이 바스러뜨리기 시작했다.
"우우웃!"
돌연 한 소리 용(龍)이 울부짖는 듯한 장쾌한 강소성이 아득한 용암의 연못
저 아래에서 터져 솟구쳤다.
고오오…! 콰르르르…!
이어 용암의 소용돌이로부터 한 쌍의 인영이 빛살같이 치솟아 올랐다. 그
한 쌍의 인영은 열화강풍을 쩍 가르며 단번에 백여 장을 날아올랐다.
"아아… 태양을 다시 보게 되다니… 꿈은 아니겠지?"
열화강풍 위로 훌훌 날아오르며 한 인영이 만감이 서린 음성을 토해내었다.
화르르…! 스스슥…!
이어 두 인영은 쌍쌍이 단애 위로 날아내려 섰다.
일남일녀(一男一女)-!
그들은 아주 특이하게 생긴 일남일녀였다.
여인, 나이는 이십대 중년 정도일까?
낮뜨겁게도 그녀는 상의만 걸치고 있었다. 붉은 빛이 도는 피의로 간신히
둔부까지만 덮치고 있어 고혹하기 이를 데 없는 차림이었다. 기이하게도 그
녀의 머리에는 한 올의 모발도 나있지 않았다.
-잠마여제 궁비연.
"…!"
용암연에서 눈을 떼고 돌아서던 철운비는 흠칫했다. 잠마여제 궁비연이 망
연한 표정으로 사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을 발견한 때문이다.
천 년은 길고 긴 시간이다. 그 사이 용형마도의 지형도 완전히 바뀌어 궁비
연에게는 그저 낯설기만 한 것이다.
"너무도… 긴 시간이 지났구나!"
궁비연은 쓸쓸히 중얼거렸다.
그녀는 한숨을 흘리며 철운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본… 여제와 이어졌던 모든 인연의 끈은 이미 끊어져 먼지로 화한 지 오래
겠지?"
반짝!
궁비연의 위엄스러운 눈꼬리로 언뜻 이슬이 맺혔다.
천 년의 시공은 모든 은원과 인연의 끈을 삭여 버린 것이다. 지금 이 하늘
아래 그녀, 잠마(潛魔)의 여제(女帝)와 관련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을 느끼는 순간 격렬한 고독감이 궁비연을 감싼 것이다.
"…!"
궁비연은 자기도 모르게 두 팔로 가슴을 감싸안으며 바르르 몸을 떨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철운비는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가슴을 저미는
듯한 연민의 정이 그의 삭막하던 가슴을 찌른 것이다.
"이제…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철운비가 우울하게 입을 열었다.
궁비연은 망연한 표정으로 남쪽을 바라보았다.
"절정… 마도에 한 번 들러야겠지? 옛 친구의 묘에 인사라도 해야 하니…"
"성모… 천도에는…!1"
철운비의 말에 궁비연은 살래 고개를 저었다.
"잠마혈맥과… 나의 인연은 이미 천 년 전에 끝났다. 이제… 나와 인연이
이어지는 것은 절정마도라는 황막한 섬 하나와… 그대… 뿐이야!"
츠- 읏!
궁비연은 아주 형형한 시선으로 철운비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철운비는 찔끔하였다. 그녀의 눈빛에서 철운비는 그녀가 모든 것
을 알고 있음을 느낀 것이다.
"여자의… 몸이란 아주 예민하지, 비록… 천 년 동안 잠들었었어도…!"
궁비연은 낮게 말하며 철운비를 쏘아보았다.
그녀는 철운비가 자신을 범한 것을 알고 있었다.
"죄… 송합니다!"
철운비는 얼굴이 벌개져 더듬거렸다.
그 모습에 궁비연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미… 지난 일이니 마음에 둘 것 없다. 후일… 내가 중원에 들어가면 비
바람이나 피할 수 있는 작은 집 한 채나 지어다오!"
화라락…!
말을 마치기도 전 궁비연은 단애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휘이이이잉!
그녀는 흡사 무게없는 깃털같이 해풍을 타고 까마득이 치솟아 올랐다.
"몸조심… 하거라. 너는… 이 넓은 하늘 아래에서 나와 인연의 끈을 맺고
있는 단 한 명의 친인이니…!"
궁비연은 훌훌 날아오르며 쓸쓸하게 말했다.
피- 이잉!
그런 그녀의 신형에서 하나의 방패가 떨어져 내려 철운비에게로 날아왔다.
마모천둔(魔母天둔)-!
바로 그것이었다.
철운비는 급히 마모천둔을 받아들었다. 그 사이에 궁비연은 바다를 날아건
너 유황독강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집이나… 한 채 마련해 두라고?"
철운비는 마모천둔을 쓰다듬으며 얼굴이 벌개져 중얼거렸다. 궁비연이 남긴
말이 무엇인지 깨달은 때문이다.
(천년 이전에 사해를 호령하던 여제왕을 첩(妾)으로 두게 될 판이니… 이걸
염복이라고 해야 하나 여난이라고 해야 하나?)
철운비는 고소를 지으며 궁비연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헌데 그가 궁비연의 풍만하던 몸을 떠올릴 때였다.
구어어어억!
돌연 용형마도 저편에서 굉렬한 용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천… 왕(天王)!"
철운비는 기쁨으로 얼굴이 환해지며 용음이 들린 곳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고오오!
그런 그의 두 눈에 마리 거대한 익룡이 열화강풍을 산산이 바스러뜨리며 자
신을 향해 쏜살같이 쏘아내려오는 것이 들려왔다.
수호… 익룡!
그것은 바로 잠마혈맥을 지키는 수호영물 수호익룡이었다.
봄(春)-!
대륙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던 삼엄한 동장군의 횡포도 이제 멀리 장성 너머
로 물러간 뒤였다. 따사로운 춘광이 얼어붙었던 대지를 녹이며 생명의 소생
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림(武林)은 바야흐로 이제 길고 암울한 겨울에 들어서고 있었다.
살륙과… 공포의 겨울…
그것은 한 명 무서운 대마인(大魔人)에 의해 전개된 것이었다.
-지옥천존(地獄天尊)!
<지옥… 마교(地獄魔敎)!>
-오대무벌(五大武閥)!
-막북(漠北) 적붕호황천(赤鵬護皇天).
-남해(南海) 혈해군벌(血海軍閥)!
-흑룡패왕(黑龍覇王)!
이것이 그 정복자의 이름이었다.
흑룡(黑龍)의 패왕(覇王)-!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전무했다. 진짜 이름도… 출신도… 아무도 알지 못
했다. 혹자는 그가 사십 년 전에 중원을 침공했다가 실종된 팔황마전(八荒
魔殿)의 전대제왕, 팔활마성(八荒魔聖)의 제자라고도 하지만 확인할 수 없
었다.
신비 속의 패왕… 그의 흑룡패황이라는 벌호는 그가 늘 흑룡이 수놓인 장포
만은 걸치고 있기 때문에 붙은 것이었다.
어쨌든 그의 출현을 변황 일대에서는 신화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흑룡패황은 단 일 년 만에 신강과 천산남북, 그리고 성숙해와 서장일대의
제파를 정복했다.
서북무림(西北武林)에서 이제 흑룡패왕에게 정복되지 않은 곳은 전무한 상
태였다. 그것은 흑룡패왕이 막하에 백만(百萬)에 이르는 세력을 두고 있음
을 의미하기도 했다.
백만(百萬)의 강병(强兵)…
흑룡패왕은 그 거대한 세력을 하나의 조직으로 결맹시켰다고 한다.
<서북팔황연맹(西北八荒聯盟).>
절곡(絶谷)-!
병풍을 세워 놓은 듯한 까마득한 절벽 사이로 하나의 절곡이 자리하고 있었
다.
지옥(地獄)으로 들어가는 입구일까? 지표로부터 무려 일천여 장이나 꺼져
내려간 그 절곡에는 햇살조차 제대로 비쳐들지도 못했다.
한데 놀랍게도 그 절곡의 끝에는 하나의 석전(石殿)이 자리하고 있었다.
온통 이끼로 뒤덮인 황량한 고대석전-!
알 수 없는 음습한 귀기(鬼氣)가 그 석전을 구비구비 감싸고 있는 듯했다.
석전의 정면, 이끼에 덮인 석문(石門)이 자리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그
석문 위에는 몇 자의 글이 반쯤 지워진 채 이끼에 가려 있었다.
<지옥… 마전(地獄魔殿)!>
대전체(大篆體)의 그 글은 이런 뜻이었다.
지옥… 마전이라니…?
설마 이곳이 저 사대마맥 중 지옥마맥과 관계가 있는 곳일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한데…!
뚜벅뚜벅…
음울한 발자국 소리를 끌며 한 명의 인물이 문득 지옥마전(地獄魔殿)으로
들어섰다.
머리 끝에서부터 발 끝까지 온통 검은 천으로 휘감은 자, 보이는 것은 몽면
사이로 번뜩이는 한 쌍의 눈빛이었다.
눈(眼)… 그런 그 자의 두 눈은 흡사 독(毒)이 발라진 비수같이 새파란 빛
을 띤 채 섬뜩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누구인가?
지옥천존(地獄天尊)! 바로 그였다.
대륙풍운의 주역인 제일마종! 그가 이 지옥의 입구 깊은 곳에 나타난 것이
었다.
석실(石室)-!
온통 음울한 귀기와 어둠에 덮인 석실이었다.
넓은 석실 저 끝에는 아수라기 새겨진 석벽이 하나 있었다. 두 눈을 부릅뜨
고 세상을 향해 재앙을 내치려는 자세의 흉흉한 아수라의 형상이었다.
"…!"
지금 그 아수라를 마주보고 한 명 노인이 앉아 있었다.
회색의 장포… 회색의 머리카락… 깡마른 체격인데 오른팔이 무엇인가에 잘
려져 나간 독비(毒臂)의 노인이었다.
노인은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노인의 입가로는 미미
한 미소가 배어 흐르고 있었다.
(우리 지옥마교가 군림할 때가 임박했다. 후훗! 오대무벌은 곧 뢰(雷)가 내
대신 쓰러뜨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지옥마맥의 천년심원을 방해할 그 무
엇도 지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리라.)
독비노인의 얄팍한 입술가로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고독패왕이 있으나… 아수(阿修) 조사(祖師)께서 제거해 주실 것이니 걱정
할 필요는 없고… 적당한 때를 보아 뢰(雷)도 제거한다. 후훗! 그 후에 아
무도 모르는 우리 지옥마맥(地獄魔脈)의 세 가신(家臣)들을 움직여 일거에
대륙을 정복하는 것이다.)
독비노인의 숨결이 다시 거칠어졌다. 그의 일족인 천년야망의 완성이 목전
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는 때문이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화약… 냄새?)
빠- 직!
독비노인의 두 눈이 번쩍 떠지며 무서운 광망이 번개같이 일어났다. 한 가
닥 지극히 강렬한 화약냄새가 맡아진 것이다.
독비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눈에 석실 입구를 가득 메우
며 서 있는 한 명 흑의인이 보였다.
지옥천존이었다.
"…!"
지옥천존은 암울한 눈빛으로 독비노인을 바라보고 있는데 화약냄새는 그의
소매 속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뢰(雷)?"
독비노인은 심중의 동요를 누르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지옥천존이 대답했다.
"성(城)의… 뇌옥에서 팔황마성(八荒魔聖)이란 자를… 만났소이다."
"무엇이?"
순간 독보노인의 전신에 격렬한 파문이 일었다.
-팔황마성(八荒魔聖)!
-천층마벽(千層魔壁)!
그리고,
스으으…!
치솟는 화염을 타고 한 명 흑의인이 절공으로부터 훌훌 날아올랐다. 그는
물론 지옥천존이었다.
화염을 타고 떠오르며 지옥천존은 아주 괴로운 눈으로 무너지는 지옥마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잘… 가시오, 지옥… 노조!"
지옥천존의 입에서 문득 우울한 신음이 배어 흘렀다.
-지옥노조(地獄老祖) 능황(陵皇)!
무너지는 지옥마전(地獄魔殿)!
대륙(大陸)의 운명이… 지금 또 한 차례 반전되는 순간이었다.
번-쩍! 꽈르르릉!
횡포한 우뢰성과 시퍼런 뇌전(雷電)에 대지(大地)가 몸살을 앓고 있었다.
쏴아아… 콰르르르릉!
장대발 같은 빗줄기…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도록 뽀얗게 일어나는 우연
(雨煙)!
인세(人世)의 종말이라도 온 것일까? 땅 위의 모든 추악한 것들을 쓸어내려
는 듯이 그렇게 소나기가 퍼붓고 있었다.
아직 초저녁이건만 장대 같은 빗줄기에 가려 사위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번- 쩍!
시퍼런 뇌전이 도끼같이 천공을 가르며 지나갔다.
어느 이름모를 산등성이 위에는 세찬 빗줄기에 금방이라도 떠내려간 듯 한
채의 사당이 서 있었다.
토지묘(土地廟)-!
그 사당은 바로 토지신을 모시는 토지묘였다.
피- 이잉!
문득 세찬 빗줄기를 뚫고 하나의 인영이 토지묘를 향해 질주해 왔다.
빛살 같은 속도로 다가서는 인물, 그 자는 한 명의 여인이었다.
나이는 이십대 중반 정도일까? 일견하여 아주 당당한 체격을 지닌 여인이었
다. 육 척에 가까운 키, 딱 벌어진 어깨, 잘못 보면 사내로 오인할 정도로
훤칠한 체격의 여인이었다.
하지만 사내같은 체격과 달리 여인은 상당한 미인이었다. 큼직큼직한 오관,
짙은 눈썹, 전체적으로 시원스러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 거녀(巨女)는 특이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당당한 몸에는 검붉은 전포를
걸치고 있는데 그 전포자락에도 포효하는 사자의 형상이 수놓아져 있었다.
"하아… 하아…!"
스스슥…
거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토지묘 앞에 내려섰다. 무엇엔가 쫓기는 듯
여인의 큼직한 봉목은 불안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쏴아아…!
세찬 빗줄기가 여인의 전신을 흠뻑 적시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아랑곳
하지 않고 빠르게 토지묘 주위를 살폈다.
"이대로라면… 반나절이 못 되어 거령수황(巨靈獸皇), 그 자에게 잡히고 만
다!"
여인은 피로한 기색으로 입술을 잘근 물었다.
거령수황이라니…? 여인은 저 지옥천존의 세 그림자는 지옥삼패 중 거령수
황에게 쫓기고 있단 말인가?
"안 돼! 무슨 일이 있든 소주군(少主君) 아기씨를 지옥마교의 무리에서 넘
길 수는 없어!"
여인은 단호한 표저을 지으며 가슴섶을 내려다 보았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
부분에는 한 명 어린 사내아이가 여인의 전포자락 안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
다.
그 사내아이를 들여다 보며 여전사의 두 눈이 결의의 빛으로 번뜩였다.
"주군 철사대제(鐵獅大帝)님이 실종된 지금, 위대한 사자철림(獅子鐵林)의
운명은 아기씨께 달렸다. 절대로… 아기씨를 지옥의 무리에게 넘기지 않는
다!"
스- 윽!
중얼거리며 여전사는 빠르게 토지묘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사자철림(獅子鐵林)!
(흐윽!)
채 십 리를 달리지 못해서 여인은 급급히 멈춰서야만 했다.
여인의 십여 장 앞,
스으… 스으!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 하나 거대한 인영이 악귀같이 우뚝 서 있었기 때문이
다. 그 자는 전신이 시뻘건 털에 뒤덮인 흉측한 형상의 반인반수의 괴인이
었다.
-거령수황(巨靈獸皇)!
-철사신녀 적아황!
-천독강시(千毒疆屍)!
∑ 제 18 장 우중(雨中)의 정사(情事)
-묘강(苗疆) 살황독종(薩荒毒宗)!
<변황사패(邊荒四覇)!>
신강(新疆) 팔황마전(八荒魔殿)!
막북(漠北) 적붕호황천(赤鵬護皇天)!
서천(西天) 뇌정마찰(雷霆魔刹)!
묘강(苗疆) 살황독종(薩荒毒宗)!
(애송이… 아닌가?)
거령수황의 흉측한 안면이 와락 이지러졌다. 적아황의 탐스런 육체를 즐기
려던 것을 방해한 것이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애송이였다는 사실이 그를
분노케 한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자칫 철운비가 저 무서운 천독강시에게 상처를 입힌 초고수
자임을 잊고 말았다.
"바득…! 죽어랏! 애송이!"
꽈- 릉!
거령수황은 대갈일성하며 철운비를 향해 일장을 후려쳤다. 솥뚜껑만한 그
자의 손바닥이 활짝 벌려진 채 철운비의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그 기세는
마치 태산이 무너져 내리는 정도로 위맹했다.
-거령철마장(巨靈鐵魔掌)!
토지묘,
"이 녀석이… 철사대제의 아들이란 말이지?"
철운비는 신탁에 걸터앉아 품에 안고 있는 어린아이를 내려다 보았다.
한 달이 갓 넘었을까? 아주 귀여운 사내아이가 철운비의 팔 안에서 곤히 잠
들어 있었다.
오동통하고 영리해 보이는 사내아이, 그 아이가 바로 북산 사자철림의 어린
후계자인 막사후(莫獅吼)였다.
(남해에서 돌아오지마자 오대무벌의 후예와 조우하다니… 나란 놈은 아무래
도 오대무벌과도 꽤나 인연이 많은 모양이군!)
철운비는 고소하며 막사후의 귀여운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는 수초익룡을 타고 막 남해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러다가 우연찮게
적아황이 위기에 빠진 것을 구해 주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어린아이는 아주 뛰어나다. 나 적아황의 일생을 맡기기에 충분할 만큼
…!)
철사신녀 적아황!
북산(北山)의 암사자는 그녀답지 않게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
것은 하체에서 전해오는 은은한 통증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 어린
소년에게 깔려 몇 번인가 혼절했었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저희 사자철림은 이미 지옥천존의 마수에 장악당한 상태예요. 다른 사대무
벌들의 사정도 본림보다 그다지 좋지는 않을 거예요."
적아황은 내심의 동요를 숨기려 말을 꺼냈다.
"흐음… 어째서 오대무벌이 지옥마교의 횡행을 방관만 하고 있나 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군!"
철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안고 있는 막사후에게
서 떠나지 않았다.
-사자천후(獅子天后) 당숙빈(唐叔賓)!
-북망산(北邙山)!
<귀왕대탑(鬼王大塔)!>
-천년귀왕(千年鬼王)!
-귀왕대탑(鬼王大塔)!
-천년귀왕(千年鬼王)!
삼경(三更),
북망산 전역은 어둠의 장막에 뒤덮여 음산한 귀기를 흩뿌리고 있었다.
푸스스스…!
여기저기서 번쩍이는 새파란 인광…
우- 우-우-!
암흑을 꿰뚫고 번져오르는 귀기스런 귀곡성…!
사자(死者)들만의 지옥계(地獄界)가 펼쳐져 있는 이곳 북망산이었다.
한데,
"아직도 귀왕초인(鬼王超人)의 종적은 확인되지 않았나요?"
문득 어둠 속에서 음울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섬뜩하도
록 무미건조한 음성이었다.
북망산의 남단에 자리한 자그마한 구릉 위,
스으… 스으…!
언제부터인가 한 명 하얀 소복(素服)의 여인이 귀영(鬼影)인 듯 서 있었다.
화르르…!
전신을 을씨년스런 소복으로 감싸고 있는 그녀의 허리께까지 내려온 긴 수
발은 야풍에 산발되어 심해의 수초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소복여
인의 용모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없었다.
츠으으…!
다만 눈(眼)! 산발한 머릿결 사이로 번뜩이는 한 쌍의 봉목(鳳目)만이 뚜렷
이 드러나 있을 뿐이었다. 헌데 기이하게도 소복여인의 눈빛은 짙푸른 밀림
지대를 연상시키는 듯한 초록빛이 아닌가?
이 여인은 대체 누구인가? 새하얀 소복을 입고 이 깊은 야시(夜時)에 이 망
자의 귀역인 북망산중에서 을씨년스런 귀기로움을 연출하고 있는가?
소복여인의 전면에는 십여 명의 괴인(怪人)들이 서 있었다. 하나같이 수수
깡처럼 깡마른 자들인데 몸에는 모두 상복이 걸쳐져 있었다.
파… 츠으…!
그리고 그들의 푸르뎅뎅한 안색의 사자처럼 썩어가는 안면의 가운데에 자리
한 해골처럼 움푹 패인 눈가에서는 푸르스름한 인광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괴인들이 일종의 사악한 사공(邪功)을 연마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현상이었다.
"…!"
파라라- 락!
그 휘몰아치는 돌풍 속에서 지옥천존은 흑포자락을 찢어질 듯 펄럭이며 우
뚝 선 채 전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미 사방의 어디에도 유령귀모와 그 수
하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 지옥천존의 두 발은 발목까지 깊숙이
지면을 파고들어 있었다.
(역시… 노조(老祖)답군! 나의 천 년 내공이 담긴 일격을 정면으로 받아내
고도 무사할 또 한 명의 제자를 길러냈다니…!)
지옥천존은 소리없이 신음을 흘렸다.
이어 그는 씁쓸한 신색으로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때,
"왜… 그 계집이 귀왕윤회대진으로 피신하는 것을 막지 않았소 교주?"
스읏!
한 줄기 중후한 음성이 울림과 함께 한 명, 초로의 인물이 지옥천존의 등
뒤로 나타났다.
나이는 오십대 중반쯤 돼 있을까? 일신을 고풍스런 자포(紫袍)로 감쌌고,
네모 반듯한 중후한 얼굴에 눈꼬리가 긴 봉목의 인물이 있다. 일견키에도
아주 심기가 깊고 신중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귀왕윤회대진(鬼王輪廻大陣)은 안쪽에서 진을 해체하기 전에는… 밖으로부
터는 깰 수 없는 것이오 부교주!"
지옥천존은 여전히 야천을 응시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의 말에 자포중년인의 눈가로 놀람의 빛이 스쳤다.
"놀랍… 습니다! 그 찰나의 순간에 유령귀모의 수하들 중에 아(我)측의 간
세를 섞어 들여보내셨다니… 물론 그 정도의 능력을 지닌 간세라면… 막하
의 회의사신(灰衣死神) 외에는 달리 없겠지요?"
자포인은 경탄 어린 탄성을 토했다.
하나 지옥천존의 신색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한 눈에 본좌가 보낸 간세의 정체까지 알아내다니… 역시 부교주는 천뇌마
야(千腦魔爺)라 불리워도 조금의 손색도 없소!"
지옥천존의 칭찬하는 말투도 여전히 음울한 것이었다.
"과찬이시오, 교주!"
천뇌마야라 불리운 자포중년인은 고소를 지으며 지옥천존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헌데 지옥천존의 등 뒤를 바라보는 천뇌마야의 시선으로 언뜻 섬뜩
한 냉기가 스쳐가는 것이 아닌가?
(후후…! 물론 본좌는 똑똑하오! 교주가 아는 것보다 최소한 다섯 배 이상
…)
천뇌마야의 눈엔 한 줄기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결코 이인자가 될 수 없
는, 정상을 바라는 자 만이 가질 수 있는 야망의 불꽃이었다.
(어서… 환우의 패자가 되시오. 그 직후 나 음천세(陰千世)가 교주의 기업
을 감사히 접수해 줄 것이니…)
천뇌마야의 표정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다만… 그의 두 눈만이 차갑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하늘 밖의 하늘이랄까?
환우제일의 대효웅인 지옥천존! 그의 그늘 속에는 또 다른 야망의 불꽃이
은밀히 타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옥천존은 내심을 읽을 수 없는 깊은 눈빛으로 유
령귀모 등이 사라진 북망산의 북단을 주시하고 있었다.
수많은 무덤 그림자의 저편…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하나의 탑그림자가
음산하게 떠올라 있었다.
천뇌마야란 자의 시선도 어느덧 그것을 주시하고 있었다.
-천뇌마야(千腦魔爺) 음천세!
북망산(北邙山)의 서천(西天),
구워어억!
문득 어두운 밤하늘을 은은하게 떨어 울리는 웅혼한 용(龍)의 울음소리가
있었다.
콰아아…!
야천(夜天)을 가르며 하나의 괴조가 육중한 동체를 드러낸 것은 순간적인
일이었다. 괴조는 한 번의 날개짓으로 일천 장을 날아들고 있었다.
-수호익룡(守護翼龍)!
-철사신녀(鐵獅神女) 적아황!
구워어억!
그 사이 수호익룡은 하나의 절곡을 향해 유성같이 날아내렸다.
(피비린내…!)
철운비는 문득 절곡으로부터 역겨운 피비린내 섞인 음풍이 솟구쳐 올라오는
것을 느끼고 흠칫했다.
"되었다 천왕! 이쯤에서 멈추어라!"
철컹!
철운비는 쥐고 있던 대라철삭을 한 차례 세차게 흔들며 수호익룡에게 명령
했다.
구워어억!
콰드드득!
순간 절곡을 향해 쏘아내려 가던 수호익룡은 급격히 반동하여 허공에 멈추
었다.
(저 아래에서 무슨 일인가 벌어진 모양인데…!)
츠- 읏!
철운비는 수호익룡 등 위에 우뚝 선 채 어둠에 뒤덮인 절곡을 내려다 보았
다.
"저는… 어찌할까요?"
그런 철운비를 보며 적아황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녀는 저 북산 사
자철림의 제일여전사다. 그녀 역시 절곡으로부터 올라오는 음풍 속에 피비
린내가 섞여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사후에게 저 아래에서 일어난 일을 보여 주고 싶지 않으니 나 혼자 갔다
오겠어!"
철운비가 돌아서며 말했다.
"아빠빠…!"
그러자 적아황의 품에 안겨 있던 막사후가 해맑게 웃으며 철운비에게 안기
려고 사지를 바둥거렸다.
막사후의 귀여운 모습에 철운비는 절로 미소를 지었다.
"안 돼! 아저씨는 지금 사후와 놀아 줄 수 없으니 고모와 함께 있어라!"
철운비는 포동포동한 막사후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천왕이 조용한 곳에 데려다 줄 테니 그곳에서 잠시 쉬며 기다리도록…!"
스- 윽! 화르륵!
철운비는 이어 적아황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에 주저없이 까마득한 절
곡으로 뛰어 내렸다.
"조심…!"
적아황이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는 사이 이미 철운비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파묻혀 버린 뒤였다.
적아황은 하얘진 표정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쁜… 자식! 나를 이렇게 놀라게 하다니…!"
구워어억!
콰아아…!
적아황이 한숨을 쉴때 수호익룡은 다시 커다란 날개를 휘저어 암천으로 떠
올라갔다.
절곡-!
그곳에는 북망산의 다른 곳과 다름없이 온통 무덤들로 뒤덮여 있었다. 지난
여름 장마에 무너진 것인지 여기저기 무덤들이 파헤쳐져 있었고 훼손된 무
덤에서는 썩은 관목과 허연 백골들이 삐져 나와 있어 섬뜩한 분위기를 풍겼
다.
"지독… 한데!"
철운비는 그 파헤쳐진 무덤들 사이에 우뚝 선 채 검미를 찌푸리고 있었다.
그의 발치에는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끔찍한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시체들… 다섯 구의 끔찍하고 기이한 시체들이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끔찍하다는 것은 시체들의 두개골이 무엇인가에 으스러져 있다는 것이고,
반면 기이하다는 것은 그 시신들이 바람 빠진 풍선을 연상시키듯 말라 비틀
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마치 물기를 모두 증발시킨 물고기같이 죽어 있는 다섯 구의 시신들… 심지
어 으스러진 두개골에서 흘러나온 희뿌연 뇌수까지도 푸석푸석한 먼지같이
메말라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자들은… 몸 안의 정기란 정기는 모두 말라붙어 죽어 버렸다! 이것은
대체 어찌된 일인가?)
철운비는 시신들을 일별하자 해연히 놀라며 유심히 시선을 던졌다.
시체가 된 오 인은 모두 하얀 상복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들의 피부는 한결
같이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철운비는 한눈에 그 자들이 일종의 사악한 마공을 연마했음을 알아보았다.
<귀(鬼)>
-소수마공(素手魔功)!
밤(夜).
음습한 북망산의 밤은 점점 깊어가고 있었다. 과연 이 밤에 또 어떤 괴사가
벌어질 것인지…!
북망산의 어느 절벽,
"으… 으! 아… 안 돼! 다가오지 마라!"
한 명의 소년이 절벽을 등진 채 공포로 절율하고 있었다. 나이가 십 칠팔
세쯤 되었을까 한 영준한 미소년이었다. 하지만 영활하고 음침한 눈빛은 그
의 성격이 아주 교활하고 영악함을 보여 주고 있었다.
지금 그 소년은 공포 어린 시선으로 전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둠 속,
스으…!
한 쌍의 새하얀 손(素手)이 스물스물 움직이며 소년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
다.
어둠 속에 떠 있는 새하얀 손, 그것은… 너무나도 공포스러워 소년의 전신
은 뻣뻣하게 굳어져 있었다.
"호호… 호!"
파- 앗!
문득 허공에 뜬 소수(素手)의 뒤쪽에서 요악스런 웃음이 터지며 새하얀 소
수는 마침내 소년의 목을 움켜 쥐었다.
"캐- 액!"
당연한 결과로 소년이 두 눈이 튀어나올 듯이 부릅떠지고… 숨통이 넘어가
는 듯한 비명이 사위를 울린 것은 순간적인 일이었다.
빠- 지지직! 츠츠츠… 츳…!
놀랍게도 하얀 손에 목이 쥐켜진 미소년의 전신 피부가 급격히 쭈그러 들었
다. 그것은 소년의 순양지정(純陽之精)이 급격히 체외로 빠져나가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삽시간에 소년의 피부는 노인의 그것처럼 말라 비틀어졌다. 부릅떠진 소년
의 눈은 급격히 생기를 소실해 가고 있었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멈… 췄!"
돌연 사나운 폭갈이 밤하늘을 뒤흔들었다.
피- 잉!
이어 한 명의 폐포소년이 질풍같이 절벽을 향해 폭사해 드는 것이 아닌가?
그는 바로 철운비였다.
절벽으로 날아들던 철운비의 눈가로 우선 비쳐든 것은 한 명의 검은 옷을
걸친 산발한 여인이 예의 소년의 이마를 움켜쥐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여인은 전신을 칠흑같이 검은 흑의로 감싸고 있었다. 그 때문에 흡사 한
쌍의 소수만이 암흑 속에 둥실 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 일으키고 있었
다.
(급… 하다!)
철운비는 한눈에 예의 미소년이 이미 죽기 일보직전의 상태에 놓여 있음을
직감했다.
"요… 악한 것! 잠마(潛魔)… 폭풍참(暴風斬)!"
철운비는 질풍같이 여인의 배심으로 걸쳐 들며 일장을 후려쳐 갔다.
콰- 르르… 릉!
그의 손 끝에서 폭풍같은 잠경이 폭발하듯 일며 여인의 등으로 작렬했다.
-잠마폭풍참(潛魔暴風斬)!
-귀왕철면(鬼王鐵面)!
대충 이런 내용의 글이었다.
(귀왕철면? 이건 무엇에 사용하는 것일까?)
철운비는 고개를 갸웃하며 이리저리 귀왕철면을 뒤집어 보았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콰- 콰쾅!
한 줄기 폭음과 함께 절벽의 일부가 박살나며 돌가루가 분분히 휘날렸다.
그곳은 바로 예의 소수의 마녀가 잠마폭풍참에 튕겨져 박혀들어간 자리였
다.
"호호호- 홋!"
이어 비산하는 사석 속에서 분노 서린 여인의 교성이 떨쳐졌다.
스- 읏!
그와 함께 무너지는 절벽 속에서 하나의 왜영이 유령같이 떠올랐다.
"죽지… 않았다니! 잠마폭풍참에 휘말리고도…!"
철운비는 불신과 경악의 시선으로 왜영을 응시하며 침음성을 흘렸다.
소수마녀는 터럭 하나 다치지 않은 상태였다. 비단 다치지 않았을 뿐 아니
라 그녀가 걸치고 있는 흑의조차 조금의 손상도 없었으니…
철운비는 그제서야 여인이 걸친 흑의가 천잠사(天蠶絲)로 짠 것임을 알았
다.
"나… 아프게 했어! 죽일… 테야!"
피- 이잉!
미녀는 더듬거리는 교갈을 터뜨리며 유령같이 철운비의 앞으로 짓쳐들었다.
"…!"
철운비는 느닷없이 공세에 대경하며 손 끝에 뇌정개벽천강을 극한으로 일으
켰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화라락…!
불어오는 산풍이 마녀의 산발한 머리끝을 허공으로 흩날리고… 머릿털로 가
려졌던 여인의 얼굴이 철운비의 동공으로 확산되어 투영되었다.
"허- 억! 당… 신은…!"
그 순간 드러난 소수마녀의 얼굴을 본 철운비의 두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
다. 놀랍게도 그 마녀의 얼굴은 철운비가 꿈에도 잊지 못할 한 여인의 그것
이었던 것이다.
대체 그녀가 누구이기에 철운비가 그토록 놀라는 것인가?
"어… 머니!"
철운비의 입에서 단말마의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가 망연자실해 있는 찰나,
"호홋! 죽…엇!"
빠-직!
여인의 흑포자락 속에서 분칠을 한 듯 새하얀 섬섬옥수가 벼락같이 튀어나
와 철운비의 가슴을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콰드득…!
"크-흑!"
철운비는 자신의 가슴 일부가 여인의 소수(素手)에 그대로 박살남을 느끼며
뒤로 날아갔다.
쿠- 웅!
철운비는 이십여 장이나 퉁겨져 지면으로 모질게 팽개쳐졌다. 그런 그의 가
슴은 거북의 등껍질같이 쩍쩍 균열되어 있었다.
소수마공(素手魔功)!
그 미증유의 파멸마력(破滅魔力)이 철운비의 모든 호신지력(護身之力)을 산
산이 바스러뜨린 것이었다.
"수운… 월! 당신이었습니까? 소수(素手)의 마녀(魔女)가…?"
철운비는 미약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다가 그대로 차츰 혼절의 나락으로 침잠
되어 갔다.
불신(不信)!
도저히 믿기지 않는 현실(現實)을 도피하듯…
-수운월(水雲月)!
"호호…! 죽… 일 테야!"
슷…!
소수마녀… 아니 사황녀 수운월은 살광을 번뜩이며 혼절한 철운비에게로 날
아들었다.
파- 츠으!
그녀의 요악스럽도록 아름다운 두 눈에서는 새파란 사광(邪光)이 폭사되고
있었다.
그런데,
"…!"
철운비의 앞으로 날아내린 수운월의 교구가 돌연 뻣뻣하게 굳어져 갔다.
그녀의 혼미스럽던 봉목으로는 경이의 빛이 스쳐가고… 망연한 그녀의 시선
은 기절해 있는 철운비의 안면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가늘게 잔경련을 일으키는 긴 속눈썹…
이윽고,
"무… 정(無情)! 철무정…"
한숨처럼 새어나오는 이름 하나가 있었다.
수운월은 흡사 실성이라도 한 듯 그 이름을 되뇌이고 있었다. 그녀는 철운
비를 그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마음 속 정인(情人)이던 철무정(鐵無情)으로
착각한 것일까?
헌데,
"철무정… 철무정… 오호호홋!"
피- 이잉!
수운월이 발작하듯 웃어제치며 돌연 지면을 박차고 허공으로 비상(飛上)해
올랐다.
"그를… 죽였어! 내 손으로… 호호홋! 철무정! 그를…"
광기(狂氣)마저 서린 그녀의 교소는 삽시간에 아득히 멀어져 갔다.
순식간에 하나의 점(点)으로 화(火)해가는 사황녀(邪皇女) 수운월… 그녀가
어떻게 이리 변했단 말인가? 정녕 모를 일이었다.
-유령귀모(幽靈鬼母)!
여인은… 바로 그녀였다.
북망산의 전설인 귀왕대탑의 안주인인…!
"저 아이로구나!"
유령귀모는 장내로 날아내린 후 쓰러져 있는 철운비를 발견하고는 급히 다
가섰다.
직후,
"이… 이것은…!"
그녀는 철운비의 한 손에 귀왕철면(鬼王鐵面)이 쥐여 있는 것을 발견하며
안색을 일변시켰다.
"귀왕… 초인(鬼王超人)!"
유령귀모는 경악성으로 토하며 철운비의 상세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녀는
철운비를 귀왕초인으로 착각한 것이었다.
"죽지… 않았다니… 소수마공에 정면으로 격중당하고도…!"
유령귀모는 경이의 시선으로 철운비를 내려다 보았다.
비록 핏기없이 창백하나 요악스럽도록 아름다운 철운비의 용모! 그것을 직
시하는 순간 여인의 숨결은 어떤 야릇한 열기를 느끼며 거칠어질 수밖에 없
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서… 둘러야 한다! 즉사하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두면… 일각이 못 가 죽고
말 것이다!"
츠- 팟!
다급한 옥음을 토하며 이내 유령귀모는 철운비를 끼고는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장내는 다시금 을씨년스런 적막감에 휩싸이고…
수운월에게 순양지정을 갈취당한 진짜 귀왕초인의 비쩍 마른 시체만이 쓸쓸
히 나뒹굴고 있었다.
∑ 제 20 장 유령천인총(幽靈千人塚)의 전설(傳說)
"우… 우…!"
"크아악!"
콰- 콰콰- 쾅!
북망산의 적막은 처절한 비명과 섬뜩한 대마후(大魔吼)에 의해 갈가리 찢겨
지고 있었다.
<귀왕대탑(鬼王大塔).>
-귀왕윤회대진(鬼王輪廻大陣)!
-지옥전사(地獄戰士)!
"흐음…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문득 한 줄기 음울한 음성이 유령미궁의 침잠한 적막을 깨뜨렸다.
스으…!
이어 한 줄기 회색 인영이 유령미궁의 어느 미로(迷路) 끝으로 나타났다.
회색(灰色)!
그 인물은 머리 끝에서부터 발 끝까지 온통 회색인 인물이었다. 심지어는
걸치고 있는 의복뿐만이 아니라 머릿결, 눈썹, 심지어 음산하게 번뜩이는
가늘게 찢어진 두 눈까지 회색인 인물이었다.
그 회색인(灰色人)의 옆구리에는 동영(東瀛) 은밀종(隱密宗)의 무사들이 쓰
는 길고 짧은 한 쌍 기형도(奇形刀)가 찔러져 있었다.
누구인가?
-회의사신(灰衣死神) 잔독(殘毒)!
-천년시균(千年屍菌)!
"…!"
회의사신은 퍼뜩 걸음을 멈추고 전면을 주시했다.
그는 지금 아주 습습관 막다른 밀로에 이르러 있었다. 사면의 벽은 습기를
잔뜩 머금은 이끼들로 뒤덮여 있었다.
헌데… 그 이끼들 틈으로 벌겋게 녹이 슨 철문(鐵門)의 잔해가 언뜻 보이는
것이 아닌가?
(제대로… 온 것일까?)
회의사신은 가는 눈을 흥분으로 번뜩이며 녹슨 철문 앞으로 다가섰다. 그
철문에는 다 삭아들어가는 글이 여러 개 적혀 있었다.
회의사신은 조심스레 이끼를 떼어내며 그 글들을 읽어 내려갔다.
<유… 령… 천인…총(幽靈千人塚).>
먼저 그런 글이 눈에 띄었다.
"유령천인종(幽靈千人塚)! 역시 여기가 그 옛날 불사성황(不死聖皇)에 도전
했다가 몰살한 유령천사(幽靈千邪)들의 무덤이군!"
잔독의 숨결이 흥분으로 거칠어졌다. 그는 조심조심 이끼를 떼어가며 철문
에 쓰인 글을 읽어 내려갔다.
광기 서린 글들…
그것은 세인들이 알지 못하는 한 가지 아득한 상고시대의 비사를 나타내고
있었다.
천 수백 년 전! 하늘과 땅 아래 존재했던 가장 위대한 무인이 있었다.
<불사… 성황(不死聖皇)!>
-유령천사(幽靈千邪)!
-적목철경(赤目鐵經)!
-소수마경(素手魔經)!
(드디어…)
회의사신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이 안쪽에는 유령천사(幽靈千邪)의 시신이 묻혀 있고… 그들의 시정(屍精)
을 먹고 자란 천년시균(千年屍菌)이 있다.)
회의사신은 흥분을 삭이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천년시균만 얻으면… 더 이상 번뇌살황(煩惱殺皇)의 추격을 두려워하지 않
아도 된다.)
스- 읏!
염두를 굴리며 잔독은 왼손을 철문을 향해 내밀었다.
빠지직… 푸스스!
그의 깡마른 좌수 끝에서 무형경력이 일어나 녹슨 철문을 이지러 뜨렸다.
철문의 모서리가 비틀어지며 서서히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스- 읏! 화라락!
어디선가 극히 경미한 파공성이 일어남을 회의사신은 감지했다. 그 파공음
은 아주 미약하여 잔독이 아니었으면 감지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 말고도 어떤 자들이 이 유령천인총의 비밀을 알고 있단 말인가?)
회의사신은 흠칫하며 급히 모든 행동을 중지했다.
이내 그의 예의 파공음이 유령천인총 저편에서 들려오는 것을 알아내었다.
그는 철문의 뜯어진 모서리로 눈을 가져가 유령천인총을 들여다 보았다.
"…!"
그런 그의 몸이 흠칫 경직되었다.
(저… 계집은…!)
회의사신의 가는 두 눈이 놀라움을 담고 유령천인총 안쪽을 노려보았다.
-유령일천사황(幽靈一千邪皇)!
-전능환룡(全能幻龍) 음세룡(陰世龍).
-음세황(陰世皇).
-음사향(陰麝香).
-음세룡(陰世龍).
바로 이들이었다.
그들은 친남매지간이고 전능기환전의 당대전주 천수제왕(千手帝王)이 그들
의 아버지였다.
전능삼영은 발군의 지혜와 능력을 지녔는데 밑으로 내려갈수록 두 배씩 더
뛰어나다고 한다.
음세황이 뛰어나나 누이동생인 음사향에 미치지 못하고 그 번뇌화 음사향은
또 막내인 음세룡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전능기환전의 어린 잠룡(潛龍)-!
그가 전능환룡 음세룡이었다.
천수제왕은 장차 대륙패왕으로 음세룡을 기르고 있었다.
천수제왕은 아주 심기가 깊은 자였다.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도 대륙의 패자
가 되지 못함을 알고 야심을 안으로 감추어 왔었다.
그러다가 음세룡을 낳았고 그 음세룡에게 자신의 꿈을 걸고 있었다. 그 음
세룡을 귀왕대탑에서 유괴한 것이었다.
유령귀모-
그녀는 지옥천존이 자신의 주인인 지옥노조를 위해한 사건이 발생하자 복수
를 맹세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복수의 도구로 천수제왕의 자랑인 음세룡이
선택된 것이다.
유령귀모는 음세룡에게 천년시균을 복용시켜 지옥천존을 제거하게 할 계획
이었다.
그러나 그 전능환룡 음세룡이 소수마녀, 아니 수운월에 의해 시체가 되었음
을 그녀가 알 리 없었다.
스- 읏!
철운비를 내려다보던 수운월은 선뜻 신형을 날려 해골의 산 위로 올라갔다.
유령천사(幽靈千邪)의 유골 꼭대기…
스으… 스으…!
그곳에서는 푸르스름한 빛에 덮여 하나의 버섯이 자라고 있었다. 일견하여
용(龍)의 형상을 한 버섯이었는데 자세히 보면 그 지균(芝菌)에는 한 쌍의
붉은 뿔과 수염까지 달려 있었다.
거기에다 반투명한 몸에서는 푸른빛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여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이 보였다.
-천년시균(千年屍菌)!
-천뇌마야(千腦魔爺)!
-자린호천보갑(紫鱗護天寶甲)!
∑ 제 21 장 귀왕초인(鬼王超人)의 탄생(誕生)
콰콰콰쾅--!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
산악이라도 허물어뜨릴 듯한 강대한 무형잠경이 폭풍같이 사면을 휩쓸어 갔
다.
콰드드득! 우두둑…!
그 무형잠경이 이르는 곳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몇 장 두께의 석
벽도 청강석(靑剛石)의 석주(石柱)도… 무형잠경의 폭풍에 휘말린 모든 것
들은 종잇장같이 찢기고 수수깡같이 꺾여져 나갔다.
무서운 잠력, 그것은 놀랍게도 두 명의 인물이 일으키고 있었다.
고대(古代) 제왕(帝王)의 지하능실(地下陵室)이었던 듯한 어느 석전,
수많은 돌기둥들이 늘어선 그곳에서 지금 두 명의 인물이 무서운 기세로 충
돌하고 있었다.
안색이 아주 희고 눈빛이 기이하게도 녹색의 여인, 그리고 머리 끝에서부터
발 끝까지 검은 천으로 휘감은 몽면인 그들은 바로 유령귀모와 지옥천존이
었다.
"…!"
"…!"
꽈르르르릉!
두 사람은 십 장을 격하고 마주서서 초식을 발휘하고 있었다.
보통사람들에게 십 장이란 거리는 아주 먼 거리다. 하지만 두 사람 같은 초
고수자들에게는 십 장이란 거리는 아차하는 사이에 목숨이 날아갈 만큼 극
히 짧은 거리밖에 안 되었다.
후두둑… 쩌저정!
양인은 느릿느릿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 때마다 하늘을 가르고 땅을 뒤
엎어 버릴 듯한 무서운 역도가 일어나 상대방에게 밀려갔다.
일견 아무런 위력도 없어 보이는 초식들… 그러나 두 사람의 한초식 한 초
식마다에는 형언불가의 파괴력이 실려 있었다.
어느 한쪽이라도 현재 위치에서 한 걸음이라도 물러서면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 누적되어 있던 역도가 일시에 작렬하여 그의 몸을 산산이 바스러뜨
려 버릴 것이다.
그리고 형세는 완전히 유령귀모쪽이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두두둑… 파스스…!
유령귀모가 걸치고 있던 소복이 지옥천존의 무형파멸마강의 역도에 갈가리
찢겨나가고 있었다. 그 뿐 아니라 그녀의 살갗도 쩍쩍 갈라지며 상체가 점
점 뒤로 젖혀져 갔다.
(아아! 틀렸다! 이제는 삼합(三合)을 더 견디기 힘들다!)
유령귀모의 녹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녀가 비록 여인답지 않게 강한 것
은 사실이지만 지옥천존에게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이십합을 못 견디고 이 지경이라니… 귀왕초인으로도 저 자를 상대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주르르…!
유령귀모의 오공에서 선혈이 흘러나왔다.
(지옥… 삼가신(地獄三家臣)이 연수를 해야만 어찌해 볼 수 있는데… 아아
… 이제는 틀렸다!)
유령귀모는 내부의 진동으로 정신이 혼미해져감을 느끼며 신음을 흘렸다.
그런 그녀를 지옥천존의 두 눈이 스산하게 노려보았다.
"이제… 끝낼 때가 되었다. 유령귀모!"
쩌저정…!
지옥천존의 손 끝에서 지금까지의 그것보다 두 배 강한 역도가 일어나 곧장
유령귀모에게로 무찔러져 왔다.
콰드득…!
그 지옥참의 무서운 역도는 순간적으로 유령귀모의 열 겹 호신강벽을 박살
내 버렸다.
(끝… 인가?)
유령귀모는 지옥참의 역도가 젖가슴 사이로 후벼파고 들어옴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더 이상… 그녀에게는 저항할 능력이 없었다. 곧 그녀의 아름답던
젖무덤은 무참하게 으스러져 나갈 것이다.
한데,
"우우웃!"
용(龍)이 울부짖는 듯한 폭갈이 터진 것은 바로 그 때였다.
꽈르릉…!
그와 함께 눈을 시리게 하는 시퍼런 빛무리가 측면에서 폭발하듯 일어나 지
옥참(地獄斬)의 역도와 충돌했다.
"유령… 청명강살(幽靈靑冥剛殺)?"
언뜻 지옥천존의 놀라움 실린 경호성이 터지고…
콰르르르릉!
이어 터진 엄청난 폭음에 모든 소성이 파묻혀 버렸다.
콰콰쾅! 콰드드득!
잠력이 소용돌이가 백 장을 휘감고 웅장하던 지하석전 전체가 순간적으로
붕괴되어 버렸다.
무너지는 바윗덩이들… 그 속에서 두 명 인물이 십 장을 격하고 마주서 있
었다.
놀라움으로 흔들리는 지옥천존의 앞에는 언제인가 한 명의 괴인이 유령같이
나타난 우뚝 서 있었다. 전신이 시퍼렇고 사이한 광망에 덮인 인물인데 얼
굴에는 흉측한 귀신의 가면이 씌워져 있었다.
철운비(鐵雲飛), 바로 그였다.
그의 옆구리에는 피투성이가 된 유령귀모가 축 늘어진 채 안겨 있었다. 그
녀가 지옥참에 쓰러지는 순간 철운비가 나타나 구한 것이다.
"귀왕… 초인(鬼王超人)이냐?"
지옥천존이 신음하듯 물었다.
콰콰쾅…!
거대한 암괴가 그와 철운비 사이로 무너져 내려 두 사람을 갈라놓은 때문이
었다.
콰콰쾅! 우두두둑…!
뒤흔들리는 지축… 무너져 내리는 바윗덩이들… 한번 들어가면 유령이 되어
서야 빠져나올 수 있다는 유령미궁(幽靈迷宮)은 서서히 붕괴 되어가고 있었
다. 천 년의 신비를 영원히 지저에 묻어 버리려는 듯이…
콰르르르…!
어둠 속,
"아아! 흑백쌍시가 자신들의 의무를 제대로 수행했구나!"
미약한 여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반쯤 무너진 유령미궁의 지하미로에 석벽을 기대고 유령귀모가 힘없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저고리는 갈가리 찢겨나가 소담스러운 젖무덤이 수줍게 드러나 보였
다. 하지만 그녀는 드러난 젖무덤을 가릴 생각도 않고 앞 쪽을 바라보고 있
었다.
"…!"
그녀의 앞에는 철운비가 등을 돌린 채 우뚝 서서 어두운 미로 저편을 바라
보고 있었다.
그는 지금 천이통(天里通)의 공력을 발휘하여 유령미궁 내의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아깝군! 지옥천존(地獄天尊)과 나의 무공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
였는데…!)
츠- 읏!
귀면 속에서 철운비의 두 눈이 섬연히 번뜩였다. 그의 천이통 공력은 유령
미궁 내에 자신과 유령귀모만이 남아 있음을 감지한 것이다.
지옥천존-!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 그 자신의 운명(運命)의 적수(敵手)!
철운비는 이 년 내내 한시라도 빨리 그와 만나기를 바래 왔었다.
그리고 드디어 이곳 유령미궁에서 만났는데… 일합(一合)을 주고받은 뒤에
부득불 헤어져야만 했던 것이다.
(나의 내공은… 이곳에서 한 단계 더 높아졌다. 그런데도 그를 압도하지 못
했으니…)
철운비는 귀왕철면 속에서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그의 왼손은 아직도 얼얼한 상태였다. 천년시균을 복용하여 그의 내공은 일
층 강력해졌는데도 지옥천존과의 충돌에서 적지 않은 타격을 받은 것이었
다.
철운비가 상념에 잠겨 있을 때,
"귀… 왕초인(鬼王超人)! 이제 본녀를 유령미궁 밖으로 옮겨 가세요!"
철운비의 뒤에서 유령귀모가 미약한 음성으로 명령했다.
(귀왕… 초인(鬼王超人)?)
철운비는 움찔하며 돌아섰다.
유령귀모가 가냘프게 숨을 몰아쉬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옥용
은 더욱 더 하얘져 있는데 숨을 몰아 때마다 찢긴 저고리 사이로 드러난 자
그마한 젖무덤이 아래 위로 일렁였다.
철운비는 흘깃 그 젖무덤을 쓸어본 뒤 냉연하게 말했다.
"누가 귀왕초인(鬼王超人)이란 말인가?"
철운비의 말에 유령귀모의 옥용이 일변했다.
"무슨 말이에요? 설마 쌍로가 귀왕섭령대법(鬼王攝靈大法)을 펼치지 않았단
말…"
경악성을 흘리던 유령귀모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츠- 읏!
귀왕철면 사이로 음울하게 번뜩이는 철운비의 두 눈은 그의 이지(理智)가
아무런 금제도 당하지 않은 명철한 상태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당… 당신은 누구지요?"
유령귀모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철운비는 냉철하게 대답했다.
"나는… 철운비(鐵雲飛)라고 하지. 귀왕초인도 무어도 아닌…"
"철… 운비(鐵雲飛)?"
유령귀모의 입에서 숨넘어가는 듯한 신음이 토해졌다.
전혀 생소한 이름…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유령귀모는 비로소 자신이 오해를
하여 전혀 엉뚱한 사람에게 천년시균을 먹였음을 깨달았다.
"이…이런 어이없는 일이…음…움세룡(陰世龍)이 아니었다니…!"
유령귀모는 실성한 듯 중얼거렸다.
철운비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음울하게 말했다.
"당신이 본인을 구한 모양인데… 그 은혜는 나중에 반드시 갚도록 하겠어.
그렇지만 나를 보고 귀왕초인이니 뭐니 하면 곤란해!"
철운비는 말하며 선뜻 신형을 돌렸다.
"지옥천존과 지옥마교의 무리들은 모두 사라졌으니 본인도 이만 가 보아야
겠어."
뚜벅… 뚜벅!
철운비는 말을 하며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모습은 이내 미로 저
편으로 사라져 갔다.
"흐윽! 이… 이런 엉터리 같은 일이…!"
사라지는 철운비의 뒷모습을 보며 유령귀모는 참담한 표정이 되었다.
"다… 틀렸다. 천년시균(千年屍菌)을 어처구니없게 써 버렸으니 이제 무엇
으로 지옥천존에게 복수를 한단 말인가?"
유령귀모는 처절하게 흐느꼈다.
유일한 희망이던 천년시균, 그것이 사라진 이상 그녀에게 저 마신(魔神)같
이 무서운 지옥천존을 상대할 방법이라고는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그것을
통감하며 유령귀모는 땅 끝으로 굴러떨어지는 듯한 절망감을 느꼈다.
한데 그 때였다.
"헛허… 너는 실패하지 않았다, 귀모(鬼母)!"
돌연 어디선가 한 소리 창노한 노인의 음성이 들렸다.
유령귀모는 깜짝 놀라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제였을까?
츠읏! 츠읏!
그녀 왼쪽의 무너진 돌더미 위에 긴 담뱃대를 입에 문 한 명 괴인이 걸터앉
아 유령귀모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깨에서 잘려나간 오른팔, 전신이 화상으로 흉측하게 녹아 버린 괴인,
치우노조-!
그 괴인은 바로 북망산 기슭에서 철운비와 만났던 그 독비노인이었다. 놀랍
게도 치우노조는 철운비의 천이통 공력에도 감지되지 않은 채 그곳에 나타
난 것이다.
그는 긴 담뱃대를 뻑뻑 빨며 자애로운 눈길로 유령귀모를 내려다 보고 있었
다.
부르르!
노인의 눈빛을 접하는 순간 유령귀모의 전신으로 격렬한 파문이 스쳐지나
갔다.
"아아… 대종사(大宗師)! 정녕 대종사(大宗師)이시옵니까?"
유령귀모는 놀라움과 격정으로 신음을 토해내었다. 그리고는 천 근 같은 몸
을 일으켜 노인 앞에 오체복지(五體伏地)하였다.
자그마한 유방이 먼지 쌓인 돌바닥에 짓눌려졌으나 유령귀모는 그것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녀의 뇌리는 지금 엄청난 충격과 흥분으로 진공상태가 되
다시피한 상태였다.
죽었다고 생각한 노주군(老主君)-!
그가 지금 그녀 앞에 있는 것이다.
모습은 화상을 입어 끔찍하게 변했으나… 노인의 눈을 보는 순간 유령귀모
는 그 노인이 누구인지 즉시 알아본 것이다.
대종사(大宗師)!
유령귀모에게 그렇게 불릴 인물은 하늘과 땅 사이에 단 한 명뿐이었다.
-북산(北山),
산해관(山海關) 남서(南西)-_
하나의 나즈막한 구릉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구릉 위에는 한 그루의 거대
한 천년고목이 우뚝 서 있었다. 그 둘레가 무려 십 장이나 되는 거목(巨木)
이었다.
지금 그 거목 아래에는 삼인(三人)이 앉고 서 있었다.
일남이녀(一男二女), 사내는 허름한 폐포에 흉악한 귀신 형상의 철가면을
쓴 소년이었다. 그의 허리춤에는 한 자루의 핏빛 낫(鎌)이 걸려 있었다.
철운비(鐵雲飛)-!
바로 그였다.
철운비의 뒤에는 당당한 채격의 아름다운 여전사(女戰士)가 서 있었다.
물론 그녀는 사자철림의 제일여전사(第一女戰士)- 철사신녀(鐵獅神女) 적아
황이었다. 그녀의 품에는 어린 막사후가 손가락을 입에 문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귀왕철면(鬼王鐵面)을 쓴 철운비는 지금 나무 뿌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한 명의 여인이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부복해 있었
다. 나이는 삼십대 초반 정도, 사내 못지 않게 당당한 체격에 일신에 붉은
갑주를 걸친 여전사였다.
여인의 가슴을 방호하고 있는 청동갑주에는 포효하는 암사자의 머리 모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북산(北山) 사자철림의 여전사 조직인 적사
여황단(赤獅女皇團)의 표식이었다.
적사여황단은 사자철림에 소속된 모든 여인들을 통괄하여 지휘한다.
그 단주(團主)는 대대로 사자철림의 당주 부인이 맡아왔다. 물론 당대단주
는 사자천후(獅子天后) 당숙빈이었다.
청동갑주의 여전사는 아주 강한 눈빛으로 철운비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
다.
"주모님은 어딘가에 연금당해 계신 상태인데… 그 곳이 어딘지 아직 확인하
지 못했습니다."
-담철화(潭鐵花)!
-지옥팔식(地獄八式)!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저 지옥혈겸(地獄血鎌)에 감추어진 지옥마맥의 이대절학 중 하
나였다. 지극히 잔혹하고 신랄하여 철운비도 연마하기를 꺼린 무서운 마공
인 것이다.
하지만 철운비는 그것을 적당히 개조하여 적아황에게 전수했으며, 적아황은
현재 지옥팔식 중 사식(四式)을 연마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초식상으로는 무림에 적수가 드물 정도였다. 만일 그
녀가 지옥팔식을 모두 연마해 내면 누구도 그녀를 이기지 못하리라.
<참회마전(懺悔魔殿).>
참회마전의 깊은 곳,
타닥… 타닥!
송진을 굳혀 만든 횃불이 검은 그을음을 내며 타오르고 있었다.
한 칸의 장방형의 석실인 이곳은 일견하여 고문실인 듯 각가지의 형구들이
사면 벽에 걸려 있었다.
석실의 한쪽에는 이글이글 불꽃을 일으키며 타오르는 화로가 놓여 있다. 화
로 안에는 십여 개의 인두와 쇠꼬챙이가 벌겋게 달아오른 채 꽂혀 있었다.
그리고 석실의 한쪽 벽,
"…!"
한 명의 여인이 두 팔이 쇠사슬에 묶인 채 축 늘어져 있었다.
그녀의 형상은 실로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제멋대로 헝클어져 산발한
머리.
얼굴은 풀어 헤쳐진 머리카락으로 인해 보이지 않았다.
여인은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벌거벗은 그녀의 몸은 온
통 지독한 고문을 당한 흔적으로 얼룩져 있었다. 찢기고 불에 탄 여인의 몸
뚱이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특히, 여인의 부끄러운 곳은 뭇 사내들에게 지독한 난행을 당한 듯 온통 검
붉은 선혈로 물들어 있었다.
여인은 대체 누구일까? 어떤 죄를 졌기에 이렇듯 처참한 형상으로 무참하게
짓밟혔단 말인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형상으로…
그긍…!
문득 둔중한 굉음과 함께 석실의 철문이 열렸다. 이어 서너 명의 사내가 안
으로 걸어들어 왔다. 흉신악살같이 험악한 인상의 사내들이었는데 그들은
근육질로 번들거리는 상체를 벌거벗고 있었다.
그 자들의 앞에는 중후한 인상을 지닌 사십 전후의 적포(赤袍) 중년인이 앞
장서 걸어 들어왔다.
일문종사의 기품을 지닌 당당한 체구의 인물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
자는 눈빛이 극히 차갑고 음험한 인상이었다.
그 자는 최근 가슴부위를 다친 듯 적포자락 사이로 흰 천을 가슴에 감고 있
는 것이 보였다.
석실로 들어선 적포중년인은 숱한 사내들에게 윤간을 당해 핏자국으로 물든
여인의 아랫도리를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너무… 험하게 다룬 것이 아니냐?"
그의 말에 장한들은 찔끔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여인을 윤간한 것은
그 자들의 짓인 듯했다.
장한들 중 한 명이 급히 변명하고 나섰다.
"아주 지독한 계집이었습니다 영주(令主)! 최후의 방법으로… 그런 것인데
… 저희들에게 모두 서너 차례씩 당하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흐음…!"
적포인은 괴로운 표정으로 낮게 신음했다.
(미안하오 숙빈… 순순히 그것을 내놓았으면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
데… 하지만 이왕 시작한 것, 나는 무슨 수를 쓰든 그것을 얻을 것이고…
그 후 이놈들을 도륙내어 그대의 원한을 갚아줄 것이오.)
그의 눈가로 만가지 상념과 함께 언뜻 잔혹한 살광이 스쳐 지나갔다.
한데… 숙빈이라니…?
그렇다면 쇠사슬에 묶여 고문을 당하고 있는 여인이 바로 사자천후(獅子天
后) 당숙빈이란 말인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천하 오대무벌(五大武閥)의 안주인인 그
녀가 이런 처참한 모습이 되어 있으리라고 누가 믿겠는가?
적포인…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이 자가 바로 가짜 철사대제(鐵獅大帝)
막붕(莫鵬)이란 말인가?
"깨워라…!"
가짜 막붕의 입에서 한 소리 차가운 명이 떨어졌다.
"옛!"
촤아…!
즉시 대답과 함께 한 명의 장한이 즉시 한 통의 찬물을 당숙빈에게 끼얹었
다.
순간,
"음…!"
당숙빈은 미약한 신음과 함께 진저리를 치며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물에 젖은 머리카락 사
이로 아주 아름답고 기품있는 미부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흉한들은 고문을
하면서도 그녀의 얼굴에까지는 손을 대지 않은 듯 얼굴은 비교적 깨끗한 편
이었다.
하나, 여인으로서 가장 치욕스런 짓까지 당한 그녀의 얼굴 어디에도 생기라
고는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창백하게 질려 처절하기 이를 데 없는 그
녀의 모습은 오히려 야릇한 충동까지 느끼게 했다.
힘겹게 고개를 든 당숙빈의 초점 잃은 눈동자가 적포인에게 머물렀다.
순간, 그를 알아본 당숙빈은 악을 쓰듯 처절한 음성으로 외쳤다.
"어서 나를… 죽… 여라! 막거명(莫巨命)! 당신이 아직도… 사자철림(獅子
鐵林)의 제자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막거명(莫巨命)…!
당숙빈은 그 가짜의 정체를 알고 있는 듯했다.
한데, 놀라운 일이었다. 막거명(莫巨命)이라 불리운 적포인! 그 자는 지옥
마교(地獄魔敎)에서 파견된 자가 아니고 사자철림(獅子鐵林)의 내부 인물이
란 말인가?
가짜 철사대제(鐵獅大帝), 즉 막거명이란 자는 음험한 눈빛을 번뜩이며 당
숙빈을 바라보았다.
"나는 북산군벌(北山軍閥)을 움직일 수 있는 북산풍운번(北山風雲幡)이 필
요하오! 그것은 어디에 감추었는지 말하기 전에는… 당신은 결코 죽지 못하
오, 형수님!"
그는 당숙빈의 턱을 들어 올리며 음울한 어조로 말했다.
-북산풍운번(北山風雲幡)!
∑ 제 22 장 사자철림(獅子鐵林)의 비극(悲劇)
-석림(石林),
이경(二更) 무렵,
짙은 어둠이 석림 일대를 뒤덮고 있었다. 주위는 적막했다. 너무 적막하여
수많은 비석들로 뒤덮인 석림은 귀기마저 감돌았다.
피- 이잉!
문득 하나의 인영이 적요를 깨며 석림의 상공을 유성같이 흘러갔다. 마치
한 마리 천마(天馬)같이 석림의 중지로 날아드는 그 인영은 바로 철운비였
다.
그의 두 팔에는 당숙빈이 축 늘어져 있었다.
"바로… 저기예요!"
당숙빈은 힘겹게 말하며 철운비가 질주하는 전면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하나의 거대한 비석이 우뚝 서 있었다. 높이는 무려 십 장, 수백
년 간 풍상에 씻겨 원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변모된 거대한 비석이었
다.
철운비는 어둠 속에서도 그 비석의 전면에 새겨진 흐릿한 글을 읽을 수 있
었다.
글의 내용은 그러했다.
사자천존(獅子天尊) 막천형(莫天形)-!
그렇다! 그 비석은 위대한 사자철림(獅子鐵林)의 패왕 사자천존(獅子天尊)
의 비석이었다.
그가 다른 네 명의 세외기인들과 함께 분연히 검을 들어 아수마황을 요격함
으로써 북산 사자철림은 천하 오대무벌의 일가가 되었고 지난 오백 년 간
북산무림의 맹주로 위명을 떨쳐올 수가 있었다.
화라락!
철운비는 당숙빈을 안고 훌훌 사자천존의 비석 앞으로 내려섰다.
"왜 이곳으로 오자고 하셨소?"
그는 웅장한 사자천존의 비석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대륙을 구했던 위대한
투사의 비석을 바라보는 철운비의 가슴에는 회오리 같은 상념이 일었다.
그때, 당숙빈이 미약한 음성으로 철운비의 상념을 깨뜨렸다.
"은공… 께서는 이 천한 계집의 생명인 사후(獅吼)를 구해 주셨어요. 그래
서 한 가지 물건을 드려 그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려고 해요!"
그녀는 처절한 눈빛으로 자신의 위대했던 선조의 유적을 올려다 보았다.
"이 신단(神壇)을 옆으로 밀어 보세요. 그 안에… 은공께 드릴 선물이 있어
요!"
그녀는 사자천존의 비석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주르르…!
그런 그녀의 파리한 뺨으로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못난 후손을… 용서하소서! 저는 더 이상 북산풍운번(北山風雲幡)을 지킬
수가 없어 그것을 이 젊은 초인(超人)에게 맡기려 하나이다!)
깊은 죄책감으로 당숙빈의 눈빛이 처절하게 물들었다.
"…!"
철운비는 침중한 안색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당숙빈을 조심스
럽게 바닥에 내려 놓고는 말없이 비석 앞에 놓인 신단으로 다가섰다.
신단은 넓이가 삼 장 이상으로 족히 십만 근은 나가 보였다.
그그긍…!
하지만 철운비가 그것을 슬쩍 밀자 신단은 가볍게 옆으로 밀려났다.
신단이 밀려난 자리에는 하나의 길다란 공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공간
안에는 다섯 자 길이의 하나의 철함(鐵函)이 하나 들어 있었다.
"…!"
철운비는 조심스럽게 철함을 집어 들어 열어 보았다.
철컹…!
쇠소리와 함께 철함이 열려졌다.
순간 철운비는 흠칫했다.
(깃발(幡)이 아닌가?)
철함 속에는 하나의 깃발이 단정하게 접혀져 있었다. 깃봉의 길이는 네 자
정도, 그 위에 폭이 한 자, 길이 석 자 정도의 깃폭이 달려 있었다.
"…!"
철운비는 한눈에 깃폭이 천잠사로 짜여져 있음을 알아보았다.
팟! 쩌러렁!
그는 깃발을 집어 들어 펼쳐 보았다.
깃폭의 사면에는 일천 개의 작은 칼(刀)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깃폭의 전면, 사자(獅子)와 늑대(狼), 그리고 독수리가 뒤엉킨 위에
검은 구름이 뒤덮인 삼수쟁패풍운도(三獸爭覇風雲圖)가 정교하게 수놓여져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철운비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훌륭… 한데!"
그는 한눈에 그 문양 중에 극히 오묘한 세 가지 구결(口訣)이 숨겨져 있음
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풍운제왕결(風雲帝王訣)!
그 같은 이름의 삼식(三式)의 초식이 바로 그것이었다.
천 년 그 이전, 북산(北山)을 놓고 쟁패했다는 북산삼황(北山三皇)의 최후
절기가 바로 그것들이었다. 하지만 지난 천 년 간 그 풍운제왕결(風雲帝王
訣)을 연마해 낸 자는 아무도 없었다.
철운비는 한동안 풍운제왕결(風雲帝王訣)을 살피다가 깃폭의 뒷면을 바라보
았다. 그곳에는 깨알같은 글로 일천 개의 문파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사자철림(獅子鐵林)!
-낭인맹(狼人盟)!
-금시천궁(金翅天宮)!
……
이름하여 북산일천군벌(北山一千軍閥)!
그들의 서명이 크지 않은 깃폭에 가득 적혀 있었다. 그 서명은 일천 개의
문파가 자신들의 운명을 그 깃발의 주인에게 위탁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철운비는 그것을 깨닫고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열 관 정도 무게의 별로 볼품없는 깃발… 하지만 그것에는 놀랍게도 북산
일대 오십만 군웅들의 생명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느끼자 철운비는 북산풍운번(北山風雲幡)이 수천억 관의 무게로 느
껴졌다.
이윽고 그는 침중한 표정으로 당숙빈의 앞으로 다가섰다.
"나는 이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부인!"
그는 무거운 어조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말에 당숙빈은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천첩의 바깥 분이 모살(謀殺)당하신 이상… 그것을 소지할 자격이 있는 사
람은 이 북산(北山)에 이미 없어요.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가세요. 북산풍
운번(北山風雲幡)을 지닌 이상… 이제 한시라도 북산군벌 오십만 정영을 은
공의 수족으로 부릴 수 있어요!"
"하지만…!"
철운비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렸다.
그러자 당숙빈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말했다.
"정… 부담스러우시다면… 그것을 천첩의 아들 사후(獅吼)가 성인이 될 때
까지 만이라도 갖고 계세요. 이것은… 천녀의 마지막 부탁이에요!"
"음…!"
철운비는 낮게 침음하며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후일 사후가 사자철림(獅子鐵林)의 지존(至尊)이 될 때까지 제가
보관하는 것으로 하지요!"
그 말에 당숙빈은 비로소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후훗! 누구 마음대로… 그것을 갖겠다는 것이냐 애송이…?"
돌연 어디선가 한 줄기 음산한 음성이 들려왔다.
"막… 거명(莫巨命)!"
순간 당숙빈은 안색이 하얗게 변하며 부르짖었다.
철운비도 흠칫하며 음성이 들린 곳을 주시했다.
언제 나타났을까?
화라락…!
하나의 비석 위, 흠뻑 피에 젖은 적포의 중년인이 오만하게 팔짱을 낀 채
우뚝 서 있었다.
막거명(莫巨命)!
그 자는 바로 철사대제(鐵獅大帝) 막붕(莫鵬)으로 위장했던 인물이었다.
철운비는 막거명의 출현에 뜻밖이라는 기색을 지었다.
"참회… 마전에서 죽지 않았었느냐?"
그는 귀왕철면 사이로 두 눈을 싸늘하게 번뜩이며 막거명을 노려보았다.
막거명은 철운비의 말에 냉소를 터뜨리며 이를 갈았다.
"흥! 철사후예는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다! 참회마전에서 본좌가 죽지 않았
기 때문에 이제 네놈이… 죽어 주어야 한다 애송이!"
말과 함께 그는 손을 쳐들었다.
화라락! 스스스…
그러자 돌연 사방의 비석 뒤에서 아홉 명의 노인이 떠올라 철운비와 당숙빈
을 에워쌌다.
그들은 머리와 수염이 온통 눈이 내린 듯 새하얀 노인들로싸 도무지 나이를
추측할 수 없었다. 전신이 마치 늙은 사자(獅子)들 같은 당당한 위엄과 패
도적인 눈빛을 지닌 노인들이었다.
철운비는 검미를 모았다.
(저… 쥐새끼 같은 놈이 어떻게 거리낌없이 나타났는가 했더니 믿는 데가
있었군!)
그는 나타난 아홉 명의 노인을 돌아보며 내심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그는 노인들이 풍기는 기도에서 그들이 막거명보다 최소한 두 배 이상 강한
내공을 지닌 고수들임을 알아 본 것이었다.
"구대장로…!"
그때 노인들을 본 당숙빈이 옥용이 새하얗게 변하며 비칠 물러섰다.
철운비는 그런 당숙빈을 얼른 부축하며 내심 흠칫 놀랐다.
(구대장로? 그렇다면 이 노인들이 사자철림 최강의 고인들이라는 북산구무
황(北山九武皇)이란 말인가?)
그의 뇌리에 철사신녀(鐵獅神女) 적아황(赤娥皇)에게서 들은 아홉 초고수들
의 이름이 떠올랐다.
-북산구무황(北山九武皇)!
-옥사자(玉獅子) 막거명(莫巨命).
"우하하하핫!"
돌연 막거명은 어깨를 흔들며 미친 듯 웃어제꼈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며 광기 서린 눈으로 중인들을 돌아보았다.
"흐흐! 그렇소! 바로 나요! 십 년 전 당신들의 잘난 가주인 막붕에 의해 천
길단애로 밀려 떨어진 막거명이오!"
그는 악을 쓰듯 외치며 북산구무황을 돌아보았다. 그의 음성은 격분으로 떨
리고 있었다.
"막붕은 늘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었소! 그의 어머니가 정실이고 나의 어
머니가 첩(妾)이라는 이유 때문에… 아버님은 물론… 막대한 부와 권력까지
도…!"
찌- 익!
이어 막거명은 거칠게 반쪽의 인피면구를 마저 얼굴에서 찢어냈다. 그러자
제법 영준하고 단아한 중년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의 안면근육이 거칠게 실룩거렸다.
"어머님이… 당신들의 냉대 속에 쓸쓸히 돌아가셨을 때 나는 그 분의 영전
에 맹세했었소! 언젠가는 북산군벌을 내것으로 만들고 말겠다고…"
그는 광기 번들거리는 눈으로 외치며 북산구무황을 돌아보았다.
"…!"
"…!"
북산구무황은 지나친 충격으로 석상같이 굳어져 멍한 표정으로 막거명을 바
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막거명의 두 눈은 원한과 격분으로 한껏 부릅떠졌다.
"죽어가던… 나를 지옥천존이 구해 주었고… 그의 도움으로… 북산군벌이
내 손에 들어오기 직전이었는데…!"
츠-- 읏!
그는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철운비를 바라보았다.
"네… 놈이 모든 것을 망쳤다! 바득! 이 빚도 꼭 갚고 만다! 어린 놈!"
그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철운비에게 악을 썼다.
그때 북산구무황 중 한 명이 문득 정신을 차리며 노갈을 터뜨렸다.
"바득! 거명! 임주님을… 어떻게 했느냐?"
그 말에 막거명은 음산하게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막붕? 흐흣! 그 놈은 이미 한 줌의 독수(毒水)로 화한 지 오래일 것이다!
천존(天尊)이 시전한 무형지독(無形之毒)에 중독되어 쓰러졌으니까!"
"흐- 윽!"
쿵…!
순간 장권 밖에서 듣고 있던 당숙빈의 안색이 백짓장같이 변해 힘없이 무너
져 내렸다. 남편 철사대제가 살아 있으리라는 한 가닥 희망이 막거명의 그
한 마디에 산산이 깨진 것이었다.
"죽…일 놈! 비록 배가 다르다고는 해도 림주는 네 형이거늘…!"
"네놈이… 사자철림(獅子鐵林)을 망치는구나! 용서할 수 없다!"
그와 함께 북산구무황이 노갈을 터뜨리며 일시에 막거명을 향해 덮쳐갔다.
"멈춰랏!"
피- 잉!
순간 막거명은 훌쩍 십 장 뒤로 물러서며 폭갈을 터뜨렸다. 그런 그 자의
손에는 어느새 한 알의 검붉은 구슬이 들려 있었다.
그것을 본 북산구무황은 대경함을 금치 못했다.
"벽력… 굉천뢰(霹靂宏天雷)다!"
그들은 경악의 외침을 발하며 급급히 멈춰섰다.
-벽력굉천뢰(霹靂宏天雷)!
-철사신녀(鐵獅神女) 적아황!
-지옥벽전풍(地獄霹電風)!
∑ 제 23 장 다시 만난 남장미녀(男裝美女)
황혼(黃昏),
스으… 스으…
진홍빛 노을이 사자철림의 총단인 철사부(鐵獅府)의 후원 가득히 흐르고 있
었다. 홍화(紅火)를 밝힌 붉디붉은 노을은 환상적인 색채를 이루며 타오르
고 있었다.
철사부 후원의 한쪽에는 아름다운 누각이 잘 정돈된 정원에 둘러싸여 있었
다. 그림같이 평화롭고 운치있는 광경이었다.
"까르르…!"
그 평화로운 경치 속에서 해맑은 어린아이의 웃음소리가 노을 속으로 번져
갔다.
어린아이, 한 명의 어린 사내아이가 정원의 잔디밭 위를 아장아장 걷고 있
었다. 바로 철사대제의 아들 막사후(莫獅吼)였다.
막사후는 보기 좋은 발그레한 얼굴로 뒤뚱거리며 나비를 쫓아다니고 있었
다.
"…!"
두 명의 여인이 흐뭇한 표정으로 그런 막사후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크고 작은 몸매의 두 여인, 그녀들은 누각 안에 있었다. 철사신녀 적아황,
그리고 사자천후 당숙빈이 그녀들이었다.
당숙빈은 파리한 안색으로 창가의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생기없던
그녀의 봉목은 제법 윤기를 띠고 있었다.
그녀는 따뜻한 정이 일렁이는 눈으로 어린 아들의 모습을 쫓고 있었다.
적아황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안도의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행이야. 사후아기씨가 주모(主母)에게 생의 의욕을 되살려 주고 있다!)
그녀의 입가에는 미미한 미소가 어렸다.
그때,
"아빠빠…"
돌연 정원의 막사후가 환히 웃으며 한쪽으로 뒤뚱뒤뚱 달려갔다.
막사후가 달려가는 곳은 정원의 입구인 월동문 쪽이었다. 그 월동문으로 막
한 명의 장한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네모 반듯한 위맹한 얼굴에 검붉게 전포를 걸친 그 인물은 철사대제 막붕!
아니, 그로 환신한 철운비였다.
막사후는 철운비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달려갔다.
철운비는 미소지으며 달려온 막사후를 번쩍 안아들었다.
"하하! 우리 사후는 하루가 다르게 무거워지는데…"
그는 유쾌한 듯 껄껄 웃었다. 이어 그는 막사후를 안고 누각 안으로 들어섰
다.
그러자 침상 위에 누워 있던 당숙빈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
"일어서지 마시오 부인!"
하지만 철운비는 일어나려던 당숙빈을 저지하며 막사후를 그녀에게 안겨 주
었다.
당숙빈에게 안긴 막사후는 배가 고팠는지 당숙빈의 저고리를 작은 손으로
파헤쳤다. 막사후의 고사리 같은 손에 의해 당숙빈의 저고리가 옆으로 벌어
지며 한 쌍의 풍만한 젖무덤이 나타났다.
"…!"
당숙빈은 자신의 젖무덤이 철운비의 시야에 드러나자 옥용을 빨갛게 붉혔
다. 그러나 애써 가리지는 않았다.
막사후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숙빈의 젖무덤에 얼굴을 묻고 열심히
빨기 시작했다. 그의 작고 앙증맞은 고사리 손은 빨지 않는 어머니의 다른
한쪽 젖가슴을 남에게 뺏길세라 꼭 움켜쥐고 있었다.
"…!"
당숙빈은 애정이 충만한 따뜻한 눈으로 젖을 빠는 어린 아들을 내려다 보았
다.
철운비는 침상 옆에 앉아 두 모자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후 막사후는 당숙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잠이 들어 버렸다. 그제서야
철운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작별… 인사를 드리러 왔소!"
"…!"
그의 말에 순간적으로 당숙빈의 교구가 경직되었다. 하나 이내 그녀는 평정
을 회복하고 막사후가 풀어헤쳐 놓은 저고리를 여몄다.
"벽력… 부(霹靂府)로 가시렵니까?"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물었다.
철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벽력부의 가장 강력한 화기인 벽력굉천뢰가 어떻게 지옥마교
의 손에 들어갔는지 알아볼 생각입니다."
그는 잠든 막사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지옥천존은 오대무벌을 비롯한 수많은 문파에 그
마수를 뻗어 놓은 상태일 것이오. 그 자와 싸우기 위해서는 먼저 각파에 뻗
힌 그 마수들을 제거하여 지옥마교를 철저히 고립시켜야만 하오!"
말을 하는 철운비의 눈빛이 아주 강해졌다.
그는 북산에 와서야 왜 오대무벌이 지옥마교의 횡행을 방관하고 있는지 알
아차렸다.
지옥천존은 교묘한 수법으로 오대무벌을 장악한 상태였다.
그 지옥천존의 지옥마교와 싸우기 위해서는 먼저 오대무벌에 침투한 마교의
무리를 제거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언제… 떠나시려는지요?"
문득 당숙빈이 기어들어가는 낮은 음성으로 철운비에게 물었다.
철운비는 말을 하는 그녀의 음성이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어느덧 철운비가 당숙빈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인물
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철운비는 그것을 깨닫고 내심 고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게 될 것이오. 그래서 미리… 작별 인사를 드리러
왔소이다!"
그는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그는 침중한 음성으로 말하며 잠시 당숙빈을 내려다 보았다. 이어 그는 돌
아서 천천히 누각을 걸어나갔다.
"상공…"
그런 그의 뒤를 적아황이 급히 쫓아나갔다.
"…!"
그제서야 당숙빈은 고개를 들어 월동문을 나서는 철운비를 주시했다.
철운비는 뒤따라 온 적아황의 손을 마주잡고 월동문 밖으로 사라졌다.
이미 살을 섞어 사실상의 부부가 된 두 사람이다. 당분간 헤어져 있어야 하
는 그들에게는 남은 시간이 너무나 짧기만 한 것이다. 두 남녀는 자신들만
의 공간으로 숨어들어가 아쉬운 열정을 불사를 것이다.
"내일… 아침에 떠난다고…"
당숙빈은 철운비와 적아황이 사라진 월동문을 주시하며 망연한 음성으로 중
얼거렸다.
문득 그녀의 슬픈 봉목에 뽀얀 물안개가 서렸다. 그와 함께 파리한 그녀의
입술 사이로 소리없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무사히… 돌아와요. 그때… 당신이 이 비천한 계집과 사후(獅吼)를 구해
줄 보답을 해드릴 테니…!)
그녀는 모종의 결의로 봉목을 빛내며 잠든 어린 아들을 꼬옥 껴안았다.
스으… 스으…
진홍빛 노을이 두 모자의 주위로 한 폭의 그림처럼 깔리고 있었다.
-야인산(野人山),
-남황(南荒) 벽력부(霹靂府)!
바로 그들이었다.
저 오대무벌 중 남방을 지배하는 패자(覇者),
본래, 벽력부 뇌가(雷家)의 발원지는 서역(西域)이었다. 흑자는 그들이 천
축(天竺)에서 귀화한 일족이라고도 했다. 어쨌든 벽력뇌가(霹靂雷家)가 중
원일족이 아님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벽력천왕(霹靂天王) 뇌합극(雷合極)!
-천축(天竺) 뇌정신문(雷霆神門)!
마천령 아래--
어찌된 일인지 사방 백 장여가 온통 초토화되어 있었다. 아름드리 거목들이
모두 두 동강 난 채 어지러이 쓰러져 있었다.
놀랍게도 거목들은 모두 일 장 높이로 끊어져 넘어져 있었다. 그것은 누군
가가 무서운 검기(劍氣)로 백 장 내의 모든 수목을 일격에 넘어뜨린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츠으… 츠으…!
넘어진 나무들은 급격히 검은 독수로 녹아 내리고 있었다. 무엇인가 지극히
강렬한 독기(毒氣)가 그 나무들을 녹여내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면 장내의
흙과 암석들도 검은 독기로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장권의 끝,
"크크크…!"
"카아…!"
"…!"
기괴한 음향과 함께 세 개의 인영이 대치하고 있었다.
전신이 온통 먹물을 칠한 듯 시커먼 두 명의 괴인들이 좌우로 벌려선 채 한
명의 인물을 포위하고 있었다.
-천독강시(千毒疆屍)!
<폭풍… 군림(暴風君臨)!>
-폭풍제왕검(暴風帝王劍)!
삐-- 이익!
문득 어디선가 한 줄기 날카로운 호각성이 숨막힐 듯한 적막을 갈가리 찢어
발겼다.
"카-- 악!"
직후 두 명의 천독강시가 괴성을 내지르며 미검수를 덮쳐 들었다.
치지직…!
그 자들의 손 끝에서 시커먼 독강(毒剛)이 벼락같이 일어나 미검수를 후려
쳤다.
천독묵강(千毒墨剛)---!
천종극독(千種極毒)의 정화가 응결된 그것에 스치면 금강지신이라 할지라도
단번에 녹아 버린다.
한데 미검수는 천독묵강이 짓쳐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두 눈을
반쯤 내리깔고 검 끝만 주시하고 있었다.
파츠츠…!
순식간에 천독묵강은 미검수의 전신에 작렬했다.
아니 작렬한 듯이 보였다.
천독묵강이 그의 전신을 강타하기 직전,
번- 쩍… 비이잉!
미검수의 전신에서 돌연 검붉은 노을이 폭발하듯 천 겹으로 일어났다.
쩌러렁…!
동시에 천층으로 일어난 그 붉은 노을은 순간적으로 천독묵강을 안개같이
흩어져 버렸다.
"단철… 신강(丹鐵神剛)!"
어디선가 한 마디 놀란 신음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위이잉!
그와 함께 미검수의 폭풍제왕검이 언뜻 허공을 그어냈다.
퍼퍽!
"카아악!"
다음 순간 검은 피가 확 퍼지며 천독강시 중 한 명이 허리부근이 성둥 베어
져 나뒹굴었다. 도검불침이라는 천독강시이건만 미검수의 일검에 무기력하
게 두 동강 난 것이었다.
"카아아…!"
쐐-- 액!
그것을 본 나머지 한 명의 천독강시는 두려운 표정으로 급급히 뒤로 퉁겨져
달아났다. 순간적으로 천독강시는 백 장 저편의 밀림으로 날아 들어갔다.
한데,
"돌아… 가랏!"
그 밀림 속에서 냉막한 일갈이 터지며 하나의 인영이 섬전같이 떠올랐다.
츠츠츠…
전신이 온통 시뻘건 화망에 뒤덮여 떠오르는 인영, 바로 철운비였다.
"뇌… 정인(雷霆印)!"
꽈르릉…!
그의 손 끝에서 일순 시퍼런 뇌정이 일어나 천독강시를 후려쳤다.
퍼-- 억! 푸스스…!
순간 뇌정개벽천강에 격중된 천독강시는 그대로 재가 되어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피-- 잉!
화락! 천독강시를 재로 바스러뜨린 철운비는 질풍같이 허공을 밟아 미검수
의 앞으로 날아내렸다.
그때 미검수는 폭풍제왕검을 등에 짊어진 검갑에 막 집어 넣고 있었다.
"검왕! 방금 그 단철패왕천강(丹鐵覇王天剛)은 누구에게… 배웠소?"
철운비는 격동된 어조로 말하며 미검수를 주시했다.
검왕(劍王)…!
그렇다! 그 미검수는 바로 철운비가 용형마도(龍形魔島)에서 만났던 검왕
(劍王) 벽황(碧皇)이라는 신비검수였다.
"…!"
검왕 벽황은 서글서글한 눈빛으로 철운비를 마주보았다. 그, 아니 그녀의
허무하던 눈빛이 그 순간 기쁨으로 반짝 빛을 발하는 것을 철운비는 미처
보지 못했다.
"남황에서… 그대를 다시 보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벽황은 잔잔하게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그 말에 철운비는 검미를 모으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나는 당신이 어떻게 단철패왕천강을 알고 있는지 물었소!"
철운비가 재차 그렇게 묻자 벽황은 고개를 갸웃하며 미소지었다. 이어 그녀
가 동요없는 조용한 음성으로 태연히 말했다.
"이 세상에서 제게 단철패왕천강을 가르쳐 주실 만한 분이 몇이나 있겠어
요?"
그녀의 말에 철운비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설… 마! 아버님의 제자란 말이오?"
벽황은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어요. 나는… 사제(師第)의 아버님이신 그 분께 단철패왕천강을 배웠
어요!"
"사… 제(師第)?]
철운비는 거듭되는 놀라움으로 입을 딱 벌린 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알기로 눈 앞의 이 남장여인은 하늘 아래 가장 강한 여고수였다. 그녀
는 아마도 머지않아 천년검후(千年劍后)의 보좌에 이를 것이다.
그 최강의 여검수가 바로 철운비의 아버지 고독패왕(孤獨覇王) 철무정(鐵無
情)의 제자를 자청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알 것 같았다. 철운비는 그제서야 아직도 젊기만한 벽황이 어
찌 그렇듯 막강한지 이해가 되었다.
그때 벽황이 서글서글한 눈빛으로 철운비를 주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더 알려 주자면… 이 사저(師姐)의 본이름은 황혜(皇慧)! 벽황혜
예요."
그녀는 정감이 깃든 낮은 음성으로 말하며 어린 사제를 바라보았다.
"벽… 황혜!"
철운비는 더듬거리며 그녀의 이름을 되뇌었다.
문득,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해 줄 테니… 우선 이리로 와봐요!"
검왕, 아니 검후(劍后) 벽황혜(霹皇慧)는 폭풍제왕검을 짊어진 채 표표히
교구를 날려 한쪽으로 날아갔다.
"…!"
철운비도 급히 그녀를 뒤따라 하나의 바위 뒤로 날아갔다.
바위 뒤,
"…!"
한 명의 소년이 가부좌를 튼 채 운공하고 있었다.
나이는 철운비보다 두세 살 어려보이는 십 오륙 세 정도, 중원인과는 달리
윤곽이 뚜렷하고 두 눈 부위가 움푹 파인 영준한 소년이었다.
소년은 일신에 붉은 적포를 걸치고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그의 눈썹은 물론
머리카락까지도 은은한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츠으… 츠으!
운공하고 있는 소년의 몸 주위로 불꽃같이 강렬한 화망(火網)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천독강시의 독기에 중독된 듯했는데 지금 내공으로 그 독기를
태우고 있었다.
철운비는 그 모습을 보고 내심 해연히 놀랐다.
(저것은… 벽력부 비전의 벽력뇌강(霹靂雷剛)이 구성(九成)에 이르면 나타
나는 현상이다!)
그는 형형한 눈빛으로 적포소년을 주시했다.
(나보다 어린 나이인데… 저 정도의 성취를 이루다니… 이 아이의 신분은
무엇이란 말인가?)
놀라움과 함께 의아함을 금치 못하는 철운비의 귀에 문득 벽황혜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 아이는 벽력부의 당대 부주인 벽력잠룡(霹靂潛龍) 뇌천강(雷天剛)이에
요!"
"벽력잠룡(霹靂潛龍) 뇌천강(雷天剛)?"
철운비는 흠칫 놀라며 벽황혜를 돌아보았다.
"이 아이가 벽력부의 부주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벽력부의 당대가주는 벽력
천공(霹靂天公) 뇌패천(雷覇天)이 아니던가요?"
"얼마 전까지는 그랬지요!"
벽황혜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철운비는 그녀의 말에 직감전으로 벽력부에 무슨 변고가 일어난 것을 감지
했다.
-벽력천공(霹靂天公) 뇌패천(雷覇天)!
∑ 제 24 장 벽력부(霹靂府)의 밤
-벽력부(霹靂府)!
-벽력대부인(霹靂大婦人) 뇌온향(雷溫香),
쐐--액! 화라락!
문득 마천령의 좌측 능선으로 세 개의 인영이 질풍같이 날아올랐다. 그들은
바로 철운비와 벽황혜, 그리고 뇌천강이었다.
삼 인은 벽황혜를 선두로 질풍같이 벽력부로 다가섰다.
"강아!"
화락!
아들을 발견한 벽력대부인 뇌온향은 환하게 웃으며 삼 인을 향해 마주 날아
갔다.
"아아! 무사했구나, 나의 아들…!"
뇌온향은 와락 뇌천강을 끌어안으며 안도의 오열을 터뜨렸다.
철운비는 몸을 멈추며 뇌온향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나갔다.
(이 여인이… 벽력대부인(霹靂大婦人) 뇌온향인가?)
뇌천강은 그런 어머니 뇌온향의 가슴에 푹 파묻힌 형상으로 안겨 있었다.
헌데,
"…!"
철운비는 뇌온향에게 안긴 뇌천강의 표정이 아주 복잡한 것을 놓치지 않았
다. 뇌천강의 눈빛은 어떤 연민과 고통의 빛으로 젖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철운비는 음울한 눈으로 뇌온향 모자를 지켜보았다.
그때,
"숙모님! 그동안 격조했습니다!"
문득 벽황혜가 앞으로 나서며 뇌온향에게 포권했다.
뇌온향은 그제서야 이들을 놓아 주며 환히 미소지었다.
"이게 누구야? 장래의 만검조종(萬劍祖宗) 아닌가요?"
그녀는 반갑게 벽황혜의 손을 잡았다. 벽황혜는 일 년 전 남방을 여행하던
중 며칠인가 벽력부에 머물며 신세를 진 적이 있었다.
이윽고 인사를 나눈 벽황혜는 철운비를 뇌온향에게 소개했다.
뇌온향은 철운비에게 시선을 돌리며 온화하게 미소지었다.
"폭풍성은… 복도 많군요. 검왕(劍王) 조카만 해도 인세에 보기드문 기재인
데 철소협 같은 천고기재를 제자로 두었다니…!"
그녀는 진심으로 부러운 듯 말하며 철운비를 주시했다.
"…!"
그녀의 시선을 접한 철운비의 얼굴로 절로 붉어졌다. 푸근한 뇌도향의 인상
에서 문득 그는 얼굴도 못 본 어머니의 모습을 연상한 것이었다.
뇌온향은 무척 기쁜 표정이었다.
"자! 어서 들어가요. 오랜만에 검왕 조카도 오고 했으니 잔치라도 벌여야지
요."
그녀는 따뜻하게 웃으며 돌아섰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철운비는 순간적으로 뇌온향의 미간 사이로 분홍빛
점이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본 그는 내심 흠칫했다.
(저것은… 일종의 고(蠱)에 중독된 현상이 아닐까?)
그는 검미를 모으며 염두를 굴렸다. 그 사이 뇌온향 등은 이미 저만큼 앞서
걷고 있었다.
철운비는 침음하며 눈을 번뜩였다.
(흐음! 이것은 관찰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데…?)
그는 내심 중얼거리며 급히 걸음을 옮겨 중인들의 뒤를 따랐다.
이년(二年) 전,
고독패왕은 아주 심하게 다친 몸으로 운중산을 지나다 벽황혜를 만났다. 그
는 지옥천존과의 싸움에서 중상을 입기는 했으나 죽을 정도로 다치지는 않
았다.
사실 하늘 아래 고독패왕을 죽일 수 있는 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
다.
고독패왕과의 일전에서 지옥천존도 심각한 중상을 입었다. 그리고 그는 일
천 명의 수하 중 구 할 이상을 잃었다.
허나 그 일전으로 고독패왕은 이미 중원에는 지옥천존과 지옥마교를 상대할
어떤 세력도 존재치 않음을 깨달았다.
그것을 깨달은 그는 후일을 도모키 위해 변황(邊荒)으로 가던 길이었다.
그리고 그 도중에 벽황혜를 만난 것이었다.
벽황혜를 만난 고독패왕은 한눈에 그녀가 천년검후(千年劍后)의 재목임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그는 폭풍성에 한 달 간 머물러 벽황혜에게 무공을 전
수해 주었다.
벽황혜가 시전했던 단철패왕신공(丹鐵覇王神功)도 바로 그 중의 하나였다.
그런 한 달 후, 고독패왕은 다음과 같은 한 마디를 남기고 장성(長城) 너머
로 길을 떠났다.
그런 말을 남긴 채…
그것이 이 년 전의 일이었다. 그 후 벽황혜도 수련을 위해 폭풍성을 떠났
다.
그러나 금릉(金陵)에까지 이르게 된 벽황혜는 그곳에서 낙월정(落月亭)의
참사를 듣고 실종된 금릉일관옥(金陵一貫玉)이 바로 자기 사부의 아들임을
알게 된 것이었다.
문득,
"덥… 구나!"
화락…!
술기운이 오름대로 오른 벽황혜는 몽롱한 눈으로 철운비를 바라보며 머리에
쓴 영웅건을 풀어 버렸다. 그러자 삼단 같은 머릿결이 물결치듯 그녀의 어
깨로 흘러내렸다.
이어, 벽황혜는 자신의 가슴을 더듬거리더니 저고리의 옷고름까지 풀어 버
렸다.
그 모습에 철운비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사… 사저!"
그는 급히 말리려 했다.
허나 이미 늦고 말았다. 벽황혜의 저고리가 양 옆으로 벌어지며 눈같이 희
고 탐스러운 그녀의 젖무덤이 드러났다.
그녀의 젖가슴은 별로 크지는 않았다. 허나, 소담스럽고 탄력있는 육봉은
탐스럽기 이를 데 없었으며 젖꼭지 또한 유난히 큼직하여 눈길을 끌었다.
철운비는 용형마도에서 이미 벽황혜의 젖무덤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허
나 그럼에도 그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내가… 밉지 않아, 사제?"
벽황혜는 야릇한 눈길로 철운비를 바라보며 물었다.
철운비는 고혹적이기 이를 데 없는 벽황혜의 모습에 얼굴이 벌겋게 변한 채
더듬거렸다.
"아… 아름다우십니다. 세상 누구보다도…!"
그의 당황하는 모습에 벽황혜는 문득 깔깔 웃었다.
"호호… 사제는 아부에도 능숙하군! 그런 의미로 한 잔 더…!"
그녀는 술잔에 술을 가득 채우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자 몽롱하던 그녀
의 눈빛이 더욱 흐려졌다.
"나는… 천년검후(千年劍后)가 되는 것이 꿈이야. 하지만… 마지막 단계에
서 한 가지 장애에 부딪쳐 좌절당하고 말았지."
벽황혜는 혼미한 눈빛으로 철운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지간한 그녀건만
술기운에 이미 몸을 주체치 못할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철운비는 실로 당혹함을 금치 못했다. 허나 그 당혹함을 감추기 위해 더듬
거리며 물었다.
"그 난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웃지 마라! 바로… 육… 욕(肉欲)…!"
쿠-- 웅!
거기까지 말하던 벽황혜는 기어코 모로 쓰러지고 말았다. 허나 벽황혜는 그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이내 인사불성이 된 듯 잠에 곯아떨어져 벌렸다.
"육… 욕(肉欲)이라고…?"
철운비는 벽황혜의 말에 얼굴이 벌겋게 변한 채 더듬거렸다.
그는 이내 벽황혜가 말한 의도를 알아차렸다. 벽황혜는 철운비에게 자신을
안게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 이상 욕정(欲情)으로 고민하는 일없
이 검후(劍后)의 경지에 이를 작정이었다.
허나 그녀는 맨정신으로 안길 용기가 없어 술을 마신 것이었다.
철운비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내심 탄식했다.
(당신은… 제게 친누님같이 소중한 분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범할 수가
없습니다 사저!)
그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그는 자신의 장포를 벗어 벽황혜의 벗
은 상체를 덮어 주었다.
"바람이라도… 쏘이고 와야겠군."
슥!
철운비는 우울하게 중얼거리며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가 나간 직후,
(바보!)
또륵…!
문득 꼭 감은 벽황혜의 긴 속눈썹 사이로 따뜻한 이슬이 배어 흘렀다.
그녀는 실상 술에 취한 것이 아니었다. 술에 취하기에는 그녀의 내공과 수
련이 너무 심오했다.
(입 안에 들어온 고기도 못 먹는 멍청이! 그래서 내가 네게 빠진 것인지도
몰라 나의… 운비(雲飛)!)
벽황혜의 입술가로 문득 따뜻한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언제고 날 품게 만들고 말겠어! 사부님이신 고독패왕에게 입은 은
혜를 조금이나마 갚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두 손으로 자신의 젖가슴을 꼬옥 끌어안았다.
밤(夜), 남황(南皇)의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암흑독종(暗黑毒宗)!
-벽력대부인(霹靂大婦人) 뇌온향,
<벽력열화진결(霹靂熱火眞訣)!>
"안… 돼!"
한순간 벽력대부인 뇌온향은 거의 발작적으로 외쳤다.
빠-- 직!
그와 함께 그녀의 봉목에서 폭발하듯 화광이 일며 그녀의 묶은 머리카락이
창날같이 치솟아 올랐다.
"벽력… 열화진결을 네놈에게 건네 주느니… 차라리 네놈과 동귀어진하고
말겠다."
쩌저정!
뇌온향은 벽력뇌강(霹靂雷剛)을 극한으로 일으킨 채 맹렬한 기세로 암흑독
종을 향해 덮쳐들었다. 그런 그녀의 기세는 마치 한 덩어리 불(火)의 정령
(精靈)같이 보였다.
하지만 암흑독종의 표정에서는 조금의 동요도 찾아볼 수 없었다.
"흐흐… 너는 내게 반항하지 못할 텐데…! 옴마니 반메흠 옴 아 홈 사바하
…!"
그는 음산하게 웃으며 입 안으로 무엇인가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악!"
쿠-- 웅!
순간 맹렬하게 덮쳐들던 뇌온향이 갑자기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뚝 떨
어져 나뒹굴었다.
그때 철운비는 보았다. 바닥으로 나뒹군 뇌온향의 미간에 분홍빛 점이 선명
하게 떠오르는 것을!
뇌온향의 이마에 떠오른 그것은 마치 누에고치의 형상으로 흡사 살아 있는
듯 뇌온향의 미간에서 꿈틀거렸다.
그리고 무엇인가 사이한 주문을 외우는 암흑독종의 검은 미간 사이에도 뇌
온향의 그것과 똑같은 분홍빛 점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을 본 철운비는 경악하며 숨을 죽였다.
(고… 독(蠱毒)이다!)
그는 뇌온향의 이마에 떠오르는 분홍점이 일종의 고독(蠱毒)에 중독된 현상
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제서야 그는 뇌온향이 왜 가문의 율법을 어기고 벽력굉천뢰를 외부에 유
출시켰는지 알게 되었다.
벽력대부인 뇌온향, 그녀는 바로 묘강에서만 난다는 일종의 고충(蠱蟲)에
제압당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시술자는 암흑독종, 그 자일 것이다.
"흐윽… 아아아…"
그때 바닥에 쓰러진 뇌올향은 숨넘어갈 듯 헐떡이며 괴롭게 몸부림치고 있
었다. 그녀의 옥용은 불에 달군 쇳덩이같이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또한 그녀의 두 눈은 욕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으며 붉은 입술 사이로 숨막
힐 듯 거친 헐떡임이 새어나왔다. 뇌온향이 중독된 고독은 아마도 욕정(欲
情)을 자극하는 작용을 하는 듯했다.
"제… 제발… 나좀 어떻게 해줘요."
뇌온향은 참을 수 없는 듯 자신의 손으로 저고리를 마구 풀어헤치며 암흑독
종을 향해 애원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당당한 벽력부의 안주인도 무엇도 아니었다. 그저 그
녀는 발정한 한 마리 짐승의 암컷일 뿐이었다.
찌직… 찍…!
마침내 뇌온향은 욕정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전포를 갈가리 찢어발겼다.
삽시에 전포의 저고리가 찢겨나가며 눈같이 희고 풍만한 뇌온향의 젖무덤이
물결치듯 출렁이며 나타났다.
물이 오를대로 오른 중년여인의 속살은 한 번 본 사내라면 뇌살당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탐스러웠다.
"흐흐…!"
어느덧 암흑독종의 녹색 눈도 타는 듯한 욕정으로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
다.
"흐흐… 본좌가 말했었지! 네년은 영원히 내 손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그는 음탕하게 히죽 웃으며 뇌온향에게 다가갔다.
뇌온향은 이미 이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어… 어서… 제발…!"
그녀는 사내가 다가서자 반듯이 누워 허벅지를 활짝 벌려 세우며 숨을 헐떡
였다.
지금 그녀는 자신을 향해 다가서고 있는 사내가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못하
는 상태였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자신의 욕정을 충족시켜 줄 사내
뿐이었다.
암흑독종은 그런 뇌온향의 모습에 득의의 웃음을 흘렸다.
"흐흐… 벽력열화진결을 손에 넣는 것은… 한 차례 즐긴 후라도 상관없겠
지!"
그는 두 눈을 욕정으로 번들거리며 자신의 앞에 무방비 상태로 누워 있는
탐스러운 여체를 노려보았다.
이어 그는 활짝 벌려 세운 뇌온향의 아랫도리로 먹물을 칠한 듯이 시커먼
손을 가져갔다.
화락…!
뇌온향의 붉은 치마가 암흑독종의 손길에 의해 뒤로 걷혀졌다. 그러자 뽀얗
고 풍만한 뇌온향의 아랫도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곧게 쭉 뻗은 종아리… 한아름이나 될 듯 풍만하고 희멀건 허벅지… 그 위
쪽으로 펑퍼짐하게 벌어진 둔부와 팽팽한 하복부는 사내를 숨죽이게 만들었
다.
헌데 놀랍게도 치마 속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기름진 복
부 아래로 여인의 부끄러운 곳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알맞게 살이 올라 도도록한 두덩과 그 아래로 이어진 계곡을 뒤덮은 무성한
방초, 뇌온향은 눈썹과 머리칼 뿐 아니라 부끄러운 곳의 체모까지도 붉은
빛이었다. 그것은 실로 기묘한 자극을 주는 모습이었다.
"흐음…!"
암흑독종은 침을 꿀꺽 삼키며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이어 그는 검은 손을
뻗어 뇌온향의 허벅지를 좌우로 활짝 열어젖혔다.
마침 뇌온향은 동굴의 입구 쪽으로 하체를 벌리고 누워 있었다. 그 바람에
철운비는 본의 아니게 뇌온향의 부끄러운 곳을 그대로 보고 말았다.
무성한 붉은 방초 사이로 한 쌍의 붉은 꽃잎을 내민 여체의 깊게 갈라진 비
궁이 화살같이 철운비의 두 눈에 쏘아져 들어왔다.
(빌어… 먹을…!)
철운비는 당황하며 급히 시선을 돌려 버렸다. 어쨌든 일문의 주모인 벽력대
부인 뇌온향의 부끄러운 곳을 본다는 것이 죄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 악!"
그때 암흑독종이 어떻게 했는지 뇌온향의 입에서 자지러지는 듯한 교성이
터져나왔다.
"…!"
흠칫하며 고개를 돌린 철운비의 얼굴이 금방 벌겋게 변했다. 암흑독종의 머
리가 활짝 벌려진 뇌온향의 아랫도리에서 교묘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본
것이었다.
암흑독종의 입술과 혀가 움직일 때마다 뇌온향은 사지를 허위적거리며 비명
을 내질렀다.
삽시에 뇌온향의 은밀한 부위는 그녀 자신의 체액과 암흑독종의 타액으로
흥건히 젖어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아… 악!"
뇌온향은 마침내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크게 사지를 허위적거리다가 축 늘
어뜨렸다. 암흑독종의 집요한 공격에 그만 실신하고 만 것이었다.
"흐흐…"
그제서야 암흑독종은 히죽 웃으며 뇌온향의 하체에서 얼굴을 뗐다. 부끄럽
게 사지를 활짝 벌린 채 혼절한 뇌온향의 깊고 농염하게 무르익은 옹달샘에
서는 뜨거운 이술이 꿀물처럼 배어 흐르고 있었다.
"흐흣… 오늘은 각별한 맛이 있겠는데…"
암흑독종은 하체만 벌거벗은 뇌온향을 음탕하게 내려다 보았다.
이어 그는 서둘러 하의를 벗어내렸다. 그러자 시커멓고 흉측한 그의 남성이
불끈 튀어나왔다.
암흑독종은 욕정에 번들거리는 눈으로 곧 뇌온향의 풍만한 몸 위로 올라갔
다. 그리고 그는 한 손으로 뇌온향의 젖은 꽃잎을 양 옆으로 벌리고 그곳으
로 자신의 흉칙한 일부를 가져갔다.
"흐흐…!"
암흑독종은 자신의 예민한 일부가 더할 수 없이 보드러운 살점에 닿는 전율
적인 감촉에 몸을 떨었다.
이어 그는 서서히 하체에 힘을 주어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순간 실신한 뇌
온향의 허벅지가 한 차례 퍼뜩 경련을 일으켰다.
"으음…!"
그와 함께 암흑독종의 입에서도 앓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격렬하
게 조여드는 여체의 감촉에 몸을 떨며 자신을 깊숙이 여체 속으로 밀어 넣
기 시작했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헛!)
돌연 암흑독종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전율을 느끼며 부르르 몸을 경련했다.
눈빛! 한 쌍의 비수 같은 눈빛이 자신의 등으로 날아와 꽂히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초절정의 내공을 지녔기 때문에 감지할 수 있었다.
"웬… 놈이냐?"
팟!
다음 순간 암흑독종은 벼락같이 뇌온향에게 떨어지며 홱 돌아섰다.
헌데 돌아선 그의 두 눈이 한껏 부릅떠졌다.
언제 나타났을까? 동굴의 입구를 가득 메우고 한 명의 인영이 우뚝 서 있었
다.
그 인물은 밤하늘을 등지고 있어 언뜻 모습을 알아볼 수 없었다.
츠-- 읏!
다만 한 쌍의 심장을 바스러뜨릴 듯 무섭게 번뜩이는 눈빛만이 보일 뿐이었
다.
"너는… 케-- 엑!"
노갈을 내지르던 암흑독종의 입에서 비명이 터진 것은 바로 직후였다.
퍼-- 억!
그의 오른팔이 무엇인가에 썽둥 잘려져 어깨로부터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닌
가? 아! 어느 사이엔가 나타난 인영의 왼손에 한 자루 쇠사슬이 달린 낫
(鎌)이 들려 있었다.
전체가 온통 피를 칠한 듯 시뻘건 낫(鎌)…! 암흑독종의 오른팔을 베어 버
린 것은 바로 그 낫이었다.
낫이 날아드는 속도는 너무 빨라 암흑독종이 경각했을 때는 이미 자신의 오
른팔이 동체에서 떨어져 나간 후였다.
"지옥… 혈겸(地獄血鎌)!"
쿵쿵…!
암흑독종은 공포의 비명을 지르며 뒤로 비칠비칠 밀려났다. 그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자신의 팔 하나가 잘려졌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지옥혈겸(地獄血鎌)!
∑ 제 25 장 암흑독종(暗黑毒宗)의 죽음
-암흑천독강전(暗黑千毒剛箭)!
그것은 독문(毒門) 오대독공(五大毒功)에 드는 것이었다. 이것은 일종의 지
력(指力)으로써 그 빠르기가 가히 전광(電光) 같다.
그것에 일단 격중되면 순간적으로 전신이 썩어 버린다. 다만 암흑천독강전
은 극도의 내공소모를 일으켜 한 번 시전한 뒤 다시 펼치려면 한 달 동안
요양해야만 한다.
철운비를 격중시킨 것은 바로 그 암흑천독강전이었다.
"카앗! 아는 것이 너무 늦었다, 애송이!"
피-- 잉!
그때 암흑독종에 재차 발악하듯 외치며 비틀거리는 철운비에게 덮쳐들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철운비가 아니라 철운비가 들고 있던 지옥혈겸(地獄血
鎌)이었다.
한데 철운비가 그 지옥혈겸을 떨어뜨리자 암흑독종은 거리낄 것없이 덮쳐든
것이었다.
"바득… 녹아랏! 묵린독장(墨鱗毒掌)!"
치지직!
암흑독종은 거칠게 흉갈을 터뜨리며 왼손으로 벼락같이 철운비의 정수리를
후려쳤다.
순간 그의 손바닥에서 시커먼 독장이 벼락치듯 일어나 철운비에게 작렬했
다.
(죽였다!)
암흑독종은 득의의 미소를 떠올리며 철운비의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비이이-- 잉! 쩌러렁!
돌연 철운비의 몸 주위로 검붉은 노을이 천 겹으로 폭발하듯 일어났다.
-단철패왕신공(丹鐵覇王神功)!
-잠마폭풍참(潛魔暴風斬)!
남해 잠마혈종(潛魔血宗) 최강의 파멸공력이 펼쳐진 것이었다.
후드득… 퍼퍼퍽!
다음 순간 분쇄된 살점과 뼈조각이 검붉은 피와 함께 허공으로 확 번져올랐
다.
"크아아!"
쿠웅!
이어 암흑독종의 입에서 재차 처절한 비명이 터지며 그의 몸이 동굴 밖으로
내팽개쳤다.
아! 실로 끔찍했다. 잠마폭풍참에 휘말려 암흑독종의 아랫도리는 허리까지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으스러져 버린 것이 아닌가?
"으아아악! 내 다리… 내 다리…!"
지면으로 나뒹군 암흑독종은 처절하게 부르짖으며 몸을 바둥거렸다.
"흐응! 남의 고통은 몰라도 네놈 자신의 사지가 떨어져나간 고통은 아는구
나!"
슥!
그때 철운비가 차갑게 냉소하며 암흑독종의 옆으로 날아 내렸다.
암흑독종은 고통으로 안면을 참담하게 일그러뜨리며 눈을 부릅떴다.
"크윽… 네놈은 분명… 암흑천독강전에 격중되었을 텐데…!"
그는 철운비를 노려보며 불신과 공포의 빛을 띠었다.
그 모습에 철운비는 싸늘한 냉소를 흘렸다.
"암흑천독강전 정도는 나를 죽이지 못한다!"
찌익!
그는 왼쪽 어깨의 폐포자락을 뜯어냈다. 그런 그의 어깨에는 사발만한 크기
의 검은 점이 새겨져 있었다. 바로 암흑천독강전에 관통당한 흔적이었다.
하나 보라! 기이하게도 그 점은 급격히 작아지고 있었다. 그것은 철운비의
내부에 있는 만년혈만(萬年血饅)의 보혈이 작용하여 독기를 밀어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에 암흑독종은 경악하며 입을 딱 벌렸다.
"불… 사지체(不死之體)였다니…!"
그의 눈이 절망의 빛으로 물들었다.
"독문(毒門)의… 천적(天敵) 불사마종(不死魔宗)이… 부활하다니… 이 사실
을… 독황야(毒皇爺)께서 알아야 하는데…"
그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철운비를 바라보며 더듬거렸다.
철운비는 눈썹을 꿈틀했다.
"독… 황야(毒皇爺)? 그 자가 누구냐?"
그는 냉담한 눈빛으로 암흑독종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순간 암흑독종은 잔인한 표정으로 바득 이를 갈았다.
"캇! 네놈이 불사지체는 무어든… 독황야께서 복수를 해주실 것이다. 본좌
는 뇌가계집을 데리고 먼저 지옥에 가서 네놈을 기다리겠다!"
퍼억!
발악하듯 외침과 함께 돌연 그 자는 성한 왼손으로 자신의 심장을 후벼팠
다.
"엇!"
돌연한 그의 태도에 철운비는 대경했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암흑독종이
스스로 심장을 박살내고 나뒹군 후였다.
철운비는 안색이 일변했다.
(큰일이다. 고독(蠱毒)은 시술자가 죽으면 중독당한 숙주까지 함께 죽고 만
다는데…!)
그는 급히 동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고독을 시술한 암흑독종이 죽은 이상
뇌온향까지 죽게 된 것이었다.
한데, 철운비가 막 동굴 안으로 달려 들어가려 할 때였다.
"그럴… 필요없소 철형(鐵兄)!"
문득 동굴 위의 석벽에서 비통한 일갈이 터졌다.
(벽력잠룡 뇌… 천강!)
철운비는 안색이 홱 변하며 내심 부르짖었다. 그는 급히 석벽 위를 올려다
보았다.
과연 동굴이 있는 석벽 위 한 명의 적포소년이 눈물을 흘리며 서 있었다.
-벽력잠룡(霹靂潛龍) 뇌천강!
-지옥… 천존(地獄天尊)!
바로 그녀였다.
지옥천존의 그림자인 지옥삼패(地獄三覇)의 막내 요녀(妖女)!
나찰관음은 지옥천존에게 나긋하게 허리를 숙이며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어제저녁… 벽력부에 두 명의 젊은 무사들이 왔었는데… 그 중 한 자는 사
경(四更) 무렵 급히 남쪽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지옥천존의 녹안이 순간 번쩍 빛났다.
"그 자들의 이름은 확인했느냐?"
그 말에 나찰관음의 눈빛이 문득 야릇해졌다.
"그것이… 한 자는 철운비(鐵雲飛)라 하고… 다른 한 자는 잘 알려진 신진
제일고수 검왕(劍王)…"
지옥천존이 그녀의 말을 막았다.
"떠난 쪽은… 철운비(鐵雲飛) 쪽인가?"
"그렇습니다. 아마도 그 어린 아해는 묘강의 살황독종(薩荒毒宗)을 향해 간
듯합니다!"
나찰관음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용… 연향 때문이겠지!"
따각!
지옥천존은 암흑독종의 바스라진 두개골을 발로 툭 차며 스산하게 중얼거렸
다.
그는 한눈에 암흑독종의 몸에서 환희마고(歡喜魔蠱)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
다. 그리고, 그것으로 모든 것을 추측해 낼 수 있었다. 그것은 지옥천존 자
신이 오히려 암흑독종보다 더 고명한 용독(用毒)의 달인이었기 때문이다.
문득, 지옥천존은 모종의 결심을 한 듯 내심 중얼거렸다.
(그래! 그 어린 용(幼龍)이 더 이상 자라게 방치할 수는 없다. 묘강(苗疆)
이라면 놈을 제거하기에 적합한 장소지!)
츠으!
그의 눈가로 섬뜩하도록 스산한 한광이 스쳐 지나갔다.
"…!"
그것을 본 나찰관음의 봉목이 순간적으로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지옥천존은 스산한 음성으로 나찰관음에게 명했다.
"묘강의… 도화독모(桃花毒母)에게 전서를 보내라. 한 마리 잠룡(潛龍)이
갈 것이니… 붙잡아 두라고. 독… 황야(毒皇爺)가 도착할 때까지…!"
"…!"
나찰관음의 교구가 일순 파르르 경련했다. 하나 그것은 극히 순간적이라 지
옥천존도 눈치채지 못했다.
"분부대로…!"
나찰관음은 두 손을 풍만한 가슴에 모으고 고개를 깊숙이 숙여 보였다.
스스…
그녀는 곧 날렵하게 교구를 날렸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모습은 자욱한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나찰관음이 사라지고 나자 지옥천존은 허리를 숙여 암흑독종의 시신에 왼손
을 갖다냈다.
파사삿!
다음 순간 돌연 암흑독종의 시신이 새하얀 백골로 변해 부서져 내렸다.
그것은 암흑독종의 시체에 깃들어 있던 모든 독기가 순간적으로 증발되어
일어난 현상이었다. 심지어는 흙에 스며들었던 독혈(毒血)의 독기까지 일시
에 증발해 버리고 말았다.
물론 그 독기를 받아들인 것은 지옥천존이었다. 가공스럽게도… 그는 전율
스런 위력의 독공(毒功)까지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오갑자에 이르는 암흑독종의 천독지공(千毒之功)을 흡수한 지옥천존의 눈가
로 만족한 빛이 흘렀다.
"후훗! 철운비! 곧… 본좌를 만나게 되리라! 살황독종(薩荒毒宗)의 땅… 묘
강(苗疆)에서 후후훗!"
스스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이 뿌옇게 변하더니 이내 장내에서 사라져 버렸다.
사람의 자취가 사라진 절곡에는 다시 음습한 안개와 괴괴한 적막만이 떠돌
고 있을 뿐이었다.
-묘강(苗疆).
<살황… 독종(薩荒毒宗)!>
바로 그들이었다.
만독(萬毒)의 하늘… 그들은 달리 묘강천독연맹(苗疆千毒聯盟)이라고도 불
린다.
일천 개의 군소국가와 부족, 문파가 모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천독연맹이라
불리는 것이다.
살황독종은 가히 묘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묘강에는 수많은 군소국
가들이 있으나 그들 중 살황독종의 통제를 받지 않는 국가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살황독종은 그렇게 천 년 이상 묘강을 지배해 왔다. 자연히, 살황독종의 종
사는 신(神)같이 숭앙을 받아왔다.
당대의 독종(毒宗)은 묘강독성(苗疆毒聖)이란 인물이었다. 백 년 전, 열 명
의 천독강시를 중원으로 보내 한바탕 파란을 일으킨 장본인이 바로 그였다.
그는 살황독종 사상 최강의 고수라 할려진 인물이었다. 그의 나이 백오십이
가까우나 아직까지 묘강 아래에서는 신(神)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묘강독성은 이미 독공 최후단계인 독종독인지경(毒宗
毒人之境)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경지는 십 리 밖의 적을 눈짓 한 번으로
녹여낼 수 있는 경지였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묘강독성은 문인들의 앞에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대신 그는 독종(毒宗)의 상징인 독왕번(毒王幡)을 한 명의 젊은 패웅에게
주어 그로 하여금 살황독종을 다스리게 했다.
-독… 황야(毒皇爺)!
이것이 새로운 살황독종 종사의 이름이었다.
그는 아주 신비한 인물이었다. 다만 독황야라 불릴 뿐 그의 모든 것은 비밀
에 싸여 있었다.
혹자는 그가 묘강독성(苗疆毒聖)이 중원의 공략을 위해 비밀리에 키운 제자
라고도 하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어쨌든 독황야는 몇 년 사이 가히 초인적인 능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묘강독성에 못지 않은 뛰어난 독공(毒功), 빈틈없이 치밀한 심기 등으로 독
황야는 이내 묘강 제부족들을 진심으로 심복화시켰다.
묘강의 풍운아(風雲兒)-- 독황야(毒皇爺)!
살황독종의 문인들은 그 독황야가 그들의 천 년 숙원인 중원정복을 이루어
줄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살황독종의 독인들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독황야라는 이름 아래 파
멸의 암운(暗雲)이 서서히 묘강 전체를 뒤덮고 있음을…
정오 무렵,
콰-- 아아…!
갑자기 하늘이 새카맣게 변하더니 장대 같은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것은 열대지방에서 매일 한 차례씩 쏟아지는 폭우였다.
쏴아아…!
빗줄기는 흡사 묘강밀림 전체를 떠내려 보낼 기세로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
다.
어느 야트막한 구릉,
"흐음… 대단한 기세인데…!"
한 명의 소년이 팔짱을 낀 채 우뚝 서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온 치렁한 장
발, 일신에 낡은 폐포를 걸친 소년이었다.
철운비-- 바로 그였다.
그는 구릉 위에 우뚝선 채 폭우가 쏟아지는 광활한 밀림을 내려다 보고 있
었다.
스으… 스으…
그의 일 장 주위로는 빗물이 침투해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몸 주위에서 일어나는 무형강기의 벽이 빗물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흐음… 살황독종의 중심지까지는 왔지만 어디 가서 용연향을 구할지 난감
한데…?)
철운비는 검미를 모으며 습관적으로 이마를 긁었다.
그런 그의 이마에는 하나의 흐릿한 분홍 점이 떠올라 있었다. 물론 그것은
환희마고(歡喜魔蠱)였다.
철운비는 벽력부를 떠난 지 사흘 만에 이곳에 닿았다. 사흘 동안 환희마고
는 수시로 철운비를 당혹하게 만들곤 했다.
그것은 보통 때는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하나 환희마고는 수시로 깨어나
철운비의 본능을 자극하여 날뛰곤 했다.
본래 환희마고는 이성(異性)의 음정(淫精)을 먹고 사는 놈이었다. 즉 철운
비가 여인을 안으면 그때 생기는 음양정기를 먹고 사는 것이었다.
당연히 사흘 동안 철운비는 한 번도 환희마고를 만족시켜 주지 못했다. 그
때문에 환희마고의 발작은 점점 빈번해지고 그 강도도 강해져 갔다.
철운비는 의지력으로 그것을 제어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간 고역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빌어먹을… 빨리 용연향을 찾아 이놈을 몰아내든지 해야지, 원, 이러다가
나 자신도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겠는데…!)
철운비는 자신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고소를 지었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크아아아…!"
어디선가 한 줄기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
철운비는 그 소리에 흠칫 정신을 차렸다.
빗줄기가 워낙 드센지라 보통사람 같았으면 듣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 철운
비의 민감한 이목은 순간적으로 그 비명이 들린 위치를 파악해 냈다.
철운비는 번쩍 기광을 발했다.
(가보자! 잘하면 살황독종의 무리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스읏!
그렇게 결심한 순간 그의 신형이 흔들리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쏴아아…!
빗줄기는 여전히 세차게 묘강의 밀림 위를 두드리고 있었다.
∑ 제 26 장 천독사망편(千毒死亡鞭)
석곡(石谷)--
높은 석벽 아래 자리한 험한 골짜기였다.
쏴아…!
이름모를 그 석곡(石谷)에도 거센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한데 아! 이럴 수가…! 낮은 곳으로 흐르는 빗물은 끔찍하게도 검붉은 핏빛
이 아닌가? 빗물이 핏물로 화해 흘러내리다니…
문득,
"크으…! 자면독왕(紫面毒王)! 네… 네놈까지 살황독종(薩荒毒宗)을 배신하
다니."
분노와 고통에 이지러진 음성이 미약하게 들렸다.
하나의 바위 아래, 한 명의 노인이 고통스럽게 바르작거리고 있었다. 당당
한 체격에 네모 반듯한 얼굴을 한 초로의 노인이었는데, 지금 그의 모습은
너무도 끔찍하여 도무지 살아 있는 인간의 몸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츠… 츠으…
노인의 사지는 마치 얼음이 녹듯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있었다. 무엇인가 강
렬한 극독이 노인의 뼈와 살을 녹여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노인의 전신 피부도 급격히 녹아들어가 근육과 뼈가
허옇게 드러나고 있었다. 실로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빗물이 검붉게 변한 것은 노인의 몸이 녹아내린 독혈(毒血)이 섞였기 때문
이었다.
한데 그런 노인의 처참한 모습을 잔인하게 내려다보며 히죽 웃고 있는 자가
있었다.
"후훗! 아직도 주둥이는 살아 있구나, 개비독장(開臂毒掌)!"
그자는 일견하여 이십 오륙 세 정도 되어보이는 청년이었다. 제법 영준한
용모를 지녔는데 기이하게도 얼굴이 검붉은 자색(紫色)이었다. 또 가늘고
날카로운 눈매와 얄팍한 입술은 잔인한 인상을 물씬 풍겼다.
자면청년(紫面靑年)의 오른손에는 날카로운 비늘이 솟은 하나의 채찍이 감
겨 있었다.
-천독사망편(千毒死亡鞭)!
이것이 채찍의 이름이었다. 그것은 천 가지 독물에 담궈 만든 것으로 스치
기만 해도 금강불괴를 녹이는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살황독종의 호법신병(護法神兵)으로 지옥혈겸(地獄血鎌)과 함께 천하팔천병
(環宇八天兵)의 하나에 드는 마병 천독사망편!
그것을 이 자면청년이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개비독장(開臂毒掌)이라 불린 노인의 사지가 흐물흐물 녹아드는 것은 바로
그 천독사망편(千毒死亡鞭)에 스쳤기 때문이었다.
개비독장 또한 절정독공을 익힌 고수자였다. 하건만 천독사망편의 무서운
독기에 침습당해 자신이 녹아들고 있는 것이었다.
-사대독황(四大毒皇)!
--독황야(毒皇爺)!
--암흑독종(暗黑毒宗)!
--도화독모(桃花毒母)!
--자면독왕(紫面毒王)!
그들이 바로 사대독황(四大毒皇)이었다.
사대독황은 묘강 살황독종을 이끌어 나갈 다음 세대라는 네 명의 고수들로
써 각기 한 가지씩의 독특한 독공절기를 지녀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다는
자들이었다.
그 중 암흑독종은 천독강시(千毒疆屍)를 부리는 것과 암흑천독강전(暗黑千
毒剛箭)으로 유명한 자인데 얼마 전에 철운비에게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그 자가 패사한 것도 순전히 방심하다가 기습을 당해 죽은 것이었
다. 그것도 철운비가 환우팔천병(還宇八天兵) 중 하나인 지옥혈겸을 지녔기
때문에 어이없이 격살당한 것이다.
한 예로 철운비조차 그 자가 시전한 암흑독강전에 피하지도 못하고 격중당
했지 않은가? 만일 철운비가 백독불침의 능력이 없었으면 죽음을 면치 못했
을 것이다.
하물며 암흑독종의 암흑천독강전은 살황독종 오대독공(五大毒功)중 겨우 서
열 사 위의 것에 불과함에랴…!
자면독왕(紫面毒王)--!
방금 달아난 그 자도 사대독황(四大毒皇)의 일 인이었다. 하지만 그 자 역
시 창졸지간 철운비의 적붕쇄강조(赤鵬碎彊爪)의 공력에 당해 놀라 달아난
것이었다. 만일 정식으로 싸웠다면 철운비도 꽤 고전했을 것이다.
스으… 스으…
짙은 안개가 온통 밀림을 뒤덮고 있었다. 폭우가 그치자 남방의 뜨거운 태
양이 다시 작렬하며 대기를 온통 한증탕같이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꾸역꾸
역 일어나는 안개는 너무 짙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였다.
피-- 이잉!
헌데 그 짙은 안개 속으로 하나의 인영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철운비, 바로 그였다.
(낭패인데… 길을 잃은 것 같다!)
그는 고소를 지으며 안개 속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촤아아…!
돌연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나직한 인기척까지 들리는 것이 아
닌가?
"…!"
철운비는 반가운 마음에 급히 물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신형을 옮겼다.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코끝으로 문득 흐릿한 복숭아꽃 향기가 떠돌았다.
하지만 철운비는 미처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주위의 안개가 급격히 엷어지며 흐릿하게나마 주위의 경물이 보였다.
촤르르!
그 사이 예의 목소리는 더욱 가깝게 들리고 있었다.
철운비는 눈을 번뜩이며 하나의 바위 위로 뛰어올랐다. 물소리는 바로 그
바위 뒤에서 들렸던 것이다.
한데,
(욱!)
바위 위로 뛰어오르던 철운비는 질겁하고 말았다. 그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바위에서 미끄러져 내릴 뻔했다.
바위 뒤에는 철운비가 상상도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은 하나의 아늑한 계곡의 끝이었다. 전면에는 온갖 기화이초가 만발한
넓은 화원이 그림같이 자리하고 있었다. 또한 화원의 중간에는 제법 연못이
파여져 있었다.
그 연못가에는 그림같이 아늑한 한 채의 죽옥(竹屋)이 서 있었다. 마치 별
세계를 보는 듯 아름답고 환상적인 광경이었다.
스으… 스으…
게다가 흐릿한 분홍빛 안개가 그 연못의 주위를 휘감고 있어 더욱 신비스러
움이 더했다.
한데,
촤아아…
예의 연못 속에는 하나의 뽀얀 동체가 유영하고 있었다. 여인(女人), 한 명
의 여인이 전라의 몸으로 수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빙기옥골의 뽀얀 피부, 터질 듯 무르익은 탐스러운 동체…
그리고, 수초같이 넓게 퍼져 하늘거리는 긴 머릿칼… 그 모습은 마치 한 마
리 인어(人魚)를 연상시켰다.
"…!"
철운비는 상상치도 못했던 그 신비로운 광경에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마치 무엇에 이끌려 들 듯 연못 속을 내려다 보았다.
투명하도록 연못의 물 속으로 인어같이 움직이고 있는 뇌살적인 여체, 그
여체의 신비로운 율동에 철운비는 자신이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연못 속의 여인은 철운비가 지켜보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듯 태연히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한데, 그 때였다.
쉬-- 이잇!
돌연 연못가의 풀숲에서 하나의 길죽한 물체가 나타나 빠르게 연못 속의 여
인을 향해 접근해 갔다. 그것은 전체가 알록달록한 한 마리의 독사(毒蛇)였
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철운비는 대경했다.
(위험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조심… 하시오!"
피-- 이잉!
그는 다급한 일갈과 함께 번개같이 지력을 떨쳐내 여인을 향해 접근하는 독
사의 머리를 으스러뜨렸다.
"까-- 악!"
그제서야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던 여인은 죽은 독사를 발견하고 날카롭게
비명을 내질렀다. 이어 그녀는 너무 놀라 까무러친 듯 그대로 물 속으로 잠
겨들었다.
그 모습에 철운비는 안색이 일변했다.
"이런…!"
화라락! 그는 즉시 바위를 박차고 연못을 향해 쏘아갔다.
촤아아…!
이어 그는 물 속에 잠겨드는 여인의 허리를 끌어안고 연못 밖으로 날아나왔
다. 물기 젖은 더할 수 없이 탄력있는 여체의 감촉이 철운비를 당혹하게 만
들었다.
(묘강까지 와서 별꼴을 다 당하는군!)
그는 교소를 지으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윽고 그는 조심스럽게 여인을 연못가의 풀밭 위에 뉘였다. 그제서야 그는
여인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여인은 아주 묘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어찌 보면 완숙한 중년여인 같
기도 했고 또 어찌 보면 순진무구한 소녀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나 아주 풍만한 몸매로 미루어 여인은 상당히 나이가 들었음을 알 수 있
었다.
터질 듯 탄력있고 탱탱한 유방, 미끈하고 팽팽한 하복부, 적당히 살이 오른
뽀얀 허벅지…
"…!"
뇌살적인 굴곡을 이룬 여체에 시선이 닿자 철운비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졌다.
여인의 머리는 아주 길고 풍성했다. 그 젖은 머릿칼이 그녀의 젖가슴과 허
벅지 사이의 은밀한 곳을 살짝 가리고 있었다. 하나 그 모습이 몸매가 완전
히 드러난 것보다 오히려 더 뇌살적이었다.
철운비는 내심 당혹함을 금치 못했다. 당장이라도 기절한 여체를 범하고 싶
은 충동이 불끈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정말… 묘한 계집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부동심(不動心)이 흔들리다니…!)
그는 내심 나직한 신음을 발했다. 이어 그는 혼절한 여인의 뺨을 손바닥으
로 두드렸다.
"소저! 정신 차리시오!"
그는 여인의 귀에 대고 큰소리로 외쳤다.
순간,
"…!"
여인의 두 눈이 기다렸다는 듯 반짝 떠졌다.
츠읏!
그런 그녀의 봉목에서 요악한 도화빛이 광망이 인 것은 그 직후였다.
그 모습에 철운비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급히 여인에게서 떨어지려
했다.
순간,
"호홋! 늦었다, 어린 놈!"
여인의 붉은 입술 사이로 요사한 교소가 터지며 한 줄기 강렬한 도화향(桃
花香)이 철운비의 얼굴을 확 뒤집어 씌웠다.
"크-- 읏!"
피-- 잉!
철운비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급급히 십 장 뒤로 퉁겨져 나갔다. 하나
그 때는 이미 늦어 그의 전신이 불덩이에 빠진 듯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
했다.
철운비는 대경했다. 그는 자신이 한 가지 지극히 강렬한 음독(淫毒)에 중독
된 것을 깨닫고 급히 내공을 일으켜 저지하려 했다.
하지만 한 번 일어난 본능의 욕화는 그의 전신으로 폭발하듯 급격히 퍼져나
갔다.
"호홋! 헛수고 하지 말아라! 도화독분(桃花毒粉)은 음양교합으로 토해내기
전에는 해독이 불가능하니까!"
슥!
누워 있던 여인이 깔깔 웃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철운비는 혼미 중에 이를 부득 갈며 여인을 노려보았다.
"네… 네가… 도화독모(桃花毒母)였느냐?"
여인은 요염한 자세로 철운비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본녀가 이 도화곡(桃花谷)의 주인인 도화독모 단려화(丹麗花)다!"
-도화독모(桃花毒母) 단려화(丹麗花)!
-도화쇄심독인(桃花碎心毒人)!
-뇌정개벽천강(雷霆開霹天剛)!
-독황야!
-뇌정천층화막(雷霆千層火幕)!
-폭풍파멸검강(暴風破滅劍剛)!
폭풍일맥의 가장 무서운 절정검예가 완벽에 가까운 형태로 펼쳐진 것이다.
"카-- 악!"
퍼-- 퍼퍽!
단말마의 비명… 폭풍검강이 작렬하며 뻗혀 지나간 곳으로 선뜻 핏빛 무지
개가 흩어졌다. 자면독왕의 전신이 푹풍검강에 휘말려 순간적으로 허공에서
산화되어 버린 것이다.
실로 무서운 검기(劍氣)였다. 그러나 진정 무서웠던 것은 벽황혜의 분노였
다.
무적(無敵)의 여제왕… 자면독왕을 형체도 없이 바스러뜨린 것은 바로 그녀
의 분노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데, 벽력부를 지키고 있을 그녀가 어떻게 이곳 묘강(苗疆)에 나타난 것일
까?
그 이유는 벽황혜 그 자신만이 알 것이다.
∑ 제 27 장 독황야(毒皇爺)의 비밀(秘密)
"…!"
부르르--!
독황야의 전신에 격렬한 파문이 스쳤다.
그의 찢어질 듯 부릅떠진 눈이 주시하고 있는 곳은 은밀한 바위 틈은 두 사
람이 나란히 눕기에도 비좁아 보였는데…
"아흑…! 아흐윽!"
하의만 벗은 철운비가 완전히 벌거벗은 벽황혜를 찍어 누르고 미친 듯이 날
뛰는 모습이 쏘아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허억!)
철운비 밑에 깔린 채 애처롭게 바둥대는 벽황혜를 본 순간 독황야는 뒷통수
를 둔기에 강타당하는 듯한 충격에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저 어린 놈에게 능욕당하는 대상이 황혜… 황혜였다니…!)
독황야의 얼굴은 더 이상 무참해질 수 없으리만큼 일그러졌다.
그는 벽황혜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아니 그런 표현은 옳지 않다! 잘 아는 정도가 아니라 벽황혜는 독황야에게
있어 생명이라고 해야 옳기 때문이다.
헌데 그런 벽황혜가 지금 철운비의 밑에 깔려 폭행을 당하고 있는 것이니…
독황야의 전으로 천 개의 종이 일시에 울리는 듯한 굉렬한 진동음이 울려왔
다.
그런 속에서 도화독모의 당혹에 찬 음성이 들려왔다.
"대사형(大師兄)! 왜 보고만 있느 거죠? 저 어린 놈이 미쳐 날뛰고 있을 때
제압해야…"
지껄이던 도화독모의 안색이 돌변한 것은 그 때였다.
쩌렁… 빠지직!
눈빛!
눈빛만으로 살인을 할 수 있다면 도화독모는 천참만륙되고 말았으리라.
그런 살인적인 안광을 폭사하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독황야를 마주 본 도
화독모의 안색은 순간적으로 하얗게 탈색되어 갔다.
"대… 대사형!"
그녀의 음성은 가늘게 떨려 나오고 있었는데…
그런 도화독모를 향해 독황야는 음울한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를 제거하려던 계획은… 취소한다. 그대신…"
독황야는 잠시 말을 멈추며 시퍼런 전광(電光)이 토해지는 도화독모의 동공
깊은 곳을 주시했다.
"사매는… 나와 함께 어느 한 곳에 가 주어야겠다!"
"무슨 말…?"
도화독모는 종잡을 수 없는 공포에 질려 주춤 물러섰다.
다음 순간,
파-- 앗!
독황야의 중지(中指)가 섬전 같은 속도로 도화독모의 마혈(麻血)을 찔러갔
다.
"악!"
도화독모는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마혈을 제압당했다. 거리가 가깝기는 했
으나 그보다 독황야의 수법이 너무도 탁월했기 때문이다.
"다… 당신이 이럴 수가…!"
부릅떠진 도화독모의 눈에 경악과 분노의 빛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독황야를 노려보며 모로 쓰러졌다.
슥--!
독황야는 쓰러지는 도화독모의 교구를 안아 들어 옆구리에 꼈다.
"네가 할 일은 모두 끝났다. 마지막 한 가지만 남겨 놓고는…!"
독황야는 그렇게 내뱉으며 신형을 돌렸다.
"아아아…!"
"헉… 헉…!"
돌아선 그의 귓전에 철운비와 벽황혜의 뜨거운 헐떡거림이 파고 들었다. 그
런 소리를 듣는 독황야의 표정은 괴이하게 일그러져 있었는데…
"휴-- 우!"
그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터져나온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지면을 박차고
비조처럼 솟아 오르고 있었다.
그 속에서 흐르는 그의 사념,
(행복… 하거라! 황혜… 나의… 딸아…!)
--나의 딸아!
독황야(毒皇爺)!
그의 어린 사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의문은 안개처럼 사위에
자욱이 깔리는데…
스-- 으--!
그의 신형은 순식간에 난석곡 밖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독황야의 도화독모가 나타났던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헉헉…!"
"아흑…!"
철운비와 벽황혜의 뜨거운 숨소리는 난석곡의 바위 틈을 끝없이 떠돌고 있
었다.
계곡--!
스으… 스으…
짙은 유황(硫黃) 연기가 온통 자욱이 뒤덮고 있는 비역(秘域)! 유황이 부글
부글 꿇고 있는 연못이 도처에 널려진 이 계곡은 초열지옥을 방불케 했다.
뼈를 부식시키고 내장을 녹여낸다는 저주의 운무! 유황독무는 풍우(風雨)의
영향권 속에서도 그 특성을 상실치 않는 악마의 독무로 일컬어지고 있었으
니…
<유… 황곡(硫黃谷)!>
-묘강독성(苗疆毒聖)!
-독황지정(毒皇之精)!
"우뢰! 너는 정녕 독하구나."
묘강독성은 문득 탄식을 흘렸다.
"독황지정을 꺼내려면 내 스스로 심장을 으스러뜨려야 함을 알면서도 그것
을 달라다니."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의 노안은 이내 결의의 빛으로 번뜩였다.
"원한… 다면 주마! 그 대신… 려화(麗花)를 다치지 않겠다고 야속해라!"
츠-- 읏!
묘강독성의 두 눈에서 형형한 지광(紫光)이 떠올라 독황야를 노려보았다.
독황야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오! 위대한… 폭풍세가의 이름을 걸고…"
푹풍세가…!
그 이름이 독황야의 입에서 나오자 묘강독성의 노안에 안도의 빛이 흘렀다.
그는 누구보다도 눈 앞에 선 제자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맵고 독하나 명예만큼은 목숨보다 중하게 여김을…
"후하하! 좋아! 어쨌든 너는 나 단태독(丹太毒)의 제자이고 살황독종의 후
예다. 너를 위해 무엇을 주지 못하겠느냐?"
묘강독성은 미친 듯이 광소를 터뜨렸다. 이어 그는 무섭게 독황야를 노려보
자 가슴을 앞으로 내밀었다.
"자! 독황지성을 받으라! 나의 제자여!"
퍼-- 억!
묘강독성은 대갈하며 깡마른 오른손으로 자신의 왼쪽 가슴을 후벼팠다.
우두둑…! 퍼-- 어억!
뼈와 살이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뜨거운 피분수가 확 일어나 독황야와 도
화독모를 뒤집어 씌웠다.
(용서… 하시오 사부!)
독황야는 미미하게 떨며 눈을 감았다. 그런 그의 두 볼로 한 줄기 뜨거운
물기가 흘러내렸다.
(제자는… 좀더 악독한 마종(魔宗)이 되어야 하오…! 아수라(阿修羅)로 불
리어 손색이 없기 위해 독황지정이 필요하단 말이오.)
독황야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냉혹하던 두 눈이 가득 물기로 젖어 있었다.
(사부에게 진 빚은… 사매를 통해 돌려 드리리다.)
독황야는 중얼거리며 안고 있던 도화독모를 내려 놓았다. 그리고는 쓰러진
묘강독성에게로 다가섰다.
황혼 무렵,
"으음 아무래도 한 걸음 늦은 것 같습니다 사저!"
스스스…
화다다닥…!
우울한 탄식성과 함께 두 명의 인물이 유황곡의 동굴 앞에 내려섰다.
철운비와 벽황혜! 바로 그들 두 사람이었다.
도화독분(桃花毒粉)으로 인해 한바탕 격렬한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눈 그
들이었다.
철운비는 겸연쩍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친누이 같은 아버지의 제
자… 그녀를 범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못내 불경을 저지를 것만 같은 죄책
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반면 벽황혜의 표정은 아주 묘했다. 부끄러워하고는 있지만 무엇인가 큰 짐
을 벗은 듯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그녀의 유현하던 눈빛은 이제 오히려 평범하게 변해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천년검후로서 최후의 관문을 통과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벽황혜는. 이제 인간이 이룰 수 있는 마지막 단계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래! 늦은 것 같구나!"
동굴 안쪽을 들여다 보며 벽황혜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한 가닥 역겨운 피비린내가 동굴 안쪽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두 사람은 예측하고 있었다.
철운비가 앞서 동굴로 들어섰다. 그 뒤로 벽황혜가 그림자같이 따랐다.
"으… 음!"
문득 철운비가 신음을 흘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검푸른 독혈이 동굴의 바닥
을 흥건히 적시고 있는 중에 두 명의 인물이 쓰러져 있었다.
심장 부분이 무참히 으스러진 백발의 괴인, 그리고 인사불성이 되어 누워
있는 풍만한 몸매의 미소부…
물론 그들은 묘강독성과 도화독모, 두 조손이었다.
-묘강독성(苗疆毒聖) 단태독(丹太毒)!
-묵마독황인(墨魔毒皇印).
유황곡--!
츠으… 휘르르…!
극독한 유황독장이 흐르는 속에 무덤이 하나 생겼다.
동굴을 허물어뜨려 만든 무덤, 물론 그것은 묘강독성 단태독의 무덤이었다.
"흐윽! 복수… 하겠다! 반드시…!"
지금 그 무덤 앞에서 오열하는 한 명의 여인이 있었다. 꿇어엎드린 미소부
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도화독모(桃花毒母) 단려화--!
묘강독성의 일점혈육인 묘강제일미인, 그녀의 방심은 독황야라는 인물에 인
해 갈가리 찢겨진 상태였다. 마음을 준 연인에게 조부를 잃은 그녀의 심정
이 어찌하겠는가?
오열하는 단려화를 벽황혜가 달래고 있었다.
"…!"
철운비는 조금 떨어져서 두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복잡하게 빛나는 그의
눈은 지금 도화독모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벽황혜 쪽을 보고 있었다.
(아아… 정녕 지옥천존이… 황혜누님의 아버님이란 말인가?)
철운비의 입가로 소리없는 한숨이 흘렀다.
폭풍성… 벽우뢰!
--남해(南海) 혈해군벌(血海軍閥)!
--막북(漠北) 적북호황천(赤鵬護皇天)!
--신강(新疆) 서북팔황연맹(西北八荒聯盟)!
혈해성모(血海聖母) 궁월영(宮月影)--!
그녀는 혈해구룡과 남해의 십만장병을 이끌고 중원의 남단인 십만대산 근역
에 상륙했다. 그녀는 혈해구룡과 남해의 십만장병을 이끌고 중원의 남단인
십만대산 근역에 상륙했다.
그녀는 표면적으로는 구룡혈황의 복수를 부르짖었으나… 그녀의 진정한 목
적이 천 년 간 내려온 중원정벌임은 불문가지의 사실이었다.
어쨌든 혈해군벌의 기세는 가히 파죽지세였다. 아무도 혈해군벌을 막지 못
했다. 십만대산에 교두보를 구축한 혈해군벌은 노도와같이 그 세력권을 확
장해 나갔다.
한 달이 채 못 되어 천남(天南)과 강남(江南) 일대가 팔 할 가까이 혈해군
벌의 수중에 평탄되었다.
이미 지옥마교(地獄魔敎)의 횡행으로 황폐해질대로 황폐해진 강남무림에 지
옥마교보다 오히려 무서운 혈해군벌을 맞서 싸울 저력이 있을 리 만무했다.
지옥마교조차도 노도같은 혈해군벌의 기세에 별 저항도 못하고 강북도 패퇴
한 상태였다. 이제 강남에서 혈해군벌에 맞설 세력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
다.
있다면 남황의 벽력부(霹靂府)나 서촉(西蜀)과 동정호(洞庭湖) 일대를 장악
하고 있는 전능기환전(全能奇幻殿) 정도 뿐이었다.
그러나 저 지옥마교의 횡행조차 방관하던 오대무벌이다. 더구나 벽력부는
살황독종을 견제하느라 중원(中原)에 신경을 쓸 입장이 못 되는 듯 보였다.
결국 혈해군벌에 맞설 세력은 전능기환전 정도밖에 없었다. 그리고 전능기
황전도 실로 오랜만에 모종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본래 전능기환전의 주세력권은 오대호(五大湖)와 장강(長江)일대의 수로(水
路)였다.
혈해군벌의 입장에서 보면 강북(江北)의 지옥마교와 한판 승부를 벌이려면
장강은 꼭 장악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 장강을 건너려면 전능기환전과의 충
돌은 불가피하게 보였다.
거기에 전능기환전도 장강을 양보할 의사는 없는 듯했다. 이미 각지에 퍼져
있던 전능기환전의 가신(家臣)과 병력들이 속속 동정 군산으로 집결하고 있
는 것이 감지되고 있었다.
-장강대회전(長江大會戰)!
적붕… 호황천(赤鵬護皇天)!
격변하는 풍운(風雲)--!
바야흐로 대륙 전체가 광풍에 휘말려 들어가려는 상태였다.
무림도상의 인심은 흉흉해질대로 흉흉해졌다.
지옥마교(地獄魔敎)와 변황(邊荒)의 세 초강파--!
그 대륙풍운의 주역들을 무림인들은 대륙사강(大陸四强)이라고 불렀다.
<대륙… 사강(大陸四强)!>
<마황총(魔皇塚)!>
-황룡보(黃龍堡)!
삼경(三更)--!
으스름 달빛이 황룡보 일대를 조요하고 있었다.
스-- 읏!
문득 황룡보의 후원으로 한 줄기 인영(人影)이 흐르듯 날아들었다. 황룡보
의 곳곳에는 수많은 고수자들의 이목이 번뜩이고 있었으나 아무도 그 인영
(人影)이 후원으로 날아드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 인영의 경공
은 기오막측한 것이었다.
스스스!
"…!"
그 인영은 후원에 자리한 가산(假山) 아래 유령같이 몸을 세웠다.
언뜻 달빛 아래 드러나는 얼굴은 아주 해맑은 얼굴에 눈빛이 요악스러운 장
발소년이었다.
그는 바로 철운비였다.
묘강에 있더 그가 어떻게 이곳 장강 연안에 나타난 것일까?
(흐음 궁월영! 이 계집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일까?)
츠-- 읏!
철운비는 검미를 찌푸리며 형형한 눈초리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는 혈해
성모 궁월영을 노리고 황룡보에 잠입한 것이다.
어쨌든 그는 혈해군벌의 맹주인 구룡혈황이다. 혈해군벌이 궁월영의 야심으
로 인해 피를 흘리는 것을 그는 원치 않고 있으며 그 목적을 위해 궁월영을
제압할 작정으로 황룡보에 잠입한 것이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궁월영은 황룡보의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 뿐만 아니라
혈해구룡의 종사들까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웬지모를 불길한 예감이 철운비의 뇌리를 스쳐갔다.
(이 계집…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일까?)
철운비는 소리없이 신음하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곳은 아늑한 후원이었는데 아마도 황룡보의 안주인이 기거하던 곳인 듯했
다.
단아하게 치장된 후원으로 달빛이 은가루같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그 후원
한쪽에 한 채 전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저곳에도 없다면… 궁월영은 지금 황룡보 내에 있지 않다!)
철운비는 음울하게 눈을 번뜩이며 전각을 향해 몸을 날렸다.
"…!"
전각의 정실로 들어서던 철운비의 몸이 문득 굳어졌다. 그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여인의 규방이었다. 규방의 한쪽에는 침상이 자리하고 있는데… 지
금 그 침상 위에 한 명 미부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주 가냘퍼 보이는 미소부, 그녀는 철운비가 아주 잘 아는 여인이었다.
(부… 용!)
철운비의 눈빛이 흔들렸다.
-부용부인(芙蓉婦人) 곽부용!
폭풍일과(暴風一過)--!
한 차례 격렬한 열풍이 지나간 규방에 정적이 돌아왔다. 곽부용은 철운비의
넓은 가슴에 꼬옥 파묻힌 채 할딱이고 있었다. 그런 곽부용의 머리를 쓰다
듬으며 철운비는 그간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은황장(隱皇莊)!
-혈해마녀(血海魔女)!
<은황장(隱皇莊).>
그 장원은 바로 은황장(隱皇莊)이었다.
화라락!
은황장이 내려다 보이는 나지막한 구릉 위에는 십 인의 남녀가 옷깃을 펄럭
이며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일행의 맨 앞에는 고통스런 전포에 붉은 투구를 깊숙이 눌러쓴 한 명의 여
인이 서 있었다.
-혈해성모(血海聖母) 궁월영!
바로 그녀였다.
"…!"
궁월영은 깊숙이 눌러쓴 투구 아래로 봉목을 유현하게 빛내며 은황장을 주
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는 아홉 명의 남녀가 서 있었다. 바로 남해 혈군벌을 이루는 혈
해구룡(血海九龍)의 종사들이었다.
그 중에는 신임 인황군도(人皇群島)의 총수가 된 빙서시(氷西施) 냉철화(冷
鐵花)와 주작군도(朱雀群島)의 여제 주작천후(朱雀天后) 등의 모습도 보였
다.
문득 주위의 침묵을 깨고 주작천후가 나직한 음성으로 궁월영에게 말했다.
"다시 한번 재고에 보는 것이 어떨까요? 저는 아무래도 저곳에 지옥천존(地
獄天尊)이 있다는 그 정보에 의심이 가요!"
하나 궁월영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지 않았다.
"정보는… 확실해요. 지옥천존은 지금 저곳에 머물고 있고… 이런 기회는
다시 오지 힘든 천재일우(天載一遇)의 기회예요."
그녀는 낮으나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옥천존만 제거할 수 있으면 우리의 중원정벌은 반 년 앞당길 수 있어요.
"
듣고 있던 주작천후는 아미를 모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예의 정보는 전능기환전(全能機幻殿)에서 흘려보낸 이간계일 수도
…"
그녀의 말을 궁월영이 단호한 음성으로 끊었다.
"겁이 난다면…이곳에서 기다려도 좋아요. 주작도주(朱雀島主)!"
스읏!
말을 마침과 함께 궁월영은 더 이상 망설임없이 몸을 날려 은황장 쪽으로
날아갔다.
주작천후는 그런 궁월영의 뒷모습을 망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주작도주… 라고?)
그녀는 입 안으로 나직이 뇌까렸다.
주작천후와 궁월영은 어머니들이 자매인 이종자매 사이였다. 궁월영의 가장
절친한 친인이 바로 주작천후인 것이다. 그 때문에 궁월영은 그런 주작천후
에게 주작도주라는 공식적인 칭호를 쓴 적이 없었다.
한데 지금 궁월영이 처음으로 이종 언니인 주작천후를 주작도주라고 부른
것이다.
궁월영이 웬일인지 자신에게조차 거리를 둔다는 사실에 주작천후는 고개를
흔들며 서글프게 미소지었다.
(그녀는 변했어. 용형마도(龍形魔島)에서 돌아온 이후로…!)
그때,
"흐음… 이제 별 수 없이 따라갈 수밖에 없군. 어쨌든… 그녀는 잠마(潛魔)
의 종사시니…!"
청룡제왕(靑龍帝王) 곽붕이 고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어 그는 즉시 몸을 날려 궁월영을 뒤따라 날아갔다.
스스스!
그러자 주작천후를 비롯한 다른 팔 인 역시 묵묵히 그 뒤를 따라 몸을 날렸
다. 어쨌든 궁월영은 그들이 지키고 복종해야 할 주군인 것이다.
삽시에 구 인의 모습은 은황장 안쪽으로 사라졌다.
헌데 그 직후였다.
"드디어 걸려들었구나, 혈해성모(血海聖母)!"
문득 한 줄기 스산한 여인의 음성이 주위를 울렸다.
스스스…
이어 십 인이 섰던 구릉 위로 문득 하나의 가냘픈 인영이 날아올랐다. 그
인영은 일신에 마의(魔衣)를 걸친 가냘픈 체격의 여인이었는데 기이하게도
그녀의 눈빛은 짙은 회색이었다.
-번뇌화(煩惱花) 음사향,
바로 그녀였다.
오대무벌 중 전능기환전(全能機幻殿)의 전주인 천수제왕(千手帝王)의 둘째
딸로써 가장 지혜롭다고 알려진 여제갈인…!
음사향의 잿빛 봉목은 싸늘한 독기를 품고 은황장을 노려보았다.
"용형마도(龍形魔島)에서 유일하게 살아나온 자는 궁월영… 그 계집뿐이었
다. 그것은 세황(世皇) 오빠를 시해한 범인이 그 계집임을 의미하는 것이
다!"
그녀는 낮고 차가운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혈해성모(血海聖母) 궁월
영이 쌍뇌모황(雙腦謀皇) 음세황을 죽였다고 믿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은황장으로 궁월영을 유인한 것은 바로 그녀란 말인가?
"저 안에 지옥천존은 없다. 그대신… 지옥천존이 만든 한 명의 무서운 마인
(魔人)이 은신하고 있지!"
음사향의 얄팍한 입술에 한 줄기 섬뜩한 미소가 떠올랐다.
"호호… 궁월영! 네년은 물론 네 수하들까지 그 마물(魔物)의 손에 갈가리
찢겨 죽으리라! 이 모두… 나의 사랑하는 오라버니를 기해한 대가다."
그녀는 냉혹한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득의의 웃음을 지었다.
한데 바로 그 때였다.
"정녕 마음이 독한 계집이구나. 너는…"
돌연 음산한 사내의 음성이 음사향의 뒤에서 들렸다.
(이 목소리는…!)
순간 음사향의 교구가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그녀의 회색눈이 놀라움으로
크게 흔들렸다.
슥!
그녀는 빠르게 돌아섰다.
그런 그녀의 삼 장 뒤에는 어두운 밤하늘을 등지고 하나의 훤칠한 그림자가
서 있었다.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를 온통 새카만 천으로 휘감은 인물이었는데 그의 검
은 몽면 사이로 한 쌍의 시퍼런 마안(魔眼)이 섬뜩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지… 옥… 천존(地獄天尊)!"
돌아선 음사향의 입에서 일순 숨넘어 갈 듯한 신음이 터져나왔다.
스-- 팡! 피이-- 잉!
동시에 그녀는 맹렬하게 양 소매를 떨치며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녀의
소매 속에서 십여 자루의 반투명한 비수(匕首)가 일시에 퉁겨져 나가며 지
옥천존을 무찔러갔다.
-투명엽도(透明葉刀)!
-초혼… 마적(招魂魔笛).
은황장(隱皇莊)의 지하--
그그긍…!
이끼낀 거대한 석문이 둔중한 굉음과 함께 열렸다. 이어 열린 철문으로 하
나의 날렵한 인영이 들어섰다.
혈해성모 궁월영-- 바로 그녀였다.
"…!"
석문 안으로 들어서던 궁월영은 일순 흠칫했다. 그곳은 사방 이십여 장에
달하는 석실이었다.
석실의 저편,
<흡혈마전(吸血魔殿).>
그와 같은 편액이 걸려 있었다.
편액 아래 하나의 거대한 석관(石棺)이 놓여 있었다. 전체가 시뻘건 피칠을
한 듯한 혈강석(血剛石)의 그 석관은 길이가 이 장 가까이나 되는 거대한
것이었다.
하나 궁월영을 놀라게 한 것은 그 석관이 아니었다.
시체! 석관의 주위에는 끔찍하게도 백여 구의 시체가 쌓여 있지 않은가?
남녀가 뒤섞인 백여 구의 그 시체들은 몸집으로 보아 그 시체들은 모두 나
이 어린 소년소녀들의 것인 듯한데 모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었다.
헌데 기이하게도 그 시신들은 마치 물기 빠진 물고기들같이 전신이 비쩍 말
라 비틀어져 있었다. 자세히 보면 시체들의 심장부분이 모두 으스러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소녀들의 시신은 아랫도리가 무참하게 으스러져 있었다. 그것은 소녀
들이 무엇인가 거대한 것에 난해당하고 죽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궁월영은 분노의 표정으로 석관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이게 다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슥!
그녀는 석관 앞으로 다가섰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비밀열쇠가 그 석관 안에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윽고 궁월영은 섬섬옥수를 내밀어 석관의 뚜껑을 밀어냈다.
끼기긱…!
그러자 기분나쁜 굉음과 함께 석관의 뚜껑이 천천히 열려졌다.
번-- 쩍!
바로 그 순간 감자기 석관 안에서 한 쌍의 시뻘건 혈광(血光)이 푹출했다.
"이… 이것은…!"
쿠-- 웅!
궁월영은 아연실색하여 석관의 뚜껑을 떨어뜨리며 비칠 물러섰다.
"크크크크…!"
그때 돌연 석관 안에서 십팔층 지옥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섬뜩한 괴성이 터
져나왔다. 이어 하나의 거대한 그림자가 천천히 석관 안에서 일어나 앉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에 궁월영은 아연실색했다.
"흡혈… 강시(吸血疆屍)?"
쿵쿵쿵!
그녀는 안색이 하얗게 변하며 비칠비칠 뒤로 물러섰다.
흡혈강시(吸血疆屍)…!
과연 그것은 무엇인가?
∑ 제 29 장 공포(恐怖)의 흡혈강시(吸血疆屍)
(이럴… 수가…!)
부르르…!
막 하나의 모퉁이를 돌아서던 주작천후는 경악과 분노로 몸을 떨며 전면을
주시했다.
그곳은 하나의 막다른 골목이었다. 한데 미로 끝의 석벽에는 한 명의 여인
이 석벽에 기댄 채 죽어 있었다. 놀랍게도 여인은 궁월영을 수행해 온 백
명의 혈해마녀(血海魔女) 중 한 명이었다.
혈해마녀는 벽에 등을 기대고 원한의 시선으로 전면을 노려본 채 죽어 있었
다. 그녀는 자신의 장검으로 복부를 찔려 죽어 있었는데 그 장검이 몸을 관
통하여 등 뒤의 석벽에 박혀 있어 쓰러지지 않고 있었다.
한데 그 혈해마녀는 하의가 벗겨져 허연 아랫도리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데 그런 그녀의 하체 중심부는 온통 선혈로 물들어 있지 않은가?
찢겨진 치마 사이로 뽀얀 허벅지가 드러나 있는 것이 보였다. 그 허벅지 사
이는 무엇인가 둔기로 난자당한 듯 무참하게 찢겨 있었다.
주작천후는 그 모습에 치를 떨었다.
"어… 어떤 놈이 이런 끔찍한 짓을…!"
그녀는 분노로 교구를 부들부들 떨며 혈해마녀의 시신을 벽에서 떼어냈다.
한데, 그녀가 막 시신을 벽에서 떼어내는 순간이었다.
"흐흐흐…!"
돌연 그 벽에서 섬뜩한 음소가 들렸다.
"…!"
주작천후는 깜짝 놀라며 몸이 굳어졌다.
번… 쩍!
바로 그때 돌연 석벽에서 한 쌍의 시뻘건 눈(眼)이 떠올랐다.
눈 뿐만 아니었다.
눈에 이어 코, 입, 귀가 벽면으로 떠올라 하나의 얼굴 형태를 이루는 것이
아닌가?
그 광경에 주작천후는 대경했다.
(사… 술(邪術)!)
그녀는 아연하여 급히 벽면에서 떨어지려 했다.
"크크… 늦었다, 계집!"
직후 한 소리 잔혹한 음성이 주작천후의 귓전을 울렸다.
파-- 앗!
동시에 한 쌍의 손이 석벽에서 불쑥 튀어나와 주작천후의 양쪽 어깨 견정혈
(肩頂穴)을 움켜쥐었다.
"악…!"
쿵!
주작천후는 아차 하는 사이 견정혈을 제압당해 알고 있던 혈해마녀의 시신
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너… 너는 누구냐?"
그녀는 전신이 뻣뻣하게 경직됨을 느끼며 사력을 다해 물었다.
그러자 벽 속의 괴인이 잔혹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흐흐흣! 본좌를 즐겁게 해 주고 죽을 계집이니 알려 주마? 본좌는… 지옥
십마황(地獄十魔皇)의 일곱째인… 환영음마(幻影淫魔)이니라!"
"지옥… 십마황(地獄十魔皇)?"
주작천후는 낮게 뇌까리며 신음을 발했다.
찌--익!
그녀의 저고리가 날카로운 소성과 함께 찢겨져 나간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옷이 찢기며 그녀의 풍만한 젖무덤이 출렁 나타났다.
"하-- 악!"
순간 후의 입에서 자지러질 듯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환영음마(幻影淫魔)라 자칭한 벽 속의 괴인이 깡마른 손이 주작천후의 육봉
을 움켜쥐어 으스러뜨린 것이었다.
"흐흐… 나이는 제법 들었으나 몸매는 여전히 괜찮은 물건이로군!"
환영음마는 음흉하게 웃으며 주작천후의 젖무덤을 떡 주무르듯 이지러뜨렸
다.
"흐윽…!"
그 때마다 주작천후의 입에서는 고통의 비명이 터져나왔다.
찌-- 익!
마침내 주작천후의 치마와 고의마저 그 자의 손에 일시에 찢겨져 나갔다.
그러자 그녀의 희멀건 허벅지가 어둠 속에서 뽀얗게 드러났다.
"나… 나를 죽여라! 더 이상 치욕을 주지 말고…!"
주작천후는 수치와 절망으로 눈물을 흘리며 몸부림쳤다.
"흐흐… 죽는 것을 서두르지 마라! 한 차례 즐긴 후 먼저 지옥에 가 있을
네 동료들에게 보내줄 테니…!"
환영음마는 음탕하게 히죽 웃었다. 이어 그는 한 손을 주작천후의 허벅지
사이로 불쑥 밀어 넣었다.
"흐윽…!"
주작천후는 수치로 몸을 떨며 다급히 허벅지를 오므리려 했다. 하나, 그녀
에게는 이미 그럴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내 그녀의 허벅지는 벽면을 향해 부끄러운 자세로 벌어졌다.
마침내, 환영음마의 거친 손이 주작천후의 방초 무성한 둔덕 아래로 슬금슬
금 미끌어져 들어갔다.
"아흐윽…!"
주작천후는 이물질이 자신의 몸 안으로 파고듦을 느끼며 숨넘어 가는 비명
을 내질렀다.
"흐흐…!"
환영음마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이어 그는 주작천후의 몸
에 집어 넣은 손가락을 고요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주작천후의 사지가 반사적으로 퍼덕거렸다.
남달리 몸이 뜨거워 미망인이 된지 얼마 안 되어 음세황과 불륜을 저질렀던
그녀다. 그녀의 육체는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몸은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
다.
(아… 안 돼!)
주작천후는 자신의 의지를 배신하는 몸이 한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때 언뜻 그녀의 눈에 바닥에 쓰러진 혈해마녀의 시신이 쏟아져 들어왔다.
모로 벌려진 혈해마녀의 은밀한 곳은 온통 선혈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그것을 본 주작천후는 섬뜩한 공포에 몸을 떨었다.
"흐흐…! 곧 저 계집같이 만들어 주마!"
그때 환영음마가 음산하게 말하며 주작천후의 하체를 벽 쪽으로 끌어들였
다.
주작천후의 하체 부근의 석벽에는 하나의 흉측한 물건이 솟아 있었다. 비정
상적으로 거대한 그것은 도무지 인간의 그것이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주작천후는 언젠가 암컷과 교미를 하는 물소 수컷의 양물을 본 적이 있었
다. 헌데 벽 속의 괴인의 그것은 그 물소 수컷의 양물보다도 오히려 커보이
는 것이다.
그것을 본 주작천후는 안색이 하얗게 질리며 몸부림쳤다.
"제… 제발 나를 고이 죽여다오."
그녀는 울음 섞인 음성으로 호소했다.
하나 환영음마는 망설임없이 주작천후의 하체를 자신의 그것 위로 끌어올렸
다.
"하아악!"
순간 주작천후는 자신의 은밀한 옹달샘에 거대한 사내의 실체를 느끼고 전
율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흐흐…!"
환영음마는 음탕한 눈을 번뜩거리며 서서히 주작천후의 몸을 아래로 내리
눌렀다. 감당할 수 없는 흉기가 하체로 파고들자 이미 반실신한 주작천후의
아랫도리가 고통으로 퍼덕거렸다.
"흐흐! 역시 이년도 한 번 쓰고 버릴 물건에 불과해!"
주작천후의 육체가 자신의 흉기를 받아들이지 못하자 환영음마는 변태적으
로 키득였다. 그러면서도 힘주어 주작천후의 몸을 자신의 흉기위에 내리눌
렀다. 그대로가면 그녀 역시 하체가 파열되어 죽은 혈해마녀의 꼴이 될 것
이다.
한데… 바로 그 위기의 순간이었다.
피-- 이잉!
돌연 주작천후의 등 뒤로부터 날카로운 파공음이 일며 한 가닥 시뻘건 물체
가 섬광같이 벽면에 꽂혔다.
빠직!
"카아악…!"
이어 무언가 뼈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벽 속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
렸다.
"…!"
그 소리에 혼미하던 주작천후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앞을 바라보았다.
환영음마, 벽면에 돋아난 그 자의 얼굴은 온통 공포와 경악으로 이지러져
있었다. 그런 그 자의 미간, 한 자루의 핏빛 옥비녀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흐릿하게 핏빛 용(血龍)이 조각되어 있는 옥비녀였다.
"혈…혈마옥잠(血魔玉簪)!"
그 옥비녀를 본 순간 주작천후의 입에서 경악과 불신의 신음이 터져나왔다.
-혈마옥잠(血魔玉簪)!
-흡혈마전(吸血魔殿),
"카아아…!"
콰르릉--!
심혼을 얼어붙게 만드는 끔찍한 괴성과 굉렬한 폭음이 흡혈마전을 뒤흔들었
다.
화드득! 퍼-- 퍼퍽!
가공할 경풍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비쩍 마른 소년 소녀들의 시신은 먼지로
바스라져 흩날렸다.
"흐윽… 천… 천년내공(千年內功)을 지녔다니…!"
화드득…!
그 가운데에서 하나의 인영이 경악과 고통의 신음을 토하며 허공으로 퉁겨
져 나갔다.
콰드득…!
그 가냘픈 인영은 모질게 석벽에 부딪혀 한 자 가까이나 석벽에 깊숙이 파
묻혀 버렸다.
천년공력! 미증유의 거력에 말려 석벽에 박혀 버린 인영은 바로 궁월영이었
다.
그녀의 몰골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입고 있던 전포는 갈가리 찢겨졌
으며 오공에서는 선혈이 꾸역꾸역 흘러내리고 있었다. 탐스럽던 머리칼은
제멋대로 흩어져 있었고 안색은 백짓장같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크크…!"
그런 궁월영의 앞으로 하나의 거대한 그림자가 성큼 다가섰다.
괴인…! 무려 일 장 오 척에 이르는 거구의 괴인이었다. 이 괴인의 전신은
온통 시뻘건 털로 뒤덮여 있었으며 두 눈에는 검푸른 마광(魔光)이 벼락치
듯 번뜩이고 있었다.
흡혈강시(吸血疆屍)!
그렇다. 그 괴인은 예의 석관에서 나온 흡혈강시였다.
궁월영은 다가서는 흡혈강시를 올려다 보며 절망의 표정을 지었다.
"지옥천존! 그 자가 이곳에서 흡혈강시를 만들고 있었다니…!"
-흡혈강시(吸血疆屍)!
-지옥명공강(地獄冥空剛)!
-지옥대팔식(地獄大八式)!
-주작뇌주(朱雀雷珠)!
-흡혈마전(吸血魔殿)!
-아수마황(阿修魔皇)!
혈해구룡(血海九龍)의 종사-!
그들 또한 적지 않은 고난을 겪은 듯했다. 그들의 의복은 여기저기 찢겨 있
었으며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얼굴은 환하
게 빛나고 있었다.
"맹… 주를 뵙습니다!"
"허허… 더욱 헌앙해지셨소이다 혈황(血皇)!"
혈해구룡의 종사들은 감격에 떨며 분분히 철운비에게 군례를 올렸다. 그들
중 빙서시(氷西施) 냉철화와 청룡제왕(靑龍帝王) 곽붕은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철운비는 미소로써 중인들에게 답례하며 문득 그들의 뒤편으로 시선을 던졌
다. 그 곳에는 한 명의 가냘픈 미소부가 천여 명의 혈해마녀(血海魔女)들에
호위된 채 그림같이 서 있었다.
부용부인 곽부용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철운비를 떠나보낸 뒤 안심이 안 되어 혈해마녀 전원을 이끌고 은황
장에게 왔었다.
그리고 은황장에 진입하여 지옥십마황(地獄十魔皇)에게 고전하고 있던 혈해
구룡의 종사들을 구한 것이었다.
"…!"
곽부용은 철운비와 시선이 마주치자 살짝 얼굴을 붉히며 살포시 웃었다. 그
런 그녀는 더 이상 가냘픈 아녀자로만 보이지는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그녀
에게는 혈해구룡의 노종사들조차 절로 고개 숙이게 하는 기품이 배어 흐르
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혈해군벌(血海軍閥)의 용사들에게 주모(主母)라 불리는 상태였
다. 그것은 그녀가 혈해군벌 내에서 철운비의 아내로 인정받고 있음을 의미
하는 것이었다.
철운비는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래 부용, 당신이야말로 정말 혈해군벌의 여주인으로 어울린다!)
그는 훈훈한 미소를 띠우며 곽부용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런 철운비의 모습을 바라보며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는 두 여인이 있었으
니… 그녀들은 바로 주작천후와 빙서시 냉철화였다.
(우리에게는… 그의 시선을 잡을 능력이 없는 것일까?)
그녀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우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스으… 스으…
어느덧 동녘이 환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황룡보(黃龍堡).>
의사청 밖,
"…!"
"…!"
몇 명의 왜소한 인영이 당혹한 표정으로 의사청에서 새어나오는 소리를 들
고 있었다. 부용부인 곽부용, 빙서시 냉철화, 그리고, 주작천후 등이 그녀
들이었다.
주작천후와 빙서시의 표정은 아주 볼 만했다. 두 여인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들이었다. 그녀들은 연신 어쩔 줄 몰라하며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반면 곽부용은 의외로 태연한 표정으로 의사청 안을 향해 귀를 기울이고 있
었다.
"흐윽… 하악!"
궁월영의 흐느낌은 점점 급박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고통스럽게
들렸으나 점점 그 소리는 야릇한 환희의 교성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것을 듣고 있던 빙서시 냉철화는 마침내 못 견디겠다는 듯 곽부용을 향해
원망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저… 정말… 너무하세요 주모(主母)님. 아무리 혈해군벌의 분열을 막기 위
해서라고 해도… 그 분 보고 성모를 안으라고 시키시다니요?"
그녀는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고인 채 말했다.
아… 그랬던가? 곽부용, 철운비에게 궁월영을 안으라고 시킨 것이 바로 그
녀였단 말인가?
곽부용은 빙서시의 항의에 극히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그이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어요!"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녀의 태연한 표정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쏴아아…꽈르릉--!
빗발은 더욱 거세어지고 있었다. 간간이 들리던 우뢰성도 점차 높아지는 듯
했다.
그 속에 궁월영의 흐느낌은 급박하게 절정을 치닫고 있었다.
-성숙해(星宿海)!
<유리성궁(琉璃聖宮).>
-유리부인(琉璃婦人) 마옥령(瑪玉玲)!
-서천제일용자(西天第一勇者) 담철형(潭鐵形)!
-마황금시(魔皇金匙)!
-흑룡패왕(黑龍覇王)!
-야수심결(野獸心訣)!
-호화지존(護花至尊) 담철형(潭鐵形)!
∑ 제 31 장 유리패왕궁(琉璃覇王弓)
-마황금시(魔皇金匙)!
-호화철환(護花鐵環)!
-마옥령(魔玉玲)!
-열화마룡(熱火魔龍)!
-빙마곡(氷魔谷)!
<마황… 총(魔皇塚)!>
화라라락!
저녁 무렵의 차가운 삭풍에 옷깃을 날리며 한 쌍의 남녀가 마황총의 입구에
서 있었다. 그들은 다름아닌 철운비와 유리부인 마옥령이었다.
유리부인 마옥령은 철운비가 벗어 준 장포로 나신을 가린 채 서 있었다. 큼
직한 철운비의 장포에 푹 싸여 있는 마옥령은 슬픔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시
선으로 철운비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위에게 부끄러운 곳까지 전부 보이고 말다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
가?)
마옥령은 소리없이 한숨을 쉬며 얼굴을 붉혔다. 슬픔에 잠긴 그녀의 눈은
철운비의 손가락에 끼어진 호화철환(護花鐵環)을 보고 있었다.
호화철환이 그의 손에 끼어져 있음은 철운비가 마옥령 자신의 사위임을 의
미했다. 비록 당사자인 철운비는 모르고 있지만…
그런 미래의 사위에게 마옥령은 내밀한 금단의 부위까지 보이고 만 것이었
다.
(이들을 죽인 자는… 지옥천존이다.)
그때 철운비는 안색을 침중하게 굳히며 마황총 입구에 널려진 시신들을 조
사하고 있었다. 그는 한눈에 그 시신들이 지옥천존의 손에 죽은 것임을 알
아차렸다.
하지만 그는 마옥령이 걱정할까보아 그런 사실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는… 벌써 저 안에 들어가 있다. 이미 유리공주 마비취도 마황금시의 탁
본을 믿고 마황총 안으로 뛰어든 후일 것이다!)
철운비는 눈을 번득이며 마황총의 안쪽을 바라보았다.
"궁주께서는… 수호익룡(守護翼龍)과 함께 밖에서 기다리십시오. 마황총에
는 저 혼자들어가 따님을 구해 오겠습니다."
철운비는 마황총에 시선을 던진 채 침중하게 말했다.
"…!"
마옥령은 함께 가겠다고 말하려다가 소리없이 한숨을 쉬며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함께 들어가 보았자 철운비에게 부담만 될 것임을 아는 때문이었다.
"조심… 하세요, 제발!"
마옥령은 눈으로 철운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음성에는 미래의 사위
에 대한 애정과 우려가 가득 실려 있었다.
그것을 느끼고 철운비는 퍼뜩 돌아보았다.
(이 분은 마치 내 어머니라도 되신 듯하다.)
철운비는 고소를 지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그녀의 사위가 된 사실을 모
르고 있었다.
"하하…! 걱정마십시오! 아수라(阿修羅)라도 저를 해치지는 못하니까!"
철운비는 껄껄 웃어보였다. 그리고는 유리패왕궁을 불끈 움켜쥔 채 마황총
의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그의 훤칠한 모습은 이내 마황총 내부로 사라져
갔다.
"…!"
마옥령은 철운비가 사라진 마황총을 근심 서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휴…!"
이윽고 그녀는 나직이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마황지문(魔皇之門).>
∑ 제 32 장 고금제일마(古今第一魔)의 무덤
-유리공주(琉璃公主) 마비취!
이것이 쓰러진 소녀의 이름이었다. 다음대 유리성궁의 궁주가 될 청해제일
미인(靑海第一美人)이 그녀였다.
그곳은 한 칸의 석실이었다.
별로 크지 않은 장방형의 그 석실의 중앙에는 하나의 거대한 향로(香爐)가
하나 놓여져 있었다.
높이 이 장에 가까운 그 거대한 향로는 철운비가 전에 본 적이 있는 마황혈
정(魔皇血鼎)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다만 크기가 더 크고 그 전면에 새겨진
모양이 좀더 복잡할 뿐이었다.
한데 그 향로의 앞에는 한 명의 여인이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은 채 마황혈
정의 모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갈하고 짧은 머리카락에 만년혈만의 껍질
로 만든 붉은 장포를 걸친 미소부. 그녀는 하늘 아래 오직 철운비만이 아는
여인이었다.
"여… 제(女帝)!"
철운비는 놀라움과 경이가 섞인 신음을 발하며 성큼 여인의 옆으로 다가섰
다.
-잠마여제(潛魔女帝) 궁비연!
놀랍게도 여인은 바로 천 년 만에 부활한 잠마여제 궁비연이었다. 한데, 남
해 절정마도에 있어야 할 그녀가 어떻게 이 마황총에 있는 것일까?
"이제야… 왔구나! 운비(雲飛)!"
문득 향로 앞에 앉아 있던 궁비연이 빙긋 웃으며 철운비를 돌아보았다.
"이게 어찌된 일이 십니까? 남해에 계신 줄 알았는데…!"
철운비는 마비취를 내려 놓고 반갑게 궁비연의 섬섬옥수를 움켜쥐었다.
그말에 궁비연은 문득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불사성황의 아내이셨던 잠후의 후예임을… 잊었느냐? 나는… 네게
성황조사님의 마지막 절기를 전해 주려고 이 마황총을 여는 불경을 저질렀
단다."
그녀는 전면의 거대한 향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순간 철운비는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마황총을… 연 것이 여제누님이셨습니까?"
그렇다. 세인들은 지진으로 빙마곡(氷魔谷)의 천년빙벽이 무너져 마황총이
나타난 줄 알고 있으나 사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잠마여제 궁비연!
-불사초연신강(不死超然神剛)!
-빙하서시(氷河西施) 설옥빈,
-마황총(魔皇塚)!
-지옥마교(地獄魔敎)!
-복우산(伏牛山).
-지옥마전(地獄魔殿)!
-새북팔황연맹(塞北八荒聯盟)!
-막북(漠北) 적붕호황천(赤鵬護皇天)!
-북산(北山) 사자철림(獅子鐵林),
-남황(南荒) 벽력부(霹靂府),
-묘강(苗疆) 살황독종(薩荒毒宗),
복우산(伏牛山)의 서쪽 산록,
촤라락…!
"…!"
한 명의 여인이 옷깃을 펄럭이며 하나의 구릉 위에 표표히 서 있었다.
신비한 회색 동공을 지닌 여인,
-번뇌화(煩惱花) 음사향,
-흡혈강시(吸血疆屍)!
-거령수황(巨靈獸皇)!
∑ 제 33 장 불사지존(不死至尊)의 탄생(誕生)
피-- 이잉!
재차 비단폭을 찢는 듯한 활시위 소리가 황혼을 갈랐다.
꽈-- 르릉!
"카아아악!"
그 순간 굉렬한 폭음이 터지며 악귀같이 날뛰던 흡혈강시의 거구가 십 장
밖으로 나뒹굴었다.
유리패왕궁--!
그것에서 일어난 강맹한 무형강전(無形剛箭)이 흡혈강시에게 타격을 준 것
이다.
콰드드득!
아수마황의 거구에 부딪혀 하나의 바위가 박살나 버렸다.
"카아악!"
타격을 받긴 했으나 아수마황은 이내 용수철같이 벌떡 뛰어 일어났다.
고오오…!
그 사이 수호익룡은 아수마황의 머리 위까지 이르렀다.
철운비는 유현한 눈빛으로 흡혈강시가 된 아수마황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눈가로 동정의 빛이 흘렀다.
"그대의 지난날 악업이 크고도 깊어 죽어서도 흙에 묻히지 못하는구료! 아
수마황!"
철운비는 탄식을 하며 훌쩍 수호익룡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피-- 이잉!
그는 허공을 밟으며 곧장 흡혈강시의 정수리를 향해 날아내렸다.
"이제… 당신을… 땅으로 돌려보내 주겠소!"
스--읏!
철운비는 침중하게 말하며 아수마황의 정수리를 손 끝으로 내리쳐 갔다.
버-- 번-- 쩍!
그의 손 끝에서 희고 붉은 뇌정이 선뜻 일어나 아수마황의 정수리에 내리꽂
혔다.
"크- 아아아악!"
아수마황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그의 거구가 벼락을 맞은 듯이
뒤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쓰러지지는 않고 우뚝 굳어졌을 뿐이었다.
츠-- 으--!
아수마황의 눈에서 광기가 사라졌다. 이어 그의 몸에서 지옥명공강의 시퍼
런 불꽃이 모공을 통해 빠져나와 허공으로 흩어져 갔다.
비틀…
아수마황의 거구가 흔들했다. 그 순간 아수마황의 두 눈에 언뜻 살아 있는
사람의 그것 같은 생기가 돌아왔다.
"고… 맙… 다!"
다음 순간 믿어지지 않게도 아수마황의 입에서 아주 평온한 한 마디가 새어
나왔다. 아니, 철운비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퍼-- 억!
푸스스스…!
뒤미처 아수마황의 거구가 정수리로부터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머리가
사그러들고 이어 가슴, 복부… 하체까지 먼지로 스러졌다. 삽시에 그가 섰
던 자리에는 그저 한 무더기 먼지만이 수북하게 쌓여 있을 뿐이었다.
아수마황(阿修魔皇)!
가장 무섭고 잔혹했던 오백 년 전의 대마황! 그가 비로소 흙으로 돌아간 것
이었다.
-지옥… 무저갱(地獄無底坑)!
<지옥… 마전(地獄魔殿)!>
-고독패왕(孤獨覇王) 철무정!
-달란(達丹)의 여왕(女王)!
꽈르르릉!
"으음…! 지독하구나!"
신음하는 철무정의 손 끝에서 우뢰성이 일어나며 단철신강(丹鐵神剛)의 붉
은 노을이 벼락치듯 일어났다.
그는 아주 괴로운 표정이었다. 철무정이 괴로워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다른
사람과 연수(連手)하여 적을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의 적은 물론 지옥천존 벽우뢰였다.
그리고 철무정과 함께 지옥천존을 상대하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검후(劍后)
벽황혜였다.
이미 전설의 천년검후가 된 벽황혜는 철무정 자신의 제자이며 또한 며느리
이기도 했다.
사상최강의 사제! 그들은 하늘 아래 가장 강한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허나, 그런 두 사람이 손을 합쳤건만 지옥천존을 쓰러뜨리지 못하고 있었
다.
"크하하핫! 모두… 죽인다!"
콰르르릉…! 파츠츠츠!
마성에 미쳐 날뛰는 지옥천존, 그의 심장에는 한 자루 독검(毒劍)이 손잡이
만 남기고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를 그렇게 만든 자는 다름아닌 전능기환
전의 당대전주인 천수제왕(千手帝王) 음천세였다.
상식대로라면 심장이 찔린 벽우뢰는 죽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
독중지독(毒中之毒)을 복용하여 죽지 않았다.
죽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는 단기간 사이에 두 배 강한 내공과 고금최강의
독강을 지니게 되었다. 그 수준은 흡혈강시가 되었던 아수마황을 두 배 능
가하는 경지였다.
천수제왕 음천세! 그는 지옥천존을 제거시키기는커녕 두 배 강하게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 독황지정의 독기가 벽우뢰의 뇌수까지 침범하
여 그는 광인(狂人)이 되어 버렸다.
파츠츠츠…!
쩌러러렁!
벽우뢰의 몸 주위로 자극천독강벽(紫極千毒剛壁)이 뇌전같이 휘돌고 있었
다. 그것은 스치기만 해도 금강지체도 녹여 버린다.
지금 지옥마전의 폐허 여기저기에는 몇 명의 인물들이 그 자극천독강벽에
휘말려 쓰러져 있었다.
-적붕천황(赤鵬天皇) 단목천뢰!
-지옥노조(地獄老祖) 능황!
바로 그였다.
그의 발치에는 한 명의 소복여인이 갸날프게 숨을 몰아쉬며 누워 있었다.
그녀는 바로 북망산의 여왕, 유령귀모(幽靈鬼母)였다. 그녀 역시 지옥천존
의 자극천독강벽에 휘말려 중독된 것이다.
--황혜(皇慧)를… 부탁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