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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저녁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 가운데 17일 오전 서울 명동성당을 찾은 한 스님이 조문을 하고 있다.
 지난 16일 저녁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 가운데 17일 오전 서울 명동성당을 찾은 한 스님이 조문을 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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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선종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에 대한 내 개인적인 기억들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내가 김수환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때는 1966년, 고등학교 3년 시절이었다. <경향잡지>라는 교회 잡지를 통해서였다. 당시 대전교구 태안성당 초대 주임이셨던 고대연 야고버(콜롬비아인) 신부님이 내게 경향잡지의 표지를 보여주셨다. "또 한 분의 한국인 주교님이 탄생하셨다"는 말씀을 하셨던 것 같다.

당시 경향잡지는 표지에 매번 교구장 주교님들의 모습을 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시절에 30대 젊은 주교님이었던 윤공희 초대 수원교구장 주교님의 모습도 경향잡지 표지를 통해 보았던 기억이 아련하다.

경향잡지 표지를 통해 새로 탄생한 초대 마산교구장 김수환 주교님의 모습을 처음 대했을 때는 별다른 감동이 없었던 듯싶다. 교구가 또 하나 늘고 한국인 주교님이 또 한 분 탄생한 사실을 즐거워하시는 듯한 콜롬비아 신부님의 모습, 그분의 휘파람소리가 더욱 명료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러다가 2년 후인 1968년 다시 교회 매스컴을 통해 마산교구장 김수환 주교가 서울대교구장이 되고 대주교가 되었다는 보도를 접했을 때도 별 뾰족한 느낌은 없었다. 또 콜롬비아인 고대연 야고버 본당 신부님이 <가톨릭시보>를 보여주면서 "우리 주교님이 되게 섭섭하겠다"라며 웃으시던 모습에 대한 기억이 더욱 명료하다.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던 그때 그 라디오 방송 

그리고 1년 후인 1969년 4월 28일 김수환 대주교의 추기경 서임 소식을 접했다. 이번에는 교회 매스컴이 아닌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였다. 당시 우리 집에는 라디오가 한 대 있었고, 마루 위 선반에는 유선방송 스피커가 달려 있었다. 라디오는 성능이 좋지 않아서인지 잡음이 많았지만, 유선 스피커는 음질 상태가 좋았다. 내 쪽에서 사이클을 선택할 수 없는 아쉬움 가운데서도, 청취료를 무는 만큼 음질 상태가 좋은 스피커 방송을 많이 들으며 살던 시절이었다.

집 마당에서 뭔가를 한 짐 얹어놓은 지게를 지고 일어나려던 순간이었다. 마루 선반 위 스피커에서 귀에 익은 KBS 방송국 임택근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긴급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대주교가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리고 천주교의 '추기경'에 대한 설명도 곁들여 주었다.

나는 지게를 지고 일어서려던 동작을 멈추고, 지겟다리 사이에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임택근 아나운서의 그 방송 보도를 거듭 들었다. 임택근 아나운서가 같은 말을 거듭 방송하니 나는 거듭 듣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라디오 방송 내용이 하루종일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추기경이 탄생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내내 즐거운 기분을 갖게 했다. 내가 한국 사람이어서 기분이 좋고, 천주교 신자여서 더욱 기분이 좋다는 생각을 했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기도 했다.

거듭된 성직자 구속... 비판 발언 높여간 추기경

2007년 9월 18일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학교 주교관을 예방한 대전교구 태안성당 구본국 베난시오 주임 신부님과 노인 신자들이 김수환 추기경을 모시고 기념촬영을 했다. 김 추기경의 왼쪽 바로 옆에 서 있는 할머니가 내 어머니다. 김 추기경님과 함께 한 우리 가족의 유일한 사진이다.
▲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2007년 9월 18일 서울 혜화동 가톨릭대학교 주교관을 예방한 대전교구 태안성당 구본국 베난시오 주임 신부님과 노인 신자들이 김수환 추기경을 모시고 기념촬영을 했다. 김 추기경의 왼쪽 바로 옆에 서 있는 할머니가 내 어머니다. 김 추기경님과 함께 한 우리 가족의 유일한 사진이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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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시절에 암울했던 독재시대를 살아온 나로서는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기억이 더욱 각별하다. 우리나라 민주화의 도정(道程) 안에서 김수환이라는 이름이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비록 시골의 작은 성당에서 신앙생활을 할 망정 내 촉각은 온통 서울 명동성당에,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9년의 이른바 '삼선개헌'으로 만족하지 않고 영구집권 야욕을 드러내던 박정희 정권의 공포정치를 비판한 김수환 추기경의 1971년 명동성당 성탄 자정미사 강론은, 내가 군에서 제대한 1972년 이후에 제대로 접할 수 있었지만, 내게 깊은 감동과 희망을 안겨 주었다.

1972년 8월의 시국성명 발표는, 5월 군에서 제대한 후 거의 방황하는 상태였던 내게 가치관의 확실한 기초를 잡아주는 계기가 되었다. 74년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의 구속을 시작으로, 76년 '명동성당 3·1절 구국기도회' 사건으로 함세웅 신현봉 장덕필 신부가 구속되고, 78년 전주교구 '7·18 기도회 사건'으로 문정현 신부가 구속되자, 그때마다 김 추기경은 성명서 발표와 강론을 통해 유신 정권의 독재와 인권 탄압을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자유언론과 인권·민주회복을 열렬히 강조했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의 이름으로 발표된 성명서와 명동성당 강론은 그대로 전국의 수많은 성당들에 배포되었다. 나도 태안성당에서 그것들을 속속 입수했고, 당시 유호식 아우구스티노 주임 신부님의 의지와 배려로 교중미사 강론 시간에 신부님 강론 대신 내가 김 추기경의 성명이나 강론을 낭독하기도 했다.

태안성당에서 최초로, 또 가장 오래 전례봉사를 하면서, 1970년대와 80년대 김수환 추기경의 성명이나 미사 강론, 또 정의구현사제단의 성명 등을 교중미사 시간에 낭독하곤 했던 일을 가장 큰 보람으로 여긴다. 그때는 내가 지은 기도문으로 '보편지향기도'(옛날에는 '신자들의 기도')도 많이 바쳤는데, 나는 태안성당의 교중미사 시간에 하느님께 바쳤던 내 모든 기도문들을 지금도 알뜰히 보관하고 있고, 내 홈페이지의 '기도방' 안에 모두 게시해 놓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의 정치 참여(?)는 당연히 가톨릭과 정권의 대립 양상을 낳았고, 교회 내부에 교회의 정치 개입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교회는 세상 속에 존재하는 것임을 그는 분명하게 일깨워 주었다. 그런 김 추기경의 확고한 방향 제시로 말미암아 한국 천주교의 명동성당은 민주화의 성지로 자리매김될 수 있었다.

너무 일방적이고 편협한 비방, 안타깝다

지난 16일 저녁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 가운데 17일 오전 서울 명동성당을 찾은 가톨릭 신자들이 전시된 김 추기경의 생전 사진을 둘러보고 있다.
 지난 16일 저녁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한 가운데 17일 오전 서울 명동성당을 찾은 가톨릭 신자들이 전시된 김 추기경의 생전 사진을 둘러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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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을 가까이에서 뵐 수 있는 기회도 내게 여러 번 있었다. 김 추기경은 1980년대 초 태안에서 한 이틀 묵고 가신 적도 있다. 태안성당을 공식적으로 방문하신 것은 아니고, 당시 태안성당 사목회장이었던 고(故) 임해창 와네리오 회장의 전원 주택에서 맑은 공기를 즐기며 휴식을 하고 가신 적이 있는 것이다.

1990년대 어느 핸가는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한국가톨릭문인협회' 정기총회를 가진 적이 있는데, 그 자리에 김 추기경께서 몸소 참석하셔서 좋은 말씀을 들려주시고 강복을 주셨다. 그때도 김 추기경을 지척에서 뵈면서, 온화하고도 인자한 얼굴 표정에 내심 감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주교 성직자들의 특성 중의 하나가, 하나같이 온화하고 인자한 얼굴이지만, 김수환 추기경의 얼굴은 그 온화함과 인자함이 더욱 특별하다는 생각을 그분을 뵐 때마다 떠올리곤 했다.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소식이 알려지면서 인터넷 상에도 많은 글들이 올라온다. 대부분은 김 추기경을 추모하며 그의 성품과 업적을 칭송하는 글들이다. 그런데 매우 이질적인 글들도 없지 않다.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우리 사회의 보수화 회귀 현상과 맞물리는 김 추기경의 보수적인 언행을 비판하는 글들은 그런 대로 논리와 품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김 추기경의 젊은 시절 학도병 사진을 올리면서 비난을 퍼붓는 글들에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너무 일방적이고 편협하다. 그 학도병 사진 하나가 전부일 수는 없다. 그들은 그 학도병 사진 하나를 가지고 김 추기경을 '매국노'로 비난할 줄만 알았지, 김 추기경이 동성상업학교 졸업반 시절 '황국신민으로서 소감을 쓰라'는 시험 문제가 나오자 "황국신민이 아니어서 소감이 없다"고 썼다가 교장에게 불려가 뺨을 맞기도 한 사건은 알지도 못하고,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

일제 시대에 학생이었던 사람 치고 학도병 아니었던 사람이 어디 있으며, 젊은 사람 치고 징용 대상이 아니었던 사람이 어디에 있었겠는가. 우리는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베를린 올림픽에 뛰었다 해서 그를 매국노라고 하지는 않는다. 가슴에 달린 일장기 때문에 우승 시상대 위에서 면류관을 쓴 머리를 숙인 채 침울한 표정이었던 그의 얼굴을 잊지 못한다.

내 소년 시절에는 우리 동네에도 일제시대에 징용에 끌려갔다가 살아 돌아온 이들이 여럿 있었다. 징용에 끌려갔다는 이유로 그들을 매국노라고 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 아버지는 부산에서 탈출을 했지만, 내 아버지도 일제의 징용 대상에 걸려든 사람이었다.

어제(16일) 서울을 다녀왔다. 잠실 올림픽경기장 실내체육관에서 치러진 Y대 신입생 입학식에 참석하고 학부모들에게 공개된 오리엔테이션까지 구경하고 오후 4시 40분 버스로 내려오는데, 아내가 전화로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사실을 전해 주었다. 내 손에는 이미 묵주가 쥐어져 있었다. 나는 그 순간부터 태안에 도착할 때까지 김수환 추기경을 생각하면서 묵주기도에 열중했다. 하느님께, 또 김수환 추기경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태그:#김수환 추기경 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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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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