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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역사를 고대-중세-근세-근대로 4등분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년)은 중세와 근세의 과도기에 살았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 도쿠카와 이에야스와 더불어 중세의 혼란을 극복하고 근세 일본을 여는 데에 기여한 인물이다. 그리고 형식상으로는 국왕(소위 천황) 밑의 관백(關白)이었지만, 실질상으로는 한때 일본의 최고통치권였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초상화.
ⓒ 도쿄 하타케야마 기념관 소장
한국인들에게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원흉'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센고쿠통일(戰國統一)을 이룩하고 근세 일본을 여는 데에 결정적 기여를 한 역사적 인물로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그는 특히 전쟁술에서 탁월한 면모를 보여 주었다. 상대에게 직접적 공격을 가하기보다는 가급적 적의 허를 찌르고 또 과학적인 병참 작전을 구사하는 등의 남다른 방식으로 그는 일본 통일의 영웅이 될 수 있었다.

이는 그가 상대적으로 불리한 상황 하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에 능숙한 사람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나름대로 '저비용 고효율'의 전쟁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오늘날 일본에서 센고쿠시대(전국시대) 최고의 전략가·지모가로 인식되고 있다.

그럼, 도요토미는 구체적으로 어떤 전술을 구사하였을까? 그의 전쟁술을 이해하는 것은 비단 도요토미라는 한 인물을 이해하는 차원에 그치는 게 아니라, 현대의 일본 군인들이 이상적인 본보기로 생각하는 전쟁술의 일부분을 이해하는 데에도 일정한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 총 3부에 걸쳐 그의 전쟁술의 주요 특징들을 각각 살펴보기로 한다.

스피드를 앞세운 기습전

기습전이 적용된 야마자키 전투(山崎合戰)와 시즈가타케 전투(賤ケ嶽合戰)의 사례를 분석해 보면, 도요토미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에 기습전을 감행하였다.

▲적군의 총 전력이 아군의 총 전력을 능가하고 ▲적군이 2곳 이상에 분산되어 있거나 ▲지휘계통을 달리하는 2개 이상의 적과 대치 중일 때에 이 방법이 사용되었다. 위 2개의 사례 중에서 야마자키 전투만 소개하기로 한다.

1582년 도요토미의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서부 일본을 평정하기 위하여 도요토미에게 모리씨(氏)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런데 도요토미가 모리씨의 다카마츠성(高松城)을 공격하는 틈을 이용하여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가 교토 혼노사(寺)에 있는 자신의 주군을 습격하였다. 일본 센고쿠시대의 특징 중 하나인 하극상이 벌어진 것이다. 이로 인해 오다 노부나가는 결국 자결하고 말았다.

이제 도요토미는 눈앞에 있는 모리씨뿐만 아니라 배반자인 아케치까지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당시 도요토미는 수공작전을 통해 다카마츠성 함락을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아케치에게 천하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군대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도요토미는 모리씨와의 싸움을 중지하고 야마자키에 있는 아케치의 본진을 급습하기로 결정하였다.

무사히 철군을 단행하기 위하여, 도요토미는 주군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극비에 부치고 모리씨에게 강화(講和)를 제의했다. 그는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에게 강화를 청하면서 "다카마츠성 성주를 할복시키면 군대를 돌리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도요토미 측에게 불상사가 생긴 사실을 모르고 있던 모리씨는 그저 '다행'으로 생각하며 도요토미의 강화 제안에 호응했다.

다카마츠성 성주가 할복하는 것을 확인한 도요토미는 일단 히메지(姬路)성으로 군대를 퇴각시켰다. 그는 이곳에서 모든 금은을 장병들에게 나누어준 뒤에 '망군(亡君)의 적에 대한 복수'를 명분으로 군대를 재편하였다.

그리고는 아케치의 본진을 향해 '잇푸진라이'(疾風迅雷, 맹렬한 기세)의 속도로 달려갔다. 얼마 안 있어 '도요토미의 강화가 거짓이며 괜히 애꿎은 성주만 죽였다'는 것을 깨달은 모리씨 군대가 뒤늦게 추격을 해왔지만, 이미 추격이 불가능할 정도로 거리가 벌어진 뒤였다.

도요토미 군대가 어찌나 빨리 행군을 했던지, 아즈치(安土)와 사카모토(坂本)에 있는 아케치의 군대가 야마자키의 본진에 합류할 겨를도 없이 아케치 군대는 도요토미 군대의 기습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도요토미는 대승을 거두었고, 주군을 살해한 배반자를 처단했다는 공로 때문에 그의 지도력은 한층 더 고양될 수 있었다.

야마자키전투는 '야마자키 및 모리씨라는 2개의 적이 있고 또 야마자키의 군대가 3곳 이상에 분산되어 있으며 또한 모든 적을 동시에 상대하기 힘든 상황' 하에서 스피드를 앞세워 야마자키의 본진을 기습함으로써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 전쟁이었다.

그리고 조직 내의 또 다른 라이벌인 시바타 가츠이에(柴田勝家)와의 싸움인 시즈가타케 전투(1583년)에서는 이츠키가케(一騎驅)라는 전법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대장 혼자 말을 타고 앞서 달리고 부하 장수들은 그 뒤를 달리면서 적군을 기습하는 방법이다. 이츠키가케의 생명은 스피드에 있었다. 스피드가 담보되지 않으면 적군의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적의 본진을 무력화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공(水攻)작전 및 병참 차단

야마자키 전투와 시즈가타케 전투를 통해 중앙 권력을 장악한 도요토미는 이후로는 기습작전 같은 '비신사적인 방법'을 자제하기로 하였다. 자신의 체면을 구길 수 있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히데요시는 사람 목을 베는 것을 싫어한다"는 선전을 강화하면서 그 후로는 적군을 직접 죽이기보다는 간접적으로 죽이는 쪽을 선호하였다.

대신, 적군을 물에 빠뜨려 죽이거나 혹은 굶겨 죽이는 방식을 더 많이 구사한 것이다. 물론 다카마츠성 전투의 경우처럼 중앙권력 장악 이전에도 이러한 방법들은 종종 사용되었다.

그가 사람 목을 직접 베기를 꺼린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가 사람 죽이는 것을 즐기다가 부하들의 공포심을 유발하고 결국 부하의 배신에 의해 죽었기 때문이다. 주군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히데요시는 자신은 생명을 존중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조성하면서 사람들의 신뢰를 얻어 갔다.

그렇지만, 그의 본질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좀 더 교묘한 방법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물에 빠뜨려 죽이건 굶겨 죽이건 간에 어차피 참혹한 것은 다 마찬가지엿다.

수공작전이 성공한 사례로는 앞서 언급한 다카마츠성 전투 외에도 카니에성 전투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병참 차단이 성공한 사례로서 오다 노부나가 생존 당시의 돗토리성 전투를 들 수 있다. 이때 도요토미는 병참부대를 공격하여 식량이 돗토리성에 반입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성 안에서는 생지옥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병사들끼리 서로 잡아먹는 끔찍한 일이 생긴 것이다. 결국 도요토미는 적장이 할복하는 조건으로 포위를 풀어 주었다.

병참 차단을 위해 도요토미가 구사한 또 다른 방식으로는 '히고로시'(干殺し)가 있다. 이것은 성 안으로 흐르는 수도를 끊어서 성 안 사람들이 목 말라 죽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덧붙이는 글 | 내일 제2부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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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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