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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갓버섯
ⓒ 고평열
남편은 새벽에 벌초를 가야 한다고 일찍 잠들었다. 들이나 산으로 다닐 일이 없다가도 이때가 되면 전 도민이 너나없이 벌초를 하는 시기, 제주의 독특한 문화가 돋보이는 달이 음력 8월이지 싶다.

이땐 전국에 흩어져 살던, 제주를 고향으로 둔 사람들이 모여들고, 외국에서조차 적잖이 겸사겸사 하여 고향을 방문하는 시기이다.

가끔 독버섯 사고에 관한 소식들이 들리기도 하고, 독버섯과 먹는 버섯의 차이 혹은 구별법에 대해 문의가 한번쯤은 꼭 들어오기도 한다.

▲ 큰갓버섯의 주름살
ⓒ 고평열
소낭밭(소나무밭)을 개간하여 막 농사를 짓기 시작한 고구마밭에 '큰갓버섯'이 많이 발생하여 할머니와 따다 먹었던 어릴 적 기억이 남아 있다.

참기름을 두른 팬에 잔소금을 뿌리며 노릇노릇하게 버섯을 구워 밥반찬으로 얹어 주시던 할머니의 잊을 수 없는 그 맛. 밭두둑이며, 길가에도 틈틈이 보였던 흔한 버섯이었는데, 이젠 어쩌다 간간이 보일 뿐인 쉽지 않은 버섯이 됐다.

▲ 큰갓버섯 유균(어린버섯)
ⓒ 고평열
제주 방언으로는 '말똥버섯'이라고 불리나, 표준어의 '말똥버섯'과 차이가 많이 난다.

큰갓버섯은 숲 가장자리의 초지 주위에 많이 발생하지만 말똥버섯은 소나 말의 분변 위에서만 자라고, 큰갓버섯은 식용버섯이나 말똥버섯은 식중독을 일으키는 독버섯에 속한다.

큰갓버섯은 이름처럼 갓이 크다. 20∼25cm 정도의 갓 크기에 대는 30cm 정도까지 자란다.

▲ 흰독큰갓버섯. 큰갓버섯과 유사하여 중독사건이 흔히 발생한다.
ⓒ 고평열
담갈색의 갓에 진갈색의 인편이 듬성듬성 크게 자리 잡고 붙어 있으며, 대와 고리도 물론 갈색이다. 반지처럼 생긴 고리가 위아래로 움직일 수 있는 가동성 고리여야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 모여 나지 않는 습성이어서 여기저기 하나씩 흩어져 발생한다.

육지 지방에는 개암버섯과 비슷한 노란다발이나 싸리버섯류 중에서 독이 있는 버섯을 섭취하게 되어 버섯 식중독이 많이 발생하지만, 제주도에는 큰갓버섯으로 오인하여 먹는 독버섯 때문에 식중독이 주로 발생한다.

▲ 흰갈대버섯. 큰갓버섯과 유사하나 식용불명이다.
ⓒ 고평열
흰독큰갓버섯이며, 흰갈대버섯, 진갈색주름버섯 등 비슷한 류의 버섯들이 큰갓버섯과 서식공간을 같이 하며 비슷한 생김새로 사람들의 이목을 흐리게 한다.

며칠 전에는 모처럼 만난 큰갓버섯이 반가워서 몇 개체 따다가 3개는 건조표본을 만들고, 3개를 후라이팬에 구워 보았다. 기대와 달리 큰갓버섯은 어린 시절 할머니가 숟가락에 얹어주시던 그 맛과 사뭇 달랐다.

고급화된 입맛 때문인지, 아니면 맛의 기억이란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미화되어 왔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 흰갈대버섯도 큰갓버섯처럼 아주 키가 크다.
ⓒ 고평열
지나간 세월들은 멈추어 서서 뒤돌아보는 이의 눈에는 그리움과 아쉬움이라는 포장지로 싸여서 보관되나 보다. 맛은 옛 맛이 아니었으되, 버섯 굽는 냄새에 이끌린 남편이 호들갑을 떨며 술잔을 챙기는 그 너스레 때문에 젓가락에 얹어주며 미소 짓게 되는 즐거움이 있었다.

어쩌면 혀끝이 기억하는 '맛'이란 것은 '정'이라는 양념이 뿌려져서 저장되고, 오랜 시간 숙성된 그 감칠맛만을 고집스럽게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선선한 가을바람과 함께 어느새 10월도 무르익었다.

▲ 큰갓버섯속에 속하나 알 수 없는 버섯
ⓒ 고평열
9, 10월이 절정을 이루는 가을은 이렇게 벌초며, 추석이며, 혹 연이어 있는 제사라도 한 번쯤 치를라치면, 여름을 견디며 가을을 기다렸던 그 마음과 달리 정말 너무도 빨리 스쳐 지나고 만다.

10월이 지나면 늘 한해의 마감을 준비해야 한다는 아쉬움이 인다. 그렇게 겨울의 찬 서리 앞에 내동댕이쳐지듯 서 있는 자신을 어느 순간 느낄 때, 한 해의 시간만을 보낸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어느 부분까지 송두리째 도려 내어진 듯 느껴지는 건 50을 향해 가는 주부라면 누구나 앓는 '가을앓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일 벌초 길에서 돌아오는 남편의 손에 큰갓버섯 서너 개쯤 다시 들려 왔으면 좋겠다. 버섯향보다도, 버섯에 뿌려지는 참기름냄새보다도, "우와 맛있겠다!"하고 감탄사를 던지며 소주잔을 집어들 남편의 즐거운 웃음을 양념으로 고이 재워 큰갓버섯의 맛을 기억해 두어야 하겠다.

덧붙이는 글 | 서귀포 신문과 인터넷 카페에 같이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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