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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새가 떠난 하도리 창흥동
ⓒ 고평열
철새들은 떠났다. 대부분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고, 채 떠날 준비를 마치지 못한 댕기흰죽지만이 일부 남아 있을 뿐, 이제 곧 그들마저 떠나면 이 땅의 터줏대감인 흰뺨검둥오리와 물닭, 백로나 왜가리 등의 텃새들만 남을 것이다.

왝왝거리던 오리들의 울음소리는 멎었다. 간혹 번식기에 이르른 휘파람새의 울음소리와 딱새, 돔박새 등의 날갯짓 소리가 탐조대 인근의 소나무 숲에서 적막을 깰 뿐이다. 수천 마리의 철새들이 겨우내 머물던 창흥동 철새도래지에는 겨울과 여름의 가름에서 이렇게 떠나는 자와 남는 자가 생겼다.

▲ 찻잔버섯의 어린균
ⓒ 고평열
연이틀 봄비가 내렸던 대지는 촉촉하다. 떠나는 이들은 누가 되었든 그렇게 떠나고, 남는 이의 가슴엔 항상 아쉬움이 자리한다. 이제 바야흐로 남은 습지는 신록으로 빛나려 하고, 꽃마리, 개미자리, 방가지똥과 민들레 등등의 봄꽃들이 철새 떠난 빈자리를 채우려는지 황사 바람에도 아랑곳없이 봄기운에 취해있다.

가족이 떠난 빈자리가 휑뎅그레하여 괜스레 머물던 자리 뒤돌아보듯 철새들이 떠난 창흥동 습지를 천천히 걸으며 둘러본다.

▲ 좀주름찻잔버섯
ⓒ 고평열
말을 놓아 풀을 뜯기도 하는 철새도래지에는 말똥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대지위 말똥에는 낯익은 버섯들이 무리지어 돋아있는 것이 눈에 띈다. 좀말똥버섯이 보이고, 환각버섯이 보이고, 볏짚버섯도 눈에 띄며 찻잔버섯은 아예 말똥을 다 덮고 있다.

바닷바람에 노출되어 있는 나대지인 이곳은 비록 사방이 물로 둘러져 있더라도 숲 그늘이 없는지라 쉬이 대기가 건조해진다. 찻잔버섯은 말똥이 마르기 전에 서둘러 포자를 번식시키려는지 유균부터 노균까지 한자리에 모여 있다.

▲ 찻잔버섯
ⓒ 고평열
보송보송한 털로 쌓인 어린 찻잔버섯과, 번식을 위해 포자주머니를 열고 있는 성체인 찻잔버섯과는 같은 종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차이가 크다. 주머니가 열린 찻잔버섯의 내부에 들어있는 작은 초콜릿 알처럼 생긴 것이 '포자괴'라는 것으로, 대개는 떨어지는 빗물의 힘을 빌려 찻잔 밖으로 튀어나오게 된다.

포자괴 속에는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포자들이 수두룩히 들어있다가 포자괴가 터지면서 포자는 대지로 파종 되는 것이다.

▲ 찻잔버섯 노균
ⓒ 고평열
포자괴가 다 튕겨져나가 껍질만 남은 빈 찻잔버섯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는 무엇을 위해 이 땅에 와서 무슨 일을 하고 이제 자연으로 돌아가느뇨. 먼지버섯 속에서 어머니의 영상을 보았듯이 찻잔버섯의 빈 껍질 속에서 내가 서 있는 내 자리를 본다.

▲ 찻잔버섯 황색형
ⓒ 고평열
대학을 졸업한 딸이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독립을 하겠다고 한다. 이제 엄마를 떠나 자신의 삶의 무게를 스스로 지고 살겠다고 한다. 찻잔버섯처럼 가슴에 품어 키운, 작은 생명의 씨앗인 줄만 알았더니 이제 놓아 보낼 때가 어느새 된 것이다. 대견함보다 서운함이 훨씬 크다.

▲ 찻잔버섯 황색형2
ⓒ 고평열
그래 딸아. 가거라. 뒤돌아보지 말고 가거라. 늙어갈 육신이 비록 쇠약해질 일만 남았지만, 딸이 스스로 설 수 있게 도와야 하는 어미의 마음은 누구보다도 강해야 함을 안다. 용기있는 어미가 심지 굳은 딸을 키워 낸다는 걸, 딸이었던 내가 내 딸을 독립시킬 때가 되고 보니 알겠구나.

독립의 의지가 생겼음을 축하해주며 기쁜 표정으로 보낼 수 있는 어미는 어지간한 용기로는 할 수 없는 일임을 이제 알겠구나.

▲ 주름찻잔버섯
ⓒ 고평열
딸을 품안에서 놓아 보내기는 안타깝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지에 봄비가 내려 습기가 충만했듯이 내 딸은 이미 독립해도 충분할 만큼 야무지게 성장해 있음을 엄마가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해 홀로서기를 하려면 어려움도 많을 것이다.

때때로 외로워질 것이고, 때때로 몸과 마음이 상처입기도 할 것이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사뭇 가슴 떨리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 주름찻잔버섯2
ⓒ 고평열
작년 봄에 떠나갔던 철새들이 지난겨울 다시 이 습지를 가득 메우며 돌아왔듯이, 지금 떠나가는 새들도 올겨울 다시 찾아들 것임이 틀림없으리라. 혹한을 피해 철새들이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듯이, 삶이 힘들고 괴로울 때 언제든지 날아들어 깃들 수 있는 엄마의 품이 네 안식처로 항상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 새둥지버섯
ⓒ 고평열
내 딸아. 이제 비단옷을 아끼지 말고 꽃다운 젊은 날을 더 아끼며 살아야 하느니…. 사그라져 갈 어미의 좁은 어깨나마 딛고 너는 이 시대의 새로운 주역으로 올라서서 자리매김하거라. 네 날개를 활짝 펴서 이제 네 힘으로 날아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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