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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글고 있는 나락-벼 이삭
ⓒ 김규환
나는 사람을 닥치는 대로 사귀는 편이다. 지역도 문제가 아니다. 생김새도 가리지 않는다. 말만 통한다면 나이 차이도 쉽게 극복한다. 거리낌 없이 마음을 열고 대화하면 쉬 친해지니 이 얼마나 좋은가.

각양각색, 경향각지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을 백과사전을 뒤적이는 일에 비길까. 내가 못한 경험을 책에서 얻는 것보다 직접 듣는 재미와 이득은 더 크다. 뿐만 아니라 매번 새록새록 흥미롭다. 허전한 마음의 곳간을 채우듯 부자가 된 느낌이다.

내가 아는 경상도 몇몇 친구들은 '올해'를 '올개'로 발음한다. '쌀'을 '살'로 소리내는 것보다는 알아듣기 쉬워 고맙다고 할 때가 더러 있었다.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가 하면 다 곡절이 있다. 마침 추석도 쇠고 했으니 오늘은 '올개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올벼쌀'이나 '올해 난 햅쌀'쯤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그리 간단하지 않다. 우리네 풍속과 뗄 수 없는 풍습에 관련되어 있으니 잠시 30년 전으로 가보자.

내가 어릴 적 그 해는 여느 때보다 이르게 한가위 추석이 들었다. 쌀독에 바닥이 드러난 건 오래 된지라 조상님 뵙기가 겁이 나니 어머니 한숨은 길기만 했다. 양력으로 10월 이전에 추석이 돌아오면 햇과일, 햇곡식은 물론 돈이 될 만한 곡식이 없어 더욱 힘들다. 봄날 보리가 익기 전이 춘궁기로서 가장 힘든 철이지만, 그에 못지 않은 어려운 시기가 2차 춘궁기로 불렸던 가을 벼가 익기 직전이다.

송편이란 걸 모르고 살던 그 때 그곳 사람들은 어떻게든 차례상에 차릴 음식을 마련해야 했으나 맘 같이 돈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삼베를 내다 팔면 다행이었으나, 그 때까지 남아 있을 리 만무하다. 가을누에고치를 내다 팔면 다행이련만….

▲ 벼 알맹이만 훑어냅니다.
ⓒ 김규환
하루하루 대목장은 다가오니 차라리 명절이 한 해에 한 번만 있기를 바라던 어머니, 아버지도 많았다. 제삿날 하루를 위해 석 달을 굶는다는 속담이 먼 옛일만은 아니었다. '올개심니'로 얼버무려진 그 이면엔 우리 부모님 세대의 고난이 배어있다.

옆집에 돈을 빌려 간신히 곶감에 건어물, 꼬막, 전어 그리고 병어 몇 마리 장만하더라도, 남부지방은 벼가 익어 탈곡을 하기까지 최소 스무날은 더 기다려야 했다. 일이 늦어지면 눈 올 때 탈곡을 하는 풍경을 쉽게 접하곤 했다.

미리 술을 담가 놓고 식혜와 조청을 고고 유과를 만들었다. 아이들 몰래 숨겨둔 쌀 몇 되를 퍼서 추석 전날 안반에서 떡을 하니, 아이들이 부모를 신으로 생각할 만큼 어렵고 소중하게 여겼던 차례 준비였다.

일찍 모내기를 하고 조생종 중심이었던 중부지방과는 달랐다. 영남 쪽도 형편은 말이 아니었으나 논농사 중심이었던 호남 쪽은 소출을 최대로 하기 위해 중생종이나 만생종을 심었다. 문제는 거기서 불거졌다. 햅쌀밥을 올려야 하는데 이제 막 고개를 숙이고 누렇게 변해가는 벼가 어떤 곳은 뜨물이 픽픽 빠져 나오니 이를 어쩔 건가. 그렇다고 묵은 쌀로 올릴 수도 없다. 추수감사절에 어찌 차례상에 그걸 올린단 말인가.

▲ 이걸 따서 껍질을 버리고 씹는 일도 많았지요.
ⓒ 김규환
어머니는 추석 전날 하던 일을 멈추고 하늬바람이 살랑이는 신작로를 따라 부산히 논으로 달려가셨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엄마, 엄마!" 불렀다. "핑 댕겨올텡께 집에 있거라" 잠시도 옆에서 떨어지기 싫던 나는 "한꾼에 가잔께요"하며 마구 달려가서 몸빼바지를 잡고 늘어졌다. 코흘리개 나를 팽개치고 갈 수 없었던지 달고는 갔지만 어머니 발걸음은 빨라 바람을 일으킬 지경이었다.

"엄마, 소쿠리 들고 뭣하러 가시요?"
"올개심니 할라고 근다."
"그거시 뭐시다요?"
"조상님께 우리 돌봐줘서 고맙다고 올해 난 쌀을 상에 올리는 것이여."
"엄니 글면 낫을 들고 가야제 왜 소쿠리만 갖고 간다요?"
"몇 줌만 훑으면 됭께 글제."

달음질을 하여 논에 도착했다. 안쪽과는 달리 바깥 논두렁 쪽은 깜부기 투성이였지만 이삭이 훨씬 크고 탐스러웠다. 도착하자마자 어머니는 누렇게 익어가는 벼를 쭉쭉 훑었다. 어머니는 두꺼운 손톱으로 벌써 열댓 개를 넘기고 있었지만 나는 재그랍다 못해 손끝에 박히듯 억세어 한두 개를 잡고 씨름하고 있었다.

"엄마 손가락이 패일 것 같으요."
"글면 이삭 모가지를 뽑그라."
"알았어라우."

어머니가 알갱이를 따고 지나간 뒤를 따라 한 걸음 뒤에 붙어서 꼿꼿이 서 있는 벼 모가지를 뽑았다. 가지런히 하느라 더디기만 했다. 한 되쯤 되었을까 어머니께서는 나락 따기를 멈추고 내 쪽을 향해 오시면서 나락 모가지를 서둘러 마저 뽑으시더니 집으로 가자고 하셨다. 내 손엔 빗자루 하나가 들려 있으니 칼싸움거리로 안성맞춤이었다.

집으로 오신 어머니는 솥에 물을 붓고 벼를 쪘다. 찐 벼를 키에 펴서 넌다. 서너 시간쯤 지났을까 다른 일을 하시다가 적당히 마르자 절구통에 넣고 절구질을 해대니 약간은 푸르스름하며 누런 현미 쌀이 알알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엄마 한 줌 묵어도 되끄라우?"하며 겨와 쌀이 뒤섞인 한줌을 "후후" 불며 까불어 '올개쌀'을 툭 털어 넣었다. 쌉싸름하면서도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몰캉몰캉한 쌀을 씹는 즐거움에 빠졌다.

곧 어머니는 쌀 두어 줌을 챙기고 가져온 벼 이삭을 가지런히 묶어 문지방에 거셨다. 두 손 모아 빌었다. 자식들 잘 되라고 그러셨겠지.

'올개심니'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송편과는 인연이 없던 남부지방 대부분은 차례상에 묵은 쌀과 '올개쌀'을 섞어 메를 지어 올리는 걸로 대신했다.

푸른 밥, 올벼쌀로 만든 쌀밥을 모처럼 먹었다. 입안에 풋풋한 향기가 가득 퍼졌다. 다음날부터 며칠간 나는 남은 '올개쌀'을 주머니에 넣고 한 줌씩 털어 넣어 씹는 재미로 살았다.

▲ 올개쌀은 벼 껍질째 찐 쌀입니다.
ⓒ 김규환
지방에 따라 이 전통을 '올개심니' 혹은 '올게심니'라 하고 '올개쌀', '올게쌀'이라 한다. 이르게 익은 조생종(早生種) 올해에 난 쌀을 '올개쌀'이라 하면 답일까? '오려'는 요즘 말로 바꾸면 '올벼'다. '파시'라 부르는 '오려감'이 이른 철에 나는 감이라는 것을 알기는 어렵지 않은 것처럼 '올개쌀'도 그쯤으로 알아두면 좋을 듯하다.

어느 정도 여문 벼를 훑어다가 솥에 쪄서 말린 다음 그것을 찧어 메를 짓는 데 보태게 되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이것을 '올래심리', '올베심리'라 하든 이렇게 만든 쌀을 '올개쌀', 혹은 '올베쌀'이라 하든 자꾸만 잊혀져 가는 전통에 아쉬움이 남는다. 정성 하나는 끝내줬던 그 시절의 추석이다. 이젠 그 맛이 날지 모르지만 수수라도 푹 삶아 먹어보련다.

▲ 수수라도 삶아 먹어봐야겠습니다. 지금이 조금 덜 익은 수수 쪄먹는 때입니다.
ⓒ 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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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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