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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어떤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고 계십니까? 면이나 모가 적당히 배합된 옷감, 아니면 나일론이나 기능성 소재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습니까?

산업이 발달하면서 옷감소재도 무척 다양해졌습니다. 때가 덜타고 구겨지지 않는 옷감이 등장했는가 하면 작은 건전지 하나면 한겨울에도 열이 펄펄 나고 칼로 찔러도 찢어지지 않는 그런 옷감으로 만든 옷도 등장했습니다. 얼마 전 어떤 나라에선 입기만 하면 투명인간이 되는 투명망토까지 개발되었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 발달된 기술은 누에고치에도 접목되었습니다. 하얗고 뽀얗기만 했던 누에고치도 이젠 컬러시대가 되었습니다. 인위적으로 물을 들인 게 아니고 막 잠을 자고 난 누에에게 어떤 처리를 하면 이렇게 노란 고치를 짓는다고 합니다.
ⓒ 임윤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옷감 중에서 제일 보드라운 촉감으로 가슴에 다가오는 옷감을 꼽으라고 하면 어떤 옷감을 꼽겠습니까? 아니, 지금 제일 입고 싶은 옷감을 말하라고 하면 어떤 옷감을 이야기하실 겁니까? 저에게 누군가가 그런 옷감을 꼽으라고 하면 전 비단을 꼽겠습니다.

▲ 개미처럼 작지만 이미 한잠을 자고 난 누에입니다. 아직은 허물을 벗지 못해 거무튀튀하지만 1령이란 누에 나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 임윤수
비단이 어떤 옷감입니까? 옛날에는 임금님이 내려주던 귀중한 하사품이었고 혼수나 예물로 등장하던 고급 옷감 중 으뜸이었습니다. 그런 비단을 누에가 만든 고치에서 얻는다는 건 대부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런 비단 재료가 되는 누에치기를 요즘엔 좀체 보기가 어렵습니다. 누에는 그런 고급 옷감인 비단도 제공해 주지만 맛난 간식거리인 번데기의 전신이기도 합니다.

▲ 두 잠을 자고 난 2령의 누에입니다. 제법 누에 티가 납니다.
ⓒ 임윤수
제가 어렸을 때 시골에서 목돈을 만지는 날 중 하루가 바로 누에고치를 바치는 날이었습니다. 그때는 공판이라는 말보다는 '바친다'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누에는 춘잠과 추잠 즉, 봄과 가을 두 번에 나누어 쳤습니다. 누에씨를 가져와 온도와 습도가 잘 맞는 방에서 부화를 시킵니다. 처음엔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누에지만 며칠 간격으로 눈에 띄게 그 몸집이 커집니다.

▲ 석 잠을 자고 나니 누에가 웃자라있습니다. 여기실린 누에 사진들은 같은 조건으로 찍은 것들입니다.
ⓒ 임윤수
누에는 가느다란 싸리나무나 대나무로 얽어 만든 잠박(蠶箔)이라고 하는 곳에서 뽕을 먹으며 자랍니다. 아기누에 때는 뽕도 연한 것만을 따다 잘게 썰어서 줍니다. 누에의 몸집이 커지면서 잠박 수가 점점 늘어나면 나무를 엮어 칸칸이 층을 이루고 있는 누에 방은 겨우 사람 하나 다닐 공간만 남게 됩니다. 그럴 즈음 누에 방에 들어가면 누에들이 뽕잎 갉아먹는 소리가 소나기 소리처럼 들립니다.

더우면 문을 열어 통풍으로 온도를 낮춰 줘야 하고 비라도 내려 기온이 떨어지면 군불을 때 방을 따뜻하게 해 주어야 했습니다. 매일 신선한 뽕잎을 마련해 주어야 하는 누에는 집안의 희망이며 애물단지였습니다. 목돈을 만지게 해 줄 거라는 희망의 대상이었지만 자칫 병이 들면 걱정거리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 넉 잠에서 깨어난 누에들입니다. 어느 놈은 아직도 잠을 자고 있는지 머리를 고추세우고 있습니다.
ⓒ 임윤수
주변 환경에 민감한 누에는 매사를 조심하게 했습니다. 근처에서 농약이라도 친 걸 모르고 뽕을 따 먹이면 누에농사를 망치기 일쑤였습니다. 하다못해 소 외양간이나 돼지우리의 두엄을 치우는 것도 조심해야 할 정도로 까다로운 농작물(?)이 바로 누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물이라 부정을 탄다고 말도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특히 쇠파리는 누에치기에서 경계대상 1호였습니다. 쇠파리 한 마리가 누에 방에 날아들면 엄청난 누에를 버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 막 잠을 자고 난 5령의 누에들입니다. 몸이 말갛게 변하기 시작하면 고치를 지을 수 있는 섶으로 옮겨 줍니다.
ⓒ 임윤수
알에서 부화된 누에는 며칠 간격으로 먹는 걸 멈추고 잠을 잤습니다. 사람들과는 달리 움직이지 않고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으면 그게 잠을 자는 거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고개 세우고 잠을 자고 나면 누에의 몸집은 웃자랐고 색깔도 달라져 있습니다. 그렇게 한 숨 자고 나면 누에는 한 살을 더 먹어 령(齡) 수를 더해갑니다.

▲ 종이로 만들어진 섶에 누에들이 하나씩 들어가 고치를 지었습니다. 사진 위쪽에 검은색을 띤 고치는 누에가 번데기로 변하는 과정에서 죽었거나 썩은 상태일 겁니다.
ⓒ 임윤수
그렇게 잠을 5번 자고 나면 누에들은 고치라고 하는 집을 짓기 시작합니다. 누에의 몸집이 말갛게 변하기 시작하면 미리 마련한 섶에 누에를 골고루 올려 놉니다. 그런 다음 며칠 후 누에 방문을 열어보면 옥구슬같이 뽀얗고 하얀 고치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가끔 집짓기에 실패한 누에들이 시커먼 주검으로 바닥에 떨어져 있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누에농사를 지을 때 이런저런 심부름을 하던 것도 성가시고 귀찮은 일이었지만 제일 겁나는 건 살아 있는 누에를 먹이려 했던 어른들의 극성(?)이었습니다. 산 누에를 먹으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속설 때문에 매년 누에가 익어 갈 즈음이면 홍역 아닌 홍역을 겪어야 했습니다.

▲ 예전엔 사진에서 보듯 소나무 등에 누에를 올려 고치를 짓도록 하였습니다. 노랑고치, 하얀고치가 같이 달려있습니다.
ⓒ 임윤수
누에를 바치는 날이면 그동안 심부름을 한 대가로 옷을 얻어 입거나 새 신발을 얻어 신기도 했습니다. 물론 평소에 먹기 힘들던 눈깔사탕이나 고깃국도 먹을 수 있는, 하루만이라도 부자가 된 듯한 그런 날이었습니다.

지금은 보기조차 힘든 누에와 고치를 보니 어렸을 때 집안 풍경이 그려집니다. 나중에야 그렇게 마련한 돈으로 자식들 학교 보내고 누이들 시집갈 때 농 값이 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때 당시 목돈을 마련해 주고 자식들 출세시키는 대학 공부를 가능케 하였던 소와 담배 그리고 누에치던 어른들의 모습이 번갈아 교체됩니다.

▲ 요즘엔 이렇게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섶도 있는 모양입니다. 고치를 뜯어낸 섶은 다음 연도에 다시 활용될 겁니다.
ⓒ 임윤수
시대의 화두처럼 떠오른 단어 중 하나가 웰빙입니다. 값비싼 옷과 맛난 음식도 좋지만 비단처럼 고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게 진정 고품질 웰빙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사진 속 누에가 만든 고추에서 뽑아내고 자아 낸 옷감이 삶과 생각에 비단 옷 한 벌 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지금은 보기 어려운 농촌 풍경 중 하나가 되어버린 누에치기지만 거칠어진 마음을 조금은 비단결처럼 부드럽게 해 주는 듯합니다.

발달한 기술 덕분에 오직 하얗기만 할 줄 알았던 고치도 노란색으로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컬러시대에 걸맞은 천연소재 최고급 비단이 될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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