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애니메이션 영역에서 일본의 위상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미국에 디즈니가 있다면, 일본에는 지브리 스튜디오가 있다. 경제 규모로 보면 지브리는 디즈니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브리 작품이 남긴 문화적 유산은 디즈니에 밀리지 않는다. 디즈니가 환상과 동심의 세계를 쌓아올렸다면 지브리는 '원령공주'(1997),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과 같은 작품으로 관객에게 깊은 성찰을 요구했다.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둔 영화, 드라마, 게임은 지금도 전 세계 곳곳에서 제작되고 있다. 일본 만화가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은 일일이 헤아리기 어렵다. 일본이라는 만화왕국은 1946년 개국했다. 그 전에도 일본에 만화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1946년이 만화왕국의 원년인 이유는 분명하다. '만화의 신' 데즈카 오사무가 데뷔한 해이기 때문이다.
1952년 일본에 또 다른 '리틀 보이'가 등장했다. 이번엔 정말로 소년의 모습을 한 로봇이었다. 이 소년은 히로시마에 떨어진 '리틀 보이'처럼 원자력을 동력 삼아 움직였다. 막강한 힘을 가진 소년은 하늘과 우주를 훨훨 날았다. 지구에 위험이 닥칠 때마다 인간을 위해 싸웠다. 어린이들은 이 소년을 친구처럼 여겼다. 어른들은 최첨단 과학으로 무장한 소년에게서 일본이 나아가야 할 미래를 봤다. 소년의 이름은 아톰(Atom)이다.
데즈카는 1928년 오사카 인근 도시에서 태어났다. 같은 해 미국에서는 미키마우스가 탄생했다. 허약했던 데즈카는 또래에게 괴롭힘 당하는 소년이었다. 그는 학교보다 집을 좋아했다. 집에는 당시엔 귀한 물건인 영사기가 있었다. 데즈카는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찰리 채플린 영화를 보며 미국 대중문화 세례를 받는다. 디즈니 작품에 반한 데즈카는 만화가라는 꿈을 꾼다. 훗날, 데즈카는 아톰을 창조할 때 미키마우스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데즈카가 데뷔하기 전 일본에서 만화는 유해한 문화일 뿐이었다. 군국주의에 물든 나라에서 한가하게 만화 따위를 그리는 학생은 체벌 대상이었다. 데즈카는 남몰래 그림을 그리며 꿈을 키워야했다. 식민지를 늘려가던 일본은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기세등등한 나머지 1941년 선전포고 없이 미국을 공격했다. 미국은 즉각 일본 본토에 폭격기를 보내 보복했다. 만화가가 되고 싶었던 중학생 데즈카도 군수물품 공장에 강제 동원됐다. 그 기간 데즈카는 폭격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비극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죽음을 걱정해야 하는 일상은 1945년 8월 15일 막을 내렸다. 원자폭탄 위력에 놀란 일본은 항복을 선언한다. 데즈카는 이날을 자신의 만화가 시작된 날로 정했다. 1946년 데즈카는 '마아짱의 일기'라는 만화로 데뷔한다. 이 작품은 "만화의 세계에도 평화가 찾아왔습니다"라는 작가의 인사말로 시작한다.
아톰의 이름은 당연히 '원자(Atom)'에서 따왔다. 일본인들은 원자력을 자유자재로 이용하는 아톰을 반겼다. 어떻게 자신의 나라를 할퀸 살상무기 이름을 가진 로봇에게 열광할 수 있었을까. 일본은 아시아 국가 중 서양문명을 가장 빨리,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성장한 나라다. 그들에게 원자라는 초월적인 힘은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 따라잡아야 할 도전과제였다. 그런 상황에서 등장한 아톰은 과학강국을 꿈꾸는 일본인들에게 희망의 아이콘으로 소비됐다.
하지만 데즈카는 맹목적으로 아톰을 찬양하는 세상을 보며 우울해했다. 그가 아톰을 통해 전하려 했던 메시지는 따로 있었다. 데즈카는 "과학과 개발의 폭주를 경계하기 위해 만든 캐릭터인 아톰이 도리어 과학의 총아로 떠받들어지는 상황이 슬프다"고 말했다. 인간의 마음을 가진 로봇 아톰은 종종 슬픔에 잠긴다. 아톰은 인간을 위해 싸우지만, 로봇이기에 영원한 이방인이다. 아톰에겐 '나는 무엇인가'라는 고민이 따라다녔다. 데즈카는 아톰의 쓸쓸한 뒷모습을 통해서 과학이라는 진보 뒤에 드리울 수밖에 없는 그림자를 보여주려 했다.
오늘날 애니메이터로서의 데즈카는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다. 데즈카는 인기 만화책이 애니메이션이라는 2차 창작물로 이어지는 일본 산업구조를 만들었다. 덕분에 일본 애니의 폭발적인 성장을 이끌었다는 공을 인정받는다. 반대로, 데즈카를 애니메이션계 적폐로 보는 시선도 만만치 않다. 지브리 스튜디오 창립자 미야자키 하야오는 데즈카를 두고 "애니메이션 업계를 망친 인물"이라며 혹독한 평가를 내렸다.
2D 애니메이션은 '풀 애니메이션'과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으로 나뉜다. 전자는 1초에 24프레임을 사용해 자연스럽고 디테일한 표현을 가능케 한다. 후자는 1초에 10프레임만을 사용해 캐릭터의 움직임이 투박스럽다. 당연히 제작비는 '풀 애니메이션'이 압도적으로 높다. 방송국은 데즈카에게 편당 50만엔이라는 제작비를 제시했다. 애니메이션 업계는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이라며 즉각 반발했다. 데즈카가 방송국 제안을 거절하길 원했다.
데즈카는 현실보다 꿈을 택했다. '리미티드 기법'을 도입해 저비용으로 아톰을 193회까지 제작했다. 염가 제작 시스템은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 표본이 됐다. 경제 관점에서 보면, 적은 비용으로 최대 효율을 낸 데즈카는 일본이 애니메이션 왕국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애니메이터들의 위상은 급격히 추락했다. 낮은 월급을 받고 격무에 시달리는 열악한 구조가 정착됐다. 몇몇 애니메이터가 과로로 쓰러졌고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데즈카는 후배들의 도전에 뒷걸음질치지 않았다. 20년 넘게 고집했던 화풍을 버리고 '극화' 스타일을 받아들인다. 데즈카는 '블랙잭' '붓다' 등의 걸작을 그리며 제2의 전성기를 맞는다. "데즈카 오사무의 시대는 끝났다"고 외치던 젊은 작가들은 다시 '만화의 신' 앞에서 옷깃을 여며야 했다.
만화를 향한 데즈카의 열정은 아톰의 능력처럼 초월적이었다. 그는 평생 700여 편의 만화를 남겼다. 종이로 따지면 15만장이다. SF, 종교, 정치, 의학, 동성애, 악, 자연 등 이 세상 거의 모든 소재를 만화로 다뤘다. 말년에 건강이 악화돼 혼수상태에 빠진 데즈카가 눈을 뜨자마자 한 말은 이랬다. "제발 부탁이니까 만화를 그리게 해줘."
데즈카는 자신도 셀 수 없을 만큼 방대한 작품을 그렸지만 그 안엔 한 가지 원칙이 있었다. 데즈카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만화를 그릴 때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기본적인 인권이다. 인권만은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전쟁이나 재해의 희생자를 놀리는 것, 특정 직업을 깔보는 것, 민족이나 국민, 대중을 바보로 만드는 것이다."
데즈카의 원칙은 만화 바깥에서도 마땅히 지켜져야 할 가치다. 약자와 소수자를 조롱하는 혐오 표현이 유행어처럼 소비되는 지금 이곳에서 '만화의 신'이 남긴 말은 더욱 되새길 만하다.
[조성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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