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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조선의 씨를 말려라"

배한철 기자
입력 : 
2016-10-28 16: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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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초상.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12]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과 1597년 일어난 정유재란은 완전히 다른 성격의 전쟁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의 명분은 정명가도(征明假道), 즉 명나라를 치려고 하니 조선의 길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임진왜란 당시 우리의 피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곧이어 발생한 정유재란 때의 참상과는 견줄 바가 아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참전으로 크게 고전을 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인의 씨를 말리려는 구상을 하게 된다.  매년 군사를 보내 조선 사람을 모두 죽여 조선반도를 빈 땅을 만든 뒤 자신들의 사람을 옮겨 살게 하겠다며 또다시 우리 땅을 침략한다. 이 전쟁이 바로 정유재란이다. 조선인 몰살이 목표였던 만큼 첫 번째 전쟁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왜군 한 명당 한 되씩 조선 사람의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바치라고 명한 게 바로 이 전쟁이다. 또한 도공 등 조선의 기술자들이 대거 일본으로 끌려간 것도 정유재란 때의 일이다.

 간양록(看羊錄)은 재침한 왜군에 포로로 잡혀간 형조좌랑 강항의 2년9개월 동안의 일본 생활을 기록한 책이다. 강항이 생전에 남긴 문집을 그의 제자들인 1656년(효종7) 묶어 발간하면서 간양록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간양은 양을 친다는 뜻으로 한나라 충신 소무(蘇武)가 유배지에서 쓸모없는 숫양 몇 마리를 키우며 충절을 지켰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책은 적국에서 당하고 목격한 포로들의 참상과 그곳에서 보고 들은 실정을 빠짐없이 적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전란 대비책 등 국내 정책제언까지 낱낱이 언급하고 있다.

 강항은 재침한 왜군을 피해 식솔들을 이끌고 피란하던 도중 왜선에 발각된다. 모두 물에 뛰어드는 과정에서 둘째 형과 자식 2명을 잃는다. 간양록은 "어린 자식 용과 딸 애생이 밀려드는 파도에 '으악, 으악, 칵, 칵' 기막힌 울음소리를 내다가 그만 파도에 삼켜지고 말았다"며 비통해했다. 강항은 체포된 직후 통역을 통해 "왜 죽이지 않느냐"고 물었다. 왜군은 "사모를 쓰고 좋은 옷을 입고 있으므로 관원이라 판단하여 묶어 일본으로 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경계가 아주 엄하다"고 했다.

 포로로 끌려가는 과정은 비참했다. 겨우 8세인 조카가 갈증이 나 짠 바닷물을 들이켰다가 설사를 하자 왜병들이 바다에 던져 버렸다. 조카는 아버지를 외치다 죽어갔다. 전라좌병영 우후(종3품 무관직) 역시 강항처럼 포로로 잡혀 일본으로 끌려갔다. 우후는 병사 몇몇과 함께 배를 마련해 탈출을 기도했다. 왜군이 뒤쫓아왔고 더 이상 도망할 수 없음을 깨닭은 우후는 검으로 자신의 배를 관통시켜 죽었다. 왜군들은 죽은 우후와 그 일행을 데려와 모두 수레에 걸어 찢어 죽였다. 강항도 6번이나 탈출을 시도하다가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그의 학문과 인품을 흠모한 일본 승려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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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일본 무사의 모습.
 강항은 조선 침략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책의 많은 부분을 할애해 강하게 비판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36년생으로 (알려진 바대로) 얼굴이 못생기고 키는 짤막하다고 적고 있다. 그는 날 때부터 손가락이 여섯인 육손이었다. 성장 후 손가락이 여섯 개나 있어서 무엇 하랴 하고는 칼로 하나를 잘라버렸다. 집안이 가난해 머슴살이를 하다가 오다 노부나가 휘하로 들어갔다. 출신은 미천했지만 배포가 커 출세 가도를 달렸다.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 중 한사람이 반란을 일으키자 단신으로 적진에 들어가 태연하게 "항복하면 부귀를 잃지 않도록 보증하겠다"고 항복을 권유했다. 적들이 달려들어 죽이려고 하자 적장은 "나를 위해 계책을 말하러 왔는데 어찌 죽이랴"고 말하고는 살려서 보내줬다. 살아 돌아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시 군사를 이끌고 가 난을 진압했다. 그 뒤 여러 전투에서 승리해 결국 일본 열도를 평정한다.  조선에서 벌인 두 번의 전쟁에서 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마침내 1598년 3월 병들어 7월 17일 죽었다. 후계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대혼란을 우려해 그의 죽음을 비밀에 부쳤고 시체의 배를 갈라 그 속에 소금을 채워 넣고는 시체를 나무통에 앉히고 평시에 입던 관복을 입혀 놓았다. 그 모습이 감쪽같아 장수들도 그가 죽은 줄 알지 못했다. 8월 30일에 가서야 더는 숨길 수 없게 되자 조용히 상을 치렀다. 저자는 조선인을 소금에 절이라고 한 지 한 해도 되기 전에 소금으로 제 놈의 배때기를 절이게 됐다고 했다.

 일본 사람은 키가 작고 힘도 없다. 조선 사람과 씨름을 하면 매번 지는 쪽은 일본 사람이다. 삶을 가볍게 여기고 죽음을 아끼지 않는다고 여기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 정유년(1597) 가을부터 무술년(1598) 초여름까지 왜군이 우리와 싸우면서 군대를 지속적으로 징발했다. 사상자가 대량으로 발생했기 때문이다. 군대에 뽑힌 자들은 모두 울면서 전장으로 떠났으며 그중에는 도망하는 자까지 생겨 어미와 처를 가둬 강제로 입대시키기도 했다. 왜병들은 일본으로 돌아와 "일본 검은 그저 몇 걸음 안에서만 쓸 수 있지만 조선의 화살은 멀리 수백 보 밖까지 미치니 만일 조선이 힘써 싸우기만 했다면 우리가 감히 맞붙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고 책은 전한다.

 또 장인을 천대했던 사대부의 눈에 기술을 중시하는 일본의 풍속 역시 곱게 비칠 리 없었다. 간양록은 호리다 오리베(掘田織部)라는 장인을 소개하면서 그의 재산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견줄 만하다고 했다. 사람들은 꽃을 심거나 다실을 꾸밀 때 반드시 그의 평가를 받고자 하는데 그 대가로 황금 백정을 서슴지 않고 낸다. 숯 담는 깨진 표주박, 물 긷는 목통이라도 호리다 오리베가 귀하다고 평가한 것이라면 다시 값을 논하지 않고 사간다는 것이다. 외국과의 통상에 적극적인 것도 꼴불견으로 생각했다. 강항은 왜놈의 성질이 신기한 것을 좋아해 외교를 훌륭한 일로 여긴다고 했다. 일본 조정은 먼 데서 온 외국 사람을 왜병이 해치기라도 하면 그들과의 길이 끊어질까 하여 반드시 가해자의 삼족을 멸했다. 그리하여 나귀, 노새, 낙타, 코끼리, 공작, 앵무 등이 해마다 끊임없이 들어오며 왜국 시장에는 중국과 남만의 물화가 언제나 널려 있었다고 책은 전한다.

 대마도는 원래 일본보다는 조선과 가까웠다. 여자들은 우리나라 옷을 많이 입으며 남자들은 거의 우리나라 말을 알았다. 그들은 영리한 아이를 골라 조선말을 가르치고 여러 문서의 격식을 가르쳐 능숙하게 했다. 대마도는 땅이 척박해 우리나라에서 쌀을 얻어먹었다. 일본에서 조선까지의 바닷길이 멀고 파도가 사나워 가기 힘들다는 말도 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는 겁을 먹고 오히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붙어 조선 공격의 선봉장이 됐다. 전쟁 후 대마도주의 가신은 강항과 만나기를 청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귀국을 침범할 때 어찌 저희가 막을 수 있었으리까, 일본이 쇠약해지고 귀국이 부강해져서 대군으로 바다를 건너와서 일본을 친다면 이 섬은 또한 어쩔 수 없이 귀국을 따라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대마도에 억류돼 있는 포로들을 되돌려보내겠다는 뜻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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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촬영한 일본 무사집단의 모습.
 책은 또한 다양한 정책적 제언도 잊지 않는다. 그동안 일본의 강성해짐을 간과한 부분을 질타한다. 사실 12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일본은 평온한 나라였다. 법령이 중국, 조선과 다르지 않아 평민들은 자기 밭이 있었고 수령도 주기적으로 교체했으며 과거로 인재를 선발했다. 그러나 막부정치가 시작되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관동장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1147~1199)가 유력 가문들을 멸족시켰으며 일본 전역은 전쟁터로 바뀌었다. 무기의 측면에서도 임진왜란 발발 50년 전 총포와 화약을 가득 실은 남만의 배가 표류해 일본에 닿게 되면서 드디어 총 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임란을 즈음해서는 총의 명수가 온 나라에 널리게 됐다. 반면 조선은 여진족 방어가 급선무였다. 남병사, 북병사를 둬 2품의 높은 봉록으로 대우하며 또한 명망 있는 문관으로 서평사, 북평사를 임명했다. 하지만 호남과 영남 등지의 장수들은 낮게 대우했다. 강항은 100만의 여진이 10만의 왜군을 당하지 못할 터인데 남쪽을 가벼이 여기고 북쪽을 중히 여김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강항(1567~1618) =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으며 조선전기 문장가인 강희맹의 5대손이다. 1593년 별시문과에 병과(3등급 중 3등급)로 급제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남원에서 군량보급에 힘썼으며 남원이 함락된 후 통제사 가족들과 함께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려다가 왜군에 붙잡혔다. 1958년 교토 후시미성으로 끌려가 승려들과 교유하면서 유학을 가르쳤는데 일본 주자학의 선구자가 된 후지와라 세이가(藤原惺窩·1561~1619)가 그의 제자이다. 1600년 수은집(睡隱集), 운제록(雲堤錄), 건거록(巾車錄) 등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배한철 영남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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