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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머리 앤이 하는 말 - 124 (마지막회)

백영옥 기자
입력 : 
2016-05-31 06: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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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머리 앤이 하는 말-124] 앤: 이 전환점을 돌면 어떤 것이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난 그 뒤엔 가장 좋은 것이 있다고 믿고 싶어요!  영화 '토르'로 잘 알려진 영화배우 '톰 히들스턴'은 어느 날 런던의 지하철역 벽에 쓰여 있는 한 문장을 읽는다.

 We all have two lives. The second one starts when we realize that we only have one(누구에게나 두 개의 인생이 주어져 있습니다. 당신의 두 번째 인생은 삶이 한 번뿐이라는 것을 당신이 깨달았을 때 시작됩니다).

 그는 어느 토크쇼에 출연해 이 글이 자신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고 이야기한다. 깨달음은 전봇대 위에도, 지하철 벽에도 있다.

 만약 우리가 인생을 두 번 살 수만 있다면, 우리는 훨씬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누구라도 과거의 후회를 (옳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되돌려놓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두 개의 인생이 주어져 있다!" 런던 지하철역 벽에 현자가 써놓은 이 문장은 그러므로 우리에게 복음인 셈이다. 두 개의 인생이 주어졌다는 이 말은, 이전까지와의 '나'와 결별하고 '다른 나'와 만나는 기회를 잡는 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 출생의 배우 톰 히들스턴은 '토르'로 2013년 MTV 영화제에서 '최고의 악당상'과 '최고의 싸움상'을 동시에 받았다. 하지만 2014년 그는 짐 자무시 감독의 영화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같은 예술영화에도 출연했다. 그 영화에서 그는 사람을 죽이고 세계를 파괴하는 대신 음울한 음악가가 되어 '숨어 사는 쪽'을 선택한다. 누구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 힘을 나쁜 쪽으로 쓰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더 이상 인간을 죽이고 싶어하지 않는 뱀파이어를 연기한 최고의 전직 악당은 새롭게 변신해 사랑을 선택하고 세상에 회개한다.

 나는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을 적어도 10번 이상 보았다. 그사이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10대의 나와 40대의 나는 분명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이기도 하다. 빨강머리 앤이 내게 해준 말에 대한 '해제집'을 쓰겠다고 결심했을 때, 나는 앤에게 아마도 이런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앤, 내가 살아보니 꼭 그런 건 아니야….

 앤의 말이 다 맞는 건 아니었다. 그건 10대의 나와 40대의 내가 같지만 다르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러나 앤의 말은 내게 언제나 '간절히!' 맞는 말이길 바라는 말이다. 이제부터 내가 '앤'에게 들려주고 싶은 가장 간절한 말은 어쩌면 이 두 번의 인생과 깊이 관련 있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얼마나 많은 실수를 저질렀는지 모른다. 사소한 실수들도 있지만 치명적인 실수도 있었다. 만약 그 순간으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니 정확히 말해, 내게 두 번의 삶이 주어진다면, 그 시간으로 돌아가 바꾸거나 돌이키고 싶은 순간들 말이다. 실수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고, 기회를 놓치기도 했으며, 누군가의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기도 했다.

 사람들은 과거는 절대 바꿀 수 없다고,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과거'도 바뀔 수 있다는 걸 이젠 안다. 정확히 말해 과거의 '의미'는 내가 '현재'를 어떻게 살아내느냐에 따라 변한다. 나는 과거가 뒤바뀐 사람들을 줄곧 관찰해 왔다. 성취가 실패로, 상처가 성숙으로, 행운이 불행으로, 분노가 기쁨으로 말이다. 내가 자기 소개란에 줄곧 '작가'란 말 대신 '상처 수집가' '눈빛 탐험가'라고 쓴 이유는 그것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지금 이 순간을 열심히 사는 이유다. 이토록 절망적인 세상에서 발견한 희망인 것이다.

 인생이 딱 한 번뿐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우리의 두 번째 삶이 시작된다. 이것은 '30대가 꼭 해야 할 30가지 일' 혹은 '40대가 되고 나서야 깨닫게 된 40가지'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하는 다섯 가지 가장 큰 후회' 같은 리스트를 읽고 '좋아요'를 누르거나 '공유'하는 삶과 무관하다.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정말 중요한 건 어떤 일을 그냥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읽는 것'이 아니라 '읽고 난 이후'의 행동에 힘을 실어주는 책이길 바란다. 어린 시절 우리와 함께 울고 웃던 '앤'도 아마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사람의 앞길엔 언제나 구부러진 길모퉁이가 있기 마련이군요. 새로운 길모퉁이를 돌았을 때, 그 앞에 무엇이 보일는지, 전 거기에 희망과 포부를 품고 이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나 좁은 듯이 보이는 이 길을 꼬불꼬불 꼬부라지면서 천천히 걸어나가기 시작하자 전 그때 넒은 지평선을 향하여 힘차게 내달리던 시절에 비하여 주변의 아름다움이며 흐뭇한 인정을 맛보는 일이 많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 책을 다 쓰고 난 후, 앤이 내게 해준 가장 큰 위로의 말을 하나 적는다면 이것이다.

 Never too late.

 만약 당신이 인생이 '딱' 한 번뿐이라는 걸 깨달았다면, 다행히 늦지 않았다. AI, 인공지능, 가상현실, 생체기술이 현기증 나게 발달하고 있는 지금, 생각보다 길게 살 것이 분명한 우리 세대엔 어쩌면 삶이 두 번이 아니라 세 번이나 네 번쯤 더 이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때의 내가 또다시 발견한 '앤'의 말에 대한 이야기를 쓸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작가'가 아니라 전혀 다른 일을 하는 사람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이 책을 쓴 나 자신이 가장 먼저 구원받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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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옥 소설가
[백영옥 소설가] <연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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