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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칼럼

[배한철의 역사의 더께/아비규환2] "인도 정복하겠다"도요토미의 허황된 꿈

배한철 기자
입력 : 
2020-02-10 14:43:48
수정 : 
2020-02-10 15: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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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음력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일본군은 단 19일만에 한양 도성을 점령했다. 이를 보고받은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1598)는 스스로의 능력을 과신해 허무맹랑하기 이를 데 없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이른바 '삼국분할계획'이다. 2년 안에 조선과 명나라, 인도를 차례로 복속시키고 3개국에 일본인을 파견해 통치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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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임진왜란 관련 자료를 종합하면, 도요토미는 1593년까지 명나라 정복을 모두 마무리해 조카 도요토미 히데쓰구(1568~1595)를 명나라의 관백으로 삼아 다스리게 하고 조선에도 별도 관백을 두기로 마음을 먹게 된다. 이어, 도요토미 자신은 우선 베이징으로 옮겼다가 인도 정복을 위해 저장성 닝보로 이주한다는 원대하기 이를 데 없는 목표를 세운다. 마지막으로 1594년에는 고요제이(後陽成·재위 1586~1611) 일왕을 베이징에 이주시키고 황태자를 일왕으로 삼는 구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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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도요토미 히데요시 동상. 일본 오사카시 호코쿠 신사 소재.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는 조선과 중국은 물론 멀리 인도까지 정복하려는 허황된 꿈을 꿨다.
당시 일본의 경제력과 국력을 감안했을 때 이쯤되면 거의 과대망상에 가까운 허황된 꿈이다. 중일전쟁에서 악전고투하는 상황에서 또다시 세계 최강의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 제국주의 군부의 맹목적 낙관주의는 도요토미가 원조였던 게 분명하다. 충무공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의 활약, 전라도와 경상도 의병의 봉기, 명나라 원병의 참전 등으로 전세가 뒤집히게 되자 도요토미는 이룰 수 없는 꿈을 접어야만 했다. 대신, 보다 실리적인 전략을 모색한다. 조선 남부지역으로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일본은 1597년 7월 다시 조선을 침범한다. 9월 5일 모든 전력을 투입한 천안전투에서 조명연합군에 패배하자 곧바로 남쪽으로 물러나 남해안 일대에 18개의 왜성을 구축했다. 왜성은 동쪽으로 울산왜성에서 서쪽으로 순천왜성까지 남해안을 따라 방어선을 형성했던 것이다. 일본의 임진왜란 전문가 나카노 히토시 규슈대 교수는 "정유재란기 일본의 군사행동은 어디까지나 조선반도 남부의 제압, 영토 확보를 목표로 한 것"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동아시아와 인도를 모두 차지하겠다는 헛된 포부가 물거품이 된 이상 정유재란을 통해서는 "4~6세기 야마토왜가 한반도의 임나를 지배했다"는 이른바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 관련 기술을 근거로 자신들의 고토로 인식해오던 한반도 남부를 확보해 실리를 챙기려 했던 것이다. 메이지시대를 전후해 일본 지도층에 팽배했던 정한론(征韓論)도 그 출발점이 이 임나일본부설에 있다. 고대 한반도 남부와 일본이 빈번하게 교류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왜가 별도의 기관을 둬 직접 통치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은 현재 허구라는 게 정설로 굳어져 있다. 2010년 한일 양국 역사학계도 공동 학술대회를 통해 임나일본부의 실체가 입증되지 않는다고 최종적으로 결론 내리고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합의한 바도 있다.

재침에서 일본은 한반도 남부를 자기네 땅으로 만들려는 야심에 그치지 않고 아예 조선인들의 씨를 말려 버리려고 했다.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입은 피해도 적은 것은 아니지만 정유재란 때의 참상과는 견줄 바가 아니었던게 그런 이유다.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다 극적으로 탈출해 돌아온 문신 강항(1567~1618)이 쓴 <간양록>은 "일본은 '매년 군사를 보내 조선 사람을 모두 죽여 조선반도를 빈 땅을 만든 뒤 왜인들을 옮겨 살게 하겠다' 하였다"고 고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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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일본 교토의 이총. 일본은 정유재란 때 한반도 남부를 빈땅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조선인 12만6000여명의 코와 귀를 잘라 가 귀무덤을 만들었다.
조선인 몰살이 목표였던 만큼 전쟁은 살육전이었다. 주로 남쪽지방 백성들이 피해를 입었다. <간양록>은 "도요토미가 왜군 한 명당 한 되씩 조선 사람의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바치라고 명했던 것도, 도공 등 조선의 기술자를 대거 일본으로 끌려간 것도 정유재란 때의 일"이라면서 분노했다. 일본 교토에는 정유재란 때 12만 6000여 명의 조선인 코와 귀를 잘라 가 매장한 이총(耳塚)이 지금도 남아있다. 전례없는 참화 속에서도 조선의 지배자들은 여전히 당파싸움에 여념이 없었다. 경산도 함양 의병이었던 정경운의 <고대일록>은 "온 나라의 백성들이 곧바로 죽지 못함을 한탄하고 있건만 어가를 따르고 있는 무리들은 위기 극복을 위해 힘을 합치기는 커녕 정적을 제거할 궁리만 하고 있으니 슬픈 일이로다. 썩은 나무가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걸어 다니는 시체가 권력을 쥐고 있으니 나라의 불행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구나"라며 분노했다. 진작에 죽어 없어져야 할 임금과 썩어 빠진 관료들이 불쌍한 백성들의 불행은 아랑 곳 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잇속과 명분 챙기기는 데만 급급하다고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에 제일 적대적인 일본인들은 한반도 출신의 후손들이다. 일본 서북부 지방에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했다. 도래인들은 백제계를 중심으로 신라계, 고구려계 등 다양하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역사적으로 조상의 땅을 공격하고 그땅의 후손들을 죽이는 데 선봉의 역할을 맡았다. 각종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모리 데루모토(1553~1625)가 바로 그런 류의 사람이다. 실학의 선구자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은 여러 책을 인용해 "임정태자(臨政太子·성왕의 아들 임성)가 백제 멸망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주방주(周防州·규슈 후쿠오카)를 도읍으로 하고 '오우치노도노(大內殿)'라고 칭하였다"고 기술한다. <지봉유설>에 의하면, 그로부터 47대가 지나 임정태자의 대가 끊어지자 가신이었던 모리가문이 영지를 물려받았다. 모리 가문은 임정태자 가문의 가신이었던 만큼 역시 백제계나 그 후손이었을 것이다. 모리 가문의 후손 모리 데루모토는 조선전쟁에 왜군의 핵심 장수로 참여해 진주성 전투, 울산성 전투 등 주요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다. <지봉유설>은 "모리 데루모토의 풍속은 다른 왜인들과 달리 너그럽고 느려서 우리나라 사람의 기상이 있다고들 한다"고 했다. 임진왜란은 중세 동아시아 최대 전쟁으로 치러졌다. 조선, 일본, 중국 등 세 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다양한 인종이 참전한 세계대전이었던 것이다. <지봉유설>에 따르면, 명나라 육군 제독 유정(?~1619)의 군대는 다국적군으로 구성됐다. 그의 군사 중에는 흑인도 포함돼 있었던 모양이다. 다음은 <지봉유설>의 내용이다. "남번(南蕃)출신의 '해귀(海鬼)'로 묘사하는데, 해귀의 낯빛은 매우 검어서 옻칠을 한 것 같았으며 얼굴은 귀신 모습이었다. 형상과 체구가 커서 거의 두 길이나 되어서 말을 타거나 수레를 타고 다닐 수 없었다고 한다." 해귀가 말을 탈 수 없을 만큼 덩치가 컸다면 아프리카계가 아니었을까. 동아시아에서 벌어진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국제전이었던 한국전쟁 때 전세계가 식량 등을 지원했듯 임진왜란 시기에도 중국이 아닌 제3국에서 조선에 원조물자를 보내주었다. <고대일록>은 "여국(女國) 사람들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군량 일천 섬을 명나라에게 바쳤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도착했다"며 "아! 뜻밖의 일이다"라고 감격스러워했다. 여국은 필리핀으로 짐작될 뿐 구체적인 지역을 알기 힘들다. [배한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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