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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고 조립 못하면 루저?"…38년간 레고로 놀며 `꿈의 자격증` 딴 건축설계사 [인터뷰]

방영덕,유서현 기자
입력 : 
2021-12-17 13:46:15
수정 : 
2021-12-17 14:4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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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고 공인작가(LCP) 이재원씨
전 세계 단 21명 중 한 명

집콕에 지친 부모들에게
레고 놀이팁 전수하기도
사진설명
전세계 단 21명 뿐인 레고 공인작가(LCP)에 이름을 올린 이재원씨
어린 자녀에게 레고를 사주는 부모의 마음엔 몇가지 바람이 담겨 있다. '유튜브나 게임만 즐기기보다 직접 뭘 만들어봤으면', '집중력 좀 키웠으면', '창의력을 길렀으면'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다 포장지를 푼 지 10분이 채 안돼 아이가 '엄마(아빠) 도와줘'라고 외치면 한숨 푹푹. "이것도 혼자 못해?" 한마디를 쏘아붙인다.

부모들의 이같은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레고 조립을 못하면 루저(loser)인가요?"라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가 있다. 이재원(42·사진) 삼우종합건축사무소의 건축설계사다.

"레고를 가지고 놀아본 아이들이 더 잘 노는 것일 뿐이에요. 무엇을 만들었든 칭찬해주고, 공감해 주세요."

육아나 교육 전문가는 아니지만 12살 딸과 여전히 레고로 함께 논다는 그의 말에 왠지 귀가 더 쫑긋해진다.

본업은 건축설계사, 그것도 국내에서 가장 큰 건축사무소에서 일한다. 어렸을 때부터 취미로 레고창작 활동을 한 덕분에 3년전 레고 공인작가(LCP·LEGO Certified Professional)가 됐다. 이후 더욱 바쁜 삶을 살고 있는 이씨를 만나 얘기를 나눠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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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고 공인작가는 덴마크 레고 본사에서 인정한 레고 창착 활동가를 의미한다. 이씨의 경우 레고 측에서 먼저 제의가 들어와 2년간의 엔트리 프로그램(수습, Entry Program)을 거쳐 공인 작가가 됐다. 전세계에 딱 21명만 이같은 자격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두번째로 이씨가 LCP 자격을 획득했다. 의사, 변호사, 첼로리스트 등 본업을 가진 채 LCP로 활약하는 다른 나라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늘 시간에 쫓긴다.

"많이 바쁠 때는 하루 2~3시간 밖에 못 자는 날도 많아요. 본업에 지장을 주면 안되니까요. 잠 잘 시간을 줄여서 하는 일이 레고 작가로서의 일이라 힘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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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원 작가와 그의 딸 보원양이 함께 만든 레고 마스크
레고로 어렸을 때부터 딸과 소통하며 놀았다는 그는 최근 그런 노하우를 담아 유튜브 영상을 찍고 있다. 코로나로 '집콕'에 지친 부모에게 아이와 레고로 놀 수 있는 팁이 주된 내용이다. 작품 활동도 꾸준히 하며 전시회를 개최한다. 어린이 레고 창작 수업을 온라인으로 하고 있는데 접수 시작과 동시에 마감되는 스타 강사다. 물론 본업인 건축 설계사로서의 업무를 우선 마치고 나서 하는 일들이다. 레고 마니아들 사이 꿈의 자격증으로 불리는 LCP를 딴 그는 스스로 운이 좋았다고 했다. 80년대 초반 당시 무역업을 하셨던 할아버지와 아버지 덕분에 국내에 들어오지 않았던 레고 모델까지 얻어 일찌감치 레고로 놀 수 있던 게 한 가지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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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원 작가가 코로나 의료진 응원을 위해 만든 레고 작품
그냥 노는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의 관심과 격려 속에서 놀았던 것이 또 다른 행운이라고 그는 꼽았다. "제가 만든 레고 성을 보고 아버지께서 유럽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아버지가 역사를 전공하셨거든요. 레고가 아버지에게 재밌는 얘기를 듣는 소재였다고 할까요. 어머니께선 제가 매뉴얼대로 모형을 만들면 과감히 부수는데 일가견이 있으셨죠. 다시 만들면 된다고 하시며 보자기에 섞은 후 주셨어요(웃음). 그래서 제가 새로운 것을 만들고 나면 그게 무엇이 됐든, 절대 이상하다고 핀잔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집에 놀러오신 손님들 앞에서 '얘가 이런 재주가 있네요'라며 칭찬을 크게 해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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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원 작가가 만든 매트릭스
건축설계사란 현재 직업도 레고 작품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공통점이 많아서다. 가령 건축물 설계나 디자인을 할 때 레퍼런스 이미지를 찾고, 스케치 하는 일이 레고 작품의 기획 작업과 비슷하다. 그는 레고 작품을 만들 때 이같은 기획 작업에만 한 달 가까이를 쓴다. 건축 설계나 레고는 각각의 로직(logic)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그 로직만 잘 찾아 지키면 아무리 어려운 작품이라도 1~2주 안에 뚝딱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로직 얘기가 나온 김에 물어봤다. 혹시 규격화 된 레고 매뉴얼이 레고만의 창의성을 오히려 저해하는 것은 아닐지,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아이들이 레고 매뉴얼에 갇혀 획일적인 장난감을 만드는 것일 뿐이란 주장이 일각에서 나오고 있어서다. 매뉴얼대로 레고 조립을 완성하지 못하면 루저가 된 듯한 좌절감만 레고가 안길 뿐이란 주장마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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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원 작가가 만든 후크선장 작품
이씨는 반박했다. "레고가 무척 자유로워 보이지만 시스템 안에서 룰이 분명히 존재해요. 그에 대한 탄탄한 이해가 바탕이 될 때 창작이 가능한 것이죠. 따라서 그 룰에 익숙해지려면 매뉴얼을 가지고 만들어보는 과정이 꼭 필요합니다." 레고 매뉴얼대로 꼭 만들지 못했더라도 아이 스스로가 루저라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놀아본 아이들이 잘 논다고, 처음부터 디테일하게 만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일단 많이 (레고놀이를) 해보고 편하게 놀아본 아이들이 그 익숙함을 바탕으로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워낼 수 있는 것이죠."

이씨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의 작품을 대하는 부모의 태도'라고 강조했다. 아이들이 레고로 무엇을 만들든 칭찬해 주고 부모님들이 관심을 많이 가져야 한다는 것. 이씨는 부모님께 받은 그와 같은 관심과 사랑을 이제 딸 보원양에게 고스란히 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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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원 작가가 만든 삼국지 영웅들 작품
이씨는 레고를 이용해 아트 피규어를 만드는 데 관심이 높다. 지금까지 가장 많이 공을 들였던 작품으로는 '삼국지 영웅들'을 꼽았다. 유비, 장비, 관우 등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을 실감나게 구현했다. 100% 레고 블록을 통해서다. 이씨는 개인적으로 말의 생동감 있는 근육 처럼 동물의 세세한 특징을 잡아서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영화 '기생충'을 보고 감명을 받아 영화에 등장한 집을 레고로 만들었다. 해당 작품을 봉준호 감독에게 선물로 전하고 싶다고 한 방송에서 말한 뒤 봉 감독의 아들을 직접 만나 작품을 전하기도 했다. 그것이 계기가 돼 봉 감독과 통화를 하고 사인도 받았다는 그는 "팬으로서 굉장히 감사하고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며 해맑게 웃었다.

SNS를 통해 세계 곳곳의 레고 마니아들과 소통하는 그는 '핵인싸'이자 '레고 멘토'로 통한다. 최근에는 레고그룹이 창립 이후 90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인 여성 디자이너 유미나씨를 발탁한 가운데 유씨에게 인생 선배로서 이런저런 조언을 해 줬다.

"인스타로 연락이 왔더라고요. 최종면접을 앞둔다고 하기에 마치 제 일처럼 떨렸죠. 똑부러진 친구라 될 줄 알았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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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원 작가가 봉준호 감독에게 전달한 영화 기생충에 나온 집의 모습
다가오는 새해에도 여전히 바쁠 예정이라는 이씨. 특히 내년 레고 본사가 한국에서 진행하는 방송 프로그램 '레고 마스터즈'에 대한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국내에 레고 마니아들이 참 많아요. 그래서 1년에 한번씩 열리는 브릭코리아컨벤션을 통해 대결을 펼치기도 하지만 '레고 마스터즈'처럼 연령 제한없이 남녀노소 모두 다 축제 같은 느낌으로 즐기는 프로그램이 생긴다니 너무 기대가 되요. 중국판 레고 마스터즈 참가자들은 용이나 구름을 활용한 작품을 많이 만들던데 한국 참가자들은 어떤 작품을 만들지, 어떻게 자연스럽게 레고 작품에 한국 문화가 녹아들어갈지 벌써부터 궁금한 거 있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레고 공인작가 이재원씨의 활약 또한 기대가 된다.

[방영덕 매경닷컴 기자 / 유서현 매경닷컴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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