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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초상화'...2470억원에 팔린 20세기 최고가 작품

[정윤아의 ‘컬렉터의 마음을 훔친 세기의 작품들’]

  • 입력 : 2022.05.27 12:15:46
  • 최종수정 : 2022.06.04 21:01:25
‘샷 세이지 블루 마릴린(Shot Sage Blue Marilyn)’. 1964년작. 2022년 5월 9일 크리스티 뉴욕의 토마스와 도리스 암만 소장품 경매에서 1억9500만달러(약 2470억원)에 낙찰됐다. 미국인 예술가가 창조한 미술품과 20세기에 제작된 모든 미술품 가운데 가장 높은 경매가 기록이다.

‘샷 세이지 블루 마릴린(Shot Sage Blue Marilyn)’. 1964년작. 2022년 5월 9일 크리스티 뉴욕의 토마스와 도리스 암만 소장품 경매에서 1억9500만달러(약 2470억원)에 낙찰됐다. 미국인 예술가가 창조한 미술품과 20세기에 제작된 모든 미술품 가운데 가장 높은 경매가 기록이다.

창작자의 명성과 관계없이 시공간을 초월하는 능력으로 불멸의 경지에 이르는 작품은 역사상 그리 많지 않다. 아름다운 여성의 형상은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었으며, 모든 인간의 관심사기에 다른 주제에 비해 보편성을 획득하고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진다. 이를테면, 고전미의 상징이 된 ‘밀로의 비너스’, 수수께끼 미소를 지닌 다빈치의 ‘모나리자’, 미의 화신으로 여겨지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처럼. 여기에 한 점을 더 얹는다면, 아마도 전설적인 미모로 세상을 매료시킨 할리우드 스타, 마릴린 먼로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담아낸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년)의 초상화일 것이다.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신화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고아원과 위탁가정을 전전하며 성장한 불우한 소녀에서 할리우드가 낳은 최고의 스타 여배우로 우뚝 올라섰다. 자신만큼이나 유명한 남성들과 결혼, 그리고 이혼으로 유명세를 더했으며, 케네디 대통령과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와 동시에 염문을 뿌렸다. 게다가 약물 남용으로 인한 죽음은 우발적 혹은 의도적 자살이었는지, 살해당한 것인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불멸’을 얻기는 부족하다. 불우하게 생을 마감한 아름다운 여배우는 많지만, 세상이 그녀들 모두를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죽은 지 6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마릴린이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여인이 된 데는 워홀의 초상화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워홀이 마릴린의 초상화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그녀가 사망한 1962년부터다. 다양한 기법을 실험하며, 그녀의 초상화를 여러 점 제작했다. 그 가운데 가장 완성도 높은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작품이 ‘샷 세이지 블루 마릴린’이다. 이 작품은 지난 5월 9일 크리스티 뉴욕의 토마스와 도리스 암만(Thomas&Doris Ammann) 소장품 경매에서 1억9500만달러(약 2470억원)에 낙찰됐다. 이로써 그녀는 미국인 예술가가 창조한 모든 미술품을 통틀어, 나아가 20세기에 제작된 전작 가운데 가장 높은 경매가 기록을 보유한 초상화의 주인공이 됐고, 불멸의 신화 반열에 올랐다.

워홀은 왜 그토록 마릴린의 이미지에 집착했을까.

우선은 극적으로 화려하면서도 비극적인 그녀의 복잡한 이중적 본질에 매료됐을 것이다. 누구나 선망하는 화려한 삶 속에서도 지속적인 불안증으로 인해 정신적으로는 몹시 힘들었던 점, 가난뱅이에서 유명세를 누리는 부자가 된 점 등 그녀의 소설 같은 삶이 자신을 꼭 닮아 있었기 때문이리라. 1962년 8월 5일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워홀에게 자신이 만든 초상화를 통해 그녀를 영원불변의 우상으로 만들고 싶은 더욱 확고한 의지와 욕망을 심어줬을 테다.

워홀이 제작한 마릴린 먼로 초상화의 원본 사진. 1953년에 그녀가 주인공으로 출연한 영화 ‘나이아가라’의 홍보용 스틸 사진이다,  ‘황금빛 마릴린 먼로(Gold Marilyn Monroe)’. 1962년작. 워홀이 제작한 마릴린 먼로 초상화 중 최초의 작품. 작품성 측면에서 매우 뛰어나지만, 기법 측면에서는 ‘샷 세이지 블루 마릴린’에 비해서 실크 스크린의 완성도가 떨어진다.

워홀이 제작한 마릴린 먼로 초상화의 원본 사진. 1953년에 그녀가 주인공으로 출연한 영화 ‘나이아가라’의 홍보용 스틸 사진이다, ‘황금빛 마릴린 먼로(Gold Marilyn Monroe)’. 1962년작. 워홀이 제작한 마릴린 먼로 초상화 중 최초의 작품. 작품성 측면에서 매우 뛰어나지만, 기법 측면에서는 ‘샷 세이지 블루 마릴린’에 비해서 실크 스크린의 완성도가 떨어진다.

그녀의 초상화 제작을 위해 워홀은 수많은 마릴린의 사진 가운데서도 절정에 달한 미모, 명성과 부 등 그녀가 모든 것을 다 거머쥐었을 당시에 출연한 영화 ‘나이아가라(Niagara)’의 홍보용 스틸 사진을 골랐다.

‘샷 세이지 블루 마릴린’을 자세히 보라. 이 작품에서 그는 자신의 최고 뮤즈에 걸맞은 궁극의 묘사를 통해 여배우의 삶과 명성이라는 일시적인 본성을 넘어서는 초월적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금발, 매혹적인 눈매, 도톰한 입술, 심지어 그 유명한 애교점은 워홀의 과감한 색채 사용과 세련된 명암법 사용에 의해 명확하게 강조되면서 상징적 도상으로 구현됐다. 목과 뺨을 감싸면서 왼쪽 관자놀이에 드리워진 부드러운 그늘은 워홀이 창작한 마릴린 추상화 가운데서도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완벽한 깊이감과 조형성을 더한다. 워홀의 작품을 통해 그녀는 20세기의 비너스이자 모나리자가 된 것이다.

이 작품의 뛰어난 미학적 우수성은 이전에 비해 한층 더 복잡하고 정교해진 실크 스크린 제작 과정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몇 년간의 지속적인 실험 끝에 워홀은 1964년에 보다 정확하게 자신이 원하는 부위에 원하는 색채를 원하는 농도와 명암으로 발현, 조절할 수 있는 실크 스크린 기술을 획득하게 됐다. 이 모든 노하우가 적용된 것이 ‘샷 세이지 블루 마릴린’이다.

이 작품을 처음 소장한 이는 뉴욕의 전설적인 팝아트 소장가 레온 크라우샤였다. 그와 그의 아내는 워홀의 작품을 대거 소장, 1960년대 초반에 팝아트의 가장 대표적인 컬렉션을 형성한 바 있다. 이후 이 작품은 영향력 있는 화상으로 뉴욕의 페이스 갤러리의 파트너기도 했던 프레드 뮤엘러와 언론 재벌이자 유명 소장가였던 뉴하우스 주니어가 소장했다. 다음으로는 화상이자 소장가로 명성 높은 토마스와 그의 누나인 도리스 암만이 1980년대 초반에 구매해 이제까지 그들의 컬렉션에 포함돼 있었다. 이들 남매는 1977년에 취리히에 갤러리를 오픈한 이래 세계 톱 개인 소장가들은 물론, 전 세계 유수 미술관과 기관 컬렉션에 주요 작품을 판매하는 등 유럽 미술계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토마스가 워홀의 미술에 깊이 매료되면서 둘은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됐다. 그는 유럽에서 워홀의 명성을 공고히 구축, 지지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애썼다. 1978년에 취리히 미술관에서 대형 회고전을 기획, 워홀의 커리어 전개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그런 그가 ‘샷 세이지 블루 마릴린’을 구매한 이후, 화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판매하지 않고 소장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처럼 이번 최고가 기록에는 유명 소장가의 손을 거쳐 명망 높은 컬렉션에서 소장해 40여년간 한 번도 시장에 나오지 않았던 점, 미국 팝아트 상징이 된 작품이라는 점 등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했다.

1968년에 워홀은 “모든 이가 15분 동안 유명해질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그 말은 옳았다. 인스타그램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오늘날 대중은 잠깐이나마 유명세를 누릴 더 많은 기회를 갖게 됐다. 그러나 극히 일부만이 불멸의 명성을 얻는다. 가난한 헝가리 이민 가족 출생 앤드류 워홀라에서 세계적인 예술가가 된 앤디 워홀과 외로운 소녀 노마 진에서 슈퍼스타가 된 마릴린 먼로, 시공간을 초월하는 명성을 거머쥔 이들처럼.

[정윤아 크리스티 스페셜리스트]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61호 (2022.06.01~2022.06.0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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