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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아의 컬렉터의 마음을 훔친 세기의 작품들] 생존 작가 최고가 낙찰 데이비드 호크니…9분 경합 끝에…‘화가의 초상화’ 1016억원

  • 입력 : 2018.12.03 09:17:36
  • 최종수정 : 2018.12.03 09:22:57
2018년 11월 15일 저녁, 갑자기 불어닥친 때 이른 눈보라에도 불구하고 뉴욕 크리스티 넓은 경매룸은 발 디딜 틈 없을 정도의 인파로 가득 찼다. 600개가 넘는 의자가 마련돼 있었지만 이미 착석이 끝난 상태였다. 자리를 찾지 못한 60여명이 방 뒤쪽과 옆쪽을 가득 메웠다. 웃고 떠들며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경매장 안 모든 이의 얼굴에는 새로운 경매 기록이 세워질 역사적인 순간을 기다리는 흥분감이 역력했다.

드디어 해당 작품, ‘화가의 초상화(두 인물이 있는 수영장)(Portrait of an Artist(Pool with Two Figures))’의 경매가 시작됐다. 장장 9분에 달하는 긴 응찰 경합 끝에 경매사가 낙찰을 알리며 해머를 내려쳤다. 그 순간, 장내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약 9030만달러(약 1016억원)! 대중의 기대처럼 생존 작가 작품 가운데 가장 높은 경매가 기록이 세워진 것이다. 그것도 제프 쿤스(Jeff Koons)의 대형 스테인리스 조각, ‘풍선 강아지(Balloon Dog)’가 2013년에 세운 5800만달러(약 652억원)를 훌쩍 넘어선 금액으로 말이다.

역사에 새로운 페이지를 장식한 이 예술가는 누구인가.

올해 여든한 살이 된 원로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1937년~)가 그 주인공이다. 그의 다른 작품 한 점이 지난 5월 경매에서 약 2850만달러(약 320억원)에 낙찰된 적이 있었다. 불과 반년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자신의 경매 최고가 기록을 세 배 이상 경신한 셈.

‘화가의 초상화(두 인물이 있는 수영장)(Portrait of an Artist(Po
ol with Two Figures))’. 1972년작. 호크니의 대표작 중 하나로 뉴욕 크리스티 경매(11월 15일)에서 약 9030만달러(약 1016억원)에 낙찰돼 생존 작가 경매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2018 Christie`s Images Limited.

‘화가의 초상화(두 인물이 있는 수영장)(Portrait of an Artist(Po ol with Two Figures))’. 1972년작. 호크니의 대표작 중 하나로 뉴욕 크리스티 경매(11월 15일)에서 약 9030만달러(약 1016억원)에 낙찰돼 생존 작가 경매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2018 Christie`s Images Limited.

그의 작품이 이토록 전 세계 컬렉터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그의 많은 작품 가운데 유독 ‘화가의 초상화’가 생존 작가 경매 최고가 기록을 세운 데에는 어떤 연유가 있을까.

첫째, 호크니의 전작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 중 하나였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그의 화집이나 미술관 전시 도록 커버로 사용된 경우가 많았다. 즉, 인지도가 상당히 높은 대표작이었던 것. 그의 많은 연작 중 일반적으로 최고라고 평가받는 두 개의 연작, ‘수영장(the pool)’과 ‘두 명의 초상화(double portraits)’의 주요 요소들이 통합된 거의 유일한 대형 그림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생존 화가 중 한 사람의 가장 널리 알려진 이런 상징적인 작품을 살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수요는 많고 작품은 단 한 점으로 공급은 극히 제한적이기에 천문학적인 금액이 가능했다. 물론 전 세계적으로 풍부한 유동자금이 사회적 배경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둘째, 소장 이력도 프리미엄으로 작용했다. 원래 이 작품은 1972년, 뉴욕 갤러리에서의 전시를 위해 완성된 것이다. 당시 판매 가격은 2만달러(약 2000만원)였다. 이후 미국 음반업계 거물이자 유명 컬렉터인 데이비드 게펜(David Geffen)이 1983년, 뉴욕의 한 갤러리에서 이 작품을 80만달러(약 8억원)에 구매하고 소장했다. 그러다 1995년, 자산 규모가 약 5조원에 달하는 영국 투자가이자 프로축구 구단주, 조 루이스(Joe Lewis)에게 판매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확한 판매 가격은 발표된 적이 없지만 수백억원에 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처럼 20여년간 한 유명 사업가의 컬렉션에 있던 작품이 모처럼 시장에 나왔기 때문에 큰 화제가 됐다.

셋째, 독특하고 흥미로운 작업 과정으로 인해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준 작품이라는 점이다. 얼핏 보면 하나의 장면을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관계없는 이미지들이 합성된 것이다. 수영하는 남자는 ‘수영장’ 연작을 위해 찍은 사진 중에서 가져온 이미지다. 풀 밖에 서 있는 남자는 땅에 떨어진 무언가를 쳐다보는 사람을 찍은 사진에서 가져왔다. 원래는 익명의 소년을 찍은 사진이었는데, 인물을 자신의 옛 연인으로 교체했다. 뒤에 보이는 산 풍경은 남부 프랑스를 여행할 때 찍었던 사진에서 가져왔다. 이로써 ‘수영장’ 연작에서 보여준 물과 빛의 반사가 만들어내는 기하학적 패턴에 대한 탐구와 ‘두 명의 초상화’ 연작이 갖는 인물들 간의 긴장감, 그리고 자연스러운 풍경 묘사에 이르기까지 복합적인 요소들이 완벽하게 통합됐다. 이처럼 각기 다른 세계가 한 화면에 배치돼 보는 것과 지각하는 것 사이의 관계에 관한 호크니의 연구가 성공적으로 집대성됐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작품. ‘그리스도의 수난(The Flagellation of Christ)’. 두 개로 분리된 공간과 전체적인 구도를 통해 호크니가 이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탈리아 우르비노 마르케미술관 소장.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작품. ‘그리스도의 수난(The Flagellation of Christ)’. 두 개로 분리된 공간과 전체적인 구도를 통해 호크니가 이 작품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탈리아 우르비노 마르케미술관 소장.

넷째, 다양한 미술사적 참조가 녹아 있어 풍부한 이미지 분석의 재미를 더해준다. 우선 이 작품의 전체 구조는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1415~1492년)의 작품, ‘그리스도의 수난(The Flagellation of Christ, 1450년대작)’에 큰 빚을 지고 있다. 인물들이 나타나는 두 개의 구별된 공간 구조, 건축적 구도 등 그림 속 공간을 통해 표현된 느낌이 유사하다. 배경의 산과 나무를 묘사하는 데에는 인상주의 화가, 쇠라(Georges Seurat, 1859~1891년)의 점묘법이 현대적으로 해석·응용됐다. 작품 전체에 역동성을 부여하는, 과감하게 잘린 풀장의 구도는 드가(Edgar De gas, 1834~1917년)를 연상시킨다. 20세기를 대표하는 한 점의 그림 속에 이처럼 미술사 전통이 새롭게 녹아 있다니 흥미롭지 않은가.

점묘법을 개발한 인상주의 화가, 조르주 쇠라의 작품 ‘모델들(Les Poseuses, 1886~1888년)’. 호크니의 ‘화가의 초상화’의 뒷배경인 산과 나무들의 표현에 쇠라의 점묘법이 응용됐음을 알 수 있다. 미국 필라델피아 반즈재단 소장.

점묘법을 개발한 인상주의 화가, 조르주 쇠라의 작품 ‘모델들(Les Poseuses, 1886~1888년)’. 호크니의 ‘화가의 초상화’의 뒷배경인 산과 나무들의 표현에 쇠라의 점묘법이 응용됐음을 알 수 있다. 미국 필라델피아 반즈재단 소장.

다섯째, 화가의 전작 가운데 가장 사적인 의미가 부여된 작품이다. 영국 출신으로 게이였던 호크니는 1964년 여행을 왔다가 화창한 날씨와 동성애에 관대한 밝고 자유로운 분위기에 이끌려 캘리포니아에 정착했다. 이곳의 미술대에서 만난 피터와 연인 관계로 발전했고 이후 ‘수영장’ 연작 등을 발표하며 작업에서도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피터가 다른 애인을 찾아 떠나면서 호크니는 큰 절망감에 빠진다. 사랑하는 연인이자 작업에 영감을 주던 소중한 뮤즈를 동시에 잃은 것이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과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작업에 매진하던 중, 이 작품을 시작하게 됐다. 수영하는 남자를 바라보는 풀장 밖 인물로 옛 연인인 피터를 모델로 그렸다. 그를 향한 그리움, 절망감, 고독 등 자신의 모든 감정을 쏟아부었다. 그야말로 상처 치유의 그림이다. 그러기에 그토록 생동감 있는 색채와 풍부하고 촉각적인 화면이 완성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이 그림 자체가 자신의 감정을 대변하기에 옛 연인을 모델로 했지만 제목은 ‘화가의 초상화’라고 붙였던 것이리라.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작품이 일군 미학적 혁신에 있다. 이렇게까지 눈을 즐겁게 해주는, 아름답게 균형 잡힌 구성과 색채의 현대적인 그림은 만나기가 쉽지 않다. 누구나 동경하는 한가로움에 대한 정서가 공기와 빛, 따스한 온도 등을 통해 표현돼 있지만 지루하지가 않다. 남자가 서 있는 타일과 빛의 굴절을 통한 물의 기하학적 패턴 등 추상적 형태의 단순함과 자연스럽게 대비를 이루는 생동감 넘치는 언덕과 나무의 표현. 이 모든 것이 시간, 공간, 기억에 관한 호크니만의 독특한 기법으로 집대성돼 있다.

한 평론가가 호크니에게 기억할 만한 작품을 얼마나 그린 것 같으냐고 묻자 그는 잘 모르겠다면서 그래도 몇 점은 그린 것 같다고 말했다. ‘화가의 초상화’는 바로 그 몇 점 중 한 점,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할 만한 한 점이었으리라.

[정윤아 크리스티 스페셜리스트]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85호 (2018.11.28~12.04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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