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고 터져 나올 듯 꿈틀거리는 표면

프린트

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찢고 터져 나올 듯 꿈틀거리는 표면 [그림을 읽다:GREAT ARTIST] ⑯오귀스트 로댕

기사입력2016-05-13 09:37

류장복 기자 (jangboki@lycos.co.kr) ㅣ다른기사보기

로댕과 까미유 끌로델의 다나이드, 49.7×34.7cm, charcoal on paper, 2013

꿈틀. 등신대의 청동조각이 움직임의 순간을 움켜쥐고 있었다. 덩달아 내 몸에도 팽팽한 당김이 일어나 물결처럼 번져나갔다. 조각상의 주변으로 보이지 않는 파장이 일었다. 금방이라도 튀어 올라 터질 것만 같은 근육들이 참을성 있게 버티고 있었다. 얼핏 청동의 검푸른 용액을 뒤집어쓴 청년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살아 있는 생명의 존재감이 극적으로 드러나는 그 짧은 순간, 순간이 영원으로 이어졌다. 거무튀튀하고 매끈한 청동조각은 육중한 덩어리로 그 순간에 거처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에 내 시선이 닿자 청년 조각상은 화답이라도 하듯이 몸뚱이를 움찔거리며 비틀었다. 적어도 감상자의 시선에 그렇게 보였다. 거기 있는 청동조각은 한 순간에 내게로 다가와 여기 있다.

표면을 찢고 가르며 터져 나오는 로댕의 조각

“고요함이 없다고요? 현실은 불안정합니다. 썩어가는 시체도 동작을 취하고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움직임이 있습니다. 세계, 자연, 우리도 쉬지 않고 움직입니다. 잠잘 때도 심장은 뛰고 피는 돕니다. 우리의 정신은 세계를 배회하고 있습니다.”

로댕의 청동조각 ‘청동시대’가 살롱에 전시되자 논란이 일었다. 사람들은 로댕이 살아있는 청년을 데려다가 실물 그대로 본을 떠서 작품을 주조했을 것이라 의심했다. 그 당시 인체의 부분적인 실물 주조가 암암리에 성행했기 때문이다. 로댕은 끈질기게 항의 편지를 썼고 작업의 증거물을 모아 관계자들에게 보냈다. 로댕은 자신의 조각 작품이 어떻게 생명력을 얻는지 스스로 증명해야 했다. 마침내 그는 심사위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흙으로 직접 남자의 몸통을 빚어 보였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49.7×34.7cm, charcoal on paper, 2013

로댕은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서 미켈란젤로의 볼륨을 보았다. 생명감으로 가득 찬 미켈란젤로의 볼륨에서 받은 충격은 해부학적 구조에 갇혀있었던 그의 고지식한 볼륨을 조각의 표면으로 끌어내도록 했다. 그는 솟아오르는 생명감의 볼륨으로 새로운 표현의 장을 열 수 있었다. 로댕의 인체 조각은 이제 더 이상 실물과 비교당하지 않고 조각 그 자체로 느껴지고 해석되었다.

로댕의 조각은 개체의 안과 밖의 경계에서 생동한다. 종종 해부학적인 엄밀함에서 벗어났음에도 그의 인체조각은 튀어 오르는 근육의 감정을 붙잡는 힘이 있었다. 미켈란젤로의 볼륨이 중력을 거슬러 신의 호흡으로 팽창하는 힘이라면, 로댕의 볼륨은 표면을 찢고 가르며, 마침내 터져 나온다.

로뎅과 까미유 끌로델 그리고 마리 로즈

오귀스트 로댕(Auguest Rodin 1840~1917)의 곁에는 마리 로즈-뵈레라는 여인이 있었다.

마리는 로댕과 만난 처음부터 자신이 죽을 때까지 그에게 헌신했다. 조각가의 꿈을 품고 파리에 정착했지만 가진 게 가난과 젊음뿐이었던 청년 로댕에게 시골 처녀 마리는 묵묵히 모델을 서주었고, 그의 궁색한 처지를 볼 때면 삯바느질로 모은 돈을 내놓았으며, 전쟁으로 도시 전체가 아수라장이 된 와중에도 그의 작품을 정성으로 지켰다.

로댕의 청동시대가 있는 실내, 49.7×34.7cm, charcoal on paper, 2013

로댕이 호구지책으로 벨기에에 건축 장식을 조각하러 떠났을 때도 파리에 남은 마리가 쥐꼬리만 한 생활비로 로댕의 부모와 하나 뿐인 아들을 억척같이 보살폈다. 어느 날 서른 중반의 로댕은 중단했던 조각가의 꿈을 좇아 이탈리아 여행을 감행한다. 그때도 그녀는 두말 않고 꼬깃꼬깃 모아둔 돈을 여비로 내놓았다.

로댕은 생동감 넘치는 미켈란젤로의 조각 작품에 깊은 영감을 받았다. 그는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청동 조각 작품인 ‘청동시대’를 만들었다. 살롱에 출품한 이 작품은 실물을 떠서 주조했다는 오해를 부를 정도로 사실적이었다. ‘청동시대’를 계기로 로댕이라는 이름이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로댕은 프랑스 정부의 의뢰를 받아 대작 ‘지옥의 문’을 조각하게 되었다. 국가로부터 널찍한 작업장과 작업비용 일체를 지원받으면서 로댕은 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작품 주문도 끊이질 않았다. 한때 파리에만 작업장을 여섯 곳 두었던 적도 있었다. 까미유 끌로델과 은밀하게 만났던 센 강가의 작업장도 그 중 하나였다.

외도의 낌새를 알아 챈 마리는 어느 날 로댕의 뒤를 밟다가 강변 작업장에서 끌로델과 딱 마주쳤다. 어렸지만 천재적인 소질과 당찬 성품을 지녔던 끌로델은 로댕의 우직한 버팀목인 마리를 앞에 두고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로댕은 본집을 교외로 옮기고 마리에게 금족령을 내리는 것으로 이 문제를 일단락 지었다.

오귀스트 로댕, 49.7×34.7cm, charcoal on paper, 2013

이후로도 끌로델과 로댕의 공공연한 연인 관계는 10년이나 지속되었다. 마리가 로댕의 부모를 모시고 근교의 뫼동 작업실을 지키는 동안 로댕은 파리에서 클로델과 동거하다시피 생활했다. 활화산 같은 로댕의 여성편력은 끌로델로 그치지 않았다. 수많은 여자가 로댕의 주변을 들락날락거렸다. 끌로델은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였다. 질투와 배신과 증오가 뒤섞인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던 그녀는 서른을 갓 넘긴 나이에 정신병원에 들어가 생의 남은 절반을 보냈다.

마리는 뫼동의 전원생활에 적응해갔다. 그 동안에 ‘생각하는 사람,’ ‘칼레의 시민,’ ‘입맞춤,’ ‘발자크’ 같은 기념비적인 작품이 이어서 탄생했다. 로댕은 시대 가치를 대변하는 저명인사가 되었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자처해서 로댕의 비서로 일했고, 야심에 찬 젊은 무용가 이사도라 던컨도 자신의 춤을 로댕에게 인정받고자 했을 정도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마리는 뫼동 작업실을 홀로 지켰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늙은 몸을 더 이상 가눌 수 없게 된 로댕은 상류사회의 화려한 생활을 접고 뫼동의 집으로 돌아왔다. 평생 손에 쥐고 있었던 익숙한 연장마저 떨어뜨릴 정도로 로댕의 불꽃은 사그라졌다. 그는 남아있는 모든 작품을 나라에 기증하고, 마리에게는 뫼동의 집과 토지를, 주정뱅이 외아들에게는 목돈을 마련해 주기로 했다.

재산을 상속하려면 마리와 법률상 부부일 필요가 있었으므로 주변의 권유에 못이기는 척 로댕과 마리는 백발의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여행도 갈 계획이었지만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달아 모든 물자가 턱없이 부족했던 1917년 겨울, 마리가 폐렴으로 죽는 바람에 무산됐다. 그해 늦가을 홀로 남은 77세의 로댕도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