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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미술 세계로 이끈 건 은하철도 999” 파리에서 만난 일본 팝아트 대가 무라카미 다카시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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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호 10면

1. 39Tan Tan Bo Puking-a.k.a.Gero Tan39(2002), 3600x7200x67mm
2 베르사유 궁에 설치된 ‘Pom & Me’ 부분, 133 x 107 x 90㎝ (with base 3 ‘MCBST, 1959→2011’(2011), 92 x 73㎝

무라카미 다카시에게 최근 새로운 영감을 준 사람은 프랑스 작가 이브 클라인(1928~62)이다. 이른바 ‘이브 클라인 블루’라 불리는 묘한 파랑색을 구사하는 작가다. 파리 에마뉘엘 페로탕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무라카미는 클라인의 색감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들을 선보였다. 작품의 주된 소재인 해골을 그는 이브 클라인이 즐겨 사용했던 블루·핑크·골드등의 색감으로 그려냈다.

“내 해골들은 죽음의 공포 아닌 살아있는 자들의 환희”

“동양과 달리 서양에서는 해골의 이미지를 흔히 볼 수 있다. 이는 해골에 담긴 삶과 죽음의 상징성에 대해 서양인들이 보다 가깝게 다가가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파리 카타콤의 수많은 해골이 일반인에게 공개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죽은 이들의 유골이지만 수많은 해골 더미는 오히려 죽음에 대한 공포와 허무보다는 역설적으로 살아있는 자들의 환희를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4 베르사유 궁에 설치된 ‘Tongari - Kun’[중앙포토]

이브 클라인이 사용했던 밝은 색채를 이용해 수많은 해골을 표현한 신작에 대해 무라카미는 이렇게 설명했다. 비록 이브 클라인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이번 작품들은 무라카미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기술과 스타일 면에서는 매우 일본적이었다. 전시된 그림들은 세밀한 기술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구사하는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예술 작품도 상업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전자 제품과 같다. 한동안 작품에 예술성이 깊다면 기술적인 면은 그다지 중시되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컬렉터들은 작품의 기술적인 완성도에 점점 주의를 기울인다. 따라서 기술적으로 완벽한 작품이 탄생하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이슈다. 작품을 오래 소장하게 하도록 하는 것과도 연결이 되기 때문이다.”

테크닉적인 면에 완벽을 기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은 마치 제조업체 사장이 자사의 제품을 선전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이런 기술적 요소에 대한 그의 강박관념은 그가 일본인이고 일본의 미대에서 전통 미술을 배웠다는 배경 때문일 수도 있다. 그의 작품에서는 일본의 19세기 작가인 호쿠사이(1760~1849) 등 일본 장인의 스타일을 계승하는 모티브와 이를 2차원적인 평면으로 표현하는 일본 미술의 전통을 읽을 수 있다.

5 베니스 피노 컬렉션에 설치된 ‘Milk’(1998) [중앙포토]6 And Then, When That’s Done…I Change. What I Was Yesterday Is Cast Aside, Like An Insect Shedding Its Skin(2009), 300 x 300㎝ (2 panels)7‘Flower Matango (d)’(2001~2006), 315 x 204.7 x 263㎝ 8‘Yume Lion(The Dream Lion)’(2009 ~2010), 191 x 127 x 110㎝

일본 전통 미술과 서양 미술에 대한 그의 관심은 어린 시절부터 비롯됐다. 텍스타일과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무라카미의 어머니는 어린 무라카미에게 서예 수업을 받게 했다. 또 도쿄에서 개최된 르누아르·고야 등 서양 미술 전시회에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무라카미는 상류층의 전유물로 간주되었던 소위 하이 아트(High Art)보다는 만화에 매료됐다. 그가 10대에 보았던 만화 ‘은하철도 999’에서 본, 바다 위에서 불의 파도가 일면서 폭발하는 장면은 그가 후에 미술을 공부하도록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스타일을 개발하면서 본격적인 현대 미술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94년 뉴욕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앤디 워홀에서 제프 쿤스로 이어지는 팝 아트의 개념에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이들처럼 자신의 예술을 보다 다량으로 생산하고 전파할 수 있도록 해주는 스튜디오 카이카이 키키를 만들게 된다.

그러나 무라카미의 야심은 카이카이 키키가 단순히 작품을 만드는 스튜디오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데서 엿볼 수 있다. 자신이 만들어내는 작품의 대중적 전파, 일본 현대 미술을 서양 세계에 수출하는 창구, 그리고 일본 젊은 작가들에게 보다 넓은 세계로의 플랫폼을 제공해주는 역할이 그가 꿈꾼 것들이다.
“93년 내가 무라카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에게서 선천적인 재능과 에너지, 그리고 성공에 대한 강한 신념을 읽을 수 있었다. 우리가 만난 이후 그는 수많은 명작을 만들어 냈고 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그가 이룬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카이카이 키키를 만든 것이다.” 에마누엘 페로탕은 무라카미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가 미래에 커다란 작가가 되리라 직감했다고 한다.

뉴욕과 도쿄를 오가며 작업하고 명성을 얻기 시작한 무라카미에게 확고한 계기가 된 전시는 2007년 LA 현대 미술관에서 시작해 뉴욕의 브루클린 뮤지엄, 빌바오의 구겐하임으로 이어진 회고전이었다. 이 전시에는 그가 창조한 캐릭터인 ‘나의 외로운 카우보이와 히로폰’과 같은 조각품들과 100만 달러를 호가하는 회화 작품들이 전시됐다. 전시장 한 곳에는 루이뷔통 부티크를 재현해 무라카미가 디자인한 루이뷔통 상품들과 저렴한 캐릭터 상품들이 함께 판매됐다. 이 같은 상업과 예술의 노골적인 결합에 대한 평론가들의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무라카미는 당당하다.

“현대 미술이란 무엇인가? 마르셀 뒤샹으로 거슬러가면 그는 단지 존재하는 변기에 서명을 하고 이를 예술 작품이라 했다. 현대 미술은 이렇게 예술을 제조하는 방법에 대한 끊임없는 다른 시도들을 하고 있다. 루이뷔통과의 협력은 현대 미술 작품의 또 다른 제작 방법 가능성을 실험하는 시도일 뿐이다.”
또한 이 전시는 그가 창시한 수퍼플랫(모든 것을 평편하게 만들어버린다는 뜻)의 개념을 한층 넓게 적용해보고자 했던 시도이기도 했다. 이 전시를 통해 그는 하나의 예술 작품은 소수의 부유한 사람만이 소유할 수도 있지만 스티커나 미니어처 등의 형태로 저렴한 가격에 제공함으로써 많은 사람이 똑같은 예술품을 소유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

너무 상업적인 작가라는 비난의 돌을 안전모를 쓰고 맞겠다고 장담했던 무라카미는 이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가 중 하나가 됐다. 작품이 너무 비싸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만약에 현대 미술을 전혀 모르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내 작품 가격을 본다면 당연히 비싸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 스튜디오 비용 등의 제작비, 작품의 공급을 초과하는 수요 등을 생각한다면 마냥 비싸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난해 프랑스 베르사유 궁에서 열린 그의 전시는 이러한 그의 입지와 작가로서의 대중적인 인기를 한층 더 올려주었다. ‘베르사유 효과’는 오프닝 다음날 쏟아진 3000여 개의 기사로 입증됐다. 무라카미 전시가 열리는 동안 관람객이 20%나 증가한 것으로 분석됐다. 그동안 일본에서는 오히려 작가로서 명성을 누리지 못했던 그는 베르사유 궁 전시로 비로소 일본인들의 관심을 받게 됐다. 서양에서의 관심에 비해 다소 야박하게 느껴지는 일본인들의 반응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일본의 문화를 수출하는 사람이다. 내가 나의 작품을 통해 표현하는 일본 문화에 대해 서양 사람들은 그들의 문화와 다르기 때문에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나의 작품이 내포하는 일본의 문화적인 면이 그다지 흥미롭게 다가가지는 않는다. 너무 친숙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베르사유 궁에서의 내 전시에 일본인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베르사유라는 장소에 대한 일종의 판타지가 컸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유명한 베르사유에 도대체 내가 어떤 작품을 설치할 것인지 궁금해했다.”

그는 베르사유 궁 곳곳에 만화에서 영감을 얻은 조각 작품들과 회화 작품, 비디오 작품 등 총 22점을 설치했다. 베르사유를 찾은 전 세계 관람객들은 루이 14세의 금동 조각이 서있어야 할 자리에 기괴한 모양을 한 금동 부처상을 발견했다. 고풍스러운 거울의 방에서 화려한 원색의 플라스틱 꽃들의 조각을 발견하거나 과장된 거대한 가슴을 하고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갓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소녀 캐릭터를 볼 수 있었다. 무라카미는 이들이 자신의 작품을 어떻게 읽어주길 바랐을까.

“서로 다른 문화에서 온 두 사람이 대화를 하게 될 때는 언제나 완벽하게 소통해낼 수 없는 장벽이 존재한다. 당연한 현상이다. 예를 들어 외국인 기자들이 나를 인터뷰할 때 그들은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만의 대답을 기대한다. 내가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 이상의 대답을 하면 그들은 당황하기 시작한다. 외국인들이 내 작품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종종 그들은 표면적인 것만을 본다. 내가 일본 작가로서 내 고유의 생각이나 이념 내에서 살고 있다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이러한 이해의 불가능함과 통역의 불가능함이 당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내가 시도하는 것은 단순히 나의 작품을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영역 내에서 소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이들에게서 어떠한 반응을 끌어내는 것에 나는 도전하는 것이다.”

무라카미의 이러한 도전이 앞으로 계속해서 전 세계의 반응을 끌어낼 수 있을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는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오후 9시에 자고 오전 3시에 일어나 작업을 시작한다. 오전 6시에 약간의 운동을 하고 20분간 휴식을 한 뒤 또다시 일을 한다. 그리고 점심 식사 후 짧은 낮잠을 자고 또 일을 하고 오후 9시에 잠자리에 든다.

수년간 무라카미의 리에종을 담당한 에마누엘 페로탕 갤러리 에추고 나카지마는 무라카미에 대해 말한다.
“나는 파리 카르티에 재단에서 개인전 준비가 한창이던 때 전시장의 화장실 근처 바닥의 침낭 속에서 자고 있던 무라카미를 만났다. 전시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모습이었다. 그는 마치 괴물처럼 혹은 신처럼 거대한 자아와 콤플렉스, 자만심과 수치심을 동시에 가진 이중적인 인간이다. 그래서 그는 늘 자기 자신과, 타인들과 싸운다. 그는 늘 자신에게 옳은 것, 자신이 도전할 수 있는 것을 찾느라 투쟁하고 이것이 주변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자극과 영감을 준다. 그의 삶에는 예술만이 존재한다.”

지칠 줄 모르는 무라카미의 도전의 다음 챕터는 2012년 카타르의 도하다. 무라카미의 초창기 작품부터 신작까지 총망라해서 보여줄 이 전시에서 그는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숨가쁘게 그를 따라가야 한다.


최선희씨는 런던 크리스티 인스티튜트에서 서양 미술사 디플로마를 받았다. 파리에 살면서 아트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런던미술수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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