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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호크니, 시간의 층위와 감각적 기쁨, 그것이 회화의 존속 이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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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2호 28면

[CRITICISM]런던 테이트 브리튼의 ‘데이비드 호크니’전

데이비드 호크니의 대규모 회고전이 시작된 런던 테이트 브리튼 뮤지엄에서 ‘작가의 초상(수영장의 두 인물)’ 앞에 미술관 직원이 앉아 있다. [AP=뉴시스]

데이비드 호크니의 대규모 회고전이 시작된 런던 테이트 브리튼 뮤지엄에서 ‘작가의 초상(수영장의 두 인물)’ 앞에 미술관 직원이 앉아 있다. [AP=뉴시스]

“겨울에서 봄으로 계절이 바뀌는 건 거대하고 극적인 사건입니다.”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80)는 미술사학자 마틴 게이퍼드와의 대화 중에 이렇게 말했다. 캘리포니아에 오래 머무르다가 고향 영국으로 돌아와서 새삼 느낀 것이라고 했다. 음악의 인상을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한 디즈니의 ‘판타지아’에서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의 쿵쾅거리는 소리를 공룡들이 땅을 구르는 장면으로 만든 건 디즈니가 계절변화 없는 남부 캘리포니아에 오래 있은 탓이라고 했다. 그 쿵쾅 소리는 오히려 새싹이 땅을 뚫고 돋아나는 소리, 즉 “자연이 솟아오르는 소리”라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들으면 사계절이 뚜렷한 서울에 있으면서도 콘크리트 사막에 갇혀 ‘봄이라는 거대하고 극적인 사건’을 놓치고 있는 게 아닌지 새삼 생각해 보게 된다.

객관적 시각이 존재하지 않는 건 #세상을 기억과 함께 보기 때문 #손으로 그린 감각의 기쁨이야말로 #그림이 여전히 힘이 센 이유

지난달 런던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은 호크니의 사상 최대 회고전을 시작했다. SNS를 보면 한국 미술 팬들까지 들썩들썩한다. 설치 미술과 뉴미디어 아트가 지배하는 21세기, 호크니가 회화라는 오래된 장르를 고집하면서도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유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같은 장소에서도 다른 것을 보는 이유

먼저 전시에 나온 그의 유명한 캘리포니아 수영장 그림들을 보자. 그는 이 그림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수영장 물이 다른 어느 물보다도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여줍니다…그 색깔은 (바닥 페인트색 등으로) 인공적일 수 있고 그 춤추는 리듬은 하늘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 투명함 때문에, 물의 깊이도 반영합니다. 수면이 거의 잠잠하고 햇빛이 강할 때는, 색깔 스펙트럼이 있는 율동적인 선들이 어디든 나타납니다.”

테이트에 따르면 호크니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의 표면을 나타내기 위해 각각의 그림에서 각기 다른 해법을 시도했다. 그렇게 완성된 그림들에는 감각의 기쁨이 넘친다. 수영장 데크의 심플한 단면이 반사하는 햇빛과 열기, 수영장 물에 들어갈 때 머리는 뜨겁고 몸은 차가운 그 기묘한 느낌, 수영장 물 특유의 매끄러움과 냄새, 하늘색 혹은 터키석 빛깔 수면의 일렁임이 햇살과 만나 만드는 빛의 결까지, 모든 감각의 기억이 생생하게 다시 살아난다. 그 감각의 기억은 프루스트의 홍차 적신 마들렌처럼 수영장과 관련된 온갖 추억까지 물결처럼 몰고 온다.

바로 이것이 호크니가 회화라는 매체를 고집하는 이유다. 게이퍼드가 호크니와의 대담을 엮은 책 『다시 그림이다』(2011)에서 호크니는 지금이 “사진 이후의 시대”이자 “회화로 되돌아가는 시대”라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세상을) 기억과 함께 봅니다. 내 기억은 당신의 기억과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같은 장소에 서 있다 하더라도 같은 것을 보지 않습니다. 객관적인 시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 말대로 인간이 보는 외부세계는 그것을 기관을 통해 감각하는 동시에 사유하는 인간의 몸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메를로 퐁티는 그렇게 감각과 사유가 혼합된 “화가의 시지각(vision)이 몸짓(gesture)이 될 때” 회화가 탄생한다고 했다. 이렇게 심리적, 정서적으로 보여지는 세상 풍경, 또 여러 각도에서 여러 순간에 걸쳐 보여지는 세상 풍경은 사진보다 회화가 잘 나타낼 수 있다는 게 호크니의 주장이다.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통해 여러 새로운 실험을 하는 동시대 사진작가들은 사진으로도 충분히, 아니 더 잘할 수 있다고 반박하지만.

그렇다고 호크니가 사진을 멀리 해왔던 건 전혀 아니다. 그는 한 풍경을 여러 앵글, 여러 순간에 걸쳐 찍은 사진을 결합해 만든 포토 콜라주(photographic collage)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재미있는 건, 그가 이런 사진 작업을 일종의 드로잉이라고 부른다는 것. 『다시 그림이다』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콜라주 자체가 드로잉의 형식입니다…콜라주는 한 시간의 층 위에 다른 시간의 층을 얹는 것입니다.”

‘와유’의 세계 … 눈은 산수화, 마음은 산속에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3월 19일까지 열리는 대규모 소장품전 ‘달은, 차고, 이지러진다’에는 호크니의 포토콜라주 중 하나인 ‘레일이 있는 그랜드 캐년 남쪽 끝’(1982)이 나와있다. 무척 의미심장하게도, 큐레이터 임대근은 그 작품을 한국 작가 황인기의 ‘몽유-몽유’(2011)와 나란히 걸었다. ‘몽유-몽유’는 조선 화가 안견의 걸작 ‘몽유도원도’를 디지털 픽셀화한 다음 합판 위에 플라스틱 블록으로 재현한 작품이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동아시아 풍경화의 개념인 ‘와유(臥遊)’다. 와유는 누워서 산수화를 보며 마음으로 그 산수 속을 돌아다니며 노닌다는 뜻이다.

호크니의 풍경화와 사진 콜라주에는 그의 눈과 정신이 여러 시점(viewpoint)과 시점(time)에 걸쳐 훑은 이미지가 결합돼 있다. 때문에 관람자가 그 다양한 앵글과 시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작품의 풍경 속에 들어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서구 화가들이 르네상스부터 모던 아트 이전까지 추구했던 ‘스냅사진 같은 그림’ 즉, 한 찰나 그리고 한 고정된 앵글에서 창문 너머로 바라보는 풍경이나 장면 같은 그림과는 다른 차원이다.

안견의 ‘몽유도원도’에서 왼편의 현실세계는 정면에서 바라본 시점이고 오른편의 복숭아꽃 만발한 아름다운 낙원은 높은 곳에서 멀리 내려다본 시점이다. 관람자들은 이 그림을 주문한 안평대군의 꿈 속 도원 여행을 따라가며 몇 시간을 그림 속에서 노닐게 된다.

호크니의 작품도 그렇다. 특히 그가 손으로 그린 회화에는 감각의 기쁨이 충만한 게 특징이다. 호크니는 이렇게 말했다. “중국인은 회화를 위해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손과 눈과 마음입니다”라고. 마음과 연계된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것을 손으로 다시 표현해 마음이 노닐 수 있는 그림을 창조하는 것. 거기에 깃든 시간의 층위와 호크니 특유의 유쾌한 감각적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이야말로 팔순 노장에게 여전히 세계가 열광하는 이유 아닐까.


문소영 기자
moon.so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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