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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으로] 달라이 라마 후계 갈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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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달라이 라마. 몽골어로 큰 바다를 의미하는 ‘달라이’와 스승이라는 뜻의 티베트어 ‘라마’를 합친 이름이다. [뉴델리 AP=뉴시스]

“전통은 이제 끝내는 게 낫다.” “달라이 라마는 환생해야 한다.”

앞의 말은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뒤의 말은 중국 중앙정부가 최근 한 말이다. 언뜻 들으면 할 말이 서로 뒤바뀐 것처럼 생각되지만 그간 양측이 라마교의 지도자 환생 전통을 두고 주고받은 말이다.

중국 정부의 뜻을 정확하게 해석하면 ‘중앙정부의 입맛에 맞는 달라이 라마가 환생해야 한다’는 뜻으로, 결국 환생이라는 라마교 전통 방법을 이용해 친중(親中) 인사를 티베트 지도자로 임명하겠다는 중국 정부의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티베트는 물론 서구사회에서도 현 달라이 라마의 영향력이 큰 상황에서 중국 중앙정부가 전통을 아예 무시하고 차기 달라이 라마를 직접 임명하는 것은 부담스럽기도 하다. 반면 달라이 라마의 표면적 뜻은 ‘중국 정부가 라마교 전통을 이용해 마음에 맞는 사람을 후대 달라이 라마로 앉힐 바에야 가톨릭의 교황 선출처럼 비밀투표로 후대 달라이 라마를 뽑는 게 낫다’는 것이다.

최근 중국 중앙정부와 티베트 사이에서 달라이 라마 환생 전통이 현안으로 떠오른 것은 현 14대 달라이 라마가 후계를 걱정해야 할 만큼 연로했기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는 1935년 생으로 올해 만 80세가 됐다. 지금쯤 후계 문제를 정리해 놓지 못하면 지도자 선출이 티베트 독립운동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티베트로서는 이미 아픈 경험이 있다. 89년 라마교의 제2지도자인 10대 판첸 라마가 숨졌을 때다. 당시 달라이 라마는 전통에 따라 환생 판첸 라마를 찾아다닌 끝에 95년 당시 6세이던 게둔 초에키 니마를 후계로 지정했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차기 판첸 라마와 그의 가족을 연금한 뒤 기알첸 노르부라는 소년을 11대 판첸 라마로 결정했다. 이후 달라이 라마가 지정한 판첸 라마는 실종됐다. 11대 판첸 라마로 타격을 입은 티베트로서는 차기 달라이 라마마저 같은 운명에 처하게 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중국 당국이 1995년 달라이 라마의 후계자로 임명한 판첸 라마(왼쪽)가 3일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인민정치 협상회의 개막식에 참석했다. [베이징 AP=뉴시스]

달라이 라마는 그간 “(내가 죽으면) 여성이나 중국 공산당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티베트 밖의 어디에서 환생할 것”이라고 언급해왔다. 하지만 지난해 말 영국 BBC 방송과 인터뷰에서는 “다음에 우매한 달라이 라마가 나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슬픈 일이지만 그럴 바에야 누대로 내려온 전통을 지금 끝내는 게 낫다”고 주장했다. 중국 정부가 최근 티베트와 라마교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일종의 반박인 셈이다.

중국 정부도 강하게 반박했다. 중국 공산당 내에서 티베트 문제를 오랫동안 다뤄 온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웨이췬(朱維群) 위원은 최근 “달라이 라마의 후계는 중국 정부가 결정한다”며 “14대 달라이 라마가 환생 전통 존폐를 언급하는 것은 라마교를 모독하는 것”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중국 정부로서는 15대 달라이 라마도 뜻대로 정함으로써 향후 티베트 독립의 불씨를 없애겠다는 의도다.

티베트의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는 라마교의 전통에 따라 독특한 방식으로 정해진다. 불교의 일파인 라마교에서는 여느 불교처럼 환생을 믿는다. 특히 달라이 라마 같은 최고 지도자가 숨질 경우 그 영혼이 다른 곳의 어린아이로 옮겨와 환생한다고 믿는다. 이 때문에 라마교 지도자들은 달라이 라마의 사망과 함께 환생한 차기 달라이 라마를 찾으려 애쓴다.

현 달라이 라마는 만 5세이던 1940년 라마교의 전통에 따라 지금의 지위에 올랐다. 13대 달라이 라마는 1933년 숨지기 직전 자신의 환생을 예고했다고 한다. 라마교 지도자들은 유언에 따라 ‘앞에 호수가 있는 하얀색 집’을 찾아 나섰다. 2년 세월을 찾아 헤매던 이들은 1935년 티베트 동북부 암도 지방에서 그 집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라모 톤툽이라는 세 살배기 아이가 있었다. 이 아이는 찾아온 종교 지도자들의 이름을 알아맞혔다고 한다. 또 13대 달라이 라마가 시종을 부를 때 사용하던 북도 집어 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달라이 라마의 환생이 증명됐다. 그는 이후 티베트의 수도 포탈라궁에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고 1940년 ‘잠펠 아왕 롭상 예세 텐진 갸초’라는 이름으로 제14대 달라이 라마에 즉위했다.

당시는 티베트가 중국의 영향력하에 있었지만 사실상 독립국이었다. 하지만 1950년 중국의 침공으로 시짱(西藏)자치구에 강제 편입됐고 달라이 라마는 자연스레 독립을 원하는 티베트 민족의 정신적 지주가 됐다. 59년 달라이 라마는 중국의 티베트 지배를 거부하며 티베트를 탈출해 인도 북서부 히마찰프라데시 주 다람살라에 망명정부를 세웠다. 이후 인도를 비롯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티베트 난민 13만여 명에 대한 지원과 티베트 독립을 위한 비폭력 운동, 티베트 전통문화와 라마교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벌이고 있다. 이 때문에 달라이 라마는 중국 정부에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가 됐다. 급기야 89년에는 노벨평화상까지 받으면서 중국 정부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티베트 출신 작가 체링 워서는 “달라이 라마가 ‘환생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은 라마교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니다”며 “그의 진짜 의도는 이 같은 논란을 통해 티베트인이 하나로 뭉치고 결국은 제대로 된 환생 전통을 통해 후계를 결정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S BOX] 판첸 라마도 환생 전통 … 달라이 라마 입적 땐 권한대행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불교인 라마교의 4대 종파 중 하나인 게룩파의 종주이면서 티베트의 최고 지도자이기도 하다. 현 14대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하기 전까지는 라싸의 포탈라궁에서 지냈다. 육체가 죽어 없어지더라도 반드시 환생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여겨진다. 현 달라이 라마가 그간 “여자로 환생하겠다” “(환생)전통을 끝내겠다”와 같은 말을 한 것도 이 같은 논리에 근거한다. ‘달라이’는 몽골어로 ‘바다’를, ‘라마’는 티베트어로 ‘스승’을 뜻한다. 역사적으로 티베트는 몽골과 가까웠다.

판첸 라마는 라마교에서 달라이 라마 다음 가는 제2의 지도자다.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여겨지며, 역시 환생에 의해 후계자가 정해진다. 티베트 제2의 도시 시가체에 있는 타시룬포 사원의 수장이다. 판첸 라마는 ‘위대한 스승’이라는 뜻이다. 달라이 라마가 입적하면 그가 환생한 것으로 여겨지는 소년을 찾아내 후임 달라이 라마로 성장시켜 종교 지도자 역할을 제대로 할 때까지 스승으로서 최고 지도자 권한대행을 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중국 정부에 의해 11대 판첸 라마에 오른 기알첸 노르부는 2010년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위원으로 임명되는 등 외부 활동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최준호 기자 joo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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