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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환의 시대공감] 이석기 사태 가상 시나리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40호 31면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사건의 내란음모 사건이 터졌다. 보도에 따르면, 그는 지난 5월에 이른바 RO(Revolution Organization· 혁명 조직) 130여 명을 모아 유사시에 국가 기간시설을 파괴하라고 지시한 혐의를 받고 있다. 현직 국회의원이 그런 행태를 보이다니, 사실이라면 참으로 황당한 일이다.

 이 사건이 터지자 여당 대표가 곧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석기 의원 같은 이가 나온 데 대해 집권 여당의 대표로서 책임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의 논거는 꽤 논리적이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198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자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80년대에 도도한 물결을 이룬 사회과학 연구의 열기는 새로운 한국적 사회주의 이론의 형성으로 이어졌습니다. 제도권 교육은 뒷전으로 밀리고 운동권 학생들의 의식화 운동이 대학을 지배했습니다. 대학 학생회는 한국적 사회주의로 무장한 학생들의 활동 거점이 되었습니다. 당연한 귀결이지만 세력이 확장되자 세력 분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민족의 자주권을 중시한 세력은 이른바 NL로, 계급 문제를 중시한 세력은 이른바 PD로 뭉쳤습니다. NL계에서는 북한의 주체사상을 받아들이는 주사파까지 나왔습니다. 자본주의가 압축 성장을 지속한 그 시대에 한국적 사회주의가 나오고, 대학가에서 NL·PD에 주사파까지 급진적 운동세력이 부상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운동권 이론가들의 치밀한 논리나 조직 덕분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 시절에 한국적 사회주의자를 양산한 것은 신군부의 파시스트 독재였다는 가설에 저는 공감합니다. 신군부는 5·18 때 광주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였고 일제 무단통치를 넘는 폭압을 자행했습니다. 독재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증오를 키웠고, 그 증오가 엉뚱하게도 사회주의자를 양산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주사파의 생성 여건을 조성한 역사적 책임을 집권 여당은 면키 어렵습니다.”

기자회견 내용을 전해 들은 야당 대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시청 앞 천막에서 부랴부랴 최고위원회의를 열었다. 결론을 얻기까지 1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기자들을 불러 회의 결과를 발표했다.

“우리 당은 이석기 사태를 8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 여당 대표의 인식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여당 대표는 80년대 상황이 이석기 사태에 미친 영향에 관한 논의는 정치가가 아니라 역사학자의 몫임을 알아주기 바랍니다. 우리 당은 정권 교체를 위한 야권연대 전략이 야당의 미시적 전략으로서 타당성을 지닌 것이었다거나, 이석기 의원이 지역구에서 야권연대를 통해 국회에 입성한 게 아니라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되었기 때문에 야권연대 전략의 소산이라고 보기에는 적절치 않다는 일부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우리 당은 결과적으로 종북주의자가 국회에 진출한 데 대해 무한책임을 느낍니다. 앞으로 우리 당은 어떤 전략이건 거시적 관점에서 수립해야 한다는 뼈아픈 교훈을 얻었습니다.”

이석기 의원이 소속한 당의 대표가 여야 대표의 기자회견을 전해 듣고 기자실로 달려왔다. 먼저 격앙된 어조로 여야 정당을 싸잡아 질타했다.

“거대 정당인 여당이나 야당은 군소 정당이 먼저 의견을 밝힐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또다시 두 당은 그런 아량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우리 당에서 사과회견을 한다는 정보를 듣고 선수를 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는 말을 이었다.
“80년대 상황은 80년대적 의식을 낳습니다. 그때의 의식을 3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청산하지 못한 것은 오롯이 우리 당의 시대착오 때문임을 우리는 시인합니다. 관련 당국은 이석기 의원 문제를 법대로 엄정하게 처리하기 바랍니다. 우리 당으로서는 두 가지를 약속 드립니다. 첫째, 우리 당은 당원 가운데 아직도 종북주의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자가 더 있는지 자체 조사를 대대적으로 실시하겠습니다. 물론 그런 자가 있다면 곧바로 당국에 고발할 것입니다. 둘째, 우리 당은 앞으로 21세기에 맞는 정강·정책으로 대의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우리 당의 환골탈태를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이석기 사태에 관한 3당 대표의 공방을 지켜보며 시정잡배들은 심기가 상할 대로 상했다. 그들의 위상이 급전직하했기 때문이다. 옷에는 금배지를 달고도 입으로는 상대 당에 대해 막말을 쏟아내는 의원들을 보며 사람들은 ‘시정잡배만도 못하다’고 했다. 그러나 이번 일로 시정잡배들은 그들보다 못한 300여 명의 하류인생을 더 이상 못 보게 되었으니 그들로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민환 고려대 미디어학부 명예교수. 고려대 신방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전남대ㆍ고려대 교수, 고려대 언론대학원장, 한국언론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소설 『담징』(201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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