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세의 디자인스토리]<5>랍스터의 부활

김영세 이노디자인 회장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느냐?` 이런 질문을 받을 때 마다 난처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다. 멋진 말 대신에 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김영세의 디자인스토리]<5>랍스터의 부활

“나는 그저 일상생활 속에서 아이디어들을 얻습니다. 만약 차이점이 있다면, 나는 하루에도 수 십개 이상의 아이디어를 얻고, 그런 아이디어들로 흥분하죠. 일반인들은 지나치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생활 속의 발견들을 나는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진지하게 상상의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죠. 나는 상품화를 위한 깊이 있는 시뮬레이션의 과정까지 도달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 몇 가지 아이디어들이 이노 디자인팀과의 토론을 거쳐 상품으로 태어납니다.”

◇혁신은 일상에서 시작된다

내가 아이디어에 모습과 기능을 부여하고 친근한 이름을 붙여주는 것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에 등장하는 아이의 놀이와도 같다. 애니메이션에서 아이는 갖고 노는 장난감에 이름을 붙이고 그들과 유대관계를 쌓아간다. 가스버너를 디자인하던 중에 아내가 요리하는 바닷가재(랍스터)의 모습을 보고 내가 했던 일도 그랬다.

당시 가전업계 후발주자였던 의뢰 회사는 차별화되는 아이디어를 담은 디자인을 요구했다. 창의적 해답을 내놓기 위해 나는 거실과 마당을 오가며 이 생각 저 생각을 했고, 결국 머릿속에 작은 사무실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러다 주방에서 바닷가재 요리를 하고 있는 아내를 보게 됐다. 순간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나는 얼른 식탁 위에 있던 냅킨을 펼쳐 스케치를 해나갔다. 냅킨 위에는 조금 전 아내가 만지던 랍스터를 닮은 녀석이 그려졌다. 얼마 후 나는 디자인을 의뢰했던 회사에 이제까지 본 적 없는 가스버너를 선보였다. 다리를 펼치면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 같은 가스버너였다. 공간을 많이 차지하던 지지대를 최소화해 접을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릇 받침을 접었다 펼치는 모습이 아내가 요리하고 있던 빨간 바닷가재의 집게발과 닮았다. `랍스터`라는 이름을 붙이고, 빨간색으로 디자인을 마무리해 캐릭터를 부여했다.

1990년대 초 국내 가전업체에서 발매했던 이 가스버너는 한국 기업 제품 최초로 미국산업디자인협회가 시상하는 IDEA 금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영국 유명 디자인 잡지 `DESIGN`지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랍스터는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영감을 주었다. 영국 `DESIGN`지 표지에 실린 휴대용 가스버너 사진은 유명 사진작가인 김영수 교수의 작품이다. 나는 사진을 의뢰하러 서울에 있는 그를 찾았다. 그는 섬세한 예술성과 구수한 인간성을 두루 갖춘 훌륭한 작가였다. 김 교수와 나는 이 디자인을 어떻게 사진으로 구현할까를 논의했다. 결국 바닷가재에서 얻은 영감을 최대한 살려 모래 위에서 받침대가 펼쳐지는 느낌으로 사진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며칠 후 김 교수는 내가 상상했던 그대로의 사진을 보내왔다. 모래알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제주도까지 가서 바닷가 모래를 퍼 와서 사진을 찍었다는 이야기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랍스터는 야외용 가스버너의 본능을 모래 위에서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랍스터는 단종된 이후에도 재발매 요구가 끊이지 않았다. 이노디자인 매장에 랍스터 샘플을 본 사람들의 `왜 전시를 해놓고 판매는 하지 않느냐`는 볼멘소리가 섞인 문의가 이어졌다. 최근에는 캠핑 열풍까지 더해져 20년이 지난 오늘까지 랍스터를 찾는 의견을 트위터로 듣는다.

랍스터는 올 4월에 재발매를 결정했다. 출시한 지 오래돼도 진부하지 않고 수요가 있다는 것은 랍스터가 차별화된 좋은 디자인을 가졌기 때문이다. 재발매를 결정하면서도 그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큰 변화는 주지 않았다. 당시보다 기술이 발달하고 유행이 변화함에 따라 한층 슬림해졌다. 야외에서 사용이 용이하도록 그릴과 여분의 가스통을 넣을 수 있는 슬롯 등 몇 가지의 옵션을 추가해 아웃도어 기능에 깊이를 더했다. 시대를 넘은 랍스터의 부활이다.

◇아름다운 사람에게 어울리는 목걸이

기계가 단지 기능적 역할만 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우리 삶 속에서 디지털 기기들은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 되거나 특별한 정체성의 표현이 됐다. 디자인이 아날로그 감성의 소비자와 디지털 기기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십여년 전 한국에 출장 나왔을 때 일이다. 나는 한가한 오후 시간을 압구정동의 카페에서 보내고 있었다. 창밖을 무심히 내다보던 중, 순간 내 시선이 내 앞을 지나가는 `정말 멋진 여성`을 따라갔다. 무척 아름다웠던 여성이기에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러다 나는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멋진 뮤즈의 패션과 어울리지 않는, `못생긴 MP3 플레이어`가 거추장스럽게 목에 걸려 그녀의 패션을 망치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얼른 냅킨에 그녀에게 어울릴 목걸이형 MP3 플레이어를 스케치했다. 아니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내가 스케치한 것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목걸이였다. 이렇게 탄생한 MP3 플레이어가 세계적으로 100만개 이상이 팔려나간 아이리버의 `N10`다. 그 때 디자인은 누군지도 모르는 한 여성에게 찬미의 뜻으로 선사하고 싶은 것이었다. 결국 그 선물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100만명이 넘은 셈이다.

마치 보석처럼 보이기 위해 디스플레이에는 당시 최신기술이었던 OLED를 적용해 푸른빛의 조명이 꺼지면 디스플레이가 눈에 띄지 않도록 했다. 패키지 디자인까지도 장신구처럼 느껴지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까다로운 소비자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어폰이 곧 목걸이 체인이 되는 A타입과 체인을 교체할 수 있는 B타입, 두 가지로 나눠 제작했다. 음악을 듣기 위한 도구로, 단지 조작하기 편하기 위해 목에 걸고 다니던 MP3 플레이어가 패션 아이템으로 거듭났다.

아내가 요리하던 랍스터에서 가스버너를 상상하고, 여성의 길거리 패션에 목걸이형 MP3 플레이어를 떠올렸다. 일상은 나의 신상품 아이디어들이 태어난 곳이다. 일상 속에서 히트상품의 아이디어를 찾는 비결은 상상력과 호기심, 그리고 사람과 상품에 대한 애정어린 관심이다.

김명희기자 noprint@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