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창의 고전 다시 읽기] 28. 마크 트웨인 '허클베리 핀의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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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평등의 유토피아를 향한 대장정

미국 주류 사회의 위선을 조롱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만민평등의 유토피아를 향한 대장정이다. 사진은 영화 '노예 12년'의 한 장면. 부산일보DB

미시시피 강변의 한 마을. 떠돌이 술꾼의 아들인 열네 살의 헉(허클베리 핀의 애칭)은 도덕적으로 정결한 더글러스 과부댁의 보호를 받으며 산다. 그녀는 자신이 보호하는 아이들을 교양 있는 문명인으로 키우려고 훈육한다. 헉이 보기엔 이제 죽어서 아무 쓸모도 없는 모세 이야기만 자꾸 들려준다. 별은 반짝이고 숲 속의 나뭇잎들은 살랑거리는데 웬 모세란 말인가? 야생의 삶에 익숙한 헉은 갑갑하기만 하다.

헉은 마을 판사에게 가서 자신의 몫으로 맡겨져 있던 6000달러의 거금을 포기할 테니, 대신에 1달러만 달라고 한다.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라면 돈이든 뭐든 다 필요 없다는 것이다. 철부지 행동 같지만, 소유의 질서에 대한 거부감이다.

미시시피 강 가로지르는
14살 헉의 펄떡이는 모험
탈주 노예 흑인과의 우정

주류 질서 비웃는 기개에
헤밍웨이는 말한다
"결국 미국 정신의 뼈대"

어느 날 헉의 아버지가 나타나 그를 숲 속 오두막에 가둔다.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헉은 물론 헉의 돈도 자신의 소유일 따름이다. 헉은 미시시피의 한 섬으로 도망가고, 그곳에서 탈주 노예인 흑인 짐을 만난다. 추격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두 사람은 미시시피 강을 따라 뗏목을 타고 내려간다. 떠나기 전 언덕에서 내려다보니 마을은 왠지 환자들이 모여 사는 병든 곳이고, 그 바깥은 별과 강이 있는 광활한 대자연이다. 미시시피 강과 뗏목 운행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눈에 선하다. 마크 트웨인(1835~1908)이 수로 안내사로 젊은 시절을 보냈던 체험의 반영이다.

뭍과 뗏목을 오가는, 아슬아슬한 모험과 위기의 연속. 그 와중에도 풍자와 유머가 넘실거린다. 따뜻한 영혼은 기죽지 않는 법이다. 왕과 귀족을 자처하는 두 사기꾼과 잠시 동행하기도 한다. 이들은 부흥회에 참석해 개과천선한 척 성금을 모으고, 엉터리 연극을 공연하여 관람료를 갈취하기도 한다. 당시 중서부와 남부 문학에 단골로 등장하는 야바위꾼의 전형이다. 건국 초기 청교도의 청빈사상이 물신주의에 오염되어가고 있는 세태를 풍자한 것이다.

자유 주(州) 오하이오 주가 가까워지자 짐은 초조해진다. 이제 그곳에서 돈을 벌어 자기 아내와 두 아들을 도로 사들이는 꿈에 사로잡혀 허둥댄다. 헉도 잠시 흔들린다. 짐은 사유재산이므로 그를 도피시키는 것은 구출이 아니라 절도다. 천부인권과 소유권이 충돌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헉은 체제에 훈육된 시선, 알량한 양심의 틀을 박차버리고 대범하게 우정의 길을 택함으로써 추격자들을 따돌린다. 만민평등과 우정, 미시시피 강의 정신은 이 장면에서 거세게 용솟음친다. 한 인간은 결코 다른 인간의 재산이 될 수 없다.

둘은 결국 자유 주가 아닌 아칸소 주 파이크스빌 마을에 도착한다. 마침 친척집에 온 톰 소여를 통해 더글러스 과부댁의 여동생인 왓츤 양이 유언으로 짐을 해방시켜 주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트웨인은 어린 시절 노예시장에서 가족과 생이별하며 오열하는 노예 매매의 광경을 보며 자랐다. 그의 장인은 탈주 노예를 감추어준 노예 폐지론자로도 유명했다. 시대 배경이 19세기 초반으로 노예해방 전임을 감안할 때 이후 이 소설이 어떤 대접을 받았을지는 뻔하다. 주인공 헉의 욕설과 상스러운 말은 당시 미국 주류 사회의 교양과 교육의 위선을 조롱하는 목소리다.

헉은 떠돌이였던 아버지에게도, 난파선에 갇힌 갱들에게도, 두 사기꾼에게도 온정의 시선을 보낸다. 헉의 난폭한 아버지보다, 조무래기 갱들보다, 가짜 왕과 가짜 공작보다도, 인간 흑인을 소유물로 여기는 백인 사회 전체가 더 거대한 범죄 집단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얼핏 아웃사이더로 보이지만, 소년 헉의 기개는 미국 정신의 뼈대로 평가된다. "미국의 모든 현대 문학은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비롯되었다"고 헤밍웨이는 말한다. 헉의 모험은 만민평등의 유토피아를 향한 대장정이었다. 미시시피 강의 정신은 곧 우리 '태백산맥'의 정신이다. 미국 사회나 한국 사회나 쉽사리 썩어 문드러지지 않는 것은 그런 도도한 정신의 흐름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헉은 다시 인디언 부락으로 떠날 결심을 한다. 인디언은 미국 건국의 또 다른 희생자가 아니었던가. 트웨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미국은 자신의 원죄를 직시하라!

jhc55@deu.ac.kr

장희창

동의대 교수(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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