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색 고운 술잔에 금빛 국화 한 송이 피니 주인도 객도 신선이 되네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경주 민속주 '황금주' 이야기

일렁이는 금빛에 국화향이 은은하다. 황금주의 매력은 그런 빛과 향에 있다. 아래 사진은 호리병으로 제품화된 황금주(왼쪽)과 그 자매주인 신라주.

건배! 귀가 즐거워야지

"그런데 '건배'라는 소리를 왜 하는지 아쇼? 귀가 심심하기 때문이야. 술을 마시면 우선 그 빛깔에 눈이 즐겁고, 맛에 입이 기쁘고, 향기에 코가 즐겁지. 근데 귀는 아무 좋은 게 없는 거야. 그래서 일부러 '건배!' 그러며 귀를 즐겁게 해주는 거야. 하하하~."

주선(酒仙)의 경지에 다다른 것일까요. 이진완(79) 옹의 내공(?)은 역시 깊었습니다. 그 한마디로 어색하고 서먹하던 술자리의 분위기가 확 풀어졌습니다.

술자리는 수오재(守吾齋·054-748-1310)의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차려졌습니다. 밖에는 겨울 찬 바람이 날카로와 매서운데, 모처럼의 아랫목이 참 좋았습니다.

수오재는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 전통 한옥입니다. 민박 형태로 운영하는 고택인데,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 옵니다.



개다리 소반에 나물 찬

스스로를 기행작가라 부르는 수오재의 주인 이재호 선생이 소담한 개다리소반에 정갈한 나물찬을 내와 자리에 함께 했습니다. 요즘은 보기 어려운 것이라, 개다리소반이 참 반가웠습니다. 전통 한옥, 아랫목, 개다리소반, 나물찬이라! 우리 전통주에 더없이 훌륭한 어울림입니다.

이진완 옹, 한진관 신라주황금주 사장, 이재호 선생, 그리고 기자, 이렇게 넷이서 잔을 거듭 기울였습니다. 황금주를 놓고 말이지요.

이 옹은 황금주를 오늘에 되살려 낸 분이고, 한 사장은 이 옹으로부터 황금주 제조업체인 신라주황금주를 수년 전 물려받은 이입니다. 이 선생은 두 번째라면 몹시도 서러워하는 '경주 전문가'입니다.

황금주는 경주법주가 그런 것처럼 경주의 민속주입니다. 그런데 황금주라! 그 이름이 경주에 절묘하게 맞아 떨어집니다.

경주는 곧 신라인데, 신라는 황금의 나라였습니다. 숱한 금관이나 금장식 등 유물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신라는 우리 역사상 가장 황금을 좋아했던 나라입니다. 얼마나 좋아했으면, 대표 왕족의 성이 '금(김·金)'이겠습니까.



노란 감국의 흥취 '듬뿍'

잔에 따라 놓으니 맑은 황금빛이 일렁입니다. 다른 술에서는 보기 어려운 빛깔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빛깔이 가능할까요? 이진완 옹이 설명해줬습니다.

"국화, 들국화 술이라 그래요. 식용 국화인 감국(甘菊)의 꽃과 잎으로 만듭니다. 그렇게 국화로 술을 담으면 빛깔이 담황색이 돼요. 그런데 이 황금주는 그 빛이 유별나지. 우리 나름의 기술이 있지 않겠어요? 흐흐."

황금주. 그 이름에 비해 맛은 은근합니다. 은은한 국화향이 입안에 오래 남는군요. 그래도 잡된 맛 없이 맑은 맛입니다. 이재호 선생은 약맛이 약간 느껴진답니다.

한 사장은 말합니다. "마시는 법을 제대로 익혀야 합니다. 황금주는 입 안에 오래 두면 안 돼요. 입을 오므려서 머금지 말고 천천히 혀 뒤로 넘기면, 향이 코로 사악 넘어 옵니다. 은은한 국화향이죠."



태평세월을 노래한 酒

이 즈음에서 이진완 옹이 전하는 황금주 이야기를 들려 드리죠.

삼국유사에 보면 신라 헌강왕(재위 875∼886)이 즉위 8년이 됐을 때 경주 월성에 올랐답니다. 자기가 다스리는 도읍의 모습을 내려다 봤는데, 기와집들이 처마에서 처마로 이어져 마치 기러기 날듯 동해까지 뻗어 있고, 사람들은 들국화로 술을 빚어 밤낮으로 즐기는 모습이 보였답니다. 태평의 그 세월이 왕으로서는 몹시도 뿌듯했겠지요.

한데, '들국화로 빚어낸 술'은 주로 평민층에서 만들어 마셨는데, 그러다 보니 제조법이라든가 여타 모습이 문헌상 기록으로 남지 못했던 거죠.

그랬는데, 경주시가 1986년 민속공예촌을 건립하면서 경주를 대표하는 토속주를 개발하기로 계획을 세우고는 한 민간업자에게 그 일을 의뢰했습니다. 그때 관여한 인물이 바로 이진완 옹입니다.

당시 축협 임원으로 있다 퇴임한 그를 그 민간업자가 1987년 토속주 개발의 책임자로 선임한 거죠. 이후 그는 아예 그 업체의 대표직까지 맡았습니다. 황금주는 그렇게 민·관이 합작해 복원한 민속주인 겁니다.

이진완 옹은 쌀과 찹쌀로 고두밥을 짓고 구기자, 들국화와 함께 누룩을 섞어 저온에서 19일간 발효시켜 황금주를 만들어 냈습니다. 핵심은 저온 발효인데, 35도 정도면 5~6일이면 발효가 되는데도 18도 정도에서 더 오래 발효시켰답니다.

뭐든지 급하게 하는 건 해로운 법! 급한 마음을 억제하며 천천히 제대로 발효시켜 만들어 낸 술이 몸에 이롭다는 원칙을 그는 끝까지 지켰답니다.

여하튼 1988년 첫 시음회를 가졌는데, 알코올 도수 14도의 순한 맛에 국화꽃이 숙성돼 술빛이 황금빛을 띠는 걸 보고 모두가 감탄했다고 합니다.



신라주, 깨끗한 맛 일품

참, 황금주의 자매주로 신라주가 있습니다. 발효주인 황금주를 증류시켜 20일 정도 숙성시키면 알코올 도수가 꽤 높은 증류주, 즉 소주가 되는데, 이게 신라주입니다.

한 사장이 시 한 수를 읊어 줍니다. "한 잔 신라주의 취기가 새벽 바람에 사라질까 두렵구나."

감탄하는 눈치로 쳐다보니, 웃으며 사실은 당나라 때 시인 옥계생이 지은 시의 한 구절이라고 합니다. '一盞新羅酒(일잔신라주) 浚晨恐易銷(준신공역소)'. 여하튼, 황금주를 증류시켜 만든 술의 이름은 거기서 따왔습니다. 한 사장은 신라주가 무엇보다 깨끗한 맛이 일품이라 자랑합니다.

사실은 수오재에 오기 전에 경주시 안강읍 검단리에 있는 신라주황금주 양조장을 찾았더랬습니다. 거기서 그는 거대한 증류기를 보여줬습니다. 전통 소줏고리로 만드는 소주는 비현실적이라는 판단에서 일본에서 수입한, 꽤 비싼 기계라더군요. 국내에 몇 개 안 된다고 합니다. 국화향이 확 풍기는 신라주는 황금주가 잘 갈무리된 듯한 맛인데, 깨끗한 맛은 그 증류기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어떤 전통소주는 불 냄새가 나요. 일종의 탄내. 상압식이라 그렇습니다. 솥을 걸어 놓고 소줏고리를 고으면 술이 넘어가면서 타서 넘어가는 거지. 술이 증류되는 발화점이 43도 정도거든요. 계속 압을 올려 53도쯤 넘어가면 불내가 납니다. 우리는 감압식으로 합니다. 47도 정도에서 증류가 됩니다. 그래서 불내가 안 나고 깨끗합니다. 첨가물도 일절 없고요."



포석정 위에서 동동~

'경주 전문가' 이재호 선생도 시 한 수 읊습니다. "서라벌 밝은 달 아래 밤드리 노닐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다…." 유명한 처용가지요. 생뚱맞다는 표정으로 보니 이 선생은 이리 말합니다.

"처용이 그때 밤 깊도록 뭐하며 노닐었겠습니까?"라며 "처용뿐만 아니라 옛 신라 귀족들이 포석정에 띄운 술도 바로 황금주나 신라주 아니었을까요. 그리 상상하니 재미있네요." 하, 과연 재미 있는 생각이겠네요. 천 년 세월이 황금주와 신라주를 통해 하나로 연결되는 느낌입니다.

이진완 옹은 맛도 맛이고 분위기도 분위기지만 황금주가 사람 몸에도 도움이 되는 술이라 강조합니다. 많이 마셔도 탈이 없다는 거죠.

"술을 많이 마시면 눈에 충혈이 오잖아요. 황금주는 그런 걸 오히려 해소시켜 줍니다. 국화의 효과지. 국화는 약방에서도 간 보호제로 많이 사용된다 합니다. 황금주에는 구기자도 들어갑니다. 구기자가 장수 음식이잖아요. 뭐, 어쨌든 내가 20년 이상 황금주를 거의 매일 마셨다 보면 됩니다. 많이 마셨지요. 그래도 이리 건강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80세를 눈앞에 둔 이진완 옹의 얼굴은 참 맑았습니다. 매일 테니스를 즐길 정도로 근력도 좋답니다. 다 황금주 덕택일까요?

그는 황금주는 정직한 술이라 자신한다고 했습니다. 흔한 첨가물 하나 넣지 않고 20여 년을 버텼다는 겁니다. "첫째도 원칙, 둘째도 원칙이에요. 절대 어기지 않으려 했습니다. 사람들 좋아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가볍게 술을 만들지는 않았어요."



'정직'으로 되살린 옛맛

요컨대 그는 스스로를 잘 지켜낸 겁니다. 살아가며 자신을 지켜낸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세파와 유혹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그러고 보니 고택 수오재의 이름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수오재기'(守吾齋記)에서 따온 이름인데, 거기서 다산은 이리 말했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그 성품이 달아나기를 잘하여 드나듦이 일정하지 않다. 비록 친밀하게 붙어 있어서 서로 배반하지 못할 것 같으나, 잠깐이라도 살피지 않으면 어느 곳이든 가지 않는 데가 없다.'

평생을 세파에 흔들리며 부침을 거듭했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했던 한탄으로 들리는데요, 다산 같은 이도 마음 잡기가 그토록 어려웠던 겁니다. 하물며 우리 같은 장삼이사들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이진완 옹처럼 스스로 닦고 또 닦을밖에요.

황금주 한 잔에 참 많은 생각들이 오갔습니다. 술이란 무릇 그래서 좋은 것입니다.

참, 황금주나 신라주의 판매처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마시고 싶다면, 전화(054-762-9988)를 통해 택배로 주문하는 게 낫습니다. 인터넷 홈페이지(www.sillaju.co.kr)가 있지만 공들여 운영할 형편은 못 되나 봅니다. 주문 기능이 없네요.

가격은 술을 담은 병의 종류나 크기에 따라 다른데, 유리병 황금주 1병(700㎖)이 1만 1천 원, 백자 호리병 신라주 1병(700㎖) 2만 7천 원으로 책정돼 있습니다.

글·사진=임광명 기자 kmyim@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