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임라이트]마릴린 먼로와 노마 진 사이 어딘가

이종길 2022. 10. 14.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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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문제의 신작..마릴린 먼로 픽션영화 '블론드'
금발의 백치미 섹시 심벌로 스타덤, 남성 판타지 자극 생존 시도
고정된 이미지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사실 직시하고 좌절
진정한 연기자로 거듭날 기회도 차단됐지만 창조적 삶 갈망

넷플릭스 영화 ‘블론드’는 마릴린 먼로(1926~1962)의 실제 삶을 바탕으로 구성한 창작물이다. 원작인 조이스 캐럴 오츠의 동명 소설은 제유법을 적용하며 상징적 사건들을 내세운다. 실제로 먼로가 한 말은 마지막 장에 두 줄만 들어간다. "도와줘, 도와줘!"

영화 제목으로 써도 될 법한 호소다. 앤드류 도미닉 감독은 먼로(아나 데 아르마스)의 배우 생활 시작과 끝에 ‘프레지던트(President)’를 배치했다. 전자는 할리우드 스튜디오 회장, 후자는 미국 대통령이다. 모두 일방적으로 성적 관계를 요구한다. 먼로는 금세 동공이 풀려버린다. 남성 우월 사회에 억눌린 삶에 지쳐있다.

먼로는 1940~1950년 스타 시스템과 섹스 심벌 논의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당시 할리우드는 위기였다. 텔레비전 대중화, 마이카 붐 등의 영향으로 극장 관객이 감소했다. 가부장적 스튜디오들은 남성 판타지를 자극하며 생존의 길을 모색했다. 로맨틱 코미디를 제작하면서 여배우의 가슴과 엉덩이를 부각했다. 배역들은 하나같이 남성의 욕망과 의사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었다. 남성 공장장이 만든 사이비 여성상의 전형이었고, 중심에는 먼로가 있었다.

비극적 편견은 먼로라는 신체 기호 밖에도 새겨졌다. 본명인 노마 진 모텐슨으로 살아가는 순간에도 쾌락주의와 소비주의에 이용됐다. 먼로는 고정된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힘들단 사실을 직시하고 좌절했다. 영화에서도 기호의 감옥은 탈주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녀가 발버둥을 칠수록 냉혹하게 핍박한다. 싸늘한 죽음마저 장사 수법으로 신화화했으니 마냥 허구로 간주할 수 없다.

섹스 심벌은 분명 먼로가 세계적 인기를 얻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로는 진정한 연기자로 거듭날 기회를 차단했다. 물론 한 가지 유형으로 고정된 배역을 연기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몇 안 되는 차이에 생동감을 부여하며 진부한 공식을 깨야 한다. 먼로는 거푸집 같은 연기라도 매번 신중하게 접근하며 대중의 추종을 끌어냈다.

도미닉 감독은 일련의 과정을 꽤 깊이 있게 조명한다. ‘노크는 필요 없어요(1952)’ 최종 오디션 신이 대표적 예다. 먼로는 정서 불안에 시달리는 베이비시터 넬을 훌륭히 연기하고도 두 손을 모으며 사정한다.

"다시 해도 될까요? 진짜 넬이 될 수 있어요. 저는 넬 자체예요. 넬은 몽유병이 있어요. 제드를 보지 못하고 죽은 약혼자를 보죠. 망상에 갇혔어요. 하지만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부터가 광기일까요? 애초에 모든 사랑은 망상에서 시작하잖아요?"

무심히 쳐다보던 제작진은 먼로가 퇴장하자 하나둘 본심을 내보인다. "진짜로 정신이 나간 것 같았어. 연기나 재주가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연기를 하는 이유가 있지. 그 역할을 맡은 본인은 자기 모습을 잘 아니까."

그들은 숨은 노력의 가치까진 알지 못했다. 먼로는 스타가 된 뒤에도 액터스 스튜디오에서 꾸준히 예술적 재능을 계발했다. 정치적 자유를 갈망하고 진보적 이데올로기를 추종하며 창조적 삶도 추구했다. 반공을 애국적 광기로 몰아가던 매카시즘에 저항했고, 인민주의를 이상으로 삼았다. 그러면서도 신체적 매력을 전략적으로 남성 판타지에 투사해 할리우드 시스템 속에서 생존을 시도했다. 유지나 영화평론가는 칼 롤리슨의 ‘세상을 유혹한 여자, 마릴린 먼로’ 추천 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자아도취와 자기혐오라는 극단적인 인지 부조화 속에서 죽음으로 자신을 내몰 정도로 순수하게 자기를 직면했다."

먼로의 자아와 예술 세계를 잘 탐구한 작품으로는 오드리 플랙의 그림 ‘마릴린(1977)’이 손꼽힌다. 길이 2.4m 캔버스에 거울, 향수, 립스틱 등 변신에 필요한 여러 도구가 그려져 있다. 더불어 배치된 촛불, 시계, 모래시계, 달력은 치열하게 정체성을 찾아 헤매며 짧은 생을 마감한 인생을 암시한다.

오른쪽에 그려진 먼로는 주목받기 직전인 1950년의 얼굴이다. 환하게 웃고 있지만 양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다. 왼쪽 화장대 거울에 반사된 얼굴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만 강하게 뿜어져 나온다.

도미닉 감독도 마지막 장면에서 비슷한 대칭으로 양가적 성격을 강조했다. 약에 취해 죽어가는 모습과 베개를 안고 농염한 미소를 짓는 모습을 얕게 겹쳤다. 먼로는 후자를 떠올리며 남성 판타지에 억눌린 삶을 견뎠을 것이다. 왜곡되고 조작되더라도 창조적 능력을 자극하고 의욕을 불어넣는 잠재적 동기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욕망 때문에 우리는 더 넓은 세상에서 자신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먼로는 멀리 있지 않다. 우리 자신의 확대 거울이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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