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소개

차이코프스키의 삶과 죽음. 그리고 동성애

교클 2021. 3. 21.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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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코프스키(국립국어원 정식 표기는 차이콥스키지만 차이코프스키로 칭하겠습니다.)는 전세계적으로 인기가 많은 작곡가지만 특히 한국에서 정말로 인기가 많은 작곡가로 평가받습니다. 아마도 인기순위를 매기면 5위 안에는 들어갈 거라고 봅니다. 그가 뽑아내는 러시아풍의 애수어린 멜로디가 한국인들 갬성을 자극하기 때문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차이코프스키의 멜로디 뽑아내는 능력은 그 많은 클래식 작곡가들 중에서 천재적인 수준으로 평가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분은 삶에 여러 부분에서 미스테리한 점들이 많습니다. 지금부터 그의 삶과 여러 미스테리들을 알아보겠습니다.

 

차이코프스키는 어린시절 음악적 재능을 보였지만 많은 음악가들의 부모님들처럼 집안의 반대에 의해 법률학교에 진학하게 됩니다. 하지만 역시나 많은 음악가들처럼 음악에 대한 열정을 이기지 못하고 서기관으로 일하는 도중 서구에서 음악을 배워온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루빈스타인 형제의 제자로 들어가면서 본격 음악가의 길에 들어가게 됩니다.

 

 

(청년 차이코프스키. 잘 생겼습니다.)

 

그 당시 러시아 음악계는 루빈스타인 형제의 선진 서구음악을 따라가던 부류와 러시아 5인조로 대표되는 러시아 전통음악을 중시하는 부류로 크게 구별되었는데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 5인조의 음악을 아마추어들의 수준 낮은 러시아 전통음악으로 저평가하던 루빈스타인 형제 밑에서 공부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5인조의 음악을 높게 평가하고 그들의 스타일을 연구합니다.

결국 차이코프스키는 루빈스타인 밑에서 배운 체계적인 음악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러시아 5인조들보다 더 맛깔나는 러시아 스타일 음악을 작곡합니다.ㄷㄷ(하지만 보통 교과서나 기타 음악서적에서는 ‘서구의 음악양식과 러시아 전통 양식을 완벽히 결합시켜 훌륭한 작품들을 만들어 내었다.’ 이런 식으로 적혀있죠;;)

 

이후 졸업하고 나서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 임용됩니다.(대학교 졸업하고 정식 교육을 받은 사람이 음악원 졸업하고 교수로...천재ㄷㄷㄷ)

 

이 시기에 작곡했던 곡이 그 유명한 피아노 협주곡 1번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협주곡 중 하나로 이 곡은 전 세계의 좀 친다는 피아니스트들 중 이 곡을 연주한 적 없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레퍼토리로 가지고 있는 곡입니다.

야심차게 작곡한 이 곡은 스승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에게 헌정하고 초연의 영광을 가져가기를 바랐지만 루빈스타인은 구제불능의 졸작이라는 악평과 함께 곡을 뜯어고치라고 합니다. (이 곡은 루빈스타인이 싫어하던 러시아 냄새가 찐하게 풍기는 곡입니다.) 격분한 차이코프스키는 단 한 음도 고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고 독일 지휘자 한스 폰 뷜로와 미국에서 공연을 하여 초대박을 칩니다. 결국 나중엔 루빈스타인에게 사과까지 받아냅니다.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1악장. 리히테르 연주 - 카라얀 지휘. 유명한 피아니스트들은 거의 모두 이 곡의 레코딩을 남겨놨고 그 누구의 것을 찾아 들어도 좋은 연주를 보장합니다.)

 

아무튼 차이코프스키가 교수와 작곡가의 두 가지 일을 열심히 병행하던 1876년(36세) 어느 날 한 여성과의 기묘한 만남이 시작됩니다. 그 분은 나데즈다 폰 메크라는 젊은 과부였는데 매년 6천 루블이라는 엄청난 거액을 지원하겠다고 알렸습니다. 교수 월급에 몇 배나 되는 양의 이 후원으로 차이코프스키는 돈벌기 위해서 하던 교수직을 때려치우고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됩니다.

근데 대신 내건 조건이 절대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과부가 노총각 작곡가에게 엄청난 금액의 후원을 해주는데 조건이 절대 서로 만나지 않는다?...이상한 일이지만 차이코프스키는 그 약속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차이코프스키에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이유는 바로 밑에...)

 

다음 해 차이코스프키는 결혼을 합니다. 그 상대는 모스크바 음악원 시절 제자 밀류코바.

분명 깨가 쏟아져야 할 시기이지만 결혼생활은 9주를 이어가지 못하고 파탄이 나고 맙니다.

왜냐하면...사실 차이코프스키는 동성애자였습니다. 차이코프스키는 애초에 여자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 결혼도 원래는 전혀 생각이 없었지만 밀류코바의 자살 협박까지 동원한 열렬한 구애 + 잘생기고 능력있는 남자가 그 나이 먹도록 결혼도 안하는 걸 이상하게 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억지로 한 결혼이었기 때문에 좋은 결말이 날 수가 없었습니다.

신혼 생활에서도 적극적인 아내가 성관계를 요구하는 끔찍한(!) 상황이 이어졌고 결국 견디지 못한 차이코프스키는 도망치며 결혼생활은 비극으로 막을 내리고 맙니다.

차이콥스키에게는 자살소동까지 일으킬 만큼 힘든 경험이었고 밀류코바는 이후에도 차이코프스키에 집착하다가 결국 정신병원에서 최후를 맞이합니다. (차이코프스키를 괴롭힌 악녀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어찌보면 이분도 불쌍한 분입니다. 차이코프스키가 동성애자였다는 걸 알 턱이 없었고 차이코프스키도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걸 밝힐 수가 없었을 테니...)

 

 

(차이코프스키와 밀류코바의 투샷. 그러나 이 사진이 표지로 사용되는 일은 없었다.)

 

이 결혼생활은 차이코프스키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갔고 차이코프스키는 이탈리아로 휴양을 하면서 겨우 심신을 추스를 수가 있었습니다. 차이코프스키의 결혼 상대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폰메크 부인은 차이코프스키의 여행 비용을 전부 지원하며 심신을 추스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후 심신을 추스른 차이코프스키는 폰메크 부인의 후원으로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작곡에 전념하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에 교향곡 4,5번, 바이올린 협주곡 오페라 〈에프게니 오네긴〉, 〈스페이드의 여왕〉, 발레곡 〈잠자는 숲속의 미녀〉, 1812년 서곡 등 엄청난 히트작을 쏟아내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합니다.

 

(바이올린 협주곡. 하이페츠의 연주. 5:36초 이후에 나오는 멜로디가 굉장히 강렬합니다. 저 멜로디를 처음 들었을 때 말 그대로 뻑 갔었던 기억이 나네요. 바이올린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이 곡이었습니다.)

 

이렇게 열정적인 창작활동을 하는 중에도 폰메크 부인과는 지속적으로 편지교류를 하는데 14년동안 1200통이나 되는 편지를 주고 받았습니다. 그 내용도 단순한 친교 이상으로 여러 가지 감정 등을 털어놓는 깊은 관계가 됩니다. 물론 그 긴 세월 동안 서로 만남을 가진 일은 일절 없었습니다. (우연찮게 마주친 적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내용 중에는 고개를 갸우뚱 거리게 하는 편지들도 존재합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펜에서 흘러나오는 음표들은 전부 당신을 위한 것임을 알아주세요."

부인에게 최초로 헌정한 교향곡 4번에 대해 언급했던 편지의 내용입니다. 이 교향곡을 차이코프스키는 ‘우리의 교향곡’이라고 칭했습니다.

이 외에도 여러 편지들을 보면 이게 후원자에게 보내는 편지인지 연애편지인지 착각이 들 수준의 애절한 내용들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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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최고의 작곡가로 부상하게 되고 해외에서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하지만 13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폰 메크 부인과의 인연은 너무도 허무하게 끝이 나게 됩니다.

부인이 제정 상황상 더 이상 돈을 보내줄 수 없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하지만 이 말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차이코프스키가 알아본 결과 부인의 제정 상황은 이전과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차이코프스키는 지속적으로 편지를 보냈지만 단 한번도 답장은 오지 않았습니다.

차이코프스키는 폰 메크 부인의 지원을 받는 14년 동안 월클 음악가가 되었기 때문에 재정 지원이 끊어졌어도 금전상의 어려움은 겪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돈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을 터놓을 수 있던 친구이자 음악의 동반자였던 그녀와의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멘탈이 산산조각 나버렸습니다. 아무리 편지를 보내도 어떠한 답도 없으니 결국 차이코프스키의 애정은 증오로 바뀌었고 죽기 전에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저주받을 년이라고 이를 갈았습니다.

 

부인이 왜 갑자기 관계를 끊어버렸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습니다.

폰메크 부인의 친지들이 차이코프스키와의 기묘한 관계를 알아채고 그녀를 비난하자 스캔들에 부담감을 느낀 부인이 관계를 끊었다는 설이 있고 차이코프스키의 동성애 성향을 알게 되어 단교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폰 메크 부인은 결국 차이코프스키가 죽은 후 겨우 4달 뒤에 그를 따라갑니다. 그녀가 차이코프스키에게 품었던 감정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나데즈다 폰 메크 부인)

 

 

부인과의 관계가 끊어졌어도 작곡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 이후에 작곡한 유명한 곡으로 호두까기인형이 있습니다. 발레곡인데 굉장히 아기자기하고 재미있는 곡입니다. 겨울. 특히 크리스마스 전후로 많이 연주가 되죠.

 

(호두까기인형 중 〈사탕 인형의 춤〉. 볼쇼이 발레단. 주 멜로디를 연주하는 악기는 첼레스타라는 악기인데 독특한 음색이 상당히 잘 어울리는 곡입니다.)

 

 

그리고 차이코프스키는 6번째 교향곡을 작곡합니다.

흔히 〈비창 교향곡〉으로 알려진 이 곡은 본인의 불행한 삶을 회상하는 듯한 느낌의 1악장과 슬픈지 기쁜지 미묘한 느낌을 자아내는 2악장을 거쳐 광적인 느낌까지 들 만큼 밝고 화려한 3악장에 도달합니다. 이 3악장이 굉장히 박력있고 화려하게 끝나기 때문에 곡이 끝난 것으로 착각한 관객석에서는 박수가 터져나옵니다.(제 예전 글에도 언급한 적 있는데 악장 중간에서는 박수를 치지 않는 것이 불문율입니다. 하지만 이 곡에서는 거의 지켜지지 않습니다.)

근데 뒤이어 현의 처절한 멜로디가 울려 퍼집니다. 아직 4악장이 남아있습니다. 원래 4악장은 단조 교향곡이라도 장조로 돌아와서 빠른 템포로 화려하고 당당하게 끝나는 게 베토벤 이후로의 규칙이었는데(차이코프스키의 기존 교향곡들도 이렇게 끝납니다.)이 곡은 느리고 조용한데다 슬픔의 끝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에는 아주 조용히, 들릴 듯 말듯이 끝을 맺습니다.

 

이 곡의 초연당시 반응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화려한 엔딩을 기대한 사람들이 침울하게 끝나는 엔딩에 적응하지 못하고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초연 9일 뒤 차이코프스키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마치 비창 교향곡이 자신의 죽음을 염두하고 작곡한 것처럼...

사인은 콜레라. 콜레라균에 오염된 물을 잘못 마셨다가 병에 걸려 사망했다는 발표가 나왔습니다.

이후 그의 문상 기간에는 수많은 친지들과 동료 작곡가들이 자리를 지켰고 마지막 장례식에는 8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서 대작곡가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습니다.

 

......콜레라에 걸린 사람한테??? 이 시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이게 얼마나 말이 안되는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콜레라 같은 전염병에 걸렸는데 일체의 방역수칙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시신에 대한 철저한 격리는커녕 시신의 손에 입을 맞추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도 콜레라가 전염병이라는 사실과 기본적인 방역수칙은 존재하던 상태입니다.)

 

그의 죽음에는 미스테리한 부분이 많습니다.

공식적인 사인은 콜레라였지만 당시에도 그의 죽음에 관한 사람들의 의심이 있었고 1979년 소련에서 부검을 한 결과 시신에서 상당량의 비소가 검출이 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아무튼 죽은 이후 지금까지도 그의 죽음에 대한 상당한 논란이 있습니다.

많은 독극물 중 비소가 검출된 이유는 비소에 중독되면 쌀뜨물 같은 설사증세를 보인다고 하는데 이는 콜레라 감염의 증상과 비슷하기 때문에 콜레라로 위장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차이코프스키는 비소가 든 물을 일부러 마시고 자살을 했다는 주장입니다.

그럼 왜 차이코프스키는 죽음을 선택한 것일까요? 비창 교향곡의 실패에 좌절해서 자살을 했다는 말도 있습니다.(차이코프스키가 실패한 곡이 한 두 개가 아닙니다. 고로 신빙성은...)

현재 가장 많이 회자되는 이야기는 차이코프스키의 동성애 성향을 알아차린 법률학교(차이코프스키가 음악을 배우기 전의 학교) 동문들이 차이코프스키의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킬 것을 우려하여 비밀재판을 하였고 그 재판에서 자살하라는 결론이 나와 차이코프스키가 자살을 했다는 설입니다. 차이코프스키도 본인의 동성애 성향이 들통나면 지금의 명예를 모두 잃고 사회적 매장을 당할 테니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거고요.

 

차이코프스키의 죽음에 대한 정확한 진실은 미스테리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저 비밀재판 자살강요설이 사실인 것처럼 많이 알려져 있는데 사실 잘 나가던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을 경우 나오는 음모론과 많이 유사한 점으로 봐서는 개인적으로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글을 쓰기 위해서 여러 자료들을 찾아보니 통설과는 반대로 당시 러시아에서 동성애는 큰 흠이 아니었다는 글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1979년의 부검 같은 경우도 영문 사이트에서는 검색이 되지 않는 내용입니다...어쩌면 진짜 콜레라로 죽었던 것이 맞을지도?

 

 

(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교향곡 3악장과 4악장입니다. 므라빈스키 지휘-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3악장은 웬만한 교향곡의 마지막보다도 더욱 화려하게 끝나지만 4악장은 마치 자신의 죽음을 직감이라도 한 것처럼 처절하게 슬픈 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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