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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求古深論

나옹선사 선시 몇 수(懶翁禪師 禪詩 몇 首)

고려 말의 뛰어난 고승 나옹선사(懶翁禪師, 1320∼1376)의 이름은 혜근(慧勤)이다. 법호는 나옹, 호는 강월헌(江月軒). 선사의 나이 21세 때 문경 공덕산 묘적암(妙寂庵) 요연선사(了然禪師)께 찾아가 출가했다. 그 뒤 5년 후 양주 회암사에서 밤낮없이 정진하다가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다. 1347년에는 중국 원나라로 들어가 연도(燕都)의 법원사(法源寺)에 머물고 있던 인도 출신인 지공(指空) 스님을 만나 법을 들은 뒤 다시 정자사(淨慈寺)로 가서 평산처림(平山處林. 1279~1361 臨濟의 법을 이어받은 중국의 고승)의 법을 전해 받고 불자(拂子)를 받는다. 1358년에 다시 지공을 만난 뒤 고려로 귀국한다. 1361년에는 공민왕의 부름을 받고 궁중에 들어가 내전에서 왕을 위하여 설법하고 왕과 왕비로부터 가사와 불자를 하사 받고 왕사가 된다. 여주 신륵사에서 우왕 2년(1376)에 세수 57세 법랍 37세로 입적하였다. 열반 이후의 다비 과정에서 산이 방광(放光)하며 감로비가 내리고 신룡이 나타나며 사리가 분신하여 증과 하는 등 이적(異蹟)이 속출하였다. 이로 인하여 나옹에 대한 추모 열기가 전국을 휘몰아치게 되고, 마침내 조선초에 이르러서는 붓다의 후신으로까지 평가되며 신성화되기에 이른다. 나옹의 법맥을 무학자초(無學 自超) 대사가 이어받아 이성계의 조선 개국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지공 스님과 나옹과의 관계는 "한국 선불교의 원류 지공과 나옹 연구"(불광출판사)를 펴낸 자현(玆玄·47) 스님의 책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확신한다.

려말 선초(麗末鮮初), 붓다의 후신으로 존숭(尊崇) 받은 나옹이 남긴 선시를 통해 느껴지는 일면목과 한국 선불교의 올바를 이해와 마음속 청정(淸淨)을 찾고자 몇 수를 자서해 보았다.

 

청산은 나를보고(靑山兮要我)

靑山兮要我以無語(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聊無愛而無憎兮(료무애이무증혜)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如水如風而終我(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靑山兮要我以無語(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聊無怒而無惜兮(료무노이무석혜)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山居(산거 : 산에서 살아가며...)

松窓盡日無塵鬧(송창진일무진요) 소나무 보이는 창가엔 종일 아무 번잡한 일이 없고

石槽常平野水淸(석조상평야수청) 돌 물통은 항상 평온하고 고인 물도 맑아라.

折脚鐺中滋味足(철각당중자미족) 다리 부러진 솥엔 맛있는 음식이 풍족한데

豈求名利豈求榮(기구명리기구영) 어찌 명리를 찾고 영화를 구하리요?

 

白雲堆裏屋三間(백운퇴리옥삼간) 흰 구름 쌓인 곳에 세 칸 집

坐臥經行得自閑(좌와경행득자한) 앉든 눕든 거닐든 스스로 한가롭구나

磵水冷冷談般若(간수냉냉담반야) 산골짜기 차가운 물은 반야를 노래하며 흐르고

淸風和月遍身寒(청풍화월편신한) 맑은 바람은 달과 함께 온 몸을 시원하게 하네.

 

幽巖靜坐絶虛名(유암정좌철허명) 아늑한 바위에 고요히 앉아 헛된 명성 끊고

倚石屛風沒世情(기석병풍몰세정) 돌 병풍에 기대 앉으니 세속의 정이 사라지네.

花葉滿庭人不到(화엽만정인부도) 꽃잎은 뜰에 만개한데 사람 오지 않고

時聞衆鳥指南聲(시문중조개남성) 때때로 들려오는 뭇 새소리는 나를 깨우치는 소리라.

 

虛菴(허암 : 빈 암자)

四面元來無一物(사면원래무일물) 사면이 원래 아무것도 없으니

不知何處擬安門(부지하처의안문) 문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도 모르겠네.

這閒小屋空空寂(저한소옥공공적) 이 조그만 집이 텅 비고 고요한데

明月淸風掃白雲(명월청풍귀백운) 밝은 달 맑은 바람이 흰 구름을 쓸고 있네.

 

友梅(우매 : 정겨운 매화)

 

同心妙旨孰能歡(동심묘지숙능환) 깊은 뜻을 함께하는 마음 누가 능히 기뻐할까?

雪裏淸香透室間(설리청향투실간) 눈 속에 맑은 향기 방 안까지 풍겨오네.

唯有軒前松與竹(유유헌전송여죽) 집 앞에 있는 소나무와 대나무만이

共他一樣耐霜寒(공타일양내상한) 그와 함께 서리와 추위 이겨내는구나.

 

 

深谷(심곡 : 깊은계곡)

極遠誰能到那邊(극원수능도나변) 지극히 먼 곳 누가 능히 그 곳까지 이르랴,

片雲橫掛洞門前(편운횡괘동문전) 조각 구름만이 골짜기 입구에 걸쳐 있네.

其中勝境無人識(기중승경무인식) 그 가운데 뛰어난 경치 아는 사람 없는데

明月淸風弄碧川(명월청풍농벽천) 밝은 달 맑은 바람이 푸른 시냇물을 희롱하네.

 

唐道元 求偈(당도원 구게 :  당나라 도원(道元)이 게송을 청하기에)

參禪只在起疑團(참선지재기의단) 참선이란 다만 의심 덩어리를 일으키는 것

疑去疑來似火團(의거의래사화단) 의심하고 의심하기를 불덩어리같이 해 야지.

不覺全身都放下(불각전신도방하) 자기도 모르게 온 몸을 놓아버릴 때

大千沙界一毫端(대천사계이호단) 우주가 하나의 터럭 끝에 있으리라.

 

大圓(대원 : 크게 깨침)

包塞虛空絶影形(포색허공절영형) 허공을 다 둘러싸고도 그림자나 형체조차 없으니

能含萬像體常淸(능함만상체상청) 만물을 다 품고 있으면서 그 본체는 항상 맑구나.

目前眞景誰能量(목전진경수능량) 눈앞의 진경을 누가 능히 헤아리리오?

雲卷靑天秋月明(운권청천추월명) 구름 걷힌 푸른 하늘에 가을 달이 밝구나

 

경세(警世 : 세상을 경계함)

終世役役走紅塵(종세역역주홍진) 세상 다하도록 열심히 하여 홍진을 달리어

頭白焉知老此身(백두언지노차신) 머리 희고 이 몸 늙은 줄 어찌 알았으리오

名利禍門爲猛火(명리화문위맹화) 명리 추구는 화의 문, 맹렬한 불꽃이 되고

古今燒盡幾千人(고금호진기천인) 고금에 몸을 다 태운 이 어찌 천 사람뿐이랴

 

임종게(臨終偈)

七十八年歸故鄕(칠십판년귀고향) 칠십팔 년 고향으로 돌아오니

天地山河盡十方(천지산하진시방) 천지산하가 변함없이 그대로 인데

刹刹塵塵皆我造(찰찰진진개아조) 삼라만상 모든 것은 내가 만들었으며

頭頭物物本眞鄕(두두물물본진향) 이 모든 것은 본래 내 고향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