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네 프랑크 마지막 함께 한 수용소 ‘단짝’ 93세로 별세

입력 2022.10.29 (20:40) 수정 2022.10.29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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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치하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린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의 친구 중 한 명이었던 하나 피크-고슬라어가 93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안네 프랑크 재단은 28일(현지시간) 성명을 통해 안네의 일기에서 ‘가장 친한 친구’로 언급됐던 피크-고슬라어의 별세 소식을 전하면서 애도를 표했습니다. 재단은 피크-고슬라어의 구체적인 사망 일시나 사인 등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1928년생으로 안네보다 한살 많은 피크-고슬라어의 가족은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자 독일을 떠나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 안네 가족의 옆집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후 피크-고슬라어와 안네는 소꿉친구가 돼 유치원과 학교를 함께 다녔습니다. 피크-고슬라어는 안네의 13살 생일 때는 이후 ‘안네의 일기’가 된 붉은색과 흰색 체크무늬 일기장을 안네가 부모님으로부터 선물 받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독일이 1940년 중립국이었던 네덜란드를 침공하고 1942년 안네 가족이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를 피해 다락방으로 몸을 피하면서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됐습니다.

기약 없는 은둔 생활이 이어지자 안네는 일기장을 통해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했습니다.

안네는 1942년 6월 14일 일기에는 ‘하넬리(피크-고슬라어의 애칭)와 잔은 한때 가장 친한 친구들이었다. 사람들은 우리가 항상 함께 있는 걸 보고 ’저기 안네, 하나, 잔이 간다‘고 말하곤 했다“고 적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이 재회한 것은 1945년 2월이 되어서였습니다. 1944년 누군가의 밀고로 체포된 안네가 아우슈비츠를 거쳐 도착한 독일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에서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처지로 다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서로 다른 구획에 수감된 두 사람은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가끔 얼굴을 마주했습니다. 이 수용소에서 언니를 잃은 안네는 눈물을 흘리며 ”내겐 아무도 없다“고 토로하기도 했다고 피크-고슬라어는 회상한 바 있습니다.

결국 안네는 같은해 3월 발진티푸스에 걸려 목숨을 잃었습니다.

한 달 뒤 연합군은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를 나치 독일의 손에서 해방했고, 피크-고슬라어는 1947년 이스라엘로 이주해 간호사가 됐습니다.

안네와 피크-고슬라어의 사연은 1997년 미국 작가 앨리슨 레슬리 골드의 손을 거쳐 소설화되기도 했습니다. 이 소설은 작년에는 ’내 친구 안네 프랑크‘란 제목의 영화로 제작돼 개봉했습니다.

[사진 출처 :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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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0-29 20:40:10
    • 수정2022-10-29 20:40:36
    국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치하의 참상을 전 세계에 알린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의 친구 중 한 명이었던 하나 피크-고슬라어가 93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안네 프랑크 재단은 28일(현지시간) 성명을 통해 안네의 일기에서 ‘가장 친한 친구’로 언급됐던 피크-고슬라어의 별세 소식을 전하면서 애도를 표했습니다. 재단은 피크-고슬라어의 구체적인 사망 일시나 사인 등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1928년생으로 안네보다 한살 많은 피크-고슬라어의 가족은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자 독일을 떠나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 안네 가족의 옆집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후 피크-고슬라어와 안네는 소꿉친구가 돼 유치원과 학교를 함께 다녔습니다. 피크-고슬라어는 안네의 13살 생일 때는 이후 ‘안네의 일기’가 된 붉은색과 흰색 체크무늬 일기장을 안네가 부모님으로부터 선물 받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독일이 1940년 중립국이었던 네덜란드를 침공하고 1942년 안네 가족이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를 피해 다락방으로 몸을 피하면서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됐습니다.

기약 없는 은둔 생활이 이어지자 안네는 일기장을 통해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했습니다.

안네는 1942년 6월 14일 일기에는 ‘하넬리(피크-고슬라어의 애칭)와 잔은 한때 가장 친한 친구들이었다. 사람들은 우리가 항상 함께 있는 걸 보고 ’저기 안네, 하나, 잔이 간다‘고 말하곤 했다“고 적기도 했습니다.

두 사람이 재회한 것은 1945년 2월이 되어서였습니다. 1944년 누군가의 밀고로 체포된 안네가 아우슈비츠를 거쳐 도착한 독일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에서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처지로 다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서로 다른 구획에 수감된 두 사람은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가끔 얼굴을 마주했습니다. 이 수용소에서 언니를 잃은 안네는 눈물을 흘리며 ”내겐 아무도 없다“고 토로하기도 했다고 피크-고슬라어는 회상한 바 있습니다.

결국 안네는 같은해 3월 발진티푸스에 걸려 목숨을 잃었습니다.

한 달 뒤 연합군은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를 나치 독일의 손에서 해방했고, 피크-고슬라어는 1947년 이스라엘로 이주해 간호사가 됐습니다.

안네와 피크-고슬라어의 사연은 1997년 미국 작가 앨리슨 레슬리 골드의 손을 거쳐 소설화되기도 했습니다. 이 소설은 작년에는 ’내 친구 안네 프랑크‘란 제목의 영화로 제작돼 개봉했습니다.

[사진 출처 :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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