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고궁 산책…정조가 직접 꼽은 '창덕궁 후원' 10경은?

신병주 교수

발행일 2022.11.09. 14:10

수정일 2022.11.09.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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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창덕궁 후원에 설치된 규장각
창덕궁 후원에 설치된 규장각

신병주 교수의 사심(史心) 가득한 역사 이야기 (34) 창덕궁 후원을 사랑한 정조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궁궐이 창덕궁(昌德宮)이다. 1997년 12월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창덕궁 전각의 뒤쪽으로는 북쪽으로 북한산과 응봉(鷹峯)에서 뻗어내린 자연스런 구릉지가 넓게 펼쳐져 있어서 아늑함과 평화로움을 제공한다. 

조선왕실에서는 이곳에 자연과 조화시킨 연못과 정자 등을 적절히 배치하여 왕실의 휴식 공간인 후원(後苑)으로 활용했다. 창덕궁 후원을 특히 사랑한 왕은 정조(正祖:1752~1800, 재위 1776~1800)였다.

1. 정조와 상림(上林) 10경

창덕궁 후원은 옛 기록에 따르면 북원(北苑), 금원(禁苑), 상림(上林)이라고 불렀다. 1980년대까지는 비원(秘苑)이라는 용어로 자주 지칭되었지만, 비원은 1904년 이후 주로 일제 강점기에 주로 지칭된 용어로 최근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창덕궁 후원은 세조 때 현재의 규모로 확장된 이래 인조, 숙종, 정조, 순조 등 여러 왕들의 재위 기간에 걸쳐 필요에 따라 각 영역이 조성되었다. 후원 영역은 정자, 연못, 돌담, 장식물 등이 현재까지도 그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고, 인공미와 자연미가 조화되어 조선 왕실의 풍류와 멋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 

후원의 넓이는 약 9만여 평으로, 조선 시대 궁궐 후원 중에서 가장 넓고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 창덕궁 후원에는 조선 초기부터 백여 개 이상의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들이 세워진 것으로 나타나지만 현재는 40여 채 정도가 남아 있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창덕궁 후원을 특별히 사랑해서 이곳에서 경치가 뛰어난 10곳을 선정하여 ‘상림(上林) 10경(景)’이라 하였다. 

정조가 꼽은 절경은 왕이 관풍각에서 논을 경작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관풍춘경(觀豐春耕)’, 망춘정에서 듣는 꾀꼬리 지저귀는 소리인 ‘망춘문앵(望春聞鶯)’, 천향각 주변에서 늦은 봄을 즐긴다는 ‘천향춘만(天香春晩)’, 규장각 어수문(魚水門) 앞 부용지 연못에서의 뱃놀이를 뜻하는 ‘어수범주(魚水泛舟)’, 소요정 앞에서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는 ‘소요유상(逍遙流觴)’, 희우정에서 연꽃을 감상하는 ‘희우상련(喜雨賞蓮)’, 청심정에서 비 갠 후 바라보는 달의 모습을 묘사한 ‘청심제월(淸心霽月)’, 관덕정에서 단풍을 구경하는 ‘관덕풍림(觀德楓林)’, 영화당에서 과거 합격자를 뽑고 시상을 하는 ‘영화시사(暎花試士)’, 후원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능허정에서 바라보는 눈 내리는 저녁 풍경을 뜻하는 ‘능허모설(凌虛暮雪)’이다. 
부용지
부용지

어수문 앞 부용지는 정조가 신하들과 술자리를 자주 베풀었던 곳으로, 배를 띄우고 즐겼던 낭만적인 풍경이 그대로 느껴졌다. 가장 인상 깊은 곳은 소요정으로, 현재에도 소요정 앞으로는 옥류천이 유상곡류(流觴曲流:술잔을 두면 빙글 돌아 흘러감) 형태로 지나가고 있다. 소요정 앞 소요암(逍遙庵)에는 인조가 쓴 ‘옥류천(玉流川)’ 글씨와 숙종이 직접 지은 어제시(御製詩)가 눈에 들어온다. 

최근 문화재청에서는 상림 10경을 보다 널리 알리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필자는 현재의 창덕궁과 창경궁 후원에 자리한 10곳을 직접 탐방하면서 이곳의 가치를 다시 살펴보았다. 비공개 지역인 까닭으로 그동안 가지 못했던 능허정을 처음 찾은 것은 특히 의미가 깊었다. 후원 깊숙하고도 높은 곳에 위치하여 정조 대에는 눈이 쌓인 궁궐의 모습을 그대로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2. 후원의 중심에 규장각을 설치하다

정조는 1776년 영조가 경희궁(慶熙宮)에서 승하하자, 3월 11일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식을 올렸으나, 즉위 직후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기려는 구상을 하였다. 이해 6월에는 후원의 가장 중심되는 공간에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였다. 즉위 초기부터 규장각과 같은 학문 연구기관이자 왕실 도서관의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9월 25일에는 영화당 북쪽에 2층 누각을 세우고 1층에 규장각, 2층에 주합루(宙合樓) 현판을 걸었다. 19세기의 학자 유본예가 쓴 『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규장각에 대하여, “창덕궁 금원 북쪽에 있다. 위는 樓이고 아래는 당으로 모두 6칸이며, 어진(御眞), 어제(御製), 어필(御筆), 보책(寶冊), 인장(印章)을 봉안하고 있다. 편액은 ‘奎章閣’이라 하는데 숙종의 어필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위 이듬해인 1777년 8월 6일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 왕비 효의왕후 등과 함께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본격적인 창덕궁 시대를 맞이하였고, 규장각과 함께 창덕궁의 후원 영역은 이제 정조가 가장 애착을 가지며 활용하는 공간이 되게 된다.

규장각은 규장각 신하들인 각신(閣臣)들이 모여 연구를 하는 규장각 이외에 여러 부속 건물이 있었다. 우선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근처에 사무실에 해당하는 이문원(摛文院)을 두었고, 역대 왕들의 초상화, 어필 등을 보관한 봉모당(奉謨堂)을 비롯하여, 국내의 서적을 보관한 서고(西庫)와 포쇄(曝曬:서책을 정기적으로 햇볕이나 바람에 말리는 작업)를 위한 공간인 서향각(西香閣), 중국에서 수입한 서적을 보관한 개유와(皆有窩), 열고관(閱古觀), 그리고 휴식 공간으로 부용정(芙蓉亭)이 있었다. 

부용정은 1707년(숙종 33년)에 창덕궁 후원에 처음 세웠고, 당시 이름은 택수재(澤水齋)였다. 이후 정조가 1792년(정조 16년) 이곳을 고쳐 지은 후 부용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개유와와 열고관은 청나라에서 수입한 『고금도서집성』 5,022책 등을 보관한 공간으로, 이러한 수입 도서들은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서양의 문물을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규장각을 중심으로, 정조가 직접 편찬을 주관한 책인 어정서(御定書) 2,400여 권과 이덕무, 박제가 등 검서관(檢書官) 출신 학자들이 분담하여 편찬한 명찬서(命撰書) 1,500여 권을 합하여 4,000여 권에 가까운 방대한 편찬 사업이 이루어졌고, 이들 책들은 조선후기 문화 중흥의 성과로 남게 되었다.
존덕정
존덕정

3. 존덕정과 ‘만천명월주인옹’

창덕궁 후원에서도 정조의 의지가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정자가 존덕정(尊德亭)이다. 존덕정은 후원의 정자 중에서도 화려하며 독특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천장에는 청룡과 황룡의 쌍룡이 그려져 있다. 지붕 처마가 2층이면서 육각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육우정(六隅亭)이라고도 한다. 

창덕궁의 연혁과 건물 구성을 정리해 놓은 책인 『창덕궁지(昌德宮志)』에 의하면, “존덕정(尊德亭)은 심추정(深秋亭) 서북쪽에 있다. 못이 있어 반월지(半月池)라 부른다. 인조 22년(1644) 갑신(甲申)에 세웠다. 처음에는 육면정(六面亭)이라 부르다가 뒤에 이 이름으로 고쳤다. 다리 남쪽에는 일영대(日影臺)를 두어 시각을 쟀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자 북쪽에는 반월형 연못과 네모난 연못이 나란히 있는데, 이는 즉 둥근 하늘과 네모난 땅을 상징한다. 현판의 ‘존덕정’이란 글자는 헌종의 어필이며, 선조의 어필로 새긴 두 수의 한시 게판(揭板)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정조는 신하들과 함께 자주 창덕궁 후원을 거닐었다. 1793년 2월 28일의 『정조실록』에는 “춘당대에 나아가 명하여 각신, 승지, 사관과 장용영, 약원의 여러 신료들에게 짝을 지어 활쏘기를 하도록 하였다. 상이 친히 손바닥만한 과녁에 4발을 쏘아 맞혔고, 또 편곤(片棍)을 쏘아 3발을 맞혔다. 술과 음식을 내리고 여러 신하들에게 내원(內苑)의 여러 경치를 두루 구경하게 하였다.”고 기록하여, 정조가 신하들과 하께 창덕궁 후원을 거닐던 모습을 중언하고 있다. 

한편 『일성록』에는 이날의 상황이 더 구체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즉 정조가 궁중 음식을 전담하는 사옹원에 명하여 존덕정 아래 계곡 경치 좋은 곳에 화고(花餻:꽃으로 만든 떡)를 갖추어 놓게 하고 술과 음식을 즐긴 모습이 보인다. 정조는 “이 존덕정에 처음 들어온 신하들은 다시 주량대로 다 마시라.”고 하였다고 한다. 신하들과 함께 풍류를 즐기며 호방한 모습을 보였던 정조의 인간적인 모습이 그대로 느껴진다.

정조와 존덕정의 인연은 정조가 말년에 스스로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는 호를 사용하면서, 존덕정에 ‘만천명월주인옹 자서(自序)’ 현판을 걸게 했기 때문이었다.

『홍재전서』에 기록된 자서에 의하면, “만천명월주인옹은 말한다. …달은 하나뿐이고 물의 종류는 일만 개나 되지만, 물이 달빛을 받을 경우 앞 시내에도 달이요, 뒷 시내에도 달이어서 달과 시내의 수가 같게 되므로 시냇물이 일만 개면 달 역시 일만 개가 된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달은 물론 하나뿐인 것이다. …나의 연거(燕居) 처소에 ‘만천명월주인옹’이라고 써서 자호(自號)로 삼기로 한 것이다. 때는 무오년(1798, 정조22) 12월 3일이다.”라고 하였음이 나타난다.

만 개의 개천에 만 개의 달이 비치지만 오직 하늘에 떠 있는 달은 바로 정조 자신뿐이라는 의미를 담은 글귀이다. 이 자서에는 모든 백성을 골고루 사랑하는 초월적인 군주가 되겠다는 정조의 자부심이 담겨져 있다. 

정조 재위 22년인 1798년에 쓴 ‘만천명월주인옹자서’는 1795년에 단행된 대규모의 화성 행차와 더불어 정조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백성에게 고루 덕을 베풀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었다. 정조의 이러한 모습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 러시아의 에카테리나 2세 등 서양의 계몽 군주에 비교하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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