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피리 부는 아내

추억의 샘이 된 '보리 깜부기'

등록 2007.04.16 15:19수정 2007.04.17 08:54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내가 연구실로 전화를 걸어왔다.

"시간 좀 낼 수 있어요?"
"왜요?"
"그냥…."

이 정도면 더 이상 묻고 답하지 않아도 아내의 마음을 안다. 우리는 그 정도 서로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벌써 오랜 세월을 함께 했기 때문이다.

평일도 휴일도 가리지 않고 학교 연구실로 향하는 남편에게 아내는 화가 나서 지금 투정을 부리고 있는 중이다.

"그래, 간단히 정리를 하고 바로 내려가마."

집으로 내려가니 아내가 대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로 갈까?"
"몰라, 아무 데나."

자동차 핸들을 시외로 돌렸다. 지금 남녘에는 봄이 한창이다. 이미 도회지의 벚꽃은 지고 잎이 많이 돋았지만, 산벚나무는 이제야 꽃을 피워 먼 산이 산벚으로 화사하다.

낙동강변으로 향했다. 감자와 파 등이 온 밭 가득 심어져 있었다. 농부들이 땀 흘린 결과이다. 한미FTA가 체결되더라도 미래의 농촌 들녘에서 이런 풍경을 만나 볼 수 있을까? 아마도 그땐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벌어질 것이라 예상이 된다.

a

보리밭 ⓒ 강재규

삼량진으로 향하는 길 옆에는 보리밭이 늘어서 꽃을 피우고 있었다. 어릴 적 보았던 시골의 보리밭과는 많이 달라 보였다. 태평농업을 하는 것일까? 그냥 빈 논에 씨를 뿌려두고 정성들여 가꾼 보리밭 같지가 않았다. 열심히 농사를 지어봐야 별로 소득 보전이 되지 않으니, 그냥 비워두기보다는 손이 적게 가는 보리를 뿌려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 등하굣길에서 간식으로 즐겨 뽑아 먹었던 '깜부기'도 피어 있었다. 사람 머리 위에 빳빳이 솟은 새치가 두드러지듯, 병든 보리인 깜부기 역시 높게 피어 있어 쉽게 눈에 띄었다.

a

보리 깜부기 ⓒ 강재규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보리밭에서 발견한 보리 깜부기를 보니 무척 반가웠고 어린 시절의 추억이 뇌리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깜부기를 먹은 새까만 입, 친구들과 장난치느라 얼굴에 새까맣게 깜부기로 화장을 하고서 허연 이를 드러내고 마주보고 웃던 옛 시절이 떠올라 입가엔 슬며시 미소가 감돌았다.

깜부기는 보리에 발병하는 바이러스성 질병이다. 하지만 묘하게도 그것은 주린 배를 한 나른한 봄날, 등하굣길 학동들의 멋진 간식이었다. 텁텁하면서도 약간은 고소한 맛이었던 것 같다.

a

보리피리 부는 아내 ⓒ 강재규

깜부기로 변한 보리 줄기를 하나 뽑아 아내에게 보리피리를 만들어 주었다. 흥겨워하며 보리피리를 부는 아내의 얼굴에는 웃음이 번진다. 아내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무거웠던 나의 마음도 한층 가벼워졌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인제대 법학과 교수. 전공은 행정법, 지방자치법, 환경법. 주전공은 환경법. (전)한국지방자치법학회 회장, (전)한국공법학회부회장, (전)한국비교공법학회부회장, (전)김해양산환경운동연합 상임의장, (전)김해YMCA이사장, 지방분권경남연대상임대표, 생명나눔재단이사, 김해진영시민연대감나무상임대표, 홍조근정훈장수훈

AD

AD

AD

인기기사

  1. 1 나이 들면 친구를 정리해야 하는 이유
  2. 2 맨발 걷기 길이라니... 다음에 또 오고 싶다
  3. 3 눈썹 문신한 사람들 보십시오... 이게 말이 됩니까
  4. 4 [단독] 민생토론회 한 번에 1억 4천... 벼락치기 수의계약
  5. 5 [단독] '대통령 민생토론회' 수의계약 업체, 사무실 없거나 유령회사 의혹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