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 잡는 해병’ 어쩌다 이 지경 됐나

2022.04.02 11:28 입력 2022.04.02 11:32 수정

현역병, 휴가 중 우크라로

탈영 이유는 ‘병영 부조리’

2017년 8월 울릉도 전개훈련에 참가한 해병대원들이 해군 상륙함정에서 하선망을 이용해 상륙주정에 탑승하고 있다.  해병대사령부 제공

2017년 8월 울릉도 전개훈련에 참가한 해병대원들이 해군 상륙함정에서 하선망을 이용해 상륙주정에 탑승하고 있다. 해병대사령부 제공

“흔히 말하는 ‘일말상초’쯤이었다. 밖에 나가면 ‘해병부심’ 절대 부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동기 중에도 그때쯤 생각이 바뀌는 애들이 꽤 있더라.”

대학생 김우진씨(23)는 지난해 해병대에서 의무복무를 마치고 전역했다. 대학 복학 후 어떻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알았는지 해병전우회에서 연락이 온 뒤 전화번호를 바꿔버렸다. 대학에서까지 해병 입대 기수에 따라 움직이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이등병과 일병 시절만 해도 빨간 명찰을 달고 휴가를 나오면 선임병들을 따라 어깨에 힘이 들어가곤 했지만, 어느새 자신의 처지에 회의가 들었다. “남자답게 군생활 해보려는 마음으로 해병대에 지원했는데 모델로 삼을 만한 ‘짜세 나는’(멋진) 해병을 보기 힘들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김씨는 병영생활 역시 코로나19 팬데믹에서 자유롭지 않았다고 말했다. 휴가가 취소 또는 연기되면서 병사들이 느끼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과거와 달리 선임병들이 대놓고 구타나 가혹행위를 일삼을 수 없는 환경으로 바뀌긴 했지만 그렇다고 후임병들이 괴롭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김씨는 “해병대의 일원이 됐다는 자부심에서 점점 물이 빠지고, 한편으로는 후임병들을 관리해야 하는 계급이 되면서 ‘왜 이렇게 쓸데없는 관습을 따라야 하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악과 깡을 키우기 위해 ‘악기바리’라는 이름으로 신병에게 음식을 과하게 먹인다거나, 후임병에게 중요한 물건인데도 아무 거리낌 없이 가져가는(속칭 ‘긴빠이’) 선임병을 볼 때마다 거부감이 들었다.

■‘해병문학’ 이름의 밈까지 유행

김씨도 최근 인터넷커뮤니티 등에서 유행하는 ‘해병문학’이라는 밈을 잘 알고 있다. ‘해병대갤러리’라는 인터넷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지난해부터 인기를 끌기 시작한 해병문학은 ‘문학’이라는 표현처럼 해병 영내생활을 과장된 형태로 풍자하는 가공의 이야기들이 하나둘씩 모이면서 자리 잡았다. 풍자라고는 하지만 처음 유행이 시작된 지점과 달리 많은 이용자가 살을 붙여 나가면서 조롱 또는 비하 성격을 강하게 띤 일종의 혐오표현처럼 변질됐다. 선임이 후임에게 몸에서 나오는 분비물을 주입하거나 성적인 폭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는 내용이 버젓이 담길 정도다. 김씨는 “‘해병문학’의 터무니없는 과장이 어이없어서 웃음이 나오기도 하지만 해병대를 보는 일반적인 시각이 이 정도라는 걸 깨닫고 자괴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해병문학에서 나타난 과장된 표현을 훨씬 뛰어넘는 현실 속 사건이 터졌다. 해병문학이 일종의 위기를 맞을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해병대 제1사단 소속인 A일병이 지난 3월 21일부터 휴가를 나간 뒤 인천국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폴란드에 입국한 사실이 알려졌다.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우크라이나와의 국경지대까지 이동한 A일병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에 입국을 시도했다. 폴란드 국경검문소 제지로 출국은 막혔지만 A일병이 우크라이나 의용군으로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귀국을 거부하며 현지에 머무르고 있어 급파된 군무이탈체포전담조도 그의 신병을 지금까지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현역 병사가 휴가 중 아무런 제재 없이 해외로 출국한 것을 넘어 현재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에 의용군 참전을 시도한 일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초유의 사건이다. 탈영을 결심하게 된 이유가 해병대 복무 중 경험한 병영 부조리 때문이라고 밝힌 A일병의 언급 또한 해병대에 대한 비판적 여론을 부채질하는 계기가 됐다. A일병은 지난 3월 28일 방송된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자신이 순전히 부사관을 지원한다는 이유로 가혹행위를 하고 기수열외를 시켰다”면서 “처음에는 ‘마음의 편지’를 썼는데 간부들이 그걸 덮더라”고 말했다. 병영 부조리를 당하고 있는 사실을 상급자들에게 보고했으나 아무런 시정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사건이 벌어지자 해병문학에 열광하던 누리꾼들조차 한탄할 정도다. 과장된 혐오표현이 난무하는 해병문학도 현실에서 벌어지는 병영 부조리와 비교하면 ‘새 발의 피 아니냐’는 시각이다. 곧바로 ‘해병 비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해병대 복무 시절 직간접적으로 겪은 각종 부조리와 악습을 토로하는 게시글들이 각종 인터넷 공간에 잇따라 올라왔다. 굳이 픽션으로 허구의 이야기를 지어내지 않아도 과거부터 해병대에 병영 부조리가 만연해왔다고 고발하는 일이 줄지어 나타나는 형국이다.

3월 28일 경북 포항시 남구 오천읍에 있는 해병대 교육훈련단 앞에서 입대자들이 부대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 있다.  연합뉴스

3월 28일 경북 포항시 남구 오천읍에 있는 해병대 교육훈련단 앞에서 입대자들이 부대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 있다. 연합뉴스

■해병대 지원율 갈수록 저조

해병대 소속 현역 군인들도 해병으로서의 긍지를 느낄 수 없는 현실을 토로하고 있다. 한 위관급 현역 장교는 “해병문학에서 해병들이 동성 간 성행위를 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건 비꼬려는 의도에서인데도, 지휘부에서는 포인트를 잘못 잡아 동성 간 성군기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쪽으로 교육을 강화한다”며 “일선 해병들이 생활관에서 어떻게 지내는지에 관심이 없다 보니 탁상공론 같은 대책만 내려온다”고 말했다.

해병대 측은 해병문학을 위시해 최근 인터넷에서 두드러지는 해병대 비판 내지 혐오 기류에 대해선 명시적인 대응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해병대사령부 관계자는 “해병문학이라는 이름으로 게시된 내용을 살펴본 결과 이용자들이 개인적 차원에서 인터넷커뮤니티나 블로그 등에 올린 글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해병대사령부 차원의 공식적인 대응을 하기엔 적절치 않은 일로 판단하고 있다”고 밝혔다. 최근 해병대를 향한 비판 여론이 정점을 찍게 만든 A일병의 우크라이나 입국 시도 사건에 대해선 “휴가 중 보고 없이 무단으로 군무 이탈한 데 대해서는 조치를 취하겠다”는 원론적 입장을 유지했다.

해병대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늘어나는 추세만큼은 분명하다. 과거 해병대만의 강한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한 전우애와 특유의 군기가 해병대 안팎에서 인정받던 시절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대의 톱스타 남진부터 현빈까지 해병대에서 군복무를 마친 유명인들한테 더 후한 평가를 하던 분위기도 예전 같지 않다. 특히 현역 입대를 앞둔 20대 초반 청년들 사이에서는 해병대에 대한 인식 악화가 자칫 병력자원의 부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로 전원 모집병으로 선발하는 해병대의 병 지원율은 올해 들어 지난해보다 눈에 띄게 낮아졌다. 대학생활을 하다 입대해 전역 후 복학하는 흐름이 일반적이다 보니 해병대뿐 아니라 전군의 모집병 지원율은 3월에 입영하는 모집 회차에서 가장 높고 겨울에 가까워질수록 낮아진다. 지난해 3월에 입영하는 해병 일반·기술병을 모집한 2020년 12회차 모집에서는 전체 평균 경쟁률이 5 대 1로 나왔고, 어느 모집 분야에서도 과부족 없이 계획인원을 모두 충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해병문학이 유행하기 시작한 뒤 이뤄진 올해 3월 입영자 대상 2021년 12회차 모집의 경쟁률은 2.9 대 1로 크게 낮아졌다. 3월 입영과 함께 가장 인기가 높은 4월 입영 모집 회차에서도 경쟁률은 1년 만에 4.7 대 1에서 2.7 대 1로 낮아지는 현상이 동일하게 나타나 근래 해병대 기피 풍조가 심화하고 있음을 방증했다. 게다가 겨울철 입영 병사 모집 회차에선 무기정비·정보통신·조리 등의 모집 분야에서 계획인원에 아예 미달하는 과부족 현상이 되풀이되고 있다.

■부사관 복지와 대우문제 심각

현역 해병장교로 22년간 복무한 오대훈 대경대 군사학과 교수는 연원을 따지고 올라가면 해병대 내의 병영 부조리는 창설 당시까지 올라갈 정도로 뿌리가 깊다고 말했다. 오 교수는 “어떤 경우에도 병영 부조리와 가혹행위는 용인될 수 없는 것이 원칙”이지만 “1949년 해병대를 처음 창설할 때 참여한 해병 1기 노병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과거 패망하기 전 일본군에서 이어진 악습이 창설 당시 해병대에도 있었다는 증언을 들었다”고 말했다. 오 교수는 해병대사령부를 비롯해 각급 지휘부에서 병영 부조리 사건이 터질 때마다 개선 방안을 찾아 대책을 내왔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과거의 전례가 반복되는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해병 고유의 군사문화 중 특히 부사관을 대하는 인식과 대우 문제가 가장 개선이 필요한 지점이다. 우크라이나 의용군으로 자원하려 한 A일병 역시 병으로 복무하던 중 부사관에 지원하려고 했으나 부사관 이상의 간부를 적대시하는 해병 의무복무병 내부의 문화 때문에 ‘배신자’로 낙인찍혔다고 고백했다. 특히 부사관은 장교와 병을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하는 직책을 맡지만 해병대 부사관은 상대적으로 복지나 대우 수준에서 밀리고 휘하 병사들과도 매끄럽지 못한 관계 때문에 고충을 겪고 있다고 오 교수는 짚었다. 오 교수는 “그동안 지휘부에서 숱하게 나온 대책들이 제대로 하달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도 허리 역할을 하는 부사관들이 현실적 한계를 겪기 때문이었다”며 “해병대 내에서 가장 취약한 부사관 계급에 대한 지원을 늘리는 한편 이들에게 병들을 이끌 지휘력과 인성 교육을 강화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해병대 장교 출신인 한 군사학과 교수는 해병대사령부와 국방부를 향해 쓴소리를 쏟아냈다. “생각해봐라. 요즘은 복무기간도 짧아져 해병 복무기간이 2년도 되기 전에 전역하니 사람의 물갈이가 수시로 이뤄진다. 현재의 해병 악습을 유지하는 건 간부들이다.” 그는 “나도 장교 출신이지만 해병대 고유의 문화 운운하며 끈끈하고 화끈한 전우애를 강조하다 보니 피가 끓는 선임 해병들이 후임들을 강압적으로 대할 때도 한편으론 모질게 그들을 처벌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며 “전우애도 중요하지만 엄정한 군기를 해하는 악습이 계속되면 단칼에 끊을 수 있어야 하는데 자기 편하자고 이를 외면·방관하는 간부들이 문제”라고 말했다.

해병 출신 군사전문가들의 지적처럼 과거 해병대 내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국방부와 해병대는 강도 높은 대책을 내놓았다. 이런 대책들이 제대로 먹혀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해병대의 대외적인 인식만 더욱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2011년 7월 4일 해병대 제2사단의 강화도 선두소초에서 김모 상병이 동료 해병들에게 총격을 가해 4명이 사망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김 상병은 평소 앙심을 품고 있던 같은 생활관의 동료 해병대원들을 노리고 한명씩 차례로 조준해 사격했다. 그동안의 병영 부조리에 시달리다 범행을 결심한 김 상병이 동료들에게 총을 쏘는데도 아무도 그를 저지하지 못했고, 일부는 속옷 바람으로 피신하는 바람에 논란이 됐다.

인천 옹진군 연평면 해안에서 해병대원들이 해안 수색작전을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인천 옹진군 연평면 해안에서 해병대원들이 해안 수색작전을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추락한 대외인식 개선해야

이 사건이 터진 뒤 해병대는 구타와 가혹행위를 일삼는 해병에게 군복에 부착된 ‘빨간 명찰’을 떼고 다른 부대로 전출시키는 등의 고강도 병영문화혁신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해당 기수의 해병으로 인정하지 않는 악습인 ‘기수열외’와 비슷하게 아예 해병대 소속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소위 ‘해병열외’를 가장 주된 대책으로 제시했다는 비판도 뒤따랐다. ‘행동강령’이라는 이름을 붙인 병영 혁신안도 해병 기수는 유지·계승하는 가운데 일부 문화를 고친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병사 상호 간에는 명령하달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원칙과 배치된다는 지적도 나왔다.

2016년에도 선임 4명이 후임 1명에게 식후에 빵을 억지로 먹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병영 부조리에 불만을 품고 경계근무 중 생활관 현관에 수류탄을 터뜨리는 사고 등도 잇달아 일어나자 ‘해병대의 악습을 청산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대대적으로 나온 바 있다. 전 부대를 대상으로 일과 중 1시간을 ‘병영혁신을 위한 특단의 시간’으로 운영하는 등의 대책이 쏟아졌지만 이 또한 실효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오대훈 교수는 “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악습을 핑계 삼아 자신도 마음껏 후임에게 병영 부조리를 답습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구성원들이 계속해서 해병대에 들어오는 이상 근본적인 개선은 불가능하다”며 “해병대 밖에서부터 경쟁에서 이기려면 상대를 짓밟아도 된다고 자연스레 허용하는 교육이 만연하니 사회 전체가 이 문제를 같이 고민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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