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현실적인’ 넷플릭스의 앤···그래도 너는 나의 ‘앤’

2017.06.09 21:00 입력 2017.06.09 21:13 수정

내년이면 탄생 110년…식지 않는 ‘빨간 머리 앤’ 인기 비결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빨간 머리 앤’ 한 장면. 주인공 에이미베스 맥널티는 원작 속 앤을 그대로 옮긴 듯하다.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빨간 머리 앤’ 한 장면. 주인공 에이미베스 맥널티는 원작 속 앤을 그대로 옮긴 듯하다.

지난달 12일부터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notmyanne(나의 앤이 아니야)이라는 해시태그가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인터넷TV네트워크 ‘넷플릭스’에서 내놓은 8부작 드라마 <빨간 머리 앤>이 공개된 이후 쏟아진 세계 시청자들의 항의 릴레이였다.

“대체 앤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우울해서 보기 힘들다” “어린 시절의 헤로인이 눈앞에서 파괴되는 트라우마를 겪지 않도록 주의하라” “문자 그대로 최악의 버전이다” 등 격한 메시지가 쇄도했다. 이 같은 반응은 암 선고를 받은 뒤 가족을 위해 마약제조상으로 나선 중년 남성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의 각본을 쓴 모이라 월리-베켓이 집필을 맡는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새롭게 선보인 <빨간 머리 앤>의 캐스팅 평은 일단 후하다. 1889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앤 역을 따낸 에이미베스 맥널티는 원작 속 앤을 그대로 그려낸 듯한 싱크로율을 보여주고 있다. ‘역대 캐스팅 중 최고 미남’이라는 평을 듣는 길버트를 비롯해 매튜·마릴라 남매와 다이애나 등 주요 출연진의 연기력에 대한 의견도 긍정적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앤’은 어땠기에 전 세계 팬들이 하나의 해시태그로 뭉쳤을까.

■ 나의 앤은 그렇지 않아

넷플릭스 버전의 <빨간 머리 앤>은 생후 3개월 만에 고아가 된 앤이 위탁가정에서 여덟 아이의 보모 역할을 하며 집주인 부부로부터 학대당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고아원과 학교에서는 동급생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기도 한다. 그 밖에 원작과 다르게 해석된 소소한 사건이 몇몇 등장한다. 독신인 매튜와 마릴라 남매 각각의 애정사도 추가됐다. 눈에 띄는 점은 다이애나의 고모할머니 조세핀이 동성애자로 그려지고,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어머니 모임이 등장하는 등 페미니즘적 요소가 가미되었다는 것.

그러나 팟캐스트 ‘더드라마’를 진행하고 있는 번역가 겸 칼럼니스트 박현주 작가는 “원작 <그린 게이블즈의 앤> 자체가 페미니즘적 이야기였다”고 운을 뗐다. 전통적인 이성애자 부모가 아닌 독신의 남매가 딸을 입양하고, 그 아이가 독립적인 여성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준다는 설정부터 그렇다.

‘너무나 현실적인’ 넷플릭스의 앤···그래도 너는 나의 ‘앤’

“당시 진단이 있었으면 앤은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예요. 무엇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고, 혼자 상상에 빠지며 가상의 친구와 얘기하잖아요. 넷플릭스 버전은 귀엽게만 생각했던 앤의 특징을 병리적으로까지 밀어붙인 거죠. 해외 리뷰를 보면 앤의 증상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보기도 합니다. 어려서 학대를 당한 아이가 새로운 가정을 찾았다고 한 번에 치유되기가 어렵다는 걸 보여준 거죠. 이게 흥미로운 지점이라 생각했어요. 앤을 꿈과 희망을 주는 예쁜 친구로만 볼 게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 기쁨과 아픔을 같이 보자는 취지거든요.”

대본을 쓴 월리-베켓 역시 ‘뉴욕타임스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앤은 낙관적이며 밝고 열정적이고 명랑하고 상상력이 넘친다. 나는 그녀의 역사에 그저 현실을 더할 뿐”이라고 밝힌 바 있다.

넷플릭스 버전을 “동심을 파괴하는 잔혹 동화 버전”이라고 주장하는 팬들의 글에는 ‘불쾌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gritty)’이라는 표현이 종종 등장한다. 불편한 진실을 거부하는 미국과 캐나다 팬들은 “1985년의 메건이 훨씬 원작의 앤에 가깝다”고 입을 모은다. 1985년 캐나다 CBC 미니시리즈로 방송된 <그린 게이블즈의 앤>은 당시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인기를 끌었다. 앤 역을 맡은 메건 팔로스는 사랑스러운 외모와 발랄한 연기로 ‘국민 여동생’ 수준의 팬덤을 형성했다. 이 시리즈는 2002년 EBS를 통해 국내에서도 방영됐다.

■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 앤

미국과 캐나다의 팬들에게 CBC 드라마로 추억되는 ‘그들의 앤’이 있다면, 우리에겐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로 시작하는 주제곡의 애니메이션 버전 ‘앤’이 있다. 1985년 KBS에서 방송한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의 원작은 1979년 일본 후지TV를 통해 방송된 다카하다 이사오 감독의 세계명작극장 시리즈다.

1908년에 발표된 캐나다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소설 <그린 게이블즈의 앤(Anne of Green Gables)>은 지금까지 36개 국어 이상 번역돼 5000만부 넘게 판매됐다. 몽고메리는 첫 번째 책의 성공 이후, 앤이 앙숙이었던 길버트 브라이스와 결혼해 자녀를 낳고 할머니가 될 때까지의 일대기를 담은 총 8편의 시리즈를 출간했다. 일본판 애니메이션은 첫 번째 책의 이야기를 50부작으로 담아낸 것이다. 덕분에 만화를 보며 유년기를 보낸 이들은 11세부터 16세까지의 앤을 기억한다. 지난 2008년에는 <빨간 머리 앤> 탄생 100주년을 맞아 특별 기념판 세트가 출시되기도 했다. 앤에 열광하던 소년·소녀는 어느덧 애니메이션 DVD, 원작소설 세트 정도는 가뿐하게 소장할 수 있는 어른이 됐다.

(위)진짜 초록 지붕 집과 앤의 방.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 30대 초반의 변호사이자 ‘빨간 머리 앤’ 팬인 최유진씨가 작품 배경이 된 몽고메리의 고향, 캐나다 프린스 에드워드섬을 직접 다녀와서 찍은 사진들.

(위)진짜 초록 지붕 집과 앤의 방.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 30대 초반의 변호사이자 ‘빨간 머리 앤’ 팬인 최유진씨가 작품 배경이 된 몽고메리의 고향, 캐나다 프린스 에드워드섬을 직접 다녀와서 찍은 사진들.

<빨강머리 앤> 만화를 보고 자란 백영옥 작가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앤에게 받은 위로의 메시지를 모아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이란 에세이집을 지난해 7월 출간했다. 이 책은 출판계 불황 속에서도 출간 11개월 만에 22만부 판매라는 기염을 토했다. 백 작가는 “지치고 힘들 때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 50부작을 보면서 몸과 마음을 추슬렀고, 그때 쓴 작품으로 작가 지망 13년 만에 등단할 수 있었다”며 “어떤 상황에서도 기필코 더 나은 것을 바라보려는 앤의 자세가 힘이 되었다”고 전했다.

그는 “성인이 되어서 다시 보니 마릴라에 대한 마음이 애틋해졌다”고 말했다. “처음에 마릴라는 남자아이가 아니라고 앤의 입양을 반대하잖아요. 그때 매튜가 ‘우리에겐 도움이 안되겠지, 하지만 저 아이에겐 도움이 되겠지’라고 하는데 그 말이 굉장히 뭉클했어요. 한 사람의 선의가 한 아이의 우주를 구원한 얘기잖아요. 산만하고 정신없는 아이를 키우면서 안전지대가 되어주는 풍경이 아름다운 거죠.”

<아기공룡 둘리>를 보고 고길동이 불쌍하게 느껴지면 어른이라는 말이 있다. 냉정한 줄로만 알았던 마릴라 아줌마도 20년의 시간을 건너와 마주하니 아이 한번 키워보지 않은 초보 엄마였다. 그 상황에서도 그가 보여준 자기 원칙과 현명함을 발견하는 과정은 <빨간 머리 앤>이 세대 초월의 아이콘이 되는 큰 버팀목이다. 대책 없는 수다쟁이 앤 역시 다시 보니 ‘명언제조기’였다. “내일은, 아직 아무것도 실패하지 않은 하루라고 생각하면 기쁘지 않아요?”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더 한심한 일이라 생각해요.”

백 작가는 나이가 들어서도 만화와 원작을 반복해서 찾는 이른바 ‘앤 덕후(마니아)’를 ‘절망에서 희망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 정의했다. “앤이 하는 말은 다 좋은 말인데, 맞는 말은 아니에요. 살아보니 그건 아닌데, 그렇지만 그 말이 간절히 맞았으면 좋겠고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그런 마음이 아닐까요?”

■ 이것이 왜 ‘고전’이 아니란 말인가

일본은 특히 <빨간 머리 앤> 사랑이 남다르기로 소문난 나라다. 미국 잡지 ‘배니티 페어’는 프린스 에드워드섬의 관광산업이 일본 팬들 덕분에 호황을 누렸다고 보도했다.

제주도 3배 크기인 이 섬에는 매년 여름에만 5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는다. 그중 25%가 소설에 등장하는 초록지붕 집이 있는 농장, 다이애나와 앤의 만남의 장소인 ‘유령의 숲’, 몽고메리의 생가와 그녀가 일했던 우체국 등을 찾는 ‘앤 관광객’이다. 몇 년 전까지도 앤처럼 양 갈래로 머리를 땋은 일본인 중년 여성 무리를 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도쿄에서 25년째 거주 중인 <엄마의 도쿄>의 저자 김민정 작가는 일본에서 <빨간 머리 앤>이 인기를 끌었던 요인으로 “고도 성장기, 여성 파워가 막 피어나기 시작하던 시대적 배경”을 꼽았다. 1979년 애니메이션이 방송되고 오래지 않아 일본에는 남녀고용균등법이 제정됐다. 또한 영국 문화에 심취해 있던 젊은 여성들에게 캐나다를 배경으로 한 당돌한 소녀의 이야기가 강하게 어필했을 거란 해석도 덧붙였다.

2014년에는 <빨간 머리 앤>의 번역가인 무라오카 하나코의 일생을 그린 NHK 아침드라마 <하나코와 앤>이 22.6%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여행사의 ‘빨간 머리 앤 투어’도 여전히 잘 팔리고 있다. 그러나 김 작가는 일본에서 앤에 대한 관심이 예전 같지는 않다고 한다. <빨간 머리 앤>을 추억하는 세대도 어느덧 40대 후반을 넘어섰다.

그는 “거품 경제가 무너지고, 20년 넘게 불경기를 겪으면서 더 이상 ‘빨간 머리 앤’의 시절은 오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고 전했다. 1980년대 인기 애니메이션 주인공인 ‘밍키’처럼 혼자 힘으로 편견과 맞서 싸웠던 앤의 시대는 저물고, 친구들과 협력해 적을 물리치는 이야기를 담은 인기 애니메이션 <프리큐어>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요즘 일본 청소년들 사이에서 강함보다는 유연함과 무난함이 미덕으로 통하는 것이 그 증거라고.

이제 앤을 사랑하는 것은 무거운 기억도 감당해야 함을 의미한다. 앤의 풍부한 감성을 입체적으로 연기한 성우 정경애씨는 1997년 괌 항공기 추락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원작자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1942년 4월24일 캐나다 토론토에서 숨졌다. 당시 사인은 관상동맥 혈전증으로 알려졌지만, 2008년 손녀인 케이트 맥도널드 버틀러는 “우울증 환자의 고통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오랫동안 지켜온 가족의 비밀을 공개한다”며 몽고메리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몽고메리는 “나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들지만, 아무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많은 실수에도 불구하고 항상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는 마지막 메모를 남겼다.

그러나 앤이 우리에게 심어준 꿈과 희망은 세기가 바뀐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박현주 작가는 “앤의 성장사가 공부와 직업에 관한 이전 세대와 다른 교육을 받고 자란 7080년생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록 고아일지라도 똑똑하고 공부를 많이 하면 당당히 직업을 갖고 가장의 역할까지 맡을 수 있음을 보여준 앤은 훌륭한 롤모델이었던 셈이다. 1980년생인 미국 배우 준 다이앤 라파엘은 “앤이 할 수 있다면, 나 역시도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며 “앤은 내 인생의 첫 번째 헤로인”이라고 고백했다.

탄생 110주년을 1년 앞둔 <빨간 머리 앤>은 영화와 드라마, 애니메이션, 뮤지컬 등으로 다양하게 재해석되며 생명력을 강화하고 있다. 세대를 넘어 공감을 얻는 것이 고전의 조건이라면 <빨간 머리 앤> 역시 고전이 아닐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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