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장구채

2014.11.10 21:16 입력 2014.11.10 22:35 수정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이굴기의 꽃산 꽃글]분홍장구채

겨울이면 한탄강은 꽁꽁 얼어붙는다. 광활한 철원평야의 매서운 칼바람에 풍부한 수량의 강도 맥없이 무릎을 꿇고야 만다. 추위가 아니었다면 도무지 엄두를 못 낼 일이었다. 발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강물 위를 걸었다. 얼음 이불을 덮고 노니는 물고기떼를 보기도 했다. 작년 한탄강 얼음 트레킹 이야기이다.

올해 벌어진 일들은 우리에게 기억의 몫으로 남겨두고 시간의 강 아래로 흘러간다. 그보다 더 불가해한 일이 다시 또 있을 순 없겠다. 또 무슨 칼칼한 낯으로 오려는 걸까. 이제 곧 올해의 겨울이 온다.

직탕폭포 근처. 점심을 주문해 놓고 식당 뒷문으로 연결된 계단을 통해 한탄강으로 내려갔다. 귀한 꽃이 산이나 들에만 있으란 법이 어디 있겠나. 낮게 도열한 절벽을 훑었더니 어느 바위의 겨드랑이 사이로 분홍빛 꽃이 눈에 들어왔다. 우뚝한 줄기 끝에 제법 복잡한 구조의 꽃을 달고 있는 분홍장구채였다. 경기, 강원 이북의 지역에서 드물게 자라는 멸종위기 2급의 야생화다.

꽃은 절정을 지나 이제 완연히 퇴락한 모습들. 이미 총기를 잃고 땅으로 녹아드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주로 바위틈에서 자라기에 까치발을 해서 겨우 찍었다. 분홍장구채 위로 아주 싱싱한 것이 있길래 어느 줄기의 잎사귀이거니 했다. 지금쯤 펄펄 끓고 있을 매운탕 생각에 서둘러 마무리했다.

집에 와 컴퓨터를 켜고서야 알았다. 시드는 건 꽃잎만이 아니었다. 노안 탓인가. 잎사귀는 사마귀였다. 너희들만 꽃을 보라는 법이 어디 있겠냐며 고운 꽃 앞에서 먹잇감을 노리고 있는 사마귀. 오늘의 나는 너무 큰 먹잇감이겠지만 언젠가는 사마귀와 녀석의 친구들에게 꼼짝없이 당해야 하는 날이 오고야 만다. 경고하듯 나를 날카롭게 째려보는 사마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칼바람 앞에서 분홍장구채는 흔들리고. 석죽과의 여러해살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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