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꽃꽂이 역사
우리나라 꽃꽂이의 역사를 보면 불교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꽃꽂이 역사를 알아보면 서기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때 384년 백제의 침류왕, 신라의 눌지왕시대에 불교와 함께 불전 공화의 양식으로 우리나레 전파된 것으로 전해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비단 공화의 의미로 사용된 것만은 아니다. 귀족이나 왕가에서는 일상생활에서 꽃을 사용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고구려 쌍용총 벽화에서 알 수가 있다.
불교 전래 이전에 자생적인 꽃꽂이가 존재하였음을 <굿>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무당이 굿을 할 때 꽃이 자주 사용되었는데, 예를 들면 망령을 위로하기 위한 망자공양의 굿을 할 때 영상위에 놓은 떡
중국에서 도입된 불교의 공화와 함께 꽃꽂이의 한 양식이 1세기경인 백제 때에 전래되었고 이것은 일본으로 전해졌다. 고려시대에는 꽃이나 꽃꽂이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나타나 있다. <고려사>를
즉, 고려시대에 이르러 종교의식 일부인 공화와는 구별되는 감상 위주의 꽃꽂이가 발생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고려의 귀족들은 집안에 불당을 차려 놓고 생화를 병에 꽂아 장엄미를 나타내고, 믿음의 무아경 속에서 생활했다는 것으로 보아 불교에 따른 꽃꽂이도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부분적이기는 하나 꽃꽂이에 관한 책이 저술되고, 또 전문서적이 아니더라도 꽃, 꽃꽂이, 분재, 분경 등을 다룬 저작이 등장하였다. 세종 때 강희안이 지은 <양화소록>은 일종의 원예서로
또한 허균의 문집<성소복부고> 제 17권에는 화목, 품제, 기명, 의삽(꽃의 배치), 택수 등의 내용과, 꽃의 기품의 농담과 아속을 기준으로 하여 주와 종으로 배함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당시의 꽃꽂이에 현대 꽃꽂이의 경향이 내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의 <산림경제>에는 꽃꽂이에 관한 화병법, 삽병법, 변색법, 요수법 등의 기록이 있다. 이러한 문헌 외에도 순조 때 세자가 생각해낸 <가인전목단>이라는 춤은, 모란꽃을
궁중의식에 사용된 꽃꽂이는 당시 최고의 장인들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궁중의식도>에서는 천장에 매단 새로운 형식의 꽃꽂이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꽃꽂이가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음을 풍속화, 탱화, 화훼화 및 병풍 등의 그림에서 엿볼 수 있다. 커다란 항아리에 꽂힌 연꽃과 산호가지의 조화, 도자기화병과 국화의 조화,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문화적인 탄압과 문화말살정책에 한국에는 고유의 꽃꽂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편견을 낳게 되었다. 광복 후에도 격변하는 정치적 혼란 속에 문화, 예술분야의 활동의 매우 침체되었으며, 1950년대 후반 차츰 생활의 여유와 정서를 되찾아 꽃꽂이가 다시 시작되려 했을 때, 일본의 꽃꽂이가 편입되어 발전하게 되었다. 60년대 초반부터는 꽃꽂이 연구가들의 개인전도 활발히 열렸고, 60년대 후반부터 꽃꽂이 역사연구가 행해지면서 꽃꽂이가 대중 속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