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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파 시대 명곡

[차이코프스키]차이코프스키(Pyotr Il'ich Tchaikovsky 1840∼1893, 러시아)

작성자클래식사랑|작성시간12.11.27|조회수1,856 목록 댓글 0

 

 

 

차이코프스키(Pyotr Il'ich Tchaikovsky 1840∼1893)

 러시아

 

 

차이코프스키와 아내 안토니나 이바노브나 밀라코바

차이코프스키는 1877년 7월 6일에 음악원의 제자였던 이 여성과 결혼했으나 1주일간의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뒤 별거생활로 들어가, 그대로 이혼해 버리는 불행한 사태를 초래하였다. 차이코프스키는 그 책임을 느끼어 한때 몹시 건강이 나빠져 있었다

 

 

차이콥스키의 음악에는 가슴을 파고드는 그 무언가가 있습니다. 특별히 음악에 귀를 기울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의 음악은 저절로 우리 마음을 움직입니다. 가슴 저미는 선율과 풍부한 오케스트라 사운드, 긴박감 넘치는 종결부의 벅찬 환희!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항상 가슴이 확 트이는 카타르시스를 전해주곤 합니다.

 

 어떤 이들은 차이콥스키가 자신의 정신적인 문제를 음악으로 승화시켜 자신의 정신병을 치료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예민한 성격에다 동성애 성향이 있었던 차이콥스키는 늘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남들보다 몇 배의 감정적 부담을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에게 음악은 없어서는 안 될 일종의 탈출구였습니다. 그래서 차이콥스키의 작품은 그 어떤 작곡가들보다도 그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차이콥스키가 본격적으로 그의 대표작을 내놓기 시작한 시점도 그의 삶에 결정적인 변화가 찾아온 시기와 일치합니다.

 

1877년, 37세의 차이콥스키는 불행과 행운을 함께 경험하며 격변기를 맞이했습니다. 그해 후원자인 폰 메크 부인으로부터 후원금을 받기 시작한 차이콥스키는 경제적 안정을 찾을 수 있었으나 사랑하지도 않는 여성과 성급한 결혼을 감행한 후 말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겪었습니다. 아마도 차이콥스키는 결혼을 하면 동성애에 대한 소문을 잠재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혹은 당시 작곡 중이던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의 주인공 오네긴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했는지도 모릅니다. 차이콥스키는 오페라에서 여주인공 타치아나의 연애편지를 매정하게 거절한 오네긴의 오류를 범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일까요?

그는 1877년 7월에 그에게 열렬한 연애편지를 보낸 음악원의 제자 안토니나 밀류코바라는 여인과 급히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오페라와 현실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차이콥스키의 불행한 결혼생활은 얼마 지나지 않아 파경에 이르렀고 차이콥스키는 심한 신경 쇠약에 시달리다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가혹한 운명을 상징하는 ‘운명의 동기’

 

개인적인 전환과 위기를 맞이한 이 시기에 차이콥스키는 독자적인 음악양식을 보여준 대작들을 내놓았습니다. 그 중 [교향곡 4번]은 매우 특별합니다. 차이콥스키 관현악 양식의 결정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이 비범한 교향곡은 차이콥스키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가져다 준 작품이기도 합니다. [교향곡 4번] 도입부를 장식하는 금관악기의 팡파르는 차이콥스키를 뒤따르는 가혹한 운명을 나타내듯 처절하고도 비극적으로 제시됩니다.

 

 

 

 

 

 

우수의 작곡가 차이콥스키. <출처: Wikipedia>

 

 

이 팡파르는 4악장 마지막에 다시 등장해 끊임없이 그를 추적해오는 운명의 집요함을 강조합니다. 이것은 마치 바그너의 음악극에 사용되는 라이트모티브(leitmotiv, 특정 인물이나 감정 등을 일정한 음악적 동기로 표현하는 기법으로, 주도동기 혹은 유도동기라 부르기도 함)와 비슷합니다. 이 팡파르에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운명의 동기’라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금관악기가 연주하는 운명의 팡파르가 단조로 제시된다는 점은 특히 중요합니다. 차이콥스키 당대에는 밸브가 달린 개량 금관악기들이 보편화되어 금관악기로 단조 선율을 연주하는 데 제약이 없었으나, 밸브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금관악기로 단조 팡파르를 연주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또한 금관악기가 장송행진 풍의 비극적인 음악을 연주할 때는 약음기를 낀 채 작은 소리로 연주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러나 차이콥스키는 전통적인 관례를 깨고 [교향곡 4번] 도입부를 단조의 포르티시모(ff, 매우 크게 연주하라는 강약 기호)로 충격적인 팡파르를 제시해 듣는 이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줍니다. 아마도 이 팡파르는 당대 청중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을 겁니다. 오늘날에도 이 팡파르는 말러의 [교향곡 5번] 1악장을 여는 트럼펫의 팡파르와 함께 훌륭한 ‘단조 팡파르’라 할 만합니다.

 

차이콥스키의 ‘운명의 동기’는 비단 [교향곡 4번]에만 등장하는 건 아닙니다. 그의 [교향곡 5번](1888년)은 ‘차이콥스키의 운명 교향곡’이라 해도 좋을 만큼 1악장 도입부의 ‘운명의 동기’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클라리넷의 어두운 음색으로 단조로 연주되는 운명의 동기는 [교향곡 4번]의 운명처럼 가혹하다기보다는 차라리 체념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이 우울한 운명은 4악장에 이르러 승리로 바뀝니다.

 

[교향곡 5번]에서 운명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던 차이콥스키는 그의 마지막 교향곡인 [교향곡 6번 ‘비창’]에서 교향곡 역사상 매우 독특한 결말로 완전한 체념의 정서를 전해줍니다. 차이콥스키는 1893년 9월에 [‘비창’ 교향곡]을 완성하고 그해 10월에 초연한 후 9일 만에 세상을 등지고 맙니다. [‘비창’ 교향곡]을 작곡할 당시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는지도 모릅니다. 끝없이 하강하는 선율과 꺼져가듯 길게 사라지는 4악장의 종결부는 삶의 종말을 나타내는 듯합니다.

 

<[비창 교향곡]의 결말은 모든 것을 체념한 비극을 들려준다>

 

[‘비창’ 교향곡] 4악장의 종결부에서 활약하는 악기는 비올라와 첼로, 더블베이스의 저음현과 목관악기 중 가장 어두운 음색을 지닌 바순입니다. 교향곡이 끝이 가까워오면 비올라와 바순이 연주를 멈추고 오로지 첼로와 더블베이스만 남아 피아니시시시모(pppp)의 극히 여린 음으로 사라져갑니다. 이때 더블베이스는 두 파트로 나뉘어, 상성부는 점차 느려지는 심장박동을 독특한 리듬으로 표현하고 하성부는 현을 퉁기는 피치카토 주법으로 다가오는 종말의 마지막 발걸음을 암시합니다.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을 화려한 알레그로 악장 대신 어둡고 느린 악장으로 대체한 점은 가히 혁명적인 일이라 할 만합니다.

 

운명을 극복하고 승리로 끝맺는 [교향곡 5번]과 비교해볼 때 [교향곡 6번]은 상당히 염세주의적인 느낌을 주지만, 운명에 굴복하는 ‘비창’의 우울한 정서는 오히려 우리의 정신을 맑게 정화시켜 한없는 미(美)의 세계로 이끌어줍니다.

 

 

 

감정적 고양을 표현하는 ‘동형진행’ 기법

 

교향곡 4·5번의 ‘운명의 동기’와 [교향곡 6번]의 특별한 종결부 외에도 차이콥스키 관현악에서 거론할만한 특징은 너무나 많지만, 그 중 차이콥스키 음악의 매력을 가장 잘 드러내는 기법 하나는 꼭 소개해드리고 싶군요. 차이콥스키는 감정적인 고양을 표현하고자 할 때 ‘동형진행’, 즉 ‘시퀀스’(sequence)라는 기법을 종종 사용했습니다.

 

동형진행이란 쉽게 말해 일정한 선율 패턴을 계속 반복하는 기법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반복만 하는 게 아니라 음높이를 점진적으로 다르게 반복하기 때문에 분위기를 고조시키거나 혹은 침체시키기도 합니다. 차이콥스키가 그의 음악에 자주 사용하던 동형진행 방식은 하나의 선율 패턴을 점점 더 높은 음으로 반복해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것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 중 감동적인 ‘사랑의 테마’는 차이콥스키 특유의 동형진행이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된 예라 할 만합니다.

 

1로미오와 줄리엣 사랑 테마 / 빌렘 멩겔베르크,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 19302로미오와 줄리엣 사랑 테마의 시퀀스 단위3로미오와 줄리엣 사랑 테마의 시퀀스 시작부터 절정까지

사랑의 테마 중간 부분을 잘 들어보면 작은 소리로부터 점차 큰 소리로 연주되면서 분위기가 고조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차이콥스키는 동형진행의 기본 단위가 되는 짧은 선율을 먼저 제시합니다.

 

 이 시퀀스 단위가 ‘난 널 사랑해’라는 문장이라고 가정한다면, 차이콥스키는 점차 어조를 높여 ‘난 널 사랑해’를 반복하다가 몇 차례 반복된 후에는 마치 ‘나는 널 사랑해’ ‘널 사랑해’, ‘사랑해’ 라는 식으로 음표는 줄이고 음은 높여서 극적인 클라이맥스를 구축합니다.감정의 고양상태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한 음악이 있을까요! 동형진행 기법을 사용한 작곡가들은 많지만 차이콥스키처럼 효과적으로 사용한 작곡가는 드물 겁니다.

 

차이콥스키는 생전에 국제적인 작곡가로서 명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소수의 러시아 작곡가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즉각적으로 대중의 가슴 속을 파고드는 음악을 만들었으니 그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은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오늘날에도 차이콥스키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모릅니다. 클래식 입문자에게나 클래식 마니아에게나 늘 한결같은 감동을 안겨주는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앞으로도 오래도록 살아남을 ‘클래식 중의 클래식’이라 할 만합니다.

 

 

교향곡 제3번 「폴란드 교향곡」 D장조 Op.29
교향곡 제4번 f단조 Op.36
교향곡 제5번 e단조 Op.64
교향곡 제6번 「비창」 b단조 Op.74
환상곡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Op.32
교향시 「이탈리아 카프리치오」 Op.45
교향곡 「만프레드」 Op.58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
서곡 「햄릿」 Op.67a
서곡 「1812년」 Op.49
슬라브 행진곡 Op.31
발레 모음곡 「백조의 호수」 Op.20
발레 모음곡 「잠자는 숲 속의 미녀」 Op.66
발레 모음곡 「호두까기 인형」 Op.71
현악 합주를 위한 세레나데 C장조 Op.48
피아노 합주곡 제1번 b♭단조 Op.23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Op.35
바이올린 · 첼로 · 피아노를 위한 3중주곡 「위대한 예술가를 추모하여」 a단조 Op.50
현악 4중주곡 제1번 D장조 Op.11
「트로이카」(피아노 소곡집「사계(四季)」중에서) Op.37b, No.11
「뱃노래」(피아노 소곡집「사계(四季)」중에서) Op.37b, No.6
「우울한 세레나데」 b♭단조 Op.26
가극 「에프게니 오네긴」 Op.24
「멜로디」 E♭장조 Op.42, No.3
가곡 「다만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 Op.6, No.6

 

 

 

 

모차르트의 가락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에는 가까이 하기 어려운 신비가 있다. 거기에 비교하면 차이코프스키 가락의 아름다움에는 마음과 마음이 융합하는 듯한 친근미가 있다. 그것은 아마도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 우수(憂愁)를 띄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는 베토벤과 같은 야성적인 맛은 없다. 그러나 「비창 교향곡」에 나타난 운명관은 베토벤의 「제5 교향곡」에 나타난 그것보다 좀 더 우리들과 가깝다. 유명한 서곡 「1812년」에서 그는 불타는 듯한 애국심을 영원한 기념으로 조국에 남기고 있다.

 

차이코프스키는 1840년 5월 7일에 러시아의 외딴 시골 카마 강변 보트킨스크에서 광산 기사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그의 일족 중에 음악과 인연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지만, 음이 민감해서 10세 때 이미 작곡을 할 정도였다. 그는 처음에 법률학교에 들어가서 19세 때 사법성의 관리가 되었다. 그러나 세월과 함께 늘어나는 마음의 괴로움은 그를 음악의 세계로 몰입시켰다.

차이코프스키가 출생한 집
(보트킨스크)
차이코프스키는 1840년 5월 7일에 이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일리아 페트로비치 차이코프스키는 1837년(42세)에 젊은 두번째 아내 알렉산드라 안드레예브나와 함께 광산의 공장장으로서 부임하여 3년 뒤에 이 부부의 차남으로서 표트르는 태어났다. 그리고 1848년 온 집안이 페테르스부르크로 이사하기 전까지 여기서 자랐던 것이다. 현재는 차이코프스키 기념관이 되어 있다.

 


1863년에 그는 생활이 안정된 관리 생활을 포기하고 음악원에 입학하여 음악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였다. 이론을 자렌바에게, 관현악법을 안톤 루빈시타인에게 배웠다. 음악원에서의 성적은 매우 우수하여, 그것이 루빈시타인의 눈에 띄어 지우(知遇)를 얻게 된다. 안톤 루빈시타인은 이 천재를 감화와 격려로써 지도하였으며, 차이코프스키는 음악원을 졸업하자마자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최초의 교향곡이 작곡되어 그의 지위를 확립했고, 그리고 얼마 후 이상적인 후원자 메크 부인의 도움을 받아 생활이 안정되어 오로지 작곡에 매진할 수가 있었다. 그는 유럽을 편력하고, 미국에 가게 됨으로써 크나큰 명성과 영예를 얻었다. 모스크바 근교의 그가 숨어 살던 집은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 사람들의 많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1893년 여름에 그는, 제6번 교향곡인 유명한 「비창 교향곡」이 상연된 뒤 몇 주일이 채 못되어 콜레라에 걸려서 급사했다.

사람들은 뜻밖의 급사 소식을 듣고 놀라 차이코프스키 자살설을 믿을 정도였다. 그것은, 우선 「비창 교향곡」에 넘치는 어두운 그림자가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종류의 불안을 상상케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차이코프스키의 전기(傳記)를 읽으면 그 속에는 메크 부인과의 관계가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데, 이 메크 부인은 부호의 미망인으로 차이코프스키 예술의 훌륭한 이해자였다. 흥미로운 것은 차이코프스키와 메크 부인은 생전에 전혀 면식이 없었으며, 우연히 만나도 알지 못하고 지나칠 정도였다는 점이다. 차이코프스키도 편지 왕래는 하고 있었지만, 부인을 방문한 적도 없고 또 찾아가려 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는 부인을 신뢰했고, 부인은 그의 예술을 사랑하여 그 성장과 결과를 즐긴 것이었다.

 

 

러시아 작곡가. 보토킨스키 출생. 광산기사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프랑스계 어머니의 영향으로 프랑스식 교육을 받았으며 피아노도 배웠다. 1850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법률학교에 입학하였고 52년 어머니를 잃은 뒤 독일 작곡가 R. 큔딩거에게 피아노와 음악이론을 배웠다. 법률학교를 졸업한 뒤 법무부 공무원이 되었으나 음악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하여, 61년 A. 루빈슈타인이 주재하는 러시아음악협회 음악교실(62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음악원으로 개편)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루빈슈타인과 N. 자렌바에게서 작곡을 배웠고 66년 1등으로 졸업하였다.

 

그 뒤 루빈슈타인의 동생 니콜라이가 교장으로 있는 모스크바음악원에 교수로 초빙되어, 음악이론과 작곡을 가르쳤고, 이 시기에 활발한 작곡활동을 하였다. <겨울날의 환상>이란 제목이 붙은 《교향곡 제 1 번 G단조(1866)》, 환상서곡 《로미오와 줄리엣(1869)》, 제 2 악장의 <안단테 칸타빌레>로 유명한 《현악 4중주곡 제 1 번(1871)》, 소러시아 민요를 소재로 한 《교향곡 제 2 번 C단조(1872)》, 웅대한 서주와 민요풍의 주제를 가진 《피아노협주곡 제 1 번(1874)》, 피아노곡집 《사계(1875)》 《슬

<표트르 차이코프스키1860년 법무성 시절>

라브행진곡(1876)》, 환상곡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1876)》, 발레곡 《백조의 호수(1876)》 등의 걸작을 작곡하였으며, 특히 《백조의 호수》는 초연 때 별로 주목받지 못하였으나, 그의 사후에 진가가 인정되어 발레의 고전으로 지금까지 널리 공연되고 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비평가들로부터는 혹평을 받기도 하였으나 애호가들과 청중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아 작곡가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굳힐 수 있었다. 77년 결혼에 실패하여 자살을 기도하였으며, 극도의 신경쇠약으로 스위스에서 요양하던 중 알게 된 러시아 철도왕의 미망인 N. 폰 메크부인이 재정적 후원자가 되었다. 이로써 재정적 어려움 없이 작곡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고 메크부인에게 78년 작곡한 《교향곡 제 4 번 F단조》를 <우리들의 교향곡>이라 부르며 헌사하였다.

 

그 뒤 각지로 여행하면서 가극 《예브게니 오네긴(1877)》, 깊은 정감과 러시아적 애수로 유명한 《바이올린협주곡(1878)》, 《이탈리아기상곡(奇想曲)(1879)》, B.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을 묘사한 《1812년 서곡(1880)》 등을 작곡하였는데, 특히 《바이올린협주곡》으로 명성을 세계에 떨쳤다. 그러나 이 작품도 비평가들의 신랄한 비판을 받는 등 그의 독창적인 작품에 대한 일부의 비난은 매우 가혹하여 그는 많은 고민과 함께 더욱 고립적인 성격이 되어갔다. 85년 모스크바 교외에 주거를 정하고 창작에 몰두하였으며, 자신의 작품 지휘도 자주 맡았다.

 

이 시기에 작곡한 작품은 교향곡 《만프레드(1885)》, 《관현악모음곡 제 4 번(모차르티아나, 1887)》, 환상서곡 《햄릿(1888)》, 《교향곡 제 5 번 E단조(1888)》, 발레곡 《잠자는 숲속의 미녀(1889)》, 가극 《스페이드의 여왕(1890)》, 발레곡 《호두까기 인형(1891)》, <비창>이라는 부제로 널리 알려진 《교향곡 제 6 번 B단조(1893)》 등이며 특히 <비창>은 그 스스로가 최고 작품으로 인정하였는데, 곡이 가지는 절망적인 어두움은 자신의 삶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88년 이후 작곡활동과 함께 함부르크·베를린·프라하·파리·런던 등을 순회하면서 자신의 작품을 지휘하였고, 91년 미국에서도 연주여행을 하였다.

 

이미 1890년에 메크부인의 지원은 끊어졌지만 세계적인 작곡가로서 인정받고 있었다. 93년 5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고 러시아로 돌아와 《교향곡 제 6 번》을 완성하였고, 그 초연을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갔으나 그곳에서 콜레라로 급사하였다. 서유럽 낭만파음악의 정신과 기교를 도입하여 러시아민요의 표현 방법을 조화시켜, 넘치는 열정과 비장하며 극적인 내용, 감미롭고 우아한 서정성, 명쾌한 구성 및 교묘한 악기 용법의 많은 명곡을 남겼다. 가극 11, 발레곡 3, 연극용 5, 관현악곡 38, 현악곡 2, 협주곡 12, 실내악 17, 바이올린곡 5, 피아노곡 110, 합창곡 23, 이중창곡 6, 독창곡 106 등 많은 작품이 있다.

 

낭트칙령이 폐지된 뒤에 프랑스인의 자손 알렉산드라 다시에 Alexandra d'Assier와 결혼한 광산기사의 차남인 그는 사법관이 되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그가 음악을 지향하고 음악을 직업으로 삼기로 결심(1862)한 것은 법률공부를 마치고 법무성에 들어가 서기의 지위를 얻은 후였다. 그는 음악원에 입학하여 3년 동안 루빈스타인(오케스트레이션)과 자렘바 Zaremba(음악이론) 등의 강의에 출석했고, 피아노 이외에 플루트와 오르간을 배웠으며 모짜르트, 베토벤, 글린카, 마이어베어, 베버, 슈만, 그리고 리스트에게 경도하고 있었다.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이 원장으로 있던 모스크바 음악원의 화성학 교수에 임명(1866~77)됨으로써 그의 재정적 문제는 해소되었다. 그리고 교수가 된 그에게는 1867년에 두 번째의 러시아 여행을 하고 있었던 베를리오즈를 공적으로 영접하는 영광이 주어졌다. 1868년에 〈5인조〉 그룹과 관련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가 가령 발라키레프에게 공감을 지니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림스키 코르사코프에 대한 어떤 불신감과 또 그와는 성격이 달랐던 무소르그스키에 대한 솔직한 적의적 감정은 단 한 차례도 버린 적이 없었다.

 

이 시기에 그의 최초의 작품이 여러 곡 작곡되었다(특히 3곡의 교향곡, 한스 폰 뷜로에게 헌정한 피아노협주곡 제1번, 오페라지방장관, 옹딘, 오플리치니크, 대장간의 바쿨라, 백조의 호수). 때로는 통속적인 주제가 그의 작품을 풍요롭게 하고 있는데(cf. 교향곡 제2번의 특히 최종악장, 또는 눈 아가씨), 차이코프스키는 그것들을 보다 서구적인 기법으로 다루었다. 더욱이 그의 눈 아가씨에서의 차용은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동명의 작품에서 한 옮김보다는 더 존중될 만한 것이었다.

 

흥미롭게도 차이코프스키는 〈5인조〉와의 관련에 의해서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서구를 향해서 눈을 돌렸다. 그것은 자신의 친구들에게는 러시아적 주제를 부여하고 있으면서 차이코프스키에게는 서구적 주제를 부과한 스타소프의 의도에 의한 것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템페스트, 교향곡 "만프레드" 등의 작품은 스타소프가 그에게 매우 세밀한 초고에서조차 시사를 준 것이다. 그러나 차이코프스키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칸틸레나와 선율에서조차 어떤 우울성과 결부된 매우 근원적인 러시아적 특징을 길러나가는 방법을 터득했다. 나는 러시아인이다. 뼛속까지도 러시아인이다라고 그는 어느 날 형제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다.

 

1875년 이후 그는 음악상 교제관계의 발을 넓히게 되었다. 생상과 우정을 맺었고 리스트, 그를 열광시킨 카르멘의 작곡자인 비제, 그리고 마스네와도 교제했다. 그는 바이로이트로 가는 여행길에 바그너와 만나기를 시도했었지만 이것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1876년은 중요한 이른바 열쇠가 되는 해였다. 왜냐하면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의 덕택으로 부호 폰 메크 von Meck 부인(1879년에는 외동딸을 위해서 피아노 교사로 드뷔시를 고용했다)과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두 사람은 한 번도 서로 만난 적은 없었으나(그것은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그녀는 그의 조언자인 동시에 후원자가 되었다. 두 사람의 교제가 계속된 14년간 계속된 그들의 열렬한 편지의 왕래는 우리에게 기묘한 〈목가적 순애〉의 흔적을 하나씩 더듬을 수 있게 해준다. 그녀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돈을 정기적으로 보내준 덕택으로 그는 모든 재정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실 그는 그때 가르친다는 의무에서 벗어났고, 실패로 끝난 결혼(1877) 후에는 여행과 사교생활(클라렌스, 파리, 베네치아, 로마, 피렌체, 산레모)에 대한 어떤 취미를 찾아냈다. 이 시기는 그의 위대한 창작의 시기였다.

 

그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서 처음으로 데뷔했던 때는 1886년이었던 것 같으며, 1888년에는 유럽으로 연주여행을 떠났고 그 후에 대서양을 건넜다. 그의 작품은 미국에서 매우 열광적인 영접을 받았고 1891년 5월 5일에는 카네기 홀의 신축기념으로 연주되었다. 1893년 6월 케임브리지 대학의 명예박사학위(막스 블로흐, 생상, 그리그 등과 동시에)를 받았으나 그 해 10월 28일 성적 스캔들 때문에 명예를 위해 자살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의 정신적, 음악적 유서인 교향곡 비창의 초연 직후의 일이었다.

 

표현상의 진실에 대한 배려, 즉 단순한 동시에 성실하다는 배려가 차이코프스키에게 있어서는 그의 교향곡과 오페라 작품이 가지는 근원적인-유일하다고 해도 좋을-주제와 언제나 함께하고 있다. 인간의 운명, 인간이 그 운명을 지배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야기되는 투쟁과 그 좌절이 주제이다. 사실상 교향적 환상곡 운명(1868), 그의 최후의 교향곡 3곡, 그리고 비창의 최종악장을 구성하고 〈운명〉을 앞에 놓고 인간의 패배에 바쳐진 저 장송미사 등을 어찌 달리 해석할 수 있겠는가? 또 렌스키, 헤르만, 잔다르크와 같은 인물들도 어떻게 달리 해석할 수 있겠는가? 그의 속에는 비극적인 것과 거의 병적인 관대성, 그리고 기만성을 수반한 인간의 여러 가지 정념을 표현하고 싶다는 뜨거운 욕망이 있었던 것이다. 그 자신은 거기에 속지 않았다(나는 얼마나 늙은 울보인가!). 그러나 음악 속에서 유일하고 가치있는 위로를 찾아냈던 것은 확실하며, 이 과도적인 낭만주의적 경향 속에서 폰 메크 부인은 그의 여러 가지의 실망과 열망에 대한 반응을 찾지 못했는지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가곡이 〈영혼의 상태 état d'ame〉를 표현하는 것이었다면, 그에게 있어서 교향곡이란 〈영혼의 음악적 고백〉, 즉 그의 심정의 토로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다만 단순하게 목적이 없는 음의 장난에 불과한 음악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형식의 틀이 큰 쪽이 그에게는 적합했던 것이다. 틀이 클수록 그의 특징이 되는 긴 멜로디와 장대하고 장식적인 주선율을 충분히 전개시킬 수 있을 것이고 또 지극히 자연스러운 대규모적인 전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적극적으로 현악기를 추구했고 결코 음량을 올리지는 않았다. 분명히 그의 교향곡은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것보다 화려하다고 할 수 없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분명히 착상을 얻었을 것으로 보이는 베를리오즈의 음악적 흐름의 계열인 표제가 붙은 낭만주의적 교향곡의 전형이기조차 한 만프레드에서처럼 매우 풍성할 수 있었다. 그의 교향곡은 멘델스존 이후의 독일 낭만파적 서법을 다시 격화시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모든 새로움은 그에게는 무지의 표명이다), 차이코프스키는 분명히 그의 세대에서는 가장 우수한 러시아인 교향곡 작곡가였다.

 

10곡의 오페라는 그 테마가 역사적인 것(오를레앙의 소녀)에서 심리극(에프게니 오네긴, 스페이드의 여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오페라에 대한 그의 공헌을 명시하고 있다. 무소르그스키의 사실주의와 마찬가지로 바그너적 개념까지도 거절한 차이코프스키는 글린카식의 생각에 더 가까운 형식개념레치타티보에 의해서 맺어진 아리아와 앙상블의 연결을 선택했으나 그것은 시적이고 싶은 분위기 속에서였다. 레치타티보는 실제로 오페라의 중요한 몇 가지의 시간을 맺어주는 요소에 불과할 것이다(선율적 레치타티보라는 형태 위에 구축된 오페라는 음악이 없는 오페라이다).

한편, 스페이드의 여왕에는 카르멘의, 즉 음악이 이른바 끊임없이 대기하고 있는 작품의 영향의 흔적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차이코프스키의 약간의 서정성이야말로 그가 얻은 성공을 설명하는 것이며 그것은 지나가버린 향수, 즉 1850년대부터 1860년대에 걸친 러시아에 대한 향수를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혁명 직후에 그의 오페라가 소시민적인 심성을 가졌다고 비난받았다는 사실은 뜻이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늘날에도 그의 발레음악에 관해서는 그런 의견을 표명할 수 있다(백조의 호수[1875~76], 잠자는 숲속의 미녀[1888~89], 호두까기인형[1891~92]).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가 레오 들리브에 이어서 발레음악 부흥을 위해서 힘을 쏟았고 디아길레프에 의해서 전위음악이 생기기 이전에 발레음악을 독립된 성격을 가진 작품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잊게 되는 것이 된다.

 

 

표트르 일리이치 차이코프스키

표트르 일리이치 차이코프스키
(Piotr Ilyitch Tchaikovsky 1840~1893)
광산기사를 아버지로 하여 보트킨스크에서 태어나 53년 남짓한 생애를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마쳤는데 죽음의 원인은 콜레라였다. 「러시아 5인조」하고는 대체로 같은 시대에 속하나 그의 음악은 러시아 민족성에 기조하면서도 형식적으로는 독일의 영향이 많고, 내면적으로 예민한 감성을 지니고 있다. 1897년 조각가 비렌스키 작.

 

 

차이코프스키가 출생한 집

차이코프스키가 출생한 집(보트킨스크)
차이코프스키는 1840년 5월 7일에 이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일리아 페트로비치 차이코프스키는 1837년(42세)에 젊은 두번째 아내 알렉산드라 안드레예브나와 함께 광산의 공장장으로서 부임하여 3년 뒤에 이 부부의 차남으로서 표트르는 태어났다. 그리고 1848년 온 집안이 페테르스부르크로 이사하기 전까지 여기서 자랐던 것이다. 현재는 차이코프스키 기념관이 되어 있다.

 

 

표트르 차이코프스키

표트르 차이코프스키(사진)
1860년 법무성 시절.

 

 

표트르 차이코프스키

표트르 차이코프스키 1863년 법무성을 사직한 해.

 

 

차이코프스키와 형제들

차이코프스키와 형제들
앞줄은 형 니콜라이와 표트르. 뒷줄 양 끝은 아우 아나톨(왼쪽)과 모데스트 이 두아우는 쌍둥이. 중앙은 히폴리트(1927년까지 클린의 차이코프스키하우스 관리인). 1890년 촬영. Glinka Museum, Moskva.

 

 

시인 레프 톨스토이

시인 레프 톨스토이(Lev Tolstoi 1828~1910)
차이코프스키는 일찍부터 숭배하고 있던 이 시인을 1876년에 방문한 일이 있다. 톨스토이는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에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다고 한다.

 

 

표트르 이바노비치 유르겐손

표트르 이바노비치 유르겐손(Piotr Ivanovich Jurgenson)
차이코프스키의 친구이자 출판업자.

 

 

블라디미르 바지리에비치 스타소프

블라디미르 바지리에비치 스타소프(Vladimir Stassov)
음악비평가.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Alexander Pushkin 1799~1837)
《오이겐 오네긴》, 《스페이드의 여왕》의 원작자.

 

 

차이코프스키하우스(클린)의 음악실

차이코프스키하우스(클린)의 음악실
피아노는 러시아의 J. Becker 제. 1885년 그 회사가 기증한 것. 차이코프스키의 생일과 기일(忌日)에는 매년 일류 연주가들이 이 피아노로 연주한다.

 

 

차이코프스키의 유품

차이코프스키의 유품
압지 위의 코안경, 펜, 재떨이, 담배케이스, 파이프, 벨 등. 클린의 차이코프스키하우스.

 

 

차이코프스키의 거실

차이코프스키의 거실
아버지 차이코프스키의 초상을 중심으로 온 벽 가득히 가족과 기억에 남는 사진들이 걸려 있다.

 

 

차이코프스키의 침실

차이코프스키의 침실
침대와 나이트테이블, 가운, 클린, 차이코프스키하우스.

 

 

차이코프스키의 부모

차이코프스키의 아버지 일리아 페트로비치

차이코프스키의 아버지 일리아 페트로비치
광산학교를 나와 유능한 광산기사로서 1837년에 보트킨스크에 부임하였고, 1848년에 육군소장 대우의 지위로 퇴직하였다. 그는 연극과 음악을 좋아하여 스스로 플루트를 연주하고 있었다.

 

 

어머니 알렉산드라 아렉세예브나 앗시르

어머니 알렉산드라 아렉세예브나 앗시르
그녀는 프랑스혁명으로 러시아에 이민해 온 프랑스인의 피를 받고 태어나 1833년에 일리아 페트로비치의 재취 아내가 되었다. 성격이 착한데다 음악에 재능이 있었으며 차이코프스키는 특히 이 어머니를 끔찍이 생각했다. 1855년 사망.

 

 

차이코프스키의 생가 전경

차이코프스키의 생가 전경(보트킨스키)

 

 

 

카멩카의 다비도프가

카멩카의 다비도프가(家)
현재 기념관.

차이코프스키의 누님 알렉산드라는 1860년에 레오 다비도프와 결혼하여 카멩카에서 살았다. 이 부부는 7 남매의 자식을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몄다. 차이코프스키는 종종 이 매형네 집으로 누님과 생질들을 찾았는데, 특히 가운데의 사내아이 블라디미르(사진 앞줄 왼쪽끝)를 귀여워했다.

 

 

누이 알렉산드라 일리니시나

누이 알렉산드라 일리니시나(Alexandra Ilynishna)
뒷날에 다비도프 부인이 된다.

 

 

다비도프네 가족

다비도프네 가족중앙이 다비도프 내외.

 

 

 

차이코프스키 기념상

차이코프스키 기념상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음악원 입구 정면.


차이코프스키도 다른 많은 러시아 대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음악을 지망했던 사람은 아니다. 1852년(12세)에 페테르스부르크의 법률학교에 입학하여 그 한편으로 작곡도 시도하고는 있었지만, 1859년 졸업과 동시에 법무성에 취직하면서 음악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었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의욕이 강해져 감에 따라 1862년에 새로 열린 페테르스부르크 음악원에 들어가 이 학교의 교수 잘렘바에게서 대위법(對位法)을 배웠다. 그리고 1863년에 정식으로 법무성을 그만두고 루빈슈타인의 교실에서 배웠는데, 이 사람이 1865년에 개교한 모스크바 음악원 원장이 된 탓으로 차이코프스키도 그 학교의 화성학 강사로 초빙이 되었다. 이 음악원이 현재의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으로서 전통이 있는 러시아 최고의 음악학교가 되어 있다.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의 건물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의 건물(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의 여자들

데지레 아르토(Desirée Artot) 오페라 가수

데지레 아르토(Desirée Artot)오페라 가수
1868년, 그녀가 모스크바에 연주여행을 왔을 때 차이코프스키는 그녀를 열렬히 사랑하여 결혼을 하려고 했었으나, 그녀는 이듬해에 바리톤 가수 파디라와 결혼하고 말았다. Glinka Museum, Moskva.

 

 

차이코프스키와 아내 안토니나 이바노브나 밀라코바

차이코프스키와 아내 안토니나 이바노브나 밀라코바
(Antonina Ivanovna Milakova)
차이코프스키는 1877년 7월 6일에 음악원의 제자였던 이 여성과 결혼했으나 1주일간의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뒤 별거생활로 들어가, 그대로 이혼해 버리는 불행한 사태를 초래하였다. 차이코프스키는 그 책임을 느끼어 한때 몹시 건강이 나빠져 있었다. Glinka Museum, Moskva.

 

 

나제시다 폰 메크 부인 

 

 

 

나제시다 폰 메크 부인

나제시다 폰 메크 부인
(Nadjeshda von Meck)
이 부호의 미망인은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사랑하여, 1876년부터 14년간에 걸쳐 그를 경제적으로 원조하였으나 두 사람의 교제는 서신왕래만으로 그치고 평생 서로 직접 만난 적은 없었다. Glinka Museum, Moskva.

 

 

차이코프스키와 「러시아 5인조」

차이코프스키와 「러시아 5인조」

차이코프스키와 「러시아 5인조
러시아 음악의 기초는 글링카에 의하여 굳혀지고, 19세기 후반의 「5인조」와 차이코프스키에 의하여 융성을 이루었다. 그런 가운데서 차이코프스키는 다소 이색(異色)을 나타내어 서유럽 취미를 반영하면서도 근본에 있어서 러시아의 향토색이 강한 데에는 변함이 없었다. 사진은 아리아크린스키의 수채화. 왼쪽에서 박수를 치고 있는 것이 무소르그스키, 그 오른쪽이 보로딘, 발라키레프, 차이코프스키, 악수하는 상대가 림스키-코르사코프. Glinka Museum, Moskva.

 

 

차이코프스키 만년의 집

클린의 차이코프스키하우스 입구

클린의 차이코프스키하우스 입구

차이코프스키의 만년의 집(클린)
그는 1891년에 클린에 있는 이 집을 샀다. 자작나무 숲에 둘러싸인 한적한 전원지대로서 모스크바로부터 90㎞ 떨어진 시골이다. 그는 1892년 5월에 이 집으로 이사를 했지만 겨우 1년 반을 살고 콜레라 때문에 목숨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 집은 1894년에 아우 모데스트에 의하여 차이코프스키 박물관으로서 공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피아노실과 도서실은 물론 침실까지도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현관입구의 문에 「면회는 월요일과 목요일 오후 3:00~5:00에 한함. 그 밖의 날은 삼가 주십시오」라는 표찰이 붙어 있다. 그의 교향곡 제6번 《비창》, 피아노 협주곡 제3번 등이 여기서 작곡 되었다.

차이코프스키의 집의 전경

차이코프스키의 집의 전경(클린)

 

 

차이코프스키의 유품과 데드마스크

차이코프스키의 책상

차이코프스키의 책상
이 작은 창문으로 자작나무가 난 정원이 내려다 보인다. 그는 여기서 작곡하기를 좋아하였다(클린).

 

 

차이코프스키의 세면도구

차이코프스키의 세면도구
물병과 세면기, 비누그릇, 양치질 컵 등(클린).

 

 

차이코프스키의 데드 마스크

차이코프스키의 데드마스크
1893년 10월 28에 그의 《비창(悲愴)》을 자신이 지휘하여 초연한 뒤 11월 6일 오전 3시경에 갑자기 사망한 탓으로 자살설도 나돌았을 정도였다.

 

 

차이코프스키의 무덤

차이코프스키의 무덤

차이코프스키의 무덤
레닌그라드의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묘지에는 수십명의 러시아 저명 음악가의 무덤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차이코프스키의 무덤은 한층 두드러지게 호화롭다.

 

 

차이코프스키의 사진

차이코프스키

차이코프스키1868/69년의 사진.

 

 

차이코프스키

차이코프스키1880년의 사진.

 

 

차이코프스키

차이코프스키1879년의 사진.

 

 

차이코프스키

차이코프스키1887년의 사진.

 

 

차이코프스키

차이코프스키 1893년의 사진.

 

 

 

차이코프스키

차이코프스키 1888년의 사진.

 

 

차이코프스키

차이코프스키 1893년 화가 쿠즈네초프의 유화.

 

 

차이코프스키

차이코프스키1893년의 사진.

 

 

백조의 호수

차이코프스키 자필원고

차이코프스키 자필원고발레 《백조의 호수》의 피아노 악보.

 

 

표도르 일리이치 차이코프스키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백조의 호수》 볼쇼이 극장에서의 상연.

 

 

호도까기 인형

표도르 일리이치 차이코프스키

차이코프스키의 발레 《호도까기 인형》 볼쇼이 극장에서의 상연.

 

 

표도르 일리이치 차이코프스키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 《에우게니 오네긴》 볼쇼이 극장에서의 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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