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의 역사속 인물>

프로필

2019. 3. 23. 15:34

이웃추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전국시대, 센코쿠 시대에 출세한 인물로 일개 서민 출신에서 전국을 통일하고 ' 관백 ' 이라는 지위에 올랐다. 그는 현대에와서 일본에서 일본의 역사속 인물중에 입신출세의 가장 대표적인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천하를 통일하겠다는 오다노부나가의 목표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결국 그것을 달성했다. 그의 일생은 1537년 3월 17일 ~ 1598년 9월 18일 까지 61년을 살고 눈을 감았다. 그는 전국을 통일하고 도요토미라는 성을 하사받기 전까지는 하시바 히데요시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의 서민으로써의 성은 하시바였던 것이다.

8년 이라는 시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전체를 평정하는 데 걸렸던 시간이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의 원흉으로 여겨지지만 일본에서는 밑바닥에서 시작해 전국 통일을 이룩한 희대의 영웅으로 추앙을 받는 인물이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36년 오와리국 아이치 군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재혼했는데, 양아버지의 학대로 일찍이 가출을 해서 스루가국으로 갔었다. 당시 스루가는 영주인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풍류를 사랑하여 인재를 끌어모으고, 상공업을 장려해서 전국의 인재와 상인이 모여들던 곳이었다. 면직물과 바늘 장사를 하던 그는 열다섯살 무렵 이마가와 가문의 가신인 마쓰시타 유키쓰나를 만나게 되었다.

얼마지나지않아 히데요시는 타고난 이재 감각으로 마쓰시타 가문의 재정 관리자가 되었다. 그러나 기존 가신들의 견제로 결국 유키쓰나로부터 퇴직을 권유받게되었다.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새로운 재능이 필요한 시기에 나쁜 구습을 끌어안고 안주하는 사람 아래서는 자신이 일하고 싶지 않다며 퇴직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섬기는 이마가와 가문 역시 마찬가지 일것이라며 추천도 거절했다고 한다.

고향으로 돌아간 히데요시는 1553년 무렵 오다 노부나가의 잔심부름꾼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히데요시는 원숭이를 닯은 외모와 재간꾼으로 유명한데, 전형적인 개혁가 스타일의 오만방자한 도련님인 노부나가와 달리 비위를 잘 맞추고 ,임기응변에 능하여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유형이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짚신을 늘 가슴에 품고 다니며 따뜻하게 신을 수 있게 하고, 심부름을 가면 자신의 돈으로 물건 값을 보충하여 누구보다 싼 값에 구해 오는 등 재치를 발휘했다. 부지런하고 성실한데다 때때로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곧 오다 노부나가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1568년 노부나가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쇼군으로 옹립하고 정권을 장악하자 그는 아케치 미쓰히데, 니와 나가히데와 함께 교토에서 정무를 보게되었다. 일개 잔심부름꾼이 중앙 정계에서 관리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히데요시의 능력 덕분이기는 했지만 무엇보다 노부나가가 능력위주로 인재를 등용하는 합리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1573년 히데요시는 오미 3개 군을 하사 받고, 이미하마에 성을 축조해 성주로 부임했다. 이후 노부나가가 전국을 장악하면서 그도 전공을 세워 착실히 신분 상승의 계단을 밟았다. 히데요시 인생의 전환점은 바로 1582년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쓰히데의 습격을 받고 자살한 혼노지의 변이었는데 이때 히데요시는 사이고구에서 모리 데루모토와 전투 중이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죽음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소식을 가져온 사자를 베어 죽이고 서울러 데루모토와 화의를 맺었다. 교토로 올라온 히데요시는 야마자키에서 아케치 미쓰히데와 전투를 벌려 패퇴시켰다. 미쓰히데으는 패주 후 도망쳤으나 결국 토착민의 고발로 사로잡혀 처형당했다.

미쓰히데 토벌로 공을 세운 히데요시는 순식간에 후계 싸움의 주도권을 잡고 적손인 산보시 ( 오다 노부나가의 장남)를 후계자로 정했다. 또한 노부나가의 영지는 아들들을 비롯해 유력 가신들에게 분배되었는데, 이때 그는 미쓰히데의 옛 영지였던 단바 ,야마시로, 가와치를 받으면서 어느 가신들보다 우위를 점했다. 그러면서 그때까지 가장 세력이 컸던 가신 시바타 가쓰이에와 대립하게 되었는데 히데요시와 가쓰이에는 오미의 시즈카타케에서 격돌을 하게되었고 전쟁은 히데요시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최대 경쟁자 가쓰이에가 죽자 패권은 히데요시의 손으로 들어왔다. 그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각지의 다이묘들에게 사찰을 보내 승리 소식을 전하고, 자신에게 도전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1584년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 노부카쓰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끌어들여 히데요시에게 대항했는데 히데요시는 이세와 미노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공세를 펴 나갔으나 압도적인 병력차이에도 전선은 교착 국면을 맞이했다. 히데요시는 노부카스를 설득하여 강화를 맺고, 명분을 잃은 이에야스는 군을 철수했다. 그리고 이에야스의 차남 오기마루가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면서 두 사람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었다.

전국의 주도권을 가지게 된 히데요시는 이제 신분을 바꾸고 싶었다. 타고난 카리스마로 자신의 제국을 구축하려 했던 오다 노부나가는 중앙에서 내리는 관직을 모두 거절한 바 있다. 그러나 평민 출신에 이이한 외모로 사람들에게 늘 무시당했고, 지략이나 천하에 대한 포부보다는 임기응변과 신속한 재치에 기반해 성공했으므로 권위 또한 없었다. 때문에 그는 조정에서 부여한 공식적인 지위를 통해 권위를 얻고자 했다. 그는 조정으로부터 도요토미라는 성을 하사받고, 태정대신, 간파쿠 등의 직책을 얻어냈다.

그후 그는 간파쿠의 권위를 이용해 천황의 이름으로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다이묘 간의 개인적 전투를 금지하는 '총무사령'을 내리고 명령에 따르지 않는 다이묘를 토벌했다. 복속된 다이묘들은 히데요시 정권에 편입되었다. 또한 반란의 싹을 애초에 제거하기 위해서 복속된 다이묘들을 쉴 새없이 다른 반란에 투입하여 전쟁터를 오가게 했다. 1600년 호조소운이래 간토 지방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호조 가문이 히데요시군과 3개월간 대치한 끝에 결국 무릎을 꿇었다. 명실공히 전국이 통일이 된것이다. 노부나가가 죽은지 8년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다이묘들은 일시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력에 제압당했을뿐 여전히 자신의 군사력을 온전하게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히데요시는 유력 다이묘들을 약화시키기 위해 계속 '전쟁'을 할 필요가 있었다. 전국 통일 후 그는 시선을 외부로 돌렸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이었다.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소요시토시, 고니시 유키나가, 다테 마사무네, 시마즈 요시히로등 유력 다이묘들의 만류를 무릎쓰고 조선을 침략했다. 이에야스는 갖은 변명을 대며 불참했다.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선봉장이 된 왜군은 한반도 남부에 상륙하여 파죽지세로 한양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이순신이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일본은 명과의 강화교섭에 착수했다.이 무렵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아들 히데요리를 낳았다. 57세가 되어서야 후계자를 본 것이었다.

1589년 태어난 첫 아들은 세 살도 넘기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후계를 조카 히데쓰구로 정한 바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느 아들 히데요리를 후계로 세우고 싶었으나 직접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히데쓰구의 지위는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1595년 히데쓰구가 반란을 꾀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히데요시는 그를 고야의 절에 유폐시키고 자결을 강요했다.

한편 명과의 교섭은 조선 남부의 4개 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명나라 황녀를 일본 천황과 혼인시킬것 드의 무리한 요구로 결렬되었다. 1597년 히데요시는 14만의 군사를 보내 다시 조선을 침략했으나, 이듬해 그가 죽으면서 조선 내의 왜군이 모두 철수하고 두 차례의 왜란은 막을 내렸다.1598년 병석에 누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모든 유력 다이묘들을 불러 히데요리를 돕겠다는 서약을 받고 ,오른팔 마에다 도시이에를 후견인으로 삼았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어린 아들을 걱정하며 눈을 감았다.

세상의 질시를 받던 미천한 심부름꾼에서 전국을 통일한 최고 권력자가 된 위대한 한 평생이었다. 다이묘들에게 후사를 부탁하며 남긴 편지에는 이 위대한 남자의 고단함과 죽음 앞에서 무력한 한 인간으로서의 감회가 가감없이 드러나 있다.그렇게 그는 일본의 역사속 인물로 사라져갔다.

우리에게는 원흉이라고 할수있지만, 인간으로써 그가 성공을 위해 노력한부분에 대해서는 배울것도 분명이 있다고 느꼈다.

이슬처럼 떨어졌다 이슬처럼 사라지는 게 인생이런가

세상만사 모두가 일장춘몽이로세.

도요토미 히데요시

KOREA
KOREA 교육·학문

세상의 모든 지식을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