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인드글라스는 어떻게 교회건축(고딕건축, 중세건축)으로 들어왔나? 철학적, 미학적 이유 (1)

프로필

2019. 8. 31. 16:26

이웃추가

0. 왜 스테인드글라스(Stained Glass)에 관심을 갖는가?

본인이 스테인드글라스(Stained Glass)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아름다움은 무엇일까?"라는 질문과, "빛은 아름다운 것일까?"라는 질문들이었다. 더 나아가서 아름다움에 대한 평가가 개개인마다 다양한 오늘, "이 다양한 아름다움 속에서 공통분모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서로 다르다고 생각했던 사물들이나 개념들을 아름다움으로 서로 연관시킬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한 생각을 갖고 미학 책들을 읽으며 느꼈던 한 가지는, 미와 예술은 꼭 항상 같은 것을 뜻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아름다움과 예술은 당연히 같다고 생각한 나에겐 다소 충격이었다.

그럼에도 미와 예술이라는 행위가 한곳으로 모아졌던 시기를 발견했는데, 바로 중세시대였다. 교회라는 절대적인 큰 틀 아래에서 예술품과 장식품들이 제작되고 소모되었던 중세를 알아가다 보니 건축양식을 공부할 수밖에 없었고, 그중에서도 "빛의 예술"이라고 불리는 스테인드글라스에 대해 궁금해졌다. 서론이 길었지만 짧게 말하자면, 사람들은 어떤 이유에서 스테인드글라스를 아름답다고 느꼈고 어떤 이유에서 그것을 예술로서 받아들였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들을 다양한 측면으로 정리하려고 한다. 그 첫 시작은 철학적미학적으로, 그리고 이어서 사회・인문학적으로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건축학적으로 정리해보려고 한다.

1. 스테인드글라스 제작 방법

스테인드글라스 제작 방법 (출처: Youtube "LambertsGlas", "YTN Science")

스테인드글라스란 착색된 유리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유리에 색을 낼까? 궁금하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스테인드글라스의 물리적인 탄생부터 알고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어서 짧게 요약을 해봤다.


1. 주재료 실리카와 다른 재료들을 섞어 섭씨 1600도에 녹여서 유리를 만든다.

2. 유리를 제작하는 초기 과정에서 각종 금속화합물을 섞어 열을 가하면 다양한 색깔을 낼 수 있다.

3. 녹은 유리를 파이프에 묻혀 공기를 불어넣으며 다양한 도구를 사용해 큰 실린더 모양으로 만든다.

4. 수차례 재가열을 해서 실린더 형태를 잡는다.

5. 실린더의 한 면을 절단해 얇고 평평하게 만들어 최종적으로 냉각한다.

6. 미리 제작된 도안에 맞게 색유리를 조각낸다.

7. 필요에 따라서 유리에 별도로 색칠을 하거나 에칭 등 공법을 통해 더욱 정교한 묘사가 가능하다.

8. 조각난 유리들을 도안에 맞게 배열을 한 후 "H"형 납선(lead came) 사이에 끼워서 납땜한다.

9.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마감작업(putty)을 하는데, 유리와 납선 사이에 기름진 시멘트 또는 석회질을 섞어 만든 반죽을 밀어 넣어 마무리한다.

10. 창문에 끼워 넣으면 된다.


위의 제작 과정은 매우 간략하게 설명을 한 것으로, 공정에 대해서 더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의 사이트와 영상에서 조금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국내 유일하게 인천가톨릭대학교 조형예술대학에 스테인드글라스 전공이 있다고 한다.


2. 철학적・미학적 측면으로 본 스테인드글라스와 고딕건축

4세기 로마리큐르구스의 배(Lycurgus Cup) 유리컵. 빛을 안에서 비추면 빨간색, 밖에서 비추면 황색을 띤다.

쉬제르 수도원장(Abbot Suger)

(출처:https://study.com)

스테인드글라스는 고딕(Gothic)건축과 함께 그 꽃을 피운다. 고딕건축은 프랑스의 쉬제르 수도원장(Abbot Suger)이 생드니 수도원의(Basilique de Saint Denis) 부속 교회당을 재건축하면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사실 고딕건축 양식 이전에 로마네스크(Romanesque) 양식에도 스테인드글라스가 사용되지만 육중한 천장의 압력을 견디기 위해 벽도 함께 두꺼워져 창문을 크게 낼 수 없는 제한을 주었다. 그렇다 보니 창문은 건축 내부에서의 활용도가 제한적이었다.

사실 채색된 유리는 이미 4~5세기 교회 건축에서 발견되며, 고대 이집트까지도 거슬러 올라간다. 위의 4세기의 "리큐르구스의 배(Lycurgus Cup)"가 그 대표적 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익숙한 아름다운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고딕건축 양식에서부터였다.

그렇다면 왜 하필 고딕건축일까?

2.1 이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사이의 아름다움

우선은 고딕건축이 흥했던 시대의 사람들이 무엇을 아름답다고 생각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세 이전으로 한 번 거슬러 올라가 보자

라파엘로(Raffaello)의 <아테네학당(The School of Athens)>. 왼편이 플라톤

플라톤(Platon)은 인간은 이데아의 영역인 존재계로부터 생성계로 추방되었다고 한다. 그는 우리가 불완전한 생성계로부터 벗어나 완벽한 본질을 되찾고자 하는 열망을 사랑(eros)이라고 한다. 플라톤은 바로 이 사랑의 대상을 "미美"라고 했다. 플라톤에게 아름다움이란 이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닌 존재계에 속한 것이다. 즉 우리가 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사물 속에서 존재계의 이데아가 인식되는 경우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말하는 "미"는 우리가 흔히 아는 예술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미"는 위에서 말했듯이 존재(이데아)의 현현이다. 고대 그리스의 예술은 오늘날 인간이 영감을 갖고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을 뜻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것은 예술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플라톤은 "비이성적인 작업을 예술이라 부르지 않는다고"했다. 달리 말하면 플라톤에게 예술이란 이 불완전한 세상의 것들을 다 내려놓고 정신적이고 이상적인 것을 다루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엔 엄격한 규칙과 법칙이 예술(techne:기술, 솜씨)을 뜻했다. 더 나아가 정신적인 노력이 필요한 예술과 신체적인 노력이 필요한 예술을 분리하여 교양예술과 범속예술이라고 불렀다.

한편, 플라톤의 이러한 미에 대한 생각은 예술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허용한다. 즉 예술은 실재(이데아)의 감각적 현현이라는 관점이다. 형상(이데아:Idea)은 저 멀리에 있기도 하지만 이 생성계 속에서 감각적으로 모방되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며, 우리는 이를 발견함으로써 본래의 본질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플로티누스(Plotinus)

그렇다면 이러한 질문이 가능할 것이다: "예술가란 오히려 형상(idea)에 더 가까이 있고 그것을 더욱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이러한 관점에서 신플라톤주의 창시자 플로티누스(Plotinus)는 플라톤의 미에 대한 생각은 동의했지만, 예술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은 거부했다. 플로티누스는 예술이란 단순히 자연의 모방이 아니라 자연을 더 고차원적으로 변형시켜 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플라톤의 예술과 아름다움에서 저평가 되었던 감각적인 것에 대한 옹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로티누스도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예술가가 포착하기 힘든 미를 추구하고 있었다. 이상적인 것에 대한 플라톤적인 이해로 인해 정신적인 부분에 너무 중점을 두다 보니, 감각적인 미를 추구하더라도 그 미를 정신적인 것에 종속시킬 수밖에 없었다. 플라톤은, 미는 유기적이고 자연의 복잡성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기하학에서 발견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즉 미는, 꽃 동물 또는 인체의 정교성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기하학의 직선, 원, 정방형에서 발견된다. 이처럼 미에 대해서 플라톤적인 이해에 기반한다면 예술가란 수학자에 불과하다. 아래의 그림들처럼 말레비치(Kazimir Malevich)몬드리안(P.Mondrian)의 작품들의 순수성 정도 되어야 플라톤의 미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몬드리안(Piet Mondrian), <Composition with Red Blue and Yellow>, 1929, National Museum, Belgrade, Serbia

말레비치(Kazimir Malevich), <Black Square>, c.1923, State Russian Museum, St. Petersburg, Russia


2.2 본질 회복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 지상에서 시작된 타락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 그리스도의 수난기 - 천국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이브, 1510년, 르 베르죄르 미술관

플로티누스의 미의 개념은 기독교에게도 전해졌지만, 기독교는 미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가능케했다. 우선 기독교

에서 말하는 본질의 타락은,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존재계에서 생성계로의 추방으로 인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이루어졌다. 즉, 아담(Adam)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시작되었다(정확히 말하자면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가장 이상적이고 완전한 천국은 이미 지상(에덴동산)에 있었다. 그렇다면 타락한 지상은 다시 천국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제2의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께서 오셔서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의 부활도 약속해주셨다. 신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육체를 입고 오셨다는 점과, 영과 육으로 완전하게 부활하셨다는 것, 그리고 믿는 자에게도 구원과 부활을 약속하셨다는 것을 통해서, 기독교의 이상적인 상태는 정신적인 것뿐만 아니라 감각적인 것도 긍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Saint Augustine of Hippo)는 축복받은 자는 반드시 천상의 빛을 인식할 수 있고 이 땅에서 두 눈으로 보게 될 것이라고 얘기한다. 그렇다면 지상의 미는 천국의 광휘를 모방한 것으로 축복받은 자들에게 약속된 즐거움을 맛보게끔 해주는 것이다.

2.3 지상의 교회와 천상의 빛의 관계: 요새? 환희?

880년경에 지어진 독일의 코비 수도원(Corbey Abbey) 서쪽(정면). (Photo by Aeggy)

건축은 천국의 도시를 모방하는데 가장 적합한 예술이다. 지상의 공동체는 천상의 보이지 않는 교회의 이미지이며,

지상의 물리적 교회는 천상의 도시의 이미지이다. 천상의 도시에 대한 여러 가지 반응이 있다. 교회를 요새로 보는 경향 독일에서 지속됐고, 교회를 환희의 장소로 보는 관점프랑스에서 출현했다.

교회를 요새로 보는 경우, 사람들은 교회 안으로 들어옴으로써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된다. 이러한 경향에서는 군사적 도상학(iconology)이 드러나는데, 교회의 정문이 서쪽에 그 중점을 둔다는 점이다. 서쪽은 해가 지는 곳으로 악이 예상되는 곳이다. 그래서 로마네스크의 교회는 서쪽(정문)이 악을 정복하는 요새처럼 통로도 없이 우뚝 솟아 있는 벽이나 탑의 형태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편, 중세의 고딕적 신앙에 있어서 악에 대한 심판, 즉 두려움뿐만 아니라, 희망과 사랑도 똑같이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존경이 점점 커졌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얼마 전 화재로 더욱 유명해진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Notre-Dame Cathedral)의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여기서 "노트르담(Notre Dame)"은 프랑스어로 "우리의 숙녀"라는 뜻이며, 이는 "성모"를 뜻한다. (실제로 구글 번역기에 소문자로 "notre dame"을 치면 "우리의 숙녀"라고 번역되는데, 대문자 "Notre Dame"을 치면 "성모"라고 번역된다). 파리의 대성당뿐만 아니라, 스트라스부르, 샤르트르, 루앙, 랭스, 아미앵 등 북프랑스 대성당 대부분이 노트르담이란 이름을 갖고 성모 마리에게 봉헌되었다. 이러한 성모 마리아에 대한 존경은 결과적으로 물리적이고 감각적인 것에 대한 추구로 이어졌다.

1) 오툉 대성당 정문 팀파늄 전체. 2) 선택받은 자들 부분. 3) 저주받은 자들 부분 4) 상인방 부분. (출처: Alamy Stock Photo, Dublin Core)

로마네스크 양식 있어서 그리스도는 죄인과 선택받은 자를 구분하는 무서운 심판관으로 표현된다. 대표적으로 생 나자르 성당(Sain-Lazare Cathedral) 또는 오툉 대성당(Autun Cathedral) 정문 팀파늄엔 프랑스 로마네스크 조각가 기슬레베르투스(Gislebertus)<최후의 심판(Last Judgement)> 작품이 있다. 이는 약 1130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위의 사진을 보면, 중앙에는 심판자 그리스도가 있고, 그리스도의 오른 편에는 천사들의 도움받아 위로 올라가는 선택 받은 자들, 왼편에는 죽은 영혼들이 미카엘 천사에 의해 저울로 심판받으며 마귀들에 의해 고문 받고 있다. 바로 밑의 긴 상인방에는 무덤에서 부활하여 심판을 기다리는 행렬이 보인다. 그중에는 심판받기 두려워 머리를 싸매는 사람도 있으며, 악마의 손에 잡혀 비명을 지르며 얼굴째로 끌려 올라가는 이도 있다. 이러한 조각들 위에 함께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

여기서 공포가 세속적인 죄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에게 엄습하게 하라.

왜냐하면 이 형상들의 무시무시함이 그들의 운명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Terreat hic terror / quos terreus alligat error / nam force sic verum / notat hic horro specierum)

(대놓고 겁주는..)

노트르담 대성당 서쪽(정문) 왼편 팀파늄 성모의 문(Portal of the Virgin). (출처: Professor Moriarty)

이처럼 교회 정문에서 처음 마주치게 되는 그리스도의 심판은 무서운 것이며, 선택받지 못하기라도 하면 끔찍한 악마들의 고문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한 점에서 사람들에게 마리아는 그리스도와는 다른 의미에서 희망이었다. 사람들은 자신들과 같이 죄 많은 인간인 마리아가 이상적이고 죄를 모르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였다는 사실로, 마리아를 이상적인 것불완전한 세속과의 연결고리로 인식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외에, 이 세상의 구원의 중개자로 성모 마리아가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교회 건축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위에서 언급한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는 3개의 팀파늄이 있는데 왼편 팀파늄은 <성모의 문(Portal of the Virgin)> 으로, 성모 마리아의 죽음, 승천, 대관을 그리고 있으며, 그리스도와 같은 왕좌에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가 무서운 심판관이라는 점은 변함없었다, 그리고 예술가도 이상적인 것을 추구해야 함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마리아를 통해 희망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예술가들도 이제 감각적인 것과 이상적인 것의 대립으로부터 벗어나, 감각적인 것을 더욱 추구하게 되었고, 구체적인 것을 통해 이상적인 것을 묘사하기를 시도했다. 그래서 오툉 대성당의 기슬레베루트스의 조각상들은 비교적 추상적인 것에 반해, 약 100년 후에 제작된 노트르담 대성당 팀파늄의 조각상들은 더욱 구체적이고 감각적이다.

2.4 초월적인 빛과 감각적인 빛

위-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테스(Pseudo-Dionysius the Areopagite)

""에 대한 중세의 고찰은 고딕 건축에 있어서의 감각적인 것을 위한 길을 마련해주었다. 이는 요한복음 1장, 플라톤주의나, 신플라톤주의적인 근거에 의해 제시되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위-디오니시우스아레오파기테스(Pseudo-Dionysius the Areopagite) 신학에 의해서 제시되었다.

위-디오니시우스가 신플라톤주의에 입각하여 쓴 네 가지 이론서 중, 고딕 건축의 탄생과 관련해서 중요한 책은 『천상위계론』이다. 그는 신약 성경의 하나님을 빛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6)이라는 말씀을 신플라톤주의적으로 해석했다. 그는 가장 높은 위계에 있는 신의 빛이 피조물에게 방출되었다가 다시 신을 향해 빛을 귀환시켜 피조물과의 통합을 실현한다고 말한다. 즉 피조물 안에는 신의 빛을 나누어 갖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물질적인 빛 안에도 비물질적인 신적인 빛을 어느 정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중세의 사유 속 빛은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초월적인 천상의 빛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정신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중세의 사유는, 미의 관념을 빛의 관념에 연관시키는 경우에만 일관성을 가진다. 쉬제르는 이러한 위-디오니시우스의 빛의 신학을 근거로, 빛의 신성함과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다. 폰 심슨(O. von Simson)에 의하면:

쉬제르는 디오니시우스 신학을 가시적으로 "논증"하기 위하여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사용했다. 쉬제르는 반투명의 화판에다가 신성한 상징을 "부여"했다. 즉 그에게 있어서 이러한 반투명의 화판은 베일과 같은 것으로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감추면서 동시에 드러내 주는 것이었다.

(넵, 드디어!! 스테인드글라스가 등장했습니다..ㅎㅎ)

왼쪽) 생드니 성당 콰이어 부분. Photo by Ben Johnson. 오른쪽) 생드니 성당 고측창(clerestory)

생드니 성당 북측 장미창 부분의 <이새의 나무(Tree of Jesse)>, Photo by Diliff

즉 쉬제르는 빛은 신성하다고 믿었고, 빛의 신성함이 물질적인 색유리를 통과할 때 빛 안에 있던 신성한 것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마치 빛을 프리즘에 통과시키면 굴절되고 분산되는 것처럼, 스테인드글라스는 빛 속에 담겨있던 신성함을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베일"을 통해 가시화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감각적이며 신성한 광경을 보며 자신의 신앙심을 고취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위-디오니시우스의 신학에 따르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그 신성함이 전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에 "어느 정도" 담겨있던 신의 신성함이 드러나는 것일 뿐, 본래의 신성함은 가장 높은 위계에 있는 신에게만 있는 것이다.

3. 결론

정말 먼 길을 돌아왔다. 간단히 요약해보자.

물질적인 것을 경시하고, 형이상학적인 미학을 중시한 플라톤적인 전통과 달리, 기독교 세계관은 물질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의 간격을 두지 않는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알 수 있다. 감각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 그중 하나를 부정하는 것은 바로 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 교리에서는 이 둘의 분리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잘 가시화된 경우가 고딕 건축이었고, 스테인드글라스였다. 빛은 초월적이고 신성하고 아름답다는 미적 사유와, 신성함이 물질적인 것에도 발견될 수 있다는 철학 사상이 더해져, 물질적인 빛으로 신성한 빛을 표현하려는 가시적인 움직임이 나타났는데, 바로 고딕 건축에서 스테인드글라스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스테인드글라스, 교회 건축 그리고 기독교 예술에 대해서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오늘날의 교회 예술은 일종의 기능 또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렸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 예술이란 건축, 미술, 찬양, 영상, 등 기독교라는 범위 안에서 창작되는 모든 미적행위를 포함한다) 물론 예술이 예배의 목적이 되어버리면 안 되지만, 현시점에서 기독교 예술에게 순수예술이란 명칭을 붙이기엔 과할뿐더러, 예술이라는 단어를 붙이기 아쉽다라는 느낌이 든다.

이는 기독교예술에 종사하는 분들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예술을 하시는 분들에게 죄송한 마음과 존경의 마음이 들 따름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기독교예술이 교회 안에서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건 교회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기독교 예술에 종사한다는 건 정말 예술과 기독교를 사랑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이 든다.

이처럼 오늘날의 기독교 예술은 마치 기하학과 음악같이 정신적인 것과 조화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불리고, 건축과 회화같이 육체노동이 포함되는 예술들이 "테크네(기술, 솜씨)"로 불리던 고대 그리스 시대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쩌면 이는 교회 예술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예술 분야에 적용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예술"이라는 단어는 대중적인 용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PSY의 노래 <예술이야>의 가사를 보더라도 예술은 건축, 회화, 기하학과는 전혀~~ 상관없이 아름다운 여성을 만난 기쁨과 그 여성 자체를 표현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게 예술이 될 수도 있다 보니, 그 어떤 것도 예술이라고 하기에 애매해진 게 아닐까. 또는 절대적인 미의 기준을 제시하던 큰 틀, 또는 절대적인 기준의 상실이 그 이유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더 깊게 논하기엔 지식도 얕고 글이 너무 길어져서 아무도 안 읽을까봐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ㅎㅎ)

(다음 글에선 사회・인문학적인 관점에서 스테인드글라스의 출현을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파리의 생-샤펠 성당(Sainte-Chapelle). photo by. Didier B

4.참고자료

오병남 지음, 『미학강의』,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7

정수경 지음,한국의 Stained Glass』, 파주: 한국학술정보, 2010.

정한 지음, 『빛의 예술 스테인드 글라스』, 서울: 지식과감성, 2018.

Sakai Takeshi 지음, 이경덕 옮김, 『고딕 불멸의 아름다움』, 서울: 다른세상, 2009.

Jannic Durand 지음, 조성애 옮김, 『중세미술』, 파주: 생각의나무, 2011.

Karsten Harries 지음, 오병남 옮김, 『현대미술 그 철학적 의미』, 서울: 서광사, 2001.

Monroe C. Beardsley 지음, 이성훈, 안원현 옮김, 『미학사』, 서울: 이론과실천, 1994.

Wladyslaw Tatarkiewicz 지음, 손효주 옮김, 『미학의 기본 개념사』, 서울: 미술문화, 2008.


(참고로 13세기 스콜라철학도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이루고자 했었습니다. 그래서 고딕건축과 스콜라철학을 연관 짓는 연구들도 있지만, 아직 개인적으로 연구가 부족해서 추후에 별도로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간단히 참고할 만한 영상을 링크로 걸어두겠습니다.)

EBS 특별기획 통찰 - 스콜라 철학과 고딕 성당, 빛, 신비주의 (1)


혹시 잘못된 내용이 있거나 추가할 내용 있다면 댓글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Parang
Parang 교육·학문

기독교 문화예술을 사랑합니다 :) Instagram: @parang_words Youtube: @예파랑Jesus Wa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