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코프스키의 연인(2/2) 나데츠다 폰 메크

*차이코프스키의 연인(2/2) 나데츠다 폰메크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에게 연인은 누가 있었을까?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는 백조의 호수와 호두까기 인형, 비창 교향곡, 사계의 작곡자로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 지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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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코프스키가 자신의 동성애 감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데지레 아르토와 결혼까지 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르토와의 결혼에 실패한 어쩔 수 없이 안토니나 밀류코바와 결혼은 했으나 2개월 만에 파경을 맞이한다.

결혼 실패와 파경을 맞이한 결혼이야기는 전편에서 살펴보았다.


이번 편에서는 차이코프스키의 음악활동에 있어 많은 후원을 한 나데츠다 폰 메크에 대해서 최대한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살펴보겠다.

 

1.차이코프스키의 후원자 나데츠다 폰 메크 부인

차이코프스키를 14년동안 무조건적으로 재정적으로 후원한 나데츠다 폰 메크, 그녀와 차이코프스키와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자.

나데츠다 폰메크 부인의 초상화

1876년 차이코프스키는 자신의 작품을 지지하는 부유한 미망인 나데츠다 폰 (Nadezhda Filaretovna von Meck, 1831 ~ 1894 )을 만나면서 특별한 인연을 쌓게 되었다.

나데츠다 폰 메크는 차이콥스키가 1877년 안토니나 밀류코바와 결혼하였지만 차이콥스키에게 연간 6,000 루블이라는 충분한 연금을 13년간 지불하였다.

차이코프스키는 교수직이라는 업무에서 벗어나 음악가로서 작곡 등 창작 활동에 전념하게 하는 결정적인 재정적 도움을 받은 것이다.

그녀는 이미 차이코프스키의 교향시 ‘템페스트’와 같은 음악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고 “열렬한 추종자”라고 편지로 소개하고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몇 곡을 집에서 연주하도록 의뢰했다. 차이코프스키는 기꺼이 이에 응했고 이때부터 연금을 제공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지속되던 1890년 10월 4일, 폰 메크 부인은 갑자기 재산을 잃었다며 결별을 통보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10월 말부터 폰 메크 부인과의 관계와 연금이 끊기자 차이코프스키의 신경쇠약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다.

폰 메크 부인의 일방적인 결별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는데 사망하기 직전 병상에서 정신착란을 일으키며 폰메크의 이름을 격분한 목소리로 반복해서 불렀다고 한다.

폰 메크 부인이 차이콥스키의 후원을 중단한 이유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밀류코바와의 관련설 또는 폰 메크 부인의 사위인 바이올리니스트 블라디슬라프 파클스키가 차이코프스키는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장모에게 알렸기 때문이라는 설 등이 있다.

결국은 동성애자임이 밝혀지게 되면서 폰 메크부인이 후원을 끊은 것이다.

폰 메크부인은 러시아의 여성 사업가로, 특히 음악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후원자였다. 그녀는 차이코프스키와의 예술적 관계로 오늘날까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은 서로 만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합의를 하며 연금을 후원했으며 차이코프스키는 그녀에게 F 단조 교향곡 제 4번을 바친다. 그 뿐만 아니라 니콜라이 루빈스타인과 클로드 드뷔시를 비롯한 여러 음악가들에게도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다.

2. 작곡가 표트르 차이코프스키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는 우랄 지방의 외딴 시골 캄스코보스킨스크의 광산촌 숙소에서 태어났다.

차이코프스키의 이미지 사진

아버지 일리야 페트로비치(1795 – 1880)는 우크라이나계의 정부 탄광 공학자였고, 하급 관료로 러시아 제국 정부 소유 광산의 감독관을 지내기도 했다. 어머니 알렉산드라는 프랑스인과 독일인의 피가 섞인 러시아 혼혈인 여성이었다.

아버지 일리아는 러시아 제국의 하급 관료였지만 경제적으로 상당히 무능력하였고, 가정에도 상당히 무관심하였다.

차이콥스키는 4세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으나, 그는 어려서 가정교사를 초빙하여 역사, 지리, 문학, 불어와 독어 등을 배웠는데 어학쪽에 더욱 재능을 보여 6, 7세에 벌써 독어, 불어를 구사할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러시아 상류사회의 관습도 있었고 어머니가 프랑스계 여성이었기 때문에 그는 프랑스인 여자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는 그 프랑스 출신 가정교사를 무척 좋아했으나 1848년 그 가정교사는 그만두게 되었다.

그녀를 잘 이해하고 따르던 소년 차이콥스키는 그녀와 헤어질 때 받은 충격으로 말수 적은 아이로 변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의 충격은 페테르부르크의 법률학교 기숙사 생활 때까지도 갔다고 한다.

3. 차이코프스키의 동성애 감성

1850년 차이콥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 당시 상류 계급의 풍조에 따라 법률학교의 예비 학과에 입학했다. 유년시절에 따르던 가정교사와의 이별의 충격은 기숙사 생활 때까지도 계속되어 더욱 견딜 수 없게 하였다.

그곳에서 동급생이었던 아푸흐틴을 만나 평생을 친구로 지내게 되었는데, 아푸흐틴은 13세부터 동성애를 알게 되어 담임교사와의 동성 관계도 소문이 나 있었다.

이 무렵 차이콥스키도 동성애자임을 자각하게 되었으나, 제정 러시아 당시 종교적 교리와 사회 분위기 상 동성애는 죄악으로 취급되었기에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었던 그는 친구가 몇 명 안 되었다.

1854년 지극히 내성적인 성격과 어머니 알렉산드리아가 갑자기 콜레라로 죽자 그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 가정교사와의 이별과 어머니의 죽음은 그에게 연속으로 심리적 부담감을 안겨주었음에도 법률학교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차이코프스키는 다른 남자 소년들에게 호감과 애정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사회의 시각에서 자신은 성적인 면에서 부랑자로 생각하게 됐다.

또한 자신이 외도를 한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에도 사로잡히게 되었다. 밀류코바와의 사이에서는 자녀가 없었는데, 이는 그가 동성애자라는 소문을 확산시키는 원인이 되었고 아이들을 좋아했지만 결국 자신의 후세는 가지지 못했다.

자녀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과 동성애자라는 것에 대한 죄책감과 자괴감은 그를 오래도록 좌절과 고독 속으로 살게했고, 술에 대한 폭음과 창작으로 유일한 위안을 삼게 했다.

4. 차이코프스키의 사망원인에 대한 논란

1866년부터 1867년 무렵 우크라이나로 시집가 우크라이나 카멘카에서 살던 여동생의 집에서 여름 휴가를 보냈지만 어느날 자신이 어린 외조카를 보고 사랑하게 되면서 외조카를 성적으로 사랑한 것에 대한 지나친 죄의식과 자괴감에 사로잡혀 한동안 칩거하였다.

차이코프스키 이미지 사진

차이콥스키는 자신의 작품 속 〈예브게니 오네긴〉의 여주인공 타탸나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는 그의 첫사랑인 가정교사 혹은 그가 소년 무렵에 짝사랑하던 소녀들 혹은 일찍 요절한 그의 어머니 중의 한 사람, 혹은 그들이 투영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1889년부터 순회 공연은 모두 성공하였고, 이러한 연주와 대중적으로 계속된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신질환과 조울증 증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벌어들이는 인세로 큰 경제적 어려움은 겪지 않았다. 사망하기 몇 년 전인 1893년 11월 6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향년 53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콜레라로 사망했다.

그러나 1979년 소련의 문화성에서 부검한 결과 비소 중독이라는 결론이 나와 사인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를 뒷 받침하는 설로는 차이코프스키의 유명인의 자녀와 동성애 관계가 있었다는 것으로 인해 자살로 위장하여 사망하게 했다는 설, 즉 차이코프스키가 자살 당했다는 설이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사망후 동생인 모데스트의 집으로 시신이 옮겨졌다가 그해 11월 10일 알렉산더 네프스키 수도원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인파가 몰렸으며, 그가 매장될 때 수도원 묘지에는 8천명의 조문객이 찾아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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