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영의 ‘소프트 일본’ - 철도의 나라 여행의 낭만


▎1964년 10월 1일 도쿄-오사카 구간을 시작으로 개통된 신칸센은 일본의 전 국토를 연결하는 고속철도다. 달리는 열차 뒤로 눈 덮인 후지산이 보인다.



일본 가수 마쓰다 세이코(松田聖子)가 1982년 발표한 히트곡 ‘붉은 스위트피’(赤いスイ-トピ-)는 당시 일본의 젊은 남성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봄빛 기차를 타고 바다에 데려가줘요~”로 시작하는 가사의 내용 때문이었다. 이 노래는 거품경제가 한창이던 80년대 일본 ‘젊은이들의 데이트 필수품=자동차’라는 공식을 깡그리 부정하는 내용이었다.

당시만해도 자동차 광고는 온통 “남자의 꿈을 실현하는 자동차, 닛산 블루버드”, “당신의 마음까지 풍요롭게 합니다. 도요타 코로라”의 경우처럼 남성의 소비욕구를 자극하는 문구로 채워져 있었다.

30년의 세월이 흘러 이 노래 가사는 현실이 됐다. 거품경제가 무너지면서 90년대 잃어버린 10년을 경험한 일본 사회에서 자동차는 더 이상 생필품이 아니다(적어도 대도시에서는). 2009년 일본 총무성이 발표한 자동차 보유대수는 1000세대 당 1414대. 자동차 보유대수 통계를 시작한 1989년 이래 처음으로 감소세로 돌아섰다.

자동차를 갖는 것이 더 이상 부의 상징인 시대가 저물었기도 하지만 특정한 직업 없이 아르바이트나 무직상태로 있는 15~34세의 니트족(NEET·Not in Education Employment Training)이 60만 명을 넘어선 현실이 일본 젊은 이들의 생활상을 대변한다. 자연스레 버스나 열차 같은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났다.

그렇다고 일본인들이 열차여행을 부끄럽거나 불편하게 여기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일본인들의 열차사랑은 각별하다. 통계에 따르면 일본의 열차 마니아는 200만 명에 이른다.

이따금 “70년간 ◯◯노선을 달렸던 열차 ◯◯◯호 우에노역에서 퇴역식”이라는 신문기사라도 날라치면 퇴역식에는 어김없이 수천 명의 열차 마니아가 몰려들어 은퇴 열차와 기념촬영을 하고 작별인사를 나누는 소동이 벌어진다. 철도여행 검정시험, 열차시간표 검정시험, 규슈철도 검정시험, 철도테마 검정시험 같은 철도 관련 검정시험 만도 4개나 있다.

일본에서 열차여행을 하다 보면 각 지역으로 펼쳐진 실핏줄같은 철도망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철도 왕국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일본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부터 규슈(九州) 최남단 이부스키(指宿)까지 기찻길로 편리하게 연결돼 있다. 고속열차 신칸센(新幹線)이 일본 주요도시를 연결하고, ‘재래선’에 해당하는 각종 지선과 사철(私鐵)이 전 국토를 촘촘하게 엮어놓고 있다.

달랑 전동차 한량으로 한적한 시골마을 구석구석을 누비는 열차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열차로 가지 못하는 곳이 거의 없는 곳이 바로 일본이다.

신칸센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64년 10월 1일. 신칸센이 도쿄-오사카 구간에 개통되면서 일본은 본격적인 고속철도 시대를 열었다. 이후 40여 년간 일본은 전 국토를 신칸센으로 연결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해왔다. 현재 일본 전역에는 도카이도(東海道, 515㎞), 산요(山陽, 554㎞), 호쿠리쿠(北陸, 117㎞), 조에츠(上越, 270㎞), 도호쿠(東北, 593㎞), 규슈(九州, 127㎞) 등 6개 노선에 2176㎞의 신칸센이 운행되고 있다.

일본의 일반철도는 새 선로를 건설하는 신칸센과 달리 복선화와 전철화 등 기존 철로의 기능을 개선해왔다.(일본 정부와 일본 JR 등은 1965년 22.9%에 불과했던 복선화율을 현재 37.6%로 높였다. 또 1965년 36.7%에 그쳤던 전철화 비율이 현재 61.5%로 높아졌다.)

이런 투자의 결과는 철도의 높은 수송분담률로 나타났다. 일본 철도의 여객수송분담률은 27.7%로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유럽 철도강국인 프랑스의 철도수송분담률은 10%. 독일(8%), 영국(6%), 미국(1%) 등과 비교해도 일본 철도의 수송분담률은 압도적이다. 실핏줄 같은 일본의 철도망은 JR 외에도 수많은 민간 철도회사에 의해 구축됐다.

현재 일본에서는 JR 계열회사 7개 외에도 196개의 철도사업자가 영업 중이다. 철도회사 중에는 백화점·호텔 등 다른 사업을 병행하는 회사가 많은데, 정부의 직간 접적인 지원 덕에 이들 회사는 철도사업에서 적자가 나도 공공사업인 철도 노선만은 폐쇄하지 않고 운영할 수 있다.


열차에서 즐기는 ‘에키벤’도 인기

벚꽃 피는 봄엔 ‘사쿠라 열차’, 가을엔 ‘단풍열차’가 각지에서 운행하는 다양한 열차여행 패키지와 함께 특급열차 개발도 일본철도 마니아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일례로, 한국인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후쿠오카(福岡)의 경우 인근 오이타(大分)현의 온천관광지인 유후인(由布院) 사이를 오가는 특급열차 ‘유후인 노모리(유후인의 숲)’를 운영하고 있다.

이 열차는 하루 3대밖에 운행하지 않으며, 모든 좌석이 예약제로 운영된다. 하카타역(후쿠오카역의 정식 명칭)과 유후인 왕복 티켓은 7800엔(약 11만원)으로 만만치 않은 금액이다. 하지만 고전적인 디자인과 푸른 숲을 연상시키는 녹색의 열차 차량, 고급 원목으로 처리된 객차 바닥은 여행의 낭만을 더한다. 다른 열차들과 달리 천장까지 이어진 넓은 차창은 고원지대에 펼쳐진 아름다운 창 밖 풍경을 감상하는 데 그만이다.

일본 열차 여행의 또 다른 묘미는 도시락이다. ‘여행과 도시락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게 일본인들의 인식이다. 공공장소에서 좀처럼 주전부리를 하지 않는 일본인들이지만 열차가 출발하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역에서 구입한 도시락통을 열고 식사를 시작한다. 식사를 마친 사람들도 맥주나 음료수·과자 같은 주전부리를 시작한다.

각 역에서 판매하는 프리미엄 도시락을 ‘에키벤(驛弁·역을 뜻하는 ‘에키’와 도시락을 의미하는 ‘벤토’의 합성어)’이라고 한다. 기차역에서 판매되는 도시락이 모두 에키벤은 아니다. 역내 편의점에서 팔고 있는 도시락은 그냥 벤토이고, 에키벤은 역 내에 별도로 마련된 에키벤 가게에서만 판매한다.

에키벤의 유래에 관한 몇 가지 설이 있는데, 1885년 7월 16일 도치기(栃木)현 우쓰노미야(宇都宮)역 개통식에 맞춰 인근 여관 ‘시라키야(白木屋)’가 주먹밥 2개와 단무지를 대나무 잎에 싸 판매한 데서 유래했다는 게 정설이다. 7월 16일은 에키벤 기념일로 제정됐다.

에키벤은 전국 각지의 향토 요리로 더욱 유명하다. 다양한 지역 풍토에 맞게 특산물을 브랜드화한 에키벤은 정거장마다 고유 도시락으로 상품화되어 있다. 각 지방의 특산물과 신선한 재료를 사용해 맛을 내기 때문에 에키벤을 맛보는 일은 그 지역의 명물, 문화체험이 된다.

에키벤은 3000종류가 넘는데 지역마다 특색과 개성이 뚜렷하며 일본 사람들의 에키벤 사랑도 각별하다. 각 지자체와 여행사 주최로 에키벤 콘테스트가 매년 열리고, 점심시간이면 역 매점으로 와 에키벤을 사가는 직장인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인터넷 음식점 검색사이트인 ‘구루나비’가 선정한 2011년도 ‘전국 10대 에키벤’에서 미에(三重)현 마쓰자카(松阪)역에서 판매하는 ‘쇠고기도시락정식’이 1위를 차지했다. 고기육질에 따라 2630엔, 3150엔, 5250엔(약 7만4000원)까지 가격이 다른데,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유명 브랜드인 마쓰자카규의 맛을 음미하려는 남녀노소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2위는 군마(群馬)현 요코가와역 등지에 있는 ‘언덕의 솥밥’(900엔, 약 1만2000원). 유명 리시리다시마로 낸 물로 밥을 짓는데, 1인용 작은 솥모양의 도시락에 토란, 버섯, 닭고기살, 각종 야채 등을 얹은 덮밥이다. 3위는 히로시마(廣島)현 유명관광지인 미야지마구치(宮島口)역에서 판매하는 ‘붕장어 덮밥’(1470엔, 약 2만원)이 차지했다.

뚜껑을 열면 갈색 빛이 돌도록 불 위에서 구워진 붕장어가 한입 크기로 잘라져 도시락 한 가득 채워져 있다. 30대 여성이 특히 선호한다는데, 붕장어뼈를 우려낸 국물로 밥을 짓고, 붕장어는 달콤한 간장 소스의 양념을 발라 구웠다. 시간이 지나 식어도 변하지 않는 맛을 유지하는 게 인기 에키벤의 특징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