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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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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을 내 몸에 허하라

남자에서 여자·그림에서 글자·영어에서 한글로 트렌드 변화…
개성 표현 수단으로 널리 보급되었지만 타투이스트 시술 인정 안 해
등록 2009-04-09 08:40 수정 2020-05-02 19:25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의 마이클 스코필드(웬트워스 밀러)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의 마이클 스코필드(웬트워스 밀러)

배우 류승범은 문신(타투) 애호가로 알려져 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허리에 예수님 얼굴을, 팔에는 별 모양 문신을 그렸다. 빅뱅의 리더 권지용은 등과 양팔에 문신이 있다. 등에는 ‘살기엔 너무 빠르고 죽기엔 너무 젊다’는 뜻의 영문 ‘too fast to live too young to die’를, 양팔에는 ‘인생을 달콤하게’라는 뜻의 ‘vita dolce’와 ‘천천히’라는 뜻의 ‘moderato’란 단어를 새겼다. 축구 선수 안정환과 이천수도 골을 넣을 때마다 윗옷을 벗어 몸에 새겨진 문신을 자랑한다. 이효리의 골반, 장근석의 귀, 박화요비의 발목 등 스타들의 몸 구석구석에서 문신을 발견하는 건 이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문신은 자신의 개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패션 수단이다. 축구 스타 데이비드 베컴, 배우 앤젤리나 졸리 등 해외 스타들을 거론할 것 없이 문신을 패션 아이콘으로 생각하는 국내 스타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스타들 사이에서 문신이 유행하면서 일반인들에게도 문신은 패션 트렌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문신을 즐기는 이들이 늘면서 서울 홍대 인근만 해도 100개가 넘는 문신 가게들이 성업 중이다. 경력 10년의 문신아티스트(타투이스트)인 ‘빈울’은 “문신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지고 문화로 받아들여지면서 문신을 즐기는 이도, 문신을 시술하는 이들도 늘었다”고 말했다.

수준급 기술, 외국인도 많이 찾네

문신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문신 가게를 주로 찾는 이들도 달라졌다. 학생, 직장인, 주부 등 직업이 다양해졌고, 20대부터 60대까지 연령대도 넓어졌다. 남자들이 과시용으로 문신을 새기는 것과 달리 여성들은 성형 붐이 일면서 미용의 목적으로 시술을 하러 많이 찾는다고 한다. 경력 10년의 타투이스트 ‘치우’는 “처음 문신 가게를 시작할 때만 해도 손님 대부분이 ‘깡패’였지만 이제는 깡패 손님은 거의 없을 만큼 다양한 손님들이 찾고 있다”며 “한국의 문신 기술이 수준급이라고 세계에 알려지면서 외국인 손님들도 많이 찾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녹색소비자연대가 서울시 25개구에 거주하는 10~60살 소비자 81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유사의료행위 소비자 이용 현황과 상담사례’ 보고서를 보면, 우리 사회에서 문신이 얼마나 보편화됐는지를 알 수 있다. 유사의료행위에 포함되는 행위 중 소비자 이용이 가장 많았던 것은 문신(42.8%)으로, 귓불 뚫기·피어싱(14%), 부항(10.2%), 안마(10.1%) 등보다 월등히 높게 나타났다. 문신 시술 뒤 부작용을 묻는 질문에는 ‘없었다’는 응답이 90.3%로 높게 나타났다. 문신 경험자 중에는 눈썹 문신 등 반영구 화장을 하는 40대(36.1%)와 50대(30.1%) 여성의 비율이 가장 높았다.

중년 여성들이 반영구 화장을 선호하는 것에 비해 젊은 여성들은 은밀한 부위의 문신을 즐긴다. 경력 5년의 여성 문신 아티스트인 ‘미카’는 “문신 가게를 찾는 남녀 비율이 6 대 4 정도에 이를 만큼 여성들이 점차 늘고 있다”며 “젊은 여성들은 가슴, 엉덩이 등 섹시함을 드러낼 수 있는 부위에 시술하면서 남성보다는 부담 없는 여성 아티스트를 선호해 여성 시술자의 수도 덩달아 늘고 있다”고 말했다.

남성의 전유물로만 여겨지던 문신이 여성에게로 옮겨가듯이 문신의 트렌드도 변화 중이다. 치우는 “그림에서 글자(레터링)로, 영어에서 한글로 옮겨가는 흐름이 보인다”고 말했다. 연예인의 문신을 자주 접하면서 모방이 이뤄지기도 한다. 지난해까진 등과 팔에 그림을 그리는 베컴 스타일이 유행이었다면 올해는 빅뱅의 지드래곤식 레터링이 붐이다. 이렇게 문신이 악세사리처럼 패션을 완성하는 아이콘으로 인식되면서 대중화의 바람을 타고 있다.

문신을 내 몸에 허하라

문신을 내 몸에 허하라

외국에선 아티스트, 한국에서 불법 시술자

하지만 문신은 우리나라에서 여전히 ‘불법’이다. 현행법상 문신은 의사가 아닌 사람이 시술하면 불법 의료행위로 간주하고 있다. 외국에서는 취향의 범위에 놓여 있는 문화로 용인되지만, 우리나라에선 표현의 자유와 신체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지난 4월1일 서울 홍익대 부근 상상마당에서는 한국타투인협회 창립 포럼이 열렸다. ‘오늘, 한국타투인협회에서 신체자유(身體自由)란 문신을 했습니다’란 주제로 열린 이날 포럼은 문신의 합법화를 위한 입법 투쟁과 문신을 표현의 자유로 보장받기 위한 문화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자리였다. 지난 3월2일 전국의 문신 아티스트 100여 명이 모여 창립식을 연 한국타투인협회의 첫 외부 활동이었다.

한국타투인협회 부회장인 ‘에르난’은 “합법이냐 불법이냐를 떠나 문신을 문화로 인정받자는 것”이라며 “그럼에도 단체로 힘을 모아 합법화를 요구하고 나선 건 문화로 온전히 인정받길 기다리는 동안 불법 시술인으로 불려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날 포럼에 참석한 한 문신 아티스트도 “미국에서는 아티스트로 존경받는 일인데 우리나라에선 문신 시술이 불법적인 영업으로 규정돼 직업란에 문신 아티스트라고 당당하게 쓸 수 없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떳떳하게 말할 수 없다”며 “그래서 미국 이민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현행법상 문신은 의사의 감독과 관리 아래 의료인이 시술하도록 하고 있지만 실제로 문신을 해주는 의사들은 찾기 어렵다. 합법화를 반대하는 쪽의 주장인 위생·마취·감염 문제 등에 대해 문신 아티스트들과 문신 애호가들은 수긍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한국타투인협회 김완 정책팀장은 “양심 있는 사람으로서 한 개에 몇십원인 바늘 가격을 아끼려고 쓰던 바늘을 또 쓰지는 않는다”며 “신체와 관련된 행위는 다 의료행위로 보고 의사들이 신체 관리·감독권을 가지는 헤게모니도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문신의 합법화를 막는 데는 문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작용한다. 고대 중국에서부터 이뤄져온 문신은 동아시아에서 특히 부정적인 이미지로 비쳐지고 있다. 형벌의 일종으로 얼굴이나 이마에 무늬·글자를 새기던 ‘경형’(鯨刑)의 이미지,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는 유교적 신체관, ‘장발 단속’식의 국가 통제가 뿌리 깊게 영향을 줬다. TV 보도물을 통해 ‘조직 폭력’ ‘병역 기피’ ‘망가진 신체’ 등의 부정적 코드로만 상징화된 사회적 기제도 작용했다. 김완 정책팀장은 “귀를 뚫는 유사의료행위나 성형 등을 바라보는 시각과 가치관이 유연한 것과 달리 문신은 여전히 사회적 인식에서 충돌을 빚고 있다”고 말했다.

문신 아티스트들은 2000년부터 꾸준히 문신 합법화 운동을 해왔다. 2007년 서울 대학로 게릴라 시위(오른쪽)와 올해 열린 한국타투인협회 창립포럼. 사진 왼쪽부터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한겨레 장철규 기자

문신 아티스트들은 2000년부터 꾸준히 문신 합법화 운동을 해왔다. 2007년 서울 대학로 게릴라 시위(오른쪽)와 올해 열린 한국타투인협회 창립포럼. 사진 왼쪽부터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한겨레 장철규 기자

문신의 합법화를 반대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또 다른 논리가 청소년들의 모방이다. 문신이 패션 트렌드화 되면서 최근에는 좋아하는 연예인을 따라 문신을 하려는 미성년자들의 상담과 방문이 실제로 늘고 있기도 하다. 시술 비용이 없는 청소년들은 인터넷으로 문신 기구를 사 친구들끼리 문신을 새기기도 한다. 감염이나 부작용이 따를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다. 미카는 “문신 아티스트들도 자율적인 규제로 미성년자들에게는 시술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문신을 지우는 방법은 문신 위에 문신을 덧씌우는 ‘커버업’이나 레이저 시술이 있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고 흉터가 남기도 하는 등 부작용이 있는 만큼 문신 아티스트들은 문신 시술 전에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충고한다.

문신 아티스트법 입법 추진도

“문신이 불법이냐”고 묻는 이들보다 “아직도 불법이냐”고 묻는 소비자가 많아질 만큼 문신의 확산은 막을 수 없는 흐름이 됐다. 소비자시민모임 윤명 부장은 “문신이 불법이니까 더 이상 하지 말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소비자들이 하고 있고, 의사들만 시술해야 한다고 하기엔 공급이 너무 적다”며 “다른 전문인들에게도 자격을 부여해 부작용 등의 피해를 줄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관리·감독 부처인 보건복지부나 문화부의 단속도 거의 없어진 상태다. 빈울은 “초창기엔 문신을 마약과 결부해 단속을 했지만 지금은 단속이 아예 없는 실정”이라며 “‘뜨쟁이’라고 부르며 비하했던 문신 아티스트들에 대한 대접도 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문신 아티스트를 합법화하는 법안도 발의가 준비되고 있다. 김춘진 민주당 의원은 18대 국회에서 비의료인도 문신을 시술할 수 있도록 하는 문신 아티스트법 입법을 추진 중이다. 김 의원실의 유경선 보좌관은 “문신 아티스트법 발의 전 초안을 만들기 위해 의견 수렴 과정을 거치고 있다”며 “유사의료행위 중에서 (문제성이 적어 입법하기에) 가장 쉬운 법안이기 때문에 상정되기만 하면 쉽게 통과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신은 문신일 뿐 오해하지 말자”는 구호가 힘을 얻고 있다.



영화·드라마 속 문신
요술공주 세리 문신 봤어?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문신은 배우의 캐릭터를 설명해주는 상징적인 이미지로 쓰인다.
미국 드라마 에서 마이클 스코필드(웬트워스 밀러)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형을 구하기 위해 일부러 범죄를 저지른다. 감옥에 갇히기 전에 형과 함께 탈옥할 계획을 세운 그는 복잡한 감옥 내 구조를 몸에 문신으로 새긴다. 남들이 보기엔 전신을 뒤덮은 주술적 그림일 뿐이지만 천재 건축설계사인 마이클에게 문신은 유일한 탈출 지도다.
한번 새기면 지워지지 않는 문신은 기억의 단편이기도 하다. 영화 에서 전직 보험수사관인 레너드(가이 피어스)는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다. 어떤 충격으로 10분 이상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는 그는 아내를 살해한 범인을 찾기 위해 닥치는 대로 메모를 한다. 자신이 만난 사람, 들었던 정보 등을 잊지 않으려는 그는 자신의 몸에 종이인 양 문신을 새긴다.
문신은 부정적 이미지를 이용해 작품 속 캐릭터의 직업을 설명하는 장치로도 쓰인다.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폭력배로 나오는 배우들은 몸에 용과 호랑이 등의 그림을 그려 온몸으로 캐릭터를 설명한다. 영화 에서 조인성은 등부터 가슴 앞쪽까지 이어지는 용 문신으로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안겨준다. 반면 같은 폭력배의 문신이 공포 대신 웃음을 주는 경우도 있다. 영화 에서 이문수는 등에 요술공주 세리를 문신해 관객을 포복절도하게 만든다.
영화 에서 손예진이 연기하는 백장미는 미모의 문신 아티스트다. 낮에는 문신 가게에서 일을 하지만 밤에는 소매치기 두목으로 활동하는 이중생활자다. 짙은 화장, 섹시한 옷차림으로 백장미로 변신한 손예진의 팜므파탈 캐릭터를 완성해주는 건 엉덩이 위쪽의 문신이다. 7시간 동안 그려 뽀얀 속살을 뒤덮은 ‘천수관음상 문신’은 도발적인 캐릭터를 완성해준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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