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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ke green Jun 26. 2021

당근이세요?

자원의 선순환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아주 조금..

“당근”


 새벽부터 내 잠을 깨운 건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도 아니오, 열어둔 창으로 들어온 바람도, 공사가 한창인 옆 건물의 드릴 소리도 아닌 당근 마켓 알림음이었다. 한창 중고 판매에 열을 올렸던 때 깔아 둔 당근 앱을 최근 2년간 열어보지도 않았었는데 갑자기 웬 당근인가.


 사실 어젯밤에 책장 정리를 꽤 오랜 시간에 걸쳐했다. 시작은 함께 글쓰기 모임. 이 날의 공통주제였던 “나의 인생 책”을 찾으려 책장을 스윽~하고 훑어보다 시작한 정리였는데... 집착하며 꽂아둔 읽지도 않은 책머리 위에 먼지가 소복이 쌓여 있는 게 아닌가. 근래 늘어난 내 잔기침의 원인은 이거였나...


 이 집으로 이사 온지도 2년이 지났다. 그때부터 한 번도 자리 이동하지 않은 책들도 있다. 이 녀석들... 내가 다시 이사를 가지 않는 한 이 자리에서 꼼짝없이 화석이 될 요량이다. 계약이 자동 연장되었으니 앞으로 2년간은 더 꼼짝 않겠지...


 뒤적뒤적 책을 찾다 보니 이중으로 꽂혀있는 책들 위로 겹겹이 누워있는 책들이 보인다. 이 책들을 바로 세워야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동네 서점에 주문해둔 책을 찾아와야 한다는 것도 떠올랐다. 이 상태면 새로 들어올 책은 누워있는 책들의 가장 상단에 누울 가능성이 크다.


 꽉 들어찬 책장은 욕심과 집착의 결정체다. 언젠가 읽겠지~ 하는 마음은 언제 밥 한번 먹자~와 동급이다. 읽지 않고 같이 먹지 않을 거라는 걸 사실은 알고 있다. 이 책장 안의 많은 책이 그렇다. 넘어지면 딱 압사하기 좋을 지경의 책장. 더 이상은 안되겠다!


 그런 절박함으로 2년 만에 다시 당근을 시작했다.


애정도와 가격은 반비례한다

 책장 속 책은 다양하다. 감동해서 읽고 또 읽은  소설들도 있는가 하면, 나도 자기개발이란 걸 해보겠다고 사서 세월의 흔적만 잔뜩 묻은 책들(아침형 인간이 웬 말이야..), 수학의 정석처럼 앞부분만 읽다 포기해버린 책들도 다수다. 그야말로 새 중고와 중 중고, 찐 중고가 가득... 당근과 중고거래 사이트의 판매 가능성을 보자면 한 번도 읽지 않는 책이 가장 높을 거고, 읽기를 시도했다 어프로치에서 끝나버린 책이 그다음, 몇 번이나 읽은 책이 가장 저평가될 것이다. 물론 이는 내 마음속의 애정도와는 정확히 반비례한다.

애초에 팔기 위해 산 책이 아니지 않은가. 좋아하는 책의 좋아하는 글귀가 있는 페이지는 이렇게 끝을 접어두거나 귀퉁이에 메모하는 습관 덕에 중고판매가는 떨어질 수 밖에..


 한번 스캔을 끝낸 책들 중 추억이 없거나, 감동이 없거나, 읽히지 않거나 한 책들을 뽑아 당근에 올렸다. 인생 책을 찾을 범위가 조금 줄었다.(하지만 이 타이틀은 여전히 어렵다.) 내친김에 주방에서 안 쓰는 토스트기와 전기냄비, 호기심에 산 MCT 오일, 옷장에서 눌린 채 기를 펴지 못하는 옷들과 신발장의 신발을 꺼내 당근에 올렸다.


 이것도 마찬가지다. 애정 하는 것들의 내 마음속 가치는 꽤나 높지만 그래서 자주 입고 쓴 것들은 너무 낡아있어 팔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좋아하는 것들이 더 빨리 닳고 상하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애정하는 것은 좀 더 빨리 닳는다. 내 마음 속 가치를 남들은 공감하지 못한다.  어쩌면 내가 사랑하는 나도  그렇게 닳고 있는 건 아닌지...

  처음엔 몇 개의 책만 정리하자 하고 시작한 작업이었는데 이보다 열정적일 수는 없다. 어느새 온 집을 뒤지고 사진을 찍고 있다. 돌아보니 다시 정리해야 할 것들이 바닥에 잔뜩 널려있다.

 ‘아...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어쩌다...’

갑자기 피곤이 몰려온다. 그렇게 까만 밤을 다 잡아먹은 후 잠이 들었는데 새벽 6시부터 울린 알람이 당근인 거였다. (당근은 몰려서 들어올 때 “다당근” 이라고 울린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오전, 오후 당근 약속을 잡았다.


 “미니멀리스트에 도전하는 거야?”

아침 단톡방을 통해 이 얘기를 들은 친구 하나가 물었다. 미니멀리스트. 그건 다음 생에 꿈꾸고 있는 내 목표이긴 하다. 하지만 애초에 미니멀리스트는 하늘이 정해주는 거 아닐까??? 이번 생은 글렀어... 대신 당근 해서 큰 집을 사야겠다며 깔깔 웃었다. 어차피 중고거래는 제살 깎아먹기니까 이왕이면 군살이라도 빼야겠다고 실없는 생각을 하며 외출 준비를 했다.


 오후엔 오랫동안 못 만난 친구와의 약속이 있었다. 친구는 전에 일하던 매장에 주에 두 번 출근을 한다고 했다. 스콘을 사들고 가서 반가움에 포옹을 하고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못 본 사이 둘 다 하던 일을 그만두었고, 친한 친구와 일을 했다 쓴 맛을 보았다. 경험이 비슷하니 이야기가 길어질 밖에...


애정하는 동네 스콘집(거의 매일 사먹는다)에서 친구에게 줄 스콘을 샀다. (물론 혼자 먹게 둘 생각은 아니었다. 애초에)

한참 수다를 떨고 있던 중에 “당근” 알림이 울린다.

아뿔싸... 벌써 당근 약속 시간이 되었나...

다들 퇴근하는 저녁은 당근들의 만남이 가장 활성화된 시간이다. 돌아가는 길에 동네서점이누지하비밀도서관에 들러 주문했던 책을 찾았다. 그래...비웠으면 채워야지 “책장보존의 법칙”


 바삐 친구와 다음 약속을 잡은 뒤 자전거를 타고 쌩하니 동네 서점으로 갔다. 주문한 책도 오늘 찾기로 했었던 거다.

“사장님!!! 저 당근 가야 해서 수다 떨다 가고 싶은데 그냥 가요~~”

“당근 중요하지!!! 나 저 테이블 이번에 3만 원 주고 샀잖아!!!! 당근 너무 좋아~ ㅎㅎ얼른 가요~~”

저녁을 향해 가는 해가 붉고 예뻤다. 바빠서 예쁜 저녁 하늘도 못 즐기네~ 혼잣말을 하며 쌩하니 집 앞으로 자전거를 몰았다. 이 한마디를 건네려고...


당근이세요??

 당근들의 만남은 심플해서 좋다. 다른 중고거래처럼 택배 송장에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을 일도 없고 내 집 앞으로 구매자가 찾아온다는 점도 편하다. 집 주소 공개가 꺼려지면 근처 카페와 교회 앞으로 몇 발짝만 더 걸으면 된다.


 게다가 당근 거래(를 포함한 모든 중고거래)는 자원의 재분배와 선순환에 기여한다. 이 부분이 맥시멀리스트인 나의 죄책감을 조금 덜어주는 포인트다. 나에게 불필요한 것이 필요한 곳으로 가고 누군가에게 필요 없는 것이 그것을 원하는 나에게 온다. 나는 물론 예쁜 쓰레기를 모을 가능성이 높지만. 애초에 아주 실용적인 인간으로 태어나지 못한 나이니 무언가를 정리해보겠다는 이 정도 행동도 놀랍다. 칭찬해 신효정~

 다음 이사를 가기 전에 책과 옷을 반으로 줄여보겠다는 큰 결심은 아마 당근이 도와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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