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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류키 Jul 12. 2023

단 하루만 번화가 편의점에서 일해보면

애매한 나날들을 벌충하듯 일하기


단 하루만 번화가에 있는 편의점에서 일해보면, 포스 앞에서 물건을 계산하는 게 일의 핵심이 아님을 곧 깨닫게 된다. 그건 줄곧 손님 입장이기만 했던 사람이 주로 떠올릴법한 편의점 알바의 전형적인 한 장면이다.


편의점 일은 사실 매대에 가만히 놓여있던 물건을 판다기보다는 끊임없이 흐르는 물류를 관리하는 것에 가깝다. 카운터에서의 계산은 그저 한 순간이고, 물류의 흐름에 병목이 발생하지 않도록, 또 그 흐름이 일어나는 환경이 쾌적하도록 매장에서 벌어지는 잡다한 일을 처리해야 한다. 그래서 본사는 ‘캐셔’가 아니라 ‘스토어 매니저’ 등의 명칭을 파트타이머에게 붙였을 것이다.


월요일 오후 편의점에 들어서면서 그 사실을 739번째 깨달았다. 매장 안 복도에 파란 물류 박스가 낮은 성벽처럼 쌓여 있었다. 늦은 점심을 해결하러 온 직장인, 하굣길에 들른 초등학생들이 물류 박스를 비집고 복도를 오가며 물건을 고르고, 지저분한 테이블에 엉겨붙어 컵라면이나 도시락을 먹는 중이었다. 전 타임 근무자가 미처 보충진열하지 못한 매대는 여기저기 벙벙하게 뚫려 있고, 발로 밟지 않은 쓰레기통은 곧 넘쳐 흐를 것 같다.


교대를 마치고 유니폼 조끼를 걸치면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일단 매장을 돌면서 보충진열부터 대강 끝내놓고, 전표를 보며 빠르게 새로 들어온 물건을 검수해 매대 또는 창고에 정리해야 한다. 그렇게 복도에 세워진 물류박스 벽을 철거(?)하고나야 그나마 혼란했던 매장에서 질서의 실마리가 보인다. 이제 음식물 잔해로 엉망인 테이블을 닦고, 시간 맞춰 신선식품 폐기를 골라내고, 틈 나는 대로 새 행사 고지물 중 매장에 해당되는 것을 벽에 붙이고, 업데이트된 가격표를 교체하고…


물론 이 일들을 중단없이 죽 이어갈 수 있을 리 없다. 정신없이 매장에 산적한 일을 쳐내다가도 종종 카운터로 달려와 계산을 해야하고, “이거 2+1 교차 돼요?”라든지(손님들은 대체로 눈 앞 쇼카드에 적힌 정확한 정보를 읽기보다는 저 멀리에 있는, 모든 행사 내용을 꿰고 있지는 않을 아르바이트생에게 묻기를 선호한다), ‘3일간 서울에 머무르는데, 어떤 교통카드를 사서 얼마나 충전하는 것을 추천하는가(외국어)’ 등의 문의에 응해야 한다. 1년여 전 “포켓몬 빵 있어요?”의 뒤를 잇는 “아사히 그 거품나는 캔맥주 있어요?” “먹태깡 있어요?” 에 반복해 답하는 일은 매우 쉬운 축에 속한다. 간혹 공병으로 가득한 자루를 끌고 노인분이 찾아올 때도 있다. 공병 하나하나의 상태를 점검한 뒤 병 개수에 맞게 돈을 내어 드려야 한다. 이런 민원들을 해결하고 나서야 비로소 원래 하던 일로 돌아갈 수 있다.


늦은 저녁 들이닥치곤 하는 시끌벅적한 단체 외국인 관광객까지 상대하고 집에 돌아오면 어떨땐 몸과 마음이 그야말로 ‘털려’ 있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쓰러진다. 몸이 무척 고단하다는 사실이 묘한 위안을 준다. 요즘 편의점에 출근해 닥쳐오는 일을 처리하는 것 외에는, 치열하게 임하고 있는 일이 딱히 없어서일 것이다. 그나마 편의점에서 몸이 고달플 정도로 일하고 나면 마음 한 구석 죄책감이 조금은 덜어지는 듯하다.  


얼마 전 프리랜서로서 브랜디드 콘텐츠를 제작하는 법을 알려주는 교육+채용(?) 과정이 끝났다. 여러 유명 기업과 협업해 브랜디드 콘텐츠를 제작해왔던 잡지사에서 연 프로그램이었다. 우수한 과제물을 제출한 사람에게는 프리랜서로 함께 할 수 있을지 여부를 다음주까지 알려준다고 한다. 혹시라도 붙는다면 그 이후 스케줄을 어떻게 조정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장기 계획을 잡지 않고 있다. 결과가 발표되기 전까지 공백을 메우려고 크몽에 서비스 등록도 준비해보고, 원데이 콘텐츠 제작 모임에도 나가봤지만, 마음에 크게 와닿지 않는다. 붕 뜬 상태에서 뭐라도 해야할 것 같아 이것저것 깨작거리기만 하는 느낌이다.


합격할 가능성을 생각해본다. 강의에서 암시되던 높은 기준과 과제를 수행하면서 매 순간 절감한 내 조악한 실력을 미뤄보면 떨어지는 게 당연하다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또 어떻게 기적적으로 붙을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도 품고 있다. 붙든 떨어지든 어서 이 어정쩡한 상황이 해소됐으면 좋겠다.


퇴사하고 나서 벌써 4개월이 흘렀다. 1년이라는 기간을 정해놓고 마음 가는 대로 이것 저것 시도해보자고 마음 먹었는데, 별 한 것도 없이 1/3이 휙 지나 버렸다. 남은 8개월도 그리 긴 시간이 아님을 알고 있다. 여전히 어디 가서 자기 소개를 하거나 근황을 설명하는 일은 난처하고 두렵다. 확실히 새로운 엔진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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