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essie Nov 04. 2018

다시 만난, 빨간 머리앤

비로소 그녀를 이해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빨간머리앤, 


어린 시절 티비 속의 빨간머리앤을 볼 때면 나는 앤과 함께 즐겁고 유쾌하기도 그리고 때론 불편한 감정에 휩쌓이기도 또 빨간머리앤이 되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 시절의 내 시선 속의 앤 셜리는 언제나 솔직하고 당당하지만 사고뭉치이기도, 주변 분위기보단 마음이 편해지는 선택을 하는 친구 였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아주 오래 지나 비로소 어른이란 범주에 드는 사람이 되었을 때야 나는 그 시절, 빨간머리를 한 소녀가 얼마나 용기있는 사람이었는지 또 마음이 얼마나 건강한 사람이었는지를 새삼 깨닫지 않을 수 없어진다. 타인의 기분을 생각하지 않는 어른에게 시원하게 던지는 한 마디, 본질을 흔드는 주변의 이야기에 대해 흔들리지만 다시 굳건히 마주하는 그녀를 시간이 아주 흐른 뒤에야 마주하고 있다.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 빨간머리앤은 나에겐 하나의 동경이자 또 닮아가고 싶은 친구가 되었다. 이제야 나는 그녀를 이해하는 어른이 되었다. 






 1. 마음의 근육을 키우는 법 

c. 닛폰 애니메이션

                                                                


" 앨리자가 말했어요,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않는다는 건 정말 멋진 것 같아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난다는 거니까요"


스스로의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사람들은 저마다의 시간이 걸린다. 마음이 유연한 사람에겐 그 시간이 짧게 느껴지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상황에 대한 비판과 스스로에 대한 비관이 뒤따름으로서 더욱 어려운 순간이 되기 마련이다. 30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한국에 돌아와 새로운 시작을 하는 나에게, 서울이라는 낯선 공간과 좁은 방 그리고 안정적이지 못한 직장은 언제나 나를 지치고 또 힘들게 만들었다. 지금 돌아보면 나는 '서울'이라는 공간을 탓하며 내가 쉬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유를 모두 서울에게 던지고 있었지만 사실 모든 것들은 내 마음의 문제였다는 걸 시간이 지나서야 조금씩 깨달았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이따금 건내곤 하는 '말하는대로'의 기적을 언젠가부터 믿기 시작했다. 간절한 무언가는 언젠가는 시간이 걸려도 꼭 이루어졌지만 설령 그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 간절했던 마음은 언젠가 무언가를 이룰 수 있도록 해줄테니 말이다. 생각하는 것들이 꼭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비로소 생긴 건 삶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기 때문에 예기치 못한 순간,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 찾아오기도 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2. 아침이 오는 기적 

c. Nippon Animation Co., Ltd


" 아침은 어떤 아침이든 즐겁죠.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하고 기대하는 상상의 여지가 충분히 있거든요" 


 글을 쓰게 된 것도, 스스로에 대한 마음의 근육이 조금씩 커지게 된 것도 어쩌면 나는 외로움 덕분이라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아마 오랫동안 혼자였던 그 시간들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외로움'을 영원히 고독이라는 단어와 같은 온도라고 생각하며 살았을 지도 몰랐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언제나 그 '혼자인 시간'을 위해 동이 트는 시간이면 언제나 나는 신발끈을 동여메고 매일처럼 11킬로그램의 가방을 안고 길을 나섰다. 아직 햇살이 구석구석 들지 않은 마을과 어스름하게 어둠을 비춰주는 가로등 사이를 지나 다시 지평선이 펼쳐진 넓은 들판을 걷는 일은, 하얀 입김만큼이나 쓸쓸한 일이었지만 나는 그 외로움을 사랑했다. 누군가와 '함께'인 시간을 잘 보내기 위해서는 '혼자'인 시간도 무척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33일의 여정이 나에게 알려주었다. 아무도 없는 길 위에서 아침이 오는 기적을 두 눈에 담을 때면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들에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가 행복해지는 일 그리고 내일 나에게 오게 될 크고 작은 행복들을 바라볼 수 있었고, 아무도 깨어나지 않은 세상을 먼저 걷는 것은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나 홀로 오롯이 세상을 독차지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정말로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깨닫게 되는 시간, 그래서 나는 그 시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하고 싶기도 했다. 홀로 오롯이 그 시간을 가지고 싶어서 그 누구와도 제일 처음 걷는 걸음을 걷고 싶지 않았다는 걸 이제서야 글을 통해 고백해본다. 그 아름다운 시간을 많은 사람들은 '새벽'이라는 단어로 이야기하곤 하지만 나는 '아침이 오는 기적'이라는 단어로 그 시간을 부르고 싶다.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조금 더 건강한 마음으로 많은 사람들을 이해하고 또 품어줄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3. 삶을 지탱해주는 기억들 

c. Nippon Animation Co., Ltd


" 전 시냇물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두고 싶어요. 

그런 좋은 기억은 제가 앞으로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되어주거든요. 전 지금 절망의 구렁텅이 속이 아니에요"


 언젠가 여행을 하며 만난 누군가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언젠가 네가 힘들 때, 이 곳의 풍경들이 생각나는 순간이 있을거다. 

그리고 이 풍경들은 평생 살아가는 힘이 되어주기도 할테고 말이야" 


그때는 그런 조언들이 전혀 와닿지 않았지만 한국으로 돌아와 치열하게 살아가는 삶 속에서 바닥까지 깊이 침잠했을 때에야 비로소 지난 추억의 사진첩을 열며 그 분의 말씀을 다시 떠올렸다. 사진 속 환하게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서 언젠가 꼭 한번 돌아가고 싶은 풍경을 바라보는 일 끝에 비로소 바닥까지 가라앉은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여행의 풍경은 공간 뿐만이 아니라 여정에서 만난 소중한 사람을 아우르는 말이기도 해서 나는 풍경과 함께 이따금 삶에 대한 크고 작은 느낌표를 선물해 준 사람들을 그 추억의 상자 속에서 만나곤 한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아버지의 뼛조각 하나를 품에 소중히 안고 순례길을 완주하던 유코와 그녀의 아픔을 함께 울어주며 걷던 밀밭길, 강아지 한 마리를 벗삼아 낡은 차 한대를 끌고 호주 대륙을 여행하며 자유롭게 그리고 또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고 있던 로빈, 당신의 행복이 아니라 내일 우리 아이들이 더 행복한 세상에서 살기를 바란다며 매년 700km 사막을 자전거로 횡단하는 깁챌린저들 그리고 내 여정 속에서 크고 작은 도움을 건내준 많은 사람들의 얼굴과 따뜻하고 아름다운 말들까지. 그들이 내 삶에 작은 화살표이자 힘이 되어 주었듯이 언젠가 나 역시도 누군가에게 하나의 풍경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간절히 바라며 나는 종종, 아름다운 풍경들을 떠올리곤 한다. 앤 셜리가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소원을 빌듯 말이다. 








4. 저마다에게 주어진 인생의 무게 

c. Nippon Animation Co., Ltd


"린드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런 실망도 하지 않으니 다행이지, 라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더 나쁘다고 생각해요" 



 나는 삶에 대한 무게를 짊어진다는 것에 대해 산티아고 순례길 위에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800킬로미터의 거리를 걸어내기 위해서는 가벼운 가방이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나는 조금은 다르게 생각했다. 11킬로그램의 가방을 메고 그 곳을 걸었지만 인생에 필요한 것들의 무게는 정해져있고 그리고 우리에겐 사람들이 말하는 가벼운 가방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짊어질 수 있는 마음의 체력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긴 여정을 떠나기 위해서는 저마다의 가방을 짊어질 준비가 필요한데 우린 때론 그 준비과정을 간과하며 살아가고 있기에 예기치 못한 상황들에 대해 힘들어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먼 여정을 떠나며 만날 수 있는 여러가지 일들에 대해 마음의 근육을 키워야만 한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것보다는 매일 생각지도 못한 일들 속에서 숨어있는 우연과 행운을 기대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말이다.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지만 배는 항구에 머물러 있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 파울로 코엘료 <순례자> 중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아빠는 길에서 잡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