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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 golden age Feb 11. 2024

로댕 미술관

파리: The Kiss

Musée Rodin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Auguste Rodin (1840–1917). 로댕은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수천 개의 조각을 만들었다. 여러 미술관을 다니면서 로댕의 작품을 자주 만나보게 되는데, 한 작품을 몇 개나 주조했길래 자주 보이는 건지 어디까지가 진품인 건지 항상 궁금했다. 로댕은 이미 1901년부터 작품 위작에 맞서 싸웠다는 기록이 있고, 그의 사후에는 조직적이고 대규모의 위작 사례가 나왔다. 위작이 많은 작가로 10위 안에 든다고 한다. 이에 프랑스 정부는 청동 복제의 위조 가능성을 막기 위하여 복제를 12개 주조로 제한하는 법률을 만들었다고 하니 내가 다 안심이 된다. 로댕은 몸이 쇠약해지면서 1916년에 자신의 모든 작품을 프랑스 정부에 기부하겠다고 공식화하고 그의 작업실로 사용했던 18세기의 아름다운 건물인 호텔 비롱을 갤러리로 꾸며 1919년에 개관한다. 이곳에는 6000여 점의 조각품과 7000여 점의 회화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미술관 정원에 아름답게 가꾸어진 정원수 사이에도 로댕의 조각 작품들이 많이 있으니 정원에서의 감상 시간도 고려해 두자.




로댕도 40세까지는 생활이 넉넉하지 않아서 자기 작업에 몰두할 수 없었고 건축직공으로 일했다. 문이나 계단, 난간, 창틀등 장식예술에 숙련공이었다. 그는 1864년에 로즈 뵈레를 만나 첫아들도 낳았고 평생의 동반자가 되어 53년을 함께 동거했다. 그러다가 1917년 1월이 되어서야 상속 문제도 해결할 겸 로즈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2주 후에 로즈는 폐렴으로 사망하고, 슬퍼하던 로댕도 그해 11월에 생을 마감한다. 동거생활과 더불어 그의 학생이자 조수, 훗날 동료가 된 카미유 클로델(1864-1943)과 폭풍 같고 열정적인 관계였다는 스토리는 유명하다. 로댕갤러리에는 클로델의 작품도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둘의 작품 간에 비슷한 풍이 상당히 느껴진다. 클로델의 인생과 작품은 훗날 재조명 되며 영화로도 여러 편 나왔다. 로댕은 어떤 캐릭터였을까 상상해 보게 된다. 흉상 하나하나의 표정을 보면 역시 로댕이다 싶지만, 문화적 그리고 시대적 차이로도 그의 사생활은 이해하기 어려운 거 같다.


그가 본격적으로 조각을 한 것은 이태리 여행 때 미켈란젤로 작품에서 큰 감동을 받으면서였다. 그는 이 즈음에 <청동기시대, 1877>라는 작품을 출품했는데 근육 조직까지 너무나 사실적인 전신상이어서 조각한 게 아니고 모델에 석고본을 뜬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고, 이는 잘 만들긴 했지만 사실적인 인체상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렵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져 매우 모욕감을 느끼게 된다. 결국 그는 오랜 시간을 들여 해명을 해야 했지만 작품의 가치를 알아본 프랑스 주정부가 이 작품을 구매하게 된다. 이후로는 실물보다 크거나 작게 만들어서 그런 오해를 사지 않도록 했다. 로댕은 <청동기시대>로 조각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고, 이 작품은 로댕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정말 잘 만들었다. 이후 두 번째 남성 누드 작품인 <설교하는 세례 요한, 1878>은 실물보다 큰 2m 높이로 만들어졌고, 양 발을 땅에 단단하게 붙이고 서 있는 모습인데도 역동적이고 몸짓과 근육의 섬세한 표현은 그야말로 예술이다.


왼쪽 <청동기시대,1877> Cast 1941                                                     오른쪽 <설교하는 세례 요한, 1878>


<칼레의 시민, 1889>은 실물보다 책으로 먼저 접했었다. 나는 책에서 본 기억을 더듬어서 자랑스럽게 가족에게 작품 설명을 해주었는데 딸이 흠칫 놀라던 표정이 지금도 기억난다. 엄마가 너무나 유식하게 그 어려운 칼레의 스토리를 읊었던 거다. 나 스스로도 대견했던 순간이었다. 그렇게 <칼레의 시민>이 한번 눈에 들어오고 나니 이후에는 자주 만나게 되는 느낌이 들었다. 절대로 흔한 작품은 아니고 내가 이 작품이 있는 곳마다 찾아다닌 셈이었다. 몰랐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아는 작품이라 눈에 확 들어왔다. 이 작품은 칼레(Calais) 시에서 로댕에게 역사 기념물로 제작을 의뢰하였고 2년 만에 완성되었다. 높이는 2미터, 무게가 2톤에 달하는 청동 조각이다. 6명의 사람이 다양한 모습으로 서있는데 분위기는 무겁고 어둡다. 로댕은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여섯 사람을 동등하게 표현했다. 이들은 한 곳을 보지 않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서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을 보기 위해서는 조각품 주위를 돌며 고개를 떨구고 있는 한 명 한 명의 표정을 살피게 된다. 내용을 알고 보면 이들의 번뇌와 복잡한 심경이 더 잘 느껴진다.


<칼레의 시민> 로댕미술관 소장  왼쪽 Cast 1919-1921                        오른쪽 Cast 1926


프랑스 북서부에 위치한 칼레 Calais는 도버해협의 최단거리 34km에 위치해 있어서 중세부터 중요한 항구였다. 영국의 에드워드 3세에게 1347년에 정복된 후 1558년 프랑스 손에 다시 넘어갈 때까지 영국의 영토였다. 14세기 프랑스의 역사가인 장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의하면 백년전쟁이던 1347년에 영국의 집중 공격에도 불구하고 칼레의 시민들은 끈질기게 1년을 저항하였다. 이에 영국은 칼레를 포위하고 식량의 보급로를 차단하며 전방위로 압박한 끝에 항복시킨다. 그들의 끈질긴 저항에 격노한 왕은 칼레 시민을 몰살시키려고 하였으나 주변에서 만류하자 대신 칼레를 대표하는 시민 6명만 처형하겠으니 자발적으로 나오라고 명한다. 아무도 나서지 않을 거라는 예상을 벗어나 가장 부유한 지도자인 외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제일 먼저 자원했고, 이를 지켜보던 상인, 법률가, 귀족등의 5명도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오게 된다. 이들은 모두 밧줄로 몸이 묶여 성문의 열쇠를 들고 처형장으로 향한다. 임신 중이던 왕비는 이들에게 감동하여 왕에게 간청하고 결국 희생을 자처한 6명은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는 일화를 로댕이 조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원제는 <칼레의 부르주아, The Burghers of Calais>로 이들 6명 시민대표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여준다. 완성된 작품은 기대했던 영웅들의 늠름한 모습이 아닌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공포에 떨고 있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어서 논란이 되었지만 어쨌든 칼레 시청 광장에 세워져 있다. 총 12개의 작품과 더불어 6명의 조각을 각각 분리시킨 복제본이 미국의 스탠퍼드 대학 정원등 5곳에 전시되어 있어서 작품수가 더 많아 보이는 듯하다.


<칼레의 시민> 왼쪽  London 국회의사당 앞, Cast 1908                          오른쪽  Stanford Universty Campus


로댕의 작품은 의뢰인과 대중에게 쉽게 호평을 받으며 넘어간 적이 없었다. 로댕은 유명해지면서 작품 의뢰를 많이 받게 되는데 완성작을 마주 대했을 때에 흡족해 한 의뢰인은 별로 없는듯하다. 항상 작품에 논란이 일고 열띤 토론을 거쳐 결국에는 시간이 지난 후 고심 끝에 인수했다는 비슷한 스토리들이 많이 남아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인물상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아주 강하여 의뢰인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전통적인 조각들처럼 인상이 좋고 실제보다 아름다운 모습이기를 기대하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그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기에 로댕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갔고, 1889년에는 모네와 공동 전시도 열었다. 이후에는 국가로부터 빅토르 위고와 발자크를 기리기 위한 기념비제작을 의뢰받았고 이 작품들 역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파빌리온에는 그의 작품 150점이 전시되며 국제적인 명성도 확고히 했다. 이후에는 유럽각국의 유명 정치인들과 극작가 조지 버나드쇼 (1906) 구스타프 말러 (1909)등 저명한 예술가들로부터 흉상 주문이 밀려들어왔다. 이 당시 로댕은 조각가가 아니라 조각 사업가에 가까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로댕미술관 정원    왼쪽 <Monument to Balzac> Cast 1935.           오른쪽 <생각하는 사람> Cast 1904


로댕 스스로 가장 사랑했던 작품은 <생각하는 사람, 1904> 인듯하다. 그는 생전에 이 작품으로 비석과 비문을 세워달라고 부탁했다. 로댕의 바람대로 그가 살았던 뫼동(Meudon)의 자택 정원에 <생각하는 사람> 비석을 세웠고 그 아래에 로즈와 함께 누워있다. 그가 20여 년간 공들여 작업했던 <지옥의 문, 1917>은 그의 사후에 주조로 제작되어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나는 그의 작품 중 <Kiss, 1882>를 제일 좋아한다. 어느 방향에서 봐도 완벽한 아름다움이다. 오랑주리 미술관 입구 정원에도 청동으로 된 <Kiss> 작품이 있어서 반가웠다. <칼레의 시민> 마지막 12번째 작품과 <지옥의 문> 7번째 작품은 우리나라 삼성이 소유하고 있다니 다시 볼 수 있는 날을 기대한다.


왼쪽 로댕미술관 <The Kiss 1882>.                                                     오른쪽 오랑주리 미술관 앞의 청동작품


로댕 미술관에는 그가 수집한 다양한 작품들도 전시되어 있다. 이집트, 그리스, 로마 시대의 골동품뿐만 아니라,  예술가 친구들과 교류하며 사들인 작품도 많이 있다. 르누아르, 모네, 반고흐의 작품도 여러 점 볼 수 있는데, 특히 반고흐의 <페르 탕기의 초상, 1887>이 눈에 뜨인다. 반 고흐는 탕기아저씨에게 초상화를 세 번 그려주었는데, 이 그림은 훗날 탕기의 딸이 로댕에게 판매한 것이다. 탕기아저씨는 미술용품을 판매하며 미술품도 수집하고 작가들을 후원하기도 했다. 이 그림에 그려진 일본풍의 배경은 탕기의 가게에서 판매하고 있던 일본 판화들이다. 배경에는 후지산과 마을풍경, 가부키 배우들, 그리고 벚꽃이 보인다. 이미 이 당시에 동양의 일본이라는 나라에 호기심이 충만했던 거 같다. 요즘 해외 미술관들을 다니면 일본작품 전시회가 많이 보이고 뮤지엄샵에는 일본 미술책과 액세서리등이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일본문화는 동양의 예술을 대표하며 유럽에서 이미 깊게 자리 잡은 거 같다. 우리나라도 K 문화가 널리 알려지고 있어서 다행이지만, 다양한 우리 고유의 문화를 알리기 위하여 다방면으로 더 노력해야 할거 같다.


반고흐 <페르 탕기의 초상, 1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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