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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나무 Nov 09. 2021

몇 가지 웃기는 추억들

[지금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가난했던 시절의 이야기]

1950년대, 그때는 지금 같으면 감히 상상도 못할 정도로 배꼽을 잡고 웃지 않으면 안될 일들이 심심치 않게 많이 벌어지곤 하였다. 그 몇 가지 재미있는 예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 쥐잡기 운동      


그 시절에는 쥐 떼들이 너무 많아 일반 국민들은 물론 국가적으로도 큰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쥐 떼들은 논과 밭에 농민들이 애써 가꾸고 있는 곡식이란 곡식은 모두 갉아먹거나 훑어 먹었음은 물론 채소까지 남아나는 게 없었다.      


들판뿐만이 아니었다. 쥐 떼들은 집안까지 쳐들어와서 잘 간직해 둔 곡식은 물론이고 부엌까지 들어와서 저희들 마음대로 활개를 치며 다니곤 하였다. 이를테면 집안이 그들의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운동장이며 그들이 집주인 행세를 하여 주객이 바뀐 시절이었다.    

  

부뚜막에 둔 음식은 물론이고 찬장에 둔 반찬거리도 이리저리 다니며 모두 먹어치우곤 하였다. 장롱이나 궤짝도 있는대로 그들의 이빨로 갉아놓곤 하여 남아나는 게 없었다. 밤에도 쥐들이 요란스럽게 돌아다니는 바람에 잠을 제대로 이룰 수도 없었다.         

     

쥐들이 그렇게 어디나 활개를 치고 다니며 먹을 것이란 먹을 것은 모두 휩쓸어 가는 바람에 사람들은 애써 장만한 음식 모두를 그들이 먹다 남은 것만 얻어먹을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그것은 결국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국가에서도 이를 보고 견디다 못해 급기야 쥐잡기 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범죄와의 전쟁이 아닌 쥐와의 전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우선 집집마다 쥐약을 놓거나 쥐덫을 이용하여 쥐 섬멸 작전에 만전을 기하기에 이르렀다. 쥐약과 쥐덫은 읍내 장에 가면 어느 가게에서나 팔았다. 그렇게 해서 각 가정마다 잡은 쥐들을 여기저기 아무 데나 버리곤 하였다.    

  

어쩌다 동네 개울이나 길을 거닐다 보면 죽어 자빠진 쥐들의 시체가 너저분하게 눈에 띄기도 하였다. 그렇게 각 가정마다 잡고 또 잡아도 쥐의 숫자는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수많은 쥐 떼들이 극성을 부렸던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학교 학생들에게도 불똥이 튀게 되었다. 집에서 매일 쥐를 잡는 대로 꼬랑지를 잘라서 가지고 오라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쥐꼬리를 가지고 가는 게 학과 숙제보다 더욱 중요한 숙제가 되었던 것이다.      

학생들은 각각 집에서 쥐를 잡는 대로 쥐꼬리를 잘라서 학교로 가지고 가는 일이 큰 일과 중의 하나가 되고 말았다. 선생님은 학생들이 가지고 간 쥐꼬리를 일일이 세어 수첩에 적어놓곤 하였다. 그렇게 적어 놓았다가 아마 성적에 반영하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쥐꼬리를 많이 가지고 간 학생에게는 대단한 칭찬을, 이와 반대로 적게 가지고 가게 되면 심한 꾸중을 받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아무리 쥐가 많다고는 하지만, 무슨 재주로 매일 쥐꼬리를 잘라갈 수 있단 말인가. 학생들은 할 수 없이 동네방네로 쏘다니며 남들이 잡아서 버린 쥐를 보는 대로 꼬리를 잘라가기에 혈안(?)이 되고 말았다. 그러기에 죽은 쥐만 보았다 하면 눈이 번쩍 띄곤 했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하기만 하다.  

    

공부보다는 쥐꼬리에 혈안이 된 학생들은 결국 기가 막힌 묘안을 생각해 내게 되었다. 그 기가 막힌 묘안이란 무의 꼬리를 잘라 흙바닥에 놓고 발로 몇 번 문질러 쥐꼬리에 섞어서 가지고 가게 되었던 것이다.     

 

선생님이 막대기로 뒤적거리며 쥐꼬리를 세어보곤 했지만 무 꼬리까지 분간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 소문이 퍼지게 되자 나중에는 너도나도 무 꼬리를 잘라 섞어가자고 가게 되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처럼 기막힌  묘안도 결국은 들통이 나고 말았지만…….      


    

 괘종시계와 태엽          


 

요즈음에는 흔한 게 손목시계이며 벽시계이다. 그리고 요즈음 나오는 시계들은 그 모두가 전자의 힘으로 가거나 배터리를 사용하여 움직이게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요즈음에는 누구나 휴대폰을 가지고 다니고 있기 때문에 시계에 대한 중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1950년대만 해도 시계가 아주 드물었다. 우리 마을만 해도 5,60채가 넘는 집이 있었지만 가정에 벽시계를 가지고 있는 집이 불과 열 집 안팎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회중시계를 소지하고 다닌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그 사람은 마을에서 그나마 넉넉하게 잘 사는 집의 어른들뿐이었다. 그러기에 그 시계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일종의 사치품 못지않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기에 시계가 없던 그 시절에는 현재 시각을 해를 보고 대충 짐작을 하거나 정확한 시간을 알기 위해서는 시계가 있는 집으로 가서 현재의 시각을 알아보곤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다음은 그 시절에 벽시계가 있는 어느 집에서 벌어진 재미있는 이야기의 한토막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읍내로 급히 볼일을 보러 가기 위해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부탁을 하게 되었다.      

  

 “얘야, 읍내에 급히 다녀올 테니 시간이 나는대로 시계에 밥을 좀 주려무     나. 시계가 배고 고파서 금방 설 것 같구나.”     


 ”네, 알겠어요. 걱정말고 다녀오세요.“     


얼마 뒤 읍내 일을 다보고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가 집에 오자마자 벽에 매달린 시계를 바라보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들에게 물었다.    


”아니 너 시계에 밥을 주라고 했더니 아직도 안 준 모양이구나?“     


”밥을 안 주다니요? 아까 가지자마자 제가 분명히 밥을 배부르게 잔뜩 준 걸요. 아버지가 확인해 보세요.“


이상하게 생각한 아버지가 시계의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 본 순간 아연실색하며 놀라게 되었다. 정말 기가 막힐 일이었다. 벽시계 안에는 아침에 먹다 남은 밥이 가득하게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 왜 그렇게 놀라세요?“     


”……!!“     


아버지는 그만 말문이 막혀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어 입만 벌리고 있었다.      


밥을 주라는 말에 그만 태엽을 감으라는 말을 못 알아들은 아들은 곧이곧대로 먹던 밥을 그대로 가득 넣었던 것이다.          


 

 현충일의 조기 게양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우리나라 국기에 대한 존엄성이 대단했다.   

   

이른 아침에 국기를 게양할 때, 그리고 해가 질 무렵에 국기를 하강할 때마다 각 관공서에서는 어김없이 애국가가 울려퍼지곤 하였다.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는 길을 가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각종 일터에서 일을 하던 근로자들 모두가 일손을 멈추고 바른 자세로 서서 손을 가슴에 얹고 태극기를 향한 채 애국가가 끝날 때까지 부동자세로 서 있어야 했다. 그것이 누구나를 막론하고 매일 습관으로 정착되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국경일이 돌아올 때마다 각 가정에서는 반드시 태극기를 게양해야 했다. 그리고 관공서에서는 마을마다 다니며 국기 게양 여부를 조사하러 나와서 태극기를 게양하지 않은 집은 게양해 달라고 독려하기도 하였으며 어느 마을이 가장 많이 게양하고 어느 마을이 가장 적게 게양했는지의 여부를 상부 기관에 보고하기도 하였다.     

  

현충일도 마찬가지였다. 현충일에는 깃봉에서 기폭의 2분의1정도 내려서 조기를 달도록 독려하고 있었다.      

국경일에 태극기 게양, 그리고 현충일에 조기를 게양하도록 적극 독려 권장하는 것은 학교가 더욱 찰저했던 것 같다.      


마침내 어느 해 현충일이었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현충일 전날 집집마다 조기를 게양해 줄 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한 그 다음 날, 선생님들이 마을마다 조기 게양 실적을 살펴보기 위해 각 마을로 조사를 하러 나가게 되었다.  

    

마을을 돌아보던 선생님 하나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 집 학생을 불러내어 그 자초지종을 물어보게 되었다.


깃대에는 태극기가 아닌 조기(생선 한 마리)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학생은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이윽고 학생이 밖으로 나오자 선생님이 묻게 되었다.      


”너 왜 태극기를 달지 않고 저런 걸 매달았지?“     


그러지 학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선생님이 어제 조기를 달라고 하셨잖아요?“     


”……!?“          



꺼지지 않는 후레쉬         

    

6.25동란 직후, 그때만 해도 시골에서는 밤에는 등잔불을 사용했다. 주로 석유 등잔불이었지만, 석유도 귀해서 바느질 등, 급한 볼일이 아니라면 석유를 즈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등잔불을 끄곤 하였다.     


석유가 없을 때는 어쩌다 미군부대 등에서 구해온 휘발유를 등잔에 넣어 사용하였다. 석유가 귀하다 보니 우리 부모님의 경우, 밤에 책을 좀 보거나 공부를 좀 하고 싶어도 석유가 아깝다고 불을 끄라고 하는 바람에 마음대로 책을 볼 수도 없었다.     


삭유 등잔불을 특히 그을음이 많이 나왔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서 코를 풀기라도 하면 콧속에서 여지없이 시커면 그을음이 튀어나오곤 하였다.  아주 혐오스러울 정도로...    


휘발유는 그을음은 적게 나오는 편이지만, 석유등진불에 비해 사용하기가 몹시 위험했다. 혹시 등잔을 툭 건드리기라도 하면 휘발유가 튀어나오며 방바닥이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비상이 걸리곤 하였다. 재빨리 담요 같은 것으로 휘발유불을 덮어 끄느라고 허둥지둥 온통 정신이 다 빠져나길 지경이었다.      


등잔불에 불을 켜기도 어려웠다. 성냥이 넉넉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성냥 한 개비도 여간 소중히 아껴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통에 담긴 성냥통은 고급이었다. 그래서 그때는 성냥 장수가 마을마다 가지고 다니며 됫박으로 팔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성냥을 그어 불을 일으킬 수 있는 황도 따로 팔았다.      

 

상냥이 귀하다 보니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도 성냥 한 개비라도 아끼기 위해 아궁이나 화로에 숯불을 살려두었다가 불이 붙은 숯덩이를 짚에 올려놓고 후후 입으로 불어 불을 일으켜 밥을 짓기도 하였다.     

 

불이 그렇게 귀한 시절이다 보니 담배에 불을 붙이는 일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기에 화로나 아궁이에 담뱃불을 붙이는 일이 예사였다. 어떤 때는 불이 훨훨 붙은 불에 담뱃불을 붙이다가 수염이 후르르 태우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때 어쩌다 미군부대에서 나온 지퍼 라이터 하나만 소유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지퍼 라이터 역시 휘발유를 구하기가 어렵기는 마찬가지이기도 하였지만…….     


그때는 화장실(뒷간)이 대문 밖에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킴캄한 그믐 밤중에 어쩌다 볼 일이 생길 때마다 밖에 혼자 나가기가 몹시 어려웠다.      


작은 볼 일은 집집마다 요강을 비치하고 있어서 그런대로 걱정스럽지 않지만, 큰 볼일은 여간 두렵고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래서 특히 밤에 두려움을 많이 타는 사람들은 가족들 중에 누군가와 같이 나가서 망을 보게 하는 일이 예사로 통하고 있었다.     


그나마 어쩌다 미군부대 등에서 후레쉬(그 당시에는 후레쉬란 말을 모르고 ‘덴찌’로 통했음)를 구해 가지고 있는 가정에서는 가정 귀중품 1호로 꼽힐 정도로 여간 유용하게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후레쉬가 그만큼 귀중하다 보니 여유가 좀 있는 가정에서는 읍내 장에 가서 후레쉬를 사다가 쓰기도 하였다. 그때 건전지는 주로 미군부대 쓰레기통에 가서 미군들이 쓰다 버린 건전지를 주워다가 아쉬운 대로 유용하게 샤용하곤 하였다.    

 

후레쉬가 차츰 많은 가정으로 보급되기 시작하자 우리 마을 어느 가정에도 후레쉬를 하나 장만하게 되었다.


그렇게 후레쉬를 장만하면 후레쉬가 얼마나 환하게 불이 들어오나 구경을 하기 위해 이웃들이 모두 모일 정도였다.      


어느 날 그 가정에 시아버지가 밤중에 급히 볼일을 보기 위해 대문 밖에서 멀리 떨어진 화장실(뒷간)을 가게 되었다. 이를 눈치 빠른 며느리가 급히 후레쉬를 들고 나와서 불을 켠 뒤 시아버지에게 주게 되었다.   

   

시아버지는 고마운 마음에 신기한 듯 후레쉬를 들고 앞을 비추며 뒷간으로 나가서 볼일을 보게 되었다.  

    

한참만에 볼일을 다 마친 시아버지가 다시 집으로 들어와서 후레쉬 불을 끄기 위해 후레쉬 불을 입에 대고 입으로 바람을 불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힘껏 불고 또 불어보았지만 후레쉬 불은 놈처럼 꺼지지를 않았다.     

”그거참 별일이 다 있구만!{“     


이상하다고 생각한 시아버지가 이번에는 후레쉬를 들고 있는 힘을 다해 힘껏 돌려보았다. 그렇게 몇 번 더 힘껏 돌려보았지만 꺼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이미 곤한 잠이 든 며느리를 깨워서 불을 꺼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다음날 이른 새벽이었다.     


며느리가 아침밥을 짓기 위해 일찍 일어나서 부엌으로 들어가다가 깜짝 놀란 얼굴로 부엌문 앞에 놓인 뜨물 통을 바라보게 되었다. 뜨물통 속에서 이상한 빛이 환하게 비추고 있는 게 아닌가!    

  

며느리는 곧 뜨물통 속에 손을 넣고 반져보니 그 속에 후레쉬가 켜진 채로 있는 게 아닌가!     


그때 마침 헛기침을 하며 방에서 나오고 있는 시아버지를 향해 며느리가 둥그렇게 된 눈으로 묻게 되었다.  

   

”아버님, 이 후레쉬가 왜 이 속에 들어있어요?“     


그러자 시아버지가 여전히 고개를 가웃거리며 대답했다.     


”그놈의 불 참 지독하기도 하구나! 내가 어젯밤에 입으로 힘껏 불어도 꺼지지 않고, 빙빙 돌려보아도 꺼지지 않기에 할 수 없이 뜨물통에 넣었는데 그놈의 불이 여태 꺼지지 않았단 말이더냐? 허허허“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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